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제법 커다란 흰털의 개 한 마리가 서 있었다. 녀석은 정자의 난간을 앞발로 짚고, 나머지 두 뒷발로만 선채로 여인과 같은 곳을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다.
두 시선이 향하는 곳은, 정자 아래 호수 너머의 작은 화원.
지금 그 곳에서는 한 소동(小童)과 여러 명의 기녀들이 도란도란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자지러지는 여인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름다운 미동이, 얼굴이 붉어 진 채로 검은 곱슬머리를 이리저리 흩날리는 중이었다.
“도련님~ 방금 도련님 이름이 도화라 하셨어요?”
“네에... 제, 제 이름이 ‘도화’에요!”
“운봉아~ 어여쁜 도련님은 복숭아 꽃 이시래...!호호호!”
“저, 저기 왜 웃어요? 복숭아꽃이면 안 되나요?”
“아무것도 아니어요. 호호”
“이상할 리가 있어요? 너무너무 잘 어울리셔서 그러지요~ 호호호!”
꺄르르르
이어지는 기녀들의 웃음소리. 여인들은 하나같이 모두 속살이 훤히 내비치는 각양각색의 얇은 비단 모시만을 걸치고 있었다. 도화를 가운데에 둔 대여섯 명의 기녀들은, 서로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너나 할 것 없이 이리저리 서로의 살을 부딪쳐 대고 있었다. 기녀들의 넓은 폭 소매의 기다란 장삼이 이리저리 얽히며 고운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귀한 댁 자제분이나, 이름 꽤 날린다는 한량들 혹은 풍류객까지- 사람장사로 꽤 안면이 넓다는 그녀들이었지만. 이렇게 아름답고 귀한 소공자(小功子)는 지금까지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옥색의 피부 결하며, 어깨 부근까지 검게 일렁이는 숱 많은 검은 고수머리는 광택이 일 정도였다. 매끈한 이마와 오똑한 콧날 그리고 붉은 입술까지 이어지는 선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둑알 같은 검은 눈동자와 쑥스러운 듯 붉어지는 발그레한 볼까지!
지켜보는 기녀들은 환희의 탄성을 내질렀다. 비록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해 여인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거나 밤잠을 설치게 만들 정도는 아니어도, 오히려 소년이기 때문에 지닐 수 있는 묘한 중성적인 아름다움은, 이 세상에 허락된 것이 아닌 것처럼 신비스럽게 느껴졌다.
며칠 전 홍루의 전각에 손님으로 들어 왔다는 이 도령일행은, 기녀들 사이에서 단연 최고의 화젯거리였다. 호기심 많고 말 많은 어린 기녀들의 관심은 온통 도화에게 쏠려 있었다. 물론 노모의 입단속으로 해루의 일은 비밀에 붙여져서, 일행은 단지 홍루의 전각에서 당분간 묵는 손님으로만 되어 있었다.
남의 속도 모르는 기녀들은 홍루를 몹시 부러워하며, 이것저것 묻거나, 지금처럼 몰래 찾아오는 등 귀찮게 해댔다.
“도화야~ 도화야~ 이리 오련?”
“네, 네에? 전 여기 있는데…….”
“호호호 아니요~ 우리 도련님 말고, 저기 뒤로 돌아서는 저 아이 말이에요!”
한 기녀가 깔깔거리며 저만치 떨어져 있는 소녀의 녹색 장삼을 끌어당겼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자신의 긴 머리칼을 한바퀴 춤사위로 휘날리며, 빙그르 돌아 제 몸을 뒤로 빼고는, 옆에선 다른 기녀의 어깨를 짚었다. 앞으로 당겨진 기녀는 풍만한 가슴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는 엷은 모시를 장삼으로 가리며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아잇! 언니는~! 너무해!”
“호호호~ 도화야, 너도 도련님께 인사해야지~”
“이 누나도 도화에요?”
“네에~ 도련님과 같은 도화지요! 뽀얀 복숭아 꽃 향기 나는 아이!”
"호호호호!"
그때 저만치서 붉은 비단을 걸친 여인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여인들의 품안에서 당황하는 도화를 발견하고는, 멀리서부터 고함을 지르며 뛰어오고 있었다.
“이 년들! 내 그리 일렀거늘~ 어서 그 분 곁에서 떨어지지 못해!”
“어마? 홍루 잔아? 에잇~ 눈치 하나는 빠르다니까…….호호!”
“아...! 홍루누나!”
"도련님! 괜찮으셔요?"
홍루를 알아본 도화는, 반가운 마음에 기쁘게 소리쳤다. 그동안 산 속에서 조용조용히 살아왔던 녀석은 이렇게 말 많고 시끄러운 여인들 사이에서 과한 관심을 받자니, 꼭 여우 무리에게 홀린 것만 같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운봉이 너~! 그리고 소소 너도! 나중에 보자. 가만 안둘 테야!”
“홍루 언니는 괜히 그래~ 귀한 도련님 혼자 독차지 하려고- 호호호”
“뭐야? 보자보자 하니까! 노모께 이른다! 금루국주님 불호령이 떨어질걸?”
“에게~ 무서워라~! 흥!”
“호호호 홍루가 무서우니 우린 이만 가자꾸나.”
“호호호”
금루국주님의 불호령이라는 말에 흠칫한 기녀들은 그래도 굴하고 않고 유들유들하게 몇 마디 말을 남기고는 유유히 자신들의 전각으로 돌아갔다. 뒤돌아 뛰어가며 펄럭이는 그녀들의 장삼자락이 멀어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화원의 하늘을 한가득 덮었다. 도화는 멍하게 그 모습을 눈으로 쫒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꼭 잡고 다시 노모의 전각으로 향하는 홍루를 올려다 보며 머뭇머뭇 물었다.
“홍루 누나. 내 이름이 도화이면..안되는 거야?”
“도련님..저기 그것은.......”
당황한 홍루는 얼른 고개를 돌려 기녀들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았다. 마음속으로 나중에 저것들을 정말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휴우.
큰 한 숨을 내쉰 홍루는 무릎을 숙여 도화와 눈높이를 맞춘 다음, 까만 눈동자에 시선을 두고 부드럽게 웃었다.
“아니에요 도련님. 그런 생각 마셔요.”
“아니야. 아까 저 누나들 중에도 도화라는 누나가 있었어. 꽃 이름은 여자아이의 이름이래.”
“도련님, 우리 귀한 도련님 이름은 누가 지어 주셨어요?”
“엄마가...... 내가 태어난 겨울에 내 뺨에 복숭아 꽃잎이 붙어 있었대.”
“제가 알기로 ‘복숭아, 도(桃)는 나무 목(木)에 점칠 조(兆)를 붙인 것으로, 사귀(邪鬼)를 쫓고 불로장수하는 선과(仙果)다’라고 하던 걸요? 도련님은 큰일을 하시는 분이시니... 소녀는 도련님이 도화라는 이름과 가장 잘 어울리시는 것이라 생각되어요.”
“정말? 그럴까?”
“네에. 그럼요~ 소녀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드릴게요.
옛날 동방나라의 화장산 기슭에 사냥꾼의 한 가족이 살고 있었다고 해요. 그 산꼭대기에는 큰 곰 한 마리가 살고 있어 온 산의 짐승들을 다 잡아먹어버렸다고 해요. 사냥꾼 내외도 이 곰을 잡으러 나갔다가 오히려 그 곰에게 물려 죽고 말았지요.“
“헉! 가여워 누나!”
도화의 손을 쥔 홍루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집에 남아 기다리던 오누이는 안 되겠다 싶어 부모를 찾아 산속을 헤매었고, 결국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따라서 죽고 말아요. 그러나 부모의 두 혼령은 자식의 죽음을 너무나도 가엾게 여겨, 두 아이의 영혼을 복숭아꽃으로 만들어 따뜻한 양지쪽에 피어 있게 하였답니다.”
“복숭아... 꽃으로?”
“네에. 도련님과 같이 아름답고 높으신 꽃으로요.
마침 그때 그 나라의 왕이 병이 들었는데, 백약이 다 효험이 없었다고 해요. 그러나 복숭아꽃을 먹으면 낫는다는 의원의 말에 따라 사자로 하여금 한 겨울에 복숭아꽃을 구하러 보내게 되었지요. 사자들이 멀리 떨어진 은루라는 곳의 남문 근처를 지나다가, 겨울인데도 복숭아꽃이 양지쪽에 활짝 피어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어요! 그들은 곧바로 이를 꺾어 왕에게 바쳐 왕은 그 꽃을 먹고 씻은 듯 병이 낫게 되었답니다.“
“아......!”
“사자가 복숭아꽃을 꺾었을 때 떨어져 시든 꽃술이 근처에 나서, 오빠의 정(精)은 대숲(竹林)이 되고 누이의 정은 솔숲(松林)이 되었다고 해요. 추운 한겨울에도 복숭아꽃이 피어 있었다고 해서 그 산 이름을 화장산 이라 한답니다.”
“화장산......!”
“또한 양지 바른 곳의 동쪽을 향하고 있는 복숭아 가지는, 축귀의 의미가 강해서, 문묘께 제례를 올릴 때도 사용되지 않는 걸요? 새로운 생명을 잉태를 의미하기도 하구요.”
홍루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열심히 이야기를 듣던 도화의 표정이 점점 더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작은 소년의 눈빛도, 이제는 별밤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덩달아 홍루도 속으로 묘한(?) 한 숨을 내쉬었다.
“그럼 엄마가 나에게 정말 귀한 이름을 주신거구나!”
“그, 그럼요! 호호. 도련님, 이제 저와 함께 전각으로 가셔요. 신선님께서 찾으셔요.”
“작약 할머니가? 어서 가야겠다. 헤헤”
“네에~ 이리 따라 오시어요~”
도화는 홍루의 손에 잡혀 서둘러 노모의 전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뒷모습이 화원 너머로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정자 위에서 지금까지 모든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두 시선은 거두어지지 않고 있었다.
뿌직!
지켜보고 있던 여인의 아미에 십자모양의 골이 깊이 팼다.
‘아무튼, 위씨 핏줄 아니랄까봐. 이모는 어쩌자고 아이 이름을 배짱 좋게 도화로 지은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영은 멀리 장백산의 단영이모를 원망했다.
시력이 남달리 뛰어난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을 옆에 함께 있는 것처럼 자세히 지켜보고 있었다. 홍루가 등장하면서부터는 단전의 내공을 귀로 일 주천시켜 청각을 돋우며, 소리까지 생생하게 듣고 있었다. 만약 아이가 자신에게 저렇게 물었다면, 말주변 없는 자신이 어떻게 대답했을까 하는 생각에- 등을 타고 한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현명한 홍루의 조리 있는 임기응변을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아! 그렇구나!’ 내지는 ‘옳거니!’ 하며 무릎을 쳤던 그녀다.
도화를 얻게 된 대충의 이야기를 백아이모부에게서 전해들은 한영은, 단영이 아기의 기저귀를 가는 순간까지도- 무조건- 여자 아이라고 강력하게 확신했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듣고도 ‘도화의 외모라면..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너그럽게 이해했다. 하지만 이모가 사내아이임을 알고도, 하늘의 실수라고 절규하며 아름다운 딸로 키우고자 마음먹고는 ‘도화’라는 이름을 고수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그녀는 분노하여 백아에게 외쳤다.
‘나중에..커서 아이가 받게 될 상처는요? 예!?’
‘그, 그래... 나도 많이 우겨댔지. 험험...허나 내가 어디 힘이 있느냐 .. 끌끌..’
‘그래도 그렇지! 나중에 분명히 커서 청년이 되면 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될 거라고요!’
‘쯧쯧..그럴..수도..’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요! 삼촌이 말렸어야지요! 정말로 상처가 될 수도 있다고요! 더군다나 저렇게 고운 아이 라면요!’
막 한마디 더 내뱉으려던 한영은, 그때 백아 삼촌의 마지막 한마디를 듣고는, 그 말이 다시 입속으로 쑤욱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그 후로 다시는 도화의 이름을 가지고 왈가왈부(曰可曰否)하지 않았다.
다시금 현실로 돌아온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 그럴 테지. 도화야.. 백아삼촌의 말처럼, 한 겨울에 네 뺨에 붙어 있던 그 복숭아 꽃잎이... 네 내력을 짐작하게 도와주는 마지막 열쇠가 될 지도 모를 일이란다..”
“멍!”
한영의 말을 알아들은 듯, 곁에 서서 멀어져가는 주인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흰둥이도, 나지막이 하지만 힘있게 짖었다. 늘씬한 뒷모습의 한영은 도화와 홍루가 사라진 화원에서 시선을 거두어, 원의 전경을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멋진 호수를 중심으로, 지금 그녀가 서 있는 이곳 정자는 솔원의 한가운데였다. 솔원은 초로를 이루는 세 개의 원 중에서, 왕국주가 소괄 하는 원으로 홍루가 소속된 전각이 있기도 했다. 한영이 내려다보는 풍경 속에는 규칙적으로 흩어져 있는 삼십 여개의 개성이 있는 전각과, 군데군데 전각 사이에 솟아있는 일곱 개의 정자가 호수를 배경으로 멋진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각 전각과 정자 사이는 가느다란 철사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위를 은은한 붉은 등이 사탕 꿰듯 죽 연결되어, 파란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또한 색색의 비단 천이 그 주위를 나풀대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지금 한영이 서 있는 이 정자에도 천장을 중심으로 푸른 휘장이 둘러져있어, 바람에 제 몸을 맡기며 허공에서 펄럭이고 있는 참이다.
누루에서 회복하고 있는 해루의 일은 비밀에 부쳐졌기에, 일단 도화와 작약 그리고 자신은 이곳 솔원의 홍루가 소속된 전각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또한 해루는 정신을 차린 후로도 필요한 말만 할뿐 입을 다물고 있었고, 따라서 한영은 그 놈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얻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찾아내어 요절을 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홍루도 노모도 더욱이 해루 본인조차도 거기에 대해서 입을 닫아 버렸으니, 날이 갈수록 한영의 마음속에는 갑갑증만 쌓여 갔다. 그래서 바람도 쐴 겸 정자로 올라와 보았던 것이다.
그래도 탁 트인 풍경을 보니 마음이 약간 풀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문득 한영은 자신의 옆에서 정자를 짚고 서있는 흰둥이를 슬쩍 흘겨봤다. 녀석은 제 딴에는 몹시 진지한 표정으로 풍경너머 무엇을 주시하고 있었다. 간혹 ‘끄응..!’ 거리는 신음성을 내지르기도 하면서.
‘풉!’
그녀의 입술 사이로 헛바람이 새어나왔다. 오랜만에 미소 짓는 한영이다. 방금 전 그녀는, 요즘 들어 유난스레 더 발달한 흰둥이의 장딴지 근육을 보았고, 순간 오만 생각이 스쳐 지나가며 웃음이 새어 나왔던 것이다. 그녀가 생각해도 정말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영물이 두 발로 걷다니, 아니 두 발로 걷는 개라니.
“끼이이잉...깽..!”
절 보고 웃는 것을 아는 듯, 흰털을 휘날리는 야호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푹 숙여 버린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한영은 마치 친구를 대하듯 야호의 어깨를 툭툭 다독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얼굴은 계속해서 웃어대고 있었다.
그때였다.
슈우욱-
한영의 코앞으로 희끄무레한 무엇인가가 휙- 지나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놀라서, 반사적으로 상체를 뒤로 젖히던 한영도, 그리고 곁에서 움찔하던 흰둥이도 바짝 긴장했다.
기척을 숨기고 공격한 이라면 고수가 분명했다. 한영은 오른 쪽 어깨에 메어 든 맥궁을 쥔 왼손에 슬며시 힘을 실었다.
퍼억-
희끄무레한 물체는 호선의 궤도를 그리며 정확히 기둥에 날아가서 꼽혔다. 붉은 술이 달린 은으로 된 작은 표창이었다. 표창의 전신에 정교하고 아름다운 용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살상(殺傷)용 무기라기보다는, 풍류객이나 여인들의 호신용 무기에 가까워 보였다. 표창의 은빛 전신을 타고 흘러내리는 붉은 술 아래에는 특이하게도 작은 쪽지가 매어져 있었다. 한영은 조심스레 다가가 표창을 정자의 기둥에서 뽑아들고, 쪽지를 꺼내어 펴 보았다.
힘 있는 필체로 쓴 글귀가 그녀의 눈동자에 담겼다.
草知春不久 「꽃과 나무들은 마치 봄이 곧 물러갈 것이란 것을 알듯이-」
百般紫芳菲 「경쟁하듯 서로의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아름다운 꽃들을 피우는구나」
花无才思紫 「오직 버들개지와 느릅나무만이 그들의 향과 색을 뽐내지 않고」
惟解天作雪 「바람을 따라 춤추듯 눈꽃이 되어 온 하늘에 내리는구나.」
한영은 종이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더니, 표창이 날아 온 방향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그 쪽은 한영이 있는 정자와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호수 건너편의 또 다른 정자였다. 그 정자 위에서는 한 사내가 기분 좋은 휘파람을 날리며 한영을 바라보며 반갑게 인사하고 있었다.
“신궁한영 소저 ! 오랜만입니다~ 도대체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겁니까?”
“흥!”
한영은 맥궁에 쥐었던 팔을 풀어 팔짱을 끼고는, 콧방귀를 끼며 반대쪽으로 고개를 팩 돌렸다. 그녀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는 부드러운 웃음을 띠며 계속해서 반가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날 이후로 얼마나 찾아 다녔는지 모릅니다. 전 강호를 뒤졌지요! 도대체 지난 4개월 동안 어디에 숨어 계셨던 겁니까?”
“숨어 있다니? 말은 똑바로 해라!”
“하하하. 여전히 냉랭한 모습으로 제 가슴을 설레게 하시는 군요.”
“웃기는 소리!”
사내는 목젖이 훤히 보이도록 시원하게 웃어젖혔다. 한영도 키가 크고 늘씬한 체격이었지만, 그는 그녀보다도 훨씬 더 떡 벌어진 장신에 근육이 탄탄한 체격 이었다. 길게 늘여 입은 옥색 비단옷과 황금색 머리장식은 호남형의 그의 얼굴과 매우 잘 어울렸다.
남자다운 이목구비와 짙은 눈썹이 인상적인 웃는 상의 얼굴이었다. 무엇보다도 반달형으로 웃는 눈매는 죄 없는 여인 여럿은 후리고도 남음이었다. 뭇 여인들이 보았다면 첫눈에 가슴이 떨리고 몽롱하게 눈이 풀릴 만큼 매력남이었지만, 한영에게는 그 눈웃음도 별 효과가 없는 듯 하다.
“그렇게 찾을 때는 없으시더니- 이렇듯 우연히도 결국은 다시 만나게 되니, 우리는 정녕 인연은 인연인가 봅니다.”
“흥! 개소리마라!”
“이런, 이런.... 제 가슴을 더 설레게 하실 겝니까? 하하하!”
“난 그저...... 가던 길 중에 잠시 들렸을 뿐이다.”
“저도 그저 여기서 잠시 쉬어 가는 길이지요. 그러니 인연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나한테 수작 부리려 하지 마라. 안 통하니. 여기 온 목적대로 가서 기녀나 품던지!”
“호오~! 지금 질투하시는 겁니까? 흐흐흐”
“이, 이런! 웃기는 놈을 봤나?”
“앞으로는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겁니다. 위소저!”
잠시 동안 한영은 이 난감한 상황에 앞으로 어찌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실은 저 청년은 자신도 잘 아는 이였다. 4개월 전 장백산으로 단영을 만나러가는 여정 중, 우연한 인연으로 그와 마주 칠 기회가 있었다. 그때도 한영은 저 사내가 자신을 쫒아 다니며 끈임 없이 추파를 던지는 것을 무시하고, 어느 날 새벽 아무도 모르게 말없이 길을 떠나 왔다. 그로 인해 그녀는 자신의 하나뿐인 벗(友)에게 마지막 인사도 전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길을 떠나고 말았었다. 만약 자신으로 인해 앞으로의 일행의 여정 중에 저 사내가 또 귀찮게 군다면, 여러모로 일이 꼬이고 복잡해 질 것이 틀림없었다.
그 생각만으로도 벌써부터 그녀는 머리가 아파왔다.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 찾아왔지? 하긴..정말로 모르고 우연히 마주친 것 같긴 한데...알았으면 벌써 귀찮게 굴기 시작했을 테니 말이지...!’
정말로 지지리도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한 한영은, 짜증이 실린 얼굴을 돌리고는 정자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더 있어 봤자 좋은 꼴 볼 것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녀가 막 몇 걸음 더 옮기려고 할 때였다.
슈욱-!
날카로운 예기의 느낌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 허리를 뒤로 꺾었다. 그러나 이번엔 곁에선 야호의 반응이 조금 더 빨랐다.
투우욱-
챙겅-
무심하게 스윽-하고 한번 팔을 내저은 야호의 동작으로, 날아오던 표창이 흰둥이의 팔에 부딪친 후 튕겨서 비스듬히 날아가 정자 바닥에 꼽혔다.
한영은 힐끔 그 모양을 바라보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발걸음을 계속해서 옮겼고, 흰둥이도 짜증스러운 눈으로 저쪽 정자의 사내를 한번 째려보고는, 한영을 따라 타박타박 발걸음을 옮겼다. 백아의 강기 공격을 나름대로 전수(?)받은 그의 유일 제자 흰둥이에게 있어서, 앞발에 기를 감아 쇠처럼 딱딱하게 보호한 다음, 저런 표창 하나쯤 내 치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무엇보다도 알 수 없는 예감이 영물인 야호의 기분을 야릇하게 만들고 있었다.
'할 일 없는 놈팽이 같으니라고...! 대낮부터 기루 출입이라니.. 흥! 벌써부터 싹이 노랗구나. 쳇!'
정작 당황한 사람은 호수건너 반대편 정자 위의 사내였다.
어처구니없게도 이곳 초로에 그렇게 애타게 찾던 한영이 귀신처럼 서있음을 알아 본 그는, 너무나도 반가운 나머지 그녀만을 주시하느라 곁에 서있던 흰 털의 개에게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허나 그런 그 개가, 자신의 장기중 하나인 표창을 대수롭지 않게 쳐내다니! 표창이 개의 앞발과 부딪힐 때, 분명히 검끼리 부딪치는 쇳소리가 났었다. 그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더군다나 그 흰 개는 자세히 보니, 정말로 두 발로 서서 한영을 뒤따라 걷고 있었다. 보통의 개(犬)가 아님이 틀림이 없었다.
멍하게 딴 생각을 하느라 그만 그의 시선 속에서 한영과 흰 개를 놓쳐 버린 사내다. 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이 상황이 너무나도 유쾌하고 즐거웠다.
‘이 곳 초로 안이라면- 모든 전각을 뒤져서라도 찾아내는 건 금방이지. 후후!’
그는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는 시원하게 웃어댔다.
“위소저! 정말로 우리는 인연인가 봅니다! 하하하하!”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원안의 곳곳으로 바람을 타고 퍼져나갔다. 그 소리가 잦아들 즈음, 웃음의 주인인 반대편 정자 위의 사내의 모습도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다.
그의 이름은 비형랑-
절세가인으로 인정받으며, 해어화(解語花) 세 송이라고 불리는 당대 최고의 세 기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다같이 마음속으로 품고 있다는 사내.
전 무림의 역사를 통틀어 다시없는 풍류객이자, 희대의 바람둥이인 사내.
딱히 들어 난 사건이 없어 실력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지만, 곤륜파의 절기를 이은 후예로 알려진 그가, 지금 정자 위에서 호탕한 웃음을 흘리고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잠시 뒤 정자의 천장에서 스르륵 검은 그림자가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누구도-영물인 야호 조차도 눈치 못하고 있었지만, 놀랍게도 그는 온몸을 검은 천으로 칭칭 두르고 얼굴까지 검게 칠한 사내, 바로 묵운 이었다. 며칠 전 밤 화란 부인의 명으로 그때부터 한영과 도화일행을 주시하고 있던 그는, 모두가 자취를 감춘 이 순간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떨리는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헉...! 한영... 신궁한영이었단 말이지? 그리고... 비형랑과도 아는 사이인 듯한데?
주군께 어서 보고를 드려야 할 사항이구나! “
검은 그림자는 다시금 원래대로 스르륵 모습을 감추며 초로의 중앙에 솟은 탑 쪽을 향해서 빠르게 사라져 갔다. 묵운, 그는 충실히 주군의 명을 이행하며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화야 이놈을 좀 보아라. 에잉... 나는 이런 일은 영 눈뜬장님 꼴이니……. 끌끌!”
“할머니 이것이 무엇이에요?”
홍루와 함께 급하게 달려온 도화는, 작약이 내미는 작은 광목천 두루마리를 받아들었다. 여러 번 접힌 흰 광목천을 조심스레 펼치던 소년은 곧 안에 들은 것을 확인하고는 ‘......아!’ 하고 나지막한 탄성을 내질렀다. 그것은 소년에게도 익숙한 봉인부(奉引符)로 꼼꼼하게 싸여져 있는 작은 구슬이었다.
“제 봉인부가 어찌하여....?”
“내 미처 말하지 못하고 깜박하고 있었다만, 그날 네 녀석이 쓰러지고 난 후 내가 해루의 몸 안에서 찾아 낸 것이야.”
“아... 그렇다면 이 구슬에 아귀가 봉인 되어 있는 것이로군요?”
“에끼! 이놈아 그것을 내게 물으면 어찌하느냐……. 클클. 네 녀석이 알아보아야지!”
“헤헤... 죄송해요. 그렇다면 봉인부는 어떻게...?”
“아마도 한영이 녀석이 그리 해 놓은 모양이다. 나야 부적을 보는 눈이 없으니......”
“아.. 누나라면! 가능해요. 역시-!”
도화는 자신을 대신하여 부적을 하나하나 살피며 고심했을 한영을 떠 올리자, 고운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걸렸다. 겉으로는 늘 툴툴거리며 덤벙거리기 일쑤인 그녀이지만, 부적으로 구슬을 틈 없이 꼼꼼하게도 싸둔 한영의 세심함에 손길에, 소년의 마음이 절로 뿌듯해져왔다.
“내가 오늘 그 구슬을 가만히 살펴보는데, 그 놈이 저절로 붕 허공에 떠오르더니, 부르르 떨리지 머냐! 내 어찌나 놀랐던지 뒤로 넘어져 자칫 허리를 다칠 뻔 하였느니!”
“잠시 만요……. 할머니 제가 살펴볼게요!”
도화는 구슬을 들어 올려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일단 봉인부는 뜯어서 협탁위에 두었다. 평범한 인간인 작약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도화의 깊은 눈동자는 정확히 대상을 짚어 보고 있었다. 핏빛이 감도는 요사스러운 구슬 속을 들여다보던 도화는 하마터먼 크게 고함을 지를 뻔 했다. 대신 소년은 헛바람을 집어 삼키며 신음성을 내질렀다.
“헉! 이럴 수가-!”
“왜? 무슨 일인 게야!”
“구슬안의 봉인 된 아귀가…….고통스럽게 몸부림 치고 있어요!”
“뭐야?!”
소년이 훔쳐 본 구슬안의 세상은, 더 없이 넓고 어두웠으며 또한 깊었다. 깊은 암흑속의 한 점처럼 찌그러진 아귀는 매우 고통스러운 듯 온 몸을 덜덜덜 떨어대며 표호를 내지르고 있었다. 구슬의 안쪽 표면에 얼굴을 들이 댄 아귀의 눈과 도화의 눈이 순간 마주쳤다. 아귀는 도화를 알아보고는 온 몸으로 발광하며 울부짖었다.
쿠오오오!
순간 핏빛의 구슬은 어둠의 기운을 광폭하게 내뿜으며, 스스로 꿈틀거리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헉! 안될 일! 정갈한 힘으로 마(魔)를 봉한다! 갈!”
파라락-
도화의 일갈과 함께 협탁위에 놓여있던 누런 봉인부는, 스스로 공중으로 떠올라 먹이를 입안으로 한입에 삼키듯, 구슬을 사방을 한번에 확 덮쳤다. 그리고 나지막이 읊조리는 도화의 법문과 함께, 단영의 피로 이루어진 부적의 붉은 글자들이 살이 있는 듯 꿈틀거리며 구슬의 휘감아 빙글 빙글 돌더니 이내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이전에는 한영이 단순히 정갈한 부적의 기운만으로 구슬을 봉인해 두었다면, 지금의 도화는 그 부적에 자신의 법력까지 담아 완벽하게 아귀의 봉인을 완성한 셈이다. 허공에서 봉인된 누런 종이 구슬은, 위를 향하고 있는 도화의 오른쪽 손바닥 위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구슬을 바라보며 도화는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는 말문을 열었다.
“방금은 제가 부적을 뜯어 봉인을 잠시 해제했기 때문이고요, 아까 말씀 하신 것처럼... 구슬이 부적의 봉인을 뚫고 스스로 허공을 떠오른다거나 요동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아귀 스스로의 힘으로는 말이죠.”
“메야? 이 녀석아! 그럼 내가 늙어 헛것을 보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작약이 대뜸 호통을 쳐대자 도화는 손사래를 내저으며 급히 말을 이었다. 도화의 설명을 들은 작약은 그제야 복잡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한결 풀었다.
“아니요, 할머니~!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 하다는 말 이구요, 아마도 제 생각에 아귀를 이 구슬 안에 봉인해 둔자가, 멀리서 아귀를 조정하고자 하는 것 같아요.”
“아귀를 봉인한 자?”
“네에. 아마도 원하는 바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자,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서 일수도 있고요. 아무튼 더 깊이는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겠죠.”
“이 세상에 말조가 든 게야. 말조가……. 아귀를 봉안하다니……. 내가 너무 오래 산 게야... 마신의 힘을 빌려는 쓸지언정, 다른 차원의 존재를 직접 소환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적이 없다. 고금의 어느 누구라도 말이다. 더군다나 봉인이라니.... 이는 자유자재로 이놈들을 다룬다는 말이 아니냐!”
“제가 아는 법문으로는 이 봉인을 풀고자 해도 원하는 바대로 풀 수가 없어요. 아귀라면 하급 마물이긴 하지만, 제가 어머니께 배운 우주의 법리에 따라서도, 결코 이들은 인간계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에요. 해루 누나를 노리는 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수를 쓰는 자들 이라면 반드시 막아야 해요, 할머니!”
단호한 목소리로 딱 부러지게 의사를 표시하는 도화를 바라보는 작약의 심정은 복잡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손녀 ‘현’은 이미 4개월 전에 큰 천기의 뒤틀림과 함께 차원의 일부가 허물어져 이계의 존재들이 인간계에 출현하여 앞으로 큰 혼란이 이어질 것이라 했다. 현, 아니 발귀리 선인의 예언대로 벌써부터 그 징조가 작약의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엉클어지고 끊어진 인연의 실의 무게감만큼 이 땅위에 엄청난 피바람이 몰아닥칠 것이고, 그 중심에 도화가 서 있을 것이라 했다. 그러나 일행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혼란은 점점 더 커져만 갈 것이고, 하늘의 뜻이 어디에 닿을지는 알 수가 없지만, 마지막 책임은 눈앞에 서 있는 이 작은 소년의 어깨위에 얹어 질 것이라고 현은 예언했다.
작약은 천외봉에서 단영에게 들었던 4개월 전의 일을 회상했다. 모든 것이 뿌연 안개 같이 잡을 수 없는 이야기들 이었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건 4개월 전에 천기가 크게 뒤틀린 시발점은 분명히
「시바」신 이라는 것이다.
‘이 녀석아! 이 모든 일의 원인 속에, 네 녀석이 그 한 가운데 서 있단 말이다!’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사랑스러운 도화를 바라보며, 작약은 차마 마지막 말을 성질대로 내지르지 못하고, 입안으로 삼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때마침 자리를 비우고 있던 한영과 흰둥이가 요란스럽게 투각거리며, 전각 안으로 들어왔다. 도화를 발견한 흰둥이는 반가운 마음에 힘껏 짖었다.
“멍!”
“어라? 왜 두 사람만 있어요?”
“응... 홍루 누나는 나만 여기 데려다 주고는, 급히 누루의 노모 전각으로 갔어.”
“아아. 해루를 보러 간 모양이구나?”
“그런 것 같아.”
“작약 어른은 왜 거기서 인상을 구기고 계세요? 화야~ 무슨 일 있었어? 어? 그 손에 든 누런 구슬은 머야?”
“아. 이건 그날 밤 누나가 봉인했다는 구슬.”
“머야? ...아닌데? 그게 부적이야? 부적이 어떻게 구슬이 될 수가 있어? 붉은 글씨들은?”
“끄응......!”
“아... 그러니까 그게, 할머니가.......”
작약은 말없이 돌아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고, 도화는 그간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한영에게 전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한영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펴졌다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 놈들을 잡아서 죽여 놔야 한다니까! 정말로!”
성질 급한 한영.
그렇지 않아도 그 일로 인한 울화증으로 가슴이 답답하던 터에, 도화의 이야기 까지 듣고 보니, 정말로 앉아 있지도 못하고 서있지도 못하는 좌불안석(坐不安席)이었다.
“너 혼자 애가타서 그리하면 무엇 할 것이냐! 정작 당사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조개처럼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으니.”
작약의 따끔한 일침에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순식간에 착 가라앉은 한영의 표정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더군다나 아까 우연히 마주쳤던 비형랑의 능글능글 거리는 얼굴이 계속 머릿속을 어지럽혀 그녀의 마음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작약, 도화, 한영 흰둥이까지- 오랜만에 천외봉 식구들만이 함께 모인 오붓한 오후였지만, 각자의 고민으로 다들 한동안 표정이 어두웠다. 허나 시간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흘러,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저무는 저녁이 되었고, 솔원 한가운데 홍루의 전각위에도 휘영청 밝은 달이 두둥실 떠올랐다.
『도화』 (21)
- 해어화(解語花)-말하는 꽃(5)-
나풀나풀 거리는 푸른 휘장이 시원한 바람에 펄럭이며 여인의 시야를 간질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제법 커다란 흰털의 개 한 마리가 서 있었다. 녀석은 정자의 난간을 앞발로 짚고, 나머지 두 뒷발로만 선채로 여인과 같은 곳을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다.
두 시선이 향하는 곳은, 정자 아래 호수 너머의 작은 화원.
지금 그 곳에서는 한 소동(小童)과 여러 명의 기녀들이 도란도란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자지러지는 여인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름다운 미동이, 얼굴이 붉어 진 채로 검은 곱슬머리를 이리저리 흩날리는 중이었다.
“도련님~ 방금 도련님 이름이 도화라 하셨어요?”
“네에... 제, 제 이름이 ‘도화’에요!”
“운봉아~ 어여쁜 도련님은 복숭아 꽃 이시래...!호호호!”
“저, 저기 왜 웃어요? 복숭아꽃이면 안 되나요?”
“아무것도 아니어요. 호호”
“이상할 리가 있어요? 너무너무 잘 어울리셔서 그러지요~ 호호호!”
꺄르르르
이어지는 기녀들의 웃음소리. 여인들은 하나같이 모두 속살이 훤히 내비치는 각양각색의 얇은 비단 모시만을 걸치고 있었다. 도화를 가운데에 둔 대여섯 명의 기녀들은, 서로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너나 할 것 없이 이리저리 서로의 살을 부딪쳐 대고 있었다. 기녀들의 넓은 폭 소매의 기다란 장삼이 이리저리 얽히며 고운 무늬를 만들고 있었다. 귀한 댁 자제분이나, 이름 꽤 날린다는 한량들 혹은 풍류객까지- 사람장사로 꽤 안면이 넓다는 그녀들이었지만. 이렇게 아름답고 귀한 소공자(小功子)는 지금까지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옥색의 피부 결하며, 어깨 부근까지 검게 일렁이는 숱 많은 검은 고수머리는 광택이 일 정도였다. 매끈한 이마와 오똑한 콧날 그리고 붉은 입술까지 이어지는 선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둑알 같은 검은 눈동자와 쑥스러운 듯 붉어지는 발그레한 볼까지!
지켜보는 기녀들은 환희의 탄성을 내질렀다. 비록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해 여인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거나 밤잠을 설치게 만들 정도는 아니어도, 오히려 소년이기 때문에 지닐 수 있는 묘한 중성적인 아름다움은, 이 세상에 허락된 것이 아닌 것처럼 신비스럽게 느껴졌다.
며칠 전 홍루의 전각에 손님으로 들어 왔다는 이 도령일행은, 기녀들 사이에서 단연 최고의 화젯거리였다. 호기심 많고 말 많은 어린 기녀들의 관심은 온통 도화에게 쏠려 있었다. 물론 노모의 입단속으로 해루의 일은 비밀에 붙여져서, 일행은 단지 홍루의 전각에서 당분간 묵는 손님으로만 되어 있었다.
남의 속도 모르는 기녀들은 홍루를 몹시 부러워하며, 이것저것 묻거나, 지금처럼 몰래 찾아오는 등 귀찮게 해댔다.
“도화야~ 도화야~ 이리 오련?”
“네, 네에? 전 여기 있는데…….”
“호호호 아니요~ 우리 도련님 말고, 저기 뒤로 돌아서는 저 아이 말이에요!”
한 기녀가 깔깔거리며 저만치 떨어져 있는 소녀의 녹색 장삼을 끌어당겼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자신의 긴 머리칼을 한바퀴 춤사위로 휘날리며, 빙그르 돌아 제 몸을 뒤로 빼고는, 옆에선 다른 기녀의 어깨를 짚었다. 앞으로 당겨진 기녀는 풍만한 가슴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는 엷은 모시를 장삼으로 가리며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아잇! 언니는~! 너무해!”
“호호호~ 도화야, 너도 도련님께 인사해야지~”
“이 누나도 도화에요?”
“네에~ 도련님과 같은 도화지요! 뽀얀 복숭아 꽃 향기 나는 아이!”
"호호호호!"
그때 저만치서 붉은 비단을 걸친 여인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여인들의 품안에서 당황하는 도화를 발견하고는, 멀리서부터 고함을 지르며 뛰어오고 있었다.
“이 년들! 내 그리 일렀거늘~ 어서 그 분 곁에서 떨어지지 못해!”
“어마? 홍루 잔아? 에잇~ 눈치 하나는 빠르다니까…….호호!”
“아...! 홍루누나!”
"도련님! 괜찮으셔요?"
홍루를 알아본 도화는, 반가운 마음에 기쁘게 소리쳤다. 그동안 산 속에서 조용조용히 살아왔던 녀석은 이렇게 말 많고 시끄러운 여인들 사이에서 과한 관심을 받자니, 꼭 여우 무리에게 홀린 것만 같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운봉이 너~! 그리고 소소 너도! 나중에 보자. 가만 안둘 테야!”
“홍루 언니는 괜히 그래~ 귀한 도련님 혼자 독차지 하려고- 호호호”
“뭐야? 보자보자 하니까! 노모께 이른다! 금루국주님 불호령이 떨어질걸?”
“에게~ 무서워라~! 흥!”
“호호호 홍루가 무서우니 우린 이만 가자꾸나.”
“호호호”
금루국주님의 불호령이라는 말에 흠칫한 기녀들은 그래도 굴하고 않고 유들유들하게 몇 마디 말을 남기고는 유유히 자신들의 전각으로 돌아갔다. 뒤돌아 뛰어가며 펄럭이는 그녀들의 장삼자락이 멀어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화원의 하늘을 한가득 덮었다. 도화는 멍하게 그 모습을 눈으로 쫒았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꼭 잡고 다시 노모의 전각으로 향하는 홍루를 올려다 보며 머뭇머뭇 물었다.
“홍루 누나. 내 이름이 도화이면..안되는 거야?”
“도련님..저기 그것은.......”
당황한 홍루는 얼른 고개를 돌려 기녀들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았다. 마음속으로 나중에 저것들을 정말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휴우.
큰 한 숨을 내쉰 홍루는 무릎을 숙여 도화와 눈높이를 맞춘 다음, 까만 눈동자에 시선을 두고 부드럽게 웃었다.
“아니에요 도련님. 그런 생각 마셔요.”
“아니야. 아까 저 누나들 중에도 도화라는 누나가 있었어. 꽃 이름은 여자아이의 이름이래.”
“도련님, 우리 귀한 도련님 이름은 누가 지어 주셨어요?”
“엄마가...... 내가 태어난 겨울에 내 뺨에 복숭아 꽃잎이 붙어 있었대.”
“제가 알기로 ‘복숭아, 도(桃)는 나무 목(木)에 점칠 조(兆)를 붙인 것으로, 사귀(邪鬼)를 쫓고 불로장수하는 선과(仙果)다’라고 하던 걸요? 도련님은 큰일을 하시는 분이시니... 소녀는 도련님이 도화라는 이름과 가장 잘 어울리시는 것이라 생각되어요.”
“정말? 그럴까?”
“네에. 그럼요~ 소녀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드릴게요.
옛날 동방나라의 화장산 기슭에 사냥꾼의 한 가족이 살고 있었다고 해요. 그 산꼭대기에는 큰 곰 한 마리가 살고 있어 온 산의 짐승들을 다 잡아먹어버렸다고 해요. 사냥꾼 내외도 이 곰을 잡으러 나갔다가 오히려 그 곰에게 물려 죽고 말았지요.“
“헉! 가여워 누나!”
도화의 손을 쥔 홍루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해서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집에 남아 기다리던 오누이는 안 되겠다 싶어 부모를 찾아 산속을 헤매었고, 결국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따라서 죽고 말아요. 그러나 부모의 두 혼령은 자식의 죽음을 너무나도 가엾게 여겨, 두 아이의 영혼을 복숭아꽃으로 만들어 따뜻한 양지쪽에 피어 있게 하였답니다.”
“복숭아... 꽃으로?”
“네에. 도련님과 같이 아름답고 높으신 꽃으로요.
마침 그때 그 나라의 왕이 병이 들었는데, 백약이 다 효험이 없었다고 해요. 그러나 복숭아꽃을 먹으면 낫는다는 의원의 말에 따라 사자로 하여금 한 겨울에 복숭아꽃을 구하러 보내게 되었지요. 사자들이 멀리 떨어진 은루라는 곳의 남문 근처를 지나다가, 겨울인데도 복숭아꽃이 양지쪽에 활짝 피어 있는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어요! 그들은 곧바로 이를 꺾어 왕에게 바쳐 왕은 그 꽃을 먹고 씻은 듯 병이 낫게 되었답니다.“
“아......!”
“사자가 복숭아꽃을 꺾었을 때 떨어져 시든 꽃술이 근처에 나서, 오빠의 정(精)은 대숲(竹林)이 되고 누이의 정은 솔숲(松林)이 되었다고 해요. 추운 한겨울에도 복숭아꽃이 피어 있었다고 해서 그 산 이름을 화장산 이라 한답니다.”
“화장산......!”
“또한 양지 바른 곳의 동쪽을 향하고 있는 복숭아 가지는, 축귀의 의미가 강해서, 문묘께 제례를 올릴 때도 사용되지 않는 걸요? 새로운 생명을 잉태를 의미하기도 하구요.”
홍루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열심히 이야기를 듣던 도화의 표정이 점점 더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작은 소년의 눈빛도, 이제는 별밤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덩달아 홍루도 속으로 묘한(?) 한 숨을 내쉬었다.
“그럼 엄마가 나에게 정말 귀한 이름을 주신거구나!”
“그, 그럼요! 호호. 도련님, 이제 저와 함께 전각으로 가셔요. 신선님께서 찾으셔요.”
“작약 할머니가? 어서 가야겠다. 헤헤”
“네에~ 이리 따라 오시어요~”
도화는 홍루의 손에 잡혀 서둘러 노모의 전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뒷모습이 화원 너머로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정자 위에서 지금까지 모든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두 시선은 거두어지지 않고 있었다.
뿌직!
지켜보고 있던 여인의 아미에 십자모양의 골이 깊이 팼다.
‘아무튼, 위씨 핏줄 아니랄까봐. 이모는 어쩌자고 아이 이름을 배짱 좋게 도화로 지은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영은 멀리 장백산의 단영이모를 원망했다.
시력이 남달리 뛰어난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을 옆에 함께 있는 것처럼 자세히 지켜보고 있었다. 홍루가 등장하면서부터는 단전의 내공을 귀로 일 주천시켜 청각을 돋우며, 소리까지 생생하게 듣고 있었다. 만약 아이가 자신에게 저렇게 물었다면, 말주변 없는 자신이 어떻게 대답했을까 하는 생각에- 등을 타고 한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현명한 홍루의 조리 있는 임기응변을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아! 그렇구나!’ 내지는 ‘옳거니!’ 하며 무릎을 쳤던 그녀다.
도화를 얻게 된 대충의 이야기를 백아이모부에게서 전해들은 한영은, 단영이 아기의 기저귀를 가는 순간까지도- 무조건- 여자 아이라고 강력하게 확신했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듣고도 ‘도화의 외모라면..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고 너그럽게 이해했다. 하지만 이모가 사내아이임을 알고도, 하늘의 실수라고 절규하며 아름다운 딸로 키우고자 마음먹고는 ‘도화’라는 이름을 고수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그녀는 분노하여 백아에게 외쳤다.
‘나중에..커서 아이가 받게 될 상처는요? 예!?’
‘그, 그래... 나도 많이 우겨댔지. 험험...허나 내가 어디 힘이 있느냐 .. 끌끌..’
‘그래도 그렇지! 나중에 분명히 커서 청년이 되면 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될 거라고요!’
‘쯧쯧..그럴..수도..’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요! 삼촌이 말렸어야지요! 정말로 상처가 될 수도 있다고요! 더군다나 저렇게 고운 아이 라면요!’
막 한마디 더 내뱉으려던 한영은, 그때 백아 삼촌의 마지막 한마디를 듣고는, 그 말이 다시 입속으로 쑤욱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그 후로 다시는 도화의 이름을 가지고 왈가왈부(曰可曰否)하지 않았다.
다시금 현실로 돌아온 그녀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 그럴 테지. 도화야.. 백아삼촌의 말처럼, 한 겨울에 네 뺨에 붙어 있던 그 복숭아 꽃잎이... 네 내력을 짐작하게 도와주는 마지막 열쇠가 될 지도 모를 일이란다..”
“멍!”
한영의 말을 알아들은 듯, 곁에 서서 멀어져가는 주인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흰둥이도, 나지막이 하지만 힘있게 짖었다. 늘씬한 뒷모습의 한영은 도화와 홍루가 사라진 화원에서 시선을 거두어, 원의 전경을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멋진 호수를 중심으로, 지금 그녀가 서 있는 이곳 정자는 솔원의 한가운데였다. 솔원은 초로를 이루는 세 개의 원 중에서, 왕국주가 소괄 하는 원으로 홍루가 소속된 전각이 있기도 했다. 한영이 내려다보는 풍경 속에는 규칙적으로 흩어져 있는 삼십 여개의 개성이 있는 전각과, 군데군데 전각 사이에 솟아있는 일곱 개의 정자가 호수를 배경으로 멋진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각 전각과 정자 사이는 가느다란 철사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위를 은은한 붉은 등이 사탕 꿰듯 죽 연결되어, 파란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또한 색색의 비단 천이 그 주위를 나풀대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지금 한영이 서 있는 이 정자에도 천장을 중심으로 푸른 휘장이 둘러져있어, 바람에 제 몸을 맡기며 허공에서 펄럭이고 있는 참이다.
누루에서 회복하고 있는 해루의 일은 비밀에 부쳐졌기에, 일단 도화와 작약 그리고 자신은 이곳 솔원의 홍루가 소속된 전각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또한 해루는 정신을 차린 후로도 필요한 말만 할뿐 입을 다물고 있었고, 따라서 한영은 그 놈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얻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찾아내어 요절을 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홍루도 노모도 더욱이 해루 본인조차도 거기에 대해서 입을 닫아 버렸으니, 날이 갈수록 한영의 마음속에는 갑갑증만 쌓여 갔다. 그래서 바람도 쐴 겸 정자로 올라와 보았던 것이다.
그래도 탁 트인 풍경을 보니 마음이 약간 풀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문득 한영은 자신의 옆에서 정자를 짚고 서있는 흰둥이를 슬쩍 흘겨봤다. 녀석은 제 딴에는 몹시 진지한 표정으로 풍경너머 무엇을 주시하고 있었다. 간혹 ‘끄응..!’ 거리는 신음성을 내지르기도 하면서.
‘풉!’
그녀의 입술 사이로 헛바람이 새어나왔다. 오랜만에 미소 짓는 한영이다. 방금 전 그녀는, 요즘 들어 유난스레 더 발달한 흰둥이의 장딴지 근육을 보았고, 순간 오만 생각이 스쳐 지나가며 웃음이 새어 나왔던 것이다. 그녀가 생각해도 정말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영물이 두 발로 걷다니, 아니 두 발로 걷는 개라니.
“끼이이잉...깽..!”
절 보고 웃는 것을 아는 듯, 흰털을 휘날리는 야호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푹 숙여 버린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한영은 마치 친구를 대하듯 야호의 어깨를 툭툭 다독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얼굴은 계속해서 웃어대고 있었다.
그때였다.
슈우욱-
한영의 코앞으로 희끄무레한 무엇인가가 휙- 지나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놀라서, 반사적으로 상체를 뒤로 젖히던 한영도, 그리고 곁에서 움찔하던 흰둥이도 바짝 긴장했다.
기척을 숨기고 공격한 이라면 고수가 분명했다. 한영은 오른 쪽 어깨에 메어 든 맥궁을 쥔 왼손에 슬며시 힘을 실었다.
퍼억-
희끄무레한 물체는 호선의 궤도를 그리며 정확히 기둥에 날아가서 꼽혔다. 붉은 술이 달린 은으로 된 작은 표창이었다. 표창의 전신에 정교하고 아름다운 용무늬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살상(殺傷)용 무기라기보다는, 풍류객이나 여인들의 호신용 무기에 가까워 보였다. 표창의 은빛 전신을 타고 흘러내리는 붉은 술 아래에는 특이하게도 작은 쪽지가 매어져 있었다. 한영은 조심스레 다가가 표창을 정자의 기둥에서 뽑아들고, 쪽지를 꺼내어 펴 보았다.
힘 있는 필체로 쓴 글귀가 그녀의 눈동자에 담겼다.
草知春不久 「꽃과 나무들은 마치 봄이 곧 물러갈 것이란 것을 알듯이-」
百般紫芳菲 「경쟁하듯 서로의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아름다운 꽃들을 피우는구나」
花无才思紫 「오직 버들개지와 느릅나무만이 그들의 향과 색을 뽐내지 않고」
惟解天作雪 「바람을 따라 춤추듯 눈꽃이 되어 온 하늘에 내리는구나.」
한영은 종이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더니, 표창이 날아 온 방향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그 쪽은 한영이 있는 정자와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호수 건너편의 또 다른 정자였다. 그 정자 위에서는 한 사내가 기분 좋은 휘파람을 날리며 한영을 바라보며 반갑게 인사하고 있었다.
“신궁한영 소저 ! 오랜만입니다~ 도대체 그동안 어디에 있었던 겁니까?”
“흥!”
한영은 맥궁에 쥐었던 팔을 풀어 팔짱을 끼고는, 콧방귀를 끼며 반대쪽으로 고개를 팩 돌렸다. 그녀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는 부드러운 웃음을 띠며 계속해서 반가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날 이후로 얼마나 찾아 다녔는지 모릅니다. 전 강호를 뒤졌지요! 도대체 지난 4개월 동안 어디에 숨어 계셨던 겁니까?”
“숨어 있다니? 말은 똑바로 해라!”
“하하하. 여전히 냉랭한 모습으로 제 가슴을 설레게 하시는 군요.”
“웃기는 소리!”
사내는 목젖이 훤히 보이도록 시원하게 웃어젖혔다. 한영도 키가 크고 늘씬한 체격이었지만, 그는 그녀보다도 훨씬 더 떡 벌어진 장신에 근육이 탄탄한 체격 이었다. 길게 늘여 입은 옥색 비단옷과 황금색 머리장식은 호남형의 그의 얼굴과 매우 잘 어울렸다.
남자다운 이목구비와 짙은 눈썹이 인상적인 웃는 상의 얼굴이었다. 무엇보다도 반달형으로 웃는 눈매는 죄 없는 여인 여럿은 후리고도 남음이었다. 뭇 여인들이 보았다면 첫눈에 가슴이 떨리고 몽롱하게 눈이 풀릴 만큼 매력남이었지만, 한영에게는 그 눈웃음도 별 효과가 없는 듯 하다.
“그렇게 찾을 때는 없으시더니- 이렇듯 우연히도 결국은 다시 만나게 되니, 우리는 정녕 인연은 인연인가 봅니다.”
“흥! 개소리마라!”
“이런, 이런.... 제 가슴을 더 설레게 하실 겝니까? 하하하!”
“난 그저...... 가던 길 중에 잠시 들렸을 뿐이다.”
“저도 그저 여기서 잠시 쉬어 가는 길이지요. 그러니 인연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나한테 수작 부리려 하지 마라. 안 통하니. 여기 온 목적대로 가서 기녀나 품던지!”
“호오~! 지금 질투하시는 겁니까? 흐흐흐”
“이, 이런! 웃기는 놈을 봤나?”
“앞으로는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겁니다. 위소저!”
잠시 동안 한영은 이 난감한 상황에 앞으로 어찌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실은 저 청년은 자신도 잘 아는 이였다. 4개월 전 장백산으로 단영을 만나러가는 여정 중, 우연한 인연으로 그와 마주 칠 기회가 있었다. 그때도 한영은 저 사내가 자신을 쫒아 다니며 끈임 없이 추파를 던지는 것을 무시하고, 어느 날 새벽 아무도 모르게 말없이 길을 떠나 왔다. 그로 인해 그녀는 자신의 하나뿐인 벗(友)에게 마지막 인사도 전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길을 떠나고 말았었다. 만약 자신으로 인해 앞으로의 일행의 여정 중에 저 사내가 또 귀찮게 군다면, 여러모로 일이 꼬이고 복잡해 질 것이 틀림없었다.
그 생각만으로도 벌써부터 그녀는 머리가 아파왔다.
‘어떻게 귀신같이 알고 찾아왔지? 하긴..정말로 모르고 우연히 마주친 것 같긴 한데...알았으면 벌써 귀찮게 굴기 시작했을 테니 말이지...!’
정말로 지지리도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한 한영은, 짜증이 실린 얼굴을 돌리고는 정자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더 있어 봤자 좋은 꼴 볼 것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녀가 막 몇 걸음 더 옮기려고 할 때였다.
슈욱-!
날카로운 예기의 느낌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 허리를 뒤로 꺾었다. 그러나 이번엔 곁에선 야호의 반응이 조금 더 빨랐다.
투우욱-
챙겅-
무심하게 스윽-하고 한번 팔을 내저은 야호의 동작으로, 날아오던 표창이 흰둥이의 팔에 부딪친 후 튕겨서 비스듬히 날아가 정자 바닥에 꼽혔다.
한영은 힐끔 그 모양을 바라보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발걸음을 계속해서 옮겼고, 흰둥이도 짜증스러운 눈으로 저쪽 정자의 사내를 한번 째려보고는, 한영을 따라 타박타박 발걸음을 옮겼다. 백아의 강기 공격을 나름대로 전수(?)받은 그의 유일 제자 흰둥이에게 있어서, 앞발에 기를 감아 쇠처럼 딱딱하게 보호한 다음, 저런 표창 하나쯤 내 치는 것은 누워서 떡 먹기였다. 무엇보다도 알 수 없는 예감이 영물인 야호의 기분을 야릇하게 만들고 있었다.
'할 일 없는 놈팽이 같으니라고...! 대낮부터 기루 출입이라니.. 흥! 벌써부터 싹이 노랗구나. 쳇!'
정작 당황한 사람은 호수건너 반대편 정자 위의 사내였다.
어처구니없게도 이곳 초로에 그렇게 애타게 찾던 한영이 귀신처럼 서있음을 알아 본 그는, 너무나도 반가운 나머지 그녀만을 주시하느라 곁에 서있던 흰 털의 개에게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허나 그런 그 개가, 자신의 장기중 하나인 표창을 대수롭지 않게 쳐내다니! 표창이 개의 앞발과 부딪힐 때, 분명히 검끼리 부딪치는 쇳소리가 났었다. 그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더군다나 그 흰 개는 자세히 보니, 정말로 두 발로 서서 한영을 뒤따라 걷고 있었다. 보통의 개(犬)가 아님이 틀림이 없었다.
멍하게 딴 생각을 하느라 그만 그의 시선 속에서 한영과 흰 개를 놓쳐 버린 사내다. 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이 상황이 너무나도 유쾌하고 즐거웠다.
‘이 곳 초로 안이라면- 모든 전각을 뒤져서라도 찾아내는 건 금방이지. 후후!’
그는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는 시원하게 웃어댔다.
“위소저! 정말로 우리는 인연인가 봅니다! 하하하하!”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원안의 곳곳으로 바람을 타고 퍼져나갔다. 그 소리가 잦아들 즈음, 웃음의 주인인 반대편 정자 위의 사내의 모습도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다.
그의 이름은 비형랑-
절세가인으로 인정받으며, 해어화(解語花) 세 송이라고 불리는 당대 최고의 세 기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다같이 마음속으로 품고 있다는 사내.
전 무림의 역사를 통틀어 다시없는 풍류객이자, 희대의 바람둥이인 사내.
딱히 들어 난 사건이 없어 실력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지만, 곤륜파의 절기를 이은 후예로 알려진 그가, 지금 정자 위에서 호탕한 웃음을 흘리고는 사라져 버린 것이다.
잠시 뒤 정자의 천장에서 스르륵 검은 그림자가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누구도-영물인 야호 조차도 눈치 못하고 있었지만, 놀랍게도 그는 온몸을 검은 천으로 칭칭 두르고 얼굴까지 검게 칠한 사내, 바로 묵운 이었다. 며칠 전 밤 화란 부인의 명으로 그때부터 한영과 도화일행을 주시하고 있던 그는, 모두가 자취를 감춘 이 순간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떨리는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헉...! 한영... 신궁한영이었단 말이지? 그리고... 비형랑과도 아는 사이인 듯한데?
주군께 어서 보고를 드려야 할 사항이구나! “
검은 그림자는 다시금 원래대로 스르륵 모습을 감추며 초로의 중앙에 솟은 탑 쪽을 향해서 빠르게 사라져 갔다. 묵운, 그는 충실히 주군의 명을 이행하며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화야 이놈을 좀 보아라. 에잉... 나는 이런 일은 영 눈뜬장님 꼴이니……. 끌끌!”
“할머니 이것이 무엇이에요?”
홍루와 함께 급하게 달려온 도화는, 작약이 내미는 작은 광목천 두루마리를 받아들었다. 여러 번 접힌 흰 광목천을 조심스레 펼치던 소년은 곧 안에 들은 것을 확인하고는 ‘......아!’ 하고 나지막한 탄성을 내질렀다. 그것은 소년에게도 익숙한 봉인부(奉引符)로 꼼꼼하게 싸여져 있는 작은 구슬이었다.
“제 봉인부가 어찌하여....?”
“내 미처 말하지 못하고 깜박하고 있었다만, 그날 네 녀석이 쓰러지고 난 후 내가 해루의 몸 안에서 찾아 낸 것이야.”
“아... 그렇다면 이 구슬에 아귀가 봉인 되어 있는 것이로군요?”
“에끼! 이놈아 그것을 내게 물으면 어찌하느냐……. 클클. 네 녀석이 알아보아야지!”
“헤헤... 죄송해요. 그렇다면 봉인부는 어떻게...?”
“아마도 한영이 녀석이 그리 해 놓은 모양이다. 나야 부적을 보는 눈이 없으니......”
“아.. 누나라면! 가능해요. 역시-!”
도화는 자신을 대신하여 부적을 하나하나 살피며 고심했을 한영을 떠 올리자, 고운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걸렸다. 겉으로는 늘 툴툴거리며 덤벙거리기 일쑤인 그녀이지만, 부적으로 구슬을 틈 없이 꼼꼼하게도 싸둔 한영의 세심함에 손길에, 소년의 마음이 절로 뿌듯해져왔다.
“내가 오늘 그 구슬을 가만히 살펴보는데, 그 놈이 저절로 붕 허공에 떠오르더니, 부르르 떨리지 머냐! 내 어찌나 놀랐던지 뒤로 넘어져 자칫 허리를 다칠 뻔 하였느니!”
“잠시 만요……. 할머니 제가 살펴볼게요!”
도화는 구슬을 들어 올려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일단 봉인부는 뜯어서 협탁위에 두었다. 평범한 인간인 작약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도화의 깊은 눈동자는 정확히 대상을 짚어 보고 있었다. 핏빛이 감도는 요사스러운 구슬 속을 들여다보던 도화는 하마터먼 크게 고함을 지를 뻔 했다. 대신 소년은 헛바람을 집어 삼키며 신음성을 내질렀다.
“헉! 이럴 수가-!”
“왜? 무슨 일인 게야!”
“구슬안의 봉인 된 아귀가…….고통스럽게 몸부림 치고 있어요!”
“뭐야?!”
소년이 훔쳐 본 구슬안의 세상은, 더 없이 넓고 어두웠으며 또한 깊었다. 깊은 암흑속의 한 점처럼 찌그러진 아귀는 매우 고통스러운 듯 온 몸을 덜덜덜 떨어대며 표호를 내지르고 있었다. 구슬의 안쪽 표면에 얼굴을 들이 댄 아귀의 눈과 도화의 눈이 순간 마주쳤다. 아귀는 도화를 알아보고는 온 몸으로 발광하며 울부짖었다.
쿠오오오!
순간 핏빛의 구슬은 어둠의 기운을 광폭하게 내뿜으며, 스스로 꿈틀거리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헉! 안될 일! 정갈한 힘으로 마(魔)를 봉한다! 갈!”
파라락-
도화의 일갈과 함께 협탁위에 놓여있던 누런 봉인부는, 스스로 공중으로 떠올라 먹이를 입안으로 한입에 삼키듯, 구슬을 사방을 한번에 확 덮쳤다. 그리고 나지막이 읊조리는 도화의 법문과 함께, 단영의 피로 이루어진 부적의 붉은 글자들이 살이 있는 듯 꿈틀거리며 구슬의 휘감아 빙글 빙글 돌더니 이내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이전에는 한영이 단순히 정갈한 부적의 기운만으로 구슬을 봉인해 두었다면, 지금의 도화는 그 부적에 자신의 법력까지 담아 완벽하게 아귀의 봉인을 완성한 셈이다. 허공에서 봉인된 누런 종이 구슬은, 위를 향하고 있는 도화의 오른쪽 손바닥 위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구슬을 바라보며 도화는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는 말문을 열었다.
“방금은 제가 부적을 뜯어 봉인을 잠시 해제했기 때문이고요, 아까 말씀 하신 것처럼... 구슬이 부적의 봉인을 뚫고 스스로 허공을 떠오른다거나 요동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아귀 스스로의 힘으로는 말이죠.”
“메야? 이 녀석아! 그럼 내가 늙어 헛것을 보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작약이 대뜸 호통을 쳐대자 도화는 손사래를 내저으며 급히 말을 이었다. 도화의 설명을 들은 작약은 그제야 복잡하게 일그러진 표정을 한결 풀었다.
“아니요, 할머니~!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 하다는 말 이구요, 아마도 제 생각에 아귀를 이 구슬 안에 봉인해 둔자가, 멀리서 아귀를 조정하고자 하는 것 같아요.”
“아귀를 봉인한 자?”
“네에. 아마도 원하는 바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자,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서 일수도 있고요. 아무튼 더 깊이는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겠죠.”
“이 세상에 말조가 든 게야. 말조가……. 아귀를 봉안하다니……. 내가 너무 오래 산 게야... 마신의 힘을 빌려는 쓸지언정, 다른 차원의 존재를 직접 소환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적이 없다. 고금의 어느 누구라도 말이다. 더군다나 봉인이라니.... 이는 자유자재로 이놈들을 다룬다는 말이 아니냐!”
“제가 아는 법문으로는 이 봉인을 풀고자 해도 원하는 바대로 풀 수가 없어요. 아귀라면 하급 마물이긴 하지만, 제가 어머니께 배운 우주의 법리에 따라서도, 결코 이들은 인간계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에요. 해루 누나를 노리는 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수를 쓰는 자들 이라면 반드시 막아야 해요, 할머니!”
단호한 목소리로 딱 부러지게 의사를 표시하는 도화를 바라보는 작약의 심정은 복잡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손녀 ‘현’은 이미 4개월 전에 큰 천기의 뒤틀림과 함께 차원의 일부가 허물어져 이계의 존재들이 인간계에 출현하여 앞으로 큰 혼란이 이어질 것이라 했다. 현, 아니 발귀리 선인의 예언대로 벌써부터 그 징조가 작약의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엉클어지고 끊어진 인연의 실의 무게감만큼 이 땅위에 엄청난 피바람이 몰아닥칠 것이고, 그 중심에 도화가 서 있을 것이라 했다. 그러나 일행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혼란은 점점 더 커져만 갈 것이고, 하늘의 뜻이 어디에 닿을지는 알 수가 없지만, 마지막 책임은 눈앞에 서 있는 이 작은 소년의 어깨위에 얹어 질 것이라고 현은 예언했다.
작약은 천외봉에서 단영에게 들었던 4개월 전의 일을 회상했다. 모든 것이 뿌연 안개 같이 잡을 수 없는 이야기들 이었지만, 단 한 가지 확실한건 4개월 전에 천기가 크게 뒤틀린 시발점은 분명히
「시바」신 이라는 것이다.
‘이 녀석아! 이 모든 일의 원인 속에, 네 녀석이 그 한 가운데 서 있단 말이다!’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사랑스러운 도화를 바라보며, 작약은 차마 마지막 말을 성질대로 내지르지 못하고, 입안으로 삼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때마침 자리를 비우고 있던 한영과 흰둥이가 요란스럽게 투각거리며, 전각 안으로 들어왔다. 도화를 발견한 흰둥이는 반가운 마음에 힘껏 짖었다.
“멍!”
“어라? 왜 두 사람만 있어요?”
“응... 홍루 누나는 나만 여기 데려다 주고는, 급히 누루의 노모 전각으로 갔어.”
“아아. 해루를 보러 간 모양이구나?”
“그런 것 같아.”
“작약 어른은 왜 거기서 인상을 구기고 계세요? 화야~ 무슨 일 있었어? 어? 그 손에 든 누런 구슬은 머야?”
“아. 이건 그날 밤 누나가 봉인했다는 구슬.”
“머야? ...아닌데? 그게 부적이야? 부적이 어떻게 구슬이 될 수가 있어? 붉은 글씨들은?”
“끄응......!”
“아... 그러니까 그게, 할머니가.......”
작약은 말없이 돌아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고, 도화는 그간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한영에게 전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한영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펴졌다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 놈들을 잡아서 죽여 놔야 한다니까! 정말로!”
성질 급한 한영.
그렇지 않아도 그 일로 인한 울화증으로 가슴이 답답하던 터에, 도화의 이야기 까지 듣고 보니, 정말로 앉아 있지도 못하고 서있지도 못하는 좌불안석(坐不安席)이었다.
“너 혼자 애가타서 그리하면 무엇 할 것이냐! 정작 당사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조개처럼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으니.”
작약의 따끔한 일침에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순식간에 착 가라앉은 한영의 표정이 다시금 어두워졌다. 더군다나 아까 우연히 마주쳤던 비형랑의 능글능글 거리는 얼굴이 계속 머릿속을 어지럽혀 그녀의 마음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작약, 도화, 한영 흰둥이까지- 오랜만에 천외봉 식구들만이 함께 모인 오붓한 오후였지만, 각자의 고민으로 다들 한동안 표정이 어두웠다. 허나 시간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흘러,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저무는 저녁이 되었고, 솔원 한가운데 홍루의 전각위에도 휘영청 밝은 달이 두둥실 떠올랐다.
어둠의 아픔을 어루만지듯- 은은한 달빛은 홍루각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었다.
--------------------------------------------------------------------------------------오랜만에 인사드리지요?

다들 잘 지내셨어요? 끼어있던 연휴 덕분인지 이번주는 눈깜박할 사이 지나가 버리네요.
혹여 저처럼 감기 기운으로 고생하시고 있으신 분들이 계실지 걱정입니다.
제 글을 읽어 주시는 분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것 같아, 정말로 넉넉한 가을처럼 마음이 풍성해 지는 것이...너무나도 기쁘답니다.(^^)
자자,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되니, 저는 슬슬 다시 바빠지기 시작하겠네요~
울님들 다들 이번 남은 한주도 힘차게 보내시길 바라며,
파안의 가호가 늘 함께 하시길 기도드릴께요.
<감사드리는 제 마음으로 이번 회에서는 모든 리플에 꼬리를 달아드릴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