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하다 목 다쳤습니다. 부상 자체는 그리 크지 않은 듯 한데 움직이기에 애로사항이 꽃피는 군요. ========================== 대체 뭔 짓을 한 게냐 ========================== 아무 말 없이 날 바라보고 있는 그녀. 그 때 그 기분은 두근거리기보다는 조금 허탈한 쪽이었다. 난 매일 상상 속에서 멋진 고백 장면을 꿈꿨었다. 백송이 장미꽃에 천 개의 촛불을 켠 드라마틱한 이벤트는 못 하더라도 바람이 부는 강가에서 그녀의 머릿결을 넘겨주며 진지한 표정으로 고백하고 싶었다. 이렇게... 쩔쩔 매는 자세로 어쩌다 보니 말하게 된 게 아니라. 기억 - 그냥.... 처음부터.... 좋아했어요. 좀 답답해 보이기도 했겠지만.... 미안해요, 서툴러서. 그렇게 어색하게 말을 맺은 난 머쓱한 기분에 반 쯤 몸을 돌렸다. 민아 - ........ 그녀의 표정엔 별 변화가 없었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이건 고백이라기보다는 =인생 별 거 있나, 그냥 이해하고 삽시다.= 라고 하는 한탄 쪽에 가까웠다. 이런 말에 감동받을 만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기가 차서 웃음이나 안 나오면 다행이지. 갑자기 입안이 씁쓸해지며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인생에 몇 장 없을 비장의 카드를 바람결에 날려버린 것 같은 허탈감.... 기억 - 하아.... 두근거릴 뭣도 없이 맥이 풀려버렸다. 대답을 들을 생각조차 안 들었다. =될 대로 되라.= 그저 이 상황이 어떻게든 마무리 되었으면 하는 생각만 간절히 들었다. 시간이 제법 흘렀다. 날씨는 추웠고, 분위기는 암울했다. 날 바라보던 민아는 이제 아예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기억 =이렇게 끝인가요?= 민아 =미안해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에요.= 이런 나레이션이라도 들어가면 적당할 상황. 기억 - ...... 티켓.... 많이 팔았어? 마냥 서있기가 어색했던 난 애써 태연한 척 그녀에게 물었다. 민아는 화제가 다른 곳으로 돌아가자 어딘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민아 - 아...아니. 아직 세 장 밖에.... 기억 - 응? 어쩌다가? 민아 - 친구들이... 시간이 될지 안 될지 잘 모르겠다고.... 난 그녀라면 이미 다 팔고 마진을 올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될지 모르겠다고 하면 무조건 ‘그럼 다음 기회에’ 로 넘긴 건가? 부탁하는 게 서툰 건지 마음이 약한 건지... 기억 - 같은 과에 남자들 있잖아? 그 쪽이면 쉽게 팔릴 것 같은데.... 민아 - 아..... 그게...... 뭐랄까..... =그쪽은 별로...= 라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에서 난 대략적인 상황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표를 팔자면 쉽게 팔겠지만 ‘Take & Give' 식으로 나중에 다 빚이 된다. =지난번에 티켓도 사줬는데~.= 이런 식으로. =얼음여왕.= 이라는 별명처럼 그녀가 철저한 중립을 지킬 수 있었던 건 처음부터 아무에게도 부탁하지 않음으로써 사소한 빌미도 두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기억 - 나도 아직... 많이 남았는데 같이 팔러 가 볼래? 내 친구들한텐.... 아마 쉽게 팔 수 있을 거야. 별로 부담 가질 일도 없고. 민아 - ...아, 응. 내가 먼저 몇 걸음을 옮기자 그녀는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조심스레 뒤를 따랐다. 뭔가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몇 %인가 부족한 이 기분. 그래프 fitting을 했는데 들쑥날쑥한 추세선은 미지방정식에 표준편차도 전혀 안 줄어들어들었을 때처럼 막막한 답답함이 가슴에 차올랐다. 나도.... 대담해지고 싶다. 기억 - .......... 난 걸음을 멈추고 몸을 조금 틀어 그녀에게 왼쪽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위로 가면 아무거나 건네줄 것 같았기에 엄지손가락이 아래쪽을 향하도록 철저하게 각도를 맞춰서. 내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녀는 조금 망설이다 작게 움츠린 손을 내밀었다. 곧 그녀의 손이 내 손 안으로 들어왔다. 싸늘한 날씨 탓에 조금 차가운 느낌은 들지만 너무 부드러워서 따듯한..... 작고 여린 손가락들이 내 =엄.지.손.가.락=을 감아왔다. ........ 대체 왜 그렇게 잡는 거야!? 뭔가 모양새가 좀 이상하긴 했지만 난 남은 네 손가락으로 그녀의 주먹을 감쌌다. 그렇게 손을 꼭 쥐고 있으니 몸 전체가 훈훈해지는 것 같은 온기가 팔을 타고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손이라면 이전에도 몇 번 잡은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 의미라거나 질적인 측면에서 무게의 차원이 달랐다. 적어도 난 그렇게 믿는다. 그렇게 난 평소보다 조금 느린 걸음으로 나의 홈그라운드에 도착했다. 어디보자.... 나의 사랑스러운 친구들이..... 그렇게 건물들 주변을 쭉 훑어보던 중 미세하게 흔들거리는 수풀더미를 발견한 난 손가락으로 수풀 근처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말했다. 기억 - 저기 풀숲에 삐죽 튀어나온 거 보여? 민아 - 응? 어디? 기억 - 저어~기. 건물 앞 화단에 갈색 털 뭉치 같은 거 보이지? 민아 - 응. 뭐야 저게? 기억 - 아마... 내 친구6일걸? 민아 - 그래? 왜 저러고 있어? 기억 - 뭐랄까.... 요즘 유행이라 그래. 어~~이! 친구6!! 실컷 그녀에게 뭔가 설명하는 듯한 모션을 취한 뒤 녀석의 이름을 부르자 수풀 뒤에 숨어있던 녀석은 쭈삣쭈삣 고개를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땅을 파고 들어가서라도 도망치겠지만 지금은 미모의 공주님께서 함께하고 있으니 앞에 쥐덫이 깔려있어도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억 - 여긴 우리 연극부에 공주님! 민아 - 앗, 야아~. 기억 - 괜찮아, 괜찮아. 내가 그녀를 소개하자 여기저기서 스멀스멀 고개를 드는 다른 녀석들. 무슨 숲의 요정도 아니고... 대체 왜 다들 나무 뒤 같은 데서 기어 나오는 거냐?! 친구7 - 우워....Girl....Girl..... 친구8 - 여자다.... 우워어.... 생각을 잘못했다. 숲의 요정이 아니라 무덤가에서 일어나는 좀비나 구울들이었다. 그렇게 그녀의 앞에 모인 공돌이는 다섯 명. 학기말을 앞에 두고 밀려든 과제의 압박에 치인 듯 영락없이 술 취한 노숙자 몰골에 등 뒤에선 퀘퀘한 오라까지 뿜어내고 있는 그들의 눈에선 반년여의 공대 생활 속에 정제되고 다듬어진 이성을 향한 집념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오히려 민아 친구들 보다 이 녀석들이 더 위험할지도. 곧 그들은 민아와 악수를 나누며 인사말을 주고 받았다. 민아 - 안녕하세요, 민아라고 해요. 친구6 - 아...예, 저는 기억이의 친구.... 친구6입니다. 친구7 - 안녕하세요, 저는 기억이의 절친한 친구, 친구7입니다. 친구8 - 친구8입니다. 기억이의 BF(Best Friend)라고 할 수 있죠. 친구9 - 기억이와 생사고락을 같이 해온 전우, 친구9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친구10 - 친구10입니다. 기억이와는 피를 나눈 의형제 지간으로 그 우정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겁니다. 아, 그러셨군요. 이런 $%#%#@들..... 단지 악수를 몇 초 정도 더 하기 위해 BF며, 의형제를 자처하는 녀석들의 행태에 마음속 깊이 좌절한 난 나중에 사랑과 우정 중에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두 말없이 사랑을 택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친구6 - 그런데 이 누추한 곳엔 어쩐 일로... 민아 - 아..... 그러니까 저희 연극부에서 이번 일요일에 연극 공연을 하거든요. 입장권은 한 장에 5천 원이나 하지만... 정~~말 정말 재미있을 테니까 혹시 괜찮으시다면 보러 오시겠어요? 영화 한 편 보신다고 생각하시면 절~~대로 후회하거나 하진 않을 거예요. 가슴 앞에 두 손뼉을 마주 대고 생글 생글 웃으며 부탁하는 민아의 모습에 공돌이들의 사고회로가 급격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잠시 그들의 일반적인 사고회로에서 기본 항목의 우선순위를 알아보도록 하자. 예쁜 여성의 부탁 > 생명 유지 >일반적인 여성의 부탁 > 청춘사업 > 금전 취득 > 일용할 양식과 술 > 학업 > 취미생활 > 그 외 다수..... 건강관리 > 모든 남성의 부탁 그렇다. 예쁜 여성의 부탁은 생명 유지에 우선한다. 적어도 =관상이 참 좋으시네요, 혹시 도에 관심 없으세요?= 나 =합법적이면서 매우 뛰어난 사업 아이템이 있는데요.= 등 이후 모든 기본 항목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일만 아니라면 사고 판단의 결과 값은 반드시 True, 즉 1 이 나온다. .....심지어 전자의 경우에도 상대에 따라선 1이 나올 때도 있다. 친구6 - 가겠습니다, 마님. 다른 이들이 아직도 ‘금전취득’ 과 ‘학업’ 등 하위 카테고리와의 우선순위를 비교하고 있는 사이 가장 본능에 충실한 알고리즘으로 연산을 마친 친구6이 최초로 결과값을 출력했다. 민아 - 아, 정말요? 잠깐만요, 제가 표를.... 어디다 뒀더라? 얼굴 가득 화색을 띄며 주머니 이곳저곳을 뒤적거리는 그녀. 내 표를 건네줄까도 생각했지만 그랬다간 친구6 의 분노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민아 - 아, 찾았다. 여기요~. 이윽고 가슴께에 있는 안주머니에서 표 한 장을 꺼내 두 손으로 건네는 그녀. 표를 받아든 친구6의 얼굴에 발그레한 홍조가 떠올랐다. 친구6 - 아....예, 참 따듯하네요. 그의 쑥스러운 한 마디가 공대생들의 본능에 불을 지폈다. ==예쁜 여성의 부탁은 생명유지에 우선한다!!!!== 친구7 - 아앗! 이런 저도 시간이 됩니다! 친구8 - 아니 그럴 수가, 나도 그런데! 친구9 - 전 왠지 갈 수 밖에 없을 것 같군요! 친구10 - 크아앗, 전 못 가면 죽을 것 같습니다! 결국 순식간에 다섯 장 판매. 어안이 벙벙해서 서있던 민아가 다시 활짝 웃으며 친구7의 손을 맞잡았다. 민아 - 정말요? 고맙습니다~. 친구7 - 어유, 별 말씀을. 친구8 - 저도 갑니다. 저도.... 민아 - 아, 예~ 친구8씨도 감사해요~. 그렇게 그녀는 다섯 명과 차례대로 악수를 나누었고 공돌이 다섯은 헤벌쭉한 웃음을 지은 채 표 한 장씩을 두 손에 꼭 모아 쥐고 자리를 떠났다. 이 페이스대로라면 추가 마진도 꿈은 아니겠군. 하지만 뭘까....이 찜찜한 기분은. 민아 - 우와~ 벌써 다섯 장이나 팔았어~! 기억 - ..... 음, 그러게 말이야. 민아 - 기억이 친구들 또 어디 있어? 응? 기억 - 아.... 잠깐만, 그 전에 표는 바깥 주머니나.. 그런데 넣어놓는 게 좋겠다. 민아 - 응? 왜? 기억 - 뭐랄까, 그 쪽이 꺼내주기도 쉽고.... 민아 - 아.... 그건 그렇겠다. 그녀가 안주머니에 있던 표를 코트 주머니로 옮기는 것을 보며 난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난.... 사실 굉장히 쪼잔한 성격이었던 걸까.
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37화> 판매개시!
운동하다 목 다쳤습니다.
부상 자체는 그리 크지 않은 듯 한데
움직이기에 애로사항이 꽃피는 군요.
========================== 대체 뭔 짓을 한 게냐 ==========================
아무 말 없이 날 바라보고 있는 그녀.
그 때 그 기분은
두근거리기보다는 조금 허탈한 쪽이었다.
난 매일 상상 속에서 멋진 고백 장면을 꿈꿨었다.
백송이 장미꽃에 천 개의 촛불을 켠
드라마틱한 이벤트는 못 하더라도
바람이 부는 강가에서
그녀의 머릿결을 넘겨주며
진지한 표정으로 고백하고 싶었다.
이렇게... 쩔쩔 매는 자세로
어쩌다 보니 말하게 된 게 아니라.
기억
- 그냥.... 처음부터.... 좋아했어요.
좀 답답해 보이기도 했겠지만....
미안해요, 서툴러서.
그렇게 어색하게 말을 맺은 난
머쓱한 기분에 반 쯤 몸을 돌렸다.
민아 - ........
그녀의 표정엔 별 변화가 없었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이건 고백이라기보다는
=인생 별 거 있나, 그냥 이해하고 삽시다.=
라고 하는 한탄 쪽에 가까웠다.
이런 말에 감동받을 만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기가 차서 웃음이나 안 나오면 다행이지.
갑자기 입안이 씁쓸해지며 서글픈 기분이 들었다.
인생에 몇 장 없을 비장의 카드를
바람결에 날려버린 것 같은 허탈감....
기억 - 하아....
두근거릴 뭣도 없이 맥이 풀려버렸다.
대답을 들을 생각조차 안 들었다.
=될 대로 되라.=
그저 이 상황이 어떻게든 마무리 되었으면
하는 생각만 간절히 들었다.
시간이 제법 흘렀다.
날씨는 추웠고, 분위기는 암울했다.
날 바라보던 민아는 이제 아예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기억 =이렇게 끝인가요?=
민아 =미안해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에요.=
이런 나레이션이라도 들어가면 적당할 상황.
기억 - ...... 티켓.... 많이 팔았어?
마냥 서있기가 어색했던 난
애써 태연한 척 그녀에게 물었다.
민아는 화제가 다른 곳으로 돌아가자
어딘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민아 - 아...아니. 아직 세 장 밖에....
기억 - 응? 어쩌다가?
민아 - 친구들이... 시간이 될지 안 될지 잘 모르겠다고....
난 그녀라면 이미 다 팔고
마진을 올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될지 모르겠다고 하면
무조건 ‘그럼 다음 기회에’ 로 넘긴 건가?
부탁하는 게 서툰 건지
마음이 약한 건지...
기억
- 같은 과에 남자들 있잖아?
그 쪽이면 쉽게 팔릴 것 같은데....
민아 - 아..... 그게...... 뭐랄까.....
=그쪽은 별로...=
라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에서
난 대략적인 상황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표를 팔자면 쉽게 팔겠지만
‘Take & Give' 식으로 나중에 다 빚이 된다.
=지난번에 티켓도 사줬는데~.=
이런 식으로.
=얼음여왕.= 이라는 별명처럼
그녀가 철저한 중립을 지킬 수 있었던 건
처음부터 아무에게도 부탁하지 않음으로써
사소한 빌미도 두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기억
- 나도 아직... 많이 남았는데
같이 팔러 가 볼래?
내 친구들한텐.... 아마 쉽게 팔 수 있을 거야.
별로 부담 가질 일도 없고.
민아 - ...아, 응.
내가 먼저 몇 걸음을 옮기자
그녀는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조심스레 뒤를 따랐다.
뭔가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몇 %인가 부족한 이 기분.
그래프 fitting을 했는데
들쑥날쑥한 추세선은 미지방정식에
표준편차도 전혀 안 줄어들어들었을 때처럼
막막한 답답함이 가슴에 차올랐다.
나도.... 대담해지고 싶다.
기억 - ..........
난 걸음을 멈추고 몸을 조금 틀어
그녀에게 왼쪽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위로 가면 아무거나 건네줄 것 같았기에
엄지손가락이 아래쪽을 향하도록
철저하게 각도를 맞춰서.
내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녀는
조금 망설이다 작게 움츠린 손을 내밀었다.
곧 그녀의 손이 내 손 안으로 들어왔다.
싸늘한 날씨 탓에 조금 차가운 느낌은 들지만
너무 부드러워서 따듯한..... 작고 여린 손가락들이
내 =엄.지.손.가.락=을 감아왔다.
........
대체 왜 그렇게 잡는 거야!?
뭔가 모양새가 좀 이상하긴 했지만
난 남은 네 손가락으로 그녀의 주먹을 감쌌다.
그렇게 손을 꼭 쥐고 있으니
몸 전체가 훈훈해지는 것 같은 온기가
팔을 타고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손이라면 이전에도 몇 번 잡은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 의미라거나 질적인 측면에서
무게의 차원이 달랐다.
적어도 난 그렇게 믿는다.
그렇게 난 평소보다 조금 느린 걸음으로
나의 홈그라운드에 도착했다.
어디보자.... 나의 사랑스러운 친구들이.....
그렇게 건물들 주변을 쭉 훑어보던 중
미세하게 흔들거리는 수풀더미를 발견한 난
손가락으로 수풀 근처를 가리키며 그녀에게 말했다.
기억 - 저기 풀숲에 삐죽 튀어나온 거 보여?
민아 - 응? 어디?
기억 - 저어~기. 건물 앞 화단에 갈색 털 뭉치 같은 거 보이지?
민아 - 응. 뭐야 저게?
기억 - 아마... 내 친구6일걸?
민아 - 그래? 왜 저러고 있어?
기억 - 뭐랄까.... 요즘 유행이라 그래. 어~~이! 친구6!!
실컷 그녀에게 뭔가 설명하는 듯한 모션을 취한 뒤
녀석의 이름을 부르자
수풀 뒤에 숨어있던 녀석은 쭈삣쭈삣 고개를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땅을 파고 들어가서라도 도망치겠지만
지금은 미모의 공주님께서 함께하고 있으니
앞에 쥐덫이 깔려있어도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억 - 여긴 우리 연극부에 공주님!
민아 - 앗, 야아~.
기억 - 괜찮아, 괜찮아.
내가 그녀를 소개하자
여기저기서 스멀스멀 고개를 드는 다른 녀석들.
무슨 숲의 요정도 아니고...
대체 왜 다들 나무 뒤 같은 데서 기어 나오는 거냐?!
친구7 - 우워....Girl....Girl.....
친구8 - 여자다.... 우워어....
생각을 잘못했다.
숲의 요정이 아니라
무덤가에서 일어나는 좀비나 구울들이었다.
그렇게 그녀의 앞에 모인 공돌이는 다섯 명.
학기말을 앞에 두고 밀려든 과제의 압박에 치인 듯
영락없이 술 취한 노숙자 몰골에
등 뒤에선 퀘퀘한 오라까지 뿜어내고 있는 그들의 눈에선
반년여의 공대 생활 속에 정제되고 다듬어진
이성을 향한 집념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오히려 민아 친구들 보다 이 녀석들이 더 위험할지도.
곧 그들은 민아와 악수를 나누며
인사말을 주고 받았다.
민아 - 안녕하세요, 민아라고 해요.
친구6 - 아...예, 저는 기억이의 친구.... 친구6입니다.
친구7 - 안녕하세요, 저는 기억이의 절친한 친구, 친구7입니다.
친구8 - 친구8입니다. 기억이의 BF(Best Friend)라고 할 수 있죠.
친구9
- 기억이와 생사고락을 같이 해온 전우,
친구9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친구10
- 친구10입니다. 기억이와는 피를 나눈 의형제 지간으로
그 우정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겁니다.
아, 그러셨군요. 이런 $%#%#@들.....
단지 악수를 몇 초 정도 더 하기 위해
BF며, 의형제를 자처하는 녀석들의 행태에
마음속 깊이 좌절한 난
나중에 사랑과 우정 중에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두 말없이 사랑을 택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친구6 - 그런데 이 누추한 곳엔 어쩐 일로...
민아
- 아..... 그러니까 저희 연극부에서
이번 일요일에 연극 공연을 하거든요.
입장권은 한 장에 5천 원이나 하지만...
정~~말 정말 재미있을 테니까
혹시 괜찮으시다면 보러 오시겠어요?
영화 한 편 보신다고 생각하시면
절~~대로 후회하거나 하진 않을 거예요.
가슴 앞에 두 손뼉을 마주 대고
생글 생글 웃으며 부탁하는 민아의 모습에
공돌이들의 사고회로가 급격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잠시 그들의 일반적인 사고회로에서
기본 항목의 우선순위를 알아보도록 하자.
예쁜 여성의 부탁 > 생명 유지 >일반적인 여성의 부탁 >
청춘사업 > 금전 취득 > 일용할 양식과 술 > 학업 > 취미생활 >
그 외 다수..... 건강관리 > 모든 남성의 부탁
그렇다. 예쁜 여성의 부탁은 생명 유지에 우선한다.
적어도 =관상이 참 좋으시네요, 혹시 도에 관심 없으세요?= 나
=합법적이면서 매우 뛰어난 사업 아이템이 있는데요.= 등
이후 모든 기본 항목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일만 아니라면
사고 판단의 결과 값은 반드시 True, 즉 1 이 나온다.
.....심지어 전자의 경우에도 상대에 따라선 1이 나올 때도 있다.
친구6 - 가겠습니다, 마님.
다른 이들이 아직도 ‘금전취득’ 과 ‘학업’ 등
하위 카테고리와의 우선순위를 비교하고 있는 사이
가장 본능에 충실한 알고리즘으로 연산을 마친 친구6이
최초로 결과값을 출력했다.
민아 - 아, 정말요? 잠깐만요, 제가 표를.... 어디다 뒀더라?
얼굴 가득 화색을 띄며
주머니 이곳저곳을 뒤적거리는 그녀.
내 표를 건네줄까도 생각했지만
그랬다간 친구6 의 분노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민아 - 아, 찾았다. 여기요~.
이윽고 가슴께에 있는 안주머니에서
표 한 장을 꺼내 두 손으로 건네는 그녀.
표를 받아든 친구6의 얼굴에
발그레한 홍조가 떠올랐다.
친구6 - 아....예, 참 따듯하네요.
그의 쑥스러운 한 마디가 공대생들의 본능에 불을 지폈다.
==예쁜 여성의 부탁은 생명유지에 우선한다!!!!==
친구7 - 아앗! 이런 저도 시간이 됩니다!
친구8 - 아니 그럴 수가, 나도 그런데!
친구9 - 전 왠지 갈 수 밖에 없을 것 같군요!
친구10 - 크아앗, 전 못 가면 죽을 것 같습니다!
결국 순식간에 다섯 장 판매.
어안이 벙벙해서 서있던 민아가
다시 활짝 웃으며 친구7의 손을 맞잡았다.
민아 - 정말요? 고맙습니다~.
친구7 - 어유, 별 말씀을.
친구8 - 저도 갑니다. 저도....
민아 - 아, 예~ 친구8씨도 감사해요~.
그렇게 그녀는 다섯 명과 차례대로 악수를 나누었고
공돌이 다섯은 헤벌쭉한 웃음을 지은 채
표 한 장씩을 두 손에 꼭 모아 쥐고 자리를 떠났다.
이 페이스대로라면 추가 마진도 꿈은 아니겠군.
하지만 뭘까....이 찜찜한 기분은.
민아 - 우와~ 벌써 다섯 장이나 팔았어~!
기억 - ..... 음, 그러게 말이야.
민아 - 기억이 친구들 또 어디 있어? 응?
기억
- 아.... 잠깐만, 그 전에
표는 바깥 주머니나.. 그런데 넣어놓는 게 좋겠다.
민아 - 응? 왜?
기억 - 뭐랄까, 그 쪽이 꺼내주기도 쉽고....
민아 - 아.... 그건 그렇겠다.
그녀가 안주머니에 있던 표를
코트 주머니로 옮기는 것을 보며
난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난.... 사실 굉장히 쪼잔한 성격이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