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처럼 뒤엉킨 두 생명의 꿈틀거림은 용광로의 열기처럼 뜨겁고 쏟아지는 폭포수의 물줄 기처럼 거세었다. 추림의 몸부림은 거칠고 격렬했다. 육식 공룡의 그 포악함처럼 시연을 물어뜯고 삼키려 하고 있었다. 태워버려야 한다! 불살라버려 이 육신을 한 줌 재로 만들어 버리리라! 추림의 손이 시연의 커다란 젖가슴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격럴하게 몸을 움지이는 추림의 눈엔 붉고 가는 실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하학!" "헉헉!" 시연의 허리가 활처럼 휘어지고 추림의 어깨를 힘껏 감싸안으며 필사적으로 그에게 매달 리려 애를썼다. 잊으리라... 네가 나에게 준 그 애정의 말들을 모두 잊어 버릴거야! 머리속에 각인된 너의 눈빛을 지워 버릴거고 처연히 웃던 작은 웃음도 버려버릴거야. "아아아......!" 추림의 몸이 더욱 빠르고 격렬해 지면서 입에서 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시연의 상체가 추림의 몸에 밀착되고 다리는 추림의 허리를 조여갔다. 폭풍처럼 날뛰는 추림의 몸짓에 시연은 죽을것만 같았다. 그래도 좋았다. 차라리 죽어버릴듯한 이 느낌 그대로 산화되어 갔으면 싶었다. 몸이 수천조각으로 분열되면서 공중으로 비산하는 느낌이었다. 정신이 몽롱해져왔고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고 더 많은 에너지를 추림에게서 받아내고 싶었다. 조금더 가면 무언가 잡힐듯한 기분... 처음이었다. 이런 카타르시스가 몸속에서 느껴진다 는 사실 자체가 신기하고 경이롭게 느껴졌다. 분노한듯 거친 추림의 몸부림은 광풍을 불러일으키며 시연을 집어 삼켰다. "으아아!" 애증의 몸부림이었다.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한 거대한 존재를 떨쳐내지 못한데서 비롯된 몸짓이었고 사랑에 외 면당한 분노였다. 추림의 몸짓이 더욱 격렬해지고 시연의 상체가 퍼덕거렸다. 침대 한쪽 면으로 튕겨지듯 밀린 시연의 몸이 힘껏 떨어댔다. 추림의 마지막 움직임이 절정에 달한듯 입을 벌리고 거친 숨을 토해냈다. "아!" 짧은 탄성이 흘러나오고 추림의 몸동작이 딱 멈추었다. 거친 숨결은 여전하고 붉게 충혈된 눈동자도 한결같았다. 털썩! 추림의 몸이 침대에 힘없이 늘어졌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육신이 전등 불빛에 조각처럼 비춰졌다. 몽롱하게 풀린 눈에 어떤 감정이 스며들고 반짝하고 이슬이 맺혔다. 울고 있는걸까? "하아! 하아! 추림 나 기운이 하나도 없어. 나 물좀 갔다줄래?" 팔을 벌리고 누운 시연이 천정을 바라본 채 추림에게 말했다. 그녀의 입에서는 아직도 뜨거운 숨이 토해지고 있었다. 얼굴가득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 고 눈은 흐릿하게 풀려 있었다. 여운... 그 남아 맴도는 느낌의 작은 떨림들을 곱씹고 있었다. 말없이 몸을 일으킨 추림이 냉장고로 다가가 물병을 꺼내와 그녀에게 건넸다. 물을 벌컥거리는 모습을 지켜본 추림이 몸을 웅그리고 침대 한쪽에 누웠다. 방안은 무척 넓고 화려한 장식들로 가득했는데 마포 가든호텔 안이었다. 술에 정신없이 취한채 시연에게 의지하여 이곳으로 온것 까지는 어렴풋하게 기억이 났다. 그후 어떻게 그녀와 관계를 시작했는지 기억이 모호했다. 기억하기 싫었다. 후회도 조금 들었지만 애써 받아들이기로 했다. 기운이 없었다. 몸안에 기운이란 기운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진듯했다. 시연이 한참을 누워있다가 일어나서 욕실로 걸어들어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이 마치 조각가가 세심하게 깍은 조형물처럼 완벽한 느낌이 들었다. 왜 그녀와 섹스를 했을까? 본능인가? 욕구를 느끼고 있었던가?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자 마치 오래된 사진을 보는듯한 기분이었다. 잊고 있다가 어느날 꺼내어 본 사진을 보고 다시 기억이 살아나 추억하는 그런 기분이었 다. 시연은 술집에서 대화하는 도중 누구나가 겪는 고통일수도 있다고 했다. 발전하는 것이고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라 했다. 시연에게 자세한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치 정도는 채고 있을지도 몰랐다. 미안했다. 마음속에 다른 여자가 있는데 몸만 그녀에게 준듯한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유미! 이제 난... 혼자 널 사랑해야 하는거니?' 천정에 밝혀진 샹들리에의 불빛에 유미의 얼굴이 새겨졌다. 역시 그녀는 우울한 얼굴이었다. 가슴이 울컥해진 추림은 눈가를 훔치며 팔로 가려버렸다. '미안해. 내 이런모습... 미안해!' 충동적이고 본능적인 욕정이었다. 확실했다. 주체못한 격정을, 나약해진 마음을 성이라는 도구에 온통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꼭 대상이 시연일 필요는 없었다. 누군가 필요했다. 그때 시연이 있었고 자신의 심정을 섹스라는 원초적 수단에 털어 버렸 다. 하지만 마음속에 앙금은 가시지 않았다. 더큰 무언가가 소리없이 찾아와 꽉차버린 비좁은 마음속을 파고들어 버렸다. 서글펐다. 단 한번이라도 유미를 진정으로 안아보고 싶었는데...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사 랑한다 말해주고 싶었는데... 더욱 멀어져 가고 있었다. "뭘 그리 생각하니?" 시연이 타올로 몸을 감싼 모습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믿어지지 않는다. 어떻해 자신이 그녀와 이런 모습을 할 수 있는지 사실 같지가 않았다. 침대위로 올라와 추림의 몸에 올라앉은 시연이 추림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눈이 뜨겁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이글거리는 열기가 눈빛에 가득했다. 욕망의 잔재인가! 다시 피어나는 불꽃인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녀는 무척이나 뜨겁고 흡입력이 있는 여자 같았다. 깊숙히 자신을 빨아 들이려했고 놓아주지 않으려 했다. 시연이 추림의 가슴을 살며시 쓸었다. 목선을 따라 얼굴로 이어진 손길은 귀를 만졌고 다 시 아래로 내려가 옆구리와 엉덩이 옆면을 쓸었다. 우울한 얼굴로 시연의 손길을 못느낀듯 추림은 침채된 눈빛으로 계속해서 불빛에 아른거 리는 유미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신기해. 추림에게 이런 정열이 있었다는 것이 신기해. 아니 내몸이 더 신기한건가? 나 타 버리는 느낌이었어." 그녀는 조금전의 일을 음미하는지 얼굴에 아련한 기운이 서려있는 모습으로 말했다. "추림! 너 다른 여자 생각한거 알아. 택시안에서도 너 헛소리 상당히 심했거든? 기분 나빴 지만 지금은 나랑 있다는게 중요한거 아니겠어? 뭐 상관없어." 쉬지않고 추림의 몸을 더듬는 그녀의 손길에 분명 욕정의 잔재가 남아 있음을 느낀 추림 은 자신이 실수한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시연이 상체에 두른 수건을 풀어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자 드러난 그녀의 완벽한 동체! 추림은 솔직히 그녀의 몸을 대하면 뜨거운 기운이 피 어 오름을 자인했다. 커다란 가슴은 완벽히 솓아 탄력적이고 피부는 사내의 손길을 타지 않은듯 희고 매끄러웠으며 청백지신의 그것처럼 순연하고 완연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욕망의 불덩이였고 욕망의 사슬이었다. 몸을 앞으로 숙여 추림의 상체에 붙히고 엎드린 그녀가 추림의 귀에대고 속삭였다. "말해봐. 내가 좋았는지 말해봐." "......?" 시연의 젖가슴이 그대로 느껴지고 까칠한 느낌도 하복부 쪽에서 전해져왔다. 하지만 추림은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육신은 본능에 이끌리는 또다른 생명인지 전혀 다르게 반응하려 하고 있었다. "말해볼래? 내가 여자로 좋았는지?" 시연이 다시 속삭이며 추림의 귓볼을 이빨로 살짝 물었다. "전... 모르겠어요.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이렇게... 다시 안그럴께요." 추림이 느낀 본심 그대로 말했다. 그러자 시연이 낮게 웃으며 상체를 세웠다. 웃는 얼굴로 추림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장난끼가 가득했다. "바보. 웬 동문서답? 숙녀가 물으면 솔직하게 대답해야 매너남인거야. 어서 말해봐! 좋았 어? 내가 말해볼까? 난 아까도 말했듯이 죽는줄 알았어. 뜨겁고 몸이 녹아 내리는 줄 알 았거든. 처음이야. 이런느낌! 물론 추림 네가 나안테는 첫 남자가 아니고. 하지만 솔직히 처음이었다. 이런 강하고 커다란 느낌은... 그래서 신기하다는거야." 뭐가 신기하다는 것일까? 알 수 없는 말이다. 조금은 이해가 가면서도 정확한 의미를 모르겠다. "추림 내가 추림에게 장난하는걸로 보여? 추림을 좋아한다 말한것이 거짓말 같고 지금의 내 모습이 장난같이 보이는거야?" "모르겠어요.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날 좋아할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것이 진짜가 아닐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추림을 바보라고 하는거야. 사랑은 무척 다양해. 하나일수도 있고 여러개일수도 있지. 하나의 형태일수도 있고 전혀 다른 모습일수도 있어. 자 말해봐. 추림이 사랑하는 여자와 내가 있어. 여기서 현재의 사랑은 누구일까?" "......?" "추림이 사랑하는 여자는 멀리 있지? 잘 안만나 지고 멀어지기만 하고? 설령 그 여자도 추 림을 사랑하고 있다고해도 그렇게 되고 있지? 그런데 난 이렇게 추림곁에 쉽게 있을수 있 잖아. 추림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해도 난 너무 쉽게 이렇게 추림곁에 있을 수 있지 않겠 어? 이게 뭘까? 사랑은 마음이 이끌리고 영혼이 원하는 대상을 원하지만 다르기도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바보들이 많아. 나도 그렇고. 하지만 날 사랑 해주는 이를 사랑하면 이렇게 쉽게 같이 있을수 있어. 지금의 추림과 나는 우연히 같이 이 곳에 있지만 이것마저도 사랑이라고 말할수 있는거야." 어거지처럼 들린다. 단지 그녀와 자신은 같은 공간에서 섹스를 나누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녀의 입장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에 촛점을 맞추어 긍정적으로 상황을 둔갑시켜 버린 것 이다. 하지만 그리 부정적인 견해같지는 않았다. 맞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를 선택할 수 있는 마음의 변환이 쉽게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편하고 자유로울까? 고민도 방황도 슬픔도 적게 느낄것이고 상처와 후유증도 덜 할 것이 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진다. 사랑할수 없는이와 자유롭고 행복할수는 없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사랑하는 이와 함께라면 극복해내고 견디어 낼 수 있다고 믿는 이상 주 의적 사고방식은 추림의 오래된 주관이었다. 추림은 말하지 않았다. 그녀의 생각과 주관에 굳이 자신의 다른 점으로 반박하거나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중요한것은 그녀와 자신이 한곳에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있다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훗......!" 웃음이 나왔다. 하나가 가고 하나가 왔다. 하나는 멀어지려하고 하나는 가까워지려 한다. 너무 극명한 대립인것 같아서 어이가 없고 허무하다 여긴 추림은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녀도 자신처럼 이렇게 결코 사랑하지 않는 이와 같이 잤을까? 자신이 미안한것 처럼 그녀도 미안해 했을까? 다를게 뭐가 있을까? 그녀는 여자라서 안되고 자신은 남자라서 된다고 우겨 버릴까? 진부하고 고지식한 사고 방식인가? 마음이 황량하고 공허한 느낌이었다. 자꾸 무언가에 공격받아 상처받는것 같았다. 추림의 곁에 누운 시연이 무언가를 요구하는 행동을 취하려 하고 있었다. 허벅지 살을 꼬집고 가슴을 두드리며 자꾸 신호를 보내왔다. 시연이 추림의 손을 잡아끌어 젖가슴에 올리며 꾹 눌렀다. 추림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거부하거나 빼지는 않았다. 애초부터 그녀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조금씩 후회가 들었다. 추림의 몸에 조금의 반응이 일었지만 여전히 묵묵히 움직이지 않자 시연이 움직였다. "......!" 추림의 몸위로 올라간 시연의 행동! 내재된 본능의 은밀함은 결코 추하거나 악할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처음 만나는 이와의 행위라고 해도 이렇듯 남자와 여자라는 이성간의 행위는 모든것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부끄럽거나 창피한 것이 아니다. 그저 육체가 원하는 본능에 충실할 뿐이고 솔직해지려 할 뿐이다. 잠시 추림의 배 위에서 관능적이고 뇌세적으로 움직이던 그녀의 입이 어떤 결합으로 인해 크게 벌어지고 고개를 뒤로 힘껏 젖혔다. 추림은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현재의 상황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묘한 기대를 하는 또다른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다. 마음과 사고 육체의 생명력이 따로 꿈틀거렸다. 후후후... 그래... 이렇게라도 잊을수 있다면... 잊어버릴수 있다면... 기꺼이 날 속여버리는 는 진실되지 못한 행위에 스스로를 던져 버리마! 미안하다... 어쩌면 네가 생각하고 믿을 나의 순수함에 얼룩을 남기게 되어서......! 아랫입술을 베어물고 눈을 뜬 추림이 시연의 어깨를 잡고 옆으로 쓰러뜨렸다. 강한 눈으로 시연의 얼굴을 바라보며 추림의 몸은 다시 폭풍이 되어갔다. 광풍이 되어갔고 잔인한 지배자가 되어갔다. 그날 밤, 심한 배신감에 좌절한 추림의 애달픈 몸부림은 욕망의 화신이 되어가고 있었다. * * * 봄... 시간은 덧없이 무의미하고 건조하게 흐르고 있었다. 아무런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삭막한 삶의 연속이었다. 4월이 되자 이제 봄은 더욱 완연해졌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추림은 방황과 시련속에 스스로를 불사르는 불나방 처럼 마냥 어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철저히 피했다. 하루에도 몇번씩 걸려오는 전화를 거부했고 피했다. 일이 끝나면 술에 취한 채 늦은 시간에 겨우 잠들고 다시 출근하는 날의 연속이 이어졌다. 시연과 호텔에서 있었던 일 직후 시연은 자주 찾아왔다. 주술에 걸린 자의 행동처럼 추림은 시연의 유혹을 거부하지 못했다. 시연은 수백년동안 갈증에 시달린 괴물같았다. 끝임없이 추림의 몸을 탐하려했고 그에게 무언가를 갈구하려했다. 어느덧 추림의 행동도 시연의 그것에 닮아져갔고 익숙해져 갔다. 마음이 죽은자와의 섹스는 거칠었고 본능의 행위 뿐이었지만 시연은 내색하지 않았다. 4월... 음력으로 유미의 생일이 곧 다가오고 있음을 기억해 낸 추림은 더욱 깊은 방황에 흔들렸다. 그 쯔음에 추림의 방황은 도를 더해져가며 조금씩 다른 사람으로 변해갔다. 환각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디를 보아도 온통 한 여자의 얼굴만 보여 몇번을 헛걸음질하여 넘어지고 부딪혀 상처를 입었다. 회사 동료들의 놀림처럼 폐인이 되거나 막 사는 인간처럼 변해갔다. 아침에 술에 쩔어 출근하고 밤이되면 다시 술에 파묻히는 일과가 기계적으로 반복되었다. 형같이 대해주던 이대준과 박도형의 달램과 야단에도 추림의 방탕은 달라지지 않았다. 어둠... 정오가 막 넘어가는 시간... 추림은 방안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어둠의 저편에서 손짓하는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짐승의 그것처럼 번뜩이는 그의 눈은 정상이 아니었다. 상처입은 짐승의 눈빛이 그러했고 생을 잊어가는 영혼의 기운이 그러했다. 반짝...... 눈물을 흘리는 그의 얼굴이 어둠속에 살며시 드러났다. 죽은자의 눈빛! 허탈하고 퇴색된 웃음! 죽음과도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어둠의 한켠에서 유혹하고 손짓하는 것... 안식! 자유! 일탈! 편안한 쉼! 추림은 밀려드는 외로움과 그리움에 고통스러워 하다가 조금씩 죽음을 떠올렸다. 차라리 쉬고 싶었다. 더이상 견디기 힘들었다. 영혼이 부서져가는 느낌이었다. 철저한 파괴자의 앞에 선 초라하고 나약한 이의 심정이었다. 환각은 심했다. 다른 여자를 유미로 착각하고 전혀 엉뚱한 말에도 유미의 음성으로 들어 버리곤 했다. 혼자 중얼거리는 일이 허다해졌고 이일을 해야 하는데 저일을 하고 있었고 이길로 가야 하는데 엉뚱한 길을 걷고 있었다.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가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자장 노래에 팔베 고... 스르..르르 잠...이 드읍니...다......!"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주체할수가 없었다. 죽고만 싶었다. 이토록 사무치는 그리움과 그녀를 목메이게 불러보고픈 심정을 어찌 달래 야 할지 답이 없었다. 견디기 힘들었다. 땡그렁! 손에 들고 있던 빈 소주병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어둠이 떨어댔다. 어느새 스르르 잠이든 추림의 눈가에 축축한 이슬이 진하게 맺혀 있었다. 4월을 얼마 안 남기고 힘든 날을 보내고 있던 추림에게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4월 23일...금요일! 따르르릉 따르르릉...... 밤늦은 시간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듣고 있지만 받지 않았다. 이미 오랜동안 전화를 쓰지 않은터라 먼지가 뽀얗게 쌓인 전화 기는 쉴새없이 울려댔다. 술에 취해 몽롱한 정신으로 어두운 방안에 누워있던 추림은 갑자기 짜증이 쏟구쳤다. 화가 치밀었다.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거칠어지고 그렇듯 매사를 부정적으로 대하려는 식 으로 변해버린 추림이었다. "끄응!" 힘겹게 몸을 일으킨 추림이 전화기로 다가갔다. 전화기를 집어든 그는 그대로 바닥으로 내던졌다. 딸카닥! 전화기가 거칠게 바닥에 떨어졌지만 부서지지는 않았다. 전화기를 그대로 놔둔채 다시 자리에 누우려던 추림의 발검음이 멈칫했다. "......?" 수화기에서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대준을 말하고 이상한 말들을 하고 있는 음성이 들려왔다. 느낌이 이상한 추림이 전화기를 집어들고 수화기를 귀에 댔다. -추림아! 듣고있냐? 씨발놈아! 듣고 있냐고?- 거칠게 말하는 이는 박도형의 목소리였다. 이상한 기분이 든 추림이 곧바로 대답했다. "예. 저예요. 무슨일인데요?" -이 씹새끼야! 전화는 왜 안받아! 앙! 너 빨리 여기로 와!- 다짜고짜 욕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것이 아니었다. 무척 다급하게 말하는 투가 이상한 것이다. "왜요? 무슨일... 어딘데요?" 묻다가 다시 욕설이 들려 얼른 위치를 물었다. -대림동 성심병원으로 와! 빨리와! 씨발놈아! 대준이 지금 죽어간다! 널 찾고있어! 빨리 튀 어오란 말이다! 알았어 씨발놈아!" 악을 써대며 외치는 박도형의 목소리가 갈라터지고 쉬어 있었다. "......?" 처음에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멀쩡한 이대준이 죽어간단 말인가? 낮에도 멀정했던 사람이 갑자기... 죽어? 간다고? "예에? 그게 무슨말... 뭐라고요?" 정신이 아득해져왔다. 전화기를 거칠게 바닥으로 던져버린 추림이 허둥거렸다. 불을 켜고 옷을 입다가 꼬꾸라지고 미쳐 날뛰는 사람 같았다. ------ 택시기사를 재촉하고 요금을 따블로 드린다고 말해서 득달같이 대림동 성심병원으로 도착 하자마자 급하게 응급실로 뛰어 들어갔다. "왔냐! 빨리 왔구나!" 박도형이 추림을 발견하고 말을 건네며 손짓을 해 보였다. 이미 이대준의 누나인 이금선도 와 있었고 이상열 부장과 몇몇 회사 사람들도 도착해 있 었다. 눈물로 범벅이 되고 지친듯한 이금선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몸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 다. "......?" 한 침대의 주위에 의사 여러명과 간호사가 삥 둘러서 뭔가 이야기를 나누며 분주하게 움직 이고 있었는데 무척 급하고 초조한 모습들이었다. "이추림씨가 누구죠? 왔습니까?" 한 간호사가 그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 추림은 박도형과 이상열 부장을 번갈아 바라보며 추춤거렸다. "가봐. 널 계속 찾았는데... 얼마 못산단다." "......!" 붉게 충혈되 눈에 핏발이 곤두선 박도형이 울었는지 비감한 얼굴로 말했다. 믿을수 없는 말에 추림은 간호사의 재촉에 침대로 다가갔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길을 열어 주자 침대위에 누워있는 피칠갑한 누군가가 보였다. "......!" 말도 안된다! 산소호흡기... 깨지고 부서진 얼굴과 머리... 온 몸에 피로 목욕한 전신!! 이대준이다! 어떻게 저런 모습일수가 있는지 도저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대준? 왜?" 추림이 멍하게 끔짝한 이대준의 모습을 넋놓고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의사 한명이 추림의 등을 두들겼다. "이미 뇌출혈이 발생하고 뇌수가 터졌습니다. 두개골 40%가 부서졌고 척주의 절반이 골 절되었고 심장이 기능을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자 이제 산소 호흡기를 뗄 것입니다. 얼마나 저분이 견딜지 모르지만 아마 오분에서 길어야 십분정도 될 것입니다. 약물을 투 여해서 지금까지 견딘 것이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그의 마지막 말을 들으십시오!" 의사의 말이 꿈결같이 들려왔다. 자신에게 말한 의사가 간호사와 다른 의사들에게 무슨 약물을 투여 어쩌고 하는 말이 들 려왔다. 주사기를 링겔의 투입호스에 꼿고 무언가 주입하자 이십초도 안되어 대준의 몸이 부르르 떨며 희미하게 눈을 떴다. "자 산소호흡기를 뗄 것입니다. 다가오세요. 가급적 귀를 가까이... 준비!" 의사가 말해도 추림은 움직이지 못했다. 믿을수 없는 현실에 몸이 반응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발이 굳은듯 전혀 움직여 주지 않았다. 두렵고 겁났다. 본능적으로 암시되는 일이 현실로 나타날까 그랬다. 누군가 등을 강하게 떠밀어 그 힘에 의해 대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를 악문 추림이 의사가 뭐라고 외치는 모습을 자각하려 기를썼다. 산소호흡기가 떼어지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뒤로 물러났다. 그 자리를 울며 자지러지려는 이금선과 동료들이 차지하고 추림이 가장 가까이 접근했다. 곧 이대준의 작게 떠진 시선이 추림을 바라보는 것인지 죽어가는 눈빛으로 추림을 정확히 바라보았다. "추...리...임. 미안... 미선...부...탁... 말하지... 마! 어디... 갔다고... 잘 지내...라고!" 무척이나 힘들고 미약한 소리가 추림의 귓속을 희미하게 파고들었다. 힘없는 손으로 추림의 가슴팍을 움켜쥔 대준의 손을 잡았다. 강하게 움켜쥔 대준의 손은 차갑고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 이를 악물고 눈에 힘을 주었지만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수가 없었다. 말을 해야했다. 이렇게 입을 다물고 있다가는 그가 떠난다. "너 왜이래? 일어나! 일어나 새끼야!" 버럭 소리를 지른 추림이 대준을 억지로 일으키려 했다. "아악!" "안돼요! 그대로 두세요. 꺼져가는 불꽃입니다." 이금선이 그런 추림의 행동에 비명을 질렀고 의사가 다급하게 다가와 소리쳤다. "흐으으! 좆까지 말고 니여자 니가 알아서 해! 뭐야! 씨발놈아! 너 누가 이랬어? 왜 그러냐 고! 말해! 왜 이러냐고... 흑... 개자식아......!" 추림이 발작적으로 소리치며 눈을 부릅떴다. 이렇게 가면 안된다! 넌 너무 젊단 말이다! 추림의 얼굴을 희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대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흘릴 힘도 없는지 맺힌 눈물은 흘러 내리지 못했다. 겨우 입을 벌린 대준이 뭔가 말하려 하자 추림은 더욱 귀를 가깝게 댔다. 마지막 순간일지도 몰랐다. 하나라도 더 들어둬야 했다. "나아... 충주...호... 뿌려...줘! 미선... 불쌍... 니가 돌봐...줘! 미아안......" "충주호! 미선... 그리고 또 말해봐 새끼야! 웃기지말고! 말해 개새끼야! 갈고 싶다고 말해! 그렇지? 살고 싶지? 우우욱... 대준아! 말해봐... 말하란 말이야!" 눈물을 쏟아내는 추림이 고함을 지르며 대준의 손을 힘차게 움켜쥐었다. 이 놈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다 알지만 가깝거나 친근한 사람은 자신이 유일했다. 개자식! 감히 자신의 여자를 자신에게 돌봐달라고 하다니! 이대로 가면 넌 나쁜 놈이다! "너... 컥......! 그러...지...마. 헉...헉! 정....신차...려 추리임! 울...지마! 잘 살...아! 미서언을 ... 부탁......!" 숨이 막히는지 컥컥거리던 대준이 피를 토해내며 억지로 힘을짜내 말을 쏟아냈다. 눈을 크게 흡뜬 대준이 상체를 벌떡 들며 추림의 멱살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조금전의 힘과는 전혀 다르다. 온통 깨지고 이지러진 얼굴이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직감적으로 마지막 발악임을 깨달은 추림은 고통스런 얼굴을 대준의 피범벅인 가슴에 묻 고 부볐다. 이렇게 가지마! 네가 좋아하는 파리의 에펠탑은 못가는거잖아! 몽마르뜨의 낭만도 즐겨야 하고 미선씨랑 결혼도 해야 하잖아... 죽지마! 제발 죽지마! 날 떠나지마! 무서워... 두려워... 너무 힘들어! "개새끼야! 안돼! 안된단 말이다! 뭐라고? 더 크게 말해! 안들린단 말이닷! 우아아......!" "너어... 조으노옴... 행보오옥... 미안......! 컥... 컥! 미선... 미서어언... 사...랑!" 몸을 부들거리며 떨고 허연 액체가 피와 함께 흘러 내렸다. 간다... 떠나간다... 젊디 젊은 하나의 생명이 이렇게 스러져간다! 어이할까! 어이해서 그렇듯 갈까! "으아아! 안된단 말이닷! 우아악! 우아악! 제... 발 부탁이야... 아... 안돼." "흑흑.. 어허엉!" "흐흐흑... 흑!" "......!"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린 대준의 목이 뒤로 툭 꺽여지며 허무하게 숨을 놓아 버렸다. "살려... 선생님! 어떻게 좀... 제발 그를 보내지... 말아요.. 제발, 제발......!" 의사의 가슴팍을 짚고 눈물을 쏟아가며 추림이 다그치고 사정했다. 의사들은 어두운 얼굴 로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으아아아... 우악! 안돼!" 바닥에 무릎을 굻고 오열하는 추림의 절규가 응급실에 메아리쳤다. 이금선이 울다가 실신해 버리고 박도형과 이상열등 여러 동료들이 얼굴을 돌리고 눈물을 흘렸다. "으아아아... 으아악!" 이대준의 몸을 감싸안은 추림의 입에서 슬픔과 고통의 절규가 길게... 길게 터져 나왔다. "일어나! 이새끼야! 일어나란 말이야! 으악! 안돼에......!" 다시 그의 외침이 공허하게 울려 퍼진 그날... 1993년 4월, 하나의 영혼이 스러져가고 서러 운 절규는 길게 울려 퍼졌다. (40장에 계속)1
유리사랑 (39장/ 본능적 욕망 그리고 죽음!) <실극화>
뱀처럼 뒤엉킨 두 생명의 꿈틀거림은 용광로의 열기처럼 뜨겁고 쏟아지는 폭포수의 물줄
기처럼 거세었다.
추림의 몸부림은 거칠고 격렬했다.
육식 공룡의 그 포악함처럼 시연을 물어뜯고 삼키려 하고 있었다.
태워버려야 한다! 불살라버려 이 육신을 한 줌 재로 만들어 버리리라!
추림의 손이 시연의 커다란 젖가슴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격럴하게 몸을 움지이는 추림의 눈엔 붉고 가는 실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하학!"
"헉헉!"
시연의 허리가 활처럼 휘어지고 추림의 어깨를 힘껏 감싸안으며 필사적으로 그에게 매달
리려 애를썼다.
잊으리라... 네가 나에게 준 그 애정의 말들을 모두 잊어 버릴거야!
머리속에 각인된 너의 눈빛을 지워 버릴거고 처연히 웃던 작은 웃음도 버려버릴거야.
"아아아......!"
추림의 몸이 더욱 빠르고 격렬해 지면서 입에서 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시연의 상체가 추림의 몸에 밀착되고 다리는 추림의 허리를 조여갔다.
폭풍처럼 날뛰는 추림의 몸짓에 시연은 죽을것만 같았다.
그래도 좋았다. 차라리 죽어버릴듯한 이 느낌 그대로 산화되어 갔으면 싶었다.
몸이 수천조각으로 분열되면서 공중으로 비산하는 느낌이었다.
정신이 몽롱해져왔고 아무런 기억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고 더 많은 에너지를 추림에게서 받아내고 싶었다.
조금더 가면 무언가 잡힐듯한 기분... 처음이었다. 이런 카타르시스가 몸속에서 느껴진다
는 사실 자체가 신기하고 경이롭게 느껴졌다.
분노한듯 거친 추림의 몸부림은 광풍을 불러일으키며 시연을 집어 삼켰다.
"으아아!"
애증의 몸부림이었다.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한 거대한 존재를 떨쳐내지 못한데서 비롯된 몸짓이었고 사랑에 외
면당한 분노였다.
추림의 몸짓이 더욱 격렬해지고 시연의 상체가 퍼덕거렸다.
침대 한쪽 면으로 튕겨지듯 밀린 시연의 몸이 힘껏 떨어댔다.
추림의 마지막 움직임이 절정에 달한듯 입을 벌리고 거친 숨을 토해냈다.
"아!"
짧은 탄성이 흘러나오고 추림의 몸동작이 딱 멈추었다.
거친 숨결은 여전하고 붉게 충혈된 눈동자도 한결같았다.
털썩!
추림의 몸이 침대에 힘없이 늘어졌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육신이 전등 불빛에 조각처럼
비춰졌다.
몽롱하게 풀린 눈에 어떤 감정이 스며들고 반짝하고 이슬이 맺혔다.
울고 있는걸까?
"하아! 하아! 추림 나 기운이 하나도 없어. 나 물좀 갔다줄래?"
팔을 벌리고 누운 시연이 천정을 바라본 채 추림에게 말했다.
그녀의 입에서는 아직도 뜨거운 숨이 토해지고 있었다. 얼굴가득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
고 눈은 흐릿하게 풀려 있었다.
여운... 그 남아 맴도는 느낌의 작은 떨림들을 곱씹고 있었다.
말없이 몸을 일으킨 추림이 냉장고로 다가가 물병을 꺼내와 그녀에게 건넸다.
물을 벌컥거리는 모습을 지켜본 추림이 몸을 웅그리고 침대 한쪽에 누웠다.
방안은 무척 넓고 화려한 장식들로 가득했는데 마포 가든호텔 안이었다.
술에 정신없이 취한채 시연에게 의지하여 이곳으로 온것 까지는 어렴풋하게 기억이 났다.
그후 어떻게 그녀와 관계를 시작했는지 기억이 모호했다.
기억하기 싫었다. 후회도 조금 들었지만 애써 받아들이기로 했다.
기운이 없었다.
몸안에 기운이란 기운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진듯했다.
시연이 한참을 누워있다가 일어나서 욕실로 걸어들어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이 마치 조각가가 세심하게 깍은 조형물처럼 완벽한 느낌이 들었다.
왜 그녀와 섹스를 했을까? 본능인가? 욕구를 느끼고 있었던가?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떠올려 보자 마치 오래된 사진을 보는듯한 기분이었다.
잊고 있다가 어느날 꺼내어 본 사진을 보고 다시 기억이 살아나 추억하는 그런 기분이었
다.
시연은 술집에서 대화하는 도중 누구나가 겪는 고통일수도 있다고 했다.
발전하는 것이고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라 했다. 시연에게 자세한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치 정도는 채고 있을지도 몰랐다.
미안했다. 마음속에 다른 여자가 있는데 몸만 그녀에게 준듯한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유미! 이제 난... 혼자 널 사랑해야 하는거니?'
천정에 밝혀진 샹들리에의 불빛에 유미의 얼굴이 새겨졌다.
역시 그녀는 우울한 얼굴이었다.
가슴이 울컥해진 추림은 눈가를 훔치며 팔로 가려버렸다.
'미안해. 내 이런모습... 미안해!'
충동적이고 본능적인 욕정이었다.
확실했다. 주체못한 격정을, 나약해진 마음을 성이라는 도구에 온통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꼭 대상이 시연일 필요는 없었다.
누군가 필요했다. 그때 시연이 있었고 자신의 심정을 섹스라는 원초적 수단에 털어 버렸
다. 하지만 마음속에 앙금은 가시지 않았다.
더큰 무언가가 소리없이 찾아와 꽉차버린 비좁은 마음속을 파고들어 버렸다.
서글펐다. 단 한번이라도 유미를 진정으로 안아보고 싶었는데...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사
랑한다 말해주고 싶었는데... 더욱 멀어져 가고 있었다.
"뭘 그리 생각하니?"
시연이 타올로 몸을 감싼 모습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믿어지지 않는다. 어떻해 자신이 그녀와 이런 모습을 할 수 있는지 사실 같지가 않았다.
침대위로 올라와 추림의 몸에 올라앉은 시연이 추림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눈이 뜨겁게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이글거리는 열기가 눈빛에 가득했다.
욕망의 잔재인가! 다시 피어나는 불꽃인가!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녀는 무척이나 뜨겁고 흡입력이 있는 여자 같았다.
깊숙히 자신을 빨아 들이려했고 놓아주지 않으려 했다.
시연이 추림의 가슴을 살며시 쓸었다. 목선을 따라 얼굴로 이어진 손길은 귀를 만졌고 다
시 아래로 내려가 옆구리와 엉덩이 옆면을 쓸었다.
우울한 얼굴로 시연의 손길을 못느낀듯 추림은 침채된 눈빛으로 계속해서 불빛에 아른거
리는 유미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신기해. 추림에게 이런 정열이 있었다는 것이 신기해. 아니 내몸이 더 신기한건가? 나 타
버리는 느낌이었어."
그녀는 조금전의 일을 음미하는지 얼굴에 아련한 기운이 서려있는 모습으로 말했다.
"추림! 너 다른 여자 생각한거 알아. 택시안에서도 너 헛소리 상당히 심했거든? 기분 나빴
지만 지금은 나랑 있다는게 중요한거 아니겠어? 뭐 상관없어."
쉬지않고 추림의 몸을 더듬는 그녀의 손길에 분명 욕정의 잔재가 남아 있음을 느낀 추림
은 자신이 실수한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시연이 상체에 두른 수건을 풀어 바닥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자 드러난 그녀의 완벽한 동체! 추림은 솔직히 그녀의 몸을 대하면 뜨거운 기운이 피
어 오름을 자인했다. 커다란 가슴은 완벽히 솓아 탄력적이고 피부는 사내의 손길을 타지
않은듯 희고 매끄러웠으며 청백지신의 그것처럼 순연하고 완연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욕망의 불덩이였고 욕망의 사슬이었다.
몸을 앞으로 숙여 추림의 상체에 붙히고 엎드린 그녀가 추림의 귀에대고 속삭였다.
"말해봐. 내가 좋았는지 말해봐."
"......?"
시연의 젖가슴이 그대로 느껴지고 까칠한 느낌도 하복부 쪽에서 전해져왔다.
하지만 추림은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나 육신은 본능에 이끌리는 또다른 생명인지
전혀 다르게 반응하려 하고 있었다.
"말해볼래? 내가 여자로 좋았는지?"
시연이 다시 속삭이며 추림의 귓볼을 이빨로 살짝 물었다.
"전... 모르겠어요.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이렇게... 다시 안그럴께요."
추림이 느낀 본심 그대로 말했다. 그러자 시연이 낮게 웃으며 상체를 세웠다.
웃는 얼굴로 추림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장난끼가 가득했다.
"바보. 웬 동문서답? 숙녀가 물으면 솔직하게 대답해야 매너남인거야. 어서 말해봐! 좋았
어? 내가 말해볼까? 난 아까도 말했듯이 죽는줄 알았어. 뜨겁고 몸이 녹아 내리는 줄 알
았거든. 처음이야. 이런느낌! 물론 추림 네가 나안테는 첫 남자가 아니고. 하지만 솔직히
처음이었다. 이런 강하고 커다란 느낌은... 그래서 신기하다는거야."
뭐가 신기하다는 것일까? 알 수 없는 말이다.
조금은 이해가 가면서도 정확한 의미를 모르겠다.
"추림 내가 추림에게 장난하는걸로 보여? 추림을 좋아한다 말한것이 거짓말 같고 지금의
내 모습이 장난같이 보이는거야?"
"모르겠어요.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날 좋아할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것이 진짜가 아닐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추림을 바보라고 하는거야. 사랑은 무척 다양해. 하나일수도 있고 여러개일수도
있지. 하나의 형태일수도 있고 전혀 다른 모습일수도 있어. 자 말해봐. 추림이 사랑하는
여자와 내가 있어. 여기서 현재의 사랑은 누구일까?"
"......?"
"추림이 사랑하는 여자는 멀리 있지? 잘 안만나 지고 멀어지기만 하고? 설령 그 여자도 추
림을 사랑하고 있다고해도 그렇게 되고 있지? 그런데 난 이렇게 추림곁에 쉽게 있을수 있
잖아. 추림이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해도 난 너무 쉽게 이렇게 추림곁에 있을 수 있지 않겠
어? 이게 뭘까? 사랑은 마음이 이끌리고 영혼이 원하는 대상을 원하지만 다르기도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바보들이 많아. 나도 그렇고. 하지만 날 사랑
해주는 이를 사랑하면 이렇게 쉽게 같이 있을수 있어. 지금의 추림과 나는 우연히 같이 이
곳에 있지만 이것마저도 사랑이라고 말할수 있는거야."
어거지처럼 들린다. 단지 그녀와 자신은 같은 공간에서 섹스를 나누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녀의 입장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에 촛점을 맞추어 긍정적으로 상황을 둔갑시켜 버린 것
이다.
하지만 그리 부정적인 견해같지는 않았다.
맞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이를 선택할 수 있는 마음의 변환이 쉽게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편하고 자유로울까? 고민도 방황도 슬픔도 적게 느낄것이고 상처와 후유증도 덜 할 것이
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진다.
사랑할수 없는이와 자유롭고 행복할수는 없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사랑하는 이와 함께라면 극복해내고 견디어 낼 수 있다고 믿는 이상 주
의적 사고방식은 추림의 오래된 주관이었다.
추림은 말하지 않았다.
그녀의 생각과 주관에 굳이 자신의 다른 점으로 반박하거나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중요한것은 그녀와 자신이 한곳에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있다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훗......!"
웃음이 나왔다.
하나가 가고 하나가 왔다. 하나는 멀어지려하고 하나는 가까워지려 한다.
너무 극명한 대립인것 같아서 어이가 없고 허무하다 여긴 추림은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녀도 자신처럼 이렇게 결코 사랑하지 않는 이와 같이 잤을까?
자신이 미안한것 처럼 그녀도 미안해 했을까? 다를게 뭐가 있을까?
그녀는 여자라서 안되고 자신은 남자라서 된다고 우겨 버릴까? 진부하고 고지식한 사고
방식인가?
마음이 황량하고 공허한 느낌이었다.
자꾸 무언가에 공격받아 상처받는것 같았다.
추림의 곁에 누운 시연이 무언가를 요구하는 행동을 취하려 하고 있었다.
허벅지 살을 꼬집고 가슴을 두드리며 자꾸 신호를 보내왔다.
시연이 추림의 손을 잡아끌어 젖가슴에 올리며 꾹 눌렀다.
추림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거부하거나 빼지는 않았다.
애초부터 그녀를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조금씩 후회가 들었다.
추림의 몸에 조금의 반응이 일었지만 여전히 묵묵히 움직이지 않자 시연이 움직였다.
"......!"
추림의 몸위로 올라간 시연의 행동! 내재된 본능의 은밀함은 결코 추하거나 악할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처음 만나는 이와의 행위라고 해도 이렇듯 남자와 여자라는 이성간의 행위는
모든것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부끄럽거나 창피한 것이 아니다. 그저 육체가 원하는 본능에 충실할 뿐이고 솔직해지려 할
뿐이다.
잠시 추림의 배 위에서 관능적이고 뇌세적으로 움직이던 그녀의 입이 어떤 결합으로 인해
크게 벌어지고 고개를 뒤로 힘껏 젖혔다.
추림은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현재의 상황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묘한 기대를 하는 또다른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다.
마음과 사고 육체의 생명력이 따로 꿈틀거렸다.
후후후... 그래... 이렇게라도 잊을수 있다면... 잊어버릴수 있다면... 기꺼이 날 속여버리는
는 진실되지 못한 행위에 스스로를 던져 버리마!
미안하다... 어쩌면 네가 생각하고 믿을 나의 순수함에 얼룩을 남기게 되어서......!
아랫입술을 베어물고 눈을 뜬 추림이 시연의 어깨를 잡고 옆으로 쓰러뜨렸다.
강한 눈으로 시연의 얼굴을 바라보며 추림의 몸은 다시 폭풍이 되어갔다.
광풍이 되어갔고 잔인한 지배자가 되어갔다.
그날 밤, 심한 배신감에 좌절한 추림의 애달픈 몸부림은 욕망의 화신이 되어가고 있었다.
* * *
봄... 시간은 덧없이 무의미하고 건조하게 흐르고 있었다.
아무런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삭막한 삶의 연속이었다.
4월이 되자 이제 봄은 더욱 완연해졌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지 못한 추림은 방황과 시련속에 스스로를 불사르는 불나방
처럼 마냥 어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철저히 피했다. 하루에도 몇번씩 걸려오는 전화를 거부했고 피했다.
일이 끝나면 술에 취한 채 늦은 시간에 겨우 잠들고 다시 출근하는 날의 연속이 이어졌다.
시연과 호텔에서 있었던 일 직후 시연은 자주 찾아왔다.
주술에 걸린 자의 행동처럼 추림은 시연의 유혹을 거부하지 못했다.
시연은 수백년동안 갈증에 시달린 괴물같았다. 끝임없이 추림의 몸을 탐하려했고 그에게
무언가를 갈구하려했다.
어느덧 추림의 행동도 시연의 그것에 닮아져갔고 익숙해져 갔다.
마음이 죽은자와의 섹스는 거칠었고 본능의 행위 뿐이었지만 시연은 내색하지 않았다.
4월... 음력으로 유미의 생일이 곧 다가오고 있음을 기억해 낸 추림은 더욱 깊은 방황에
흔들렸다. 그 쯔음에 추림의 방황은 도를 더해져가며 조금씩 다른 사람으로 변해갔다.
환각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디를 보아도 온통 한 여자의 얼굴만 보여 몇번을 헛걸음질하여 넘어지고 부딪혀 상처를
입었다.
회사 동료들의 놀림처럼 폐인이 되거나 막 사는 인간처럼 변해갔다.
아침에 술에 쩔어 출근하고 밤이되면 다시 술에 파묻히는 일과가 기계적으로 반복되었다.
형같이 대해주던 이대준과 박도형의 달램과 야단에도 추림의 방탕은 달라지지 않았다.
어둠... 정오가 막 넘어가는 시간... 추림은 방안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어둠의 저편에서
손짓하는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짐승의 그것처럼 번뜩이는 그의 눈은 정상이 아니었다.
상처입은 짐승의 눈빛이 그러했고 생을 잊어가는 영혼의 기운이 그러했다.
반짝......
눈물을 흘리는 그의 얼굴이 어둠속에 살며시 드러났다.
죽은자의 눈빛! 허탈하고 퇴색된 웃음!
죽음과도 같은 시간이 흘러갔다.
어둠의 한켠에서 유혹하고 손짓하는 것... 안식! 자유! 일탈! 편안한 쉼!
추림은 밀려드는 외로움과 그리움에 고통스러워 하다가 조금씩 죽음을 떠올렸다.
차라리 쉬고 싶었다. 더이상 견디기 힘들었다.
영혼이 부서져가는 느낌이었다.
철저한 파괴자의 앞에 선 초라하고 나약한 이의 심정이었다.
환각은 심했다.
다른 여자를 유미로 착각하고 전혀 엉뚱한 말에도 유미의 음성으로 들어 버리곤 했다.
혼자 중얼거리는 일이 허다해졌고 이일을 해야 하는데 저일을 하고 있었고 이길로 가야
하는데 엉뚱한 길을 걷고 있었다.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가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자장 노래에 팔베
고... 스르..르르 잠...이 드읍니...다......!"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주체할수가 없었다.
죽고만 싶었다. 이토록 사무치는 그리움과 그녀를 목메이게 불러보고픈 심정을 어찌 달래
야 할지 답이 없었다. 견디기 힘들었다.
땡그렁!
손에 들고 있던 빈 소주병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어둠이 떨어댔다.
어느새 스르르 잠이든 추림의 눈가에 축축한 이슬이 진하게 맺혀 있었다.
4월을 얼마 안 남기고 힘든 날을 보내고 있던 추림에게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4월 23일...금요일!
따르르릉 따르르릉......
밤늦은 시간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듣고 있지만 받지 않았다. 이미 오랜동안 전화를 쓰지 않은터라 먼지가 뽀얗게 쌓인 전화
기는 쉴새없이 울려댔다.
술에 취해 몽롱한 정신으로 어두운 방안에 누워있던 추림은 갑자기 짜증이 쏟구쳤다.
화가 치밀었다.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거칠어지고 그렇듯 매사를 부정적으로 대하려는 식
으로 변해버린 추림이었다.
"끄응!"
힘겹게 몸을 일으킨 추림이 전화기로 다가갔다.
전화기를 집어든 그는 그대로 바닥으로 내던졌다.
딸카닥!
전화기가 거칠게 바닥에 떨어졌지만 부서지지는 않았다.
전화기를 그대로 놔둔채 다시 자리에 누우려던 추림의 발검음이 멈칫했다.
"......?"
수화기에서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대준을 말하고 이상한 말들을 하고 있는
음성이 들려왔다.
느낌이 이상한 추림이 전화기를 집어들고 수화기를 귀에 댔다.
-추림아! 듣고있냐? 씨발놈아! 듣고 있냐고?-
거칠게 말하는 이는 박도형의 목소리였다.
이상한 기분이 든 추림이 곧바로 대답했다.
"예. 저예요. 무슨일인데요?"
-이 씹새끼야! 전화는 왜 안받아! 앙! 너 빨리 여기로 와!-
다짜고짜 욕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것이 아니었다. 무척 다급하게 말하는 투가 이상한 것이다.
"왜요? 무슨일... 어딘데요?"
묻다가 다시 욕설이 들려 얼른 위치를 물었다.
-대림동 성심병원으로 와! 빨리와! 씨발놈아! 대준이 지금 죽어간다! 널 찾고있어! 빨리 튀
어오란 말이다! 알았어 씨발놈아!"
악을 써대며 외치는 박도형의 목소리가 갈라터지고 쉬어 있었다.
"......?"
처음에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멀쩡한 이대준이 죽어간단 말인가? 낮에도 멀정했던 사람이 갑자기... 죽어? 간다고?
"예에? 그게 무슨말... 뭐라고요?"
정신이 아득해져왔다.
전화기를 거칠게 바닥으로 던져버린 추림이 허둥거렸다.
불을 켜고 옷을 입다가 꼬꾸라지고 미쳐 날뛰는 사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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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기사를 재촉하고 요금을 따블로 드린다고 말해서 득달같이 대림동 성심병원으로 도착
하자마자 급하게 응급실로 뛰어 들어갔다.
"왔냐! 빨리 왔구나!"
박도형이 추림을 발견하고 말을 건네며 손짓을 해 보였다.
이미 이대준의 누나인 이금선도 와 있었고 이상열 부장과 몇몇 회사 사람들도 도착해 있
었다.
눈물로 범벅이 되고 지친듯한 이금선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몸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
다.
"......?"
한 침대의 주위에 의사 여러명과 간호사가 삥 둘러서 뭔가 이야기를 나누며 분주하게 움직
이고 있었는데 무척 급하고 초조한 모습들이었다.
"이추림씨가 누구죠? 왔습니까?"
한 간호사가 그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 추림은 박도형과 이상열 부장을 번갈아 바라보며
추춤거렸다.
"가봐. 널 계속 찾았는데... 얼마 못산단다."
"......!"
붉게 충혈되 눈에 핏발이 곤두선 박도형이 울었는지 비감한 얼굴로 말했다.
믿을수 없는 말에 추림은 간호사의 재촉에 침대로 다가갔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길을 열어
주자 침대위에 누워있는 피칠갑한 누군가가 보였다.
"......!"
말도 안된다! 산소호흡기... 깨지고 부서진 얼굴과 머리... 온 몸에 피로 목욕한 전신!!
이대준이다! 어떻게 저런 모습일수가 있는지 도저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대준? 왜?"
추림이 멍하게 끔짝한 이대준의 모습을 넋놓고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의사 한명이 추림의 등을 두들겼다.
"이미 뇌출혈이 발생하고 뇌수가 터졌습니다. 두개골 40%가 부서졌고 척주의 절반이 골
절되었고 심장이 기능을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자 이제 산소 호흡기를 뗄 것입니다.
얼마나 저분이 견딜지 모르지만 아마 오분에서 길어야 십분정도 될 것입니다. 약물을 투
여해서 지금까지 견딘 것이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그의 마지막 말을 들으십시오!"
의사의 말이 꿈결같이 들려왔다.
자신에게 말한 의사가 간호사와 다른 의사들에게 무슨 약물을 투여 어쩌고 하는 말이 들
려왔다.
주사기를 링겔의 투입호스에 꼿고 무언가 주입하자 이십초도 안되어 대준의 몸이 부르르
떨며 희미하게 눈을 떴다.
"자 산소호흡기를 뗄 것입니다. 다가오세요. 가급적 귀를 가까이... 준비!"
의사가 말해도 추림은 움직이지 못했다.
믿을수 없는 현실에 몸이 반응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발이 굳은듯 전혀 움직여
주지 않았다. 두렵고 겁났다. 본능적으로 암시되는 일이 현실로 나타날까 그랬다.
누군가 등을 강하게 떠밀어 그 힘에 의해 대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를 악문 추림이 의사가 뭐라고 외치는 모습을 자각하려 기를썼다.
산소호흡기가 떼어지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뒤로 물러났다.
그 자리를 울며 자지러지려는 이금선과 동료들이 차지하고 추림이 가장 가까이 접근했다.
곧 이대준의 작게 떠진 시선이 추림을 바라보는 것인지 죽어가는 눈빛으로 추림을 정확히
바라보았다.
"추...리...임. 미안... 미선...부...탁... 말하지... 마! 어디... 갔다고... 잘 지내...라고!"
무척이나 힘들고 미약한 소리가 추림의 귓속을 희미하게 파고들었다.
힘없는 손으로 추림의 가슴팍을 움켜쥔 대준의 손을 잡았다. 강하게 움켜쥔 대준의 손은
차갑고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
이를 악물고 눈에 힘을 주었지만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수가 없었다.
말을 해야했다. 이렇게 입을 다물고 있다가는 그가 떠난다.
"너 왜이래? 일어나! 일어나 새끼야!"
버럭 소리를 지른 추림이 대준을 억지로 일으키려 했다.
"아악!"
"안돼요! 그대로 두세요. 꺼져가는 불꽃입니다."
이금선이 그런 추림의 행동에 비명을 질렀고 의사가 다급하게 다가와 소리쳤다.
"흐으으! 좆까지 말고 니여자 니가 알아서 해! 뭐야! 씨발놈아! 너 누가 이랬어? 왜 그러냐
고! 말해! 왜 이러냐고... 흑... 개자식아......!"
추림이 발작적으로 소리치며 눈을 부릅떴다.
이렇게 가면 안된다! 넌 너무 젊단 말이다!
추림의 얼굴을 희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대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흘릴 힘도 없는지
맺힌 눈물은 흘러 내리지 못했다.
겨우 입을 벌린 대준이 뭔가 말하려 하자 추림은 더욱 귀를 가깝게 댔다.
마지막 순간일지도 몰랐다. 하나라도 더 들어둬야 했다.
"나아... 충주...호... 뿌려...줘! 미선... 불쌍... 니가 돌봐...줘! 미아안......"
"충주호! 미선... 그리고 또 말해봐 새끼야! 웃기지말고! 말해 개새끼야! 갈고 싶다고 말해!
그렇지? 살고 싶지? 우우욱... 대준아! 말해봐... 말하란 말이야!"
눈물을 쏟아내는 추림이 고함을 지르며 대준의 손을 힘차게 움켜쥐었다.
이 놈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다 알지만 가깝거나 친근한 사람은 자신이 유일했다.
개자식! 감히 자신의 여자를 자신에게 돌봐달라고 하다니! 이대로 가면 넌 나쁜 놈이다!
"너... 컥......! 그러...지...마. 헉...헉! 정....신차...려 추리임! 울...지마! 잘 살...아! 미서언을
... 부탁......!"
숨이 막히는지 컥컥거리던 대준이 피를 토해내며 억지로 힘을짜내 말을 쏟아냈다.
눈을 크게 흡뜬 대준이 상체를 벌떡 들며 추림의 멱살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조금전의 힘과는 전혀 다르다. 온통 깨지고 이지러진 얼굴이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직감적으로 마지막 발악임을 깨달은 추림은 고통스런 얼굴을 대준의 피범벅인 가슴에 묻
고 부볐다.
이렇게 가지마!
네가 좋아하는 파리의 에펠탑은 못가는거잖아! 몽마르뜨의 낭만도 즐겨야 하고 미선씨랑
결혼도 해야 하잖아... 죽지마! 제발 죽지마! 날 떠나지마! 무서워... 두려워... 너무 힘들어!
"개새끼야! 안돼! 안된단 말이다! 뭐라고? 더 크게 말해! 안들린단 말이닷! 우아아......!"
"너어... 조으노옴... 행보오옥... 미안......! 컥... 컥! 미선... 미서어언... 사...랑!"
몸을 부들거리며 떨고 허연 액체가 피와 함께 흘러 내렸다.
간다... 떠나간다... 젊디 젊은 하나의 생명이 이렇게 스러져간다!
어이할까! 어이해서 그렇듯 갈까!
"으아아! 안된단 말이닷! 우아악! 우아악! 제... 발 부탁이야... 아... 안돼."
"흑흑.. 어허엉!"
"흐흐흑... 흑!"
"......!"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린 대준의 목이 뒤로 툭 꺽여지며 허무하게 숨을 놓아 버렸다.
"살려... 선생님! 어떻게 좀... 제발 그를 보내지... 말아요.. 제발, 제발......!"
의사의 가슴팍을 짚고 눈물을 쏟아가며 추림이 다그치고 사정했다. 의사들은 어두운 얼굴
로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으아아아... 우악! 안돼!"
바닥에 무릎을 굻고 오열하는 추림의 절규가 응급실에 메아리쳤다.
이금선이 울다가 실신해 버리고 박도형과 이상열등 여러 동료들이 얼굴을 돌리고 눈물을
흘렸다.
"으아아아... 으아악!"
이대준의 몸을 감싸안은 추림의 입에서 슬픔과 고통의 절규가 길게... 길게 터져 나왔다.
"일어나! 이새끼야! 일어나란 말이야! 으악! 안돼에......!"
다시 그의 외침이 공허하게 울려 퍼진 그날... 1993년 4월, 하나의 영혼이 스러져가고 서러
운 절규는 길게 울려 퍼졌다.
(40장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