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 연휴가 끝나고 새해를 보낸 핑계를 대고 남영기업 사원들이 연 이틀에 걸쳐 음주가무 를 별였다. 의외로 남영기업의 게으른 왕이라 불리는 박사장도 참석했는데 사장인지 아닌지 존재감마 저 희미한 분이어서 술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끌려 다녔다. 이틀 뒤 사장이 병에 걸려 누웠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만나면 키득거렸다. 한동안 남영기업에서 박사장을 보기는 힘들것 이라는게 대세였다. 주인된 이가 남영기업 실무에서 철저하게 봉세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독선적이고 넘치는 카리스마를 주체하지 못하는 사장의 파워가 오히려 해가 되고 있어서였다. 그 한가운데는 친동생 박도형 부장이 있었다. 구정 연휴가 끝나고 치룬 시무식과 함께 이과장은 그와 부장자리에 올랐다. 조용한 암투가 벌어지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상관하는 사람은 채 열명도 되지 않았고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목요일부터 남영기업의 대대적인 기계수리가 시작되었다. 덕분에 한가해진 사람들은 여유있게 출근해서 일찍 퇴근하는 기쁨을 누렸다. 입술이 부르트고 눈이 붉게 충열된 추림은 최근들어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잠을 자도 두어시간이 지나면 눈이 떠지고 더이상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친 몸으로 일주일을 보내고 주말이 되자 추림은 또다시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오랜만에 이대준과 몇몇 사람들하고 사우나를 다녀온 추림은 한결 밝아진 기분이었다. 오후 네시가 되아가고 있었다. 집에서 이곳 저곳에 전화를 하고 짜투리 시간을 미뤄두었던 일을 해결하며 보냈다. 오후 다섯시가 되자 추림은 집을 나설 준비를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미국은 수십년만에 내린 폭설로 대통령의 하야설까지 나돌고 있었고 국내도 이상 기후가 연이어 이어지고 있었다. 제법 많은 양의 비였다. 겨울비는 올 겨울 유난히 잦게 내리고 있었다. 그덕에 고통받는 이들은 정부의 각 부처와 서민들이었다. 우산을 써야 하나를 생각하다가 그대로 나가기로 했다. 겨울에 우산을 쓰고 다니는것도 이상할 것이다. 택시에 몸을 싣고 화곡동으로 향했다. 이십분도 안되어서 약속 장소에 도착한 추림은 시간이 약속한 시간보다 삼십분이나 일찍 도착하게 되자 너무 서두른것을 후회했다. 화곡동 588번 버스 종점. 수많은 버스들이 주차되어 있다가 나가기를 반복하는 광경을 지 켜보던 추림은 레스토랑 풍차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레스토랑 풍차가 오늘의 약속 장소였는데 추림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종점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어 찾을 필요도 없었다. 건물 정면에 거대한 풍차 모형이 달린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건물 이층에 위치한 풍차안으로 들어갔다. 석유난로를 피우고 있는지 기름 특유의 냄새가 코를 살짝 자극해왔다. 가게 안을 두리번 거려 적당한 자리를 찾은 추림은 좌측 창가가 비어있어 그곳으로 향했다. "맥주 두병하고 땅콩좀 주세요." 비틀즈의 노래가 경쾌하게 흘러 나오는 가게 안은 아늑하고 조용했다. 손님들이 꽤 있었지만 그리 소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기운이 나지 않았다. 유미를 만난다면 이런 기분일리가 없었다. 들뜨고 설레여야 정상이었다. 아무래도 최근 기분이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자꾸만 지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음악이 마이클 잭슨의 앨범으로 바뀌었는지 연이어 그의 노래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시간을 기다리며 맥주 두병을 거의 비워내고 있었다. 유미를 만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았지만 답이 없었다. 그냥 만나서 식사나하고 술이나 마시며 보내는것은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좀 더 세련되고 진보적인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것이 무엇일까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추림으로서도 딱히 달리 할 것이 없었다. 일단 그녀를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 그것만이 우선 필요할듯 했고 부담은 되기 싫었다. "저... 혹시 누굴 기다리시는 것 아닙니까?" 한참 깊은 생각에 빠져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추림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키가 크고 비데한 몸을 지닌 둥근 얼굴의 남자가 자신을 바라 보며 어색하게 웃으며 서있었다. "그런데요? 누구?" "죄송한데 기다리는 사람이 여자고 혹시 성이 유씨 아닌가요?" 추림은 속으로 긴장감을 느꼈다. 그리고 웬지 이 비데한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속물처럼 느껴지고 정떨어지게 보였다. 유미에게 무슨일이 생긴 것일까! 혹 이 남자가 그녀의 소식을 가지고 온 것일까? "그렇습니다만 누구시죠? 어떻게 그걸 알고 계시죠?" 사내의 조심스런 모습에 일단 추림은 수순을 밟고 사유를 알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아 맞군요! 전 박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가 응하지도 않은 악수를 청하려 손을 내밀었다. 기분이 어떨떨해진 추림은 얼결에 손을 내밀어 그의 악수를 받아주었다. 뻔뻔한건지 아니면 무지한건지 박이라는 사내는 권하지도 않은 자리에 멋대로 앉으며 그리 보기좋지 않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 "아 전 유미와 잘 아는 사람입니다. 약혼자라고 할 수도 있고... 뭐 그렇습니다." "그런데요? 제가 유미씨를 만나러 온것을 어찌 아셨는지는 별로 물어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만 당연히 밝혀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까?" 약혼자? 웃긴 말이다. 대개 이런식으로 나타나 저런식으로 말하는 자들은 허풍이 심하거나 물욕이 강한 자들이다. "이런! 사실은 오늘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유미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전혀요. 그런데 유미씨와 여기서 동시에 약속이 있던 겁니까?" "그렇지요. 바로 그겁니다! 유미가 말하지 않은 모양이군요. 녀석이 미리 언질을 주면 서로 놀라지도 않을텐데... 전 이런 사람입니다." 녀석? 계속 유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더구나 그녀를 친자처럼 부르는 말투가 거슬렸 다. 명함을 내밀어서 받아들고 바라보았다. 광영산업 대리 박경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재질의 삼류명함이었다. 그는 이것을 건네주면서 자신이 이런 사람이라고 소개했는데 추림은 도대체 그가 어떤 사 람인지 모호했다. 달랑 명함 한장을 건네면 상대의 신분과 인간됨을 다 알게 되는 것인가? 웃기지도 않는 이 코미디 같은 경우를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지 추림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 질 뻔했다. 의자에 등을 비스듬히 기대고 앉아 다리를 꼬고있는 그는 여유롭고 거만하게 보였다. "이추림이라고 합니다. 유미씨와는 몇번 본 사이고 이제 막 그 몇번을 더할 참이었죠." "시간이 다 되었는데... 안 오는군. 식사라도? 아니면 술이라도?" "아니요. 오면 같이 하던지 하지요." "그럼 그러시던지." 이놈봐라? 말을 까겠다 이건데... 좋아 두고 보겠어. 속으로 상황을 대충 짐작한 추림은 이 비데하고 넙적한 놈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이미 머 릿속에서 계산을 끝내 놓았다. "추림씨!" 그때 유미가 다가오며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이지색 롱 코트에 수실이 길게 늘어진 털 목도리 차림인 그녀의 모습이 참으로 정겹고 반갑게 느껴졌다. 추림이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에서 벗어나며 그녀를 맞아주었다. "오셨군요. 잘 지내셨어요?" "네에... 한데... 이게?" "왔어? 앉으라구. 내가 먼저왔어. 아! 오해는 말라구! 그저 우연의 일치였어. 안그래 이추림 씨?" 유미가 추림의 멋적은 얼굴을 바라보다 박경태를 노려보면서 자리에 앉았다. 비겁하고 속좁은 놈! 미리와서 염탐하듯이 상대를 살피고 있는 것이다. 추림에게 너무 미안해진 유미는 추림에게 상황을 설명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되었다. 그가 아무리 이해심이 많고 속넓은 남자라고해도 이런 상황을 쉽게 납득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유미씨. 식사 안하셨지요? 전 일부러 굶었습니다. 설이 지났지만 기념으로 떡국이라도 한 그릇씩 시켜서 먹을까요?" 다행이다. 그는 일부러 농담으로 자신의 마음부담을 덜어주고 있었다. "떡국은 무슨... 어이 여기! 이리로 잠깐 와봐!" 추림의 농담을 묵살한 박경태가 예의없이 저만큼에서 일을보고 있던 웨이타를 소리높여 불렀다. 안하무인이고 자기 세상이다. "뭘 먹을까? 이집은 너무 뒤떨어졌어. 대충 함박스텍으로 하지? 어때 추림씨?" "전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유미씨 기왕 이렇게 된거 뭐 어쩌겠습니까? 팔푼이하고 칠푼이 가 모였다고 생각해야지요. 오케이? 좋아요. 그것으로 하지요." 유미에게 농인듯 아닌듯하는 말을 하며 그녀의 의사를 물은 추림이 박경태에게 승낙의 말 을 전했다. "술은 이것으로 하고 안주는 식사가 끝나는 동시에 가져다줘. 그리고 이거 담배값이나 해 라. 공부 열심히 해." 박경태가 웨이터에게 지갑을 열어 삼만원을 선심쓰듯 주었는데 추림은 속으로 웃음을 참 을 수 없었다. 주려면 그냥 주지 엉덩이까지 쳐가며 학생인듯 말해가며 담배값이나 하라니 너무 이상한 말이었다. 허세고 거만이다. 저런 행동은 정말 유치한 장난 같은 것인데 남들에게 자신의 위상을 마치 대단한 것 처럼 포장함으로서 저울질 하려는 개수작이었다. 코웃음도 안나올 일이다. "유미가 며칠 보지 못한 사이에 많이 이뻐 졌는데? 신경을 많이 썼나보군. 그래 아버님과 어머니는 안녕하시고? 내가 명절때 들렸어야 하는데 바빠서 말이지. 나중에 한번 식사라도 대접한다고 전해드려." 거만한 자세로 앉아 실실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유미를 바라보고 말하자 유미는 짧게 대답 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런데 둘이 그리 친하지 않은 사이같은데? 이렇게 개인적으로 만나도 아무일 없나 모르 겠군. 여자는 조신해야 여자다워서 말이야. 안그래 추림씨?" 이놈은 속물이고 삼류인간이다. 이런놈은 적당히 맞추어주며 데리고 놀아주면 자신을 떠 받드는 줄 착각을 한다. "뭐 그럴수도 있겠고 아닐수도 있겠고. 그게 그렇게 중요한것은 아니겠지요?" "호? 그래? 난 여자가 나다니고 진한 화장을 하면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 같아서 아주 싫어 하지. 우리 누나들만해도 그래. 결국 내가 말해서 관철 시키기는 했지만 말이야. 여자는 자 고로 정숙하고 사내의 말에 고분해야 여자인거지. 과거 우리네 여자들이 다 그렇지 않았겠 어? 아 식사가 나왔군. 먹지. 먹고나서 이야기 하지." 주인행세 어른행세 다하려 들고 있다. 추림은 도대체 유미와 이 덜 떨어진 작자가 어떤 사이인지 궁금했고 이 자리가 만들어진 이 유가 무엇인지 이해가 안갔다. 주말에 만나자고 한것은 그녀였는데 이런 언질은 한마디도 없었다. 조금의 서운한 생각과 슬그머니 다혈질 기질이 곤두서려했다. "추림씨 미안해요. 사실은 미리 이야기 했어야 했는데... 뭐라 할 말이 없네요." "할말요? 하면 되지요. 입은 훌륭한 표현의 도구입니다. 유미씨는 무엇이든 말할 권리가 있고 전 들을 준비도 되어있습니다." 그녀의 사과를 곧이 곧데로 들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 더욱 그녀가 소침해질 것이다. "역시 이집은 고기맛이 아주 않좋아. 질기고 퍽퍽해. 유미야 다음에 오빠가 좋은곳에 한번 데려가지.한번도 가본적 없는 곳일거야. 아주 멋지고 근사해. 에이 입맛만 버렸군." 물로 입안을 행구워내며 박경태가 떨떠름한 얼굴표정을 지었다. 추림은 아무렇지도 않은 고기맛이 어떻다고 저러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관두기로 했다. 사실 이런 양식보다는 한식이 훨신 입에맞고 경제적이며 질이 높다. 그런데 사람들은 비싼 돈을 지불하며 외국에서 수입해 들어온 이런 양식을 단지 분위기라는 비싼 댓가를 치루며 즐기려 하고 있었다. "자 한잔 들지. 이렇게 만난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잘 지내 보자구 추림씨!" 웬 술과 안주를 그렇게 많이 주문했는지 어제부턴가 유행하는 미국산 맥주 버드와이저 열 병과 조니워커 레드, 큰것을 주문했다. 저놈은 상당히 독하다. 사십오도나 나가는 조니워커를 한병즘 마시면 바로 정신병자쯤 되 는 지경에 빠질 것이다. 추림은 그것을 두병까지 마셔본 경험이 있었는데 다음날 후유증에 죽을 고생을 했었다. 일반 주량으로는 한병은 어림도 없다. 마시면 바로 속에서 열불이 나기 때문에 토악질이 넘 어오게된다. 위와 장을 자극하는 것은 스코틀랜드산 양주가 지닌 독특함이다. 고급술은 죄다 스코틀랜드 산인데 그 술들의 특징은 부드럽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술은 고 급스럽고 맛도 있지만 성질이 거칠고 강했다. 숙취가 오래가는 이유였다. "자 이렇게 부드럽게 흔들어서... 천천히 향을 음미하고... 느리고 천천히 마시는거지. 자 한 잔들 하자고." 직접 술을 블랜딩해서 잔을 건낸 박경태가 별소리를 다해대고 있었다. "아니요. 유미씨 그렇게 마시면 양주의 주기가 아래로 모이고 껍데기만 맛을 보게 되는 거 예요. 위스키는 차게해서 순간적으로 마셔야 하는데. 얼음을 먼저 잔에 담고 그 위에 술을 따라야 해요. 자 이렇게. 약 오초에서 칠초가 지나면 영하 아래로 덜어지고 그것이 입에 닿 고 위에 도달할 때 쯤이면 가장 이상적인 온도가 되요. 제로점에 도달하게 되지요. 그렇게 위스키를 마시면 평소보다 술도 많이 마실 수 있고 숙취의 고통에서 자유로울수 있어요. 술은 다 그래요. 소주든 맥주든 양주든. 절대 급하게 마시면 안되지요. 이제 마셔 보세요. 혀를뒤로 빼고 술이 입안에 들어오면 혀를 좌우로 살짝 움직이세요. 잘했습니다. 목 아래로 넘긴 후에는 코로 숨을 내쉬고 입으로 숨을 들이쉬는것을 서너번 반복하세요. 들숨은 위스키의 향을 오래도록 느끼게 해주고 토로 내쉬는 날숨은 위스키가 지닌 기운을 걸러내게 되요. 어때요? 괜찮죠?" 추림이 박경태가 건넨 술은 미뤄둔채 다시 술을 만들어 유미에게 주고는 직접 가르쳐주며 그녀가 이상적으로 위스키를 음미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좋아요. 부드러운데요? 하나도 안써요. 이거 되게 신기하네? 소주는 마시면서 쓴맛을 참 아도 양주는 그러지 못했는데 하나도 안써요. 왜 그래요?" 정말 술이 하나도 독하거나 쓰게 느껴지지 않아 유미가 신기해하며 추림에게 궁금증을 드 러냈다. 기분이 나빠진 얼굴로 추림을 슬쩍 노려보고 있던 박경태 마저도 정말 그런건지 하며 얼굴 표정을 바꾸고는 추림을 응시했다. "당연히 그럴겁니다. 혀에는 맛을 느끼는 여러가지의 기능이 있는데 각기 단맛 쓴맛 짠맛 따위를 구분해내는 감각 기관이 존재합니다. 혀를 안으로 오므리고 술을 마시면 최초에 술 의 맛을 느끼는 기관인 혀의 위쪽 앞인, 단맛을 느끼는 기관에 도달하지요. 그것이 인간의 시신경에 명령을 하는 거예요. 이것은 달다. 그러므로 쓰지 않다. 맛은 쓰지만 인간의 중추 신경계나 미각기관은 그렇게 명령을 전달받고 속는 거지요. 어? 쓸텐데 이게 왜 달지? 하고 말입니다. 어때요 이해가 가요?" "되게 신기하다... 추림씨는 별걸 다 알고 있네요?" "이건 아무나에게 전수하지 않는 비법인데 유미씨에게 특별히 알려드리는 겁니다. 어디가 서 소문내지 말아요? 큰일납니다." "에? 왜요?" "제가 한국 주류협에에서 훔쳐온 거니까요. 아셨죠?" "뭐라구요? 난 또!" 유미가 어이없이 웃자 추림도 그녀를 마주보며 웃었다. 박경태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노 골적으로 불편한 마음을 드러냈다. 자신이 권한 술은 결국 쓰레기가 된 것이다. "추림씨 술을 상당히 잘 마시나보군? 사실 난 그리 술을 즐기지 않아서 말이지." "즐깁니다. 그냥 시간이 날때면 술을 찾곤 하는데 그리 의지하거나 그러지는 않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나이도 어린 사람이 그러면 안되지? 자중하라구 그리 좋은게 아니니까!" 나이가 어리다? 인정한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서로 입장의 이 해도나 인정하는 부분이 상충할 때 듣기 좋은 말이 되는 것이다. '넌... 아니다. 자식아!' "아참! 내가 유미와 서로 결혼 할지도 모른다고 이야기 했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누가 누구랑 결혼을 해요? 이제는 멋대로군요!" 유미가 발끈해서 박경태에게 쏘아 붙히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기만했다. "이거 왜 이래? 아버님도 인정하신 일이라고? 또 난 너 정도는 충분히 감당하고 행복하게 해줄수 있을 만큼 넉넉한 남자야. 잘 알고있으면서 꼭 확인하려 들어." "도저히 누구와는 이야기가 안되네요. 좋아요 추림씨 솔직하게 말할께요." 유미가 박경태의 그런 행태를 질려하면서 지난주에 있었던 그와의 일을 조심스럽게 이야 기했다. 대놓고 도와달라 말하지 않았지만 추림은 충분히 알아들었고 그녀의 입장을 충분 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 그 이갸기는 하지 않았군! 이봐 추림씨 유미가 추림씨를 아주 대단하게 생각하던데, 어 때 솔직히 이야기 해보지 그래? "그만요! 더이상 말하지 말아요! 그만 가요 추림씨! 여기에 더이상 있고 싶지 않아요." 유미가 성난 얼굴로 박경태의 말을 막으며 추림의 팔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려했다. 그런 유미를 추림은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되려 유미의 팔을 잡고 다시 앉혔다. "유미씨. 전 유미씨의 어떤 사람도 아닙니다. 현재는 그렇지요. 현재는 말입니다. 제가 유미 씨의 사생활에 끼어들거나 관여할 자격도 권리도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때론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하고 강요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 그런일 에 매우 익숙하고 그러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한번 이야기 해볼게요. 제게 기회를 한 번 주시겠어요?" 부드럽게 웃음지으며 추림이 유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눈에 힘을 실었다. 유미의 시선도 그를 바라보다가 눈꺼플이 파르르 떨리며 그녀의 고개가 아래로 떨구어졌 다. "좋아요. 어떤 행동을 해도 놀라거나 절 의심하지 말아요. 앞으로 절 더욱 많이 알게 될지도 모르는데 여기서 만약 제 어떤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또한 추림이고 아주 일부분에 지나지 않을수도 있을 겁니다. 이해하셨지요?" 추림의 말에 유미가 고개를 끄덕임으로 그의 말을 수긍으로 받아들였다. "다정하군. 역시 여자는 저래야 맛이야. 신기한대? 나안테는 얼음이 풀풀 날리는 유미가 추 림씨 안테는 얌전한 고양이 같으니 말이야." 추림이 박경태를 마주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가 말하는 동안 추림은 이놈과 대화하다가 통하지 않으면 아예 굴복 시켜 버릴 작정이었 다. 그것이 힘이든 어떤 것이든 이놈으로 인해 유미가 힘들어하고 부담스러워 하고 있었다. 추림이 자신의 크라스에 술을 한아 가득 따라 단숨에 비워냈다. 그리고는 술병을 들어 박 경태에게 불숙 내밀며 말했다. "예전에 제가 열여섯인가 되었을 땝니다. 우리 고향에는 군부대 투성인데 그 중 가장 유명 하고 무서운 한 부대가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솔져레벨에서는 대한민국 최고라고 해도 과 언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야생맷돼지를 맨손으로 때려잡아 식용으로 쓰고 대검 한자루를 들고 야산에서 사개월을 버틴다고 합니다." 이야기 하다가 박경태가 마지못해 내민 술잔에 조금전 처럼 술을 한잔 가득 따라부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잔에 다시 술을 따라 채웠다. "제가 술을 처음 마신것은 제 나이 불과 열세네살 때였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마신것 은 제가 그 부대의 일과 관련이 있고 나서였습니다. 어느날 한 동네에서 잔치가 열렸는데 제가 시내로나가 술을 사오게 돼는 심부름을 가게 되었습니다. 자전거로 이십분을 죽어라고 달려 시내로 나가 술을 사고 돌아오는길에 보았습니다. 훈련을 나갔다가 귀대하던 그 부대원 중 두명이 길에서 살벌하게 싸우고 그 두명 중 한명 의 목이 이렇게 돌아가서 부러져 죽는것을!" 추림이 두손으로 자신의 목을 잡고 한쪽 방향으로 돌리는 흉내를 냈다. "건배하죠? 정말 살벌하더군요. 사람이 사람의 목을 잡고 비틀어 죽이는 장면을 바로 코앞 에서 목도하는 일이란 정말 끔직하고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한명이 산속으로 사라지고 저와 죽은 군인만 남았는데 전 그냥 돌아갈수가 없었습니다. 어떻해서든 죽은 군인을 데려가려했죠. 큰길을 놔두고 지름길을 택한 벌을 받는구나라고 생각했죠. 칼에 낭자되고 목이 꺽여 덜렁거리는 몸을 제 힘으로 감당 할 수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 두려웠고 무서웠던거죠. 그 순간 자전거가득 실린 술병들이 보였습니다.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추림이 잔을 들고 술은 마시지 않고있는 박경태에게 잔을 내밀어 건배를 제의했다. 다시 술을 비워냈다. 그러자 그런 추림의 모습을 눈을 찡그리고 바라보던 그가 호기가 치 솓았는지 숨을 헐덕 거리며 겨우 크라스를 비워냈다. 숨도 쉬지않고 물잔에 입을 처박은 그가 벌컥거리며 물을 연거푸 마셔댔다. "겨우 열 대여섯살 먹은 꼬마가 무려 소주를 여덟병이나 마신것입니다. 그리고 만취가 되 어서 군인의 시체를 자전거에 실은채 잔치집으로 끌고왔죠. 또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추림이 이번에 자신의 잔에 술을 채우고 기다리지 않고 박경태의 잔에 술을 부어 채웠다. 그런 추림을 바라보며 박경태의 얼굴은 못볼것을 보는 얼굴처럼 변해 버렸다. "사흘만인가... 정신을 차리고 엄청 끌려 다녔지요. 군부대 경찰서를 집처럼 드나들고 한달 이 다 지나서야 자유가 되었지요. 또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추림이 다시 그 말을 내뱉고 박경태의 얼굴에 시선을 둔 채, 크라스를 들어 술을 벌컥 거리 며 들이켰다. 지독하다. 벌써 세잔째다. 입도 축이지 않고 안주도 먹지 않은 채 꿈쩍도 않고 들이켰다. "밤마다 악몽이 되더군요. 제가 그때부터 이렇게 지독한 열병에 시달렸습니다. 서울 생활 하면서 쓰레기 같은 일을 할 때 늑대처럼 거리를 쏘다녔죠. 돈을 아끼려고 주린 배를 안고 춥고 허전한 날엔 쓰고 독한 싸구려 술을 서너병쯤 마셔야 자곤 했습니다. 지금도 가끔 힘 들고 외로울때면 유일하게 날 위로해주고 알아주는것은 이놈들이 유일하죠." 술을 한잔 채우고 나니 술이 떨어졌다. "후후. 사는게 무엇일까? 어린 사람은 이렇게 살았는데 나이많은 당신은 왜 나같은 경험 도 해보지 못하고 술의 참 맛도 모를까? 잘난 부모가 덕이 있어 지닌 즐거움을 넌 그것이 마치 자신이 일군 것인냥 아무렇게나 소진하고 탕진하며 살고 있을테지?" "뭐라고? 이자식이 말을 막......!" "입닥쳐라! 한마디만 더하면 널 여기서 아까 그 군인처럼 목을 비틀어 버릴테다! 시험해봐 라. 내가 이기나 네놈이 이기나 한번 시험해 볼테냐?" 추림의 얼굴은 차갑고 암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추림이 화가나면 더욱 냉정해진다. 그 표정이야 말로 그가 지니는 야수성의 두얼굴이었다. 추림의 기세에 눌린 박경태가 얼굴을 하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었다. 유미마저 너무 놀라 손으로 입을 가리고 몸을 가늘게 떨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다. 언제나 다정하고 따듯했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화를 내고있다. "넌 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이 모두 부정이고 비진리라고 믿겠지? 네가 가두고 정한 세상에서 너대로의 방식대로 세상을 살았겠지? 여자는 얌전해야 하고 남자의 전유물이어 야 한다는 그 웃기지도 않은 사고방식으로 아무 여자에게나 다가가 울리고 빼앗고 상처주 고 했겠지? 말해봐라? 네가 살면서 일한 시간에 대해 말해봐라! 부모를 떠나 너의 힘으로 삶을 개척한적은 있나? 길을 걷다 힘겨워하는 사람을 동정으로 바라보고 너의 두 손으로 그들을 도운적은 있나?" "이... 이게! 나이도 어린놈이!" 얼굴이 씨벌겋게 변한 박경태가 추림을 금방 한 대 칠 것 같은 몸짓을 보였다. 그래도 욱하는 성질은 있는지, 자신보다 작고 곱상하게 생긴 추림이 만만하게 보였는지도 몰랐다. "참고로 난 싸우면 상대를 병신을 만들거나 반쯤 죽인다. 확인하고 싶다면 도발해봐라. 넌 허세가 한강만큼 깊고 거만은 난지도 땅속만큼 더러운 놈이다. 넌 용기도 없고 남을 위해 자신을 버릴줄도 모르는 비인간이다. 넌 잉여인간 이란 말이다! 이 여자를 봐라. 이렇게 두 려워서 떨고 있다. 당혹감에 안스러워하고 있다. 유미씨가 네 여자라고 치자! 그리고 내가 지금 유미씨를 범하려 하거나 너에게서 빼앗아 가려 한다면 넌 유미씨를 지켜낼 수 있나? 넌 어리석은 놈이다! 네가 지닌것은 너의 그 나약함임을 너는 모르고 있다. 나와 유미씨가 어떤 사이인줄 궁금한거냐? 그녀는 나랑 결혼 할 사이다. 못믿겠다고? 나도 너의 말을 믿지 못했다. 아니 안 믿었다. 넌 그런 놈으로 내게 첫 인상을 준 놈이다! 너는 상대에게 그런 사람이다. 신뢰도 없고 믿음은 더더욱 없으며 존경할 구석은 더욱 없겠 지. 너의 가치를 스스로 깨닫고 타인을 저울질하려거든 해라." 추림이 가라앉은 얼굴로 분에 못이겨 씩씩 거리는 박경태를 응시하닥 맥주를 한 병 땄다. "마셔라! 내게 형이란 소리 들을 생각마라. 내가 너였다면 여기서 싸우다 죽었거나 인정했 을 것이다. 네가 가진것은 지금의 이런 너의 모습이다. 사람을 때려본적 있나? 피가튀고 뼈가 부러지는 싸움을 해본적 있나? 일하다 너무 피곤해 쓰러져 잠들어 본적 있나? 너의 누군가가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에 몰래 슬퍼하고 눈물 흘려 본적 있나? 그런것이 없었다면 넌 헛된 삶을 산것이다. 사람다운것! 너의 부모님은 널 인간으로 세상 에 잉태하셨겠지만... 신은 널 사람으로 살아가라 운명했겠지만 넌 기본적으로 그들의 바 램을 저버린 헛된 인간인 것이다. 봐라! 너의 가슴속에 무엇이 있는지! 열어봐라! 네 가슴속에 널 스스로 감동시키고 타인을 울리게 할만한 추억이 있고 슬픈 사연이 있는지 보여봐라!" 고개숙인 유미의 몸이 가늘게 떨리는것이 감정적 변화가 있는듯했다. 박경태는 이제 추림의 이야기에 몰입해 있었다. 분노도 화도 시기도 사라지고 멍하니 추림 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어째서 유미씨를 너의 소유물로 착각을하고 그리 쉽게 가벼운 여자로 대한 것이냐? 네가 그렇게 대하는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우며 존경할만한 사람일수도 있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냐? 여자! 너의 어머니도 여자다. 너에게 가까운 사람중, 여자가 절반은 될 것이다. 그런 그들은 다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사람인 것인가? 유미씨를 사랑하나? 아니 좋아하는 감정이 있나? 있다면 넌 정말 나쁜 자식이다! 최소한의 감정이 있고 관심이 느껴진다면 이미 그 사 람을 존경하고 있다는 의미다. 네가 유미씨에게 대한 행동을 되새겨봐라. 널 스스로 유미씨에게 가치있게 만들어도 충분한 시간이 네게 허락되어 있었을 것이다. 넌 지금 유미씨와 결혼한다해도 아무런 행복도 즐거움도 주지 못할 남자다. 네가 지니고 있는것 중 단 하나라도 유미씨가 존경하고 동경할만한 것이 없다면 그것은 오 로지 불행만 있을 뿐이다."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는 레스토랑안이 갑자기 정적이 찾아온듯했다. 추림이 하는 말은 가게 전체로 퍼져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처음엔 짜증을 부리고 욕을 해대던 사람들이 언제부턴가 조용하게 침묵을 지키며 귀를 기 울이고 있었다. "정당하게 사는것! 공평하지 않더라도 내것을 조금 덜어가며 사는것! 너나 나나 유미씨나 생긴 모습은 다르지만 같은 인간이란 이름이 있고 뜨거운 피가 흐르며 같은 형태를 지녔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건 너와 나 혹은 다른 이들도 모두 같다는 것이다. 남을 비방할 자격은 있지만 상처줄 권리는 없다. 나또한 타인을 억압하고 나쁘다 매도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최소한 정말 최소한 그마저도 지키지 못한다면 단 하 나만은 그래도 지켜야 하는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너의 양심이다! 인성을 잃어도 끝까지 남는 유일한 것이 양심이다. 인성을 잃은자는 살인을해도 스스로를 천하다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양심을 잃은자는 모든것을 잃은 잉여인간이 되는 것이다. 넌 이렇게 살다가 양심을 잃어버리는 추한 인간이 될테냐? 내가 지금 네게 이런 말하는 것이 내가 잘나서가 아니다. 단지 난 네가 인정하지 않는 양심 을 인정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것만이 너와 나의 차이다. 다른건 없다. 너도 원래는 이런 사란이 아니었을 테지? 조금씩 삐뚤어진 너의 사고가 널 변질시켰을 테 지. 넌 지금 무척 힘들게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테지. 너의 이성은 아니라고 하는데 너의 행동은 널 배신하고 점점 추하게 만들어 가고 있을테지. 아름답게 살아라! 다른게 아니다. 너를 뒤돌아보고 상대를 뒤에서 바라보란 말이다. 분명 달라질 것이다. 다르게 보일것이고 넌 즐거워질 것이다. 나보다 넌 더 많은 물질을 지녔을 테지만 넌 나보다 불행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다. 왜인줄 알아?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너이기 때문이다. 난 지닌 물질이 없으면 서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알고있으므로! 어떻게 살아야 즐겁고 행복한지 너보다 나이 가 더 어린 나는 알고 있단 말이다. 널 다른이에게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을 때 누군가를 사랑하고 욕을 해라. 남자가 치사하고 비겁하게 배경과 단순한 힘만으로 우월하려 하지 말아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미가 어느새 얼굴을 들어 추림을 응시하고 있었다. 복잡한 얼굴을 하고 추림의 말을 듣는지 아닌지 모를 박태경의 눈빛이 흐릿하게 변했다. "누나가 있었다. 어릴적에 고아원에서 입양한 누나였는데 난 그 누나가 친 누나인 줄 알았 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였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 누나가 보이지 않아서 한 참을 찾고 밤이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에게 물어보고 아버지에게 여쭤봐도 모 른다고 대답하셨지. 내가 무척 잘 따르고 날 아주 귀여워 해주던 누나였는데... 그 누나를 아버지와 엄마가 고아원으로 보내 버리셨다. 그것을 이년이 넘게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뒤로 난 아주 못된 아이가 되었다. 남을 시기하고 비방하고 욕하고... 집안에서 늘 천덕 꾸러기였고 말 안듣는 아이가 되버렸다. 언젠가... 언젠가 찾아올 거라 믿었는데 결국 지금 껏 그 누나는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나는... 항상 그 누나가 보고싶었는데......!" 박태경이 처연한 얼굴로 말을 하며 끝에 눈물을 흘리며 숨죽인 채 테이블 위에 고개를 묻 었다. 그의 그런 행동이 뜻밖인지라 유미가 놀라 추림을 돌아보았다. 그이 그런 과거도 놀라운 것이고 저런 나약하고 슬픈 모습도 놀라운 것이다. 갑자기 심경의 변하를 일으킨 박태경! 추림은 그에게 말을하는 내내 그가 변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눈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단상이 스처지나가고 감정이 물결친 그의 눈은 어쩌면 그가 잃은 순수함을 되찾고 있는 과정일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악하거나 순수하지 못한 사람은 없다. 박태경 그도 그런 사람일 것이다. 변화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대라면 말을 하지못할 것이지만 왜 이렇게 살아가느냐고 묻 는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할말이 무척이나 많아진다. 그도 그랬을 것이다. 어느날 부터 일그러지고 삐둘어진 자신을 느끼면서도 되돌리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슴속에 새겨진 상처가 회피의 장소를 방탕으로 택했으리라! 그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오른다. 변할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느끼고는 있을 것이다. 자신이 잃은 것이 무엇이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 로 원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은 다 똑같은 모습이다. 회귀본능을 지녔고 악보다 선을 좋아하는 감성을 지녔다. 못됐다고 하는 사람과 잠깐의 대하를 하다보면 결코 그가 그렇지 않은 사람임을 아는데는 채 십분도 안걸린다. 스스로를 깨닫고 있지 못한것! 그것이 문제다. 자신을 강하게 컨트롤하고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 그것을 능히 제어할 수 있다면 인간의 본질은 아마 지금보다 더 예민하고 섬 세해 질 수 있을 것이다. "나 먼저 가겠어!" 박태경이 그 말을 남기고 벌떡 일어았다. 유미를 잠시 보고 추림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그 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형이라고 부르게 해주지. 계산은 하고 갈거야." 어딘가 쓸쓸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홀을 가로질러 현관 입구로 다가가 카운터에 멈추고 곧 다시 걸어나가 모습이 사라졌다. 두시간이 넘게 이야기한 추림은 머리가 어질거렸다. 술을 급하게 마셨고 쉬지 않고 떠들어 대서인지 심기의 소모가 적지 않은듯했다. 숨을 여러번 고르자 몸이 붕 뜨는듯한 느낌이 들고 몸이 와르르 무너지는듯했다. "힘들었지요? 미안해요 저 때문에 괜히." "알긴 아세요? 절 이렇게 항상 불안하게 하실겁니까?" "예? 아예. 그냥 너무 피곤했어요. 그런데 한편으론 시원하면서 한편으론 미안하기도 하네 요. 괜찮겠지요?" "좋아지길 바래야지요." "저 너무 놀랬어요! 추림시가 설마 그렇게 무서우리라곤 상상도 못했거든요." "그랬어요? 이런... 연극한건데 잘 속아 넘어가셨네. 너무 완벽했나?" 농담이지만 유미는 그가 정말 무서웠다. 화를 안내던 사람이 화나면 더 무섭다고 하더니 추림이 딱 그랬다. 지금 다시 이렇게 부드럽고 얌전한 사람으로 돌아 왔지만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그런 모습은 괜히 허세를 부리는것이 아닌 진짜처럼 느껴졌다. 수연이나 친구들에게 들은 것 처럼 그는 화나면 정말 무서운 사람이 되는구나 싶었다. 박태경, 그 남자를 정말 어떻게 할 것 같아 두려웠다. "저 술이 올라오는데요. 이거 큰일이네... 억지로 마구 마셨더니... 제가 미쳤었나봐요. 어이구 속이야!" "에게게? 그게 뭐예요? 조금 전에는 무슨 영화의 한장면 같더니." "하하!남자는 배짱입니다! 술도 그렇게 멋지게 마셔 줘야지 상대에게 통하는 법입니다." "그러다가 정말 임자 만나면 어쩌려구요?" "그때는... 36계 줄행랑을 놓아야죠. 죽어라고 도망가는 겁니다." "이제 보니 순 거짓말이었군요!" "어? 아셨어요? 이거 틀켜버렸네. 유미씨 우리 밖에 나가요 너무 답답하고 사람들 시선도 부담스럽네요." "좋아요. 어디가서 못마신 술이나 실컷 마셔 봐야겠어요. 저 구정이후 처음 나오는거에요." "좋습니다. 아이구... 약국부터 들려야겠네!" "호호! 크일이네요. 어서가요." 추림과 유미가 자리에서 막 일어나 걸어 나가려 할 때였다. "유미야!" 유미를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에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옷을 멋드러지게 차려입은 하얀 피부의 사내가 정면에서 여자 한명과 다가오고 있었다. "오빠? 여긴 웬일이야?" 유미의 오빠 유혁이었다. "너 오기전부터 있었다. 그런데... 전 유미 오빠되는 사람입니다." 유혁이 추림에게 밝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해왔다. 느닷없는 유미의 오빠가 등장해 당황한 추림은 조금 난감한 얼굴로 그의 손을 맞 잡았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이추림이라고 합니다." "유혁입니다. 조금전! 아주 멋졌습니다. 이 친구는 울더군요." "예? 아 그러셨어요?" 추림이 유혁이 여자를 가리키며 말하자 멋적은 얼굴이 되었다. 본의 아니게 공개된 장소 에서 부끄러운 행동을 한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져왔다. "유미야? 나가려구? 우리도 나갈건데 같이 가서 한잔?" "아니. 따로 가서 드셔!" "뭐야? 저기 이추림씨? 유미가 반대해도 그쪽은 물론 수긍하겠지요? 어때요? 마침 보고 싶 기도했고 오늘 감동도 있었는데 제가 한잔 사겠습니다." 어색한 자리가 될 것이지만 이런 분위기를 이끄는데는 추림만한 사람이 또 없다. 거절하면 죽일놈쯤 될 것이다. "네. 좋습니다. 같이 가시죠." "추림씨 괜찮겠어요? 속도 않좋다고 하셨으면서?" 유미가 걱정이 되는지 넌즈시 강조하며 물었다. 사실은 단 둘이 같이 있고 싶어서였는데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 뭐... 견딜만 합니다. 가시죠 유미씨." "좋았어! 자 갑시다. 동지들. 오늘은 내가 쏜다!" 유혁이 기분이 좋은지 곁에 선 여자에게 팔을 두르며 몸을 돌렸다. 유미가 혀를 내밀어 언잖은 마음을 대신하고 추림을 바라보며 베시시 웃었다. 지난번 그렇게 헤어지고 그 여운을 달래지도 못하고 제대로 대화하지도 못했는데 방해꾼 이 나타난것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어쩔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 오빠였고 마침 기회다 싶기도 했다. 오빠에게 추림을 근사하게 소개하고 싶었다. 이미 보았지만 정식으로 인사 시킬 마음을 먹었다. 든든한 추림의 등을 바라보며 유미는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며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 "저놈 누구야? 남자답게 행동하는게 어디서 영화는 많이 본 모양인것 같더만." 뒤에서 손님 중 누군가가 일부러 소리높여 떠드는 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레스토랑 풍차 안에는 다시 비틀즈의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있는 져녁이었다. (23장에 계속)1
유리사랑 (22장/ 이남자가 사는 법! ) <실극화>
구정 연휴가 끝나고 새해를 보낸 핑계를 대고 남영기업 사원들이 연 이틀에 걸쳐 음주가무
를 별였다.
의외로 남영기업의 게으른 왕이라 불리는 박사장도 참석했는데 사장인지 아닌지 존재감마
저 희미한 분이어서 술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끌려 다녔다.
이틀 뒤 사장이 병에 걸려 누웠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만나면 키득거렸다. 한동안 남영기업에서 박사장을 보기는 힘들것
이라는게 대세였다.
주인된 이가 남영기업 실무에서 철저하게 봉세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독선적이고
넘치는 카리스마를 주체하지 못하는 사장의 파워가 오히려 해가 되고 있어서였다.
그 한가운데는 친동생 박도형 부장이 있었다.
구정 연휴가 끝나고 치룬 시무식과 함께 이과장은 그와 부장자리에 올랐다.
조용한 암투가 벌어지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상관하는 사람은 채 열명도 되지 않았고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목요일부터 남영기업의 대대적인 기계수리가 시작되었다.
덕분에 한가해진 사람들은 여유있게 출근해서 일찍 퇴근하는 기쁨을 누렸다.
입술이 부르트고 눈이 붉게 충열된 추림은 최근들어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잠을 자도 두어시간이 지나면 눈이 떠지고 더이상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지친 몸으로 일주일을 보내고 주말이 되자 추림은 또다시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오랜만에 이대준과 몇몇 사람들하고 사우나를 다녀온 추림은
한결 밝아진 기분이었다.
오후 네시가 되아가고 있었다.
집에서 이곳 저곳에 전화를 하고 짜투리 시간을 미뤄두었던 일을 해결하며 보냈다.
오후 다섯시가 되자 추림은 집을 나설 준비를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미국은 수십년만에 내린 폭설로 대통령의 하야설까지 나돌고 있었고
국내도 이상 기후가 연이어 이어지고 있었다.
제법 많은 양의 비였다. 겨울비는 올 겨울 유난히 잦게 내리고 있었다.
그덕에 고통받는 이들은 정부의 각 부처와 서민들이었다.
우산을 써야 하나를 생각하다가 그대로 나가기로 했다.
겨울에 우산을 쓰고 다니는것도 이상할 것이다.
택시에 몸을 싣고 화곡동으로 향했다.
이십분도 안되어서 약속 장소에 도착한 추림은 시간이 약속한 시간보다 삼십분이나 일찍
도착하게 되자 너무 서두른것을 후회했다.
화곡동 588번 버스 종점. 수많은 버스들이 주차되어 있다가 나가기를 반복하는 광경을 지
켜보던 추림은 레스토랑 풍차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레스토랑 풍차가 오늘의 약속 장소였는데 추림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종점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어 찾을 필요도 없었다.
건물 정면에 거대한 풍차 모형이 달린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건물 이층에 위치한 풍차안으로 들어갔다.
석유난로를 피우고 있는지 기름 특유의 냄새가 코를 살짝 자극해왔다.
가게 안을 두리번 거려 적당한 자리를 찾은 추림은 좌측 창가가 비어있어 그곳으로 향했다.
"맥주 두병하고 땅콩좀 주세요."
비틀즈의 노래가 경쾌하게 흘러 나오는 가게 안은 아늑하고 조용했다.
손님들이 꽤 있었지만 그리 소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기운이 나지 않았다.
유미를 만난다면 이런 기분일리가 없었다. 들뜨고 설레여야 정상이었다.
아무래도 최근 기분이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자꾸만 지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음악이 마이클 잭슨의 앨범으로 바뀌었는지 연이어 그의 노래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시간을 기다리며 맥주 두병을 거의 비워내고 있었다.
유미를 만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았지만 답이 없었다.
그냥 만나서 식사나하고 술이나 마시며 보내는것은 의미가 없다고 여겼다. 좀 더 세련되고
진보적인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것이 무엇일까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추림으로서도 딱히 달리 할 것이 없었다.
일단 그녀를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 그것만이 우선 필요할듯 했고 부담은 되기 싫었다.
"저... 혹시 누굴 기다리시는 것 아닙니까?"
한참 깊은 생각에 빠져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추림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키가 크고 비데한 몸을 지닌 둥근 얼굴의 남자가 자신을 바라
보며 어색하게 웃으며 서있었다.
"그런데요? 누구?"
"죄송한데 기다리는 사람이 여자고 혹시 성이 유씨 아닌가요?"
추림은 속으로 긴장감을 느꼈다. 그리고 웬지 이 비데한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딘지 모르게 속물처럼 느껴지고 정떨어지게 보였다.
유미에게 무슨일이 생긴 것일까! 혹 이 남자가 그녀의 소식을 가지고 온 것일까?
"그렇습니다만 누구시죠? 어떻게 그걸 알고 계시죠?"
사내의 조심스런 모습에 일단 추림은 수순을 밟고 사유를 알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아 맞군요! 전 박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가 응하지도 않은 악수를 청하려 손을 내밀었다. 기분이 어떨떨해진 추림은 얼결에 손을
내밀어 그의 악수를 받아주었다.
뻔뻔한건지 아니면 무지한건지 박이라는 사내는 권하지도 않은 자리에 멋대로 앉으며 그리
보기좋지 않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
"아 전 유미와 잘 아는 사람입니다. 약혼자라고 할 수도 있고... 뭐 그렇습니다."
"그런데요? 제가 유미씨를 만나러 온것을 어찌 아셨는지는 별로 물어보고 싶지는 않습니다
만 당연히 밝혀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까?"
약혼자? 웃긴 말이다. 대개 이런식으로 나타나 저런식으로 말하는 자들은 허풍이 심하거나
물욕이 강한 자들이다.
"이런! 사실은 오늘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유미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전혀요. 그런데 유미씨와 여기서 동시에 약속이 있던 겁니까?"
"그렇지요. 바로 그겁니다! 유미가 말하지 않은 모양이군요. 녀석이 미리 언질을 주면 서로
놀라지도 않을텐데... 전 이런 사람입니다."
녀석? 계속 유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더구나 그녀를 친자처럼 부르는 말투가 거슬렸
다. 명함을 내밀어서 받아들고 바라보았다.
광영산업 대리 박경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재질의 삼류명함이었다.
그는 이것을 건네주면서 자신이 이런 사람이라고 소개했는데 추림은 도대체 그가 어떤 사
람인지 모호했다. 달랑 명함 한장을 건네면 상대의 신분과 인간됨을 다 알게 되는 것인가?
웃기지도 않는 이 코미디 같은 경우를 어찌 받아들여야 하는지 추림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
질 뻔했다.
의자에 등을 비스듬히 기대고 앉아 다리를 꼬고있는 그는 여유롭고 거만하게 보였다.
"이추림이라고 합니다. 유미씨와는 몇번 본 사이고 이제 막 그 몇번을 더할 참이었죠."
"시간이 다 되었는데... 안 오는군. 식사라도? 아니면 술이라도?"
"아니요. 오면 같이 하던지 하지요."
"그럼 그러시던지."
이놈봐라? 말을 까겠다 이건데... 좋아 두고 보겠어.
속으로 상황을 대충 짐작한 추림은 이 비데하고 넙적한 놈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이미 머
릿속에서 계산을 끝내 놓았다.
"추림씨!"
그때 유미가 다가오며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이지색 롱 코트에 수실이 길게 늘어진 털 목도리 차림인 그녀의 모습이 참으로 정겹고
반갑게 느껴졌다.
추림이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에서 벗어나며 그녀를 맞아주었다.
"오셨군요. 잘 지내셨어요?"
"네에... 한데... 이게?"
"왔어? 앉으라구. 내가 먼저왔어. 아! 오해는 말라구! 그저 우연의 일치였어. 안그래 이추림
씨?"
유미가 추림의 멋적은 얼굴을 바라보다 박경태를 노려보면서 자리에 앉았다.
비겁하고 속좁은 놈! 미리와서 염탐하듯이 상대를 살피고 있는 것이다.
추림에게 너무 미안해진 유미는 추림에게 상황을 설명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되었다.
그가 아무리 이해심이 많고 속넓은 남자라고해도 이런 상황을 쉽게 납득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유미씨. 식사 안하셨지요? 전 일부러 굶었습니다. 설이 지났지만 기념으로 떡국이라도 한
그릇씩 시켜서 먹을까요?"
다행이다. 그는 일부러 농담으로 자신의 마음부담을 덜어주고 있었다.
"떡국은 무슨... 어이 여기! 이리로 잠깐 와봐!"
추림의 농담을 묵살한 박경태가 예의없이 저만큼에서 일을보고 있던 웨이타를 소리높여
불렀다. 안하무인이고 자기 세상이다.
"뭘 먹을까? 이집은 너무 뒤떨어졌어. 대충 함박스텍으로 하지? 어때 추림씨?"
"전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유미씨 기왕 이렇게 된거 뭐 어쩌겠습니까? 팔푼이하고 칠푼이
가 모였다고 생각해야지요. 오케이? 좋아요. 그것으로 하지요."
유미에게 농인듯 아닌듯하는 말을 하며 그녀의 의사를 물은 추림이 박경태에게 승낙의 말
을 전했다.
"술은 이것으로 하고 안주는 식사가 끝나는 동시에 가져다줘. 그리고 이거 담배값이나 해
라. 공부 열심히 해."
박경태가 웨이터에게 지갑을 열어 삼만원을 선심쓰듯 주었는데 추림은 속으로 웃음을 참
을 수 없었다. 주려면 그냥 주지 엉덩이까지 쳐가며 학생인듯 말해가며 담배값이나 하라니
너무 이상한 말이었다.
허세고 거만이다.
저런 행동은 정말 유치한 장난 같은 것인데 남들에게 자신의 위상을 마치 대단한 것 처럼
포장함으로서 저울질 하려는 개수작이었다. 코웃음도 안나올 일이다.
"유미가 며칠 보지 못한 사이에 많이 이뻐 졌는데? 신경을 많이 썼나보군. 그래 아버님과
어머니는 안녕하시고? 내가 명절때 들렸어야 하는데 바빠서 말이지. 나중에 한번 식사라도
대접한다고 전해드려."
거만한 자세로 앉아 실실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유미를 바라보고 말하자 유미는 짧게 대답
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런데 둘이 그리 친하지 않은 사이같은데? 이렇게 개인적으로 만나도 아무일 없나 모르
겠군. 여자는 조신해야 여자다워서 말이야. 안그래 추림씨?"
이놈은 속물이고 삼류인간이다. 이런놈은 적당히 맞추어주며 데리고 놀아주면 자신을 떠
받드는 줄 착각을 한다.
"뭐 그럴수도 있겠고 아닐수도 있겠고. 그게 그렇게 중요한것은 아니겠지요?"
"호? 그래? 난 여자가 나다니고 진한 화장을 하면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 같아서 아주 싫어
하지. 우리 누나들만해도 그래. 결국 내가 말해서 관철 시키기는 했지만 말이야. 여자는 자
고로 정숙하고 사내의 말에 고분해야 여자인거지. 과거 우리네 여자들이 다 그렇지 않았겠
어? 아 식사가 나왔군. 먹지. 먹고나서 이야기 하지."
주인행세 어른행세 다하려 들고 있다.
추림은 도대체 유미와 이 덜 떨어진 작자가 어떤 사이인지 궁금했고 이 자리가 만들어진 이
유가 무엇인지 이해가 안갔다.
주말에 만나자고 한것은 그녀였는데 이런 언질은 한마디도 없었다.
조금의 서운한 생각과 슬그머니 다혈질 기질이 곤두서려했다.
"추림씨 미안해요. 사실은 미리 이야기 했어야 했는데... 뭐라 할 말이 없네요."
"할말요? 하면 되지요. 입은 훌륭한 표현의 도구입니다. 유미씨는 무엇이든 말할 권리가
있고 전 들을 준비도 되어있습니다."
그녀의 사과를 곧이 곧데로 들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 더욱 그녀가 소침해질 것이다.
"역시 이집은 고기맛이 아주 않좋아. 질기고 퍽퍽해. 유미야 다음에 오빠가 좋은곳에 한번
데려가지.한번도 가본적 없는 곳일거야. 아주 멋지고 근사해. 에이 입맛만 버렸군."
물로 입안을 행구워내며 박경태가 떨떠름한 얼굴표정을 지었다.
추림은 아무렇지도 않은 고기맛이 어떻다고 저러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관두기로 했다.
사실 이런 양식보다는 한식이 훨신 입에맞고 경제적이며 질이 높다. 그런데 사람들은 비싼
돈을 지불하며 외국에서 수입해 들어온 이런 양식을 단지 분위기라는 비싼 댓가를 치루며
즐기려 하고 있었다.
"자 한잔 들지. 이렇게 만난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잘 지내 보자구 추림씨!"
웬 술과 안주를 그렇게 많이 주문했는지 어제부턴가 유행하는 미국산 맥주 버드와이저 열
병과 조니워커 레드, 큰것을 주문했다.
저놈은 상당히 독하다. 사십오도나 나가는 조니워커를 한병즘 마시면 바로 정신병자쯤 되
는 지경에 빠질 것이다. 추림은 그것을 두병까지 마셔본 경험이 있었는데 다음날 후유증에
죽을 고생을 했었다.
일반 주량으로는 한병은 어림도 없다. 마시면 바로 속에서 열불이 나기 때문에 토악질이 넘
어오게된다. 위와 장을 자극하는 것은 스코틀랜드산 양주가 지닌 독특함이다.
고급술은 죄다 스코틀랜드 산인데 그 술들의 특징은 부드럽지가 않다는 것이었다. 술은 고
급스럽고 맛도 있지만 성질이 거칠고 강했다. 숙취가 오래가는 이유였다.
"자 이렇게 부드럽게 흔들어서... 천천히 향을 음미하고... 느리고 천천히 마시는거지. 자 한
잔들 하자고."
직접 술을 블랜딩해서 잔을 건낸 박경태가 별소리를 다해대고 있었다.
"아니요. 유미씨 그렇게 마시면 양주의 주기가 아래로 모이고 껍데기만 맛을 보게 되는 거
예요. 위스키는 차게해서 순간적으로 마셔야 하는데. 얼음을 먼저 잔에 담고 그 위에 술을
따라야 해요. 자 이렇게. 약 오초에서 칠초가 지나면 영하 아래로 덜어지고 그것이 입에 닿
고 위에 도달할 때 쯤이면 가장 이상적인 온도가 되요. 제로점에 도달하게 되지요. 그렇게
위스키를 마시면 평소보다 술도 많이 마실 수 있고 숙취의 고통에서 자유로울수 있어요.
술은 다 그래요. 소주든 맥주든 양주든. 절대 급하게 마시면 안되지요. 이제 마셔 보세요.
혀를뒤로 빼고 술이 입안에 들어오면 혀를 좌우로 살짝 움직이세요. 잘했습니다.
목 아래로 넘긴 후에는 코로 숨을 내쉬고 입으로 숨을 들이쉬는것을 서너번 반복하세요.
들숨은 위스키의 향을 오래도록 느끼게 해주고 토로 내쉬는 날숨은 위스키가 지닌 기운을
걸러내게 되요. 어때요? 괜찮죠?"
추림이 박경태가 건넨 술은 미뤄둔채 다시 술을 만들어 유미에게 주고는 직접 가르쳐주며
그녀가 이상적으로 위스키를 음미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좋아요. 부드러운데요? 하나도 안써요. 이거 되게 신기하네? 소주는 마시면서 쓴맛을 참
아도 양주는 그러지 못했는데 하나도 안써요. 왜 그래요?"
정말 술이 하나도 독하거나 쓰게 느껴지지 않아 유미가 신기해하며 추림에게 궁금증을 드
러냈다.
기분이 나빠진 얼굴로 추림을 슬쩍 노려보고 있던 박경태 마저도 정말 그런건지 하며 얼굴
표정을 바꾸고는 추림을 응시했다.
"당연히 그럴겁니다. 혀에는 맛을 느끼는 여러가지의 기능이 있는데 각기 단맛 쓴맛 짠맛
따위를 구분해내는 감각 기관이 존재합니다. 혀를 안으로 오므리고 술을 마시면 최초에 술
의 맛을 느끼는 기관인 혀의 위쪽 앞인, 단맛을 느끼는 기관에 도달하지요. 그것이 인간의
시신경에 명령을 하는 거예요. 이것은 달다. 그러므로 쓰지 않다. 맛은 쓰지만 인간의 중추
신경계나 미각기관은 그렇게 명령을 전달받고 속는 거지요. 어? 쓸텐데 이게 왜 달지? 하고
말입니다. 어때요 이해가 가요?"
"되게 신기하다... 추림씨는 별걸 다 알고 있네요?"
"이건 아무나에게 전수하지 않는 비법인데 유미씨에게 특별히 알려드리는 겁니다. 어디가
서 소문내지 말아요? 큰일납니다."
"에? 왜요?"
"제가 한국 주류협에에서 훔쳐온 거니까요. 아셨죠?"
"뭐라구요? 난 또!"
유미가 어이없이 웃자 추림도 그녀를 마주보며 웃었다. 박경태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노
골적으로 불편한 마음을 드러냈다. 자신이 권한 술은 결국 쓰레기가 된 것이다.
"추림씨 술을 상당히 잘 마시나보군? 사실 난 그리 술을 즐기지 않아서 말이지."
"즐깁니다. 그냥 시간이 날때면 술을 찾곤 하는데 그리 의지하거나 그러지는 않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나이도 어린 사람이 그러면 안되지? 자중하라구 그리 좋은게 아니니까!"
나이가 어리다? 인정한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서로 입장의 이
해도나 인정하는 부분이 상충할 때 듣기 좋은 말이 되는 것이다.
'넌... 아니다. 자식아!'
"아참! 내가 유미와 서로 결혼 할지도 모른다고 이야기 했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누가 누구랑 결혼을 해요? 이제는 멋대로군요!"
유미가 발끈해서 박경태에게 쏘아 붙히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기만했다.
"이거 왜 이래? 아버님도 인정하신 일이라고? 또 난 너 정도는 충분히 감당하고 행복하게
해줄수 있을 만큼 넉넉한 남자야. 잘 알고있으면서 꼭 확인하려 들어."
"도저히 누구와는 이야기가 안되네요. 좋아요 추림씨 솔직하게 말할께요."
유미가 박경태의 그런 행태를 질려하면서 지난주에 있었던 그와의 일을 조심스럽게 이야
기했다. 대놓고 도와달라 말하지 않았지만 추림은 충분히 알아들었고 그녀의 입장을 충분
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 그 이갸기는 하지 않았군! 이봐 추림씨 유미가 추림씨를 아주 대단하게 생각하던데, 어
때 솔직히 이야기 해보지 그래?
"그만요! 더이상 말하지 말아요! 그만 가요 추림씨! 여기에 더이상 있고 싶지 않아요."
유미가 성난 얼굴로 박경태의 말을 막으며 추림의 팔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려했다.
그런 유미를 추림은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되려 유미의 팔을 잡고
다시 앉혔다.
"유미씨. 전 유미씨의 어떤 사람도 아닙니다. 현재는 그렇지요. 현재는 말입니다. 제가 유미
씨의 사생활에 끼어들거나 관여할 자격도 권리도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때론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하고 강요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 그런일
에 매우 익숙하고 그러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한번 이야기 해볼게요. 제게 기회를 한
번 주시겠어요?"
부드럽게 웃음지으며 추림이 유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눈에 힘을 실었다.
유미의 시선도 그를 바라보다가 눈꺼플이 파르르 떨리며 그녀의 고개가 아래로 떨구어졌
다.
"좋아요. 어떤 행동을 해도 놀라거나 절 의심하지 말아요. 앞으로 절 더욱 많이 알게 될지도
모르는데 여기서 만약 제 어떤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또한 추림이고 아주 일부분에 지나지
않을수도 있을 겁니다. 이해하셨지요?"
추림의 말에 유미가 고개를 끄덕임으로 그의 말을 수긍으로 받아들였다.
"다정하군. 역시 여자는 저래야 맛이야. 신기한대? 나안테는 얼음이 풀풀 날리는 유미가 추
림씨 안테는 얌전한 고양이 같으니 말이야."
추림이 박경태를 마주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가 말하는 동안 추림은 이놈과 대화하다가 통하지 않으면 아예 굴복 시켜 버릴 작정이었
다. 그것이 힘이든 어떤 것이든 이놈으로 인해 유미가 힘들어하고 부담스러워 하고 있었다.
추림이 자신의 크라스에 술을 한아 가득 따라 단숨에 비워냈다. 그리고는 술병을 들어 박
경태에게 불숙 내밀며 말했다.
"예전에 제가 열여섯인가 되었을 땝니다. 우리 고향에는 군부대 투성인데 그 중 가장 유명
하고 무서운 한 부대가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솔져레벨에서는 대한민국 최고라고 해도 과
언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야생맷돼지를 맨손으로 때려잡아 식용으로 쓰고 대검 한자루를
들고 야산에서 사개월을 버틴다고 합니다."
이야기 하다가 박경태가 마지못해 내민 술잔에 조금전 처럼 술을 한잔 가득 따라부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잔에 다시 술을 따라 채웠다.
"제가 술을 처음 마신것은 제 나이 불과 열세네살 때였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마신것
은 제가 그 부대의 일과 관련이 있고 나서였습니다. 어느날 한 동네에서 잔치가 열렸는데
제가 시내로나가 술을 사오게 돼는 심부름을 가게 되었습니다.
자전거로 이십분을 죽어라고 달려 시내로 나가 술을 사고 돌아오는길에 보았습니다.
훈련을 나갔다가 귀대하던 그 부대원 중 두명이 길에서 살벌하게 싸우고 그 두명 중 한명
의 목이 이렇게 돌아가서 부러져 죽는것을!"
추림이 두손으로 자신의 목을 잡고 한쪽 방향으로 돌리는 흉내를 냈다.
"건배하죠? 정말 살벌하더군요. 사람이 사람의 목을 잡고 비틀어 죽이는 장면을 바로 코앞
에서 목도하는 일이란 정말 끔직하고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한명이 산속으로 사라지고 저와 죽은 군인만 남았는데 전 그냥 돌아갈수가 없었습니다.
어떻해서든 죽은 군인을 데려가려했죠. 큰길을 놔두고 지름길을 택한 벌을 받는구나라고
생각했죠. 칼에 낭자되고 목이 꺽여 덜렁거리는 몸을 제 힘으로 감당 할 수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 두려웠고 무서웠던거죠. 그 순간 자전거가득 실린 술병들이 보였습니다.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추림이 잔을 들고 술은 마시지 않고있는 박경태에게 잔을 내밀어 건배를 제의했다.
다시 술을 비워냈다. 그러자 그런 추림의 모습을 눈을 찡그리고 바라보던 그가 호기가 치
솓았는지 숨을 헐덕 거리며 겨우 크라스를 비워냈다.
숨도 쉬지않고 물잔에 입을 처박은 그가 벌컥거리며 물을 연거푸 마셔댔다.
"겨우 열 대여섯살 먹은 꼬마가 무려 소주를 여덟병이나 마신것입니다. 그리고 만취가 되
어서 군인의 시체를 자전거에 실은채 잔치집으로 끌고왔죠. 또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추림이 이번에 자신의 잔에 술을 채우고 기다리지 않고 박경태의 잔에 술을 부어 채웠다.
그런 추림을 바라보며 박경태의 얼굴은 못볼것을 보는 얼굴처럼 변해 버렸다.
"사흘만인가... 정신을 차리고 엄청 끌려 다녔지요. 군부대 경찰서를 집처럼 드나들고 한달
이 다 지나서야 자유가 되었지요. 또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추림이 다시 그 말을 내뱉고 박경태의 얼굴에 시선을 둔 채, 크라스를 들어 술을 벌컥 거리
며 들이켰다.
지독하다. 벌써 세잔째다. 입도 축이지 않고 안주도 먹지 않은 채 꿈쩍도 않고 들이켰다.
"밤마다 악몽이 되더군요. 제가 그때부터 이렇게 지독한 열병에 시달렸습니다. 서울 생활
하면서 쓰레기 같은 일을 할 때 늑대처럼 거리를 쏘다녔죠. 돈을 아끼려고 주린 배를 안고
춥고 허전한 날엔 쓰고 독한 싸구려 술을 서너병쯤 마셔야 자곤 했습니다. 지금도 가끔 힘
들고 외로울때면 유일하게 날 위로해주고 알아주는것은 이놈들이 유일하죠."
술을 한잔 채우고 나니 술이 떨어졌다.
"후후. 사는게 무엇일까? 어린 사람은 이렇게 살았는데 나이많은 당신은 왜 나같은 경험
도 해보지 못하고 술의 참 맛도 모를까? 잘난 부모가 덕이 있어 지닌 즐거움을 넌 그것이
마치 자신이 일군 것인냥 아무렇게나 소진하고 탕진하며 살고 있을테지?"
"뭐라고? 이자식이 말을 막......!"
"입닥쳐라! 한마디만 더하면 널 여기서 아까 그 군인처럼 목을 비틀어 버릴테다! 시험해봐
라. 내가 이기나 네놈이 이기나 한번 시험해 볼테냐?"
추림의 얼굴은 차갑고 암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추림이 화가나면 더욱 냉정해진다.
그 표정이야 말로 그가 지니는 야수성의 두얼굴이었다.
추림의 기세에 눌린 박경태가 얼굴을 하얗게 질린 채 부들부들 떨었다.
유미마저 너무 놀라 손으로 입을 가리고 몸을 가늘게 떨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다.
언제나 다정하고 따듯했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화를 내고있다.
"넌 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것이 모두 부정이고 비진리라고 믿겠지? 네가 가두고 정한
세상에서 너대로의 방식대로 세상을 살았겠지? 여자는 얌전해야 하고 남자의 전유물이어
야 한다는 그 웃기지도 않은 사고방식으로 아무 여자에게나 다가가 울리고 빼앗고 상처주
고 했겠지? 말해봐라? 네가 살면서 일한 시간에 대해 말해봐라! 부모를 떠나 너의 힘으로
삶을 개척한적은 있나? 길을 걷다 힘겨워하는 사람을 동정으로 바라보고 너의 두 손으로
그들을 도운적은 있나?"
"이... 이게! 나이도 어린놈이!"
얼굴이 씨벌겋게 변한 박경태가 추림을 금방 한 대 칠 것 같은 몸짓을 보였다.
그래도 욱하는 성질은 있는지, 자신보다 작고 곱상하게 생긴 추림이 만만하게 보였는지도
몰랐다.
"참고로 난 싸우면 상대를 병신을 만들거나 반쯤 죽인다. 확인하고 싶다면 도발해봐라. 넌
허세가 한강만큼 깊고 거만은 난지도 땅속만큼 더러운 놈이다. 넌 용기도 없고 남을 위해
자신을 버릴줄도 모르는 비인간이다. 넌 잉여인간 이란 말이다! 이 여자를 봐라. 이렇게 두
려워서 떨고 있다. 당혹감에 안스러워하고 있다. 유미씨가 네 여자라고 치자! 그리고 내가
지금 유미씨를 범하려 하거나 너에게서 빼앗아 가려 한다면 넌 유미씨를 지켜낼 수 있나?
넌 어리석은 놈이다! 네가 지닌것은 너의 그 나약함임을 너는 모르고 있다.
나와 유미씨가 어떤 사이인줄 궁금한거냐? 그녀는 나랑 결혼 할 사이다. 못믿겠다고?
나도 너의 말을 믿지 못했다. 아니 안 믿었다. 넌 그런 놈으로 내게 첫 인상을 준 놈이다!
너는 상대에게 그런 사람이다. 신뢰도 없고 믿음은 더더욱 없으며 존경할 구석은 더욱 없겠
지. 너의 가치를 스스로 깨닫고 타인을 저울질하려거든 해라."
추림이 가라앉은 얼굴로 분에 못이겨 씩씩 거리는 박경태를 응시하닥 맥주를 한 병 땄다.
"마셔라! 내게 형이란 소리 들을 생각마라. 내가 너였다면 여기서 싸우다 죽었거나 인정했
을 것이다. 네가 가진것은 지금의 이런 너의 모습이다. 사람을 때려본적 있나? 피가튀고
뼈가 부러지는 싸움을 해본적 있나? 일하다 너무 피곤해 쓰러져 잠들어 본적 있나? 너의
누군가가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에 몰래 슬퍼하고 눈물 흘려 본적 있나?
그런것이 없었다면 넌 헛된 삶을 산것이다. 사람다운것! 너의 부모님은 널 인간으로 세상
에 잉태하셨겠지만... 신은 널 사람으로 살아가라 운명했겠지만 넌 기본적으로 그들의 바
램을 저버린 헛된 인간인 것이다. 봐라! 너의 가슴속에 무엇이 있는지! 열어봐라!
네 가슴속에 널 스스로 감동시키고 타인을 울리게 할만한 추억이 있고 슬픈 사연이 있는지
보여봐라!"
고개숙인 유미의 몸이 가늘게 떨리는것이 감정적 변화가 있는듯했다.
박경태는 이제 추림의 이야기에 몰입해 있었다. 분노도 화도 시기도 사라지고 멍하니 추림
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어째서 유미씨를 너의 소유물로 착각을하고 그리 쉽게 가벼운 여자로 대한 것이냐?
네가 그렇게 대하는 한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소중하고 사랑스러우며 존경할만한
사람일수도 있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냐?
여자! 너의 어머니도 여자다. 너에게 가까운 사람중, 여자가 절반은 될 것이다. 그런 그들은
다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사람인 것인가? 유미씨를 사랑하나? 아니 좋아하는 감정이
있나? 있다면 넌 정말 나쁜 자식이다! 최소한의 감정이 있고 관심이 느껴진다면 이미 그 사
람을 존경하고 있다는 의미다. 네가 유미씨에게 대한 행동을 되새겨봐라.
널 스스로 유미씨에게 가치있게 만들어도 충분한 시간이 네게 허락되어 있었을 것이다.
넌 지금 유미씨와 결혼한다해도 아무런 행복도 즐거움도 주지 못할 남자다.
네가 지니고 있는것 중 단 하나라도 유미씨가 존경하고 동경할만한 것이 없다면 그것은 오
로지 불행만 있을 뿐이다."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는 레스토랑안이 갑자기 정적이 찾아온듯했다.
추림이 하는 말은 가게 전체로 퍼져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처음엔 짜증을 부리고 욕을 해대던 사람들이 언제부턴가 조용하게 침묵을 지키며 귀를 기
울이고 있었다.
"정당하게 사는것! 공평하지 않더라도 내것을 조금 덜어가며 사는것!
너나 나나 유미씨나 생긴 모습은 다르지만 같은 인간이란 이름이 있고 뜨거운 피가 흐르며
같은 형태를 지녔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건 너와 나 혹은 다른 이들도 모두
같다는 것이다. 남을 비방할 자격은 있지만 상처줄 권리는 없다. 나또한 타인을 억압하고
나쁘다 매도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최소한 정말 최소한 그마저도 지키지 못한다면 단 하
나만은 그래도 지켜야 하는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너의 양심이다!
인성을 잃어도 끝까지 남는 유일한 것이 양심이다. 인성을 잃은자는 살인을해도 스스로를
천하다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양심을 잃은자는 모든것을 잃은 잉여인간이 되는 것이다.
넌 이렇게 살다가 양심을 잃어버리는 추한 인간이 될테냐?
내가 지금 네게 이런 말하는 것이 내가 잘나서가 아니다. 단지 난 네가 인정하지 않는 양심
을 인정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것만이 너와 나의 차이다. 다른건 없다.
너도 원래는 이런 사란이 아니었을 테지? 조금씩 삐뚤어진 너의 사고가 널 변질시켰을 테
지. 넌 지금 무척 힘들게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테지. 너의 이성은 아니라고
하는데 너의 행동은 널 배신하고 점점 추하게 만들어 가고 있을테지.
아름답게 살아라! 다른게 아니다. 너를 뒤돌아보고 상대를 뒤에서 바라보란 말이다.
분명 달라질 것이다. 다르게 보일것이고 넌 즐거워질 것이다.
나보다 넌 더 많은 물질을 지녔을 테지만 넌 나보다 불행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다. 왜인줄 알아? 그것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너이기 때문이다. 난 지닌 물질이 없으면
서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알고있으므로! 어떻게 살아야 즐겁고 행복한지 너보다 나이
가 더 어린 나는 알고 있단 말이다.
널 다른이에게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을 때 누군가를 사랑하고 욕을 해라.
남자가 치사하고 비겁하게 배경과 단순한 힘만으로 우월하려 하지 말아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미가 어느새 얼굴을 들어 추림을 응시하고 있었다.
복잡한 얼굴을 하고 추림의 말을 듣는지 아닌지 모를 박태경의 눈빛이 흐릿하게 변했다.
"누나가 있었다. 어릴적에 고아원에서 입양한 누나였는데 난 그 누나가 친 누나인 줄 알았
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였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 누나가 보이지 않아서 한
참을 찾고 밤이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에게 물어보고 아버지에게 여쭤봐도 모
른다고 대답하셨지. 내가 무척 잘 따르고 날 아주 귀여워 해주던 누나였는데... 그 누나를
아버지와 엄마가 고아원으로 보내 버리셨다. 그것을 이년이 넘게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뒤로 난 아주 못된 아이가 되었다. 남을 시기하고 비방하고 욕하고... 집안에서 늘 천덕
꾸러기였고 말 안듣는 아이가 되버렸다. 언젠가... 언젠가 찾아올 거라 믿었는데 결국 지금
껏 그 누나는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나는... 항상 그 누나가 보고싶었는데......!"
박태경이 처연한 얼굴로 말을 하며 끝에 눈물을 흘리며 숨죽인 채 테이블 위에 고개를 묻
었다.
그의 그런 행동이 뜻밖인지라 유미가 놀라 추림을 돌아보았다. 그이 그런 과거도 놀라운
것이고 저런 나약하고 슬픈 모습도 놀라운 것이다.
갑자기 심경의 변하를 일으킨 박태경! 추림은 그에게 말을하는 내내 그가 변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눈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단상이 스처지나가고 감정이
물결친 그의 눈은 어쩌면 그가 잃은 순수함을 되찾고 있는 과정일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악하거나 순수하지 못한 사람은 없다. 박태경 그도 그런 사람일 것이다.
변화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대라면 말을 하지못할 것이지만 왜 이렇게 살아가느냐고 묻
는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할말이 무척이나 많아진다.
그도 그랬을 것이다. 어느날 부터 일그러지고 삐둘어진 자신을 느끼면서도 되돌리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슴속에 새겨진 상처가 회피의 장소를 방탕으로 택했으리라!
그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오른다. 변할수도 있고 아닐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느끼고는 있을 것이다. 자신이 잃은 것이 무엇이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
로 원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은 다 똑같은 모습이다. 회귀본능을 지녔고 악보다 선을 좋아하는 감성을 지녔다.
못됐다고 하는 사람과 잠깐의 대하를 하다보면 결코 그가 그렇지 않은 사람임을 아는데는
채 십분도 안걸린다.
스스로를 깨닫고 있지 못한것! 그것이 문제다. 자신을 강하게 컨트롤하고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 그것을 능히 제어할 수 있다면 인간의 본질은 아마 지금보다 더 예민하고 섬
세해 질 수 있을 것이다.
"나 먼저 가겠어!"
박태경이 그 말을 남기고 벌떡 일어았다. 유미를 잠시 보고 추림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그
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형이라고 부르게 해주지. 계산은 하고 갈거야."
어딘가 쓸쓸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홀을 가로질러 현관 입구로 다가가 카운터에 멈추고
곧 다시 걸어나가 모습이 사라졌다.
두시간이 넘게 이야기한 추림은 머리가 어질거렸다.
술을 급하게 마셨고 쉬지 않고 떠들어 대서인지 심기의 소모가 적지 않은듯했다.
숨을 여러번 고르자 몸이 붕 뜨는듯한 느낌이 들고 몸이 와르르 무너지는듯했다.
"힘들었지요? 미안해요 저 때문에 괜히."
"알긴 아세요? 절 이렇게 항상 불안하게 하실겁니까?"
"예? 아예. 그냥 너무 피곤했어요. 그런데 한편으론 시원하면서 한편으론 미안하기도 하네
요. 괜찮겠지요?"
"좋아지길 바래야지요."
"저 너무 놀랬어요! 추림시가 설마 그렇게 무서우리라곤 상상도 못했거든요."
"그랬어요? 이런... 연극한건데 잘 속아 넘어가셨네. 너무 완벽했나?"
농담이지만 유미는 그가 정말 무서웠다. 화를 안내던 사람이 화나면 더 무섭다고 하더니
추림이 딱 그랬다. 지금 다시 이렇게 부드럽고 얌전한 사람으로 돌아 왔지만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그런 모습은 괜히 허세를 부리는것이 아닌 진짜처럼 느껴졌다.
수연이나 친구들에게 들은 것 처럼 그는 화나면 정말 무서운 사람이 되는구나 싶었다.
박태경, 그 남자를 정말 어떻게 할 것 같아 두려웠다.
"저 술이 올라오는데요. 이거 큰일이네... 억지로 마구 마셨더니... 제가 미쳤었나봐요.
어이구 속이야!"
"에게게? 그게 뭐예요? 조금 전에는 무슨 영화의 한장면 같더니."
"하하!남자는 배짱입니다! 술도 그렇게 멋지게 마셔 줘야지 상대에게 통하는 법입니다."
"그러다가 정말 임자 만나면 어쩌려구요?"
"그때는... 36계 줄행랑을 놓아야죠. 죽어라고 도망가는 겁니다."
"이제 보니 순 거짓말이었군요!"
"어? 아셨어요? 이거 틀켜버렸네. 유미씨 우리 밖에 나가요 너무 답답하고 사람들 시선도
부담스럽네요."
"좋아요. 어디가서 못마신 술이나 실컷 마셔 봐야겠어요. 저 구정이후 처음 나오는거에요."
"좋습니다. 아이구... 약국부터 들려야겠네!"
"호호! 크일이네요. 어서가요."
추림과 유미가 자리에서 막 일어나 걸어 나가려 할 때였다.
"유미야!"
유미를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에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옷을 멋드러지게 차려입은 하얀 피부의 사내가 정면에서 여자 한명과 다가오고 있었다.
"오빠? 여긴 웬일이야?"
유미의 오빠 유혁이었다.
"너 오기전부터 있었다. 그런데... 전 유미 오빠되는 사람입니다."
유혁이 추림에게 밝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해왔다.
느닷없는 유미의 오빠가 등장해 당황한 추림은 조금 난감한 얼굴로 그의 손을 맞 잡았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이추림이라고 합니다."
"유혁입니다. 조금전! 아주 멋졌습니다. 이 친구는 울더군요."
"예? 아 그러셨어요?"
추림이 유혁이 여자를 가리키며 말하자 멋적은 얼굴이 되었다. 본의 아니게 공개된 장소
에서 부끄러운 행동을 한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져왔다.
"유미야? 나가려구? 우리도 나갈건데 같이 가서 한잔?"
"아니. 따로 가서 드셔!"
"뭐야? 저기 이추림씨? 유미가 반대해도 그쪽은 물론 수긍하겠지요? 어때요? 마침 보고 싶
기도했고 오늘 감동도 있었는데 제가 한잔 사겠습니다."
어색한 자리가 될 것이지만 이런 분위기를 이끄는데는 추림만한 사람이 또 없다.
거절하면 죽일놈쯤 될 것이다.
"네. 좋습니다. 같이 가시죠."
"추림씨 괜찮겠어요? 속도 않좋다고 하셨으면서?"
유미가 걱정이 되는지 넌즈시 강조하며 물었다. 사실은 단 둘이 같이 있고 싶어서였는데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 뭐... 견딜만 합니다. 가시죠 유미씨."
"좋았어! 자 갑시다. 동지들. 오늘은 내가 쏜다!"
유혁이 기분이 좋은지 곁에 선 여자에게 팔을 두르며 몸을 돌렸다.
유미가 혀를 내밀어 언잖은 마음을 대신하고 추림을 바라보며 베시시 웃었다.
지난번 그렇게 헤어지고 그 여운을 달래지도 못하고 제대로 대화하지도 못했는데 방해꾼
이 나타난것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어쩔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 오빠였고 마침
기회다 싶기도 했다. 오빠에게 추림을 근사하게 소개하고 싶었다. 이미 보았지만 정식으로
인사 시킬 마음을 먹었다.
든든한 추림의 등을 바라보며 유미는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며 레스토랑을 빠져나갔다.
"저놈 누구야? 남자답게 행동하는게 어디서 영화는 많이 본 모양인것 같더만."
뒤에서 손님 중 누군가가 일부러 소리높여 떠드는 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레스토랑 풍차 안에는 다시 비틀즈의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있는 져녁이었다.
(23장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