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율(礎律) 제 75화

피바다200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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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제 앞에서 물러난 아화는 다리에 힘이 풀려 연회용 긴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 앉았다. 범의 굴에 들어와 범의 이빨을 보고도 겨우 살아남은 토끼처럼 그녀는 온 몸이 덜덜 떨렸다.

  초율이 거대한 상체를 숙이며 그녀에게 유리잔을 하나 내 밀었다. 연두빛의 색이 고운 액체가 잔에 담겨 찰랑이고 있었다. 입이 바싹 타들어갔던 아화가 급하게 잔을 받아 입에 대자 강한 발효향이 훅 끼쳐왔다. 그리고 이어 찌르르한 감각이 혀를 통해 전해졌다. 사람들은 아직도 그녀와 초율에게 관심의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아화는 술기운이 긴장을 누그러뜨리자 극도의 피로감을 느꼈다. 시선의 부담이 없는 곳으로 가 쉬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초율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옆에 선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아 그녀는 혼자 이 힘겨운 시선들과 장소를 버티어내야만 했다.

  흥겨운 음악이 연주되고 황궁의 무희들이 몰려나와 축하연을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은 겨우 둘을 떠나기 시작했다. 아화는 숨통이 약간 트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기회를 이용해서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애써 몸을 추스려 자리를 털고 일어선 그녀의 결심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 제공이 어느 새 자신들의 앞에 와 있는 것이었다. 그는 먼저 초율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정한 눈으로 아화를 향해 웃어보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 제 4황자께 남방성 증장천왕 제공이 인사올리옵니다. 아버지이신 천제 전하의 생신 또한 감축드리옵니다."

  초율은 철로 된 기계통이 울리는 듯 움직임없이 무미건조한 어조로 응답했다.

  " 안그래도 조만간 네 면상을 대면하려했다."

  제공은 그런 반응조차 반갑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 저에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셨는지요? 아니면 저에게 드디어 술 한 잔 할 기회를 주시려하셨습니까?"

  하지만 초율은 그런 그의 즐거운 표정에 물을 끼얹으며 차갑게 할 말을 이었다.

  " 얼마 전, 북궁 근처에 개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더군."

  제공은 잔잔하게 미소지으며 말을 받았다.

  " 아이구, 들개가 제황성에 들어와 돌아다니더이까? 그리하여 어찌하셨나이까? "

  " 내가 키우는 개가 먹어치워 주었다. 털 한 올 남기지 않고 아주 깨끗하게 말이다. 맛이 있었는지 흥분하더군."

  아화는 둘의 대화 속에 숨은 경고의 의미와 팽팽한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초율은 대화 중에 다시금 자신의 살기와 잔인성이 날뛰도록 감정을 풀어놓았다. 아화는 절로 소름이 돋았다. 4황자는 정말이지 극단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태연한 제공을 보면서 아화는 제공 역시 만만한 인물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한 번더 깨달았다.

  제공은 한 치의 헛점도 보이지 않고 응수했다.

  " 전하께서 키우시는 개도 보통 사나운 종이 아닌가봅니다. 다음에 한 번 보여주시겠습니까?"

  " 또 다시 개가 내 주변을 어슬렁거릴 시엔 내 개가 그의 주인까지도 찾아내어 먹어치우도록 풀어놓을 생각이다. 내 개가 보고 싶다면 네 개를 북궁의 뜰에 풀어보아라. 네가 굳이 올 것도 없이 내 개가 사나운 이를 드러내며 널 찾아갈 것이다."

  제공은 고개를 조아렸다.

  " 저를 이렇게나 생각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전하...."

  그는 천진하게 웃었지만 마음 한 켠은 씁쓸함이 자리 잡았다.

  ' 들킨건가....? 한 동안 조심해야겠군. 아까운 인물을 잃었다...'

   제공은 아화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는 자신의 인기를 순간 의식하지 못하여 황궁에 모인 귀부인들의 눈길이 무희들이 아닌 자신과 곁에 있는 이들에게 몰려 있다는 것을 놓치고 편하게 말을 하고 말았다.

  " 천제궁의 등불 아래서 보게 되니 더욱 아름답군, 아화. 가끔은 정말이지 당신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어. 당신은 선녀가 아닐까 생각해."

  아화는 제공의 입에서 자신의 기명(妓名)이 나오자 뜨끔하여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그녀는 어색하게 웃어보임으로 대답을 대신하려 하였다. 그 때, 초율이 나섰다.

  " 부용, 이 자를 아는가?"

  " 아........"

  아화는 머뭇거렸다. 대답을 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초율은 제공에게 약간 노기를 띈 목소리로 충고하였다.

  "  내 손님에게 수작을 부리려는건가, 증장천?"

  제공은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그리고 물러서야 할 때라는 것도 알았다. 관지와 아화가 만나 생길 수 있는 파장을 막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지만 초율은 결코 아화를 그에게 넘겨줄 생각이 없는 게 분명했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었다.

  " 제가 벗과 착각을 하였나봅니다. 저에게도 숙녀분을 닮은 아름다운 벗이 있지요. 실례를 하였습니다. 용서하십시오. "

  아화는 떳떳하지 못한 자신의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과 제공이 기꺼이 모욕을 감수하고 돌아서는데 대한 미안함으로 슬픈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제공은 돌아서며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고자 가볍게 한 쪽 눈을 찡그려 보였다.

  초율은  아화의 애틋한 눈빛을 보면서 물었다.

  " 저 남자를....사랑하는가?"

  아화는 옅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내 저었다.

  " 증장천왕께서는 제 든든한 후원자이시며 좋은 친구이십니다. 그리고.....생명의 은인이시지요."

  " 현명하군."

  " 네......?"

  초율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막 새로운 무희들이 방울 달린 깃털을 각각의 손에 쥐고 몰려나오고 있었고 음악도 바뀌었다. 다들 흥에 겨워 그녀들의 춤사위에 매료되어 있었다. 초율이 말을 이었다.

  " 누구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없는 남자다. 자기 자신 밖에는....."

  아화는 초율이 어울리지 않게 사랑 운운하자 입가에 절로 조소를 띄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자신밖에 사랑하지 못하는 남자는 제공이 아니라 초율이라고. 그녀는 제공을 변호했다.

  " 증장천왕께서는 누구보다 따뜻하신 분이옵고 인연을 소중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지켜 보아온 제가 누구보다 잘 알지요. 사랑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세요. 저 분은 사랑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아마 저 분의 인연이 나타나면 세상에서 가장 진실된 사랑을 하실겁니다."

  초율은 그녀의 반박에 대꾸가 없었다. 아화는 말이 트인 김에 계속 물었다.

  " 그렇다면...전하께서는 진심으로 사랑하셨습니까? 묘영의 언니를....."

  하지만 자신이 무심코 던진 말이 초율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초율이 두 주먹을 힘껏 쥐는 것이 보였기때문이다.

  아화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당황하여,

  " 전하...소인이 주제넘은 질문을 하였습니다. 용서하시어요. 잠시 제가 넋이 나가...."

  " 이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초율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아화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가 아닌 그리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그리움을 참아내기 위해, 슬픈 과거의 기억을 참아내기 위해 주먹을 쥔 것이었다.

  " 그녀가 살아있었더라면 이 자리에는 네가 아닌 그녀가 있었을 것이다. 그 누구도 그녀의 신분을 들어 그녀를 욕되게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내 여자로 그녀는 당당하게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을 것이다."

  아화는 고개를 떨구었다.

  "......소녀를 용서하시어요........."

  그녀는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다. 초율의 사랑을 모독한 자신의 큰 잘못을 진심으로 사과했다. 다시금 초율의 냉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고개를 들어라. 저기.....그 자가 온다."

  아화가 그 명을 행하는 순간 그녀는 숨이 턱 막혀오는 충격을 받았다. 관지였다. 그는 얼굴 가득 고뇌와 착잡함과 더불어 희망과 슬픔을 뒤섞어 실은 채 무겁게 걸음을 내딛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화는 그가 다른 이를 향하는 것이길 바랬다. 하지만 그토록 복잡하고 굳은 표정 속에서도 그의 눈빛만은 간절하게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가 찾는 부용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눈이었다.

  아화는 몸이 떨려왔다. 그가 다가올 수록 그녀의 몸은 멋대로 떨리고 있었다.

  " ........!! "

  그녀의 떨림이 멈추었다. 아화는 초율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팔이 그녀의 어깨를 감고 있었다. 그녀의 얇은 옷은 그의 갑옷에서 전해오는 차가운 기운을 막지 못해 서늘함이 피부에 닿았지만 확실히 그녀의 떨림은 멈추었다. 다가오던 관지는 아화의 어깨를 감싸안는 초율의 행동을 보고 잠시 움찔했지만 그녀를 확인하겠다는 결심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녀가 허깨비인지 아니면 실체인지 그는 반드시 확인해야만 했다. 설사 그것이 가슴 찢는 고통이 될지라도.

  마침내 관지는 초율과 아화를 대면하여 섰다. 잠깐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연회장은 악사들의 악기 소리와 사람들의 웃음 소리로 떠들썩했지만 마주 선 세 명을 둘러싼 공기와 시간은 멈춘 듯 했다. 관지의 눈길은 노골적으로 아화의 얼굴에서 머물고 있었고 아화는 숨조차 쉴 수 없을만큼 신경이 조여왔다.

  " 태자께서 어인 일이시오?"

  항상 낯설게만 느껴지던 제 4황자의 목소리가 귓가로 스며들자 관지는 정신이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아화에 대한 애절함만큼이나 강한 자극이었다.

  " 오...랜만입니다. 제 4황자."

  관지는 당황하여 타인과 같은 아우에게 존대를 하였다.

  아화는 관지의 애타는 눈빛을 느꼈다. 그의 시선은 그녀에게 고문이었다. 그가 사는 꼴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경멸해주리라 했던 결심은 사라지고 그녀는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그 자리에서 달아나고 싶었다. 관지의 변함없이 맑고 깨끗한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아화는 힘이 빠졌다. 그 눈동자가 발하는 슬픈 빛깔은 비수가 되어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아화는 자신이 미웠다.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주고 떠난 배신자를 아직도 그리워하고 있는 자신을 느낀 순간 아화는 자신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에게 달려가 안기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갈갈이 찢어버리고 싶었다. 초율의 가슴이 없었다면 그녀는 분명히 그 자리에서 쓰러져버렸을 것이다.

  " 내게 볼 일이 있소?"

  하지만 초율은 그런 아화를 달아나게 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녀가 겪는 고통의 시간을 연장시키려 들었다. 그리고 관지는 초율에 대한 어려움과 알 수 없는 두려움을 피하지 않았다. 지금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부용이 더욱 중요했다.

  " 4황자가 모셔 온 숙녀분께 볼 일이 있소." 

  그 말을 듣고 아화는 움츠러 들며 호소하는 눈빛으로 초율을 올려다보았다. 제발 자신을 이 상황에서 구해달라고 간절함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초율의 가면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게 그저 침묵하고 있었다.

  " 부용...."

  관지가 아화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다. 아화의 심장은 이미 울고 있었다. 얼마나 그리워한 목소리였던가. 그리고 얼마나 증오한 목소리였던가. 두 사람이 세상에 무엇하나 두려울 것 없이 사랑하던 때 관지는 늘 그렇게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 때만큼은 이름이 단순히 이름의 의미가 아니었다. 아화는 울음이 터져나올까 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 부용....나를 모르시오? 나를 보시오..나...를..."

  다시 한 번 관지는 간절하게 그녀를 불렀다. 아화는 목구멍까지 차 오른 슬픔을 간신히 눌러 막은 채 처량한 눈으로 다시 한 번 초율에게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초율은 여전히 목석같이 서서 입을 봉하고 있었다. 아화는 이 고통이 자신의 몫임을 알았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힘을 짜내어 냉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어야만 했다.

  " 소녀의 이름을 어찌 아시나이까? 소녀는 전하를 뵈온 적이 없사옵니다."

  " 그...럴리...가!!"

  관지는 탄식처럼 소리쳤다. 깊은 곳에서 솟구친 절망의 목소리가 크게 울리면서 사람들은 흘깃거리며 상황에 관심을 가지지 시작했다. 제공은 그들 속에서 표정없이 관지를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 4황자 전하...소녀 머리가 아파 쉬어야겠습니다. 밖으로 나가도 될런지요?"

  아화는 초율이 더 이상 자신을 고문하지 않길 바랬다. 다시 관지 앞에 남겨두려한다면 그녀는 반드시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 가도록 하지."

  초율이 그녀의 어깨를 돌려 밖으로 나가려 하자, 관지는 다급한 나머지 손을 뻗어 아화의 손목을 붙잡으며 외쳤다.

  " 잠깐..부용! 잠깐만...!!!"

 그에게 손목을 잡힌 아화가 소스라쳐 놀라는 순간 초율의 저음이 귓가를 스쳤다.

  " 그만 하지, 태자."

 초율은 오른손으로 관지의 팔을 쥐었다. 아화의 손목을 잡고 있던 관지는 초율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오자 팔이 짜르르 욱신거림을 느끼며 고통스럽게 팔을 비틀었다. 그 바람에 그는 아화의 손목을 놓아야만 했다. 초율은 신음소리를 내며 괴로워하는 관지를 내버려두고 아화를 끌어당겨 더욱 강하게 가슴에 안았다. 그리고 차갑게 말했다.

  " 아우의 여자를 탐하는 것이 황가의 내력인가보지. 태자? "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제가 그 소란을 눈치 챈 모양인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초율은 천제의 태도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아화와 관지에게는 또렷하게 들려왔다.

  " 내 것을 탐하지 마라.  태자......이 여자는 내 것이다. 쳐다보지도 말 것이며 마음에 품지도 마라. "

  초율은 등을 돌리며 끝을 맺었다.

  " 내 말을 어길 시엔 너도 복주 곁에 묻히게 될 것이다. 목이 비틀어진 채.."

  관지는 돌처럼 굳어버렸다. 초율의 마지막 한 마디에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복주라는 이름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죽은 2황자의 이름. 사유를 알 수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죽어 사라진 황자 복주. 그가 초율과 또 무슨 관계란 말인가. 하지만 어떤 무시무시한 느낌이 그를 사로잡았다. 관지는 그렇게 충격에 휩싸인 채 떠나가는 둘을 지켜볼 뿐이었다. 

  아화는 연회장 문을 나서자마자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더 이상 걸을 힘이 없었다. 그녀는 벽을 짚고 한참을, 한참을 울었다. 뼛 속까지 스민 슬픔과 그리움과 원망의 울음을 길게도 터뜨렸다. 초율은 그런 그녀의 등 뒤에서 말없이 서 있었다.

 

====조금은 지루한 사건들이 이어졌습니다. 이제 만날 사람은 다 만난 듯 싶네요. 이제부터는 조금 빠르게 진행될 예정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녀가 등장할 때가 된 것 같군요. 초율의 비장의 무기라고 할까요?^^ 날씨가 좋지요? 이런 날은 룰루랄라 놀러가야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