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사랑 (23장/ 욕망은 폭풍이 되어..) <실극화>

추림의 풍200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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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은 두렵지 않아 눈물은 참을수 있어

하지만 홀로 된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해......

 

그가 변진섭의 노래 홀로 된다는 것을 부르고 나서 갑자기 취기를 보였다.

삼차째 단란주점에서 자리를 했을때 오빠 유혁과 그는 쌍으로 대취해 버렸다.

 

레스토랑에서 나와 두번째로 학사주점에 들러 자리 했을때 오빠 유혁은 자신의 성격을 고

스란히 드러냈다.

 

오빠 유혁은 호탕하고 낭만적인 곳이 많은 사람이었다.

기질이 호방하면서도 생각이 많은 남자였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대화하기 좋아했는데 그것은 추림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점이기도 했다.

 

추림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마음에 든다며 크라스에 소주를 가득부어 원샷에 잔을

비워버리는 무식함을 드러냈는데, 그것을 유혁은 배짱이고 터프함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유미와 오빠의 새애인은 무식함의 극치라고 놀렸다.

 

소주를 일곱병을 나눠 마시고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내기하듯 술잔을 빠르게 비워

나갔다.

 

추림은 이미 레스토랑에서 취기가 있었다.

독한 양주를 혼자서 비우다 시피하고 맥주도 그가 대부분 마셔 버렸다.

 

"야! 넌 참 멋진 놈이다! 자식아! 우리 유미 만만한 놈 아니니까 얼렁뚱땅하면 재미없을 줄

알아... 남자는 배짱이다! 배짱!"

 

유혁이 잔득 취해 몸도 제재로 가누지 못하면서 절반은 발음이 엉망인 말로 추림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호기롭게 소리쳤다.

 

"형님 이제 그만 들어가시죠. 오늘 즐거웠습니다."

 

추림은 의지력으로 술기운을 버텨내며 유혁의 팔을 슬며시 풀어내며 말했다.

 

유미는 추림이 안스럽다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남에게 기분을 맞추어주고 자신은 일단 참고보는 남자, 추림.

그가 왜 저렇게 알고 지내는 사람에게는 유독 약한 모습을 보이는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

았다.

 

"야! 우리 한잔 더하고 가자. 어때? 오케이? 유미야 오빠 한잔 더 할란다!"

 

"아휴! 이제 그만좀 해 혁씨! 너무 취했다구요!"

"그래 오빠 이제 그만 들어가던지... 몸도 가누지 못하면서 무슨 또 술이야! 이제 그만!"

 

유혁의 여자친구와 유미는 주사가 드러나려하는 유혁의 등을 떠밀며 엉뚱한 곳으로 가려는

그를 말렸다.  

 

"이런 제기랄! 나 안취했어. 안 취했다구! 보라구... 어? 너 누구세요?"

 

유혁은 안취했다고 말하면서 걸음을 옆으로 걸으며 유미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이구! 오빠 맞어? 언니 얼른 오빠 데리고 먼저 가세요. 이러다가 길거리에서 밤새게 생

겼어요."

"그래야겠어요. 먼저 갈게요. 오늘 즐거웠고 다음에 또 볼수 있으면 좋겠어요."

 

"네. 당연히 봐야죠. 조심히 가세요."

 

유미는 이 순진한 여자가 오빠에게 어떻게 넘어갔는지 안봐도 훤하게 안다.

좋은 여자처럼 보였다. 술도 많이 마시지 못하고 말도 많지가 않다. 하지만 똑똑해 보였고

정이 많은 여자였다.

 

"조심히 가세요. 힘드시겠지만 형님을 부탁드립니다."

"네. 추림씨 오늘 힘드셨죠?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자기가 왜 추림씨를 또 보면 좋다고 한담!

 

추림도 많이 취했지만 억지로 버텨가며 극구 택시를 직접 잡아 세웠다.

 

"가자! 술마시러 가자고... 나 않취했다구......"

 

술취한 사람이 자기입으로 취했다 말하는 이 적은 법이다.

 

택시안에 유혁을 억지로 밀어넣던 유미는 풀썩 웃고 말았다.

걸어서 집까지는 십분 거리다. 도대체 왜 그 거리를 택시타고 가는걸까? 어디로 가려하는

지 생각하자 절로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택시가 출발하고 추림과 둘이 남게된 유미는 피곤해 보이는 추림을 바라보며 조용히 한숨

을 내쉬었다.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거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괴성을 지르기도 하고 우는 사람들도 있었고 다투며 싸

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내일이면 모든것이 꿈처럼 여겨질 것이다.

 

"유미씨. 저 아무래도 이러다가 바보 될지 모르겠어요. 정신이 하나도 없는게 내정신이 아

닌데요. 오늘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네요."

 

취해있지만 정신만은 놓치지 않고 있었다.

오빠보다 훨씬 많은 양의 술을 마셨지만 그는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중이다. 정신력!

그것외엔 달리 이해할 길이 없다.

 

유미는 그가 차라리 쓰러지기라도 했으면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 자신이 취해서 정신을 잃었을 때 그는 자신을 업고 한참을 걸었다. 그 느낌이 아직

너무도 생생했다.

 

그리고 약간의 후회도 들었다. 오늘 어쩐 일인지 술정신이 멀쩡했다.

자신이 취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그는 어쩌면 자신을 또다시 챙기려 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 남자는 여느 남자들과 확실히 구별이 가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지 않지만 대신 다른 표현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이곤 하는 남자였다.

단란주점에서 자신에게 넌즈시 좋아하는 노래를 물었다. 장르가 너무 뻔했지만 그는 자신

이 좋아하는 장르를 중심으로 노래를 불러 주었다. 그것이 곧 자신을 생각하는 그의 마음

일지도 몰랐다.

 

거리를 잠시 걷다가 추림이 입을 열었다.

 

"많이 늦었어요. 이제 들어가 보세요. 저 그냥 갈께요."

"......"

 

유미는 그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도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같으면서도 달라야 하는 것은 서로가 믿어주고 지켜주고 싶은 순수한 감성의 발로

일 것이다.

 

"전 여기서 잠시 쉬었다가 갈께요. 커피나 한잔 하면서 정진좀 차리고 가야겠어요. 아우 춥

다. 오늘 재밌었어요?"

"예. 재밌었어요. 고민거리도 해결되었고... 무엇보다 오빠가 추림씨를 본것이 기분 좋았어

요. 추림씨를 보고 싶다고 했었거든요."

 

"그랬군요. 다행이에요. 참! 지난번... 선물 고마웠어요. 전 바보라서 손수건을 사용하지도

못할 거예요. 오래도록 간직할게요."

"... 너무 갑작스런 소식이라 대충 준비한건데... 다음에는 더 좋고 멋진걸 선물할께요."

 

"아니요. 전 받는것에는 익숙하지가 않아요. 주는 것은 그런대로 솜씨를 발휘하지만... 받

는것은 영... 그건 그렇고 생일이 언제예요? 알고 싶은데 한번 말해보세요."

"전 조금 특이해요. 석가탄신일 날 태어났거든요. 재미있죠?"

 

"아! 4월 8일! 정말 그렇네요? 복받은건지 우연인지 참 특별하기도 하네요. 기억할께요."

"정말요? 좋아요.한번 기다려 볼께요."

 

무척 추운 날씨였다.

코가 빨갛게 변한 유미가 몸을 덜며 어깨를 움츠리는 모습에 추림은 얼른 그녀를 이곳에서

보내야 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아당겼다.

 

"자 악수요... 차갑네요. 이제 그만 들어가세요."

"네에... 왜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가는걸가?. 전 아직 하고 싶은 말도 다하지 못했고 술도 채

못마셨는데!"

 

"하하. 제가 대신 마시고 놀았잖아요. 어? 파란불이! 가세요! 전화드릴께요! 아니 유미씨

가 하는게 낳겠네요. 어른들이 계셔서 전 좀 그래요."

"네에... 그럼 안녕히 가세요."

 

기운없는 음성으로 나지막히 말한 유미가 힘없이 추림의 손길에 떠밀려 횡단보도를 건넜

다.

 

가슴이 울컥거렸다.

뭘 바라는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자신을 보내버리다니... 추림이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로를건너 뒤를 돌아보니 추림이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였다.

 

피곤한 모습이 멀리서도 보이는듯했다. 마주 손을흔들어 한참동안을 바라보니 추림이 손

짓으로 어서 가라고 하는듯 했다.

 

몸을 돌려 걸었다.

눈물이 나려했다.

 

"칫! 나쁜... 뭐야 이게... 오빠는 괜히 와가지고... 다 싫어. 싫어!"

 

자신의 감정에 화가난 유미가 짜증스런 말로 화를 대신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추림이 차라리 여느 남자들처럼 과격하거나 거칠게 대해 주었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만나면 그렇게 한다고 했으면서... 마음이 휑량하게 느껴졌다.

이 끝없는 비정체성의 혼동을 도대체 어떻게 가누어야 하는지 힘겹기만 했다.

 

오늘 하루내내 그에게 너무 미안했다. 박경태와의 추한일로 그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것 같았고 오빠마저 나타나 그를 더욱 부담스럽게 한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이 떠오르지가 않았다.

헤어진지 겨우 십분도 안되었는데 갑자기 기억나지 않자 당황스런 기분이 된 유미는 길을

걷다 멈추고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눈이 시큰거리는것 같았다.

왜? 왜 이러지? 이게 뭐지? 왜 가슴이 이리도 허전하고 더욱 춥게 느껴지지.....

마음이 갈갈이 찢기어 지는것 같다! 머리속이 텅 빈듯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 홀로 떨어

진 듯한 기분이 든다... 이게 도대체 뭐지? 왜 이리 추운걸까! 나 우는거야?

 

"......!"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보는 유미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또르르하고 떨어져 내렸다.

멀다... 겨우 몇분 걸었을 뿐인데... 너무 멀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그는 지금 갔을까? 많이 취했는데... 보고싶어... 너무 보고싶어... 보고싶어!

 

바람이 불고 추위는 여전했다.

추림은 거리 자판기에서 진한 검은색, 블랙 커피를 뽑았다.

건물 계단밑에 몸을 기대고 앉아 커피를 홀짝였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무기력한 육신을 길게 누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사람들이 수도없이 지나치고 조금씩 사람들의 모습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유미... 들어갔겠지.

일곱시간을 같이 있었으니 그것으로 된거야... 단 몇분을 보기위해 수십시간을 기다리고 길

을 달려오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만큼 보았고 같이 있었으면 된거야 그래 된거야.

 

길을 지나치는 몇몇 젊은 남자들이 길 한켠에 외로이 앉아 있는 추림을 놀리듯 쳐다보며

킬킬거리고 지나갔다.

 

유미가 건넌 횡단보도가 아스라히 느껴졌다.

그녀가 지나간 길이 흔들리면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삐뚤거리면서 흔들리던 길이 다시

하나로 합쳐지고 또렷하게 보였다. 자동차 한대가 그 길을 빠르게 지나가고 그 위에 희미

한 영상하나가 남겨졌다.

 

"그래... 그렇게 웃어... 넌 항상 울고 있는것 같아! 아주 보기 좋잖아? 유미야 그렇게 웃어

난 너의 그런 모습이 좋아보인다. 웃는거야 그렇게......!"

 

길위에 신기루처럼 보인것은 추림의 상상이었다.

그 비현실의 염원이 유미의 형상을 환하게 웃게 만들었고 추림이 원하는 모습으로 태동되

었다.

 

"춥다... 추림아! 이제 가야하잖아... 그만 갈까? 아니라고? 조금만 더 있다 가자고? 왜? 그

녀를 더 느끼고 싶다고? 바보자식! 그녀는 이미 갔어. 아마 지금쯤... 아니다. 나와 같이 있

을거야 늘 함께 말이지. 어디있냐고? 여기에있지!"

 

추림은 독백을 내뱉으며 가슴을 두드렸다.

턱선에 뚜렷한 이빨자국이 도드라졌다. 뭔지 모를 간정이 몰려와 얼굴이 화끈거려 참아내

려 힘을 주었다.

 

눈에 힘을 준 추림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너무 정신이 없는것 같았다. 차라리 그녀를 잡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마치 그림같은 광경이 펼쳐진 하늘이었다. 수많은 보석들이 찬란하게 시리고 투명한 겨울

의 하늘에 촘촘히 박혀 있었다.

 

외롭다... 이런것이 고독감이라고 하는것일까!

누군가... 그 누군가를 다시 만났으면 싶다. 혼자가 싫다. 둘이 아니어도 좋지만 혼자가 싫

다.

 

걸음을 옮겼다. 삭막하게 남겨진 도로가 보였다.

저멀리 취객이 비틀거리며 잔뜩 웅크려진 몸으로 길을 따라 걷는것이 보였다.

바람이 불어와 메마른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갔다.

 

남겨진 것은 외로움뿐이었다.

 

"저기 떠나가는 배 거친바다 외로이...

가는배야 가는배야 언제 우리 다시 만날까... 물결 너머로 어둠속으로 홀로

떠나가는 배... 언제 다시 오마는 허튼 맹세도 없이......"

 

담배를 피워물며 노래를 흥얼거려 잊으려했다.

이런 기분이 싫었다. 어자피 혼자 가는 길이다! 약해지지 말자!

 

도시의 빌등들과 암울하게 가라앉은 겨울의 풍경이 핑그르하고 돌았다.

술기운이 심했다. 쉬고싶었다.

 

"잘자요 유미씨!"

 

길가로 아주 느리게 나섰다. 이제 가야했다. 이만큼 기다려 주었으면 그녀가 집에 들어갈

시간은 충분할 것이다.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돌아가 쉬면 되는것이다......

 

"한번쯤... 안아 보아도 되는거 아니니?"

 

추림이 다시 낮게 울얼거렸다.

 

"그녀도... 그리 싫어하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아니라고? 그래... 내가 엉뚱하구나! 그런데 나 왜 이렇게 허전한거니? 취해서 그런가? 안

취했어. 보라구 나 멀쩡하잖아? 봐봐 저기 써있는 글자도 뚜렷하게 보이고 오늘이 며칠인

지,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 다 기억한다고... 나 속상한거 같아...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은데

... 솔직하지 못하다고? 그건 아닐거야... 단지 난... 그녀가 좋을 뿐이야... 그런거하고는 달

라. 다른거야... 나 지금 조금 힘들다!"

 

추림의 독백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거울을 보며 말하고 길을 걷다가 말하고 나무를 보며

말하기도 했다. 홀로 술잔을 두개를 놓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만의 대화였고 외로움을

이겨내는 방식이었다.

 

멍하게 넋을 놓고 길 위에 시선을 주고 잇던 추림의 눈이 흡떠졌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자꾸 생겨나려하는 유미의 영상을 털어버리려 했는데... 새로 생겨

난 유미의 모습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너무 또렷하고 명료하게 보이는 모습이어서 추림

은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다가온다... 그녀가 다가온다... 그모습 그대로 다가온다... 웃고있다... 그녀가 웃고있다...

이제 그만가도 돼요... 나 그냥 견딜 수 있거든요... 그만 가세요 유미씨... 제가 걱정되는군

요...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저 잘 견딜수 있는걸요... 다음에 만나면... 그때는 허락해 주세요

... 유미씨 손을 잡을수 있게 허락해 주시고 한번쯤 뻔뻔하게 안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

세요! 이제 그만 가세요... 더이상 다가오면 제가 견디지 못해요... 아아... 유미씨... 유미씨!

 

"추림씨!"

 

추림의 눈이 부릅떠졌다.

유미가 안겨왔다. 빠르게 다가와 몸에 부딪혀온 그녀가 품으로 뛰어들었다. 풀내음 처럼

싱그럽고 청량한 그녀 특유의 향기가 느껴지고 묵직한 육체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유미......!"

 

추림의 눈에 반짝 이슬이 맺혔다.

유미가 얼굴의 가슴에 묻고 추림을 바라본다. 울고있다, 붉게 변한 눈으로 추림을 보며 울

고있었다.

 

환상이... 신기루가... 현실이었다!

거짓말처럼 다가온 그녀였다. 아! 믿을 수 없었다!

 

"바보! 바보! 가지도 못할거면서... 여기에 머물러 있을 거면서... 잡지도 못하고... 바보!"

 

유미의 어깨를 추림은 깊게 감쌌다.

길을 천천히 걸으며 그들은 침묵했다. 말하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이 거짓말같은 우연의 감동을 곱씹으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전... 추림씨가 갔으면 울었을 거예요. 한번 되돌아 가자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어쩌면

그 자리에 추림씨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믿어지지가 않아요.

정말 제 바램을 들어주신 하늘에 감사할래요."

 

"모르겠어요. 제 마음을... 가슴이 아프고 힘들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쯤 집에 들어갔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쉬웠어요... 바보같다는 유미씨의 말. 맞아요. 저 바보예요. 그

것도 아주 큰 바보!"

 

추림을 올려다보는 유미의 얼굴에 행복한 웃음이 가득했다.

다시 만났다. 그도 자신을 기다려 준 것이다. 자신만큼 그도 자신을 보고싶어했고 기다린

것이다. 이젠 말하고 싶었다. 그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한다면 그가 어떻

게 생각할까......!

 

"집으로 가요. 솔직하게 말하는 겁니다. 오늘 하루... 유미씨와 밤을 보내게 해 달라고 빌었

어요. 아마 용서해 주시고 허락해 주시리라 믿어요."

"전... 추림시를 따라갈 거예요!"

 

엄마가 밤새 기다릴지도 모르지만 이 순간은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다.

불안해 지려는 마음을 인내라든가 그런것하고 바꾸고 싶지 않았다. 그와 그저 있고 싶었다.

 

'엄마 미안......'

 

택시에 몸을 싣고 잠깐만에 추림의 집에 도착했다.

 

추림의 손이 유미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불이 꺼진 방안에 추림의 옷을 갈아입은 유미가 그의 팔을 베고 누웠다.

처음에 난감해하던 추림은 결국 유미를 안아줄 수 밖에 없었다.

 

그뒤로 그들은 다시 침묵했다.

유미는 지난 번 추림이 잠들었을 때 그의 품에 몰래 안겨 키스를 한적이 있었다.

그때가 생각나 저도 모르게 조금의 설렘이 들었다. 그녀는 이 우연의 일치가 결코 그저 우

연이 아니라고 여겼다. 이 기회를 그냥 놓치고 싶지 않았다.

 

영원처럼 길게 느껴질듯한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느순간 이었다.

추림이 머리를 쓸어주는 손길을 기분좋게 느끼던 유미의 손이 추림의 옆구리를 더듬었다.

그리고 바로 엉덩이 부근까지 내려갔다.

 

추림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직감했다. 유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다음 행동을 직감할 수가 있었다.

유미의 손이 다시 허리와 배를 어루만지며 가슴을 쓸어올리며 목선과 얼굴을 훓고 지나갔

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유미의 손길이 기분좋게 작은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떨리거나 강한 자극은 느껴지지가 않았다.

순수하다는 것! 이 순간 자체를 그렇게 해석하고 받아들이고 싶었다.

 

마치 봄에 부는 미약한 훈풍과도 같은 유미의 손길은 엄마의 품과도 같았고 잔잔하 호숫가

의 파랑처럼 정겨웠다.

 

추림의 손을 잡아오는 유미의 손이 떨리고 있다.

손을 끌어 당긴다. 유미에게 손을 맡낀 추림은 곧 둔중하고 탄력있는 느낌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머리가 아득해지며 뜨거운 숨결이 토해졌다.

추림의 손이 유미의 옷을 헤치며 파고들었다.

 

유미의 가슴은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아주 적당하다 표현하면 좋을 크기였다. 자신의 가슴에 추림의 손을 올린 유미의 움직임은

멈추었고 추림의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추림의 손이 움직인다.

어색하게 시작된 그의 출발은 거칠고 투박했지만 곧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였다.

겨드랑이 부근을 살며시 길게 어루만지고 가슴 사이의 패인 곡선을 손가락으로 쓸며 아래

로 내려갔다.

 

묘한 충동과 흥분이 전률을 일으키며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아!"

 

유미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흐르고 몸을 진저리치듯 떨었다.

유려하게 뻗어내려가는 옆구리의 선을 따라 아래로 흐르는 추림의 손은 구름이었다.

허리를 둥글게 어루만지며 엉덩이를 움켜쥐고 허벅지 안쪽으로 구름이 흘러들어갔다.

 

다시 배위에서 머물며 노닐던 구름은 가슴과 목을 그리고 귓볼을 간지럽혔고 강한 바람이

불어와 구름은 떠밀려 가슴에서 돌개바람에 휘쓸렸다.

 

등에 당도한 그것은 갈증을 느낀듯 엄청난 흡입력으로 등을 할퀴고 물어뜯었다.

 

갑자기 엄청난 폭풍이 불어닥쳤다.

구름은 가슴과 배 허벅지에서 거칠게 밀려다녔다.

 

"......!"

 

추림과 유미의 눈이 정면으로 부딪히며 추림의 얼굴이 유미에게 다가갔다.

그의 채취를 한껏 느낀 유미의 눈이 감기며 입술이 벌어졌다.

추림의 입에서 강렬한 유혹이 느껴졌다. 추림의 입술이 유미의 입술에 닿고 둘의 만남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졌다.

 

섬광과도 같은 부딪힘은 격정으로 변했다.

뇌성이 치고 땅위에 번개가 내리꼿혔다! 산위에서 구름은 엄청난 비를 뿌렸다.

대지가 폭풍의 비바람에 잠기며 미칠듯한 광기에 휩슬렸다.

 

"아......!"

 

둥굴게 허리가 휘어진 유미의 입에서 원초적 신음이 터져나왔다!

 

추림은 폭풍이 되어 작은 대지를 할퀴고 휩쓸었다!

무자비한 폭풍은 잔인한 미소를 머금었고 섬뜩한 시선으로 사악해져 있었다.

 

"아......!"

 

탄성은 뜨거운 기운을 토해내며 힘겨운듯 두려운듯... 억압된 감정이 가득했다.

 

"추림... 사랑해요... 아... 추림! 사랑해요!"

 

어느덧 유미의 입에서 억눌린 음성이 미약하게 새어나오고 그녀의 눈에 이슬이 가득 고여

흘려내리고 있었다.

 

휘이이잉......

거친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고 지나가며 괴괴한 소성을 토해내고 있는 밤!

어디선가 또다른 세상을 만든 두 남녀는 격정의 밤을 불태우는 밤이기도 했다.

                                                                                                       (24장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