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 (17)

운운2005.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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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어화(解語花)-말하는 꽃(1)-

 

 

 

 

 

 

 

 

‘허억! 헉..헉!!’


한 젊은 여인이 갈대숲을 가로질러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여인의 옷은 온통 풀에 베이고 찢긴 상처로 여기저기 핏물이 진득했다. 그녀와 대략 스무 장정도 떨어진 뒤에는 몇 명의 장정이 그녀를 추격해 오고 있는 중이다. 한 명은 머리가 반쯤 벗겨진 30대 중반의 비쩍 마른 남자였고, 다른 하나는 손에 철퇴를 쥐어든 배가 유난히 불뚝 튀어나온 키가 작은 남자였다. 그리고 그 둘의 뒤를 눈썹이 매우 짙고, 눈이 쭉 찢어진 거구의 남자가 큰 도(刀)를 쥐어들고 따르고 있었다. 모두 셋이다. 뒤를 쫒는 자들은 비교적 여유가 있어 보였다. 마치 음흉한 늑대무리가 겁에 질린 양 한 마리를 몰 듯, 침이 뚝뚝 흐르는 아가리를 들이밀며, 서서히 목표물과의 거리를 좁혀가고 있었다.

  도망가는 여인의 얼굴은 온통 땀과 눈물로 뒤범벅이었다. 계속해서 심하게 숨을 몰아쉬어서인지 목에서 잔뜩 핏물이 올라왔고, 그로인해 거친 숨을 내쉴 때 마다 몹시 고통스러웠다. 그녀는 마치 악몽을 꾸는 듯 했다. 극도의 긴장감으로 그녀는- 가느다란 자신의 두 발목에 천만근의 철환이 채워져 있는 듯, 달리는 두 다리가 너무나도 무겁게만 느껴졌다.

필사적으로 달리고 또 달렸다.

이 갈대숲만 벗어나면 비교적 큰 도로변이니, 지나가는 이를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한 시진 째 숲길을 도망치는 중이다. 신발은 이미 벗겨진 지 오래전이다. 그녀의 두 발은 온통 멍과 상처로 가득했지만, 여인은 전혀 개의치 안고 뛰었다. 발의 감각이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슈슈슈슈

여인의 키만 한 높이로 끝없이 펼쳐진 갈대숲이, 절망적으로 휘저어 대는 그녀의 손짓에, 이리저리 휘청대며 몸부림을 쳐댄다. 그녀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주변의 갈대숲에 부채꼴 모양으로 누런 물결이 일렁였다. 달리는 와중에도 여인은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공포의 눈동자가 뒤를 돌아보는 횟수가 잦아들수록, 그들 사이의 거리도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는 어느덧 눈에 띄게 대여섯 장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다.

  그녀의 뒤를 쫓던 셋 중 배불뚝이가 옆에 선 머리가 벗겨진 사내를 향해 눈짓을 했다. 대머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지 뒤춤에서 손바닥 정도 길이의 대나무를 꺼내들어 입에 물었다.


쉭-


달리던 그녀는 불길한 예감에 고개를 급히 돌렸고, 그와 동시에 왼쪽 등 부근에 따끔한 통증을 느꼈다. 갑자기 전신이 굳어 버리는 듯한 아찔한 느낌에 그녀는 달리던 몸을 휘청 이며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내려다 본 자신의 어깨에는 기다란 쇠침이 깊이 박혀있었다. 쇠침의 살에 박힌 안쪽 부근은 발려진 독에 의해 변질 된 듯 시커먼 색을 띠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녀의 몸은 스르르 무너졌다. 마비독이 분명했다. 하지만 몸만 마비시키는 독인 듯 정신은 흐려지지 않고, 오히려 공포로 인해 더욱 또렷해져 왔다. 그녀는 마지막 기운을 짜내어 도망가려는 듯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하지만 제자리에서 흙과 갈대를 헤집을 뿐이다. 공포로 하얗게 질린 그녀의 두 눈에서는 연신 굵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흐흐흐......”


징그러운 웃음을 흘리며, 독침을 내쏜 대머리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와, 엎드려진 채로 마비된 여인의 몸 앞에 멈추어 섰다. 사내는 여인의 어깨에서 자신의 독침을 뽑아내어 다시 대나무 통속에 집에 넣었다. 음흉한 눈으로 여인을 잠시 내려다본 그는, 발로 툭 밀어 올려 그녀를 바로 뉘였다.

  그리고는 검게 때 묻은 더러운 손으로 그녀의 장포자락을 슬며시 쥐고는 주욱 당겼다. 그녀의 얇은 장삼자락이 가슴팍부터 부욱 찢겨져 나갔다. 하얀 그녀의 두 어깨가 그대로 드러났다. 뽀얀 팔의 여기저기가 쫓기는 도중 나뭇가지에 긁히고 패인 상처로, 군데군데 피가  흐르고 있었다. 사내의 손길에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꼼짝할 수 없이 누워 사지를 벌리고 있는 자신이 미칠 것만 같았다. 그녀의 온몸이 덜덜덜 떨렸다.

꿈틀-

여인의 뱃속의 작은 생명체가 닥쳐올 위험을 감지하고는 격렬히 꿈틀대기 시작했다. 모체의 불안과 절망이 태아에게로 고스란히 전해져, 가녀린 생명체 역시 공포로 가득한 움직임이다. 여인은 배를 안아 쥐고 쓰다듬어 주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안타까워 다시 한번 울부짖었다.


“살..살려주세요..흐흑! 살려주세요..흑흑”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대머리 남자는, 그녀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사내는 비릿한 미소를 흘리며 눈물로 뒤범벅인 그녀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슬쩍 들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저런..저런..쯧쯧. 죽이지 않아. 누가 죽인다고 했지? 자네가 그랬나?”

“크크크..”


그는 뒤에 선 배불뚝이를 흘깃 돌아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키가 작은 그 사내도 그녀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죽이지 않겠다는 그 말에 순간, 잠시 동안 그녀의 얼굴에도 안심의 기색이 흘렀다. 여인은 계속해서 굵은 눈물방울을 흘리며 절절히 애원했다.


“뱃속에 아이가... 아이가 있어요..흐흑 제발, 제발...살려 주세요..흐흐흑!”

“아이?”


쭈그리고 앉아있던 대머리 사내는 투박한 손으로 그녀의 장삼 안쪽으로 손을 쑤셔 넣었다. 맨살에 닿는 거친 손의 끔찍한 느낌에 그녀는 그만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여인의 뱃속의 태아는 이제 막 오 개월 정도로 들어선 듯 했다. 사내의 손에 닿는 아랫배가 제법 불룩이 튀어 나와 있었다. 대머리 사내는 한쪽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몸을 숙여 여인의 귀에 대고 중얼거렸다.


“흐음..네 뱃속에 든 아이는 나도 이미 아는 일이지..크크... 이거 왠지 더 흥분되는데?”


여인의 두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동시에 사내는 여인의 배를 두 손아귀로 힘껏 움켜쥐었다.

콰악-

그 순간- 머리와 발끝을 관통하는 끔찍한 고통에, 그녀는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사내의 손길은 이제 거침이 없었다. 남은 장삼자락 마저 부욱 찢어냈다. 그녀의 뽀얗고 풍만한 두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사내는 자신의 거친 손길에 출렁이는 그녀의 한쪽 가슴을 오른손으로 사정없이 움켜잡았다. 그는 욕망으로 붉게 물든 눈으로 그녀의 상체를 게걸스럽게 훑어보고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생명의 잉태라는 자연의 섭리로 인해, 수유를 준비하는 모체의 유두는 크게 부푼 채 검게 물들어 있었다. 사내는 탐욕스러운 혀로 그녀의 배꼽 위부터 젖무덤까지, 그리고 부푼 유두를 천천히 핥아 올라왔다. 나체인 여인의 상반신은 약간 불록한 배를 제외하고는 나무랄 때 없는 곡선이었다.

  단지 팔다리를 움직이지 못할 뿐- 그녀의 감각은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몸을 타고 올라오는 끔직한 느낌에 여인은 사력을 다해 저항했다. 하지만 그녀의 팔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릴 뿐인 여인의 나체는, 사력을 다하느라 땀으로 흥건히 젖어있었다.

 사내는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쉰 목소리로 지껄였다.


“이름 없는 년도 ‘초로’의 계집은 ‘초로’의 계집이라더니.. 과연! 흐흐흐”


뱀이 은밀한 곳을 탐하려는 움직임과 같은 그의 손길이, 그녀의 속치마를 무릎께부터 들추며 허벅지 안쪽을 향해 더듬으며 올라왔다. 여인의 격렬한 반항에, 상체가 시위를 먹인 활처럼 팽팽히 휘어졌다. 그녀는 계속해서 서럽게 흐느끼고 있었다. 아까의 큰 고통이 뱃속의 아이에게 직접적인 충격을 주었던 듯, 느껴지는 태아의 움직임이 처음보다 훨씬 덜했다.  더욱이 그 움직임이 서서히 더 느려지고 있었다. 여인의 얼굴에는 깊은 절망이 드리워졌다. 대머리 사내의 얼굴이 여인의 얼굴을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

툇-

사내의 왼쪽 눈 부근이 내뱉은 그녀의 침으로 범벅이 되었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확 일그러졌다. 그는 사정없이 그녀의 뺨을 솥뚜껑만한 손으로 냅다 후려쳤다.

퍼억!

여인의 고개가 크게 돌아가며 입으로 피를 뿜었다. 그녀의 두 눈동자에는 고통과 절망을 넘어선 뜨거운 분노가 가득했다.


“금수만도 못한 놈들!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이, 이년이?!”


퍼억-퍼억-

사내는 서너 대 여인의 얼굴을 더 후려쳤다. 그 걸로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일어서서는 그녀의 온몸을 발길질 해댔다. 여인의 얼굴은 여기저기 부어오르고 피가 터져, 아까의 하얀 얼굴을 알아볼 수 도 없을 만큼 엉망진창이 되었다. 옆에 서서 그 모양을 지켜보던 배불뚝이가 두어 걸음 다가와서 대머리 사내를 진정시켰다. 그제야 그는 매질을 멈추고는 그녀를 향해 소리쳤다.


“너는 어차피 기루에서 몸을 파는 계집이 아니더냐? 더러운 년!”

“그만해. 그러다가 일을 그르치겠네. 그렇게 된다면 그분이... 노하실 게야..”


배불뚝이의 말에 순간적으로 대머리 사내의 표정이 파랗게 질렸다. 그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너무나도 두려워지는 그였다. 다시 한번 누런 갈대사이에 쓰러져 있는 여인의 나신을 내려다 본 사내는 그 생각을 잊으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바지춤을 풀어 내렸다. 옆에선 배불뚝이도 ‘역시..’하는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바지춤을 풀어 내렸다. 두 사내의 눈은 이미 욕망으로 인해 서서히 이성을 잃어 가고 있었다. 배불뚝이 사내가 무심하게 그녀에게 걸어왔다. 누워있는 여인의 다리를 자신의 발로 툭툭 차며 범하기 쉽도록 크게 벌려 놓는 중이다. 여인은 이리저리 몸을 틀며 반항해보려 했지만 자신의 힘으로 독을 이기기는 역부족이었다. 그저 눈물만 흘리며 사지를 쫙 벌린 채로 부르르 몸을 떨 뿐이다. 뱃속의 태아의 움직임도 이제는 멈추어 버렸다. 그녀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흐흑...아가.... 아가.......’


서럽게 흐느꼈다. 아무리 자신이 몸을 파는 계집이고, 수십의 사내를 감당해오던 창기였다 해도, 이럴 수는 없었다. 임신을 알았을 때, 여인은 아이를 지키고자 마음먹었다. 뱃속의 태동을 처음 느낀 그날은 밤새도록 얼마나 목 놓아 울었는지 모른다. 다른 기녀들의 충고도 다 뒤로 하고 지난 4개월을 잘 버텨 왔다. 하지만 너무나도 허무하게 지금 이 순간 그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려했다. 그녀는 부은 눈을 힘겹게 치뜨며 두 사내를 똑바로 쳐다봤다.

여인은 울음을 삼키며 힘들게 말을 이었다.


“누...누구냐. 사주한 자가....”

“킥킥킥”

“처음부터 네놈들이 나를... 노..리고 ...이리로 몰아...왔음이 틀림이 없다.”

“그래 어차피 죽을 년이니 내 가르쳐 주지-

 이유라도 알아야 저승 가는 발걸음이 떨어질게 아닌가! 흐흐흐”


사내는 뒤춤에서 흰 무명천을 꺼내어 그녀를 향해 내 던졌다. 무명천이 펄럭이며 그녀의 얼굴위로 덮였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아래쪽 귀퉁이에 수놓인 글자를.

루(淚)-

자신이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이레 만에 완성한 수였다. 어떻게 그 무늬를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를 생각하며, 아니 아이의 아버지를 생각하며 정성과 그녀의 마음을 담아 자신의 이름 중 마지막 자를 무명천 위에 고이 얹었다.

  그녀의 귀밑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사랑을 속삭이던 그였다. 밤새도록 안아주며 미래를 약속했던 그였다. 그를 위해 아이를 지키려 지난 몇 달간 이를 악물어 오던 그녀다.

무명을 건네주며 이 짐승 같은 놈들에게 자신을 해하라 명한 사람은 분명히 그 일 것이다.

여인은 자신의 의지를 지켜주던 마지막 하나의 끈이 툭하고 끈기는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는듯했다. 그녀는 두 눈을 꾹 감아버렸다.

  자신의 몸 위에서 아래위로 움직여 대는 사내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들은 그녀의 전신을 게걸스럽게 탐하고 있었다. 쫒아 온자는 셋 이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번갈아 가며 자신을 범하는 놈은 두 놈인 듯했다. 사내의 허리가 용수철처럼 펄떡거릴 때마다 여인의 몸도 그에 따라 출렁였다. 하지만 그녀의 몸짓에서는 이제 아무런 저항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물 먹음 솜처럼 축 늘어져 그들에게 제 몸을 맡길 뿐이다. 거칠게 내뿜는 사내들의 숨소리가 여린 피부에 닿으며 뿌연 김을 서리게 했다. 그런 것 따위는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아랫배가 텅 비어버린 것처럼 허전하게 느껴졌다. 여인의 허벅지 안쪽부터 이미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여인의 엉덩이 아래에는 흥건하게 피가 고여 있다.


-더러운 년!

-이런 짐승 같은 놈들에게 더렵혀져도 누구하나 동정해 주지 않을 더 천하고 천한 존재!

-여기서 이리 죽어도... 뼛가루 뿌려줄 피붙이 하나 없는 들풀만도 못한 인생!

-멍청한 년! 감히 어미가 되려는 욕심을 품은 분수를 모르는 년!


-남자를, 사랑을 다시 믿은 어리석고 불쌍한... 여인아.


수십 개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울렸다. 여인은 감은 눈을 뜨고 흰 무명을 가만히 응시했다. 오히려 무명에 덮여 놈들의 추잡한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잠시 스쳐지나갔다. 그녀는 충격으로 인해 이미 정신을 놓았고 마음을 잃었다. 그녀의 영혼은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숨어버렸다.

  여인의 눈에 비친 세상이 온통 흰색이었다.

그녀의 슬픈 눈동자가 또르르 굴러내려 수놓인 글자를 향했다. 피로 얼룩진 뺨 위로 굵은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린다. 그녀의 머릿속도 하얗게 새어버렸다.






“적당히들 해라. 이제... 저리들 비켜! 명을 수행해야한다.”


매우 굵고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묘한 설득력이 실린 힘 있는 목소리였다.

지금까지 대머리 사내와 배불뚝이 사내의 짐승 같은 행동을 지켜보며, 단 한마디도 없이 뒷짐을 지고 있던, 짙은 눈썹이 인상적인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가 일행의 두목인 듯했다. 여인을 탐하고 있던 두 남자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개를 돌려 그를 한번 올려다보고는 두말없이 입맛을 다시며 일어섰다. 그들의 얼굴과 하체역시 여인의 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만신창이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여인의 처참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두 사내는 주섬주섬 바지를 챙겨들고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몇 걸음 물러섰다. 눈썹인 짙은 사내가 두어 걸음 여인의 앞으로 다가왔다. 너저분한 정액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에 여인을 내려다보는 사내의 가느다란 눈이 잔뜩 찌푸려졌다.

쿠웅-

사내는 쥐고 있던 커다란 도(刀)를 땅에 박아 넣었다. 팔을 아래로 내리는 작은 움직임 이였지만 그의 도는 절반가량이나 푸욱 박혔다. 사내의 괴력에 이를 지켜보던 두 남자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품안에서 작은 환단을 하나 꺼내어 들었다. 그리고 흰 무명천을 들추어내고, 그녀의 입안에 그 약을 집어넣었다. 그가 무엇을 하든, 여인은 그저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사내는 주인의 지시를 순서대로 충실히 이행했다. 그리고 미리 외워둔 대로 작은 주문을 읊조렸다. 순간 여인의 배꼽 부근의 골반이 공중으로 잠시 튀어 오르며 움찔 하는 듯싶더니, 이내 다시 땅으로 쳐박혔다.

허공을 응시하던 두 눈꺼풀이 스스르 닫치며, 여인은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옮겨라. 그곳으로 데려가야 한다.”

“예, 형님.”

“예.” 


두 사내는 옷매무새를 고쳐 다듬은 후, 준비해 왔던 검은 자루를 꺼내어 들었다. 그 자루 속에 여인을 넣어갈 모양이다. 배불뚝이사내가 막 여인을 들어 올려, 대머리 사내가 쥐어든 자루 안으로 다리를 던져 넣으려 했다.

그때였다.


슈육!

퍼억- 퍼버버벅!


허공을 가르는 매서운 파공음과 함께 배불뚝이 사내의 머리통에 화살하나가 틀어박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처음 이마에 명중된 후, 화살의 엄청난 힘은 뇌를 뚫으며 머리통을 관통하고 날아갔다. 그것도 모자라 저만치 앞의 나무에 틀어박힌 후에도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웅웅거리며 화살은 연신 허공을 저어대고 있었다.

  배불뚝이 사내는 한마디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사내의 눈썹위의 이마 부근은 텅 비어있었다. 뇌수가 쏟아져 내리는 모습이 너무나도 끔찍했다. 너무나도 순식간의 일이었다. 눈앞에서 동생의 죽음을 지켜본 대머리 사내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너무 놀라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던 피를 고스란히 뒤집어쓴 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솟구쳐 올라오는 비명을 내질렀다. 귀며 눈이며 코며 입이며 모든 구멍으로 피가 흘러들어왔다. 그는 온톤 피로 범벅이 되어 지옥의 야차 같은 형상이다.


“으아아아악!!!!!”

“정신 차리고 저리 돌아서!”


피융-

눈썹이 짙은 남자의 외침이 동시에 울렸다. 그리고 피를 뒤집어 쓴 채 공포에 절어있는 놈의 앞으로 두 걸음 만에 다가왔다. 그는 거대한 도를 들어 다시 한번 날아오는 화살을 옆으로 쳐내었다. 화살을 절단해봤자 날아오는 힘으로 볼 때, 남은 조각은 충분히 저 녀석의 머리마저도 관통 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최선을 다해 화살을 옆으로 쳐내었다.


‘헉!’


하지만 그의 예상과는 달리 화살의 위력은 훨씬 대단했다. 방향을 크게 우회시키지 못했다. 도를 쥐어든 그의 어깨 죽지도 화살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몹시 욱신거려 왔다.

퍼억!

그나마 다행히 화살은 대머리 사내의 어깨를 꿰뚫고 지나갔다. 엄청난 고통과 충격으로 대머리 사내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기절했다.

눈썹이 짙은 사내역시 이 의외의 사태에 몹시 놀랐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금은 빠른 판단이 절실한 순간이다.

적은 갈대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허나 자신들은 적에게 노출되어 있었다. 거리 싸움이다. 상대는 그의 거리 밖이고 자신의 상대의 거리 안이다. 두 말할 나위 없이 패배한 싸움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기절한 대머리 사내와 여인을 번갈아 보았다. 명을 수행하자면 여인이 필요했다. 허나 이대로 두면 자신의 동생은 죽은 목숨과 마찬가지였다. 또한 심지가 약한 저 녀석이 붙들린다면 대업을 앞에 두고 비밀이 새어나가 모든 일을 망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사내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고민은 길게 가지 않았다.

그는 대머리 사내의 허리춤을 한 팔로 번쩍 안아들어 왼쪽 옆구리에 끼고는, 그대로 몸을 날렸다. 대단한 신력(神力)이었다.

사내는 나머지 손으로 품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땅으로 내던졌다.

피슈슈욱-

파공음과 함께 그 일대가 뿌연 연기에 휩싸였다. 연막탄(煙幕彈)이다. 일경의 시간정도 주변이 온통 매캐한 연기로 가득했다. 연기가 거두어졌을 때는 두 사내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후다. 처참한 갈대숲에는 고요한 정적만이 흘렀다.






  잠시 뒤 큰 활을 등에 짊어진 한 인영이 그곳에 나타났다. 몹시 급하게 달려온 모양인지 그는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방금 전 장정 셋을 공격한 이가 틀림없어 보였다. 일당을 놓친 것이 몹시 분한 모양인지, 그의 굳게 쥔 두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활과 편보를 땅에 내려놓으며 쓰러져 있는 여인을 향해 돌아 선 그 인영은, 놀랍게도 늘씬하고 시원한 이목구비의 여인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분노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이런...! 개자식들....!”


그녀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나체의 여인에게 덧입혔다. 흥건한 핏자국과 부어올라 재대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얼굴만 보아도, 얼마나 모질게 당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다.

그녀는 여인의 얼굴에 조심스레 자신의 귀를 대었다. 다행이 가느다랗긴 하지만 간신히 숨은 붙어 있었다. 하지만 걱정이 앞섰다. 다리사이로 지금도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는 핏물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너무도 처참한 모습에, 자신이 조금만 더 일찍 발견했더라면 하는 죄책감이 일었다. 잔인한 손속으로도 유명했지만, 또한 유난히 색계(色界)와 관련된 일은 결코 용서치 않기로도 잘 알려져 있는 그녀다. 그리고 이어지는 목소리에 깜짝 놀란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누나!!!”

“쯧쯧...”


놀란 표정으로 하얗게 질린 소년의 비명소리와, 상황을 한눈에 알아본 쭈그렁 노파의 한숨소리는 거의 동시에 갈대숲을 울렸다.

노파는 먼저 이마에 구멍이 뚫려 죽은 시체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리고는 여인을 노려보았다. 한순간의 절명이었다. 악인이기는 하나 그리 생명을 귀이여기라 일렀거늘 이렇게 쉬이 죽은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노파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분노한 노파의 눈빛을 담담히 대면한 여인은 전혀 수그러짐이 없이 ‘흥!’ 하는 콧소리와 함께 고개를 팩 돌렸다. 노파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고는 쓰러져 있는 나체의 여인에게로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맥을 짚어보고 상처를 이리저리 살피던 노파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으음... 가여운 지고. 쯧쯧”

“상태가 어때요?”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여인이 노파를 향해 물었다. 노파가 가벼운 손짓으로 몇 군데 혈도를 잡자, 쓰러진 여인의 하혈(下血)이 눈에 띄게 줄더니 급기야 멈추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 인지 계속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노파는 급히 간단한 응급처지를 하며, 옆에 서있는 꼬마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꼬마야 어서 주변에 떨어진 호패가 있나 찾아 보거라.”

“......”


멍하게 서 있는 꼬마는 충격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머리가 터져 죽어있는 사람의 시체와 여인의 이러한 끔찍한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술법을 연마 할 때 이것보다 훨씬 끔찍한 장면들을 수도 없이 보아왔지만 어디까지나 환상이었고, 실제로 겪기는 오늘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천외봉을 떠나 온지 오늘이 이틀 째였다.

늦은 오후 노숙을 피하기 위해 급히 마을을 찾던 일행은 갈대숲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도화는 이상한 술(術)의 기운을 잠시였지만 느꼈고, 일행은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유난히 시력이 발달한 한영은 가장먼저 여인을 겁탈하고 있는 세 남자를 발견했다. 그녀는 상황의 다급함에, 미처 알릴 겨를도 없이 활을 겨낭한 채로 그쪽으로 달려 가버렸던 것이다. 작약과 도화는 무슨 일이 있음을 짐작하고 무조건 한영을 따라 뛰었다. 열 댓 개가 넘는 짐을 주렁주렁 목에 매단 흰둥이도 날렵하게 도화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도착한 이곳의 광경은 정말로 처참함 그 자체였다.


“이 녀석아! 아이를 죽일 셈이냐! 정신 차리고 이름이 쓰인 나무패를 찾아봐!”

“아..! 네엣!”


작약의 말에 도화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리고 의연한 손놀림으로 주변을 헤집으며 패를 찾기 시작했다.


“어찌된 일이에요? 답답해요! 말씀을 해보세요!”


한영이 다급하게 작약을 다그쳤다. 노파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아이를 잃었어..쯧쯧..

 배에 있을 때야 귀한보물이지 지금은 몸 안의 끔찍한 독일 뿐 인게야.”

“저런...!”


이야기를 듣던 한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두 어금니를 꽉 물었다.

뿌드득!

나머지 두 놈도 죽여 없애 버리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한이 될 것만 같았다.


“빨리 제 집으로 데려가 사산된 아이를 꺼내어야 한다. 더 이상 지체되면 죽을게야..쯧쯧..

 얇은 차림새로 보아하니 분명 이 근처에 연고가 있는 아이야.“

“할머니~ 없어요!! 아무리 찾아보아도 이름이 적힌 패는 없어요!”


도화가 크게 머리를 휘저으며 달려왔다. 소년의 순수한 까만 눈망울에도 걱정이 한가득했다. 작약의 노안이 어두워졌다. 여인의 미모와 벗겨진 옷가지를 본 한영은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하나 들었다.


‘혹시..?’


한영은 작약의 곁으로 다가가 여인을 슬며시 돌아 뉘였다. 그리고 꼬리뼈 바로 위의 엉덩이 부근을 살폈다. 거기에는 ‘초로’라는 두 글자가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

그녀의 예상은 적중했다. 예전에 그녀는 우연히 한 기녀와 인연을 맺을 일이 있었고 그때 그녀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난 것이다. 기녀가 기루로 팔려오게 되면, 노예 낙인과 마찬가지로 기루의 이름을 여인의 가장 은밀한 부위에 새긴다고 했다. 작약도 한영의 뜻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옳거니!’ 하고 말을 이었다.


“초로라면 하남 땅에 있는 2대 기방중의 하나가 아니냐!”

“네. 맞아요. 그리로 일단 데려가죠.”

“보자꾸나.. 이 숲만 벗어나면 바로 하남 땅이다. 서둘러라. 지체할 시간이 없다!”

“네!”


한영은 여인을 들쳐 업었다. 웬만한 남자 정도로 키가 크고, 늘씬하면서도 골격이 성골(成骨)인 그녀는 별 어려움 없이 여인을 업었다. 그리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흰둥이와 도화 그리고 작약이 서둘러서 따랐다.

그들의 모습은 곧 갈대 사이에 파묻혀 사라졌다.

 

 

쉬휘이-쉬휘이-

상처를 감싸 안으려는 듯 안타까운 바람이 불어와, 갈대밭에 누런 물결이 일렁였다.

해가 뉘엿뉘엿 저무는 노을이 장관이다.

일행이 향하는 하남 땅은 분명히 소북으로 향하는 동쪽 물가였다.

지리상으로도 딱 동(東)쪽 이였고, 하남을 감고 흐르는 젖줄인 유호강이 고고히 흐르고 있으니 말이다.


‘동쪽 물가로 가지 마시어요. 서북쪽이 길방 입니다.’


멀리서 바람소리와 함께 현의 애틋한 목소리가 메아리쳐 오는 듯 했다.

 

 

 

 

 

 

 

 

-------------------------------------------------------------------------------------- 너무 오랜만이지요?(^^)

그 동안 답사도 하고 자료를 준비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답니다.(사실은 푸-욱 쉬었답니다ㅋ)

혹시나 많이 기다리신 분들도 있으시지요?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가속도를 붙여야 할 것 같아요.

첫장면부터 너무 잔인하고 강렬한 이야기이라.. 죄송스럽기도 합니다.

 

부디 오늘 하루도 행복하고 좋은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재미없고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시는 모든 고마우신 분들께 파안의 가호가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