바로 알기나 하고 그런 말을 하시는 건지

고상기2005.09.23
조회461

근거 다 찾아가며 답글달다가 금지어 사용이라고 글을 날려서 다시 씁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다른 답글 다신 분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소설 그만 쓰시죠.

 

세금을 해상운송으로 안했다니 말이 됩니까?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도 아주 잘나옵니다.

당시의 세금은 곡식과 군포(옷감)과 특산물 등으로 걷었죠. 조선 말에 이르러서야 화폐로 납부하는 겁니다. 그리고 각지방의 해안가에 조세창을 만들고 배로 서울의 경창까지 운반하는 체계였습니다.

N 사이트 백과사전에서 조선의 조세제도라고 검색하면 잘 정리되어 나옵니다.

 

그리고 해상활동에 신경을 안썼기 때문에 발전이 미약했다라니 그것도 웃깁니다.

그러면 정화의 원정이나, 당시 대진국(로마)까지 간 개성상인이나 동남아시아를 주무대로 해서 19세기 까지 악명을 떨친 중국 해적이나 중국 남부지방까지 진출에서 어떤 때는 중국 내륙까지 진출해서 노략질을 일삼았던 왜구 등은 어떻게 설명할건가요? 우리민족만 하여도 장보고의 해상활동도 있고 백제의 예도 있습니다. 조선시대야 중국을 모시는 사대주의 때문에 다른 나라들은 거의 쳐다보지도 않는 상황이라 그랬다지만 고려때 까지만해도 벽란도를 통한 국제무역이 성행했고 그 덕에 현재 우리나라의 영어이름이 코리아라는 것도 아십니까? 이거 고등학교때 다 배우는 내용입니다. 그때 뭐하고 사셨는지 궁금하네요.

 

세계적으로 범선이 그때 유행했다고 하는데 어디서 범선이 그렇게 유행했다는 겁니까? 유럽 밖에 더 있었나요? 그리고 뭔가를 잘 모르시는 가 본데. 판옥선을 예를 들죠.

판옥선은 중종과 명종을 거쳐 개발된 군선입니다. 그 구조는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의 형태에, 2개의 횡범(돛)를 달고 있으며 2층 갑판을 가진 범노형(돛과 노를 같이 갖춘 형태) 전투선입니다. 대포는 최소 20문이상을 장착할 수 있죠. 이 때가 16세기 입니다.

자 그럼 유럽의 16세기 전투선을 살펴 볼까요? 유럽에서는 16세기까지 상선과 군선의 구분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때 유행하던 배의 형태가 캐러벨과 캐럭이죠. 캐러벨의 경우는 콜럼부스의 항해나 엔리케왕자의 원정 등에서도 쓰인 아주 선호되는 형태의 배입니다. 삼본 마스트 (돛이 3개)의 삼각돛을 쓰는 배죠. 이 배는 선저(바닥)이 판옥선과 같이 평평한 형태로 연안항해에 적합했기 때문에 15세기 이후로는 캐럭선에 밀려버렸죠. 그리고 등장한 캐럭선은 횡범과 종범을 고루 갖추고 선저가 뾰족한 첨저선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범선의 전형이 된 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투를 목적으로 16세기 말에 처음 등장한 범선이 갈레온선입니다. 이는 캐럭선을 원형으로 하여 전투에 적합하도록 발전하였는데, 갈레온이 캐랙선 보다 선체길이가 길며, 선폭이 상대적으로 작습니다. 이는 기민한 기동력을 얻고, 현측 포를 되도록 많이 배열하기 위해서죠. 그런데 이때 까지만 해도 서양의 범선은 상갑판 하나만을 가진 단층배였습니다. 17세기에 들어서야 전투선이 보다 대형화된 갈레온형선으로 진화하여 2층,3층 갑판으로 만들고 포도 2층 3층으로 배열하게 된 겁니다. 판옥선과 비교해 볼 때 어떤가요? 원인은 다르지만 이미 16세기에 2층 구조의 전선이 만들어져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 뿐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조일전쟁(임진왜란, 정유재란을 말하는 거죠)에서 등장했다는 거북선도 판옥선을 기반으로 하여 그 이후로도 꾸준히 발전되어 온 돌격함입니다. 판옥선도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전선(戰船)이라는 명칭의 배로 발전을 하였죠. 판옥선의 개발 배경도 전라도 지방을 약탈하던 중국의 해적들이 이미 그런 형태의 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야 한다고 중종 39년에 판중추부사 송흠이 주장하기도 했었습니다.

더군다나 화포 기술은 이때 까지만 해도 세계 최고였습니다. 고려 말엽의 최무선 선생님으로 부터 다양한 화포가 개발되었죠. 왜 비격진천뢰, 신기전, 장군전, 천자총통 같은 것들이죠. 서양에서는 캐논, 데미캐논, 컬버린, 세이커 등의 대포가 17,8세기에 들어서야 나오게 되구요.

 

일단 이정도로 하고 주된 논점이 되었던 원균과 이순신에 대한 얘기를 해볼까요?

먼저 원균에 대해 호의적인 표현을 하시던데 그건 개인의 의견차이기 때문에 무어라고 하진 않겠습니다. 그러나 원균이 패해서 삼도수군이 지리멸렬했던 칠천량해전에 대한 내용을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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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해전의 전황을 시간대별로 정리해보죠...
칠천량 해전 전투기록 보면 황당합니다 시간순으로 정리해보지요...

7월 4일. 원균은 부산포로 떠납니다. 삼도수군과 140여척의 판옥선을 거느리고... 그리고 7월 7일 부산포 근처에 도착해 왜선 8척을 불사릅니다. 문제는 이때 부산포로 들어오던 일본군 수송부대가 그걸보고 도망가자 그걸 쫒아가다가 물마루에 걸려 경상우수영 배 5척, 전라우수영 배 7척을 표류시킵니다. 경상우수영 배는 무사히 귀환하지만 전라우수영배들은 서생포에 상륙했다가 가토 기요마사 부하들에게 몰살당합니다.

7월 9일 다시 부산포로 갔던 원균은 일본 육군 수송함대(!)가 덤비자, 놀라 달아나다가 전선 20척을 한척씩 갖다바칩니다.

7월 11일 그리고 돌아오다가 권율의 소환을 받고 고성으로 간 원균... 곤장을 맞습니다.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20척이 넘는 판옥선과 수군들을 날려버렸죠... 대충 2,500에서 3,000명 가량의 병사들을 죽인 겁니다. 곤장 맞은게 다행입니다. 참수당해도 아무 말 못합니다. (임진왜란 개전 전 전라좌수영의 판옥선이 24척이었습니다.)

7월 14일 다시 부산포로 갑니다. 이번에는 배는 안 잃습니다. 그러다 돌아오다가 가덕도에서 하루 머무르려고 나무와 물을 구하려고 병사들 보냈다가 왜군의 기습하자 육지에 나무하던 400여명의 병사들을 버리고 도망칩니다.

7월 15일 다시 두들겨 맞습니다.(11일과 15일 기록에 따라 다르고 두번 맞은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7월 16일 홧술을 퍼마시다가 잔 원균은 일본군이 야습해오자...(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달랑 두 척) 당황해서 아군 다버리고 무작정 도망칩니다. 왜군 함대는 그걸보고 그냥 따라오고, 그걸 보고 놀란 원균은 춘원포에 내려서 앞장서 도망치고, 다른 장수와 수군들도 덩달아 도망칩니다.

그리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두 장수만 춘원포에서 싸우다 전사합니다. 이게 칠천량해전입니다. 말도 안된다고요? 황당하다고요? 칠천량해전 참전자인 김완(당시 조방장)의 해소실기, 세남(수군 격군)의 보고서 그외 일본측 기록인 등당기(일본수군 총대장 도도가의 기록), 조선일일기(제성수비군감 오타 가즈요시 휘하 종군승 케이넨의 일기) 그외 수많은 양측 참전자들의 기록에서 일치하는 내용인데요? 조선 수군들 거의 다 도망치고, 빈 배 불태우고 육지에서 추격해 조선군 다수 참살했다고... 나중에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강항의 간양록 등에도 등장하며, 심지어는 중국측 기록에도 이 사건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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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하면 원균의 됨됨이를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무능력한 인물이 어떻게 저 지위에 까지 올랐을까요? 그리고 원균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사료에도 나와있습니다. 한번 살펴보죠.

 

원균이 하는 짓들 보면 가관 중에 가관입니다. 아군에게 활질해 부상입혀, 조선 어부 습격해 죽인 후 그걸 왜군이라 속여, 피난민 처녀 밤에 끌어들여, 부하들 매질해 죽여, 굶겨죽여, 술먹고 와서 행패부리고 가. 엉터리 전공 만들어 아들이랑 동생들 벼슬얻게 해.. 나중에는 원균은 '따'가 됩니다. 이순신만 원균 싫어한게 아니라 이억기, 구사직 등 다른 수사들도 다 싫어합니다.

위의 글들이 원균과 사이가 안좋던 이순신의 난중일기 기록일까요? 천만에요... 조경남의 난중잡록과 안방준의 은봉야사별록,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내용들입니다. 난중일기 기록들 보면 더 가관입니다. (상부에서 내려온 무기들까지 가로채고, 부하장수 부인 겁탈하려고 든 일 등 별의 멸일들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

 

이제 이순신 장군의 능력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죠.

님의 표현을 살펴보면 현대적인 관점에서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이나 사상을 간과하고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평가하는 것 같네요. 일단 전투에 대한 사항만을 기준으로 해서 따져 봅시다.

객관적인 측면에서 조선 수군은 병기의 측면에서 우월했습니다. 판옥선은 일본수군의 전투함인 세키부네나 아다케보다 성능이 우월합니다. 자세한 자료는 찾아보시구요. 그리고 화포가 있어 일본 수군보다 우월했죠. 다만 일본은 조총이 있었기 때문에 화력면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없었을 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단병접전에 조선 수군이 아주 약하다는 면이 있었고요.

 

하지만 명량해전에서의 이순신의 전과를 살펴보면 그 인물의 한 단면을 볼 수 있겠죠. 물론 이순신 장군 단 한사람만의 공이라고 할수는 없지만 과거의 전쟁에서는 장수 한사람의 판단과 능력이 전체를 좌우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위의 칠천량 전투에서도 이억기 등의 뛰어난 장수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균이 모든걸 말아먹은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이순신은 원균이 춘원포에서 조선수군을 말아먹은 후 겨우겨우 패잔병과 망가진 배를 수습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수군은 조선수군의 숨통을 끊어놓으려고 수백척이 몰려들었죠. 일본기록에 의하면 도도 다카도라, 구루지마 미치후사,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하치스카 이에마사 등 거의 600척이 넘어가는 수였습니다.

당시 이순신이 처한 상황입니다.

우선, 명량의 해류 유속이 너무 빠르기 때문에, 적의 접근속도가 그만큼 빨라지므로 백병전 빈도가 올라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지금도 명량가면 물살이 장난아닙니다 그나마도 현대에 암초들을 폭파해서 느려진건데도...)
둘째, 이에 비례해서 조선 전선 역시 체력소모가 큽니다. 격군도 지칩니다. 떠내려가는 거 막느라.
셋째. 패잔병들 겨우겨우 수습한 상황이라 병사들 사기 또한 최악입니다.

어디 한번 이 상황에서 이겨보시죠? 명량의 경우 해류를 잘 탈경우 15노트 이상의 초고속으로 달려와 접현한 후 판옥선으로 기어올라가 백병전으로 돌입한다면? 천자총통의 유효사거리인 1킬로 정도야 15노트로 돌진해오면 1, 2 분 정도면 끝입니다 그 정도라면 화포는 두방 정도 쏘는게 고작입니다.

이 상황에서 적의 영주한명 잡아 죽이고 연속해서 적함들 다 때려부수고 총대장 기함까지 송두리채 날려보내보시죠? 아무나 가능하다고요? 한번 해보시죠?

제 의견은 이상입니다.  도대체 님이 작성하신 글에서 사실에 근거한 내용이 무엇이 있습니까?

 

글 한 번 날려먹고 대강 생각나는 대로 쓰다보니 글이 좀 정리가 안되네요.

 

다른 분들의 의견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