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사랑 (18장/ 사내 대장부! ) <실극화>

추림의 풍2005.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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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경태오빠 왔어!"

 

유진이 부르는 소리가 귀로 들려 왔지만 유미는 침대위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거실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마 아버지의 손님들이 몰려들어 술판이 벌어

진듯했다.

 

"언니! 일어나봐!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유진이 거칠게 이불을 걷어내며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십분동안 유미를 깨운 유진이었지

만 언니는 들은채도 하지 않고 있던 것이다.

 

"유미야 얼른 일어나라 경태 와서 기다린다."

오빠 유혁이 방으로 들어와 유진을 거들자 그제서야 유미는 꾸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부스스한 모습으로 눈을 비빈 유미가 잠시 멍하게 천장을 응시하고 있다가 기지개를 펴면

서 나른한 몸을 풀었다. 

 

"빨리 나가봐 밖에서 이십분이나 기다리고 있다. 뭘 잔뜩 사들고 왔더라. 지금 추워서 죽으

려고 할거다."

 

유혁이 외출했다 들어온 모양인지 깔끔한 옷차림과 잘 정돈된 머리 모습이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져녁 일곱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오늘이 며칠이야?"

 

유미가 하품을 마지막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거울앞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그렇게 쏘다니니까 이제 날자 개념도 없는거야? 오늘 목요일이야."

"목요일? 수요일이 아니고?"

 

머리를 빗으며 유미가 시큰둥하게 되물었다.

 

"미적거리지 말고 빨리 나가봐. 어쨌든 손님이잖아!"

 

유진이 뾰로퉁하게 말하며 방을 나가버렸다.

유미는 근 이틀을 연이어 자고 일어난 탓에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대충 세수만 하고 얼굴에 스킨을 바르른 후, 옷을 갈아입고 모자를 눌러썼다.

박경태! 지겨운 남자였다. 아버지와 같은 동향 사람의 자식이라는 연관성 때문에 집에서

어느정도 인정을 받고 있는 남자였지만 아마도 그 남자의 실체를 안다면 어버지나 어머니

나 기함하실 것이다.

 

주방 식탁에 둘러앉은 아버지와 몇몇 어른들이 술을 드시면서 왁자하게 이야기를 주고 받

고 있었다.

힐긋 그곳을 바라본 유미가 무심하게 일견하고 현관에 섰다.

 

"유미야!"

 

엄마가 유미를 부르며 잰 걸음으로 다가왔다.

난처한 표정을 지은 유미가 얼른 운동화를 신고 나가려 하자 어느새 다가오셨는지 엄마가

어깨를 당겼다.

 

"너 밥도 안먹고 또 어디를 나가려고? 이것이 아주 밤 도깨비가 되었어! 나가지마!"

 

어머니 최씨 여사는 무척이나 보수적이라서 엄격하고 강압적인 면이 많은 분이셨다.

하지만 정에 무척이나 약해서 눈물을 자주 흘리셨고 남편에겐 순종적인 여자였다.

 

"밖에 누가왔데. 엄마 모르고 있었어?"

"누가 와 오긴? 이것이 또 어디를 돌아치려고... 빨리 맙먹고 나랑 얘기좀 하자!"

 

"아버지가 좋아하는 사람 왔는데도?"

"아버지가? 누구?"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최여사는 유미가 장난치는것이 아님을 알고 관심을 보였다,

 

"몰라 그런 사람있어. 나도 나가기 싫으니까 날 제발 붙잡아줘."

 

유미가 현관문을 밀치고 나가며 그렇게 말하자 뒤에서 최여사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글쎄 누군줄 말해야......"

 

밖으로 나오자 어두운 추위에 뒤덥힌 주택가의 골목길이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라이트가 켜진 자동차를 발견한 유미는 그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소형 중고차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내렸는데 유미에겐 익숙한 얼굴이지만 절대 익숙하고 싶

지 않은 둥근 얼굴의 남자였다.

 

"이제 나왔어? 나 추워 죽는줄 알았다."

 

굵은 목소리가 유미의 귀를 자극하며 희미한 어둠속에서 그가 엄살을 떨었다.

하지만 결코 엄살이 아닌것을 유미는 곧 기억해냈다.

두달전인가 사고를 내고 차를 수리하지 않은 채 끌고 다녀 히터가 작동되지 않는다 했다.

육 칠년 지난 차를 곧 바꾼다고 말했지만 작년부터 들었던 말이라 차를 바꾸어야 바꾸었

나 하고 생각할 말이었다.

 

"언제 왔어?"

 

유미의 반응은 최소한의 예의만 드러나고 별 감정은 묻어있지 않았다.

 

"어디좀 가면 안될까?"

 

키가 훌쩍크고 비데한 몸을 지닌 박경태는 그리 잘 생긴 얼굴이 아니었다.

하지만 집안은 그런데로 괜찮은 편이었지만 그의 부모들은 지독한 수전노에 인정없는 사람

들로 알려졌다.

 

"아니. 나 손님 오기로 약속이 있어. 할 말 있으면 빨리 말해 들어가서 준비해야 하니까!"

 

유미의 시큰둥한 변명에 박경태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지고 입이 실룩거리며 떨림을 보였

다. 기분이 대번에 불쾌해짐을 드러낸 것이다. 

이 남자는 저렇게 자기 감정도 조절할 줄 모르고 인내도 배려도 모르는 사내였다.

 

"흥! 거짓말인거 다 알아. 들어가서 아버님을 뵙고 말할까? 청혼이야기도 있고."

 

아버지는 거의 독단적으로 이 남자를 사위로 삼겠다고 말하면서 다니셨다.

그의 아버님과 자신의 아버지는 전라도 목포로 동향 사람이었고 선후배 사이쯤 되는 사이

였다.

 

"누가 누구에게 청혼을 해? 뭘 착각하고 있네. 나 그만 들어갈테니까 이만 돌아가."

 

유미는 이 남자가 지겨웠다. 싫다고 말은 대놓고 하지 않았지만 이제 겨우 스므살인 자신에

게 결혼 어쩌구 하는 스믈네살의 청년은 눈치도 코치도 없어 보였다.

 

"나 밥 안먹었다. 어디가서 식사나 하자. 그렇게 쌀쌀맞게 굴 필요는 없잖아!"

"그만 가요. 전 밥 생각도 없고 약속이 있어서 그만."

 

유미가 박경태의 말을 무시하고 돌아섰다.

그때 박경태가 유미의 팔을 신경질적으로 잡아 당기며 그녀를 돌려 세웠다.

 

"악! 아파!"

 

갑작스런 힘의 충격에 통증을 느낀 유미가 짧게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고통스럽게 찡그렸

다.

 

"......!"

"흥! 내가 너안테 함부로 무시 당해도 좋은 사람은 아니야. 그렇게 예의가 없는것이 무슨 여

자라고... 여자답게 굴어라."

 

"이거 그만 놔요. 난 누구안테 여자이고 싶지도 않고 남자로 보이지도 않거든요. 다시는 찾

아오지 말아요."

 

화난 표정을 한 유미가 냉정히 잘라 말했다.

알게 된지 이년이 되었다. 그리 잘난 외모도 조리있는 말솜씨나 매너도 부족한 탓에 연애는

물론 로맨스의 가치도 모르고 있는 남자였다.

 

자신을 일방적으로 좋아하고 쫓아다닌것이 작년 무렵부터인데 그때부터 그는 유미가 스므

살이 되면 데려간다고 떠들고 다녔다.

있는것은 돈 밖에 없는 남자라는 말은 그가 가장 자주 하는 말 중에 하나였다.

 

"야! 내가 어디가 어떻다고 이렇게 무시하는데? 못배웠어? 지지리 궁상맞게 가난해? 능력

없어? 아니잖아? 니가 잘나서 내가 이러는 줄 알아? 웃겨 정말!"

 

이 남자의 더럽고 추한 면은 이런 것이었다.

자신의 인감됨을 돌아보지는 않고 현재 지닌 것만으로 모든것을 평가하고 점수 매기려 하

는 저 졸렬함!

 

"말해드려요? 없는것을 말해볼까요?"

 

유미가 도전적으로 쏘아붙혔다.

이렇게 그를 냉정하게 대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언젠가 자신을 강제로 범하려 한 후부터는

행동을 달리 할 수밖에 없었다.

 

"말해봐. 내가 뭐가 부족한지?"

 

자신만만한 얼굴로 박경태가 거만하게 굴었다.

그런 그가 정말 얄밉고 지겨웠다. 그의 얼굴을 보다가 한대 후려 갈겼으면 하는 충동이 들

었다. 자신의 결점을 장점으로 착각하는 비열한 사내!

 

"첫째. 여자를 대하는 태도가 부족해요. 아니 사람을 대하는 누구의 행동은 기본적으로 소

양을 갖추지도 인격적으로 준비되어 있지도 않아요. 왜 사람을 대할 때 나라는 개념이 우선

되어야 하죠? 상대를 먼저 알아가고 나중에 나를 알려도 되는데 굳이 그렇게 하려는 것은

너무 이기적이지 않아요?"

 

유미는 절대 그를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다. 유미의 성격은 그랬다. 마음에 들지 않거나 인간

적으로 부족하다 싶으면 호칭마저 제외 시켜버리는 냉정한 성품이 있었다.

 

"흥! 내가 어때서? 인격? 웃기는군. 내가 뭘 인격이 부족한데? 난 배울만큼 배운 사람이야.

날 가르치려 들지 말라구."

 

절대 자신의 단점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그의 속좁은 면은 더욱 더 그를 싫어하게 하는 면

임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둘째. 배려심도 없고 인내심도 없어요. 여자는 남자의 외모와 능력이전에 감정에 의존한

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누구를 전 존경하지 않아요. 사람과 사람 사이에 격식이기

전에 먼저 우선 되어야 할 것이 상대를 우선하는 배려고 양보예요.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

는 지혜라고 하는데 많이 배운 누군 그것도 모르는군요."

 

이 말은 두번째 만남에서 추림에게 들었던 것이었다.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이자리에서 사용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기다리고 먼저 주면 나중에 아주 많은 것을 얻을수 있다는 것을 추림은 스스로 알았다고 했

다. 그런것을 알아가는게 지혜가 아닌가 싶다고 했었다.

 

"뭐라......"

 

"셋째! 여자를 힘으로 억합하려 하는 남자는 이미 남자로서나 사람으로서 여자에게 인정

받을 수 없어요. 여자가 남자와 같이 있다고해서 모든것을 허용했다고 믿는 착각과 소유

하려 드는 졸열함이 얼마나 역겹게 느껴지는지 어떤 남자들은 평생을 살아도 깨닫지 못하

겠지만...넷째! 상대를 이해하고 나를 이해시켜도 될것을 자신을 먼저 이해 시키려 드는 강

제성! 이건 인간 사회에서 가장 하지 말아야 할 덕목인데, 남자들은 치사하게 그것을 여자

에게 주입시키려 애쓰죠. 자기과신, 우월성!   

다섯째! 결정적으로 난 누가 정말 싫거든요? 더 말해 보라면 백가지 정도는 더 말할 수 있

는데 듣고 싶으면 제가 글로 대신하죠."

 

박경태가 반박할 기회도 주지않고 빠르게 말해버린 유미는 냉정하게 말을 이어갔다.

마지막 말을 한 유미의 얼굴은 통쾌한듯 보였다.

그에게 당한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고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드는 유미였다.

 

"웃기는군! 니가 지금 말한것들을 다 지닌 남자가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기다려주고 인내

심을 발휘하고... 뭐 부처쯤 되겠군. 어디서 주워 들은건 많아 가지고. 세상 남자들이 니가

말한데로 다 그러면 이놈의 세상에서 싸움질이나 폭력이 있을리가 없지 않그래?"

 

마치 절대 지닐수 없는 가치를 둘러댄 유미의 말이 허구처럼 들렸는지 박경태의 얼굴에 비

웃음이 가득했다. 유미가 절대 저 남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부분이 저

것 이었다. 세상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해석하고 사고하려는 성품.

 

추위에 몸을 잔뜩 어깨를 움추린 유미는 박경태가 자신을 비웃음으로, 승리자의 얼굴로 거

만하게 응시하자 문득 웃음이 번졌다.

 

있었다! 그가 말한 그런 남자가 떠올랐다.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인간적이고 당당한

사람, 인간적인 냄새가 물씬 느껴지는 남자가 떠올랐다.

가슴이 뭉클했다. 그를 떠올리자 이 박경태를 어쩌면 떼어놓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대단한 착각을 하고 계신듯한데요? 그런 남자가 없다고 누가 그래요? 내 주위에만도

그런 남자가 있는데! 그는 누구처럼 거칠지도 뻔뻔하지도 매너없지도 않고 부드럽고 당당

하고 떳떳하며 인내심이 많고 먼저 양보할 줄 아는 남자지요."

 

유미가 비아냥 섞인 음성으로 말하자 박경태는 코웃음을 치며 여전히 거들먹 거렸다.

 

"있다고 치지 뭐. 그 남자가 널 좋아할까? 어디 지나가는 말로 듣고 한번쯤 몰래 보거나 우

연히 만나는 보았겠지? 안그래?"

 

당연히 그렇게 믿을 것이다. 자신의 개념안에 자신을 너무 잘알고 세상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 자신의 그것과 다르지 않기에 그가 알고 있는 유미를 무시하고 있었다.

 

"아니요 그는 내가 아주 잘아는 사람이예요. 나이도 젊고 아주 밝아요. 누구와는 정 반대

죠." 

"흥. 아주 멍청한가보군. 무능력하고! 대개 그런 놈들이 천성은 밝고 낙천적인것 처럼 꾸미

고 다니지. 그마저도 없으면 인간 대접도 못받는걸 알기 때문이지. 하지만 뒤에선 온갖 음

흉한 일은 다 벌이면서 다니고 사고치면 대부분은 더럽고 쓰레기같은 것만 골라서 치곤 하

지! 니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는 모양이군!"

 

박경태의 말에 유미는 추위도 잊은 채 입술을 잘근 깨물고 눈에 힘을 주었다.

그가 추림을 도매금으로 싸잡아 스레기 취급해 버리자 반발심이 들었다.

그는 그런 남자가 아니다. 아직 사내라는 묵직한 말을 들을 나이는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그는 당당하고 강한 남자였다. 자신의 일에 후회해도 미련을 두지 않는 남자고 상대를 업

신 여기거나 고통스럽게 피해주는 남자가 아니었다.

 

"할 말 없네요. 그를 만나본다면 단번에 그 기세가 사그라 질 것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

만... 관둬요. 나 이제 들어가겠어요. 잘가요."

 

유미는 이 유치한 말 장난을 그만 하고 싶어서 박경태를 쳐다도 안보고 몸을 돌렸다.

 

"흥! 꼬리를 말아? 유치한건 내 말장난이 아니고 네가 흉내낸 성자같은 그 말이다. 당당하

고 떳떳하고 인내심 많고 배려있고 매너있으며 사려까지 깊은 잘나고 멋진 놈은 어느나라

배우냐? 결국 싫다고 말하면 되는것을 사람을 가지고 놀아? 이거야말로 유치하군!"

 

끈덕지고 속좁은 인간!

저런 성격을 누가 좋아할까?! 여자는 커녕 남자 조차도 학을 뗄 성격이다. 어째서 아버지는

저런 인간을 잘 보고 그 집안에 고개를 숙이는지 생각하면 열불이 치솟았다.

 

울컥하고 속에서 무언가 치민 유미가 몸을 돌려 세우고 박경태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본다고 거짓말이 사실이 되는건 아니다. 가자 밥이나 먹고 술이나 한잔 하면서 생

각해보자. 니가 지닌 어리석음이 무엇인지 내가 알게 해주마."

 

어째서 이 인간은 매사에 이렇게 독선적이고 자기 멋대로일까? 모든것을 자신의 주관으로

해석하려 들고 개념하에 두어 움직이려 드는 사고방식이 구역질 날 정도였다.

 

"좋아요. 그를 만나게 해 드리죠! 어째서 내가 누구를 싫어하고 비교하는지... 그를 만나서 

직접 확인하세요. 됐어요?"

 

신경질적으로 그렇게 말한 유미는 곧 후회했다. 너무 감정이 부풀어 그만 실수하고 만 것

이다. 멋대로 추림을 그와 만나게 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순간적인 자존심 때문에 유미는

그 말을 취소하거나 물릴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어쩌면 추림은 이 마저도 용서하고 이해

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호오... 그래? 좋아 기꺼이 만나주지! 대신 하나만 약속해라. 그가 만약 니가 말한데로 그

런 놈이 아니고 그저 그런 남자라면 이제주터 넌 내 여자다. 약속할래? 아니 우리 내기할까

? 니가 믿는 그 놈의 내적인 성격과 외적인 당당함이 얼마나 웃긴것인지 내가 보여 줄테니,

너의 믿음과 나의 생각을 내기할까? 왜? 자신없어?"

 

추위에 몸을 덜면서도 끝까지 유미를 공격해대는 박경태는 승리자의 얼굴이었다.

그의 말에 당황한 유미는 어찌해야 되는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감히 자신이 사람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듯한 상황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몸이 부르르 떨리고 더욱 웅크려졌다. 비단 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싫다고 안된다고 말하면 자신이 우습게 되고 바보는 물론 앞으로 저 꼴보기 싫은 인간이 끝

임없이 찾아와 빈정 될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역겨운 느낌이었다.

더구나 추림을 그가 생각하는 사람으로 남들고 싶지 않은 충동적 반발심에 유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약속은 내가 정하지요. 기다리세요. 그에게 연락하고 시간을 짜 맞추어야 하니까."

"아니. 약속은 내가 정하지. 날 떼어놓고 그놈과 연극 연습할 시간을 주고 싶지 않거든. 뭐

해봤자 애새끼들 놀이 정도겠지만 말이야. 이번주는 구정이니 안되겠고? 구정이 끝나는 다

음주 주말에 보자. 너도 양심이 있다면 당당해라. 그와 약속만 하고 만나는 거다. 치사하게 

모의하지 말고. 그래도 난 모르겠지만! 너희들은 물론 할건 다하겠지?"

 

하라고 하는건지 하지 말라고 하는건지... 치사하고 추잡한 인간이었다.

 

'좋아 네놈의 콧대를 꺽어 주겠어! 추림씨라면... 넌 후회하게 될거야!'

 

속으로 이미 마음을 굳힌 유미는 이렇게 된 것 막 가자는 심정이 되었다.

지난날 박경태에게 당할뻔 했던 기억들이 떠올라 화가 치밀었다. 그가 자신을 강제로 범하

려는 과정에서 폭행을 당해 이주동안을 꼼짝 못하고 앓아 누웠던 적이 있었다.

강하게 저항하고 거칠게 맞서 위기를 모면했지만 그는 계속 찾아왔고 아버지가 진 빛을 빌

미로 자신의 행동에 제약을 걸었다.

 

"즉흥적으로 만나는 것으로 하겠어요! 약속만 잡고 우연을 가장하면 되겠어요? 흥. 누가 치

사하고 비겁한지 두고봐요! 그만 가겠어요. 나중에 보지요."

 

냉정하게 말한 유미가 더이상 가치없는 시간을 허비하는게 싫어서 몸을 돌리고 발걸음을

빠르게 놀려 집으로 향했다.

 

"야! 너 각오하는게 좋아! 그놈 아주 묵사발을 내 놓을 거니까!"

 

뒤에서 박경태의 듣기싫은 목소리가 울리며 유미의 신경을 자극했다. 돌아서서 한마디 하

려다가 억지로 참고 곧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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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 왜그래? 그렇게 냉정하게 대해도 되는거냐? 그렇게 자신있어?"

 

방으로 들어오자 마자 오빠 유혁이 쫒아들어와서 한말이었다.

다 듣고 있었는지 상황 파악을 빠르게 뒤섞어 간단하게 핵심을 찔러댔다.

 

"뭘? 그인간을 그렇게 대하면 안돼? 오빠도 같은 남자라고 편드는거야?"

 

이분법적인 반응. 남자는 결국 남자로서의 범위 내에서 사고하고 여자또한 마찬가지였다.

유미가 가장 싫어하고 추잡하게 여기는 행태가 남자와 여자의 편 가르기식 사고방식이었

다.

 

"난 네 오빠다. 나도 그 자식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아. 하지만 말을 대충 들어보니 너...

누가 있어? 너 남자친구 생겼냐?"

 

오빠 유혁은 따듯하고 활달한 남자였다. 성격이 다혈절적인 면이 있지만 그건 남자다운 면

으로 보아줘도 무방할 만큼은 되었다.

얼굴이 갸름하게 잘 생기고 음악을 좋아했다. 성격도 원만하고 강한 편이지만 단 하나 우유

부단한 점이 가끔 초라하게 만들곤 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오빠로서는 최선을 다해주는 남자이고 매우 선해서 주위에 사람들이 많은 편이었

다. 특히나 여자들이 그를 무척이나 잘 따랐는데 유미가 볼때는 바람끼가 다분해 보였다.   

 

"남자친구? 글쎄......?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침대에 몸을 반쯤 누인채로 유미는 추림을 떠올리다가 그렇게 대답했다.

뭐하나 확실한 것이 없으니 일단 최소한의 연관성만을 밝혀 놓은 것이다.

 

"대단한 놈인거 같네? 천하에 유미가 좋아하는 남자가 다 있고!"

 

정말 놀랐는지 유혁이 강한 호기심을 보였다.

 

"놈이라니? 누구에게 지금 놈이라는거야? 한번만 더 그래봐!"

"어쭈? 이거 정말 심각하잖아? 요 꼬맹이가! 누구야 한번 들어나 볼까! 잠깐만 너 나랑 맥주

나 한잔하자."

 

유혁은 그리 꽉 막힌 남자가 아니다. 오빠로서도 그렇지만 사내로서도 그는 호감을 살만한

점이 많은 남자였다.

 

술을 좋아해 유미와 자주 대화를 나누면서 즐기기도 했는데 세명의 여동생 중 유미와는 가

장 잘 통했다.

 

금새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오는 유혁의 뒤로 언니 유화와 동생 유진이 따라들어왔다.

각기 먹을것을 들고 들어왔는데 저녁은 그것으로 떼워도 될 것 같은 양이었다.

 

"자. 이제 말해볼래?"

 

유혁이 맥주 한잔을 유미에게 건네고 진지한 척 하면서 물었다.

입술에 하얀 거품을 묻히고 혀로 핧던 유미가 그를 바라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말해? 오빠 지금 나랑 열고개 하자는거야?"

"어쭈구리? 까분다. 난 오빠로서 너의 사생활 일부에 기어들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안그

래 막내 꼬맹이야?"

 

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유혁이 장난치자 유진이 기분좋게 웃었다.

 

"맞아. 당연하지. 언니 빨리 말해봐. 착한 동생도 들어줄께."

"어쩐지 요즘 남자안테 전화가 자주 온다했어."

 

유화까지 나서자 그들은 아주 작당을 한것처럼 둔갑해 버렸다.

 

"그러니까 도대체 뭘 말하라는거야? 셋 다 바보아니야?"

 

"......?"

"......!"

"......?!"

 

졸지에 바보가 된 유혁등이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말로는유미에게 당해내지 못하는 것

이다.

 

"오빠 나 생리하는게 궁금해? 그거 이야기해줘?"

"요게? 니 그게 내가 왜 궁금해? 장난하지 말고 남자친구... 아니 만나기로 한 그놈... 그 사

람 이야기 해달라고!"

 

"아! 그 이야기였어? 그런데 그걸 왜 오빠에게 해줘야 하는데?"

"헉! 말이 그렇게 되나? 그럼 여기 온 우린 뭐야? 그러지 말고 심심풀이나 하자."

 

유혁이 뚱하게 반응하다가 졸라댔다. 남자들을 자주 만나는건 알지만 동생 유미가 남자를

좋아하거나 마음에 든다고 말한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동생에게 변화가 일어나듯 보여 호

기심이 생긴것에 불과했지만 조금은 관심이 있었다.

 

"언니 말해주라 응? 멋있어? 키커? 잘생겼어? 뭐하는 사람이야?"

 

고등학생인 유진이 나이답게 관심있는 이성 부분에 대해 와르르 질문을 쏟아냈다.

그런 유진을 바라보던 유미가 살포시 미소를 머금었다. 갑자기 추림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졌다. 그 정도면 할 말은 충분히 되는 자격이 주어진 것이다.

 

"응. 멋있다. 언니. 수연이 알지?"

"수연? 아 김수연? 그 당차고 이쁘장한 얘? 잘알지?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잖아. 후배였지.

지금 연락해?"

 

김수연을 먼저 알게 된것은 유미보다 언니인 유화였다. 우연히 알게 되어 알음을 통해 유

미까지 알게된 친구였다.

 

"이쁘장하긴...응. 얼마전에 만났어. 잘 지내고 있나봐. 사정이 생겨서 대학 진학은 미루었

데."

"요것들이? 수연인 나중이고! 왜 삼천포로 빠져?"

 

유혁이 꽥하고 소리를 질렀다.

 

"급하긴. 가만이 있어봐. 듣기 싫어?"

"......?"

 

유혁이 금새 입을 다물고 맥주를 홀짝거렸다.

 

"수연이 고향 동창인데... 지난 연말에 만났어. 개봉동에 살아. 우연히 같이오게 되었는데,

그 친구의 누나가 카페를 하는 자리에서 수연의 친구들을 여러명 만나고 나서 알게 되었다.

처음엔 관심도 주지 않고 날 바라보지도 않길래 뭐 저런놈이 다 있나 싶었어." 

"뭐야? 그럼 강원도 촌놈이잖아? 쿡쿡... 순진한 남자를 딱 찍었구만."

 

유혁도 수연을 알고 있어서 그렇게 말하고는 킥킥거리면서 웃었다.

 

"오빠는 전라도 갱갱이거든? 언제 오빠가 서울 남자가 되었다고... 옷은 갈아입기 마련이지

안그래?"

 

유혁의 말을 일축한 유미가 사과를 집어 버석거리며 깨물었다.

 

"그래서? 그애가 나보다 멋져? 싸움 잘해?"

"오빠는 상대도 안될걸? 수연이하고 친구들에게 그 친구 이야기듣고 나 울기까지 했다."

 

"맙소사! 울었어? 천하에 유미가 눈물을 흘려?"

"진짜야 언니?"

 

유화와 유진이 놀라서 한마디씩 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유미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 여자

인지... 그런것을 생각하니 믿기지가 않는 것이다.

 

"사실이야. 수연이하고 만나서 말하다가... 오빠. 세상에 중학생 짜리가 수백명을 동원한

데모를 일으키고 그 주범이 되어서 죄를 다 감당하는게 오빠라면 가능할 것 같아?

고등학생이 친구들을 도와주고 대신 학교를 그만두는게 가능할것 같아? 친구의 불행을 자

신의 불행으로 여기고 기꺼이 자신을 어려운 시련속에 몸을 던져 넣는게 오빠라면 가능 할

것 같아?"

 

유미가 멀뚱이 앉아 이야기를 듣고있던 유혁을 불러가며 묻자 유혁이 뭔소리냐는 얼굴을

하고 바라보았다.

 

"오빠는 그렇게 할 수 있냐고?"

 

같은 남자로서 냉정하게 객관적인 입장을 비교하려는 것인데 유혁은 아직 선뜻 이해를 못

하는 눈치였다.

 

"미쳤어? 중학생이 그랬다면 그 놈 되게 까진 새끼고 고등학교때 그런 일을 했다면 그놈...

물건이다! 그리고 나중의 말은... 그거 진짜 사내새낀데? 야! 유미야? 걔가 그런 놈이란 말

이야?"

 

유혁이 유미의 말을 알아듣고 빠르게 말하다가 유미를 놀라 바라보았다.

유미가 어딘지 처연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 친구야. 한두명이 아니고 만나는 사람마다 다 그래. 그 친구들 몇명 만나 보았거

든. 대단해. 엄청나게 강한 남자래 내적으로. 글쎄. 고등학교때 친구 셋이 학교에서 보관하

던 학비 수백만원을 털고 걸려서 도망치다가 그 친구에게 피신했는데 그 도둑질을 대신 덮

어쓰고 자퇴했데."

 

"그거 멍청한 짓이잖아!"

"그래 맞다. 그건 바보나 할 짓이다."

 

유화와 유진이 한마디씩 하며 부정하고 나섰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래서 물어 봤거든. 그런데 뭐라고 한 줄 알아?"

"그야 모르지? 그러니까 그냥 말해! 말 끊지 말고."

 

유혁이 조금 진지한 얼굴로 유미의 말에 반응하며 재촉했다.

 

"셋이 병신 되는것 보다 한명이 병신 되는게 낫다고 생각했다는거야. 그 절도 사건의 진범

을 학교에서 다 알고 조치를  취하려 했는데 그 친구가 교장실로 가서 담판을 지었대. 자신

의 학년이 졸업하는 날 까지 큰 사고 안치기로 책임 질 테니까 세명 대신 자신이 학교를 자

퇴하겠다고 했대. 그 친구가 워낙 대단했나봐. 중학교 때부터 그 친구를 선생들이 많이 어

려워하고 꺼려했나나봐. 그래서 그 기회에 그 친구를 몰아내기로 했다고 그 친구들이 그러

는데 난 그것을 믿어. 중학교때 그 친구가 부당한 일로 체벌 받은 친한 동문의 일로 학교에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큰 일을 저질렀을 때, 엄청난 폭력 사건이 터졌는데 경찰이고 선생

이고 할 것 없이 엄청 당했다고 하더라구. 그 친구의 사촌 형님이 알아주는 주먹이래.

강원일보에 큰 기사가 났다고 하는데... 오래전 일이지 뭐."

 

"그 새끼 그거 진짜 물건이네? 꼴통 기질도 다분하고! 햐 정말 대단한 놈이다! 그런 친구를

니가? 그런거야?"

"되게 멋지다. 잘생겼어? 여자 친구들 많겠다 그치?"

"수연인 좋은 친구를 뒀네. 그런데 아깝다! 그렇게 학교를 그만두었으면... 지금은?"

 

"그 친구가 그냥 좋아. 항상 웃어주고 대범하게 굴거든. 여러명의 친구들이 있는데 어찌나

어른스럽고 크게 보이던지... 잘 생겼어. 큰 미남은 아닌데 눈이 매우 강한 빛을 띠고 웃음

이 굉장히 매력적이야. 지금 일해. 아주 열심히 해. 회시에서 인정 받나봐. 자신의 일에 만

족해 하고 늘 낙척적인 사고를 해. 일요일날 만났다."

 

"어라? 언니 그래서 안 들어온거야?"

"아니 너? 같이 잤어?"

 

유진이 말하고 나자마자 유혁이 험해진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유미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웃었다. 당당한 것이다.

 

"응. 같이 잤어."

 

"맙소사! 너어?"

"......?"

 

할말을 잃어 버렸는지 유화가 한 소리하고 유진은 침묵했고 유혁은 얼굴빛을 심각하게 굳

혔다.

 

"사람들은 왜 남녀가 같이 잤다고하면 색안경을 끼는거지? 그 친구를 만나려고 내가 죽자

고 기다렸다가 결국 만나서 술 한잔 마시게 되었어. 그러다가 내가 너무 취해서 화장실에

서 그만... 취해 잠들었나봐. 아니 그랬어. 아주 잠깐.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나니까 내가

그 친구 등에 업혀 있더라고. 날 자신의 코트로 덥어주고 업은채 걸어가고 있더라구."  

 

"그래서 잔거야?"

"아무일 없었지?"

 

유화와 유혁이 동시에 물어왔다. 유미는 이제 그 이야기가 재미가 있어서 웃음을 지우지

못하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 너무 좋았어. 초등학교 사학년 때인가 아빠가 업어주고 그 뒤로 누군가에게 업혀보지

못했는데... 아주 조심스럽게 걸으면서 혼자 노래도 부르고 말하고 그러더라구. 난 처음에

그게 꿈구는 것인줄 알았는데... 정말 꿈같았어."

 

"좋았겠다... 되게 낭만적이다."

 

유진이 부러운지 두 손을 마주 모으고 눈을 빛냈다.

유화도 뭔가 떠올리는지 눈빛이 반짝거렸다. 유혁은 생각한 것 보다 심각한 일이 아닌것을

직감한 눈치였다. 만약 무슨 일이 있었다면 동생이 저렇게 자연스러운 얼굴로 이야기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마음이 편해졌다.

 

"날 그 친구가 집으로 업고갔는데, 이십분을 넘게 그런것 같아. 되게 무거웠을 텐데... 언니

남자가 여자의 발을 주물러 주고 그러는게 어떤 뜻이야?"

 

말하다 말고 유미가 유화에게 질문을 던지자 유화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무언가 생

각하는 듯했다.

 

"임마. 여자의 발은 치부야. 함부로 남자에게 드러내는 것은 그 상대를 인정하거나 마음속

에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의미다. 반대로 남자가 여자의 발을 주물러 준다는 것은... 발은

인체에서 가장 더러운 곳과 가장 가까운 곳이고 노동력이 많은 곳이야. 한 마디로 불결하

고 꺼려지는 곳이야. 남자가 여자의 발을 주물러 주는 경우는 딱 두가지다!

한가지는 병과 관련된 상황이므로 그것은 제외하고 나머지 하나다 그럼."

 

유혁이 끼어들어 설명하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유미가 얼른 물었다.

 

"그런 놈이 있다면 우선 그놈은 엄청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다. 여자의 발을 주물러 피로를

덜어주고 근육을 풀어주는 것은 엄청난 고도의 기술인데... 하여간 그런놈은 성격이 세심

하고 속이 매우 깊다고 볼 수 있다. 자신보다 여자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그렇게까지 깊

게 표현 할 정도의 남자는 드물다. 그리 청결하지 못한 타인의 발을 주물러 주는 남자는 백

프로 그 여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중간 중간에 의문을 달며 머뭇거린 유혁이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아마 여자를 유혹

하는 그런 기술이라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자 모두의 눈이 유미에게 쏠렸다. 그 친구가 발을 주물렀냐는 물음을 담은 눈빛으로.

 

"그랬구나......! 그 친구가 내 발을 한동안 주물러 주었어. 내가 자는줄 알았나봐. 그러지 않

아도 발이 굉장히 아프고 단단했는데, 조심스럽게 양말을 벗기고 아주 시원하고 천천히 그

렇게 해 주었어. 그리고... 잘자하고 속삭여 주는데... 오빠도 그래?"

 

당시를 다시 떠올리며 말하던 유미가 잠자코 있던 휴혁을 바라보며 물었다.

 

"나? 말해주리? 미쳤니? 난 그렇게 안해! 못한다고 봐야하나? 하여간 그 친구 참 난놈인것

같다. 같은 남자면서 조금 질투나려하네. 멋있는 놈이다. 틀림없다. 정말 흔치않은 사내구

나. 좋은 친구인거 같으니까 자주 만나봐라. 아마 다른면도 있을 것이고 니가 생각한 것과

는 또 다를지도 모른다. 너무 집착하지는 말고."  

 

유혁은 유미와 여섯살이나 차이가 난다. 오빠로서 충분히 충고할 나이이고 더 어른인 셈이

다. 유혁의 세상 경험도 그리 적은것이 아니어서 사람을 판단하고 분석할 줄은 알았다.

유미의 말을 통해 들은 바대로라면 흔히 말하는 남자들 세계에서 사내대장부로 불려도 손

색이 없을 친구였다. 하지만 그것은 객관적일 수 없었다. 그를 보고 판단한 것은 유미지 그

자신이 아닌 것이다. 마지막의 충고는 그래서 필요했다.

 

"난 누구앞에서 울어본적도 별루 없고 힘든 내색도 한적이 없는데, 그 친구앞에 서면 이상

게 내 모든것이 변하는 느낌이 들어. 처음 개인적으로 만나서 내가 그 친구 앞에서 한시간

을 넘게 울었다면 믿을런지 모르겠어 여러분?"

 

"......?"

"아주 푹 빠졌구나!"

 

"아니 푹은 아니고 그냥 달라. 모르겠어. 그 친구는 늘 변하지 않을거 같거든. 뭐든 다 줄 것

같고 이해해주고 용서해줄 것 같거든. 내가 먼저 남자품에 기대보고 얼굴을 바라본적이 처

음인것은 확실해."

 

"뭐야? 그럼 안겨봤다는 거야?"

"너무해 언니! 몰라!"

 

"아니 그런게 아니라. 그 친구가 날 방에 눕혀 놓고 다른곳에서 혼자 술마시다가 잠들었어.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편하게 느껴지던지 내가 슬쩍 그 친구 품을 도둑질 했다. 히히."

 

즐거운지 유미가 때아닌 말 자랑을 늘어 놓으며 오빠와 언니 동생과 오랜만에 정겨운 시

간을 보내고 있었다. 예전에 자주 이랬었지만 언젠가부터 삭막하고 답답하기만 하게 느껴

진 집이었다. 참 오랜만에 정겨운 기분이 든 유미의 마음도 그만큼 즐겁고 푸근하게 느껴

졌다. 당분간 집 밖으로 나가지 말자는 다짐을 하면서 유미는 이런 시간이 오래도록 지속

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야 유미! 언제 그 놈 얼굴 한번 보자! 얼마나 잘났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오빠! 놈이라고 하지 말라고 했지?!"

 

"어? 그래? 그런 그 새끼 얼굴 한번 보자!"

"뭐야? 정말 화낸다!"

 

유미와 유혁의 작은 실랑이가 집안을 오랜만에 정겹게 만들고 있는 밤이었다.

                                                                                                          ( 19장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