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사랑 ( 8장/ 암연의 시간들.. 두번째..) <13년 전, 실극화>

추림의 풍2005.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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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이 되자 무척 분주해진 추림은 시계를 수십번도 더 바라보고 나서야 오전근무를 마

칠수가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손을 씻고 있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뭐야? 비 오는거잖아? "

 

오전내내 어둡고 칙칙한 가운데 따듯한 바람이 불었는데 눈이 아닌 비가 내리려는 바람같

았다. 다행이 그리 큰 양은 아니었다. 소슬비였다.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수건을 집어던진 추림이 누가 볼새라 바쁜 걸음으로 회사를 나섰다.

퇴근 카드는 이미 찍어 뒀으니 몸만 나가면 되지만 아마 사람들은 찾을지도 몰랐다.

 

십분만에 집에 도착한 추림은 빌라를 들어서면서 바로 옷을 벗고 목욕탕으로 뛰어들어갔

다.

 

" 늦었잖아!"

 

빌라를 나서면서 시간을 확인하니 두시가 막 되어가고 있었다.

바람이 조금 거칠게 불고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는데 거리를 걷던 추림은 기분이 묘했다. 

유미와 만나는 날 하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분주하게 뛰던 추림은 곧 멈추어서며 코트를 벗어 손에 들었다.

머리를 단장한다고 무스를 발랐는데 그것이 채 마르기도 전에 뛴 탓에 짧지않은 머리카락

이 흘러내려 바보같은 모습이 자동차 유리창에 선명했다.

머리를 매만지며 땀을 닦아내고 횡단보도앞으로 다가가 섰다.

 

레스토랑 '봄다'는 이제 이분도 안되는 거리로 좁혀졌다. 아마 유미는 이미 와 있을지도몰

랐다. 곧 신호가 바뀌고 추림이 잰 걸음으로 도로를 건너 상가들을 지나쳤다.

 

봄다가 위치한 건물을 지나친 추림은 상가 근처에 있는 꽃집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어놓은 채 너저분하게 꽃들을 늘어놓고 손보던 주인 여자가 추림을 바라보고 미소

를 건넸다.

 

" 저기... 오늘 처음 만나는데... 꽃좀 주세요."

 

" 여자겠죠? 어떻게 드릴까요? 의미가 담긴 꽃을 드릴까요? 아니면 단순하게 인사치레를

위해서 장미하고 안개꽃을 섞어 드릴까요?" 

 

순간 추림은 어찌해야 할지 망설였다.

이런 경험은 그리 익숙하지 않았다. 꽃을 유미에게 주려는 것은 물론 그녀가 마음에 들어

서이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라고 자문한다면... 어려웠다.

 

괜히 꽃을 사려했다고 금새 후회한 추림은 하는수없이 말했다.

 

" 그냥 장미하고 안개꽃을 섞어서 주세요. 이쁘게 치장해 주세요."

 

" 몇송이나?"

 

"......?"

 

다시 남감해진 추림은 정말 다음부터는 꽃을 사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꽃을 사는것이 이렇게 신경쓰이는 일인줄은 미처 몰랐다.

 

" 어떡해 하지요? 제가... 알아서 주세요. "

 

주인 여자가 추림이 난감해 하자 소리없이 웃으며 장미꽃 다발통에서 연홍빛 색깔의 장미

다섯 송이와 흑장미 열송이 그리고 붉은 장미 다섯송이를 섞고 안개꽃을 다듬어 장미와 섞

었다.

 

무척 이뻤다. 꽃이 아름다워 예쁜 것인지 아니면 주인여자가 신기를 발휘해서 그런지 몰라

도 장미와 안개꽃이 어우러져 소담스럽고 풍성하여 결코 초라해 보이지 않았고 붉고 흰 두

가지 색깔이 무척이나 조화로웠다.

 

" 고맙습니다. "

 

인사를 건네고 밖으로 나와 약속장소로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

다. 꽃을 사고 누군가에게 준적도 있지만 이런 떨림은 없었다.

 

" 후우...... "

 

숨을 골라쉬며 꽃다발이 다칠라 조심스럽게 손에 들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장미꽃 송이가 딱 스므송이었다. 순전히 우연의 일치였지만 이렇게 공

교롭게도 잘 어울려 버렸다. 유미 그녀의 나이도 스므살이어서 그런 의미가 생겨난 것이다.

 

봄다는 지하에 위치했다. 크고 넓어서 외딴 장소에 자리하고 있는데도 늘 손님이 많은 레스

토랑이었다. 추림도 몇번 와 보았는데 올때마다 동행했던 사람이 제각각이었다.

 

양복 저고리에 비가 스며 축축해져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봄다의 내부는 곳곳에 큰 밀림형 식물이 심어진 화분이 놓여있고 천정은 낮으며 불빛은 아

주 적당히 밝아서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익숙한 팝송이 흐르고 있었다.

 

나비 넥타이를 맨 젊은 종업원이 다가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오자 추림도 마주 인사를 건

넸다. 

 

" 찾으시는 손님이 계십니까? "

 

종업원이 명료한 발음으로 물었다.

 

" 제가 찾아 볼께요. 아마 와 있을 겁니다. "

 

" 그러세요. 즐거운 시간 되시고 필요하면 불러 주세요. "

 

종업원이 물러가자 추림은 각 좌석마다 화분과 칸막이로 가로막힌 홀을 둘러보았다.

한눈에 들어 올 넓이였지만 화분들에 가려진 홀은 발품을 팔아야 살필수가 있었다.

보였다. 왜 사람들은 구석진 자리를 좋아할까? 그렇게 생각한 추림이 뒤에서 두번째 자리

에 앉아 있는 유미의 모습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낮게 드리워진 전등에 그녀의 동체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목이 긴 회색빛 티를 입고 머리를 길게 늘어 뜨리고 앉아 있었는데 분위기가 매우 허전하

게 느껴졌다.

 

가슴이 조금 긴장으로 두근거렸다. 많은 사람을 만나왔고 보아 왔지만 이런적은 처음이었

다.

 

" 미안합니다. 조금 늦었네요. "

 

추림이 꽃을 뒤로 숨긴 채 유미에게 조용히 다가가 인기척과 함께 말을 건넸다.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미가 고개를 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오셨군요. 제가 조금 일직 왔어요. "

 

낮게 인사를 받고 건넨 유미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게 퍼졌다. 눈웃음이다. 아마 다른 이

들도 그녀의 웃음을 본다면 묘한 자극을 느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추림이었다.

 

" 앉으시죠. 자. 이건 제가 늦은 벌로 드리는 겁니다. "

 

추림이 뒤로 숨겼던 꽃다발을 두손으로 잡고 건넸다.

 

"어머? 세상에... 너무 아름다워... 고마워요. 추림씨! "

 

조금전보다 더 진한 웃음이 피어나고 정말 기분이 좋아졌는지 유미가 꽃다발을 살포시 품

에 안았다.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우기 여자가 남자에게 꽃을 받으면 상대가 누구든지 

감동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유미가 진정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본 추림은 사오길 잘했다고 생각을 돌려 먹었다.

 

" 뭐 드셨어요? 전 아직 식사하지 않았습니다. "

 

" 저도 아직... 추림씨가 근사하게 사준다면 먹어드리죠. "

 

활기차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무척 외로워 보이는 것은 처음의 만남때 그녀

가 너무 강렬하게 기억되어서 인지도 몰랐다.

 

식사는 스테이크로 시키고 과일과 위스키를 따로 주문했는데 그건 유미가 술 마시고 싶다

고해서 주문한 것이다.

 

" 어제 수연이랑은 재미었습니까?"

 

식사가 준비되는 동안 대화가 이어졌다.

 

"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이런 저런... 술도 조금 마시고 노래방도 갔었고 그랬어요."

 

유미의 말에 추림은 내심으로 웃었다. 이틀 전, 자신과 마신 술도 그리 작지 않았고 노래방

도 갔었는데 아주 딱 그렇게 똑같이 놀았다는 것이다.

거짓말을 해 버려서 미안해진 마음이 들었다. 고의는 아니고 숨기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지

만 그것이 더 나은 방법인것 같았다.

 

"추림씨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예? 저를요? 막 욕하고 그랬겠지요?"

 

"훗... 아니요. 그냥 대충... 조금 슬프던데요?"

 

"이녀석 엉뚱한 말을 했나 보군요? 제가 조금 슬픔을 주긴 하지만... 그건 천기누설인데...

전화 왔었습니다. 어제 늦게 전화해서 한참을 이야기 했는데 기억나는건 언제 술 사줄건데

라는 말이더군요.

어찌나 졸리던지... 씻지도 못해서 수화기를 내려 놓으니까 혼자서 잘 떠들더군요. 전 딱

한마디 했습니다. 언제 잘건데? 어제 유미씨랑 기분 좋았다고 말하더군요."

 

유미가 추림의 말에 즐거운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추림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어 그녀가 심심하지 않게 해주었다. 그런거라면 추림에

게 아주 자신있는 일이었다.

한참을 이야기 나눌때 주문한 식사가 나와 그들은 소소한 담소를 나누며 조용히 식사에 몰

두했다.

 

"참 저 영훈씨 만났었어요."

 

거의 식사를 마치자 유미가 추림에게 경훈을 만났다고 말을 건넸다.

말하지 않아도 되고 하고 싶지 않지만 유미는 추림의 마음을 알아보고 싶었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반응이 궁금했다.

 

"영훈일요? 그놈 내게는 연락도 하지 않더니? 멋지지요? 잘생기고... 그놈이 또 뭘 잘하더

라... 노래는 영 아니고 춤도 꽝이고... 술은 아주 잘 마셔요. 스케이트도 국보급이고. 갔었

지요? 그놈 십팔번이 그건데... 좋은 녀석입니다. 누군가 길만 바로 잡아주면 아주 열심히

살 친구지요."

 

의외의 반응이다. 유미는 추림이 영훈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그가 느끼는 감정을 꿰뚫어

보려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평범하고 일상같은 일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 흘러 나

온것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대개가 칭찬하거나 아니면 무시해 버리는데 추림

은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예. 스케이트 타러 갔었어요. 아주 어릴때 한번인가 타 보았는데 그 뒤로 처음이었어요.

많이 배웠어요. 덕분에 즐거웠고. 술 정말 잘 마시던데요. 나이트장 갔었거든요. 제가 데려

다 달라고 해서요."

 

"그래요? 그놈 춤 사부가 난데 혹시 그런 말 안해요? 자식! 예전 실력이 녹슬지 않았나 모

르겠네. 좋았겠네요. 새로 알게된 친구와 멋진 밤을 보내는건 낭만적이지요."

 

역시 별 반응이 없었다. 강영훈 그 친구는 다시는 나이트장에 함께 가고 싶지않은 친구였

다. 춤은 왜 그리 못추고 안추려 하는지 그렇게 젬병인 남자는 처음이었다.

듣기는 했었다. 추림에게 춤도 배우고 같이 꽤 놀러도 다녔다고 모든 분야에서 추림이 최

고라고 했지만 그 당시에는 옆에 있는 사람도 챙겨주지 못한 남자가 그런 말 한다고 위로

가 되지는 않았다. 

 

유미는 추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눈이지만 검은색 눈동자가 또렷하고 눈빛은 무척이나 강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웃음이 매력이라고 말하지만 정말 웃음이 매력적인 사람은 이 남자였다.

웃음이 추림같은 남자는 보지 못했다. 어찌나 시원하고 크게 웃는지 그의 입이 미소를 그

리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질수도 있었다.

 

어제 수연과 온통 이 남자에 대해서 이야기만 했었다.

그의 과거를 들었고 사람됨을 알게 되었다. 같은 성별의 친구들보다 이성인 수연에게 듣는

것이 더 구체적이고 객관적일수 있었다.

 

수연은 친구라고 표현하고 동창이라고 말하면서 추림에게 푹 빠져 있었다.

그를 어찌나 칭찬하고 크게 생각하는지 자신이 다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다음주에 석호를 만나기로 했는데... 약속을 취소할까하는 마음이 생겼다. 

 

"저 궁금한것이 있어요 "

 

식기가 치워지고 과일안주와 위스키가 나오자 얼음과 위스키를 믹스하고 있던 추림에게

유미가 질문해왔다.

 

"말씀해 보세요."

 

유미를 잠시 바라보고 대답한 추림이 하던일을 마무리 지었다. 한잔을  유미앞에 건네 놓

자 유미가 두손으로 언더락을 쥐고 살작 입을 축였다.  

 

"지난번... 처음 만났을 때 말이예요? 그 때 정말 제게 관심도 없었어요?"

 

어떤 질문에도 대답할 용의도 있었고 준비도 하고 있었지만 이 질문을 예상하지 못한 질

문이었다.

 

유미로서도 쉽지 않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것이 궁금하고 사실여부를 확인하

고 싶었다.

 

"전... 누구를 바로 바라보기 싫어해요.  바로 바라보거나 응시하게되면 이곳에 그 모습이

각인되어서 때론 그 기억에 힘들어 질까 망설여 지곤 합니다."

 

추림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그냥요... 그냥 궁금했어요. 그때 추림씨는 절 한번도 쳐다보지 않았잖아요"

 

그게 중요한것이 아니었다. 그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지만 추림은 보통 남자

들과 달랐다. 진지하면서 그것을 가볍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가 여자 사귀는 것을 보

지도 듣지도 못했다고 친구들이 말했다. 믿을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유미가 볼 때 추림은 근사한 남자다. 어굴도 잘 생긴 편이고 체구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어

디가서 작다고 무시당할 만큼은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마음이 넓고 따듯한 사람이었다. 매너가 좋고 사내로서 지녀야 할 덕목

같은 용기도 있는 남자였다. 그의 친구들은 추림을 한결같이 그렇게 인정했다. 자신이 느

끼기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것이 꼭 오랜 만남을 통해 알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어서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독서광이라 했으니 무지하지는 않을것이고 성격이 대범하고 중후했고 섬세한 면까지 있었

다.

 

너무 사람이 좋은 나머지 잃은것이 많은 남자인게 조금 흠이지만 그건 그의 인간성이기에

크게 버려야 할 단점으로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그를 여자들이 과연 그대로 놔두었을까? 그가 거부하더라도 주위에서 몰려드는 여자

들 한두명과 사귀지는 않았을까?

 

추림의 시선이 유미의 얼굴위에 머물렀다.

그이 눈빛은 매우 강렬하고 힘이 있었다. 깊은 눈매라서 그가 눈에 힘을 주면 무척 날카롭

고 매서운 모습으로 돌변했다.

 

"전 유미씨를 안본것이 아니라 못 본겁니다. 처음 수연에게 소개 받을 때 인연이 될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게 어떤것인지는 구체적으로 모르겠습니다만... 전 본능과

육감에 매우 민감합니다. 본능이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고 육감은 이렇게 저렇게 지시를

합니다. 제가 느낀 본능이 말하고 육감이 지시한 무엇이 유미씨가 맞으면 어찌될지 몰라

그냥 안 본겁니다. 사실.. 제가 길을 걸으면서도 시선을 한곳 이외에는 산만하게 움직이

지 않습니다."

 

어려운 말이지만 이해는 가는 말이었다.

유미는 자신이라면 <관심두기 싫어서 그랬습니다> 라고 말할텐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몰라도 인연이라는 단어를 도용할 만큼 느낌이 있었다

면 분명 자신에게 관심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 여자를 좋아해본적 있으세요? "

 

유미는 이참에 추림에게 물어보고 싶거나 궁금한것을 말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첫사랑이라고 해야 하나... 초등학교 6학년때 절 아주 잘 따르던 아이가 있었는

데 그놈이 항상 나랑 같이 살거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정말 우리 바로 밑

에 집으로 이사를 왔어요.

그것이 막 중학교에 입학한 후였는데 공부를 같이 한다는 핑계로 매일 붙어 있더군요.

그 아이가 첫사랑인지는 몰라도 매우 각별하게 대했던것은 맞았던 것 같습니다. 어릴적에

는 그래도 손도 잡아주고 그랬는데... 한살 차이나는 그녀석과는 나중에 손도 제대로 잡아

보지 못했지요.

이년전에 그놈이... 내게 그러더군요. 오빠를 오래도록 기다리기는 힘들다고...겨우 고등

학생인 주제에... 어느날 보니까 내 친구와 손잡고 걸어다니고 있길래 우울했던 적이 있어

요. 그게 내가 여자에게 그나마 구체적으로 무언가 느낀 감정입니다."

 

결국 사귄적은 없다는 말이지만 그를 좋아했던 여자는 많아았다고 들었다.

어쩌면 지금쯤 한명정도는 마음에 두고있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요?"

 

추림은 씁쓸하게 미소지으며 선주를 떠올리고 다른 여자 몇명도 동시에 떠올렸다.

자신을 좋아하지만 자신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과연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 전... 한번 맺은 사랑은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놈인가 봅니다. 그래서 절 구애하는 많은

 여자들에게 늘 기다리라고 요구하는지도 몰라요. 유미씨의 그 질문은 잘못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고 묻지 말고 좋아할 만한 사람이 있냐고 물어봐 주실래요? " 

 

"좋아요. 그럴만한 여자는 있나요?"

 

조금 가슴이 두근거린 추림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누군지 말해주지 않겠죠?"

 

"말해주면 안믿을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그것이 더 깊어지고 지금 내 마음이 그것이 맞다

면 그 때 말해 드릴게요. 아직은 자세히 모르겠거든요."

 

유미는 추림의 그 말에 속으로 작은 파문이 생겨남을 직감했다. 좋아하고 있다면 차라리

그게 자신에게 덜 서운할 말일텐데... 좋아지려 하고 있다면 더 큰 것들이 존재할 것이기에

자신이 어쩌면 추림을 좋아하게 될지도 모를 그 때가 힘들어 질 것이었다.

 

"유미씨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 있다면 그에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세요.

기도하면 이루어 질지도 모르잖아요. 전 가끔 그럽니다. 내가 바라는 무엇을 비록 날 외면

해도 항상 기도하고 속으로 빌고 있죠. 이제 그만 내 기도를 들어줘 하고 말입니다. "

 

반병가량 위스키가 비워지자 추림의 얼굴이 붉게 달아 올랐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당겼다.

 

그녀는 모를것이다. 추림이 한 말이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인지 말이다. 

유미의 술잔이 비워지자 추림이 그녀의 잔을 물로 행구워내고 얼음을 채워 위스키를 다시

 믹스 시켰다. 추림은 유미가 말없이 앉아있는 모습에 견딜수 없는 가련한 느낌을 받았다.

 

충동이었다. 그녀는 아마도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처음에 그랬다. 어딘가

텅 빈듯한 그녀의 모습은 늘 권태스럽고 무기력하게만 보였다.

 

"유미씨? 항상 그렇게 앉아 계시지 마세요. 되도록이면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고 말을 전

하세요. 전 유미씨의 그런 침묵이 두렵습니다. 처음 보았을 때 친구들 사이에 조용히 앉아

있는 유미씨의 모습이 마치 정물 같았습니다. '난' 같았죠. 창가에 하루종일 같은 자리 같

은 모습으로 놓여진 난 같았습니다. 가금 미안해질때가 있습니다. 집안에 책꼿이에 끼워진

책이 항상 같은 자리면 그 책에게 미안해져서 괜히 뽑아내어 다른 자리로 옮겨 주기도 하고

그럴때가 있습니다.

존재하는듯 존재하지 않는듯한 유미씨의 모습같아서 다시 확인하고 싶어지고... 그랬거든

요.  그래서 아예 바로 응시하지 말자 생각한 겁니다."

 

고개를 든 유미가 추림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추림도 피하지 않고 눈에 힘을주자

유미의 깊은 눈동자가 아른거리듯 흔들림을 보였다.

 

"그렇게 보고 말하는 겁니다. 그럼 상대를 제압할수도 있고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좀 더 확

실하게 전달할 수가 있지요. 연습하셔야 할겁니다. 유미씨는 마음이 옳곧지 못합니다. 나쁘

거나 삿되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의지에 의심하고 믿음이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유미는 추림의 말에 깜짝 놀랐다. 자신은 누군가와 말할 때 늘 고개를 반쯤 숙이고 상대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다름아닌 상황을 의미있게 받아들이지 못해서 마음이 늘 불안하

고 자신을 신뢰하지 못해서였는데 그것을 추림이 정확히 꼬집은 것이다. 이제는 그것이 거

의 습관처럼 굳어져서 자연스러워져가고 있었다.

 

고개를 여전히 들고 추림에게 도발적인 눈빛을 던졌다.

추림의 눈은 흔들림 없이 그런 유미의 눈을 바라보았는데 유미는 추림의 눈빛에서 따듯함

과 동시에 포근한 기운을 느꼈다.

 

알수없는 감정이 생겨난 유미는 추림에게 안기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에게 힘든 마음

을 토로하고 외로운 심정을 기대고 싶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많은 남자들을 만나오면서 필요에 의한 시간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

도 감동도 없었다. 남자에게 이런 기분을 느낀것은 정말 처음이었다.

 

"유미씨... 힘들군요? 유미씨는 잘 웃는듯해도 정말 웃음을 모르는 여잡니다. 잃은게 많은

사람이 대개 그렇습니다. 아니 무의미한 시간이라든가 건조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거

의 그런 눈빛이고 웃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도 한때는 그랬습니다."

 

추림에게 연민의 정을 느껴진 유림은 갑자기 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힘들고 무의미한 시간들 투성이인 삶을 이겨내지 못하는 현실을 눈물로 쏟아내고 싶

었다.

 

추림이 슬며시 일어나 화장실을 다녀온다고 잛게 말하고 사라졌다.

 

그가 앉았던 자리가 횡하니 비자 가슴이 저려왔다. 입술을 꼬옥 깨물고 있던 유미의 눈에

서 작은 물방울이 비췄다.

서둘러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려 했는데 손수건 챙기는 것을 잊었다. 식타위에 놓여진

냅킨을 몇장 뽑아 눈을 찍었다. 

 

어깨에서 시작된 스산한 느낌이 등골을 따라 허리어림으로 내려왔다. 유미의 눈물이 더욱

진해지자 그것은 허벅지 하박아래로 내려가 다리를 저리게 만들었다.

비스듬히 상체를 식탁위에 기대고 그렇게 울때 추림이 조용히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유미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냥 울고 싶었다.

누가 보던 이순간에는 그저 울고만 싶었다. 삶이 고단하고 지루하고 힘들어 우는게 아니었

다. 그것들이 힘든짐이 되는것은 사실이었지만 참아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여지껏 잘

 참아왔는데......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서울로 이사오면서 방황을 시작하여 불안정한 길위를 걷게된 자신

의 믿음없는 삶과 원치 않은 상처로 뒤덥힌 허무한 날들...... 

 

탈출하고 싶었던 시간들이었다. 서울로 이사온 열 서너살 무렵부터 자신은 자신이 아닌 모

습으로 살아 왔다. 사회를 알았고 세상의 단면들을 보았으며 거친 삶을 투쟁으로 헤쳐나가

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두렵고 삭막한 시간이었다. 가정이 불안정하게 흔들렸고 자신은 겉돌았다.

일찍 술 담배를 시작했고 남자들과 어울렸다. 

육체적 관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같거나 그러지는 않았지만 나이에 맞추어 살아가는 삶을

일직 포기해 버렸다. 아니 포기한것이 아니고 잃어버렸다.

그냥 외로웠다. 사춘기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는 동안 그 때 얼룩졌던 상흔들이 지워지지

않고 잔재로 남아 지금까지 자신을 힘들게 했다.

 

그러다가 의지와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남자를 알게 되었다. 한명 두명..

그리고 상처만 남았다. 다시는 남자를 믿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필요에 의해 남자를 찾았

다.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사귀고 싶은 남자들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들이 싫었지만 풀수없는

목마름과 두렵고 외로운 침묵을 견디게 해주는 청량제 역활을 했다.

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자신은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것 같았다. 다른 이들과 같은 모습이

지만 속에 흉측한 진자 모습을 감춘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것 같았다.

 

자신도 믿을수가 없었고 사람들은 더더욱 믿을수가 없었다.

오로지 의미없는 시간들만 길고 길게 흘러갔다. 진정 외로웠지만 믿음으로 자신을 대해

줄 사람은 없었다. 세상이 일그러지게 보였고 자신은 항상 비틀거렸다.

 

때론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살아보려 했지만 며칠만에 자신은 또다시 비틀거리며 낯선곳

을 방황하고 있었다.

 

불안정한 삶... 믿음없는 자신... 신뢰할 수 없는 시간들... 달랠 수 없는 기분... 그것은 진정

두려운 것이었다. 그것을 버리고 잊기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것 같았다.

 

"제가 사회에 처음 나왔을 때, 수천명의 사람들이 길을 걸어가고 있더군요. 너무 힘들고

무서운데 그 많은 사람들 중 제가 아는 이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는게

이상하고 화가 나더군요.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반드시 난 다른 이들에게 저렇게 낯설고 무의미한 사람이 되지 말자

고 다짐했습니다. 전 다른 사람앞에서 울어본적이 별로 없습니다. 우는건 창피하거나 부끄

러운게 아니라고 하면서도 이상하게 그렇게 되더군요. 많이 울었습니다. 친구가 억울한 일

을 당해서 울었고 친구가 억울하게 목숨을 잃어 울었습니다. 힘들어서 울었고 외로워서 울

기도 했습니다. 남겨진 작은 아이가 불쌍해서 울었습니다. 유미씨... 사람을 앞에두고 다음

부터는 그렇게 울면 안됩니다.

반드시 앞에 있거나 곁에 있는 사람에게 기대서 우십시오. 그 사람이 같이 울어주지 못하고

해도 아마 유미씨가 누군가의 앞에서 울수 있다면 그를 믿거나 의지할만하다고 여겨져서

일겁니다.

그리고... 미안한 말이지만 나약해 지지 마십시오. 그렇게 힘든 얼굴로 절 만난다면 아마

다음번에는 저도 같이 울어야 할겁니다. 우는것 보다 웃는 삶도 많은데... 하필 왜 울고 있

는 삶을 가고 있는 겁니까? 많이 미안하다는 마음이 듭니다. 전 이럴때 무기력함을 느낍니

다. 내가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절 그렇게 만듭니다."

 

진정이 되었는지 유미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추림은 어쩌면 자신은 유미의 저런 심약하고 애처로운 모습 때문에 그녀를 기억하고 생각

했는지 모른다 생각했다.

 

처음에 보았을 때 그런 느낌이 강렬했다. 참 가련하게 느껴지는 여자구나라는 느낌이 들었

다.

그것이 맞거나 틀려도 상관없었다. 단지 추림은 그녀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이순간 만큼

은 그녀를 웃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술잔을 들어 입에 댄 추림이 진한 위스키의 향을 맡으며 혀로 그 맛을 가만히 음미했다.   

무척 독하고 썼다. 하지만 그 맛은 강한 중독성을 지녔다. 알면서도 마시고 찾게 되는 술처

럼 삶도 그런것 같았다. 삶의 끝에는 죽음만이 있지만 사람들은 죽어라고 뛰어가려한다.

 

고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살아오지 않은 인생이지만 아주 오랜동안을 살아온 날들

처럼 깊고도 두텁게 느껴지는 지난 날이었다.

추림은 자신의 과거를 유미에게 들려줄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단념했다. 자신이 별반

재미없게 느끼는 것을 상대라고 재미있어 할리는 없었다.

 

"이제 술 마셔도 되는 겁니까?"

 

추림이 유미의 침잠된 현실을 두드려 일깨웠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유미를 추림이 다시 불렀다.

 

"유미씨? 고개를 들고 절 한번 보실래요?" 

 

유미가 잠시 가만이 있다가 슬며시 얼굴을 들었다.

눈가에 물기가 뚜렷하고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눈물뒤에 남는 흔적은 늘 개운하지가

 않다.

세수를 하기전에는 그 느낌이 완전하게 가시지 않았다. 코 끝이 빨갛게 달아오른것이 굉장

히 복받친 설움으로 운듯 보였다.

 

추림은 강한 시선으로 유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유미가 부끄러운지 아니면 운게 창피한지 고개를 숙이려하자 추림이 고개짓으로 그녀의

행동을 저지했다.

 

"다음에 울때는 어떻게 하라고 했지요?"

 

추림이 묻자 유미는 어쩔줄 몰라 하는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말해 보세요. 만약 또 울어야 할때는 유미씨에게 뭐가 필요한지!"

 

쉽지 않을 것이다. 추림은 유미에게 강한 정신력을 원하는 것이지만 자칫하면 그것이 원치

않는 강요가 되는 것이라서 재촉하지는 않았다.

 

"우는 사람보다 그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이 더 슬플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같이 우는게 가

장 낳은 방법입니다. 다음에 울고 싶을때는 유미씨가 생각나는 사람에게 찾아가던지 연락

을 하십시오.

그리고 말하는 겁니다. '나 울고 싶은데 지금 만나 줄 수 있어'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딱 두

가지 대답이 나오는데, '장난하니' 하고 말하는 것과 응해준다는 대답입니다. 그런데 그런

말이 아니고 '같이 울어줄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절대 놓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이라면 유미씨에게 아주 훌륭한 힘이 되어줄 겁니다. 고개좀 끄덕여 보세요. 이런

말 할때는 원래 볼펜하고 공책이 있어야 하는데... 일단 외우시고 다음에 검사 하겠습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유미가 끝에 웃음을 지었다.

추림이 원하는 행동이어서 그도 같이 소리내어 웃어 주었다.

 

유미느 바보같은 마음에 고개를 들수조차 없었다.

한번도 이런 경우가 없었다. 남앞에서 울어 본적도 드물었고 아직 낮선 남자 앞에서는 아

예 없다시피 했다.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부끄러운 와중에도 가슴은 뻥 뚫리는듯한 기분이었다. 아직 마음이 무겁고 많은 생

각들로 혼란스럽지만 최소한 아까보다는 낳았다.

추림이 한 말을 가만히 되짚어 보았다. 그러다가 만약 그에게 연락해서 울고 싶다고 말해볼

까라는 생각이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그에게 굉장히 고마웠다. 이렇게 깊게 울어본적이 근래에 드물었고 후련한 울음은 더더욱

흔치 않은 경우였기에 더욱 그마음이 컸다.

후회하지않을것 같은 자리였다. 그는 우는동안 조용히 기다려 주었고 눈물을 멈추자 민망

해 할까봐 화재를 돌려 이야기로 위로를 해 주었다.

 

세심한 남자라더니 맞는거 같았다. 가슴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혹 이 마음의 정체가 추림으로 인한 것이라면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다. 이렇게 낮설고

생소한 두근거림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가히 싫지 않은 느끼이기에 더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다.  

 

"유미씨! 우리 이차 갈래요? 아까 올 때 비오던데... 지근쯤 눈 올지도 모르거든요. 거리가

보이는 술집에서 아주 멋지게 저녁을 만들어 볼래요? 그런 장소가 있어요. 작고 아담한 술

집! 나가요 우리. "

 

확실히 추림은 사려깊은 사람이다.

그러지 않아도 이곳이 너무 덥고 답답하다 여기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을 쐬거나 다른 장소

로 옮긴다면 기분이 한결 나아 질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는 마치 속을 들여다 보고

있는것 같았다.

                                                                                                          (9장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