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토요일. 비가 내렸다. 소리없이 내리는 비는 새벽부터 시작되어 오후에 접어드는 시간에도 그칠줄 몰랐다. 주말이라는 날의 개념이 사라진지 오래인 유미는 초췌하고 어두운 얼굴로 종로 거리를 지 나쳐 약속 장소를 찾았다. 저멀리 수연이 말한 커피숍, 아담과 이브가 보였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극장 피카디리가 나온다. 추림과 영화 볼 심산으로 왔다가 그냥 발길 을 돌렸던 적이 있는 곳이었다. 커피솝 아담과 이브에 들어서자 많이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고개를 두리번거려 수연을 찾았다. "왔구나?"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툭 치며 하는 말에 유미의 얼굴이 뒤로 향했다. 수연도 이제 막 들어 오는 길인지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바로 뒤에 서있었다. 자리를 찾아 앉고 차를 주문했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여전히 편하지가 않았다. 수연의 얼굴은 밝아 보였지만 그것이 기분이 좋아서인지는 확실하지가 않았다. 차가 한잔이 거의 비워지고 리필을 주문하고 나서야 수연이 이것 저것 물어 보았다. 둘은 계절이 바뀌고 나서 거의 처음이었다. 목적이 있는 만남이다. 유미의 행방이 사라지고 그녀를 찾을 길이 없었지만 수연은 그런쪽에 도가 텄는지 기어이 이렇게 만나고 말았다. 수연이 언니 유화에게 집요하게 조르고 부탁하여 이자리에 나오게 된 유미였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추림이었다. 유미는 친구 수연을 볼 때마다 묘한 질투심 감정을 느끼곤 했다. 자존심 제일 수연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늘 밝고 털털했다. 자신에게 없는 소박함도 지 녔고 살뜰한 점도 많아 남자들에게 사랑 받을 스타일이었다. 또한 그녀는 이야기 할 때 자 신처럼 고개를 숙이거나 그러지 않았다. 추림이 말한대로 상대의 얼굴에 시선을 곧이 두고 말하는 것이다. 여러모로 자신과는 대조적이었다. "유미아. 우리 친구 맞니? 이상하잖아? 친구인데 늘 어려운거 같고 어색한거 같기도 하고 ... 마치 빚쟁이를 대하는 느낌이랄까? 우리 감정이 없다면 솔직하게 터놓고 이야기 해보 자." "뭐든지. 궁금한게 있는거야? 우리 오랜만이잖아. 그냥 편한 대화나 하면 안될까? "후훗. 너 내가 여기에 왜 왔는지 알고 있잖아? 안그러니? 그게 솔직히 알고 싶은거잖아?" 자신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수연의 말투에 유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대놓고 내색하기는 싫었다. 이왕 잊어가기로 한 사람이었다. 더이상 흔들리기 싫었 다. "나도 지금 굉장히 짜증 나려고 하거든? 내가 왜 친구의 일로 널 만나서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 하는지 미친년 같은 기분이야. 솔직히 말하면 너는 둘째 문제고 추림이 걱정되서야."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수연의 입에서 추림의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닌척 하면서 최대한 긴장한 채 귀를 기울였다. "어쩜 그렇게 사람이 달라 질 수 있는거니? 너 그거 알아? 만약 추림이 네가 없었다면 아무 렇지도 않은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었을 거라는거? 내 말이 너무 심하게 들리니?" 입술을 깨문 유미가 고개를 좌우로 가로 저었다. 심한 말이다. 하지만 당연히 그런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말해볼래? 너 지금 추림 보고싶지?" "글쎄? 그가 보고싶은지 나도 잘 모르겠어. 꼭 보고 싶어해야 하는거야?" 반발심이 밀려들어 부정적으로 대답한 유미의 말에 수연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 다행이네. 난 니가 추림을 보고싶어 하고 있는줄 알았거든. 그럼 추림의 근황이 궁금할지도 모르니까 그에 대해 이야기 해줘도 상관 없겠지?" "응. 아는 사람이니까 들어도 되겠지 뭐." 수연은 서글한 눈으로 유미의 얼굴에서 가식이나 거짓을 찾아내려 집요하게 살폈다. 거짓말이다. 흔들리고 있는 눈빛이란것은 어린 아이도 알것이다. 초조하고 굳은 얼굴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그는 잘 있겠지? 열심히 일할거고 친구들도 자주 만나겠지? 늘 그렇잖아." 아닐거라 예상하면서 그렇게 물은것은 자신의 본심을 감추기 위한 작은 연극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유미는 마치 커다란 것을 얻은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른 친구도 아니고 수연이란 친구의 앞이었다. 묘한 대립의 역학적 관계인냥 늘 비교와 잣대의 기준이 된듯한 친구였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기는 싫었다. 물론 수연도 알것이다. 자신이 추림을 얼만 큼 좋아하고 그리워 하고 있다는 것 따위를 말이다. 만약 수연이 웃는 낮으로 말하지 않았 다면 좀 더 솔직하고 차분해질수 있었지만 수연의 웃는 얼굴에 반항심이 솟구쳤다. "잘 있다? 잘있어. 아주 잘...! 친형처럼 여기던 누군가가 죽어서 슬퍼하고 어떤 여자를 사 랑하는데 그 여자는 사라졌고 사랑할 수 없어서 괴로워하고 절망에 빠져있지. 실의에 젖 어서 매일 술에, 악몽에, 방황에, 허무에 시달리지... 굉장히 재밌게 살고 있지 않겠어?" "......!?" 힘든 와중에 큰일을 만났다. 그가 많이 어려워 하고 있는것 같다. 커다란 송곳으로 가슴을 후벼파는 느낌이 몰려 들었다. 조금은 그럴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그렇게까지라니... 하지만 멀쩡히 견디고 있을거라 생각했다. 이미 지난번에도 수연에게 똑같은 말을 들었고 그 후에 그를 보았었다. 힘들었겠지만 그는 여전했고 아주 조금 달라져 있었을 뿐이었다. "나! 추림 좋아해! 너처럼 그렇게 사랑하지 않을 자신있어!" "......!" 갑작스럽게 수연의 입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어울리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그 말을 들은 유미는 갑작스런 어떤 충격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녀가 추림을 좋아하리라 생각은 했지만 갑자기 여기서 왜 그말이 흘러 나오고 저렇듯 강조하면서까지 말하는 것인 지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너로인해 추림이 흔들릴때 난 그때마다 항상 그의 곁에 있었어. 그정도면 되지 않아? 누 군 그를 힘들게 하지만 누군 그를 위로해주고 기대게 해 줄수 있어. 말하고 싶은게 있어서 극구 널 만나야 겠다고 유화 언니에게 떼를 부렸던거야. 유미! 너 이제 추림앞에 나타나지 말아줄래? 아니 그를 잊어줄래? 석호도 좋고 영진도 좋아! 다른 남자도 많잖아! 하지만 추 림만큼은 만나지 말아줄래? 부탁하는거야. 니가 추림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내 말을 들어주리라 믿어."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수연은 유미에게 강하고 또렷하게 말했다. 수연의 얼굴에 시선을 둔 유미의 얼굴도 굳었고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 "추림은 지금 굉장히 힘들어. 아주 엉망이지. 얼마전에 그를 찾아갔었어. 니가 내게 그의 안부를 묻고 얼마 안되서였는데... 난 믿을수가 없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추림이야! 그는... 추림은 그러면 안되는 사람이라고! 만약 유미 네가 추림과 별다른 일없이 서로 사 랑해나가고 있었다면 난 너의 둘 사이에 끼어들 여지가 없었을거야. 당연한거니까. 하지만 한 사람은 여전히 한 사람을 좋아하고 변하려 하지 않는데, 한 사람은 다른 한쪽과 는 달리 늘 다른 모습 다른 마음이잖아. 그건... 사랑도 뭣도 아니야!" 예전부터 수연의 저런 점이 무섭고 부럽기도 했다. 자신의 생각과 이상을 관철시키려 도전하려했고 직선적으로 강한 사고를 피력하곤 했다. 몸이 떨려왔다. 다른이도 아니고 친구에게서 듣게 된 말이었다. 사랑하지 말란다. 만나지 말란다. 잊으라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피해를 준단다! "난...난... 너의 말을 안들은 것으로 할래. 그를 좋아하건 사랑하건 너의 마음이잖아. 하지 만... 내게 강요하거나 그렇게 부탁하지마!" 유미가 힘겹게 그렇게 말하며 허벅지의 옷자락을 힘껏 움켜쥐었다. 눈물이 나려했다. 죽을힘을 다해 눈물을 참아낸 유미의 고개가 힘껏 들리며 수연의 얼굴 을 바라보았다. "그래! 난 그를 힘들게 하는 여자야. 그만큼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난 그를 사랑한다고 우 기는 못된 년이야. 날 비웃겠지? 사랑하는 남자를 두고 다른 남자랑 자는 년이라고? 가서 물어볼까? 그가 너와 나 둘중에 누굴 좋아하고 사랑하는지?" 유미의 입에서 도전적이고 앙칼진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참을수 없는 격분이었다. 자신보고 뭘 어쩌란 말인가! 괴롭다. 괴롭고 힘들어 죽어 버릴것 같은데 어떻하란 말인가! "그래? 그럼 그를 왜 그렇게 내버려 두는데? 추림을 그렇게 말려 죽이려고? 넌 다른 사람 들을 잘도 만나고 다니면서 그는 오로지 너만 사랑해야 하는거니? 너무 이기적인거 아니 야? 너 집에 안있고 다른곳에 피해 있는 의도가 뭐야? 죄졌니? 추림은 네가 필요한데 넌 그를 외면하고 있잖아! 아니야? 죽을것 같다고? 가서 추림을 한번 볼래? 정말 죽을것 같은 사람이 누군지 한번 볼래? 영진이 전화했더라. 식사나 같이 하자고. 다 말하더구나. 놀러가기로 했는데 빵구 났다면서? 유화 언니가 널 위로해 주라고 부탁하더라. 추림때문 에 힘들어 할거라면서... 그런데 왜 내 귀에는 널 때려주라는 소리도 들렸을까? 이상하지? 난 이해하기도 널 위로해 주기도 싫어!" 점점 어려워져 간다. 어긋나가고 있다. 원하지 않은 일들이 모든것을 더욱 어렵고 꼬이게 만들어 가고 있다. 인연... 인연... 인연이 아닌가! 왜! 왜! 자신의 사랑을 이렇게 더럽게만 만들어 가는걸까! 할말을 잊어버린 유미는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수연을 설득시키고 이해시킬 기운이 없었다. 모든것은 오해이고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변명할 기회가 없음을 느끼고 있었다. "적어도 난 너처럼 그렇게 하지 않을 자신있어. 힘들때 작으나마 어깨를 빌려주어 그에게 기대게 할 자신있고 같이 울어줄수있어. 피하지 않을거고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을 자신있 어. 내가 잘못했다면 용서를 빌거고 죽어라고 죄를 빌거야. 메달릴거고 차라리 그가 보는 앞에서 죽어 버릴거야!" 수연의 강한 어조는 신랄하게 유미를 비판하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온통 유미가 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 투성이었다. 정말 수연이 그렇게 할지는 모르지만 적 어도 다짐 정도는 될 것이다. "왜 나안테 그런 말을하니? 이런 말 하지 않고도 그렇게 하면 되잖아. 왜 내게 이런말을 하 는건데? 왜? 그래. 난 다 거짓이야!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해. 난 아직도 추림씨를... 사랑해 ! 누구보다 사랑해! 이건 진실이고 내 모든것이야!" 수연을 똑바로 응시하고 그렇게 말한 유미의 눈은 찬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것이다. 그것이면 되는 것이다. 진실하게 올곧게 사랑한다면 다른 것은 상관없다. 그런것이다. 사랑은 조건도 이상도 이유도 지닐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아니! 넌 마치 내가 하지 못하는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넌 몰라! 물론 나와는 다를지도 모르지만 네가 모르는것이 있어. 니가 추림씨를 좋아한다해도 그가 널 좋아해주 지 않는 이상 너의 사랑은 허무할 뿐이야. 그와 내가 사랑하는 것보다 더 힘들고 어려울걸 ? 이건 장담해! 짝사랑이 왜 오래가고 힘든줄 알아? 절대 가질수 없는 가치이기 때문이야! 자신에게 맞지 않는 가치를 억지로 가지려고 해서 힘들고 필요하기 때문에 오래가는 거야. 넌 모르고 있어. 그래 너의 그 마음을 나는 상관 할 수 없어. 하지만 내게 강요하지마!" "......!" 입술을 베어문 수연은 억울한듯 얼굴을 일그리고 있었다. 숨을 죽여버린 유미는 조금은 트인 마음이었다. 다른것은 다 참을수 있었다, 하지만 한가지는 참기 싫었다. 자신의 사랑을 모독하거나 손가락질 하는것만은 참기가 싫 었다. 추림의 말이 떠오른것이다. 수불능오여지애... 감히 나의 사랑을 더럽다 욕하지마라! 그렇게 사랑하자고 했었다.누군가가 자신들의 사랑을 비웃고 놀려도 그렇게 여기며 사랑 하자 했었다. 그리웠다. 수연의 말처럼 그를 찾아가 위로하고 싶었고 기댈수 있는 어깨를 내어주고 싶었 다. 하지만... 하지만 그럴수 없었다. 수연의 말속에 정답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만나면 그를 더 힘들게 할거라는 말이었다. 그말이 정답처럼 들려왔다. 정말 웃긴 경우였다. 사랑하는데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니... 이 렇게 모순될 수도 있는 것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모순이었다. "난 여전히 추림씨를 사랑할거고 그리워 할거야. 지금은 내가 이런 모습이지만 언제가는 반드시 그를 만나서 내 사랑을 확인할거야!" 유미는 수연의 말들을 모조리 묵살해 버리는 마음을 토로했다. 수연이 추림을 좋아하거나 하는 것은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그의 마음이 변한다해도 오로 지 자신은 추림을 사랑하고자 했다. 언젠가 그의 앞에 서서 미안하다 말할 것이고 사랑한다 말할것이며 그의 사랑을 다시 확 인할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기다리고 늘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지금은 너무 힘들고 절망스러웠지만 자신의 죄과라고 생각했다. 올바르지 못했던 행동에 관한 죄이고 어려운 시간을 가지라는 심판이라 생각했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가 그렇게까지 힘든 방황을 하고 있다니 달려가고 싶었다. 가서 그를 확인하고 싶었다. 미칠것 같은 기분... 폭주해 버리고 싶었다. "아니야!" 서로 침묵을 지키던 순간이 수연의 뾰족한 한마디에 의해 깨어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미가 얼굴을 들어 수연을 바라보았다. "절대 아니야!" * * * "아니야! 절대 아니야아아!" 강하게 부정하는 말을 터트린 미선은 뒤로 몸을 늘이고 말았다. 찻집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고 이상하게 바라보았지만 추림은 상관하지 않았다. 아니 상관하거나 신경쓸 정신이 없었다. 미선을 만나 식사하고 억지로 재밌게 놀아주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는 이유가 그를 그렇게 힘들게했다. 한시간여가 지나고 마음에 결단을 내린 추림이 먼저 미선에게 강한 마음을 가지라 부탁하 고 대준의 죽음을 힘겹게 일러 주었다. 예상은 했었다. 당연한 행동반응이 나오리라 수도없는 경우를 생각하고 대처할 준비도 해 두었다. 그러나 막상 상황에 마딱뜨리고 나니 정말 어려웠다. 처음에 미선은 믿지 않고 장난치지 말라며 말하다 조금씩 얼굴표정이 이상하게 변해갔다. 결국 상세하게 설명할 수 밖에 없었다. 대준이 술에 취한 채 오토바이를 타고 광란의 질주를 벌이다 트럭과 충돌했으며 병원에서 자신에게 부탁한 말까지 해버렸다. "미선씨......!" 추림이 흐느끼며 고개를 연신 도리질 치는 미선을 달래주려다가 그만두었다. 자신도 이렇게 힘든데 그녀는 얼마나 힘들까! 믿을수 없으면서도, 부정하면서도 현실앞에 무력한 채 그렇게 슬퍼했다. "... 나쁜... 나쁜사람! 나쁜놈! 왜... 왜 죽었어! 왜 죽었니? 추림씨 아니지요? 그렇지요? 맞 아! 아닐거야! 아니라고 말해봐요!" 찻집안이 울릴 정도로 커다랗게 소리치는 미선이 다가와 추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애 원했다. 상황이 이상했는지 사람들의 반응은 짜증나는 가운데 침묵으로 바라만 보았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미선의 손을 잡아주며 힘겹게 말한 추림이 고개를 숙여 버렸다. 정말 어려운 부탁을 대준이 남겼다. 못할짓이다. 죽음을 알리는 상대가 이제 막 사랑을 풋 풋하게 키워 미래를 꿈꾸고 있는 여자였다. 힘든 그녀의 환경을 대준이 온통 책임지고 있었다. 월급을 받는데로 그녀의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에 지출했고 투자했다. 미래! 그 하나를 보고 그렇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 버렸다. 미선에게 여러가지로 커다란 존재가 사라진 것이다. 절망과 고통... 이제 미선의 삶은 빛바래질 것이다. 추림은 후회했다. 말하지 말것을... 왜 이제야 깨달은건지... 그녀가 찾아오면 어떻게 말해 야 할지 모르고 기다리느니 차라리 일찍 알려주어 상황에 익숙해지라 하려 했는데 후회스 러웠다. "아니야... 아닐거야! 흑흑! 왜 그랬니! 나 어떻하라고 나쁜놈아! 왜 죽었어!" 미선이 고통스럽게 말하며 흐느꼈다. 소란에 종업원이 다가오다가 그녀의 말을 듣고 멈칫 했다. 추림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입을 가린 후 다시 돌아갔다. 한시간을 넘게 울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아무런 말도 해줄수 없는 추림은 미선의 고통을 느낀 채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기다렸다. "그는... 편히 갔겠지요? 많이 아프지 않았겠지요?" 오래도록 울던 미선이 의외의 모습을 보였다. 눈물을 훔치고 차분하게 변했다. 추림이 알고 있는 미선은 무척 심약하고 섬세한 여자였다. 잘 웃지도 않지만 큰 행동이나 거친일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연속극을 보면서 울 정도로 눈물이 많고 정이 지나치다 할 정도로 많은 여자였다. "예. 그는 편하게 갔어요. 웃으면서... 할말 다하고 편하게 갔어요. 아마 마지막까지 고통을 못 느꼈을 겁니다." 거짓말이다. 감각이야 거의 느끼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가는 순간은 처절했다. 장기가 파열되어 피를 몇되나 토해내며 십여분을 넘게 힘들어했다. 한마디라도 더 하려고 몸부림쳤고 기운을 짜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할수는 없었다. "추림씨!" "예. 미선씨. 말씀하세요." 서글픈 얼굴로 추림을 부르는 미선의 눈가에 진한 아픔이 스며들어 있었다. "저. 그사람 사랑했어요. 아주 많이 사랑했어요." "알아요. 제가 모르면 누가 압니까.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 잘알고 있었다. 바람끼가 넘치던 대준을 유일하게 잡아끌던 여자였다. 처음에 충주호에 놀러갔다가 대학 동아리에서 여행온 양미선을 만나 장난치듯 알고 지내 던 대준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섬세함과 사람됨은 대준의 성정을 바꾸어 놓았을 정도로 속이 깊고 정이 많은 여자였다. 한번은 미선을 울렸다고 대준이 이주를 넘게 괴로워 한적도 있었을 정도였다. 반드시 결혼해서 프랑스 파리로 신혼 여행을 간다고 했었는데... 깨진 꿈이었다. "전... 혼자 못살아요." 쓸쓸히 말하는 미선의 말을 들은 추림은 예감이 이상했다. 마치 무언가 음습한것이 다가드 는 느낌이 들었다. "미선씨. 기운을 내셔야해요. 대준이형도 그것을 바랄거고 잘못되면 무척 슬퍼할 겁니다." "아니요. 우린 죽어도 같이 죽자고 했어요. 한날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죽자고 했어요. 그런데...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요." 다시 눈물을 흘리는 미선은 처연한 얼굴로 대준을 떠올리고 있는것 같았다. "제 팔자가 그런가보네요. 추림씨... 고맙고 미안해요. 그가 무척 힘든 부탁을 한 것 같아 제 가 대신 고맙게 생각할께요. 저 그만 갈래요." "......?"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직관력과 어떤 예감에 강한 에너지를 빌린 추림은 아무래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아닐것이다. 단지 불안한 마음일 뿐이었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좀 더 있다가... 식사라도... 아니면 어디가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허둥거리며 추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말하는 동안 미선은 벌써 몇발자국을 걷고 있었다. "미선씨! 미선씨! 잠깐만요!" 거리로 나와 우산도 펼치지 않은 채 우림은 미선을 얼른 따라 붙으며 그녀를 불렀다. 우산을 접은 채 비를 그대로 맞아가며 저만치에서 걸어가는 미선의 어깨가 무척 외롭게 보였다. "잠깐 예기좀 해요. 아니 제 부탁... 대준이 부탁에 대해 이야기좀 해요." 급한 나머지 평소 부르던 그대로 대준을 형이라 칭하지 않은 추림이 미선의 팔을 잡아 발 길을 멈춰 세웠다. "아까 못한 말이 있는데, 대준이 천천히 오래요. 열심히 공부하고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 고 할 거 다하고 오래요. 반드시 그렇게 전해 달래요. 빈다고 했어요. 항상 그렇게 빌고 또 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만나주지 않는다고 부탁했어요." 숨을 내쉬며 빠르게 말한 추림은 초조하게 미선의 반응을 살폈다. 미선이 살짯 웃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추림은 곧 멍한 표정을 지었다. "훗! 추림씨. 추림씨는 거짓말을 상당히 못하는군요? 애써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돼요. 저 괜찮아요. 이만 가 보세요. 바쁠텐데, 전 일이 있어서 이만 가 볼께요." 미선의 말에 추림은 갑자기 몸이 으슬거리며 떨려왔다. 정말 이상하게 예감이 좋지 않았다. 무서울 정도로 미선의 반응이 침착하고 냉정했다. 미선이 다시 걸어갔다. 추림은 터벅거리며 미선의 뒤를 몰래 따라갔다. 한참을 걸어 미선이 보라매 공원으로 접어들어 배회하다 공중전화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 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미선을 미행하며 상황을 지켜 보았다. 이십여분을 어딘가에 전화를 건 미선이 다시 걸어서 대로로 나왔다. 길가에 멈추어 선 미선이 택시를 타는 것을 확인한 추림은 그제서야 마음을 놓았다. 아마 집으로 향할 것이다. 집에 도착해서 울지 못한것을 마음껏 토해내고 슬퍼하고 고뇌 할 것이다. 한동안 방황하다보면 괜찮아 지겠지...... 추림은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저녁 일곱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토요일이지만 할 일도 없었다. 한숨을 내쉰 추림은 할일없이 거리를 걸었다. 이미 몸은 거의 젖어 있었다. 냉기가 느껴져 몸을 떨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디가서 술이라도 한잔 하고 들어가기로 했다. 사람들을 만나는게 싫었다. 집안에 있어도 불이 밝혀지는 것들은 켜지 않았다. 조용히 혼 자 있고 싶었다. 자주오던 시연은 본격적인 기자 일에 정신이 없어 연락만 가끔 해왔다. 선주는... 연락이 없다. 물론 자신이 연락을 시도해본지는 오래되었다. 그만큼 정신이 피폐 해져 있었다. '어디가서 술을 마시나......?" * * * 밤이 늦어가자 비는 멈추었다. 대신 기온이 떨어지고 바람이 불었다. 거리는 조용했다. 길가에 가로등만 훤한 채 사람들이 인적은 뜸했다. 일곱시 반에 도착해서 지금 시간은... 시계가 없어서 모르겠지만 아마도 세시간 이상은 지 난듯했다. 사람들의 인적이 뜸해지는 것으로 보아 아마 열한시는 넘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추림이 사는 빌라의 골목 근처였다. 도로가에서 정면으로 마주보이는 곳이므로 만약 추림 이 뒷길로 오지 않는다면 이길로 들어 설 것이었다. 다리가 아파오고 감기 기운이 있는지 얼굴은 뜨겁고 현기증이 느껴졌다. 수연과 헤어져 무작정 찾아온 길이었다. 혹시 먼 발치에서 그를 볼 수 있을까 했지만 추림 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집안에 없는것은 몇번 확인했다. 골목 담벼락 밑에 쭈구리고 앉아 뚫어져라 대로변으로 통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넓직한 골목을 들어서는 것이 보여 유미는 긴장한채 눈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곧 맥이 풀렸다. 벌써 열번 이상은 이렇게 긴장과 이완을 반복했다. 지루한 시간이 흘렀다. 밤하늘이 맑게 개이면서 별들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바람은 더 심해지고 몸은 조금씩 쳐져갔다. 돌아가고 싶었다. 수도없이 생각했지만 발걸 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그의 모습을 몰래 보고 싶었다. 그럴수만 있다면 가슴속에 담긴 열기를 덜어낼수 있 을것 같았다. 발자국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만은 하는 심정으로 담벼락에 몸을 기대로 시선을 한곳에 고정했다. 이번이 아니면 더이상 견디기 힘들것 같았다. 무척 거칠고 일정하지 않은 발자국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리고 어느순간 검은 그림자를 길게 늘이며 누군가가 골목길을 접어 들었다. "......!" 멀리 가로등 불빛에 비추어드는 남자... 추림이었다. 가슴이 다시 뛰었다. 비틀거리며 담벼락을 짚으며 힘겹게 걸어들어 오고 었었다. 술에 취해있다. 가슴이 거칠게 두근거리고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보인다. 멀지만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토록 그리운 사람이었는데... 더이상 다가 가지 못하다니... 미칠것 같았다. 담가에 손을 짚고 허리를 숙인 추림이 토악질을 하고 있었다. 웬만하면 저렇듯 취하지 않는 추림인데... 무척 취해 보였다. 한참을 토하던 추림이 휘청거리며 바닥으로 넘어졌다. 손으로 바닥을 짚어 흉한 꼴은 면했 지만 손바닥에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저도 모르게 달려가려한 유미는 추춤 멈추었다. 눈물이 흘렀다.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었다. 비틀거리며 넘어진 그를 안아 일으켜 주고 집 으로 데려다 주고 싶었다. "추림... 추림... 보고싶었어요!" 소리없이 흐느끼며 중얼거린 유미는 비틀거리며 담벼락에 몸을 기댔다. 가슴이 터져 버릴것 같았다. 당장 달려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한스러웠다. 신에게 수천번도 더 빌고 빌었던 기도를 다시 되뇌이며 발걸음을 떼었다. 골먹을 꺽어 빌라로 들어서는 추림을 뒤쫒았다. 느렸다. 바로 코앞인 집을 쉽게 걸어 들어가지 못하고 무척 힘겹게 가고 있었다. "거기가 아니에요. 왼쪽으로 조금더요. 조심해요! 화단이 있잖아요.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 조금 쉬었다 가세요." 익숙한 추림의 집이라 머리속에 길을 떠올리며 위태위태하게 걷는 추림을 걱정스럽게 바 라보며 중얼 거렸다. 계단을 힘겹게 올라 들어가는 모습을 끝으로 추림이 사라졌다. 가슴이 막혀와 유미는 손으로 가슴팍을 치며 막힌 가슴을 뚫으려했다. "추림 사랑해요. 저 기다릴꺼예요. 보고싶었어요. 너무너무 보고싶었어요. 사랑해요... 사 랑해요... 흑!" 빌라의 입구에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가린채 흐느껴 울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가운데 추림은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현실과 비현실이 오락가락 하는 혼동에 사고가 정지한듯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었 다. 집에 들어오자 마자 화장실로 들어가 뱃속에 든 내용물을 모조리 토해내자 울렁거리는 속 이 진정되고 머리의 두통도 조금 가라앉았다. 물을 마시자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포장마차에서 마시다가 호프집에 들어가 무식하게 술을 들이켰다. 혼자 마시며 울기도 하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시간이 지루하게 흐르고 있었다. 견디기 힘든 날이었다. 무엇으로도 이 마음을 달랠수 없을것 같았다. 미치도록 유미가 그리웠다. 어디로 갔는지 그녀의 언니 유화는 모른다고 말했다. 흔적도 없다. 손안에 든 무언가가 어느날 사라진 것같은 기분이었다. 하긴... 이제 다른 모습이어야 하는 그녀였다. 사랑하지만 내색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 두통에 얼굴을 일그리며 우두운 방안에 멍하게 앉아있던 추림은 어디선가 미약하게 흐느 껴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환청? 자주 있는 일이라 그렇게 생각하려 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을 잡아 끌었다. 마치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멀리서 아련하게 추림이라 부르는 소리로 착각 되게 들려오는 흐느낌이었다. 갑자기 몸이 부르르하고 떨려왔다. 흐느낌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아주 나직한 소리는 이 제 기척만 미약할 뿐 조금전 처럼 어떤 소리인지 대충이라도 구별할 수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추림이 우당탕 거리며 현관문을 열고 뛰쳐 나갔다. 신발도 신지 않은채 밖으로 뛰쳐나온 추림은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느낌이다! 온 신경 세포가 곤두설 정도로 강력한 느낌이 전신을 감쌌다. 느껴진다! 아니 그런것 같다. 그녀의 냄새... 싱그런 초원의 풀향... 왔었다! 아닌가......! 주위를 둘러보며 흔들거리는 시선으로 길을 찾아 냅다 뛰었다. 퍽! 곡몰을 나서다가 담에 부딪혀 넘어졌다. 이마가 깨져 피가 흘렀다. 힘들게 일어나 다시 뛰었다. 제 정신이 아니었다. 도로가로 뛰쳐나온 추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최대한 시선을 하나로 잡아내려 애썼다. 안보인다! 환청? 착각? 아니...다! 그 느낌! 그 풀내음! 그녀의 것이다! "유미이이......!" 늦은 밤이 추림의 함성에 놀라 일렁거리듯 그의 외침이 멀리 멀리 퍼져 나갔다. "유미이이... 유미이이......!" 골목길을 휘청거리며 뛰어 한바퀴 돈 추림은 그렇게 외치다가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고개를 숙였다. "유미... 너지? 어딨어? 어딨어어어... 흑흑! 왔지? 여기에 있잖아!" 추림의 목소리가 점차 미약해지며 흐느낌이 밤을 흔들었다. "흑흑! 미안해요 추림! 정말 미안해요... 나도 다가가고 싶어요. 그런데 어쩌지요? 흐흑! 당신을 사랑하지 말래요... 견디세요. 할 수 있을거예요. 미안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도로가 건너 트럭뒤에 몸을 숨긴 채 유미는 추림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 달려가고 싶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달려가서 그에게 안기고 싶었다. 저주스러웠다. 모든것이 저주스럽고 한맺히게 느껴졌다. "건강하세요 추림! 사랑해요!" "유미이이이......!" 추림의 외침이 어두운 허공을 뚫어버리고 있는 밤이었다. (2장에서 계속)
유리사랑 (41장/ 어떤 밤에 생긴일...) <실극화>
5월 1일 토요일.
비가 내렸다. 소리없이 내리는 비는 새벽부터 시작되어 오후에 접어드는 시간에도 그칠줄
몰랐다.
주말이라는 날의 개념이 사라진지 오래인 유미는 초췌하고 어두운 얼굴로 종로 거리를 지
나쳐 약속 장소를 찾았다.
저멀리 수연이 말한 커피숍, 아담과 이브가 보였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극장 피카디리가 나온다. 추림과 영화 볼 심산으로 왔다가 그냥 발길
을 돌렸던 적이 있는 곳이었다.
커피솝 아담과 이브에 들어서자 많이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고개를 두리번거려 수연을 찾았다.
"왔구나?"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툭 치며 하는 말에 유미의 얼굴이 뒤로 향했다.
수연도 이제 막 들어 오는 길인지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바로 뒤에 서있었다.
자리를 찾아 앉고 차를 주문했다.
오랜만에 만났지만 여전히 편하지가 않았다. 수연의 얼굴은 밝아 보였지만 그것이 기분이
좋아서인지는 확실하지가 않았다.
차가 한잔이 거의 비워지고 리필을 주문하고 나서야 수연이 이것 저것 물어 보았다.
둘은 계절이 바뀌고 나서 거의 처음이었다.
목적이 있는 만남이다.
유미의 행방이 사라지고 그녀를 찾을 길이 없었지만 수연은 그런쪽에 도가 텄는지 기어이
이렇게 만나고 말았다.
수연이 언니 유화에게 집요하게 조르고 부탁하여 이자리에 나오게 된 유미였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역시 추림이었다.
유미는 친구 수연을 볼 때마다 묘한 질투심 감정을 느끼곤 했다.
자존심 제일 수연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늘 밝고 털털했다. 자신에게 없는 소박함도 지
녔고 살뜰한 점도 많아 남자들에게 사랑 받을 스타일이었다. 또한 그녀는 이야기 할 때 자
신처럼 고개를 숙이거나 그러지 않았다.
추림이 말한대로 상대의 얼굴에 시선을 곧이 두고 말하는 것이다.
여러모로 자신과는 대조적이었다.
"유미아. 우리 친구 맞니? 이상하잖아? 친구인데 늘 어려운거 같고 어색한거 같기도 하고
... 마치 빚쟁이를 대하는 느낌이랄까? 우리 감정이 없다면 솔직하게 터놓고 이야기 해보
자."
"뭐든지. 궁금한게 있는거야? 우리 오랜만이잖아. 그냥 편한 대화나 하면 안될까?
"후훗. 너 내가 여기에 왜 왔는지 알고 있잖아? 안그러니? 그게 솔직히 알고 싶은거잖아?"
자신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수연의 말투에 유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대놓고 내색하기는 싫었다. 이왕 잊어가기로 한 사람이었다. 더이상 흔들리기 싫었
다.
"나도 지금 굉장히 짜증 나려고 하거든? 내가 왜 친구의 일로 널 만나서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 하는지 미친년 같은 기분이야. 솔직히 말하면 너는 둘째 문제고 추림이 걱정되서야."
짐작하고 있었으면서도 수연의 입에서 추림의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닌척 하면서 최대한 긴장한 채 귀를 기울였다.
"어쩜 그렇게 사람이 달라 질 수 있는거니? 너 그거 알아? 만약 추림이 네가 없었다면 아무
렇지도 않은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었을 거라는거? 내 말이 너무 심하게 들리니?"
입술을 깨문 유미가 고개를 좌우로 가로 저었다.
심한 말이다. 하지만 당연히 그런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말해볼래? 너 지금 추림 보고싶지?"
"글쎄? 그가 보고싶은지 나도 잘 모르겠어. 꼭 보고 싶어해야 하는거야?"
반발심이 밀려들어 부정적으로 대답한 유미의 말에 수연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 다행이네. 난 니가 추림을 보고싶어 하고 있는줄 알았거든. 그럼 추림의 근황이
궁금할지도 모르니까 그에 대해 이야기 해줘도 상관 없겠지?"
"응. 아는 사람이니까 들어도 되겠지 뭐."
수연은 서글한 눈으로 유미의 얼굴에서 가식이나 거짓을 찾아내려 집요하게 살폈다.
거짓말이다. 흔들리고 있는 눈빛이란것은 어린 아이도 알것이다. 초조하고 굳은 얼굴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그는 잘 있겠지? 열심히 일할거고 친구들도 자주 만나겠지? 늘 그렇잖아."
아닐거라 예상하면서 그렇게 물은것은 자신의 본심을 감추기 위한 작은 연극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유미는 마치 커다란 것을 얻은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른 친구도 아니고 수연이란 친구의 앞이었다. 묘한 대립의 역학적 관계인냥 늘 비교와
잣대의 기준이 된듯한 친구였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보여주기는 싫었다. 물론 수연도 알것이다. 자신이 추림을 얼만
큼 좋아하고 그리워 하고 있다는 것 따위를 말이다. 만약 수연이 웃는 낮으로 말하지 않았
다면 좀 더 솔직하고 차분해질수 있었지만 수연의 웃는 얼굴에 반항심이 솟구쳤다.
"잘 있다? 잘있어. 아주 잘...! 친형처럼 여기던 누군가가 죽어서 슬퍼하고 어떤 여자를 사
랑하는데 그 여자는 사라졌고 사랑할 수 없어서 괴로워하고 절망에 빠져있지. 실의에 젖
어서 매일 술에, 악몽에, 방황에, 허무에 시달리지... 굉장히 재밌게 살고 있지 않겠어?"
"......!?"
힘든 와중에 큰일을 만났다. 그가 많이 어려워 하고 있는것 같다.
커다란 송곳으로 가슴을 후벼파는 느낌이 몰려 들었다.
조금은 그럴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그렇게까지라니... 하지만 멀쩡히 견디고 있을거라
생각했다.
이미 지난번에도 수연에게 똑같은 말을 들었고 그 후에 그를 보았었다.
힘들었겠지만 그는 여전했고 아주 조금 달라져 있었을 뿐이었다.
"나! 추림 좋아해! 너처럼 그렇게 사랑하지 않을 자신있어!"
"......!"
갑작스럽게 수연의 입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어울리지 않은 말이 튀어나왔다.
그 말을 들은 유미는 갑작스런 어떤 충격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녀가 추림을 좋아하리라
생각은 했지만 갑자기 여기서 왜 그말이 흘러 나오고 저렇듯 강조하면서까지 말하는 것인
지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너로인해 추림이 흔들릴때 난 그때마다 항상 그의 곁에 있었어. 그정도면 되지 않아? 누
군 그를 힘들게 하지만 누군 그를 위로해주고 기대게 해 줄수 있어. 말하고 싶은게 있어서
극구 널 만나야 겠다고 유화 언니에게 떼를 부렸던거야. 유미! 너 이제 추림앞에 나타나지
말아줄래? 아니 그를 잊어줄래? 석호도 좋고 영진도 좋아! 다른 남자도 많잖아! 하지만 추
림만큼은 만나지 말아줄래? 부탁하는거야. 니가 추림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내 말을
들어주리라 믿어."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수연은 유미에게 강하고 또렷하게 말했다.
수연의 얼굴에 시선을 둔 유미의 얼굴도 굳었고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
"추림은 지금 굉장히 힘들어. 아주 엉망이지. 얼마전에 그를 찾아갔었어. 니가 내게 그의
안부를 묻고 얼마 안되서였는데... 난 믿을수가 없었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추림이야!
그는... 추림은 그러면 안되는 사람이라고! 만약 유미 네가 추림과 별다른 일없이 서로 사
랑해나가고 있었다면 난 너의 둘 사이에 끼어들 여지가 없었을거야. 당연한거니까.
하지만 한 사람은 여전히 한 사람을 좋아하고 변하려 하지 않는데, 한 사람은 다른 한쪽과
는 달리 늘 다른 모습 다른 마음이잖아. 그건... 사랑도 뭣도 아니야!"
예전부터 수연의 저런 점이 무섭고 부럽기도 했다.
자신의 생각과 이상을 관철시키려 도전하려했고 직선적으로 강한 사고를 피력하곤 했다.
몸이 떨려왔다. 다른이도 아니고 친구에게서 듣게 된 말이었다.
사랑하지 말란다. 만나지 말란다. 잊으라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피해를 준단다!
"난...난... 너의 말을 안들은 것으로 할래. 그를 좋아하건 사랑하건 너의 마음이잖아. 하지
만... 내게 강요하거나 그렇게 부탁하지마!"
유미가 힘겹게 그렇게 말하며 허벅지의 옷자락을 힘껏 움켜쥐었다.
눈물이 나려했다. 죽을힘을 다해 눈물을 참아낸 유미의 고개가 힘껏 들리며 수연의 얼굴
을 바라보았다.
"그래! 난 그를 힘들게 하는 여자야. 그만큼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난 그를 사랑한다고 우
기는 못된 년이야. 날 비웃겠지? 사랑하는 남자를 두고 다른 남자랑 자는 년이라고? 가서
물어볼까? 그가 너와 나 둘중에 누굴 좋아하고 사랑하는지?"
유미의 입에서 도전적이고 앙칼진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참을수 없는 격분이었다. 자신보고 뭘 어쩌란 말인가!
괴롭다. 괴롭고 힘들어 죽어 버릴것 같은데 어떻하란 말인가!
"그래? 그럼 그를 왜 그렇게 내버려 두는데? 추림을 그렇게 말려 죽이려고? 넌 다른 사람
들을 잘도 만나고 다니면서 그는 오로지 너만 사랑해야 하는거니? 너무 이기적인거 아니
야? 너 집에 안있고 다른곳에 피해 있는 의도가 뭐야? 죄졌니? 추림은 네가 필요한데 넌
그를 외면하고 있잖아! 아니야? 죽을것 같다고? 가서 추림을 한번 볼래? 정말 죽을것 같은
사람이 누군지 한번 볼래? 영진이 전화했더라. 식사나 같이 하자고. 다 말하더구나.
놀러가기로 했는데 빵구 났다면서? 유화 언니가 널 위로해 주라고 부탁하더라. 추림때문
에 힘들어 할거라면서... 그런데 왜 내 귀에는 널 때려주라는 소리도 들렸을까? 이상하지?
난 이해하기도 널 위로해 주기도 싫어!"
점점 어려워져 간다. 어긋나가고 있다. 원하지 않은 일들이 모든것을 더욱 어렵고 꼬이게
만들어 가고 있다.
인연... 인연... 인연이 아닌가! 왜! 왜! 자신의 사랑을 이렇게 더럽게만 만들어 가는걸까!
할말을 잊어버린 유미는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수연을 설득시키고 이해시킬 기운이 없었다. 모든것은 오해이고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변명할 기회가 없음을 느끼고 있었다.
"적어도 난 너처럼 그렇게 하지 않을 자신있어. 힘들때 작으나마 어깨를 빌려주어 그에게
기대게 할 자신있고 같이 울어줄수있어. 피하지 않을거고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을 자신있
어. 내가 잘못했다면 용서를 빌거고 죽어라고 죄를 빌거야. 메달릴거고 차라리 그가 보는
앞에서 죽어 버릴거야!"
수연의 강한 어조는 신랄하게 유미를 비판하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온통 유미가 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 투성이었다. 정말 수연이 그렇게 할지는 모르지만 적
어도 다짐 정도는 될 것이다.
"왜 나안테 그런 말을하니? 이런 말 하지 않고도 그렇게 하면 되잖아. 왜 내게 이런말을 하
는건데? 왜? 그래. 난 다 거짓이야!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해. 난 아직도 추림씨를... 사랑해
! 누구보다 사랑해! 이건 진실이고 내 모든것이야!"
수연을 똑바로 응시하고 그렇게 말한 유미의 눈은 찬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것이다. 그것이면 되는 것이다. 진실하게 올곧게 사랑한다면 다른 것은 상관없다.
그런것이다. 사랑은 조건도 이상도 이유도 지닐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아니! 넌 마치 내가 하지 못하는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넌 몰라! 물론 나와는
다를지도 모르지만 네가 모르는것이 있어. 니가 추림씨를 좋아한다해도 그가 널 좋아해주
지 않는 이상 너의 사랑은 허무할 뿐이야. 그와 내가 사랑하는 것보다 더 힘들고 어려울걸
? 이건 장담해! 짝사랑이 왜 오래가고 힘든줄 알아? 절대 가질수 없는 가치이기 때문이야!
자신에게 맞지 않는 가치를 억지로 가지려고 해서 힘들고 필요하기 때문에 오래가는 거야.
넌 모르고 있어. 그래 너의 그 마음을 나는 상관 할 수 없어. 하지만 내게 강요하지마!"
"......!"
입술을 베어문 수연은 억울한듯 얼굴을 일그리고 있었다.
숨을 죽여버린 유미는 조금은 트인 마음이었다. 다른것은 다 참을수 있었다,
하지만 한가지는 참기 싫었다. 자신의 사랑을 모독하거나 손가락질 하는것만은 참기가 싫
었다. 추림의 말이 떠오른것이다.
수불능오여지애... 감히 나의 사랑을 더럽다 욕하지마라!
그렇게 사랑하자고 했었다.누군가가 자신들의 사랑을 비웃고 놀려도 그렇게 여기며 사랑
하자 했었다.
그리웠다. 수연의 말처럼 그를 찾아가 위로하고 싶었고 기댈수 있는 어깨를 내어주고 싶었
다. 하지만... 하지만 그럴수 없었다. 수연의 말속에 정답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만나면 그를 더 힘들게 할거라는 말이었다.
그말이 정답처럼 들려왔다. 정말 웃긴 경우였다. 사랑하는데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니... 이
렇게 모순될 수도 있는 것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모순이었다.
"난 여전히 추림씨를 사랑할거고 그리워 할거야. 지금은 내가 이런 모습이지만 언제가는
반드시 그를 만나서 내 사랑을 확인할거야!"
유미는 수연의 말들을 모조리 묵살해 버리는 마음을 토로했다.
수연이 추림을 좋아하거나 하는 것은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그의 마음이 변한다해도 오로
지 자신은 추림을 사랑하고자 했다.
언젠가 그의 앞에 서서 미안하다 말할 것이고 사랑한다 말할것이며 그의 사랑을 다시 확
인할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기다리고 늘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지금은 너무 힘들고 절망스러웠지만 자신의 죄과라고 생각했다. 올바르지 못했던 행동에
관한 죄이고 어려운 시간을 가지라는 심판이라 생각했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가 그렇게까지 힘든 방황을 하고 있다니 달려가고 싶었다. 가서 그를 확인하고 싶었다.
미칠것 같은 기분... 폭주해 버리고 싶었다.
"아니야!"
서로 침묵을 지키던 순간이 수연의 뾰족한 한마디에 의해 깨어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미가 얼굴을 들어 수연을 바라보았다.
"절대 아니야!"
* * *
"아니야! 절대 아니야아아!"
강하게 부정하는 말을 터트린 미선은 뒤로 몸을 늘이고 말았다.
찻집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고 이상하게 바라보았지만 추림은 상관하지 않았다.
아니 상관하거나 신경쓸 정신이 없었다.
미선을 만나 식사하고 억지로 재밌게 놀아주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는 이유가 그를 그렇게 힘들게했다.
한시간여가 지나고 마음에 결단을 내린 추림이 먼저 미선에게 강한 마음을 가지라 부탁하
고 대준의 죽음을 힘겹게 일러 주었다.
예상은 했었다. 당연한 행동반응이 나오리라 수도없는 경우를 생각하고 대처할 준비도 해
두었다. 그러나 막상 상황에 마딱뜨리고 나니 정말 어려웠다.
처음에 미선은 믿지 않고 장난치지 말라며 말하다 조금씩 얼굴표정이 이상하게 변해갔다.
결국 상세하게 설명할 수 밖에 없었다.
대준이 술에 취한 채 오토바이를 타고 광란의 질주를 벌이다 트럭과 충돌했으며 병원에서
자신에게 부탁한 말까지 해버렸다.
"미선씨......!"
추림이 흐느끼며 고개를 연신 도리질 치는 미선을 달래주려다가 그만두었다.
자신도 이렇게 힘든데 그녀는 얼마나 힘들까! 믿을수 없으면서도, 부정하면서도 현실앞에
무력한 채 그렇게 슬퍼했다.
"... 나쁜... 나쁜사람! 나쁜놈! 왜... 왜 죽었어! 왜 죽었니? 추림씨 아니지요? 그렇지요? 맞
아! 아닐거야! 아니라고 말해봐요!"
찻집안이 울릴 정도로 커다랗게 소리치는 미선이 다가와 추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애
원했다.
상황이 이상했는지 사람들의 반응은 짜증나는 가운데 침묵으로 바라만 보았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미선의 손을 잡아주며 힘겹게 말한 추림이 고개를 숙여 버렸다.
정말 어려운 부탁을 대준이 남겼다. 못할짓이다. 죽음을 알리는 상대가 이제 막 사랑을 풋
풋하게 키워 미래를 꿈꾸고 있는 여자였다.
힘든 그녀의 환경을 대준이 온통 책임지고 있었다.
월급을 받는데로 그녀의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에 지출했고 투자했다. 미래!
그 하나를 보고 그렇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
버렸다.
미선에게 여러가지로 커다란 존재가 사라진 것이다.
절망과 고통... 이제 미선의 삶은 빛바래질 것이다.
추림은 후회했다. 말하지 말것을... 왜 이제야 깨달은건지... 그녀가 찾아오면 어떻게 말해
야 할지 모르고 기다리느니 차라리 일찍 알려주어 상황에 익숙해지라 하려 했는데 후회스
러웠다.
"아니야... 아닐거야! 흑흑! 왜 그랬니! 나 어떻하라고 나쁜놈아! 왜 죽었어!"
미선이 고통스럽게 말하며 흐느꼈다. 소란에 종업원이 다가오다가 그녀의 말을 듣고 멈칫
했다. 추림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입을 가린 후 다시 돌아갔다.
한시간을 넘게 울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아무런 말도 해줄수 없는 추림은 미선의 고통을 느낀 채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기다렸다.
"그는... 편히 갔겠지요? 많이 아프지 않았겠지요?"
오래도록 울던 미선이 의외의 모습을 보였다. 눈물을 훔치고 차분하게 변했다.
추림이 알고 있는 미선은 무척 심약하고 섬세한 여자였다. 잘 웃지도 않지만 큰 행동이나
거친일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연속극을 보면서 울 정도로 눈물이 많고 정이 지나치다 할
정도로 많은 여자였다.
"예. 그는 편하게 갔어요. 웃으면서... 할말 다하고 편하게 갔어요. 아마 마지막까지 고통을
못 느꼈을 겁니다."
거짓말이다. 감각이야 거의 느끼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가는 순간은 처절했다.
장기가 파열되어 피를 몇되나 토해내며 십여분을 넘게 힘들어했다. 한마디라도 더 하려고
몸부림쳤고 기운을 짜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할수는 없었다.
"추림씨!"
"예. 미선씨. 말씀하세요."
서글픈 얼굴로 추림을 부르는 미선의 눈가에 진한 아픔이 스며들어 있었다.
"저. 그사람 사랑했어요. 아주 많이 사랑했어요."
"알아요. 제가 모르면 누가 압니까.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 잘알고 있었다. 바람끼가 넘치던 대준을 유일하게 잡아끌던 여자였다.
처음에 충주호에 놀러갔다가 대학 동아리에서 여행온 양미선을 만나 장난치듯 알고 지내
던 대준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섬세함과 사람됨은 대준의 성정을 바꾸어 놓았을 정도로
속이 깊고 정이 많은 여자였다.
한번은 미선을 울렸다고 대준이 이주를 넘게 괴로워 한적도 있었을 정도였다.
반드시 결혼해서 프랑스 파리로 신혼 여행을 간다고 했었는데... 깨진 꿈이었다.
"전... 혼자 못살아요."
쓸쓸히 말하는 미선의 말을 들은 추림은 예감이 이상했다. 마치 무언가 음습한것이 다가드
는 느낌이 들었다.
"미선씨. 기운을 내셔야해요. 대준이형도 그것을 바랄거고 잘못되면 무척 슬퍼할 겁니다."
"아니요. 우린 죽어도 같이 죽자고 했어요. 한날 태어나지는 못했지만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죽자고 했어요. 그런데...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요."
다시 눈물을 흘리는 미선은 처연한 얼굴로 대준을 떠올리고 있는것 같았다.
"제 팔자가 그런가보네요. 추림씨... 고맙고 미안해요. 그가 무척 힘든 부탁을 한 것 같아 제
가 대신 고맙게 생각할께요. 저 그만 갈래요."
"......?"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직관력과 어떤 예감에 강한 에너지를 빌린 추림은 아무래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혹시... 아닐것이다. 단지 불안한 마음일 뿐이었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좀 더 있다가... 식사라도... 아니면 어디가서......."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허둥거리며 추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말하는 동안
미선은 벌써 몇발자국을 걷고 있었다.
"미선씨! 미선씨! 잠깐만요!"
거리로 나와 우산도 펼치지 않은 채 우림은 미선을 얼른 따라 붙으며 그녀를 불렀다.
우산을 접은 채 비를 그대로 맞아가며 저만치에서 걸어가는 미선의 어깨가 무척 외롭게
보였다.
"잠깐 예기좀 해요. 아니 제 부탁... 대준이 부탁에 대해 이야기좀 해요."
급한 나머지 평소 부르던 그대로 대준을 형이라 칭하지 않은 추림이 미선의 팔을 잡아 발
길을 멈춰 세웠다.
"아까 못한 말이 있는데, 대준이 천천히 오래요. 열심히 공부하고 결혼도 하고 아기도 낳
고 할 거 다하고 오래요. 반드시 그렇게 전해 달래요. 빈다고 했어요. 항상 그렇게 빌고 또
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만나주지 않는다고 부탁했어요."
숨을 내쉬며 빠르게 말한 추림은 초조하게 미선의 반응을 살폈다.
미선이 살짯 웃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추림은 곧 멍한 표정을 지었다.
"훗! 추림씨. 추림씨는 거짓말을 상당히 못하는군요? 애써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돼요. 저
괜찮아요. 이만 가 보세요. 바쁠텐데, 전 일이 있어서 이만 가 볼께요."
미선의 말에 추림은 갑자기 몸이 으슬거리며 떨려왔다.
정말 이상하게 예감이 좋지 않았다. 무서울 정도로 미선의 반응이 침착하고 냉정했다.
미선이 다시 걸어갔다. 추림은 터벅거리며 미선의 뒤를 몰래 따라갔다.
한참을 걸어 미선이 보라매 공원으로 접어들어 배회하다 공중전화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
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미선을 미행하며 상황을 지켜 보았다.
이십여분을 어딘가에 전화를 건 미선이 다시 걸어서 대로로 나왔다.
길가에 멈추어 선 미선이 택시를 타는 것을 확인한 추림은 그제서야 마음을 놓았다.
아마 집으로 향할 것이다. 집에 도착해서 울지 못한것을 마음껏 토해내고 슬퍼하고 고뇌
할 것이다. 한동안 방황하다보면 괜찮아 지겠지......
추림은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저녁 일곱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토요일이지만 할 일도 없었다.
한숨을 내쉰 추림은 할일없이 거리를 걸었다. 이미 몸은 거의 젖어 있었다.
냉기가 느껴져 몸을 떨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디가서 술이라도 한잔 하고 들어가기로 했다.
사람들을 만나는게 싫었다. 집안에 있어도 불이 밝혀지는 것들은 켜지 않았다. 조용히 혼
자 있고 싶었다.
자주오던 시연은 본격적인 기자 일에 정신이 없어 연락만 가끔 해왔다.
선주는... 연락이 없다. 물론 자신이 연락을 시도해본지는 오래되었다. 그만큼 정신이 피폐
해져 있었다.
'어디가서 술을 마시나......?"
* * *
밤이 늦어가자 비는 멈추었다. 대신 기온이 떨어지고 바람이 불었다.
거리는 조용했다. 길가에 가로등만 훤한 채 사람들이 인적은 뜸했다.
일곱시 반에 도착해서 지금 시간은... 시계가 없어서 모르겠지만 아마도 세시간 이상은 지
난듯했다.
사람들의 인적이 뜸해지는 것으로 보아 아마 열한시는 넘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추림이 사는 빌라의 골목 근처였다. 도로가에서 정면으로 마주보이는 곳이므로 만약 추림
이 뒷길로 오지 않는다면 이길로 들어 설 것이었다.
다리가 아파오고 감기 기운이 있는지 얼굴은 뜨겁고 현기증이 느껴졌다.
수연과 헤어져 무작정 찾아온 길이었다. 혹시 먼 발치에서 그를 볼 수 있을까 했지만 추림
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집안에 없는것은 몇번 확인했다.
골목 담벼락 밑에 쭈구리고 앉아 뚫어져라 대로변으로 통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넓직한 골목을 들어서는 것이 보여 유미는 긴장한채 눈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곧 맥이 풀렸다. 벌써 열번 이상은 이렇게 긴장과 이완을 반복했다.
지루한 시간이 흘렀다.
밤하늘이 맑게 개이면서 별들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바람은 더 심해지고 몸은 조금씩 쳐져갔다. 돌아가고 싶었다. 수도없이 생각했지만 발걸
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그의 모습을 몰래 보고 싶었다. 그럴수만 있다면 가슴속에 담긴 열기를 덜어낼수 있
을것 같았다.
발자국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만은 하는 심정으로 담벼락에 몸을 기대로 시선을 한곳에 고정했다.
이번이 아니면 더이상 견디기 힘들것 같았다.
무척 거칠고 일정하지 않은 발자국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그리고 어느순간 검은 그림자를 길게 늘이며 누군가가 골목길을 접어 들었다.
"......!"
멀리 가로등 불빛에 비추어드는 남자... 추림이었다. 가슴이 다시 뛰었다.
비틀거리며 담벼락을 짚으며 힘겹게 걸어들어 오고 었었다. 술에 취해있다.
가슴이 거칠게 두근거리고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보인다. 멀지만 그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토록 그리운 사람이었는데... 더이상 다가
가지 못하다니... 미칠것 같았다.
담가에 손을 짚고 허리를 숙인 추림이 토악질을 하고 있었다.
웬만하면 저렇듯 취하지 않는 추림인데... 무척 취해 보였다.
한참을 토하던 추림이 휘청거리며 바닥으로 넘어졌다. 손으로 바닥을 짚어 흉한 꼴은 면했
지만 손바닥에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저도 모르게 달려가려한 유미는 추춤 멈추었다.
눈물이 흘렀다.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었다. 비틀거리며 넘어진 그를 안아 일으켜 주고 집
으로 데려다 주고 싶었다.
"추림... 추림... 보고싶었어요!"
소리없이 흐느끼며 중얼거린 유미는 비틀거리며 담벼락에 몸을 기댔다.
가슴이 터져 버릴것 같았다. 당장 달려가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한스러웠다.
신에게 수천번도 더 빌고 빌었던 기도를 다시 되뇌이며 발걸음을 떼었다.
골먹을 꺽어 빌라로 들어서는 추림을 뒤쫒았다.
느렸다. 바로 코앞인 집을 쉽게 걸어 들어가지 못하고 무척 힘겹게 가고 있었다.
"거기가 아니에요. 왼쪽으로 조금더요. 조심해요! 화단이 있잖아요. 계단을 올라야 하는데
... 조금 쉬었다 가세요."
익숙한 추림의 집이라 머리속에 길을 떠올리며 위태위태하게 걷는 추림을 걱정스럽게 바
라보며 중얼 거렸다.
계단을 힘겹게 올라 들어가는 모습을 끝으로 추림이 사라졌다.
가슴이 막혀와 유미는 손으로 가슴팍을 치며 막힌 가슴을 뚫으려했다.
"추림 사랑해요. 저 기다릴꺼예요. 보고싶었어요. 너무너무 보고싶었어요. 사랑해요... 사
랑해요... 흑!"
빌라의 입구에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가린채 흐느껴 울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가운데 추림은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현실과 비현실이 오락가락 하는 혼동에 사고가 정지한듯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었
다.
집에 들어오자 마자 화장실로 들어가 뱃속에 든 내용물을 모조리 토해내자 울렁거리는 속
이 진정되고 머리의 두통도 조금 가라앉았다.
물을 마시자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포장마차에서 마시다가 호프집에 들어가 무식하게 술을 들이켰다.
혼자 마시며 울기도 하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시간이 지루하게 흐르고 있었다.
견디기 힘든 날이었다. 무엇으로도 이 마음을 달랠수 없을것 같았다.
미치도록 유미가 그리웠다. 어디로 갔는지 그녀의 언니 유화는 모른다고 말했다.
흔적도 없다. 손안에 든 무언가가 어느날 사라진 것같은 기분이었다.
하긴... 이제 다른 모습이어야 하는 그녀였다. 사랑하지만 내색할 수 없는 사랑이었다.
"......?"
두통에 얼굴을 일그리며 우두운 방안에 멍하게 앉아있던 추림은 어디선가 미약하게 흐느
껴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다.
환청? 자주 있는 일이라 그렇게 생각하려 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을 잡아 끌었다.
마치 귓가에 속삭이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멀리서 아련하게 추림이라 부르는 소리로 착각
되게 들려오는 흐느낌이었다.
갑자기 몸이 부르르하고 떨려왔다. 흐느낌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아주 나직한 소리는 이
제 기척만 미약할 뿐 조금전 처럼 어떤 소리인지 대충이라도 구별할 수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추림이 우당탕 거리며 현관문을 열고 뛰쳐 나갔다.
신발도 신지 않은채 밖으로 뛰쳐나온 추림은 비틀거리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느낌이다! 온 신경 세포가 곤두설 정도로 강력한 느낌이 전신을 감쌌다.
느껴진다! 아니 그런것 같다. 그녀의 냄새... 싱그런 초원의 풀향... 왔었다! 아닌가......!
주위를 둘러보며 흔들거리는 시선으로 길을 찾아 냅다 뛰었다.
퍽!
곡몰을 나서다가 담에 부딪혀 넘어졌다. 이마가 깨져 피가 흘렀다.
힘들게 일어나 다시 뛰었다. 제 정신이 아니었다.
도로가로 뛰쳐나온 추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최대한 시선을 하나로 잡아내려 애썼다.
안보인다! 환청? 착각? 아니...다! 그 느낌! 그 풀내음! 그녀의 것이다!
"유미이이......!"
늦은 밤이 추림의 함성에 놀라 일렁거리듯 그의 외침이 멀리 멀리 퍼져 나갔다.
"유미이이... 유미이이......!"
골목길을 휘청거리며 뛰어 한바퀴 돈 추림은 그렇게 외치다가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손으로 바닥을 짚은 채 고개를 숙였다.
"유미... 너지? 어딨어? 어딨어어어... 흑흑! 왔지? 여기에 있잖아!"
추림의 목소리가 점차 미약해지며 흐느낌이 밤을 흔들었다.
"흑흑! 미안해요 추림! 정말 미안해요... 나도 다가가고 싶어요. 그런데 어쩌지요? 흐흑!
당신을 사랑하지 말래요... 견디세요. 할 수 있을거예요. 미안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도로가 건너 트럭뒤에 몸을 숨긴 채 유미는 추림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장 달려가고 싶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달려가서 그에게 안기고 싶었다.
저주스러웠다. 모든것이 저주스럽고 한맺히게 느껴졌다.
"건강하세요 추림! 사랑해요!"
"유미이이이......!"
추림의 외침이 어두운 허공을 뚫어버리고 있는 밤이었다.
(2장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