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리: 재석아. 너가 빌려 달라던 바지야. 이 바지를 입고 한국 패션계의 선두주자가 되길 바래. ^^
이대리: 자. 섹시하게 입고 다녀? 알았지? ^_^
이대리: 어제 말한 빨간 바지야. 우리 재석이 이제 킹카 되는 일만 남았네. 하하. ^0^
이렇게 앙증맞은 표정과 니글니글한 말투로 거울 앞에서 연습을 하고 있는 이유는
어제 그 멍청한 친구들이 벌인 사건에 대한 뒷수습 때문이었다.
박군에게 어제 당한 것만 생각하면 바지를 그냥 휙, 던져주고 싶지만
커다란 약점이 잡힌 나로선 학교 짱인 박군에게 이 바지를 뇌물로 사건을
잘 무마시켜야 하기에 좀 비굴해 질 수 밖에 없었다. -_-;
그렇게 거울 앞에서 한참 열연하고 있는데 얼마 후 박군이 등장했다.
박군: 거울 앞에서 뭐하냐?
이대리: 뭐, 뭐하긴. 어제 너가 만들어준 작품 감상중이지.
박군: 얼굴은 좀 어떤대?
이대리: 칫. 보면 모르냐!
방금 전까진 거울을 보며 매우 화사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막상 그놈과
마주치니 표정도 말투도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신경질 적으로 나가게 됐다.
박군: 집에 있는 연고라도 가져왔다. 발라라.
이대리: 이미 발랐다. -_-
박군: 색히. 근데 엄마한테 이르진 않았겠지?
이대리: 왜? 학교에 찾아올까 겁나냐? 나 그렇게 치사한 놈은 아니다.
박군: 다행이군. 참 어제 말했던..
이대리: 자. 가져왔다. 입어봐라.
박군: 어라? 깨끗하네? 그 많은 핏자국이 하나도 안 보이는데? 이거 너가 빤거야?
이대리: 아니. 엄마가. 깨끗이 입어라. -_-
사실..
어젯밤 내 손으로 직접 빡빡 문질러 빤 거다.
그것도 피 지우려고 한 시간 동안 고무장갑 끼고 있어야 했다. -_-;
박군: 잘 입을게.
이대리: 대여기간 1주일이다. 그 이후론 연체료 받는다. 하루에 만원씩. -_-
박군: 훗. 귀여운 자식.
이대리: 참! 나한테 혹시 할 말 같은 거 없냐?
박군: 무슨 말? 아, 그래. 고맙다. 됐냐?
이대리: 그, 그래. 됐다. -_-
녀석에게 듣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었다.
혹시나 어제 내 친구들이 벌인 일에 대해 녀석이 알고있는지 한 스푼 떠본 것이었다.
그런데 녀석의 반응을 보니 아직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듯 했다.
하긴. 아직 1교시 수업도 안 했는데 그 소문이 벌써 퍼졌을 리는 없지.
그나저나 내 친구들에게 맞은 넘들은 누구일까?
누군지 알기라도 하면 찾아가서 맛있는 거라도 사주면서 살살 달래볼 텐데.
제발 그 주인공들이 3학년만 아니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녀석들의 폭력이 정말 두려웠던 것일까.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될 때마다 내 심장은 콩딱콩딱 뛰어댔고
교실 문이 우르르르~~ 열릴 때마다 난 가슴을 몇 번이나 쓸어내려야 했다.
1교시, 2교시, 3교시가 지날 때까지 다행히도 내가 두려워하던 일은 터지지 않았고
이제 오늘의 하이라이트 점심시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보통 점심 시간이 시작되면 미리 밥을 까먹은 1진 녀석들이 한꺼번에 우리 반으로
몰려오는데 그 시간만 아무일 없이 넘긴다면 난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드디어 4교시를 마치는 종소리와 함께 공포의 점심시간은 시작 되었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도시락을 먹고 있는데..
그 날 따라 가슴 철렁거릴 정도로 크게 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어제 그 일 때문이 아닌 그저 평상시 녀석들의 등장이길 바랬지만
살며시 눈동자를 굴려 그들의 모습을 한 번 살펴보자,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놈들 중 나처럼 얼굴이 심하게 망가진 놈이 한 명 껴있는 것이었다.
1진도 아닌 녀석이 그들 무리와 함께 있는 이유라던가, 왜 저렇게 얼굴이
망가져있는지는 그들에게 묻지 않고도 뻔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제기럴. 드디어 터졌군. -_-;
김군: 왠만하면 눈감아주려 했더니 아주 스스로 무덤에 매트리스를 까는구만.
기분 나쁠 정도로 껌을 짝짝, 씹어대며 걸어온 김군이 내 책상에 걸터 앉으며
비꼬는 식으로 말했고, 난 언제 날아들지 모르는 주먹에 잔뜩 긴장을 해야 했다.
김군: 어제 니 친구들이 쟤 얼굴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뒀네. 잘 봐봐. 최소한 한 시간은 밟힌 얼굴이지?
이대리: ...
김군: 왜? 모른 척 발뺌하려고?
이대리: 인정할게. 하지만 계획된 일은 아니었어. 그리고 저 친구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_=;
김군: 미안하다고 느낄 정도면 좀 맞아야 하는 것도 알고 있겠네?
이대리: 내가 저 얼굴보다 더 심각하니 그냥 비겼다 치고 그만 돌아가라. 이 얼굴로 더이상 싸우기 힘들다.
김군: 오.. 얼굴 더 망가질까 걱정 돼? 그러길래 왜, 학교 짱 재석이한테 개기냐. 개기긴. 아무튼 최대한 티 안나게 정성들여 패 줄 테니 잠깐만 따라오라고. 오케이?
김군이 내 멱살을 잡고 끌고 나가려하자 반장이 다가와 김군의 양팔을
붙들며 말리려했다.
반장: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오늘은 좀 참아. 얘 많이 다쳐있는 상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퍽! 소리와 함께 반장은 나가떨어졌고
김군은 자신의 주먹을 맞고 쓰러진 반장에게 열을 내며 소리쳤다.
김군: 씨~발라마! 저리 안 꺼져! 이게 죽으려고!
사태가 심각해지자 이를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고있던 박군이 나서서 김군에게 물었다.
박군: 무슨 일인데 그래?
김군: 재석이 넌 모르고 있었구나? 이 개자식이 어제 친구들 불러서 우리학교 애들 패고 갔대. 봐봐. 용창이 쟤 저렇게 맞았잖아.
옆에서 팔장끼고 있던 최군도 거들었다.
최군: 씨바! 용창이만 저렇게 된 게 아냐! 준수, 창일이 걔들도 당했대!
제발 3학년만 아니길 바랬던 내 바램은 그들의 대화내용을 통해 완벽하게
깨지고 말았다.
박군: 이대리. 얘들 말 진짜냐?
이대리: 억울하지만 진짜야. -_-
김군: 아오~ 이 색히 말 들을 필요도 없다니까. 너 이리 따라와라.
난 그들에게 강제로 연행되면서 박군에게 구조요청의 눈길을 보냈지만..
이 개자식이 내 바지 빌려가고도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죽일놈.. 생까다니.. -_-
결국 난 화장실로 끌려가 다섯명 정도 되는 인원에게 둘러쌓이고 말았다.
김군: 아~ 나! 이색히 오늘 죽여버릴 것 같은데 우리 나라 사형제도 있냐?
최군: 괜찮아. 짐승색히 한 마리 죽이는 건데.
이대리: 좋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날 죽이고 싶으면 한 놈만 나와 죽여라. 인해전술은 무식한 놈들만 쓰는 거다.
김군: 이 샤발놈이! 뒤지려고!!
녀석이 내 명치에 주먹을 내리 꽂았다.
웁, 하며 상체를 숙이자 녀석은 무릎으로 내 얼굴을 박살내버렸다.
어제의 후유증으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이대로 당하고만
있기엔 너무나 억울해 나도 놈에게 있는 힘껏 분노의 주먹을 날렸다.
내 주먹에 눈을 맞은 김군은 손바닥으로 눈을 문지르며 뒤로 몸을 내뺐고
이를 보고 있던 놈들은 치사하게 한꺼번에 달려들어 나에게 폭행을 가했다.
난 김군만 때려눕히겠다는 일념으로 빗발치게 날아드는 주먹을 맞아가며
김군에게만 집요하게 공격을 가했으나 그 오기는 얼마 못 가 놈들의
주먹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그런 나에게 뒤늦게 정신을 차린 김군이 녀석들을 파헤치고 다가오더니
흥분하며 씩씩거렸다.
김군: 헉헉.. 잘 들어. 방금 전까진 용창이, 준수, 창일이에 대한 복수였지만 지금부턴 내 신성한 몸에 주먹질을 한 대가야. 어디 한 번 죽어보라구.
저항할 힘도 없는 내게 놈들은 또다시 폭력을 행사했다.
입술이 터지고 눈알이 튀어나오고 코에선 피가 줄줄줄, 흘러나왔지만 놈들은
이런 날 봐주질 않았다.
죽일 각오라도 했는지 무섭게 주먹을 날려댔다.
김군: 헉헉.. 아직도 스팀 돌지만 이제 나에 대한 죄값은 이걸로 끝내 줄게. 하지만 다 끝난 건 아냐. 분명 1차 경고 했었지. 정미랑 만나지 말라고. 스스로 선택한 일이니 잘 견뎌 보라고.
놈들은 정말 잔인한 놈들이었다.
아니,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이라면 다 죽어가는 사람을 상대로 일말의 망설임 없이 이렇게
짓밟을 순 없을 것이다.
난 온 몸이 피투성이 되면서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갔고 더이상 저항할
기력도 정신도 없었다.
그렇게 비참하게 쓰러지고 있는 그 때,
커다란 목소리가 화장실을 울렸다.
박군: 그만해!!
박재석이었다.
이 자식의 등장이 왜이리도 반갑게 느껴지는 걸까.
놈들은 박군의 한 마디에 주먹과 발을 멈추었고 의아한 표정으로 박군을 쳐다보았다.
박군: 니들 정말로 죽일 셈이야!!
김군: 헉헉.. 재석아. 너도 알잖아. 저 자식이..
박군: 씨바! 닥쳐!!
최군: 재석아, 너 왜그래. 어제 너랑 맞장까지 뜬 놈이야. 왜 쟤를 감싸려고 하는 거야.
박군: 주둥아리 한 번만 더 열면 다 죽여버린다. 모두 당장 나가. 나가라고!
역시 학교 짱의 말이 무섭긴 했나보다.
놈들은 더이상 불만을 터뜨리지 못하고서 아쉽다는 듯이
씩씩거리며 화장실을 나갔다.
그러나 박군의 분노는 그들을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피를 토하며 쓰러져있는 내게도 똑같이 광분하며 소리쳤다.
박군: 개색햐! 너 도대체 뭐하러 온 색히야! 뭔데 이렇게 사고 치게 만드는 거야! 어!!!
이대리: ....
박군: 아니다 싶으면 그냥 닥치고 거슬리지 않으면 되잖아! 그럼 아무 일도 없잖아! 그렇게 티 내고 싶어? 그런 거야!!
박군의 말이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사실, 박군의 말대로 놈들에게 튀지 않고 그냥 조용히 지내면
분명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난 그럴 수 없었다.
이대리: 난 뭐 자존심도 없는 줄 알아! 니들이 시키는대로 다 해야 하는 거야?? 니들 눈에 거슬리지 않기 위해 내 자유를 포기해야 하는 거냐고! 그리고 니가 지금 내 기분을 알고서나 그딴 소릴 지껄이는 거야! 낙동강 오리알 마냥 기댈 곳 없고 정 붙일 곳 없는 내가 이렇게 비참하게 당하기까지 해야하는 기분을 알기나 하냐고! 씨바알..
눈물이 펑펑 쏟아져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 하나 날 염려해 주고 이해해주지 않는 전학생이라는게
참을 수 없을 만큼 괴로웠던 것이다.
박군: 자존심? 그래. 나도 정미한테 차인게 존심 상해서 유치한 짓이나 하고 있으니 너한테 더이상 큰소리 치지 않을게. 그리고 전학생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치만 분명히 알아 둬.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그러니 더이상 소란 피우지 마. 그냥 전학생 답게 얌전히 지내. 부탁이야..
박군은 그렇게 마지막으로 조용히 말하고는 대답따윈 듣지도 않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일평생동안 맞아야 할 것을 며칠동안 다 맞은 난 힘이 쭉 빠진 채,
더러운 소변기 옆 구석에 그대로 쓰러져 있어야 했다.
분하고, 억울하고, 고통스럽고, 쓸쓸하고, 외로운..
인간의 안 좋은 감정을 모두 한꺼번에 느끼면서 눈물이 줄기차게 흘러내렸다.
혼자 감당하기 힘든 시련 앞에 내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전에 다니던 학교
친구들이 그리운 마음에 더욱 뜨거워져만 갔다.
그렇게 눈물을 얼마나 흘렸을까, 화장실 밖에서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미: 대리야. 너 안에 있지?
정미의 목소리였다.
당장이라도 뛰쳐 나가 그녀에게 만큼은 위로를 받고 싶었지만
이렇게 망가진 모습으로 또다시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아
난 조용히 숨을 죽였다.
정미: 있는 거 다 알아. 빨리 나와봐. 빨리..
그녀가 내 상황을 짐작했는지 많이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몇 번이나 외면하였지만 결국 난 그녀의 고집을 꺽지 못하고
그리고 내 본능적인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화장실 문을 살짝 열었다.
그 이상은 열지 못하게끔 손잡이를 꼭 쥐고서.
정미: 어머나. 이 얼굴 좀 봐. 어서 이 문 열어봐.
이대리: 열지 마. =_=
살짝 열린 문을 몇차례 활짝 열려던 정미는 내 기분을 이해했는지 더이상
힘을 주지 않고 조용히 팔을 내쪽으로 집어넣는 걸로 대신하였다.
그리고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리며 휴지로 내 입술을 닦아주었다.
하얀 휴지에 빨간 피가 선명하게 묻어났다.
이대리: 미안하다. 볼 때마다 이렇게..
정미: 나 때문이지??
그녀가 말을 끊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대리: 아냐.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정미: 거짓말 하지마. 나 때문인거 맞지?
이대리: 아니야.
정미: 맞잖아! 왜 자꾸 거짓말 해!
이대리: 아니라니까!
나도 모르게 순간 화를 내고 말았다.
정미: 너..
이대리: 제발 교실로 올라가 줘. 나 혼자 있고 싶어.
정미: 안 돼. 너 지금 간호해 줄 사람이 필요해. 나랑 있는게 싫으면 양호실에라도 데려다주고 갈게.
이대리: 갈 수 없어. 그럼 싸운 거 걸리잖아. 그냥 여기에 있을게.
정미: 고집부리지 말고 잠깐만 나와봐. 너 지금 출혈이 심하단 말야.
이대리: 괜찮으니 그만 올라가줘.
정미: 흑흑.. 나쁜 자식들. 어쩜 사람을 이지경으로 만들 수가 있어. 빨리 나와보래두! 안 그러면 문 부셔버릴 거야!
우린 또 다시 손잡이에 힘을 주었고 이번에도 힘에 이기지 못한 그녀는
문을 열라고 악을 썼다.
그러는 순간, 그녀의 머리 뒤로 방금 전 나를 신나게 두들겨 팼던
놈들의 모습이 보였다.
김군: 참나. 니들 여기서 에로영화 찍냐? 야. 최정미. 남자 화장실이 그렇게 구경하고 싶던? 나랑 같이 들어갈까?
정미: 이 나쁜 자식들. 니들이 사람이냐? 사람이야?
최군: 이 년 봐라. 지 편 한 명 생겼다고 아주 당당해졌네.
정미: 짐승같은 놈들. 저리 꺼져버려. =_=
최군: 니년이 꺼져야지. 여기 남자 화장실 앞이거든.
순간, 김군이 정미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비틀었다.
김군: 2층에서 마주치면 죽는다고 경고했지.
정미: 아! 아! 이거 안 놔!
최군: 거참! 주둥아리 다물지 못해!
최군이 정미의 머리 끄댕이를 붙잡고는 마치 짐승 한 마리를 끌고가듯이
억지로 복도 계단 쪽으로 끌고 갔다.
정미는 심하게 몸부림 치며 놈들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이에 참다못한 김군이
그녀의 머리끄댕이를 세게 한 번 잡아당기더니 날렵한 손놀림으로 따귀를 때렸다.
김군: 이 년이 죽으려고! 확!!
내가 놈들에게 당했듯이 정미도 그렇게 복도바닥에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고
정미의 짧은 비명소리가 초점 잃은 내 두 눈동자를 부릅뜨게 만들었다.
반쯤 열려진 문틈 사이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있던 내 주먹엔
다시금 힘이 실렸다. 그리고 이빨이, 아니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 정미: 걔들 때문에 요즘 정말 살 맛 안 나. 누군가 나타나서 전부 혼내줬으면 좋겠어. 휴~
이대리: 걱정마. 너의 구원투수가 되어주기 위해 내가 왔잖아. 우리 이제부터 서로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친구하자. 우린 서로 친구가 필요한 입장이니까. 어때? ===========================================================
우린 친구지? 그러니까 친구가 당하고 있으면 당연히 도와줘야겠지?
설령 내가 많이 힘들고 지쳐있어도 죽을 힘을 다해 도와줘야겠지?
만약 내 선택이 잘못 돼 두번 다시 보지 못할 일이 있더라도 도와줘야겠지?
그래. 맞을 거야.
우린 친구니까 말야..
화장실 구석에 있는 대걸레를 반으로 부러뜨렸다.
살짝 열려있던 문을 활짝 열어체졌다.
대걸레를 꼭 쥐고는 놈들을 향해 시시각각 다가갔다.
김군: 어.. 어.. 너...
이대리: 으아아아!!!
김군은 놀랄 새도 없이 내가 휘두른 대걸레 나무짝에 머리를 맞아 구석으로
나가 떨어졌고 최군도 반항 한 번 못하고는 순식간에 녀석의 옆으로 뒹굴러야 했다.
내 분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쓰러진 놈들에게 내가 당한 것 이상으로
무지막지하게 나무 막대기를 휘둘렀다.
녀석들은 살려달라는 듯 악을 쓰며 신음을 토해냈고 허겁지겁 달려나온
반 아이들은 이성을 잃은 내가 무서웠는지 멀리서 그만 하라며
소리만 질러댈 뿐이었다.
그러나 막대기를 쥔 손에 절대 힘을 빼지 않았다.
둘 중 누구 한 명이 반 죽어야만 내 손에 힘이 빠질 듯 했다.
복도 바닥은 누구의 피인지 알 수 없는 혈흔으로 여기저기 무늬를 이루어만 갔고
놈들은 더 이상 저항할 힘을 잃은 채 나약한 모습으로 바들바들 떨고만 있어야 했다.
녀석들이 다 죽어가는 나에게 폭력을 멈추지 않았듯이 나 또한 그런 녀석들을
봐주질 않고 계속해서 몽둥이를 날렸다.
그런데 그 때..
누군가의 고자질로 뒤늦게 달려온 학생부 선생님들이 내 몸을 붙들며 소리쳤다.
선생님: 그만 두지 못 해!
이대리: 이거 놔요! 놓라구요!
이성을 잃은 내 눈엔 선생님도 보이질 않았다.
내 두 눈은 바닥에 쓰러져있는 두 놈에게만 향하고 있었고 내 의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두 놈을 비참하게 뭉개야 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선생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난 계속해서 몽둥이를 무섭게 휘둘렀고
녀석들은 최후의 발악을 하며 몸을 기다시피 했다.
그렇게 쉽게 멈추지 않을 것 같던 살벌한 상황은 결국 한 여자의
울부짖음으로 인해 그만 브레이크를 밟게 되었다.
정미: 제발 그만 해. 제발.. 흑흑..
친구만이 나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인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난 이성을 찾을 수 있었고
그제서야 바닥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김군과 최군 외에, 주위에서 이를
구경하는 학생들의 모습, 열을 내는 두 명의 학생부 선생님, 그리고 울고있는
정미의 모습이 차례대로 보였다.
난 그제서야 내 임무를 마친 듯, 손에 바짝 주고 있던 힘을 서서히 풀었다.
그러면서 몽둥이가 바닥으로 자연스레 퉁, 떨어져 내렸고
그 소리의 메아리가 끝나기도 전에 내 뺨에서 철썩, 하는 메아리가 울려댔다.
선생님: 미친 자식. 따라와!
난 그렇게 암담한 결말을 맺으며 학생부로 끌려가고 말았다.
그런데 학생부에 끌려가서까지도 억울 한 건 한 두개가 아니었다.
내 얼굴의 상태가 더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김군과 최군이 병원으로
실려간 탓일까.
아니면 그들을 때리고 있는 내 모습을 현장에서, 그것도 학생부 선생님들께
직접적으로 목격돼서 일까.
학생부 선생님들은 내 말을 들어줄 생각도 안 하고서 날 몰아붙이려고만 했고
전학 오자마자 싸움을 일으키고 사람 두 명을 반 병신 만든 내겐 그 어떤
외침도 그저 변명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런 내게 편이 되주기 위해 정미가 학생부 선생님들에게 울부짖으며 매달려봤지만
그 또한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했다.
결국 다음날..
난 엄마를 학교에 모시고 와야했고 상황은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만 갔다.
내개 맞은 두 녀석 중, 한 녀석은 머리가 찢어지고 또 한 녀석은 고막이 터지는
바람에 녀석들의 어머님들까지 학교로 찾아와 나와 엄마를 향해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그런데 엄마는 자신의 아들 또한 녀석들에게 당한 상황인데도 그 아줌마들에게
연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엄마: 죄송합니다. 우리 아들이 그런 애는 아닌데.. 아무튼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난 그런 상황이 억울해서 참을 수 없었다.
이대리: 엄마가 뭘 잘못했다고 사과를 해! 나 잘못한 거 없어! 저 자식들이 먼저 날 괴롭혔고 여자도 때렸단 말야! 그리고 나도 지금 죽을 기분이란 말야!
억울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지만 녀석들 어머님들은
그런 나를 보고 손가락질을 했다.
김군 어머니: 이 녀석 아주 안 되겠네! 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들고도 반성하는 기미 하나 안 보이고 말야! 아! 뭐해요! 이런 후레자식은 당장 퇴학시켜버려야 한다니까요!
최군 어머니: 왜 남의 귀한 아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그러려고 전학 온 거야! 어떻게 할 거야! 치료비 어떻게 할 거야!! 어!!
이대리: 엄마 나 진짜.. (ㅎ_ㅎ)
엄마만큼은 내 억울함을 알아달라고 뭐라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엄마가 말을 막는 바람에 말문은 거기서 막히고 말았다.
엄마: 내 아들도 많이 다쳤지만 치료비는 물어드릴게요. 그런데 자기 자식만 귀한 줄 알고 남의 자식은 귀한 줄 모르니 솔직히 화가 나네요. 아무튼 처벌을 내리면 닳게 받을 테니 학교 측에서 신중히 판단해주세요.
엄마는 평소때와는 달리 너무나 침착했다.
분명 그 아줌마들 이상으로 소리치고 흥분하며 100번을 더 따졌을
엄마였지만 자식의 인생이 바뀔 수도 있는 중요한 시점이라 그런지
다른 식으로 감정을 표출하고 있었다.
한편, 학교측에선 우리 모두의 잘못을 인정하고 모두에게 같은 처벌을 내리려 했지만
퇴학이나 전학을 시키라는 녀석들 어머님들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몹씨나
갈등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 갈등은 오래 가지 않아 상대편 쪽으로 치우치게 되었고, 제 3자의 입장에서
차분하게 지켜보던 담임선생님마저 엄마에게 알 수 없는 눈빛을 보냈다.
난 그 눈빛이 분명 무엇을 뜻하는 건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날 또다시 전학시키라는.. 눈빛이었다.
담임선생님: 아무래도 사정상 다시..
엄마: 그래요. 말씀 안 하셔도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두 번 다시 내 아들 전학 안 시키려고 했지만 사정이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네요. 학교 알아보는 대로 전학 시킬게요.
이대리: ... (ㅎ_ㅎ)
빌어먹을.
두번 다시 전학 안 간다던 내가 내 스스로 무덤을 판 꼴이라니.
그것도 한 달도 못 버티고 말야.
이번엔 엄마 때문에 내가 전학을 가게 될 상황이 아니라
나 때문에 집이 이사를 가야 할 상황이었다.
엄마는 그동안 날 전학시킨 게 많이 미안했는지 내게 싫은 소리 한 마디
하지 않으셨고 전학만 가면 사건을 덮어주겠다는 학교측에 그냥 고맙다는
말만 남긴 채 발길을 옮기셨다.
그리고 며칠 뒤..
난 교실 앞에 놓인 탁자에 서야 했고 불과 얼마 전, 반 아이들 앞에 서서
잘 지내보자는 인사의 말을 한 것과는 반대로 이번엔 잘 지내라는 작별의 말을
고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담임선생님: 오늘 이대리군이 전학을 가게 되었다. 여러분들도 그 이유는 잘 알 거라 생각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한 반에서 같이 생활한 너이들이니 마지막 가는 모습이라도 좋게 봐주길 바란다. 이대리군,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고 가야지.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내 모습을 주시하고 있는 학생들을 한 명씩 둘러보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대리: 미안하다. 모두에게.. 그런데 지금 너희들 눈동자는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진 모르겠지만 나, 너희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리 나쁜 애는 아냐. 그 동안 안 좋았던 내 모습은 잊어주고 좋았던 모습만 너희들 기억 속에 남았으면 좋겠어. 아쉽긴 하지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거겠지. 전학생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을 채워주지 못하고 이렇게 소란만 피우다 가게 돼서..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눈물을 글썽이며 난 고개를 숙였다.
그런 내가 가엾어 보였는지 반 아이들도 자신의 책상만 바라보며
슬픈 눈빛을 만들었다.
선생님: 얘기 다 한 건가.
이대리: 네. 다 했어요. =_=
선생님: 그래. 그럼 전학 가는 학교에선 생활 잘 하고 어머님 밑에서 기다리시니까 어서 내려가봐.
이대리: 저.. 선생님.
선생님: 그래. 말해봐.
이대리: 재석이랑 밖에서 잠깐 대화 좀 하고 갔으면 해요.
선생님: 흐음.. 그래. 박재석 복도로 잠깐 나가봐.
난 내가 잠시 생활했던 교실을 한번 둘러보고 끝으로 내 자리를 한 번
바라보고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복도로 나왔다.
재석이도 밖으로 조용히 걸어나왔다.
이대리: 결국 이렇게 되는 거였구나. 전학생의 최후가..
박군: ....
이대리: 하하. 절이 싫어 중이 떠나는 게 아니라 절이 중을 싫어해 중이 좇겨나는 상황이네.
박군: ....
이대리: 우리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친구할까?
박군: ....
이대리: 다른 뜻은 없고 그냥 전학 간 학교에서 남자친구 한 명 못만들고 가는 게 분해서 그래.
난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고
녀석은 알겠다는 듯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나도 만족스럽다는 듯이 그 손에 내 손을 맞대었다.
이대리: 짜식. 고맙다. 이렇게 친구가 됐으니 내가 선물 하나 주고 갈게.
박군: ...
이대리: 빨간 바지 너 가져. 줄 게 그것 밖에 없다.
박군: 싱거운 자식.
이대리: 싱거우면 나 있을 때 양념이라도 해주지 그랬냐.
박군: 넌 그 어떤 양념도 안 먹힐 녀석이야.
이대리: 그런가. 참. 우리 친구 됐으니까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지?
박군: 그래. 부담갖지 말고 말해.
이대리: 이곳에 내 친구가 한 명 더 있거든. 내 친구는 너한테도 친구겠지? 그 친구를 앞으로 잘 보살펴 줬으면 해서.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야. 어때? 어려운 부탁 아니지?
박군: 정미 말하는 거냐?
이대리: 그래. 정미.
박군: 나 사실.. 너 가기 전에 뭐 하나 말해 주고 싶다.
녀석의 갑작스런 신중함에 난 아무 말 없이 녀석을 주시했다.
박군: 정미한테 다시 한 번 고백해보려고. 어제까지만 해도 정미 그 뇬.. 아니 그 애가 싫었는데 오늘 맘을 바꿨어. 나도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너가 선물한 빨간바지 입고 멋지게 고백해 보려고. 걘 기지바지 싫어하거든. 양아치 같다면서..
이대리: 하하. 이 자식 사람 놀래키는 재주가 있었네? 아무튼 고맙다. 지금이라도 맘을 바꿨다니 다행이야. 짱인 너가 정미 곁에 있으면 애들이 함부로 못 할 테니 말야. 그 문제가 많이 걱정됐는데 이제야 속이 후련하네. 참. 근데 어쩌지? 걘 칼라바지도 싫어하던데.
박군: 그, 그래?
이대리: 암튼 잘 해봐. 또 충격 먹고 왕따 만들면 그 땐 식칼 들고 달려올 거다!
박군: 이거 무서워서 살겠냐. 근데 걱정은 하지 마라. 이번엔 차여도 지금처럼 유치한 짓은 안 할 테니.
이대리: 덕분에 맘은 편히 갈 수 있게 됐구나. 하아.. 고맙다.
박군: 넌 멋진 놈이다. 똥고집만 버리면.
이대리: 넌 멋진 남자다. 여자만 못살게 굴지 않으면. 앞으로 약자에겐 약하고 강자에겐 강한 그런 짱이 돼라. 그게 진정한 짱이거든.
박군: 짜식..
이대리: 근데 한 번만 웃어줄 수 있냐? 너 웃는 모습 한 번도 못봤다.
박군: ....
이대리: 억지로 웃기 힘들면 안 웃어도 돼.
녀석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꼬리를 천천히 위로 올렸다.
처음으로 보는 녀석의 밝은 표정이었다.
이대리: 웃는 모습 멋진데 왜 나한텐 인상만 썼냐? 앞으로 웃고 다녀라. 그래야 정미도 좋아할 거다.
박군: 그래. 노력해볼게.
이대리: 참.. 그리고.. 김군이랑 최군 만나면 전해 줘. 담에 만나게 되면 악연으로 만나진 말자구. 그럼 이만 갈게..
이렇게 모든 할 말을 마친 난..
녀석의 손을 꼭 쥐고 있던 손을 풀어 등을 돌렸다.
그러자 녀석이 날 멈춰 세웠다.
박군: 잠깐만. 나도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어.
이대리: ...
박군: 넌 나한테 지지 않았어. 그 날, 너가 이긴 거야. 그냥.. 이 말을 해주고 싶다.
녀석의 말에 난 고개를 돌려 씁쓸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박재석.
너 정말 멋진 구석이 있어.
근데, 지금 너가 한 말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그 땐 절대 지지 않았다고 우기고 싶었지만 오늘 너 모습 보니까
내가 진 거 맞아. 너가 이긴 거야.
난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계단을 쓸쓸히 내려갔다.
그런데 왜 자꾸만 눈물이 글썽이는 걸까.
또다시 새로운 곳으로 가 인사를 하고, 이름을 알리고, 자리를 배정받고
친구들을 사귀어야 하는 그런 절차들이 두려워서 일까.
아니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던 한 녀석과 헤어지는게
아쉬워서 일까.
씁쓸한 맘으로 1층 교무실에서 기다리던 엄마와 함께 텅빈 운동장을
뚜벅뚜벅 걸었다.
그렇게 교문 앞까지 걷게 되자, 갑자기 그리운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그리움에 못이겨 잠시 걸음을 멈추게 되었고 뒤를 돌아 학교 건물을
올려다 봐야만 했다.
고요한 정적이 학교를 감싸는 가운데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산한 분위기였다.
혹시나 그녀가 창가에서 내 마지막 가는 모습을 봐주길 기대했던 것일까.
아쉬움을 품은 채 그녀의 교실 창가를 지긋이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마지막 하고 싶은 말들을 속으로 속삭였다.
정미야.. 내가 전에 말했었지? 전학 가는게 세상에서 가장 싫다고. 왜 그런지 말해 줄까?
혹시, 전학 간 아이의 빈자리를 느껴본 적 있어? 그 친구가 있을 땐 그의 소중함이라던가 존재감을 못 느끼다가 막상 어느 날 부터 보이지 않고 그 아이의 자리가 비어있는 걸 보고는 뭔가 모르게 허전함을 느껴 본 적. 그래서 자꾸만 그 아이의 빈자리를 쳐다보게 되고 어떨 땐 그 아이와의 추억을 떠올려보게 되는 것 말야.
아마 한 번 쯤은 있었겠지? 근데 그게 왜 그런지 알아? 마음의 한 자리가 비어서 그런 거야. 그 친구에게 줄 마음이 한 구석에 나도 모르게 존재했던 건데 어느 날 그 친구가 없어졌으니 그 마음 한 구석도 자신의 역할을 잃고서 허전해 하는 거지.
근데 전학생의 기분은 어떤지 알아? 그 마음의 빈자리가 몇 십개, 아니 몇 백개가 생겨. 많은 학생들에게 줄 마음이 내 가슴 구석 구석에 꼭꼭 들어차 있었는데.. 그 마음들이 어느 한 순간 갈 길을 잃어버리니까 말야. 그래서 난 전학을 갈 때마다 마음이 너무 착잡해. 아무래도 뭔가 허전하고 아쉽고 외로워서 겠지.
후우.. 이제 난 또다시 얼굴이 틀리고 성격이 틀린 아이들과 앉아 수업을 받고 얘기를 나누려 하고 같이 밥을 먹으려 하겠지. 사실 좀 두려워. 모두들 서로 친하고 하나인 것 같은데.. 나만 혼자인 것 같거든. 낯선 곳에서 친구마저 없다는건 정말 견디기 힘든 시련이야. 그래서 난 혼자 왔다 혼자 떠나는 그 전학생이 싫은 거야.
그런데 이번 전학은 더욱 아쉽네. 그동안 내게 좋은 친구가 되어준 너와 헤어지게 돼서 그런가봐. 정말 좋은 친구였는데 말야.. 아쉽다. 같이 졸업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아쉬움은 버리고 내 가슴속에 널 간직하고 갈게. 그리고 항상 너와 함께 있다는 생각으로 어디서든지 힘낼게. 너도 그러리라 믿어. 근데 이거 좋은 얼굴로 멋지게 못 떠나고 이렇게 망가진 얼굴에 쫓겨나다시피 떠나게 되어 너무 부끄럽네. 그래도 내 마지막 가는 모습은 멋지게 봐 줄 거지?
참.. 박재석, 그 자식 정말 멋진 녀석이더라. 좀 사나운 면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인정미 넘치는 녀석이야. 내 빈자리를 그 녀석이 채워줬으면 좋겠어. 둘이 꼭 잘 되길 바래.
하아.. 나 이제 가봐야겠다. 엄마가 기다리시거든.
정미야.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하나만 더 하고 갈게. 나 전학가게 된 거 절대 너 때문이 아냐. 내 가슴속에 자리잡은 우정이란 녀석 때문에 가게 되는 거야. 그 녀석 가치 있는 녀석이기 때문에 나 아무런 후회도 하지 않아. 그러니 내게 미안한 맘은 절대 갖지 말고 울지도 않았으면 해. 나 울보 정말 싫어하거든. 전학 다음으로 싫어하는 게 바로 울보야. 그러니까 그럴 수 있지? 약속하는 거다?
이젠 정말 가봐야겠다. 잘 지내길 바라고 가끔 힘든 일이 있을 땐 우리 반으로 찾아와. 책상은 비어있지만 내 마음 하나는 거기에 두고 왔으니.
우정이란 녀석을..
씁쓸한 맘을 떨치고 기다리고 있던 엄마 차에 올라탔다.
곧, 차창으론 학교 풍경이 먼지처럼 사라졌고
차는 새로운 학교로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렸다.
엄마: 아까 교무실에 있을 때, 어떤 여자 아이가 와서 주고 간 거야. 읽어봐.
말없이 운전을 하던 엄마가 편지를 꺼내들며 조용히 말했고
공책을 찢어서 만든 듯한 그 편지를 받아 펼쳐보았다.
편지 상단에 적힌...
"TO. 내 소중한 친구"
라는 글씨만 보고도 이것이 누가 쓴 글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편지를 쓰며 또 울었던 것인가.
여기저기 눈물로 번진 듯한 글씨들이 눈에 띄었다.
난 그 얼룩진 글들을 한 줄 한 줄 천천히 읽어내려갔고
내 눈에선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눈물은 희미하게 얼룩진 글을 더욱 희미하게 만들어갔다.
TO. 내 소중한 친구
우선 정말 미안하단 말 밖에 할 말이 없어. 내가 그 날 편지만 보내지 않았어도 너와 난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을 테고 이렇게 전학가게 될 이유도 없었을 테니 말야.
넌, 또 나 때문이 아니라며 미소 짓겠지? 그런데 난, 바보 멍청이가 아냐. 너가 몸이 망가진 것도 이렇게 전학가게 된 것도 모두 나 때문이란 거 다 알아. 그런 내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나고 속상해. 그래서 너 붙잡고 울게 될까봐 너 가는 모습은 못 볼 것 같애. 이런 내 맘 이해해줄 수 있지?
대리야. 그동안 내게 큰 힘이 돼줘서 정말 고마워. 엎어진 날 일으켜준다고 상처가 아무는 건 아니지만 흙을 깨끗이 털어준 네가 너무 고마워. 난 너한테 미안하단 말과 고맙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네. 나.. 바보같지?
우리.. 이제 서로 살아가는 하늘은 다르겠지만.. 친구의 이름으로 항상 추억을 함께 하자. 잠시의 행복이나 웃음보다는 가슴깊이 남을 수 있는 인상을 준 넌.. 내 소중한 친구거든. 오늘도 내일도 내 소중한 친구..
우리 친구니까 나중에 또 만날 수 있는 거겠지? 다시 만나게 되면 우리 더 좋은 추억 많이 만들자. 그리고 기쁨은 두 배로, 슬픔은 반으로 줄일 수 있는 친구로 영원히 존재하자. 어때? 좋은 생각이지?
나 이제 외롭지 않을 자신 있으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전학 가서 공부 열심히 하고 잘 지내. 어리석게 또 다시 친구로 인해 희생당하지 말고. 이건 내 간절한 바램이야. 너 괴로워하는 모습 정말 보기 싫거든.
아, 참.. 너에게 거짓말 했던 게 하나 있어. 더이상 그 거짓말이 필요없게 됐으니 말해줄게. 나 원래 칼라바지 좋아해. 너가 걱정돼서 잠깐 거짓말 했던 거 뿐야. 너 파란색 바지가 젤 멋지던데. 딱 내 스타일이었어. ^^
이제 아쉽지만 수업 준비해야 돼서 그만 줄여야겠다. 이 편지 오래오래 간직하면서 내 기억 해주길 바라고 앞으로 생활하게 될 학교에서 잘 지내길 바랄게. 내게 보여준 모습처럼 항상 용기있는 모습으로.. 나 또한 그럴 테니. 그럼 이만...
-너의 소중한 친구 정미가-
이성이든 동성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게 힘이 되어 줄 수 있고,
내가 기댈 수 있는 다른 한 사람이 있다는 것.
바로 그런 친구가 내 곁에,
내 마음 속에 존재한다는 것.
그것만으로 내 앞길은 힘이 넘칩니다.
- 끝 -
* 10년 전 일이라.. 가물가물한 기억을 끄집어내 쓰긴했는데.. 쓰다보니 과장도 많이 되고 꼭 소설처럼 진행이 되네요. --; 아무튼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 감사하고요. 이 기나긴 글을 쓴 저도 고생했지만.. 읽어주신 여러분들도 고생하셨습니다. 모두 감사합니다.
writen by 이대리 http://cafe.daum.net/2daeri (이대리 유머공장)
전학생의 이름으로 그녀의 친구가 되어.. (하편)
* 그동안 많이 기다리셨죠?
이제 마지막 하편입니다.
글 길다고 짜증내지 마시고 읽어주세욧.. ^^;
이른 아침 남들보다 앞서 학교에 등교한 난 거울 앞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이대리: 재석아. 너가 빌려 달라던 바지야.
이 바지를 입고 한국 패션계의 선두주자가 되길 바래. ^^
이대리: 자. 섹시하게 입고 다녀? 알았지? ^_^
이대리: 어제 말한 빨간 바지야.
우리 재석이 이제 킹카 되는 일만 남았네. 하하. ^0^
이렇게 앙증맞은 표정과 니글니글한 말투로 거울 앞에서 연습을 하고 있는 이유는
어제 그 멍청한 친구들이 벌인 사건에 대한 뒷수습 때문이었다.
박군에게 어제 당한 것만 생각하면 바지를 그냥 휙, 던져주고 싶지만
커다란 약점이 잡힌 나로선 학교 짱인 박군에게 이 바지를 뇌물로 사건을
잘 무마시켜야 하기에 좀 비굴해 질 수 밖에 없었다. -_-;
그렇게 거울 앞에서 한참 열연하고 있는데 얼마 후 박군이 등장했다.
박군: 거울 앞에서 뭐하냐?
이대리: 뭐, 뭐하긴. 어제 너가 만들어준 작품 감상중이지.
박군: 얼굴은 좀 어떤대?
이대리: 칫. 보면 모르냐!
방금 전까진 거울을 보며 매우 화사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막상 그놈과
마주치니 표정도 말투도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신경질 적으로 나가게 됐다.
박군: 집에 있는 연고라도 가져왔다. 발라라.
이대리: 이미 발랐다. -_-
박군: 색히. 근데 엄마한테 이르진 않았겠지?
이대리: 왜? 학교에 찾아올까 겁나냐?
나 그렇게 치사한 놈은 아니다.
박군: 다행이군. 참 어제 말했던..
이대리: 자. 가져왔다. 입어봐라.
박군: 어라? 깨끗하네?
그 많은 핏자국이 하나도 안 보이는데?
이거 너가 빤거야?
이대리: 아니. 엄마가.
깨끗이 입어라. -_-
사실..
어젯밤 내 손으로 직접 빡빡 문질러 빤 거다.
그것도 피 지우려고 한 시간 동안 고무장갑 끼고 있어야 했다. -_-;
박군: 잘 입을게.
이대리: 대여기간 1주일이다. 그 이후론 연체료 받는다.
하루에 만원씩. -_-
박군: 훗. 귀여운 자식.
이대리: 참! 나한테 혹시 할 말 같은 거 없냐?
박군: 무슨 말?
아, 그래. 고맙다. 됐냐?
이대리: 그, 그래. 됐다. -_-
녀석에게 듣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니었다.
혹시나 어제 내 친구들이 벌인 일에 대해 녀석이 알고있는지 한 스푼 떠본 것이었다.
그런데 녀석의 반응을 보니 아직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듯 했다.
하긴. 아직 1교시 수업도 안 했는데 그 소문이 벌써 퍼졌을 리는 없지.
그나저나 내 친구들에게 맞은 넘들은 누구일까?
누군지 알기라도 하면 찾아가서 맛있는 거라도 사주면서 살살 달래볼 텐데.
제발 그 주인공들이 3학년만 아니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녀석들의 폭력이 정말 두려웠던 것일까.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될 때마다 내 심장은 콩딱콩딱 뛰어댔고
교실 문이 우르르르~~ 열릴 때마다 난 가슴을 몇 번이나 쓸어내려야 했다.
1교시, 2교시, 3교시가 지날 때까지 다행히도 내가 두려워하던 일은 터지지 않았고
이제 오늘의 하이라이트 점심시간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보통 점심 시간이 시작되면 미리 밥을 까먹은 1진 녀석들이 한꺼번에 우리 반으로
몰려오는데 그 시간만 아무일 없이 넘긴다면 난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드디어 4교시를 마치는 종소리와 함께 공포의 점심시간은 시작 되었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도시락을 먹고 있는데..
그 날 따라 가슴 철렁거릴 정도로 크게 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어제 그 일 때문이 아닌 그저 평상시 녀석들의 등장이길 바랬지만
살며시 눈동자를 굴려 그들의 모습을 한 번 살펴보자,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놈들 중 나처럼 얼굴이 심하게 망가진 놈이 한 명 껴있는 것이었다.
1진도 아닌 녀석이 그들 무리와 함께 있는 이유라던가, 왜 저렇게 얼굴이
망가져있는지는 그들에게 묻지 않고도 뻔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제기럴. 드디어 터졌군. -_-;
김군: 왠만하면 눈감아주려 했더니 아주 스스로 무덤에 매트리스를 까는구만.
기분 나쁠 정도로 껌을 짝짝, 씹어대며 걸어온 김군이 내 책상에 걸터 앉으며
비꼬는 식으로 말했고, 난 언제 날아들지 모르는 주먹에 잔뜩 긴장을 해야 했다.
김군: 어제 니 친구들이 쟤 얼굴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뒀네.
잘 봐봐. 최소한 한 시간은 밟힌 얼굴이지?
이대리: ...
김군: 왜? 모른 척 발뺌하려고?
이대리: 인정할게. 하지만 계획된 일은 아니었어.
그리고 저 친구에게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_=;
김군: 미안하다고 느낄 정도면 좀 맞아야 하는 것도 알고 있겠네?
이대리: 내가 저 얼굴보다 더 심각하니 그냥 비겼다 치고 그만 돌아가라.
이 얼굴로 더이상 싸우기 힘들다.
김군: 오.. 얼굴 더 망가질까 걱정 돼?
그러길래 왜, 학교 짱 재석이한테 개기냐. 개기긴.
아무튼 최대한 티 안나게 정성들여 패 줄 테니
잠깐만 따라오라고. 오케이?
김군이 내 멱살을 잡고 끌고 나가려하자 반장이 다가와 김군의 양팔을
붙들며 말리려했다.
반장: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오늘은 좀 참아. 얘 많이 다쳐있는 상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퍽! 소리와 함께 반장은 나가떨어졌고
김군은 자신의 주먹을 맞고 쓰러진 반장에게 열을 내며 소리쳤다.
김군: 씨~발라마! 저리 안 꺼져! 이게 죽으려고!
사태가 심각해지자 이를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고있던 박군이 나서서 김군에게 물었다.
박군: 무슨 일인데 그래?
김군: 재석이 넌 모르고 있었구나?
이 개자식이 어제 친구들 불러서 우리학교 애들 패고 갔대.
봐봐. 용창이 쟤 저렇게 맞았잖아.
옆에서 팔장끼고 있던 최군도 거들었다.
최군: 씨바! 용창이만 저렇게 된 게 아냐! 준수, 창일이 걔들도 당했대!
제발 3학년만 아니길 바랬던 내 바램은 그들의 대화내용을 통해 완벽하게
깨지고 말았다.
박군: 이대리. 얘들 말 진짜냐?
이대리: 억울하지만 진짜야. -_-
김군: 아오~ 이 색히 말 들을 필요도 없다니까. 너 이리 따라와라.
난 그들에게 강제로 연행되면서 박군에게 구조요청의 눈길을 보냈지만..
이 개자식이 내 바지 빌려가고도 모른 척 시선을 돌렸다.
죽일놈.. 생까다니.. -_-
결국 난 화장실로 끌려가 다섯명 정도 되는 인원에게 둘러쌓이고 말았다.
김군: 아~ 나! 이색히 오늘 죽여버릴 것 같은데 우리 나라 사형제도 있냐?
최군: 괜찮아. 짐승색히 한 마리 죽이는 건데.
이대리: 좋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날 죽이고 싶으면 한 놈만 나와 죽여라.
인해전술은 무식한 놈들만 쓰는 거다.
김군: 이 샤발놈이! 뒤지려고!!
녀석이 내 명치에 주먹을 내리 꽂았다.
웁, 하며 상체를 숙이자 녀석은 무릎으로 내 얼굴을 박살내버렸다.
어제의 후유증으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이대로 당하고만
있기엔 너무나 억울해 나도 놈에게 있는 힘껏 분노의 주먹을 날렸다.
내 주먹에 눈을 맞은 김군은 손바닥으로 눈을 문지르며 뒤로 몸을 내뺐고
이를 보고 있던 놈들은 치사하게 한꺼번에 달려들어 나에게 폭행을 가했다.
난 김군만 때려눕히겠다는 일념으로 빗발치게 날아드는 주먹을 맞아가며
김군에게만 집요하게 공격을 가했으나 그 오기는 얼마 못 가 놈들의
주먹 앞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그런 나에게 뒤늦게 정신을 차린 김군이 녀석들을 파헤치고 다가오더니
흥분하며 씩씩거렸다.
김군: 헉헉.. 잘 들어. 방금 전까진 용창이, 준수, 창일이에 대한
복수였지만 지금부턴 내 신성한 몸에 주먹질을 한 대가야.
어디 한 번 죽어보라구.
저항할 힘도 없는 내게 놈들은 또다시 폭력을 행사했다.
입술이 터지고 눈알이 튀어나오고 코에선 피가 줄줄줄, 흘러나왔지만 놈들은
이런 날 봐주질 않았다.
죽일 각오라도 했는지 무섭게 주먹을 날려댔다.
김군: 헉헉.. 아직도 스팀 돌지만 이제 나에 대한 죄값은
이걸로 끝내 줄게. 하지만 다 끝난 건 아냐.
분명 1차 경고 했었지. 정미랑 만나지 말라고.
스스로 선택한 일이니 잘 견뎌 보라고.
놈들은 정말 잔인한 놈들이었다.
아니,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이라면 다 죽어가는 사람을 상대로 일말의 망설임 없이 이렇게
짓밟을 순 없을 것이다.
난 온 몸이 피투성이 되면서 정신이 점점 혼미해져갔고 더이상 저항할
기력도 정신도 없었다.
그렇게 비참하게 쓰러지고 있는 그 때,
커다란 목소리가 화장실을 울렸다.
박군: 그만해!!
박재석이었다.
이 자식의 등장이 왜이리도 반갑게 느껴지는 걸까.
놈들은 박군의 한 마디에 주먹과 발을 멈추었고 의아한 표정으로 박군을 쳐다보았다.
박군: 니들 정말로 죽일 셈이야!!
김군: 헉헉.. 재석아. 너도 알잖아. 저 자식이..
박군: 씨바! 닥쳐!!
최군: 재석아, 너 왜그래. 어제 너랑 맞장까지 뜬 놈이야.
왜 쟤를 감싸려고 하는 거야.
박군: 주둥아리 한 번만 더 열면 다 죽여버린다.
모두 당장 나가. 나가라고!
역시 학교 짱의 말이 무섭긴 했나보다.
놈들은 더이상 불만을 터뜨리지 못하고서 아쉽다는 듯이
씩씩거리며 화장실을 나갔다.
그러나 박군의 분노는 그들을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피를 토하며 쓰러져있는 내게도 똑같이 광분하며 소리쳤다.
박군: 개색햐! 너 도대체 뭐하러 온 색히야!
뭔데 이렇게 사고 치게 만드는 거야! 어!!!
이대리: ....
박군: 아니다 싶으면 그냥 닥치고 거슬리지 않으면 되잖아!
그럼 아무 일도 없잖아! 그렇게 티 내고 싶어? 그런 거야!!
박군의 말이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사실, 박군의 말대로 놈들에게 튀지 않고 그냥 조용히 지내면
분명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난 그럴 수 없었다.
이대리: 난 뭐 자존심도 없는 줄 알아!
니들이 시키는대로 다 해야 하는 거야??
니들 눈에 거슬리지 않기 위해 내 자유를 포기해야 하는 거냐고!
그리고 니가 지금 내 기분을 알고서나 그딴 소릴 지껄이는 거야!
낙동강 오리알 마냥 기댈 곳 없고 정 붙일 곳 없는 내가
이렇게 비참하게 당하기까지 해야하는 기분을 알기나 하냐고!
씨바알..
눈물이 펑펑 쏟아져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 하나 날 염려해 주고 이해해주지 않는 전학생이라는게
참을 수 없을 만큼 괴로웠던 것이다.
박군: 자존심?
그래. 나도 정미한테 차인게 존심 상해서 유치한 짓이나
하고 있으니 너한테 더이상 큰소리 치지 않을게.
그리고 전학생의 마음도 헤아리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치만 분명히 알아 둬.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그러니 더이상 소란 피우지 마.
그냥 전학생 답게 얌전히 지내.
부탁이야..
박군은 그렇게 마지막으로 조용히 말하고는 대답따윈 듣지도 않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일평생동안 맞아야 할 것을 며칠동안 다 맞은 난 힘이 쭉 빠진 채,
더러운 소변기 옆 구석에 그대로 쓰러져 있어야 했다.
분하고, 억울하고, 고통스럽고, 쓸쓸하고, 외로운..
인간의 안 좋은 감정을 모두 한꺼번에 느끼면서 눈물이 줄기차게 흘러내렸다.
혼자 감당하기 힘든 시련 앞에 내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전에 다니던 학교
친구들이 그리운 마음에 더욱 뜨거워져만 갔다.
그렇게 눈물을 얼마나 흘렸을까, 화장실 밖에서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미: 대리야. 너 안에 있지?
정미의 목소리였다.
당장이라도 뛰쳐 나가 그녀에게 만큼은 위로를 받고 싶었지만
이렇게 망가진 모습으로 또다시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아
난 조용히 숨을 죽였다.
정미: 있는 거 다 알아. 빨리 나와봐. 빨리..
그녀가 내 상황을 짐작했는지 많이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몇 번이나 외면하였지만 결국 난 그녀의 고집을 꺽지 못하고
그리고 내 본능적인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화장실 문을 살짝 열었다.
그 이상은 열지 못하게끔 손잡이를 꼭 쥐고서.
정미: 어머나. 이 얼굴 좀 봐. 어서 이 문 열어봐.
이대리: 열지 마. =_=
살짝 열린 문을 몇차례 활짝 열려던 정미는 내 기분을 이해했는지 더이상
힘을 주지 않고 조용히 팔을 내쪽으로 집어넣는 걸로 대신하였다.
그리고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리며 휴지로 내 입술을 닦아주었다.
하얀 휴지에 빨간 피가 선명하게 묻어났다.
이대리: 미안하다. 볼 때마다 이렇게..
정미: 나 때문이지??
그녀가 말을 끊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대리: 아냐.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정미: 거짓말 하지마. 나 때문인거 맞지?
이대리: 아니야.
정미: 맞잖아! 왜 자꾸 거짓말 해!
이대리: 아니라니까!
나도 모르게 순간 화를 내고 말았다.
정미: 너..
이대리: 제발 교실로 올라가 줘.
나 혼자 있고 싶어.
정미: 안 돼. 너 지금 간호해 줄 사람이 필요해.
나랑 있는게 싫으면 양호실에라도 데려다주고 갈게.
이대리: 갈 수 없어. 그럼 싸운 거 걸리잖아.
그냥 여기에 있을게.
정미: 고집부리지 말고 잠깐만 나와봐.
너 지금 출혈이 심하단 말야.
이대리: 괜찮으니 그만 올라가줘.
정미: 흑흑.. 나쁜 자식들. 어쩜 사람을 이지경으로 만들 수가 있어.
빨리 나와보래두! 안 그러면 문 부셔버릴 거야!
우린 또 다시 손잡이에 힘을 주었고 이번에도 힘에 이기지 못한 그녀는
문을 열라고 악을 썼다.
그러는 순간, 그녀의 머리 뒤로 방금 전 나를 신나게 두들겨 팼던
놈들의 모습이 보였다.
김군: 참나. 니들 여기서 에로영화 찍냐?
야. 최정미. 남자 화장실이 그렇게 구경하고 싶던?
나랑 같이 들어갈까?
정미: 이 나쁜 자식들. 니들이 사람이냐? 사람이야?
최군: 이 년 봐라. 지 편 한 명 생겼다고 아주 당당해졌네.
정미: 짐승같은 놈들. 저리 꺼져버려. =_=
최군: 니년이 꺼져야지. 여기 남자 화장실 앞이거든.
순간, 김군이 정미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비틀었다.
김군: 2층에서 마주치면 죽는다고 경고했지.
정미: 아! 아! 이거 안 놔!
최군: 거참! 주둥아리 다물지 못해!
최군이 정미의 머리 끄댕이를 붙잡고는 마치 짐승 한 마리를 끌고가듯이
억지로 복도 계단 쪽으로 끌고 갔다.
정미는 심하게 몸부림 치며 놈들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이에 참다못한 김군이
그녀의 머리끄댕이를 세게 한 번 잡아당기더니 날렵한 손놀림으로 따귀를 때렸다.
김군: 이 년이 죽으려고! 확!!
내가 놈들에게 당했듯이 정미도 그렇게 복도바닥에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고
정미의 짧은 비명소리가 초점 잃은 내 두 눈동자를 부릅뜨게 만들었다.
반쯤 열려진 문틈 사이로 이 광경을 지켜보고있던 내 주먹엔
다시금 힘이 실렸다. 그리고 이빨이, 아니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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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 걔들 때문에 요즘 정말 살 맛 안 나.
누군가 나타나서 전부 혼내줬으면 좋겠어. 휴~
이대리: 걱정마. 너의 구원투수가 되어주기 위해 내가 왔잖아.
우리 이제부터 서로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친구하자.
우린 서로 친구가 필요한 입장이니까.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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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친구지? 그러니까 친구가 당하고 있으면 당연히 도와줘야겠지?
설령 내가 많이 힘들고 지쳐있어도 죽을 힘을 다해 도와줘야겠지?
만약 내 선택이 잘못 돼 두번 다시 보지 못할 일이 있더라도 도와줘야겠지?
그래. 맞을 거야.
우린 친구니까 말야..
화장실 구석에 있는 대걸레를 반으로 부러뜨렸다.
살짝 열려있던 문을 활짝 열어체졌다.
대걸레를 꼭 쥐고는 놈들을 향해 시시각각 다가갔다.
김군: 어.. 어.. 너...
이대리: 으아아아!!!
김군은 놀랄 새도 없이 내가 휘두른 대걸레 나무짝에 머리를 맞아 구석으로
나가 떨어졌고 최군도 반항 한 번 못하고는 순식간에 녀석의 옆으로 뒹굴러야 했다.
내 분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쓰러진 놈들에게 내가 당한 것 이상으로
무지막지하게 나무 막대기를 휘둘렀다.
녀석들은 살려달라는 듯 악을 쓰며 신음을 토해냈고 허겁지겁 달려나온
반 아이들은 이성을 잃은 내가 무서웠는지 멀리서 그만 하라며
소리만 질러댈 뿐이었다.
그러나 막대기를 쥔 손에 절대 힘을 빼지 않았다.
둘 중 누구 한 명이 반 죽어야만 내 손에 힘이 빠질 듯 했다.
복도 바닥은 누구의 피인지 알 수 없는 혈흔으로 여기저기 무늬를 이루어만 갔고
놈들은 더 이상 저항할 힘을 잃은 채 나약한 모습으로 바들바들 떨고만 있어야 했다.
녀석들이 다 죽어가는 나에게 폭력을 멈추지 않았듯이 나 또한 그런 녀석들을
봐주질 않고 계속해서 몽둥이를 날렸다.
그런데 그 때..
누군가의 고자질로 뒤늦게 달려온 학생부 선생님들이 내 몸을 붙들며 소리쳤다.
선생님: 그만 두지 못 해!
이대리: 이거 놔요! 놓라구요!
이성을 잃은 내 눈엔 선생님도 보이질 않았다.
내 두 눈은 바닥에 쓰러져있는 두 놈에게만 향하고 있었고 내 의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두 놈을 비참하게 뭉개야 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선생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난 계속해서 몽둥이를 무섭게 휘둘렀고
녀석들은 최후의 발악을 하며 몸을 기다시피 했다.
그렇게 쉽게 멈추지 않을 것 같던 살벌한 상황은 결국 한 여자의
울부짖음으로 인해 그만 브레이크를 밟게 되었다.
정미: 제발 그만 해. 제발.. 흑흑..
친구만이 나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인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난 이성을 찾을 수 있었고
그제서야 바닥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김군과 최군 외에, 주위에서 이를
구경하는 학생들의 모습, 열을 내는 두 명의 학생부 선생님, 그리고 울고있는
정미의 모습이 차례대로 보였다.
난 그제서야 내 임무를 마친 듯, 손에 바짝 주고 있던 힘을 서서히 풀었다.
그러면서 몽둥이가 바닥으로 자연스레 퉁, 떨어져 내렸고
그 소리의 메아리가 끝나기도 전에 내 뺨에서 철썩, 하는 메아리가 울려댔다.
선생님: 미친 자식. 따라와!
난 그렇게 암담한 결말을 맺으며 학생부로 끌려가고 말았다.
그런데 학생부에 끌려가서까지도 억울 한 건 한 두개가 아니었다.
내 얼굴의 상태가 더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김군과 최군이 병원으로
실려간 탓일까.
아니면 그들을 때리고 있는 내 모습을 현장에서, 그것도 학생부 선생님들께
직접적으로 목격돼서 일까.
학생부 선생님들은 내 말을 들어줄 생각도 안 하고서 날 몰아붙이려고만 했고
전학 오자마자 싸움을 일으키고 사람 두 명을 반 병신 만든 내겐 그 어떤
외침도 그저 변명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런 내게 편이 되주기 위해 정미가 학생부 선생님들에게 울부짖으며 매달려봤지만
그 또한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했다.
결국 다음날..
난 엄마를 학교에 모시고 와야했고 상황은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져만 갔다.
내개 맞은 두 녀석 중, 한 녀석은 머리가 찢어지고 또 한 녀석은 고막이 터지는
바람에 녀석들의 어머님들까지 학교로 찾아와 나와 엄마를 향해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그런데 엄마는 자신의 아들 또한 녀석들에게 당한 상황인데도 그 아줌마들에게
연신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엄마: 죄송합니다. 우리 아들이 그런 애는 아닌데..
아무튼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난 그런 상황이 억울해서 참을 수 없었다.
이대리: 엄마가 뭘 잘못했다고 사과를 해!
나 잘못한 거 없어!
저 자식들이 먼저 날 괴롭혔고 여자도 때렸단 말야!
그리고 나도 지금 죽을 기분이란 말야!
억울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지만 녀석들 어머님들은
그런 나를 보고 손가락질을 했다.
김군 어머니: 이 녀석 아주 안 되겠네!
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들고도 반성하는 기미 하나 안 보이고 말야!
아! 뭐해요! 이런 후레자식은 당장 퇴학시켜버려야 한다니까요!
최군 어머니: 왜 남의 귀한 아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그러려고 전학 온 거야!
어떻게 할 거야! 치료비 어떻게 할 거야!! 어!!
이대리: 엄마 나 진짜.. (ㅎ_ㅎ)
엄마만큼은 내 억울함을 알아달라고 뭐라 하소연하고 싶었지만..
엄마가 말을 막는 바람에 말문은 거기서 막히고 말았다.
엄마: 내 아들도 많이 다쳤지만 치료비는 물어드릴게요.
그런데 자기 자식만 귀한 줄 알고 남의 자식은 귀한 줄 모르니
솔직히 화가 나네요.
아무튼 처벌을 내리면 닳게 받을 테니 학교 측에서 신중히 판단해주세요.
엄마는 평소때와는 달리 너무나 침착했다.
분명 그 아줌마들 이상으로 소리치고 흥분하며 100번을 더 따졌을
엄마였지만 자식의 인생이 바뀔 수도 있는 중요한 시점이라 그런지
다른 식으로 감정을 표출하고 있었다.
한편, 학교측에선 우리 모두의 잘못을 인정하고 모두에게 같은 처벌을 내리려 했지만
퇴학이나 전학을 시키라는 녀석들 어머님들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몹씨나
갈등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 갈등은 오래 가지 않아 상대편 쪽으로 치우치게 되었고, 제 3자의 입장에서
차분하게 지켜보던 담임선생님마저 엄마에게 알 수 없는 눈빛을 보냈다.
난 그 눈빛이 분명 무엇을 뜻하는 건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날 또다시 전학시키라는.. 눈빛이었다.
담임선생님: 아무래도 사정상 다시..
엄마: 그래요. 말씀 안 하셔도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두 번 다시 내 아들 전학 안 시키려고 했지만
사정이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네요.
학교 알아보는 대로 전학 시킬게요.
이대리: ... (ㅎ_ㅎ)
빌어먹을.
두번 다시 전학 안 간다던 내가 내 스스로 무덤을 판 꼴이라니.
그것도 한 달도 못 버티고 말야.
이번엔 엄마 때문에 내가 전학을 가게 될 상황이 아니라
나 때문에 집이 이사를 가야 할 상황이었다.
엄마는 그동안 날 전학시킨 게 많이 미안했는지 내게 싫은 소리 한 마디
하지 않으셨고 전학만 가면 사건을 덮어주겠다는 학교측에 그냥 고맙다는
말만 남긴 채 발길을 옮기셨다.
그리고 며칠 뒤..
난 교실 앞에 놓인 탁자에 서야 했고 불과 얼마 전, 반 아이들 앞에 서서
잘 지내보자는 인사의 말을 한 것과는 반대로 이번엔 잘 지내라는 작별의 말을
고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담임선생님: 오늘 이대리군이 전학을 가게 되었다.
여러분들도 그 이유는 잘 알 거라 생각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한 반에서 같이 생활한 너이들이니
마지막 가는 모습이라도 좋게 봐주길 바란다.
이대리군,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고 가야지.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내 모습을 주시하고 있는 학생들을 한 명씩 둘러보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대리: 미안하다. 모두에게..
그런데 지금 너희들 눈동자는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진
모르겠지만 나, 너희들이 생각하는 만큼 그리 나쁜 애는 아냐.
그 동안 안 좋았던 내 모습은 잊어주고
좋았던 모습만 너희들 기억 속에 남았으면 좋겠어.
아쉽긴 하지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거겠지.
전학생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을 채워주지 못하고
이렇게 소란만 피우다 가게 돼서..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눈물을 글썽이며 난 고개를 숙였다.
그런 내가 가엾어 보였는지 반 아이들도 자신의 책상만 바라보며
슬픈 눈빛을 만들었다.
선생님: 얘기 다 한 건가.
이대리: 네. 다 했어요. =_=
선생님: 그래. 그럼 전학 가는 학교에선 생활 잘 하고
어머님 밑에서 기다리시니까 어서 내려가봐.
이대리: 저.. 선생님.
선생님: 그래. 말해봐.
이대리: 재석이랑 밖에서 잠깐 대화 좀 하고 갔으면 해요.
선생님: 흐음.. 그래. 박재석 복도로 잠깐 나가봐.
난 내가 잠시 생활했던 교실을 한번 둘러보고 끝으로 내 자리를 한 번
바라보고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복도로 나왔다.
재석이도 밖으로 조용히 걸어나왔다.
이대리: 결국 이렇게 되는 거였구나.
전학생의 최후가..
박군: ....
이대리: 하하. 절이 싫어 중이 떠나는 게 아니라
절이 중을 싫어해 중이 좇겨나는 상황이네.
박군: ....
이대리: 우리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친구할까?
박군: ....
이대리: 다른 뜻은 없고 그냥 전학 간 학교에서 남자친구
한 명 못만들고 가는 게 분해서 그래.
난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고
녀석은 알겠다는 듯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나도 만족스럽다는 듯이 그 손에 내 손을 맞대었다.
이대리: 짜식. 고맙다.
이렇게 친구가 됐으니 내가 선물 하나 주고 갈게.
박군: ...
이대리: 빨간 바지 너 가져. 줄 게 그것 밖에 없다.
박군: 싱거운 자식.
이대리: 싱거우면 나 있을 때 양념이라도 해주지 그랬냐.
박군: 넌 그 어떤 양념도 안 먹힐 녀석이야.
이대리: 그런가. 참. 우리 친구 됐으니까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지?
박군: 그래. 부담갖지 말고 말해.
이대리: 이곳에 내 친구가 한 명 더 있거든.
내 친구는 너한테도 친구겠지?
그 친구를 앞으로 잘 보살펴 줬으면 해서.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야.
어때? 어려운 부탁 아니지?
박군: 정미 말하는 거냐?
이대리: 그래. 정미.
박군: 나 사실..
너 가기 전에 뭐 하나 말해 주고 싶다.
녀석의 갑작스런 신중함에 난 아무 말 없이 녀석을 주시했다.
박군: 정미한테 다시 한 번 고백해보려고.
어제까지만 해도 정미 그 뇬.. 아니 그 애가 싫었는데
오늘 맘을 바꿨어. 나도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너가 선물한 빨간바지 입고 멋지게 고백해 보려고.
걘 기지바지 싫어하거든. 양아치 같다면서..
이대리: 하하. 이 자식 사람 놀래키는 재주가 있었네?
아무튼 고맙다. 지금이라도 맘을 바꿨다니 다행이야.
짱인 너가 정미 곁에 있으면 애들이 함부로 못 할 테니 말야.
그 문제가 많이 걱정됐는데 이제야 속이 후련하네.
참. 근데 어쩌지?
걘 칼라바지도 싫어하던데.
박군: 그, 그래?
이대리: 암튼 잘 해봐.
또 충격 먹고 왕따 만들면 그 땐 식칼 들고 달려올 거다!
박군: 이거 무서워서 살겠냐.
근데 걱정은 하지 마라.
이번엔 차여도 지금처럼 유치한 짓은 안 할 테니.
이대리: 덕분에 맘은 편히 갈 수 있게 됐구나.
하아.. 고맙다.
박군: 넌 멋진 놈이다.
똥고집만 버리면.
이대리: 넌 멋진 남자다.
여자만 못살게 굴지 않으면.
앞으로 약자에겐 약하고 강자에겐 강한 그런 짱이 돼라.
그게 진정한 짱이거든.
박군: 짜식..
이대리: 근데 한 번만 웃어줄 수 있냐?
너 웃는 모습 한 번도 못봤다.
박군: ....
이대리: 억지로 웃기 힘들면 안 웃어도 돼.
녀석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꼬리를 천천히 위로 올렸다.
처음으로 보는 녀석의 밝은 표정이었다.
이대리: 웃는 모습 멋진데 왜 나한텐 인상만 썼냐?
앞으로 웃고 다녀라. 그래야 정미도 좋아할 거다.
박군: 그래. 노력해볼게.
이대리: 참.. 그리고..
김군이랑 최군 만나면 전해 줘.
담에 만나게 되면 악연으로 만나진 말자구.
그럼 이만 갈게..
이렇게 모든 할 말을 마친 난..
녀석의 손을 꼭 쥐고 있던 손을 풀어 등을 돌렸다.
그러자 녀석이 날 멈춰 세웠다.
박군: 잠깐만.
나도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어.
이대리: ...
박군: 넌 나한테 지지 않았어.
그 날, 너가 이긴 거야.
그냥..
이 말을 해주고 싶다.
녀석의 말에 난 고개를 돌려 씁쓸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박재석.
너 정말 멋진 구석이 있어.
근데, 지금 너가 한 말은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그 땐 절대 지지 않았다고 우기고 싶었지만 오늘 너 모습 보니까
내가 진 거 맞아. 너가 이긴 거야.
난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계단을 쓸쓸히 내려갔다.
그런데 왜 자꾸만 눈물이 글썽이는 걸까.
또다시 새로운 곳으로 가 인사를 하고, 이름을 알리고, 자리를 배정받고
친구들을 사귀어야 하는 그런 절차들이 두려워서 일까.
아니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던 한 녀석과 헤어지는게
아쉬워서 일까.
씁쓸한 맘으로 1층 교무실에서 기다리던 엄마와 함께 텅빈 운동장을
뚜벅뚜벅 걸었다.
그렇게 교문 앞까지 걷게 되자, 갑자기 그리운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그리움에 못이겨 잠시 걸음을 멈추게 되었고 뒤를 돌아 학교 건물을
올려다 봐야만 했다.
고요한 정적이 학교를 감싸는 가운데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한산한 분위기였다.
혹시나 그녀가 창가에서 내 마지막 가는 모습을 봐주길 기대했던 것일까.
아쉬움을 품은 채 그녀의 교실 창가를 지긋이 올려다 보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마지막 하고 싶은 말들을 속으로 속삭였다.
정미야..
내가 전에 말했었지?
전학 가는게 세상에서 가장 싫다고.
왜 그런지 말해 줄까?
혹시, 전학 간 아이의 빈자리를 느껴본 적 있어?
그 친구가 있을 땐 그의 소중함이라던가 존재감을
못 느끼다가 막상 어느 날 부터 보이지 않고 그 아이의
자리가 비어있는 걸 보고는 뭔가 모르게 허전함을 느껴 본 적.
그래서 자꾸만 그 아이의 빈자리를 쳐다보게 되고 어떨 땐
그 아이와의 추억을 떠올려보게 되는 것 말야.
아마 한 번 쯤은 있었겠지?
근데 그게 왜 그런지 알아?
마음의 한 자리가 비어서 그런 거야.
그 친구에게 줄 마음이 한 구석에 나도 모르게 존재했던 건데
어느 날 그 친구가 없어졌으니 그 마음 한 구석도 자신의 역할을
잃고서 허전해 하는 거지.
근데 전학생의 기분은 어떤지 알아?
그 마음의 빈자리가 몇 십개, 아니 몇 백개가 생겨.
많은 학생들에게 줄 마음이 내 가슴 구석 구석에 꼭꼭 들어차
있었는데.. 그 마음들이 어느 한 순간 갈 길을 잃어버리니까 말야.
그래서 난 전학을 갈 때마다 마음이 너무 착잡해.
아무래도 뭔가 허전하고 아쉽고 외로워서 겠지.
후우.. 이제 난 또다시 얼굴이 틀리고 성격이 틀린 아이들과 앉아 수업을
받고 얘기를 나누려 하고 같이 밥을 먹으려 하겠지.
사실 좀 두려워.
모두들 서로 친하고 하나인 것 같은데..
나만 혼자인 것 같거든.
낯선 곳에서 친구마저 없다는건 정말 견디기 힘든 시련이야.
그래서 난 혼자 왔다 혼자 떠나는 그 전학생이 싫은 거야.
그런데 이번 전학은 더욱 아쉽네.
그동안 내게 좋은 친구가 되어준 너와 헤어지게 돼서 그런가봐.
정말 좋은 친구였는데 말야..
아쉽다. 같이 졸업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아쉬움은 버리고 내 가슴속에 널 간직하고 갈게.
그리고 항상 너와 함께 있다는 생각으로 어디서든지 힘낼게.
너도 그러리라 믿어.
근데 이거 좋은 얼굴로 멋지게 못 떠나고 이렇게 망가진 얼굴에
쫓겨나다시피 떠나게 되어 너무 부끄럽네.
그래도 내 마지막 가는 모습은 멋지게 봐 줄 거지?
참..
박재석, 그 자식 정말 멋진 녀석이더라.
좀 사나운 면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인정미 넘치는 녀석이야.
내 빈자리를 그 녀석이 채워줬으면 좋겠어.
둘이 꼭 잘 되길 바래.
하아.. 나 이제 가봐야겠다.
엄마가 기다리시거든.
정미야.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하나만 더 하고 갈게.
나 전학가게 된 거 절대 너 때문이 아냐.
내 가슴속에 자리잡은 우정이란 녀석 때문에 가게 되는 거야.
그 녀석 가치 있는 녀석이기 때문에 나 아무런 후회도 하지 않아.
그러니 내게 미안한 맘은 절대 갖지 말고 울지도 않았으면 해.
나 울보 정말 싫어하거든. 전학 다음으로 싫어하는 게 바로 울보야.
그러니까 그럴 수 있지? 약속하는 거다?
이젠 정말 가봐야겠다.
잘 지내길 바라고 가끔 힘든 일이 있을 땐 우리 반으로 찾아와.
책상은 비어있지만 내 마음 하나는 거기에 두고 왔으니.
우정이란 녀석을..
씁쓸한 맘을 떨치고 기다리고 있던 엄마 차에 올라탔다.
곧, 차창으론 학교 풍경이 먼지처럼 사라졌고
차는 새로운 학교로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렸다.
엄마: 아까 교무실에 있을 때, 어떤 여자 아이가 와서
주고 간 거야. 읽어봐.
말없이 운전을 하던 엄마가 편지를 꺼내들며 조용히 말했고
공책을 찢어서 만든 듯한 그 편지를 받아 펼쳐보았다.
편지 상단에 적힌...
"TO. 내 소중한 친구"
라는 글씨만 보고도 이것이 누가 쓴 글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편지를 쓰며 또 울었던 것인가.
여기저기 눈물로 번진 듯한 글씨들이 눈에 띄었다.
난 그 얼룩진 글들을 한 줄 한 줄 천천히 읽어내려갔고
내 눈에선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눈물은 희미하게 얼룩진 글을 더욱 희미하게 만들어갔다.
TO. 내 소중한 친구
우선 정말 미안하단 말 밖에 할 말이 없어.
내가 그 날 편지만 보내지 않았어도
너와 난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을 테고
이렇게 전학가게 될 이유도 없었을 테니 말야.
넌, 또 나 때문이 아니라며 미소 짓겠지?
그런데 난, 바보 멍청이가 아냐.
너가 몸이 망가진 것도 이렇게 전학가게 된 것도
모두 나 때문이란 거 다 알아.
그런 내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나고 속상해.
그래서 너 붙잡고 울게 될까봐 너 가는 모습은 못 볼 것 같애.
이런 내 맘 이해해줄 수 있지?
대리야.
그동안 내게 큰 힘이 돼줘서 정말 고마워.
엎어진 날 일으켜준다고 상처가 아무는 건 아니지만
흙을 깨끗이 털어준 네가 너무 고마워.
난 너한테 미안하단 말과 고맙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네.
나.. 바보같지?
우리..
이제 서로 살아가는 하늘은 다르겠지만..
친구의 이름으로 항상 추억을 함께 하자.
잠시의 행복이나 웃음보다는 가슴깊이 남을 수 있는
인상을 준 넌..
내 소중한 친구거든.
오늘도 내일도 내 소중한 친구..
우리 친구니까 나중에 또 만날 수 있는 거겠지?
다시 만나게 되면 우리 더 좋은 추억 많이 만들자.
그리고 기쁨은 두 배로, 슬픔은 반으로 줄일 수
있는 친구로 영원히 존재하자.
어때? 좋은 생각이지?
나 이제 외롭지 않을 자신 있으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전학 가서 공부 열심히 하고 잘 지내.
어리석게 또 다시 친구로 인해 희생당하지 말고.
이건 내 간절한 바램이야.
너 괴로워하는 모습 정말 보기 싫거든.
아, 참..
너에게 거짓말 했던 게 하나 있어.
더이상 그 거짓말이 필요없게 됐으니 말해줄게.
나 원래 칼라바지 좋아해.
너가 걱정돼서 잠깐 거짓말 했던 거 뿐야.
너 파란색 바지가 젤 멋지던데.
딱 내 스타일이었어. ^^
이제 아쉽지만 수업 준비해야 돼서 그만 줄여야겠다.
이 편지 오래오래 간직하면서 내 기억 해주길 바라고
앞으로 생활하게 될 학교에서 잘 지내길 바랄게.
내게 보여준 모습처럼 항상 용기있는 모습으로..
나 또한 그럴 테니.
그럼 이만...
-너의 소중한 친구 정미가-
이성이든 동성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게 힘이 되어 줄 수 있고,
내가 기댈 수 있는 다른 한 사람이 있다는 것.
바로 그런 친구가 내 곁에,
내 마음 속에 존재한다는 것.
그것만으로 내 앞길은 힘이 넘칩니다.
- 끝 -
* 10년 전 일이라..
가물가물한 기억을 끄집어내 쓰긴했는데..
쓰다보니 과장도 많이 되고 꼭 소설처럼 진행이 되네요. --;
아무튼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 감사하고요.
이 기나긴 글을 쓴 저도 고생했지만..
읽어주신 여러분들도 고생하셨습니다.
모두 감사합니다.
writen by 이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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