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아아아!" 박도형의 일에 충격을 받은 추림의 입에서 굉렬한 고함이 터져 나오며 그의 몸이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테이블을 딛고 날아 오르며 다시 쇼파를 차고 단숨에 거리를 좁혀 나갔다. 박도형과 싸우던 사내가 몸을 틀며 반 회전했다. 추림의 주먹이 사내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쳤다. 일수일타! 빗나간 적이 없는 주먹질이 허공을 허무하게 가로지르자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추림의 허리가 뒤틀리며 몸이 아래로 푹 꺼져내려갔다. 찰라! "크흡!" 귀신같이 옆구리에 틀어박힌 사내의 발길질에 숨이 막혀온 추림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 다. 하지만 그대로 옆구리를 내준 추림의 왼발이 위로 솟구쳐 올라가며 막 두번째 공격을 감행하려는 사내의 얼굴을 강하게 걷어찼다. 퍽! "크헉!" 고개가 뒤로 덜컥 젖혀지고 비명을 내지른 사내에게 다가간 추림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 오르며 회전을 일으켰다. 뒤돌려 공중 날아차기의 파괴력은 입식에서의 타격보다 네배나 큰 충격을 준다. 이 기술을 익히기 위해 추림은 모진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적이 있었다. 추림의 발차기에 얻어맞은 사내는 과연 녹록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서 왼발을 휘두르는 공격을 날리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추림에게 목을 얻어맞은 다음이었다. 엄청난 충격과 정신이 분열되는 순각적 괴리에 휩싸였을 것이다. "막앗! 저새끼 죽여!" 급작스런 추림의 행동에 멀건히 구경하던 사내들이 기함해 하며 우르르 몰려 들었다. 그들의 도발과 부딪히면 추림의 안위는 불보듯 뻔하다. 하지만 추림은 이놈만큼은 끝장 내려했다. 박도형이 죽은 사실이 맞다면 이놈만큼은 살려 둘 수 없었다. 그런 열망이 추림의 뇌리에서 끝없이 외쳐되고 있었다. "우왁!" 목을 얻어맞고 휘청거리는 사내에게 바람처럼 다가간 추림의 손이 그의 옷자락을 거머쥐 고 끌어당기며 그대로 등너머로 집어 던졌다. 사내의 몸이 짐작처럼 허공을 부유해 바닥으로 내던져 졌다. 유도의 업어치기 기술이 먹히자 다시 추림의 공격이 이어졌다. 다리를 허공으로 일자로 들 어 올렸다가 그대로 놈의 얼굴을 뒤꿈치로 내리찍었다. 뿌각! 광대뼈가 깨지고 피가 튀는것을 확인한 추림은 그래도 멈추지 않으려 했다. 다시 재차 공격하려 할 때였다. "으윽!" 무언가가 날아와 추림이 등을 강하게 때리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내들이 다급해서 집어던진 술병이었다. 술이 든 그대로 집어던져서인지 무척 고통스러 웠다. 순간적인 상황이 이어지는 동안 사내들이 모조로 달려들었다. 그때부터 지옥같은 상황들이 시작되었다. 아귀들의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죽엿!" "새끼야 잡아! 잡으란 말이다!" 몸을 홀의 이곳 저곳으로 피해다니는 추림을 잡으려 사내들이 악을 써대며 날뛰자 일은 수습하지 못할 상황으로 치달았다. 한 사내가 집어던진 술병이 다시 추림의 이마에 맞고 그대로 깨어지며 추림의 이마가 터져 버렸다. 비틀거리는 걸음을 안정시키려 할때 사내들이 다가와 추림을 애워쌌다. 위기였다. 얼굴을 무섭게 구긴 추림의 자세가 아래로 내려 앉으며 바닥을 굴렀다. 그 상태로 사내들에게 접근한 추림의 양발이 허공에서 폭발했다. 바닥에 양손을 짚은 상태로 서너번의 발길질을 퍼붓는 동안 추림의 몸도 성하지 못했다. 술병등을 들고 추림을 죽일 기세로 마구잡이로 손 발을 날리고 있었다. 추림이 한두대를 때리면 서너대를 맞는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당연히 이겨내지 못할 싸움을 시작한 추림은 댓가를 치루고 있었다. "으악!" "욱!" "크윽!" 추림과 사내들의 입에서 연신 비명이 터져 나오며 추림은 점점 벽쪽으로 밀려났다. 얼굴과 팔, 다리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모습으로 돌변한 추림의 모습은 흉신악살로 변해 있었다. 추림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박도형의 일이 그의 황폐한 정신과 얼어붙은 마음에 또다른 충격이 되어 언제 터질지 모를 그에게 기름을 붓고 불을 지핀 것이다. "훅훅훅!" 거칠게 몰아쉬는 숨이 불안정하게 새어나오고 얼굴에 피칠갑을 한 상태로 눈만 번쩍거리 고 있는 추림이었다. "왁!" 한 사내가 달려들며 내리친 술병에 어깨를 얻어맞고 추림이 비명을 토해내며 휘청거렸다. "죽어! 씹새끼야 죽어버렷!" "강아지!" 사내들이 떼로 달려들었다. 극한 상황이었다. 한 사내가 내리치는 술병을 팔뚝으로 막아낸 추림의 손이 한 남자의 옷 자락을 감싸쥐며 바닥으로 넘어졌다. 필사적으로 사내의 몸을 껴안고 추림이 몸부림 쳤다. 본능에만 의존하는 이런 형태의 싸움은 누구의 의지와 독기가 강하느냐에 따라 승패와 상 황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우욱!" 퍽! 퍽! 퍽! 발길질이 쇄도하고 추림의 몸이 움찔거리며 떨었다. 하지만 추림은 포기하지 않았다. 기어이 함께 넘어진 사내의 얼굴에 박치기를 하고 몸을 옆으로 굴러 벌떡 일으켰다. 엄청난 통증이 온 전신에 느껴진다. 앞이 잘 보이지가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 이게 뭐지?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하지? 추림이 뒤로 물러나다 테이블에 몸이 걸렸다. 손으로 뒤를 더듬거리다가 붙잡히는 것이 있어 무작정 앞으로 내던졌는데 술병이었다.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추림의 회사 동료들은 박도형 주변에 몰려들어 추림을 도울 생각은 않은 채 외면하고 있 었다. 추림에게 무언가 소리치고 고함지르고 있었지만 추림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사내들에게 기가 꺽인 회사동료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비겁한 해동들이었지만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몰랐다. 인간의 본능은 그렇게 만들어 져 있었다. 그래도 조금전엔 싸우는 척이라도 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추림이 날뛰자 가세할 마음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만큼 사내들의 손짓 발짓은 무섭고 추림의 모습은 불쌍하다고 할 정도로 비참해져 있었다. "퍼석! 쨍그랑......!" 추림의 손에 들린 두개의 양주병이 맞 부딪히며 부셔졌다.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술병의 조각이 무서운 흉기로 돌변하고 있었다. 입술이 터지고 얼굴이 붓고 찢어진 추림의 눈에서 용광로 같은 불길이 타 올랐다. 피에 쩔은 얼굴 가운데 눈만은 무섭게 번쩍거리며 사내들을 쏘아 보았다. "으아악!" 추림이 사내들에게 쇄도하며 팔을 휘둘렀다. "피햇!" "죽여버렷!" 사내들이 추림의 기세에 질려버렸다. 그렇게 맞고도 쓰러지지도 않았고 멈추려 하지 않는 악독함에 이제는 조금씩 소름이 돋고 있었다. 쉬익......! 퍽! 뿌악! "크허헉!" "컥!" 추림이 기습에 두명의 사내가 각기 옆구리와 어깨를 잡고 뒤로 물러났는데 그들이 얻어맞 은 옷자락이 너덜거리며 찢어져 있었고 붉은 피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욱! 큭!" 사내들도 가만이 있지는 않았다. 한 사내가 테이블을 통째로 집어던진 것이 그대로 추림 을 덮쳤다. 단단한 목재와 스텐 제질로 만들어진 테이블의 무게는 엄청났다. 그것을 집어던진 사내의 힘에 추림의 몸은 그대로 뒤로 튕겨지며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잡앗!" "조져버렷!"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정신이 멍하고 심한 현기증에 현실 감각마저 잃어버린 추림은 꿈틀거리며 일어나려 애썼 다. 막 일어서는 추림의 허리를 잡아오는 사내의 얼굴에 이마로 박치기를 해버리고 쇼파가 몰 린 곳을 타 넘고 다시 두개의 병을 들었다. 몸에 감각이 없었다. 그냥 불에 덴듯 화끈거리고 둔한 느낌만 들었다. 사물이 붉고 반 투명하게 보이는 것이 눈에 피가 스며들어 간 것 같았다. 귀속으로 무언가 외침이 들려 왔는데 머리속에 들어와 메아리같은 공명음으로 들려질 뿐 이었다. 다가온다. 날 잡아먹으려는 포악한 짐승이 덥쳐온다! "흐얍!" 추림의 입에서 다시 굉렬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죽어버리자! 이 몸을 불살라 버려 한 없이 날아 올라가 버리자! 너희들도 같이 가는거다! 어깨에 지독한 통증이 느껴지는 찰나 손을 내뻗은 지점에서 둔중한 타격감이 느껴졌다. 한 사내가 비척거리며 어깨를 쥐고 물러났다. 추림도 얻어맞은 타격에 뒤로 물러나다가 무언가에 걸려 바닥으로 넘어졌다. 순간 등곯이 서늘하게 느껴진 추림은 재빠르게 일어나려다가 머리에 강력한 충격을 느꼈 다. 마치 헤머로 얻어맞은듯 우악스럽고 무거운 충격이었다. 머리속이 하얗게 비워져가며 시선이 갑자기 어둠속에 잠긴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몸은 그대로 바닥으로 허물어져 내렸다. "지독한 새끼! 징글징글한 놈이군!" 바닥으로 커다란 양주명을 집어던진 한 사내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바닥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추림의 모습은 끔찍했다. 단 한군데도 성한곳이 없었다. 얼굴과 어깨 옆구리와 하체마저도 온통 피 투성이었고 계속해서 피가 흘러 내리고 있었다. "다행이잖아! 난 진짜 죽은 줄 알았는데... 숨을 안쉬었다고!"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탕!"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한떼의 무리가 가게 안으로 쏟아져 들어 오고 있었다. "움직이지마! 모두 조용!" * * * "지금 백방으로 손을 쓰고 있다. 조만간 좋은 결과가 있을거니 힘들어도 견디고 있어."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말하는 이금선의 얼굴은 밝지가 않았다. "전 괜찮습니다.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추림아 넌 내동생 같은 아이야. 당연히 신경쓰여. 반드시 널 여기서 빼내줄거야. 믿고 기 다려 알았지?" 그렇게 말하는 이금선은 애써 웃어보였다. 하지만 추림은 대충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에 어떤 결과가 따를지 예측하 며 부정적인 예감을 준비중이었다. 자신과 박도형의 폭력은 사내들에 비해 그리 강도가 강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추림과 박도형의 정당성은 사내들이 지닌 인맥의 힘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그들의 상처는 지금 추림이 감고 있는 붕대 따위로 막아질 상처가 아니라고 했다. 어느정도 심한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알겠지만 추림에게 당한 사내들의 상처는 모두 전 치 18주가 나왔다고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니 전혀 다른곳이었다. 바로 이곳 구로동 경찰서였다. 임시 보호소에서 치료를 받은 자신과는 다르게 박도형과 사내 몇몇은 병원에 들러 치료를 받고 이곳으로 조사를 받으러 왔는데 결과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추림과 박도형이 사건의 주범으로 둔갑되었고 그 중에서 추림의 죄질이 가장 나쁘게 증언 되었다. 박도형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뇌진탕을 을으키고 기도가 막혔던 것이다. 허무했다. 좀 더 냉정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이었다. 사건 후 사일째. 다시 조사가 진행되고 회사에서 박도형과 자신을 빼내려 갖은 노력을 기 울이고 있었다. 남영기업 사장의 동생이라는 신분이 말해주듯 회사에서 기울이는 노력은 작지 않았다. 세명의 변호사를 선임하고 인맥을 모조리 동원했지만 허사였다. 사내들의 인맥이 무엇인지 모르나 피해자와 가해자의 신분이 바뀐것은 분명했고 많은 돈 을 들여 변호사를 세명이나 구했는데도 진전이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했다. 상대와 합의나 적당히 돈을 이용해서 사건을 덥으면 될수도 있는 사건이라했다. 다름이 아니었다. 이유는 다른곳에 있었다. 범죄와의 전쟁 180일 작전! 그것이었다. 오랜 군부정치가 끝나고 처음 문민정부가 출범되었을 때 김영삼 대통령이 공언한 말이 있 었다. 부와 권력을 동시에 지니지 못하게 하겠다며 대선때 선거전략으로 내세웠고 부패와 비리, 사회의 악을 소탕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겠다고 선포했다. 말하자면 나라모습을 바꾼다는 말이었지만 그렇게 될지는 두고봐야 알 일이었다. 그것이 그가 부임하고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범죄를 소탕한다는 이른바, 문민 정부의 핵심인 사회개선 사업으로서 작전명은 [180일 범죄와의 전쟁]이었다. '서민에게 피해를 주고 사사로이 금품을 갈취하는 무리와 사회를 혼란하게 좀먹는 자들을 잡아 들여라!' 4월부터 시작된 그 작전은 전국적으로 국민들에게 많은 지지와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각 지방의 경찰서와 공무원 단체에 포상 재도를 내건 그 문민정부의 사업은 또다 른 왜곡을 낳고 있었다. 저마다 건수에 열을 올리려는 경찰서들의 욕심은 가볍고 작은 죄에게도 큰 구실을 붙혀 검찰에 넘겨 버렸다. 명백한 공권력의 탄압이었지만 사회가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때였다. 추림과 박도형이 문민 정부가 벌이는 그 사업의 일환에 걸려든 희생자라 할 수 있었다. 물론 흉기를 들고 난동을 부린 것이 죄가 가볍다 말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동기와 과정을 들여다 보면 결코 그렇지만은 않았다. 오해와 자기 방어의 수단일수도 있었고, 상대들은 전문 주먹들이었다. 몇몇은 화려한 전과를 훈장처럼 달고 있음이 밝혀 졌는데도 추림과 박도형은 그들의 놀잇 감에 불과한 처지로 전락되고 말았다. 음습하게 냉기가 흐르는 경찰서의 내부 깊숙한 곳에 위치한 유치장은 저마다 사고를 치고 들어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가벼운 경범죄로 며칠을 머무르다 나가는 사람도 있었고 곧 구치소로 이동하려 대기하는 사람들도 다수였다. 첫날인 일요일에 이곳으로 넘어와서는 빵과 우유를 식사 대용으로 먹었고 둘째날인 월요 일 오전엔 보리쌀과 흰쌀이 7/3 비율로 섞인 밥과 쉬어터진 김치로 때웠다. 사람이 먹을 음식이 아니었다. 누군가 사식을 넣어 주어야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회사에서 사람들이 줄줄이 다녀가고 그들이 넣어준 사식이 제공되자 먹을만 했지만 추림 은 또다른 절망에 빠져든 채 죽은 눈으로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구로 경찰서 유치장 5일째. '아무래도 힘들것 같아. 노력은 하는데... 일단 구치소로... 미안해 추림아' 오전에 다녀간 이금선의 말이었다. 그녀 말대로 그녀는 추림에게 누나처럼 대해 주었다. 대준을 유난히 아낀 이금선은 추림 조차도 동생처럼 여겼다. 대준이 죽었으니 아마 추림 을 대준처럼 여기고 있을지도 몰랐다. 구치소... 화사 근처에 위치한 그 음습한 건물을 말하는 것인가? 괴로웠다. 온통 절망과 암울한 일들 뿐이었다. 차라리 죽어 버리는게 낳을듯 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듯한 기분이었다. 더이상 견딜수 없었다. 버틸만큼 버티어 냈는데 이젠 기운이 없었다. '신은... 죽었다......!' 심한 괴리감과 버려진 믿음에 좌절감이 몸서리 쳐지도록 밀려 들었다. 실의에 젖은 날이 지루하고 고통스럽게 지나갔다. 정해진 시간에 따라 강압에 의한 규칙적인 생활이 물처럼 흘러 일주일이 지나갔다. 유치장 내에서도 선임자와 강한자의 구분이 있어 약자와 강자의 논리가 엄격하게 정의되 었다. 하지만 그들은 추림을 건들이지 않았다. 추림에게 덧 씌워진 죄! 그것이 추림을 건들지 못하는 수단이 되었다. 폭력범죄 3조 1항 2항! 살인 다음 무거운 폭력범죄를 나타내는 정의가 그것이었다. 하긴 그것이 아니더라도 지금 추림의 모습을 본다면 건들이고 싶은 마음이 달아날 것이다. 엉망이 된 옷은 갈아 입었지만 겉보기에도 온통 깨지고 짖어진 모습이었다. 붓기는 여전했고 눈은 암울하고 깊게 가라앉아 있어 알 수 없는 중압감이 풍기는 것이다. 유미... 못내 그리웠다. 갑자기 뒤틀리기 시작한 삶의 정체에 두려워진 추림은 그녀를 다신 못볼지도 모른다는 절 박한 심정이 되었다. 아마 그녀를 못 본다면 자신은 죽어서도 편하지 못할것 같았다. 가슴속에 조금씩 쌓여가는 그리움이 한으로 변해가 있었다. 그것은 병이었다. 치유할 수 없는 병이 되어 추림을 어둠의 늪으로 가라앉히려 하고 있었다. 구로 경찰서 유치장 8일째. 회사로 사람들이 연락을 해와 끝없이 찾는다고 했다.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고 말해달라 부탁했다. 차라리 이대로 떠나 버리는게 낳을듯 싶었다. 어자피 구치소로 송환되면 당분간 세상과는 단절되어야 한다. 이대로 사라져 버리는게 홀 가분했다. 많은 사람들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그러자 걱정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성규와 명화 그리고 명숙씨... 선주도 떠올랐고 시연과 미선, 수연의 얼굴이 그려지며 그들에게 주어진 고민과 사연이 기억되었다. 자신에게 의지하던 몇몇 사람들... 미안했다. 필요할 때 곁에 있어준다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것 같았다. 자신은 그리 강하거나 큰 사람이 아님을 이제서야 비로서 깨달았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 버리는 절망감이 심한 배신감으로 변질되어 독기를 품게 하고 있었다. 단 한번도 세상을 그릇되게 살지 않았는데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시련이 있어야 하는지 불 공평하고 억울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남몰래 베겟 머리가 젖도록 소리죽여 눈물을 흘렸다. 이젠 모든것이 끝나는것 같았다. 삶도 사랑도 미래도 희망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고 사 라져 버리는것 같았다. '유미씨... 저 잊을 수 있나요? 난...난... 당신을 잊지 않을겁니다. 잘 지내요. 저 아주멀리 어디좀 갔다가 올게요... 사랑해요. 조금 시간이 걸릴 거예요. 잘 지내세요. 부디 어디 불편 한데 없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잘 지내요......" 추림이 구로 경찰서에 든지 열흘만인 6월 15일 화요일 유리창이 철망에 가리워진 호송버 스에 태워져 구치소로 소환되는 길을 떠나갔다. 그날은 이상하게도 햇볕이 찬란하게 비추는 가운데 강한 바람이 불고 소슬비가 흩날리며 내리는 날이었다. (45장에서 계속) 1
유리사랑 (44장/ 하늘이여! 땅이여!) <실극화>
"으아아아!"
박도형의 일에 충격을 받은 추림의 입에서 굉렬한 고함이 터져 나오며 그의 몸이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테이블을 딛고 날아 오르며 다시 쇼파를 차고 단숨에 거리를 좁혀 나갔다.
박도형과 싸우던 사내가 몸을 틀며 반 회전했다.
추림의 주먹이 사내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쳤다.
일수일타!
빗나간 적이 없는 주먹질이 허공을 허무하게 가로지르자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추림의
허리가 뒤틀리며 몸이 아래로 푹 꺼져내려갔다.
찰라!
"크흡!"
귀신같이 옆구리에 틀어박힌 사내의 발길질에 숨이 막혀온 추림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
다. 하지만 그대로 옆구리를 내준 추림의 왼발이 위로 솟구쳐 올라가며 막 두번째 공격을
감행하려는 사내의 얼굴을 강하게 걷어찼다.
퍽!
"크헉!"
고개가 뒤로 덜컥 젖혀지고 비명을 내지른 사내에게 다가간 추림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
오르며 회전을 일으켰다.
뒤돌려 공중 날아차기의 파괴력은 입식에서의 타격보다 네배나 큰 충격을 준다.
이 기술을 익히기 위해 추림은 모진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적이 있었다.
추림의 발차기에 얻어맞은 사내는 과연 녹록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서 왼발을 휘두르는 공격을 날리며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추림에게 목을 얻어맞은 다음이었다. 엄청난 충격과 정신이 분열되는 순각적
괴리에 휩싸였을 것이다.
"막앗! 저새끼 죽여!"
급작스런 추림의 행동에 멀건히 구경하던 사내들이 기함해 하며 우르르 몰려 들었다.
그들의 도발과 부딪히면 추림의 안위는 불보듯 뻔하다.
하지만 추림은 이놈만큼은 끝장 내려했다. 박도형이 죽은 사실이 맞다면 이놈만큼은 살려
둘 수 없었다. 그런 열망이 추림의 뇌리에서 끝없이 외쳐되고 있었다.
"우왁!"
목을 얻어맞고 휘청거리는 사내에게 바람처럼 다가간 추림의 손이 그의 옷자락을 거머쥐
고 끌어당기며 그대로 등너머로 집어 던졌다.
사내의 몸이 짐작처럼 허공을 부유해 바닥으로 내던져 졌다.
유도의 업어치기 기술이 먹히자 다시 추림의 공격이 이어졌다. 다리를 허공으로 일자로 들
어 올렸다가 그대로 놈의 얼굴을 뒤꿈치로 내리찍었다.
뿌각!
광대뼈가 깨지고 피가 튀는것을 확인한 추림은 그래도 멈추지 않으려 했다.
다시 재차 공격하려 할 때였다.
"으윽!"
무언가가 날아와 추림이 등을 강하게 때리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내들이 다급해서 집어던진 술병이었다. 술이 든 그대로 집어던져서인지 무척 고통스러
웠다.
순간적인 상황이 이어지는 동안 사내들이 모조로 달려들었다.
그때부터 지옥같은 상황들이 시작되었다. 아귀들의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죽엿!"
"새끼야 잡아! 잡으란 말이다!"
몸을 홀의 이곳 저곳으로 피해다니는 추림을 잡으려 사내들이 악을 써대며 날뛰자 일은
수습하지 못할 상황으로 치달았다.
한 사내가 집어던진 술병이 다시 추림의 이마에 맞고 그대로 깨어지며 추림의 이마가 터져
버렸다. 비틀거리는 걸음을 안정시키려 할때 사내들이 다가와 추림을 애워쌌다.
위기였다. 얼굴을 무섭게 구긴 추림의 자세가 아래로 내려 앉으며 바닥을 굴렀다.
그 상태로 사내들에게 접근한 추림의 양발이 허공에서 폭발했다.
바닥에 양손을 짚은 상태로 서너번의 발길질을 퍼붓는 동안 추림의 몸도 성하지 못했다.
술병등을 들고 추림을 죽일 기세로 마구잡이로 손 발을 날리고 있었다.
추림이 한두대를 때리면 서너대를 맞는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당연히 이겨내지 못할
싸움을 시작한 추림은 댓가를 치루고 있었다.
"으악!"
"욱!"
"크윽!"
추림과 사내들의 입에서 연신 비명이 터져 나오며 추림은 점점 벽쪽으로 밀려났다.
얼굴과 팔, 다리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모습으로 돌변한 추림의 모습은 흉신악살로 변해
있었다.
추림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박도형의 일이 그의 황폐한 정신과 얼어붙은 마음에 또다른 충격이 되어 언제 터질지 모를
그에게 기름을 붓고 불을 지핀 것이다.
"훅훅훅!"
거칠게 몰아쉬는 숨이 불안정하게 새어나오고 얼굴에 피칠갑을 한 상태로 눈만 번쩍거리
고 있는 추림이었다.
"왁!"
한 사내가 달려들며 내리친 술병에 어깨를 얻어맞고 추림이 비명을 토해내며 휘청거렸다.
"죽어! 씹새끼야 죽어버렷!"
"강아지!"
사내들이 떼로 달려들었다.
극한 상황이었다. 한 사내가 내리치는 술병을 팔뚝으로 막아낸 추림의 손이 한 남자의 옷
자락을 감싸쥐며 바닥으로 넘어졌다.
필사적으로 사내의 몸을 껴안고 추림이 몸부림 쳤다.
본능에만 의존하는 이런 형태의 싸움은 누구의 의지와 독기가 강하느냐에 따라 승패와 상
황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우욱!"
퍽! 퍽! 퍽!
발길질이 쇄도하고 추림의 몸이 움찔거리며 떨었다. 하지만 추림은 포기하지 않았다.
기어이 함께 넘어진 사내의 얼굴에 박치기를 하고 몸을 옆으로 굴러 벌떡 일으켰다.
엄청난 통증이 온 전신에 느껴진다.
앞이 잘 보이지가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 이게 뭐지?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하지?
추림이 뒤로 물러나다 테이블에 몸이 걸렸다. 손으로 뒤를 더듬거리다가 붙잡히는 것이
있어 무작정 앞으로 내던졌는데 술병이었다.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추림의 회사 동료들은 박도형 주변에 몰려들어 추림을 도울 생각은 않은 채 외면하고 있
었다. 추림에게 무언가 소리치고 고함지르고 있었지만 추림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사내들에게 기가 꺽인 회사동료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이다.
비겁한 해동들이었지만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몰랐다. 인간의 본능은 그렇게 만들어 져
있었다.
그래도 조금전엔 싸우는 척이라도 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추림이 날뛰자 가세할 마음들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만큼 사내들의 손짓 발짓은 무섭고 추림의 모습은 불쌍하다고 할
정도로 비참해져 있었다.
"퍼석! 쨍그랑......!"
추림의 손에 들린 두개의 양주병이 맞 부딪히며 부셔졌다.
날카로운 이를 드러낸 술병의 조각이 무서운 흉기로 돌변하고 있었다.
입술이 터지고 얼굴이 붓고 찢어진 추림의 눈에서 용광로 같은 불길이 타 올랐다.
피에 쩔은 얼굴 가운데 눈만은 무섭게 번쩍거리며 사내들을 쏘아 보았다.
"으아악!"
추림이 사내들에게 쇄도하며 팔을 휘둘렀다.
"피햇!"
"죽여버렷!"
사내들이 추림의 기세에 질려버렸다. 그렇게 맞고도 쓰러지지도 않았고 멈추려 하지 않는
악독함에 이제는 조금씩 소름이 돋고 있었다.
쉬익......! 퍽! 뿌악!
"크허헉!"
"컥!"
추림이 기습에 두명의 사내가 각기 옆구리와 어깨를 잡고 뒤로 물러났는데 그들이 얻어맞
은 옷자락이 너덜거리며 찢어져 있었고 붉은 피가 넘쳐 흐르고 있었다.
"욱! 큭!"
사내들도 가만이 있지는 않았다. 한 사내가 테이블을 통째로 집어던진 것이 그대로 추림
을 덮쳤다.
단단한 목재와 스텐 제질로 만들어진 테이블의 무게는 엄청났다.
그것을 집어던진 사내의 힘에 추림의 몸은 그대로 뒤로 튕겨지며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잡앗!"
"조져버렷!"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정신이 멍하고 심한 현기증에 현실 감각마저 잃어버린 추림은 꿈틀거리며 일어나려 애썼
다.
막 일어서는 추림의 허리를 잡아오는 사내의 얼굴에 이마로 박치기를 해버리고 쇼파가 몰
린 곳을 타 넘고 다시 두개의 병을 들었다.
몸에 감각이 없었다. 그냥 불에 덴듯 화끈거리고 둔한 느낌만 들었다.
사물이 붉고 반 투명하게 보이는 것이 눈에 피가 스며들어 간 것 같았다.
귀속으로 무언가 외침이 들려 왔는데 머리속에 들어와 메아리같은 공명음으로 들려질 뿐
이었다.
다가온다. 날 잡아먹으려는 포악한 짐승이 덥쳐온다!
"흐얍!"
추림의 입에서 다시 굉렬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죽어버리자! 이 몸을 불살라 버려 한 없이 날아 올라가 버리자! 너희들도 같이 가는거다!
어깨에 지독한 통증이 느껴지는 찰나 손을 내뻗은 지점에서 둔중한 타격감이 느껴졌다.
한 사내가 비척거리며 어깨를 쥐고 물러났다.
추림도 얻어맞은 타격에 뒤로 물러나다가 무언가에 걸려 바닥으로 넘어졌다.
순간 등곯이 서늘하게 느껴진 추림은 재빠르게 일어나려다가 머리에 강력한 충격을 느꼈
다.
마치 헤머로 얻어맞은듯 우악스럽고 무거운 충격이었다.
머리속이 하얗게 비워져가며 시선이 갑자기 어둠속에 잠긴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몸은 그대로 바닥으로 허물어져 내렸다.
"지독한 새끼! 징글징글한 놈이군!"
바닥으로 커다란 양주명을 집어던진 한 사내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바닥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추림의 모습은 끔찍했다.
단 한군데도 성한곳이 없었다.
얼굴과 어깨 옆구리와 하체마저도 온통 피 투성이었고 계속해서 피가 흘러 내리고 있었다.
"다행이잖아! 난 진짜 죽은 줄 알았는데... 숨을 안쉬었다고!"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탕!"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한떼의 무리가 가게 안으로 쏟아져 들어 오고 있었다.
"움직이지마! 모두 조용!"
* * *
"지금 백방으로 손을 쓰고 있다. 조만간 좋은 결과가 있을거니 힘들어도 견디고 있어."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말하는 이금선의 얼굴은 밝지가 않았다.
"전 괜찮습니다. 너무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추림아 넌 내동생 같은 아이야. 당연히 신경쓰여. 반드시 널 여기서 빼내줄거야. 믿고 기
다려 알았지?"
그렇게 말하는 이금선은 애써 웃어보였다.
하지만 추림은 대충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에 어떤 결과가 따를지 예측하
며 부정적인 예감을 준비중이었다.
자신과 박도형의 폭력은 사내들에 비해 그리 강도가 강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추림과
박도형의 정당성은 사내들이 지닌 인맥의 힘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더구나 그들의 상처는 지금 추림이 감고 있는 붕대 따위로 막아질 상처가 아니라고 했다.
어느정도 심한지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알겠지만 추림에게 당한 사내들의 상처는 모두 전
치 18주가 나왔다고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니 전혀 다른곳이었다.
바로 이곳 구로동 경찰서였다. 임시 보호소에서 치료를 받은 자신과는 다르게 박도형과
사내 몇몇은 병원에 들러 치료를 받고 이곳으로 조사를 받으러 왔는데 결과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추림과 박도형이 사건의 주범으로 둔갑되었고 그 중에서 추림의 죄질이 가장 나쁘게 증언
되었다.
박도형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뇌진탕을 을으키고 기도가 막혔던 것이다.
허무했다. 좀 더 냉정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이었다.
사건 후 사일째. 다시 조사가 진행되고 회사에서 박도형과 자신을 빼내려 갖은 노력을 기
울이고 있었다. 남영기업 사장의 동생이라는 신분이 말해주듯 회사에서 기울이는 노력은
작지 않았다.
세명의 변호사를 선임하고 인맥을 모조리 동원했지만 허사였다.
사내들의 인맥이 무엇인지 모르나 피해자와 가해자의 신분이 바뀐것은 분명했고 많은 돈
을 들여 변호사를 세명이나 구했는데도 진전이 없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했다.
상대와 합의나 적당히 돈을 이용해서 사건을 덥으면 될수도 있는 사건이라했다.
다름이 아니었다. 이유는 다른곳에 있었다.
범죄와의 전쟁 180일 작전!
그것이었다.
오랜 군부정치가 끝나고 처음 문민정부가 출범되었을 때 김영삼 대통령이 공언한 말이 있
었다.
부와 권력을 동시에 지니지 못하게 하겠다며 대선때 선거전략으로 내세웠고 부패와 비리,
사회의 악을 소탕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겠다고 선포했다.
말하자면 나라모습을 바꾼다는 말이었지만 그렇게 될지는 두고봐야 알 일이었다.
그것이 그가 부임하고 현실로 나타나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범죄를 소탕한다는 이른바,
문민 정부의 핵심인 사회개선 사업으로서 작전명은 [180일 범죄와의 전쟁]이었다.
'서민에게 피해를 주고 사사로이 금품을 갈취하는 무리와 사회를 혼란하게 좀먹는 자들을
잡아 들여라!'
4월부터 시작된 그 작전은 전국적으로 국민들에게 많은 지지와 환영을 받았다.
하지만 각 지방의 경찰서와 공무원 단체에 포상 재도를 내건 그 문민정부의 사업은 또다
른 왜곡을 낳고 있었다.
저마다 건수에 열을 올리려는 경찰서들의 욕심은 가볍고 작은 죄에게도 큰 구실을 붙혀
검찰에 넘겨 버렸다.
명백한 공권력의 탄압이었지만 사회가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때였다.
추림과 박도형이 문민 정부가 벌이는 그 사업의 일환에 걸려든 희생자라 할 수 있었다.
물론 흉기를 들고 난동을 부린 것이 죄가 가볍다 말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동기와 과정을
들여다 보면 결코 그렇지만은 않았다. 오해와 자기 방어의 수단일수도 있었고, 상대들은
전문 주먹들이었다.
몇몇은 화려한 전과를 훈장처럼 달고 있음이 밝혀 졌는데도 추림과 박도형은 그들의 놀잇
감에 불과한 처지로 전락되고 말았다.
음습하게 냉기가 흐르는 경찰서의 내부 깊숙한 곳에 위치한 유치장은 저마다 사고를 치고
들어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가벼운 경범죄로 며칠을 머무르다 나가는 사람도 있었고 곧 구치소로 이동하려 대기하는
사람들도 다수였다.
첫날인 일요일에 이곳으로 넘어와서는 빵과 우유를 식사 대용으로 먹었고 둘째날인 월요
일 오전엔 보리쌀과 흰쌀이 7/3 비율로 섞인 밥과 쉬어터진 김치로 때웠다.
사람이 먹을 음식이 아니었다. 누군가 사식을 넣어 주어야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회사에서 사람들이 줄줄이 다녀가고 그들이 넣어준 사식이 제공되자 먹을만 했지만 추림
은 또다른 절망에 빠져든 채 죽은 눈으로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구로 경찰서 유치장 5일째.
'아무래도 힘들것 같아. 노력은 하는데... 일단 구치소로... 미안해 추림아'
오전에 다녀간 이금선의 말이었다. 그녀 말대로 그녀는 추림에게 누나처럼 대해 주었다.
대준을 유난히 아낀 이금선은 추림 조차도 동생처럼 여겼다. 대준이 죽었으니 아마 추림
을 대준처럼 여기고 있을지도 몰랐다.
구치소... 화사 근처에 위치한 그 음습한 건물을 말하는 것인가?
괴로웠다. 온통 절망과 암울한 일들 뿐이었다. 차라리 죽어 버리는게 낳을듯 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듯한 기분이었다.
더이상 견딜수 없었다. 버틸만큼 버티어 냈는데 이젠 기운이 없었다.
'신은... 죽었다......!'
심한 괴리감과 버려진 믿음에 좌절감이 몸서리 쳐지도록 밀려 들었다.
실의에 젖은 날이 지루하고 고통스럽게 지나갔다.
정해진 시간에 따라 강압에 의한 규칙적인 생활이 물처럼 흘러 일주일이 지나갔다.
유치장 내에서도 선임자와 강한자의 구분이 있어 약자와 강자의 논리가 엄격하게 정의되
었다. 하지만 그들은 추림을 건들이지 않았다.
추림에게 덧 씌워진 죄! 그것이 추림을 건들지 못하는 수단이 되었다.
폭력범죄 3조 1항 2항! 살인 다음 무거운 폭력범죄를 나타내는 정의가 그것이었다.
하긴 그것이 아니더라도 지금 추림의 모습을 본다면 건들이고 싶은 마음이 달아날 것이다.
엉망이 된 옷은 갈아 입었지만 겉보기에도 온통 깨지고 짖어진 모습이었다.
붓기는 여전했고 눈은 암울하고 깊게 가라앉아 있어 알 수 없는 중압감이 풍기는 것이다.
유미... 못내 그리웠다.
갑자기 뒤틀리기 시작한 삶의 정체에 두려워진 추림은 그녀를 다신 못볼지도 모른다는 절
박한 심정이 되었다.
아마 그녀를 못 본다면 자신은 죽어서도 편하지 못할것 같았다.
가슴속에 조금씩 쌓여가는 그리움이 한으로 변해가 있었다. 그것은 병이었다.
치유할 수 없는 병이 되어 추림을 어둠의 늪으로 가라앉히려 하고 있었다.
구로 경찰서 유치장 8일째.
회사로 사람들이 연락을 해와 끝없이 찾는다고 했다.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고 말해달라
부탁했다.
차라리 이대로 떠나 버리는게 낳을듯 싶었다.
어자피 구치소로 송환되면 당분간 세상과는 단절되어야 한다. 이대로 사라져 버리는게 홀
가분했다.
많은 사람들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그러자 걱정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성규와 명화 그리고 명숙씨... 선주도 떠올랐고 시연과
미선, 수연의 얼굴이 그려지며 그들에게 주어진 고민과 사연이 기억되었다.
자신에게 의지하던 몇몇 사람들... 미안했다. 필요할 때 곁에 있어준다 했는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것 같았다.
자신은 그리 강하거나 큰 사람이 아님을 이제서야 비로서 깨달았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 버리는 절망감이 심한 배신감으로 변질되어 독기를 품게 하고
있었다.
단 한번도 세상을 그릇되게 살지 않았는데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시련이 있어야 하는지 불
공평하고 억울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남몰래 베겟 머리가 젖도록 소리죽여 눈물을 흘렸다.
이젠 모든것이 끝나는것 같았다. 삶도 사랑도 미래도 희망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고 사
라져 버리는것 같았다.
'유미씨... 저 잊을 수 있나요? 난...난... 당신을 잊지 않을겁니다. 잘 지내요. 저 아주멀리
어디좀 갔다가 올게요... 사랑해요. 조금 시간이 걸릴 거예요. 잘 지내세요. 부디 어디 불편
한데 없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잘 지내요......"
추림이 구로 경찰서에 든지 열흘만인 6월 15일 화요일 유리창이 철망에 가리워진 호송버
스에 태워져 구치소로 소환되는 길을 떠나갔다.
그날은 이상하게도 햇볕이 찬란하게 비추는 가운데 강한 바람이 불고 소슬비가 흩날리며
내리는 날이었다.
(45장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