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사랑 (45장/ 안토니아 브렌타노!) <실극화>

추림의 풍2005.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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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계절이 본격화되고 있었다.

초여름 장마가 내린 지난 유월말은 전국적으로 엄청난 수해를 입었다.

특히 남부지방의 피해가 컸던터라 언론을 통해 재해복구에 쓰일 성금 모금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7월 중순, 뜨거운 햇볕이 찬연한 날에 유미의 가슴은 온통 차갑기만 했다.

 

'추림이 회사를 그만 두었어. 아무도 모른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이상한 기분이 들어.'

 

수연에게 전해들은 소식이 귓가에 끝없이 맴돌았다.

그는 떠났다. 아무런 소식도 없이 무정하게 떠나 버린것이다. 자신은 그를 피했지만 또 기

다린 것인데 그는 정말 떠난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힘들줄 몰랐다. 이렇게 슬프고 고통스러울지 몰랐다.

그가 마음에 이토록이나 크게 자리하고 있을 줄 몰랐다.

아무리 잊으려 노력해도 결코 잊어질 수 없는 화인이었다. 두렵고 무서웠다.

 

그가 영영 자신을 떠나고 자신은 그를 그리워하는 망부석이 될까 두려웠다.

이제 기운이 없었다. 악몽과도 같은 시간을 보낸 수개월동안 지독한 외로움과 쓸쓸함에

몸부림쳤다.

 

편히 쉬고 싶었다. 안식의 저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괴롭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가졌다.

 

"날... 용서할 건가요? 울어줄 건가요?"

 

문득, 유미의 입에서 낮은 중얼거림이 흘러 나왔다.

괴괴하고 어두운 방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이 비춰드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

에 미미하게 떨고 있었다.

 

수시간째 넋을 놓고 백치같이 앉아있던 유미의 손이 움직였다.

어둠속에서 번쩍거리며 빛나는 날카롭고 차가운 기운은 잘 벼린 면도칼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면도칼을 왼손 팔목에 대고 잠시 주저하던 유미의 눈에 광기가 번뜩 거렸

다.

 

쉬각......!

 

팔목 동맥이 잘려져 나가며 혈맥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어찌나 세게 솓구치는지 터진 혈액이 유미의 얼굴에 그대로 튀어 버렸다.

 

몸을 힘없이 바닥에 누인 유미의 눈에 이슬이 차오르며 흘러 내렸다.

아프지는 않았다. 단지 차갑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그것은 다시 뜨겁고 쓰라린 감각만이

멤돌았다.

 

불면증과 살인적인 우울증에 시달린 유미의 선택은 자살이었다.

그리움과 외로움, 추림에게의 자책감은 그녀를 구제하지 못할 진흙탕 속으로 빠뜨려 버렸

다.

 

세상과 현실로부터의 일탈.

어떤 이들에게는 작은 것도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고 생을 스스로 져 버리는 비정한 선

택을 하기도 한다.

 

유미가 그랬다. 그녀 말고도 다른 이들도 충분히 힘들고 괴로웠을 일을 그녀는 견뎌내지

못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몸이 굳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촛점은 흔들거리며 사물이 멀어졌다 가까워 지기를 반복했다.

 

'가는거야...가는거야... 아무런 기억도 하기싫어! 추림... 미안해요!"

 

극(劇) 점(点)! 그것에 다달았다고 생각했다. 더이상 슬퍼하고 아파할 것이 없다 여겼다.

더이상 사랑하고 그리워 할 자신이 없다고 여겼다. 더이상 남아있는 것이 없다고 여겼다.

 

"미안해요. 추림... 너무 미안해요. 보고...싶어요. 사랑해요."

 

무의미하듯 유미의 입에서 낮은 중얼거림이 흘러 나왔다.

꺼져가는 눈에 수십통의 편지가 수북히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보내지 못하고 생각나고 그리워 질 때마다 써내려간 편지가 오십통이 넘었다.

마지막으로 쓴 편지가 오늘이었다.

 

/추림.

저 유미예요. 잘 지내시는지 건강하신지 걱정되네요.

어느덧 여름이군요. 어디에 계세요. 유미가 추림을 무척 기다리고 있는데 추림씨는 어디

에도 없군요.

 

추림씨. 저 이대로 떠나가요. 절 용서하세요. 아니 용서하지 마세요.

너무 힘들었어요. 당신을 알고 나서 모든것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 달라진것은 제 마음이

고 현실은 더욱 힘들게 변했네요.

 

미안해요. 온통 미안한 마음뿐이예요.

감히 당신의 사랑을 의심하고 위선이라 여겼던 제 어리석음을 용서하세요.

끝까지 당신의 사랑을 지켜드리지 못한 절 용서하세요.

 

두려웠어요. 혼자 남을까 두렵고 당신을 영영 잃어 버릴까 두려웠어요.

차라리 먼저 떠나 버리는게 낳다고 믿었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사랑해요. 추림씨! 당신은 영원한 내 사랑이고 영혼이예요.

 

그거 아세요? 내가 살아오는 동안 머리속으로 떠올린 모든 일들보다 당신을 생각하고 그

린 기억이 더욱 많고 컸다는 사실을요?

그만큼 제 사랑은 컸어요. 믿어주세요. 오로지 제가 사랑한 사람은 당신입니다.

 

부탁이 있었어요. 하지만 모든게 허무하게 변해 버렸어요.

당신이 전에 베토벤을 존경하는 이유에 대해 말해 주셨죠?

 

청각의 장애를 딛고 위대한 음악의 아버지라 추앙시되는 베토벤의 천재성보다 더욱 위대

한것은 오로지 평생동안 한 여자만을 사랑한 그 마음이라고 하셨죠?

 

베토벤의 영원한 사랑... 안토니아 브렌타노!

전 당신에게 안토니아 브렌타노가 되고 싶었어요. 죽는 순간까지 그 여인을 잊지 못한 베

토벤의 순결하고 지고한 사랑을 받고 싶었어요. 바로 당신에게서요.

 

제 욕심이었던것 같아요.

아니 어쩌면 당신과 저는 그런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안토니아 브렌타노 그녀도 베토벤

곁에 있지 못하고 다른 이와 결혼했으니까요.

베토벤과 안토니아는 끝없이 갈등하고 슬퍼했다고 하셨죠? 마치 당신과 저 같네요.

 

이렇게 떠나버리는 절 용서하세요.

하지만 영원히 끝나는 것은 아니예요. 하늘로 날아올라 바람이 되고 별이 되어 당신곁에

머물거예요.

 

늘 당신에게 받을줄만 알았던 저였어요. 이제는 제가 당신을 지켜드릴 거예요.

바람이 되어 당신을 어루만질 거고 별이 되어 당신의 어둠을 밝혀 드릴거예요.

 

그리워요. 미치도록 당신이 그립고 사무치도록 한이 됩니다.

차라리 당신이 저에게 모질게 대해 주셨다면 전 아마도 조금더 편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당신은 한없이 부드럽고 자상하기만 했어요.

 

그것이 절 더욱 미안하게 했고 힘들게 했나봐요.

늘 변하지 않을 당신의 숭고함 앞에 더러운 얼룩이 되어 당신을 사랑한다 말할 자신이 없

었어요.

 

사랑해요 추림씨! 영원히 당신을 사랑하고 그리워 할 거예요.

항상 당신을 지켜 볼 것이고 곁에 있을게요.

 

저 아주 멀리 가요.

당신을 만나게 해달라고 수천번도 더 빌었는데 신은 저의 바램을 거부하셨나 보네요.

그래서 신은 죽었다고 믿기로 했어요.

창조와 죽음을 관장하는 그 신에게서 버림받은 이 기분. 오로지 당신의 사랑만을 진심으

로 떠 앉고 갑니다.

 

이제 편해질래요.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고 하늘로 날아 오를래요.

다시 태어나 곧 당신곁으로 돌아 올께요. 사랑해요 추림... 영원히. 사랑해요.

                                                                                                유미가!/

 

꺼져가는 눈동자가 흔들리면서 그녀의 입가엔 작은 웃음이 피어났다.

눈물을 흘리며 웃는 그녀의 얼굴은 지치고 슬픈 기운만이 남아 멤돌았다.

 

"사랑해요... 보고싶어요! 추림... 추림... 추림. 사랑해요. 사랑해요."

 

고통과 회한이 묻어나는 중얼거림을 토해내며 몸을 꿈틀거렸다.

몸이 붕 뜬듯한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오로지 머리속으로 잡아내지 못할 그

림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기를 반복했다.

 

사진 영사기의 화면처럼 반복되는 것은 짧지만 행복하고 잊지못할 추림과의 날들이었다.   

 

어두운 방안에 홀로 버려진 유미의 몸이 진정 어두운 세상으로 빠져들며 쓸쓸한 적만만이

가득했다.

 

피속에 잠긴 몸이 한차례 부르르 떨리고 유미의 눈은 서서히 잠겨갔다.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시선을 연속해서 깜박거리던 유미의 눈은 영원히 잠겨 버리듯

곧 감겨버렸다.

 

안녕 내사랑...! 유미의 감긴 눈에서 반짝하고 맺혀있던 눈물이 흘러 내렸다.

 

*            *          *

 

구구...구구구...구구!

 

새벽녁 비둘기 울음소리가 처량하게 들려왔다.

오늘도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워 버린 추림은 비좁은 수감실에 누워 희미하게 밝혀진 전등

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고른 숨소리와 코고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구치소로 송치된지 한달이 넘었다.

 

이제는 익숙해지고 적응할만도 하건만 추림은 도저히 현실을 받아 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잘 견디고 있는듯 보였지만 속은 그렇지가 않았다.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며 추림의 하루하루는 세상과 동떨어진 괴리에 묻혀 있었다.

영어의 몸이 되어 무엇도 의지를 실현시키지 못하는 현실을 도저히 받아 들이지 못하고 있

었다.

 

'유미. 잘 지내고 있나요? 보고싶어요. 저 이런모습 당신은 모르겠지요? 알면 슬퍼할 거지

요? 미안해요. 제가 어리석었어요. 당신곁을 떠나지 말아야 했는데 왜 이제서야 그런 생각

이 들었는지 모르겠어요."

 

가슴이 미어져왔다.

너무 그립고 만나고 싶었다. 막상 이렇게 자유를 잃고 구속을 당하고 나니 모든것이 달라

보였다.

 

새삼 자유의 소중함을 알게된 추림은 고통스러워 하고 있었다.

언제 나가게 될지 모른다. 아직 미결수로 있지만 검찰에 조사를 받고 미결과 기결의 심판

이 내려지면 그때 가려질 것이다. 

 

회사에서 변호사를 대동하고 사람들이 변호사 접견을 다녀간지 일주일이 지났다.

늦어도 다음달 초면 검찰 조사를 받는다고 했는데 변화사의 추측은 가석방은 불가능하고

적부심이나 집행유예를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빨라도 삼개월은 지나야 가능하다고 했다.

또다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처음엔 한달 그 다음엔 두달 이전에... 그리고 삼개월!

더이상 믿지도 바라지도 않는 부정적인 생각만이 들었다.

 

세상과 격리된 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격어보지 못한 사람들

은 모를 것이다.

이곳은 사회와는 별개로 나뉜 또다른 세상이었다.

 

온통 힘과 폭력만이 우선시 되는 무법자들의 세계였다.

재판을 기다리며 죄과의 심판을 기다리는 미결수들, 이미 범죄자의 신분이 되어 교도소로

이송되기 전에 대기하는 기결수들, 다른 교도소에서 제 이의 교도소로 송환되기 전에 거치

는 자들까지 온통 무법자 천지였다.

 

절대 힘과 폭력의 힘이 우선시 되는 이곳은 강한자가 주인이었고 약한자는 먹히는 존재에

불과했다.

 

이곳의 삶은 다양했다.

전직 공무원부터 교수, 의사에 사업가까지... 전범자들은 넘쳐났고 군상들의 모양도 가지

가지였다.

 

구치소에서의 첫날 추림이 당한 일은 그들의 수순된 일과였다.

관등성명과 죄명!

 

웃기지도 않는 놈들이 나이 어리다고 깔아뭉게려 드는 것을 참아주니까 끝간데없이 별 짓

을 다하려 들었다. 신고식 이었다.

말해 주었다. 이름과 나이 죄명까지.

 

이곳에서 가장 죄질이 나쁘게 치부되는 이들은 강간죄와 절도죄다. 그에 반해 가장 대우

받는 부류는 다름아닌 화려한 폭력죄였는데 추림은 그 중에서도 상위였다. 웃긴 구분이었

지만 무법자들의 천국에서는 그것이 법이었다.

 

그의 죄명은 폭력중에서도 3조 1, 2항이었다.

폭력죄중에서 가장 악질적으로 분류되는 이른바, 요시찰 바로 밑에 해당되는 범죄였다.

 

살인, 방화, 마약, 강간, 강도가 5대 범죄에 속하며 특별법으로 관리 된다면 폭력중에서 3

조항에 끼는 일은 그 다음으로 분류되는 범죄였다.

 

아직 미결수이지만 추림의 바로 그 죄과를 지니고 있었다.

흉기를 들고 다수에게 상해를 가한 죄명은 그렇게 무거운 처벌이었다.

 

흉기도 어떤것 어떻게 잡았느냐에 따라 다르고 당시의 상황과 의도에 따라 또다시 구분되

어진다. 추림의 상황은 조사서에 의도적 난동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말도 안되지만 이미 대세를 잃어버린 뒤였다.

 

추림에게 시비거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큰 소란은 없었다.

이곳의 상황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고 환경이었다.

 

각 수결자들이 기거하는 방들 중 부유한 이들이 있어 사재 물건이나 많은 돈이 영치되어

약간의 오락과(도서따위)  풍족한 간식거리를 즐길 수 있는 방을 범털방이라고 불렀고 그

와는 정 반대의 상황을 개털방이라고 불렀다. 추림이 수감된 영등포 구치소 7동 하(下) 6

호실은 범털방이었다.

 

바로 추림이 들어오고 나서 생긴 일이었다.

사람들은 끝없이 바뀌고 돌아 다닌다. 잦은 싸움과 폭력을 방지하기 위해서 자주 방을 바

꾸고 사건이 많은 방은 아예 일주일 간격으로 수감자들을 돌아가며 격리 수용했다.

 

추림이 들어오고 사흘만에 엄청난 싸움이 벌어졌다.

당시 아홉명이던 수감실에 네명이 편을 갈라 이가 부러지고 턱뼈가 골절되는 싸움을 벌였

다. 추림이 겨우 뜯어 말렸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방이 완전 바뀌어 버렸는데 나이든 두명을 제외하면 나머지여섯은 모

두 이십대 초반이었다. 

 

방장이 존재하고 다음이 실장이 존재했다.

추림, 그가 7동 하(下) 6호실의 방장이 되었다.

눈빛으로 사람을 제압하고 말로 상대를 다스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세계의 유수 기업

체 CEO나 권력기관의 핵심 간부들 정도일까? 아니다 평범한 사람일수록 그 정도가 심해

진다.

 

카리스마라는 것은 지니고자해서 지닐수 있는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몸에 익혀지는 것이다. 생각이 많고 다양한 경험을 겪을수록 그 에너지는 더욱

강해 진다. 그 에너지를 몸에 받아 들이고 정신에 새겨넣는 자들은 남들이 지니지 못하는

힘을 지닌다.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자들을 가리켜 카리스마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착각이다.

카리스마는 허영이고 위선이었다. 이미 보이는 기운에 겁먹을 필요 있을까?

진짜 무서운 자들은 자신을 철저히 숨길줄 아는 자들이었다.

 

예컨데, 고(古) 박정희 대통령의 카리스마를 보면 그와 같을 것이다.

엄청난 에너지를 지니고 위엄을 갖추었지만 그가 군 시절에 지닌 이력은 그를 절대 그런

남자로 보지 않게한다. 작고 아담한 체구에 축구를 즐겼고 농담을 잘했다 하는 그를 역대

대통령중에 가장 강한 카리스마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힘을 지닌 그를 그렇게까지 밖에 표현하지 못해서이다.

추림이 그와 같았다. 절대 나서지 않았고 흥분하지 않았다.

 

어느날 담당관이 다가와 추림에게 '네가 여기를 책임져라. 너라면 조용할거야!' 라고 말했

을 뿐이다. 40대의 그 담당관은 추림을 꽤뚫어 본것이다.

 

그가 그렇게 방장이 되고 방 자체의 색깔을 아예 바꾸어 버렸다.

장기와 바둑을 즐기고 시를 적었으며 글을 모르는 무지렁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구치소에서 먹어봐야 얼마나 먹겠냐는 생각에 추림의 사재와 회사 동료들이 영치한 돈으

로 사재식품을 사들였다.

그런데 장난이 아니었다. 엄청난 아귀의 괴물처럼 먹고 또 먹었다. 책 따위같은 것에 열정

을 갖도록 추림이 다독였다.

 

그뒤로 추림의 방은 범생방으로 변해 나날이 조용했다. 타 방에서 부러움을 보냈다.

낮동안 추림은 글을 모르는 몇몇 사람에게 글과 수학을 가르치고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

다.

 

철학과 사상 이념의 사고를 아예 모르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그건 어렵다고 할 부분이라면 더 수준을 낮추어 나라의 문화나 한국의 역사정도는 어느정

도 이해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추림은 너무도 어이없는 충격을 받곤 했다.

 

자신의 이름도 쓰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돈 계산이 백 단위를 넘어가면 아예 포기

해 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낮동안 그렇게 분주할수가 있었다.

하지만 밤이 되면 추림에겐 고통스런 시간이었다.

 

기억과 가슴속에서 피어오르는 그리움과 슬픔에 주체하지 못하고 비탄에 빠져야했다.  

기약없는 시간이 흘러갔다. 무엇도 할 수 없는 세상과의 단절은 너무도 큰 시련으로 남겨

졌다.

 

구구구.

 

멀리서 들려오는 비둘기 소리는 이제 추림의 음악이 되었다.

슬프고 그리움에 젖어 우는듯한 비둘기의 울음소리는 항상 새벽녁이면 들려왔다.

새벽 두시경이면 들려오는 소리. 늘 그 소리를 들어야 뒤척이다 잠이 들었다.

 

또다시 소리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베겟머리가 흥건해 지도록 울고 또 울어도 눈물은 마르지 않는 샘 같았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눈을 질끈 감아 억지로 이겨내려 견뎌야 멈추는 눈물이었다.

 

'반드시 찾아갈겁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유미씨... 절 아직 생각하고 계시지요? 반드

시 찾아 갈테니까 기다려 주세요.'

 

상념에 새벽을 하얗게 지샌 추림의 눈이 살며시 감기며 지친 그는 곧 잠에 빠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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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번 면회!"

 

담당관이 외치는 소리에 추림이 수감실을 나섰다.

회사에서 웬만하면 찾아 오지 말라고 했는데 오늘은 누군가가 면회를 온 것 같았다.

회사 동료들의 면회는 부담이 되었다. 찾아오면 기뻐야 응당했지만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

다.

 

좋은 모습이 아니어서 그들에게 자신을 숨기고 싶은 부끄러움이 있었다.

미안하고 자신이 창피하기도 했다.

 

오전과 오후에 각기 한번씩 있는 면회객을 맞으러 수감자들이 줄지어 늘어선 곳으로 다가

가 서자 몇몇이 아는체를 해왔다.

 

그들은 웅성거리며 며칠전에 화재가 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곧 유명한 인물이 이곳으로 이송 되어 온다고 했다. 처음엔 별 관심이 없었는데 온다고 하

는 이를 알게 되자 흥미가 생겼가.

 

대도(大盜) 조세형. 한국 역사에 남을 족적을 그린 조세형은 선도(善盜)를 추구한 이념을

지녔다고 했다. 실지로 그는 그 이념을 지닌 기행을 수없이 남겼었다.

 

그가 이곳으로 영치된다고 했다.

다른 교도소로 이감되기 전에 중간 기착지가 되는 곳이 이곳이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면회소에 다달아 대기하다가 자신의 수감번호가 방송으로 울려 퍼지

자 면회소로 들어갔다.

 

면회객과 수감자들의 대화를 기록하는 기록관이 무심하게 바라보고는 고개를 돌려 버렸

다.

 

누군가가 유리판과 쇠창살 너머의 공간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조금의 설레임과 기대감은 항상 빗나갔지만 늘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떨려왔다.

 

막 면회실로 들어온 사람들을 확인한 추림의 얼굴에 뜻밖의 표정이 떠올랐다.

 

"......!"

 

두명의 남녀가 들어오며 유리판과 쇠창살 너머의 추림을 바라보고 다가왔다.

그 중 익숙한 여자의 모습이 확대되었다.

 

"추림!"

 

여자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추림은 무거워지는는 심정을 느꼈다.

많이 생각나기도 했던 여자였다. 한동안 연락이 되지 않아 걱정도 했었고 자신의 처지를

알지 않길 바랬지만 기어이 그녀는 이렇게 찾아오고 말았다.

 

"추림아!"

 

추림을 부르는 소리에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던 추림의 표정이 밝게 변했다.

애써 그런 표정을 지으며 추림은 환하게 웃어 보였다.

 

같은 하늘아래 하나의 영혼이 하늘로 날아 오르려 선택하는 날 그날은 추림이 영어의 몸

이 된지 꼭 40일째 되는 날이었다.  

                                                                                                         (46장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