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율(礎律) 제 74화

피바다2005.09.30
조회337

  아화는 정작 상황을 마주하게 되자 도리어 냉정하게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천제궁의 연회장은 어마어마하게 넓었으나, 많은 하객들이 들어 차 붐비는 탓에 오히려 답답해보일 정도였고 궁정 악사들의 조화로운 음율이 연회장 곳곳으로 퍼지고 있었다. 저마다 화려한 차림을 한 귀족들은 그 서열에 따라 황좌 주변에서부터 낮게는 입구 근처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아화는 초율에 의지하여 장미꽃잎이 뿌려진 붉은 융단을 밟으며 그들 사이를 나아갔다.

  수많은 귀족들의 눈에 초율과 미인의 등장은 참으로 볼만한 광경이었다. 게다가 백색 대리석 위에 깔린 붉은 융단 위를 밟아가는 초율의 붉고 흰 갑옷은 그와 오묘하게 조화되어 기이한 아름다움마저 느끼게 하였다. 하객들 중에 아화를 알아 본 귀족 남자들의 충격과 놀라움으로 약간의 동요가 일기도 했지만 아화의 귀에 그들의 수근대는 소리따위는 들릴 리가 없었다. 

  차차 상석(上席)에 가까워갈 수록 아화의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감히 시선을 정면으로 하지는 못했지만 곁눈으로 천제의 모습을 살피게 되었다. 붉은 융단의 끝에 2층으로 올려진 단(彖)이 있었는데 첫 번째 낮은 단에는 네 명의 남자들이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황좌와 가장 가까운 자리인데다 마련된 자리가 극히 화려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사천왕이라고 아화는 짐작했다. 역시나 그 자리엔 제공이 알 듯 모를 듯한 얼굴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아화는 더 이상 다른 이들의 얼굴을 살필 수 없었다. 봐주는 것 없이 뛰어오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었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광목천을 떠올리자 그녀는 눈물마저 나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래서 얼른 시선을 돌렸다. 

   그 위로 다시 계단이 놓였고 그 끝에 황금의 황좌가 있었다. 황좌에 앉은 이는 역시나 남다른 분위기와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 그는 천제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리만치 강하고 근엄했다. 그리고 왼편으로는 늘씬하고 우아한 자태의 황비가 앉아 있었고 오른편으로는 황태자와 약혼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초율은 황좌 아래에서 적당한 간격을 두고 멈추어섰다. 

  " 제 4황자 초율이 세상 모든 것의 위에 계신 천제 전하의 1500번째 생신을 감축드리나이다. 영복(永福)을 누리소서."  

  초율은 한 쪽 무릎을 바닥에 꿇으며 고개를 숙여 최대한의 예의를 보였다. 그리고 아화도 그를 따라 절을 올렸다. 아화는 복잡한 황궁의 법도따윈 알지 못했다. 다만 자신이 알고 있는 최고의 예의를 서둘러 행한 것이었다. 천제의 시선은 절을 하는 초율을 무심하게 지나 아화에게 머물렀다.

  " 일어나거라."

  천제의 허락을 받고 초율이 먼저 몸을 일으켰고 아화가 따라 일어났다.

  그 때 잠시 아화의 고개가 살짝 들렸는데 관지의 눈에 그 모습이 들어왔다. 관지는 괴이한 동생이 데리고 나타난 여자에게 호기심을 보이며 그녀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는데 어찌나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지 얼굴을 볼 기회를 못 잡다가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관지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마터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달려갈 뻔하였다.

  제공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태연하게 앉아 있었지만, 복잡해 질 상황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는 관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우려하던 일이 드디어 벌어지기 시작했음을 알았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제공은 낮게 한숨을 내 쉬었다.

  ' 이것이 운명인가...그리고 막지 못할 것인가.....?'

  초율은 하인들을 시켜 자신의 선물을 가져오게 하였다. 비단이 덮힌 들것이 다시 시종들의 손에 넘겨지고 황좌가 놓인 계단과 초율의 사이로 옮겨졌다.

  " 소자, 전하께 바치 올 선물을 준비하였나이다. 지고지존이신 천제전하께 하찮을 물건이오나 소자의 정성을 생각하여 주십시요."

  천제는 건성으로 고마움을 표했고, 아화는 이런 상황이 새삼 재미있었다. 세상 무서울 것이 없이 날뛰던 초율이 보여준 온순한 태도는 정말 의외였다. 맹수와 같이 도도하고 무자비하며 잔인한 남자가 천제 앞에선 마치 꼬리 내린 강아지와도 같이 순하게 변해있었다. 도저히 예전의 그 초율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에 아화는 두려움과 긴장은 사라지고 우스워지려고 했다.

  시종들이 선물을 가리고 있던 비단 덮개를 걷어냈다. 그러자, 조명을 받아 빛의 줄기를 사방으로 뻗어내는 푸른 갑옷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여느 갑옷과 확연히 다른 무늬와 분위기를 뿜어내는 갑옷에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고개를 빼들고 몰려들었고 시큰둥하던 천제도 그 순간만큼은 놀라움과 관심으로 황좌에서 약간 몸을 앞으로 내밀며 그 진귀한 갑옷을 바라보았다. 비범한 기운이 느껴지자 감았던 눈을 번쩍 뜬 제공도 자신의 눈으로 갑옷을 확인하게 되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 그것은.........?"

  천제가 선물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을 간접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초율은 천제가 자신의 선물에 벌써부터 마음을 빼앗겼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선귀(旋龜) 의 등껍질을 단련하여 만든 갑옷이옵니다."

  설명을 기다리고 있던 하객들은 물론 천제까지 그 얼굴에 경악과 충격이 스쳤다. 하지만 곧 그들의 표정은 믿지 못하겠다는 투로 바뀌었다.

  실제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귀는 도솔천 동쪽의 깊은 바다에 살고 있는 신수였다. 새의 머리에 뱀의 꼬리를 달고 있는 거대한 거북인 선귀는 하루 단 한 번, 그것도 찰나의 시간만 그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때는 바로 아침 해가 떠 오르는 순간이었다. 해가 떠오르며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순간 함께 바다 위로 떠 오르는 선귀가 그 빛에 반사되어 모습을 보이지만 눈깜짝할 사이 해는 바다 위로 치솟고 선귀는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즉, 존재하고 있으되,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이 선귀였다. 간혹 배들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것에 부딪혀 난파되는 것을 보면 분명히 선귀는 세상에 존재하는 동물이지만, 누구도 선귀를 찾아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무기로도 선귀의 단단한 등껍질에 작은 흠집 하나 낼 수 없을만큼 선귀는 불사의 존재였다.

  그러니 선귀를 잡아 껍질로 갑옷을 만들었다는 초율의 설명이 사람들에게는 거짓말로 들리는 게 뻔했다. 사람들의 비웃음과 동요가 커지자, 천제가 벌떡 일어섰다. 그는 곁에 놓아둔 자신의 검을 빼들고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천제가 수치심에 분노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모욕을 당했지만 경사스러운 날에 저런 처사는 심한 게 아닌가 사람들은 긴장하여 천제의 동태를 살폈다. 아화는 천제가 오싹하리만치 날이 선 검을 들고 다나오자 온 몸의 털이 서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다른 이가 아니라 그는 천제이며, 초율의 아버지였다. 초율이라는 야수를 낳은 피라면 이런 곳에서 천제가 피를 뿌리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초율은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아화는 알 수조차 없었다. 천제는 마침내 초율 앞에 다가와 그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 으아아아아아!"

  그는 엄청난 괴성을 지르며 온 힘을 다해 검을 내리쳤다.

  " 쨍!"

  하지만 그의 검이 내리 친 것은 초율이 아니라 갑옷이었다. 그리고 검이 갑옷에 닿는 순간 모두들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다들 절로 입을 벌린 채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 슈우우우욱,......"

  갑옷에서 심해의 짙푸른 빛깔을 띤 물줄기가 몰아쳐 나오더니 천제의 검을 휘감았다. 검은 물줄기의 힘에 못 이겨 튕겨나갔고 천제마저 그 반동을 버티지 못하고 미끄러지더니 계단에 부딪혀 주저앉고 말았다. 물줄기는 언제 그 자리에 나타났느냐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바다의 안개처럼 반짝이는 물방울로 분해되더니 공기 중으로 흩어져버렸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허깨비를 보았나 눈을 의심하였다. 천제 역시 놀라서 달려온 제 2황비의 부축을 받고 몸을 일으키면서 자신의 겪었음에도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놀라움과 충격으로 천제궁은 한참 정적에 휘감겼다. 그리고 뒤이어 놀라움과 감탄의 소리가 연회장을 가득 매웠다. 저 갑옷은 천제를 무적으로 만들어 줄 것이 분명했다.

  천제는 선물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저 갑옷을 입으면 그 누구도 자신을 전쟁터에서 해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껄끄러운 존재인 초율에게 그 기쁨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천제는 그가 데리고 온 아화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그 마음을 대신했다.

  천제는 미녀 아화에게 호의적인 눈빛과 목소리를 보냈다.

  " 이 아름다운 숙녀분은 누군가?"

  아화는 드디어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자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을 어떻게 밝혀야 할지 몰랐다. 지고의 절대자 앞에서 자신을 당당히 '기녀'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솔직함과 대범함도 이 곳, 제황성 안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늘 숨기지 않던 자신의 위치가 그곳에서는 치부가 되어 버렸다. 초율이 그녀를 구해주기까지 그 짧은 시간이 아화에게는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 '부용'이라 하옵니다. 서방 광목천왕가의 규수이옵니다."

  아화는 초율의 소갯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녀를 본 적이 없는 서방의 왕족들과 귀족들도 약간 의아한 기미를 보였다. 하지만 다행히 나서는 이가 없었고 작은 술렁임도 쉽게 가라앉았다. 그들은 아화가 자신들의 아주 먼 친인척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는 모양이었다. 대귀족이 아니라면 자신들이 모르는 혈족은 얼마든지 있었고 황자가 그런 여자를 데리고 온 것이라고 관대히 생각한 것이다.

  " 서방의 숙녀분이로군. 즐거이 놀다 가시오."

  천제도 초율과 대면하고 있는 것이 불편한지라 일을 복잡하게 하지 않고 둘을 물러나게 하였다. 아화는 초율의 손에 이끌려 겨우 경직된 발걸음을 떼었다. 

  관지 옆에 앉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초율과 아화를 지켜보던 비영이 그들이 물러나는 것을 보며 관지에게 귓속말로,

  " 황자께서 어쩜 저리도 아름다운 분을 동행하셨는지요. 왠지 잘....."

  하지만 그녀는 관지의 얼굴을 본 순간 놀라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전하?"

  관지는 반응이 없었다. 그의 얼굴을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는 외따로 그 곳에 놓여있는 것만 같이 어떤 것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관지는 저도 모르게 충격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화염에 휩싸여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나타났다. 아름답고 현명하고 해맑던 부용이......자신의 질투가 죽음으로 내 몰았던 그 녀, 부용이 나타났다.   

 

===목감기가 심하게 걸려버렸습니다. 침 삼키기마저 힘들어 밤새 잠을 못 잘 지경입니다. 건강체질이 아니라 평소에 아주 조심을 하는데도 결국은 못 벗어나고 감기가 걸려버렸네요.  요즘은 또 저처럼 목감기가 유행인가보더군요. 다들 조심...아시죠? 아..창녕 화왕산 갈대가 그렇게 보기 좋답니다. 주말에 한 번 가 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