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높은 상석에는, 하북팽가의 가주 팽용화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노기를 띤 얼굴의 노부가, 꼿꼿하게 서서 마주앉은 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쪼르르-
그들 사이에 서서, 찻잔에 차를 따라 붓고 있는 시비의 팔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윽한 감로향이 뿌연 증기를 피워 올렸다.
시비는 흘깃 가주님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세 명의 사내를 빠르게 훔쳐보았다. 가운데 앉은 이가 서문탁 나리였고, 그의 양옆으로 공동파에서 온 두 명의 손님이 앉아 있었다. 오른쪽에 앉은 이는 몹시 인상이 차가웠으며, 짙은 흑의를 걸치고 있어 더욱 두려워 보였다. 반대쪽에는 뚱뚱하고 거만해 보이는 사내가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들의 가주님을 노려보고 있었다.
“영홍이는 차를 다 준비하였으면, 그만 나가 보아라.”
영홍이라 불린 아이는 양쪽에서 풍기는 날카로운 기운에 잔뜩 얼어있던 중이었다. 가주의 반가운 부름에 흠칫 놀란 몸을 움찔하고는, 재빨리 종종걸음으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일단은 이렇게 찾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가주 팽용화는 담담한 어조로 두 명의 손님을 향해 말했다. 그와 동시에, 서문탁의 넷째 사형이 불룩한 볼을 실룩이며 투덜거렸다.
“암! 감사해야지! 아우의 전각을 그리 찾기도 힘든 곳에 박아두다니. 찾느라 한참을 걸렸으니……. 제길.”
“더러운 해충은 제 숨을 곳을 찾아 깊숙이 파고드는 법이지.”
순간 사내의 투덜거림을 알아들은 노부가 사나운 눈으로 노려보며 작게 대꾸했다.
“뭐라고? 저 늙은이가?!”
“뭬야?? 늙은 이? 이놈들이 정녕!”
“조용히 해라. 넷째야!”
“숙부님!”
팽가주의 외침으로, 일단 노부는 입을 다물고, 더욱 매서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또한 서문탁의 넷째 사형역시, 노려보는 큰 사형의 살벌한 눈빛에 기가 죽어 고개를 옆으로 홱 꺾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서문탁은, 고개를 숙인채로 비릿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더러운 해충이라……! 크크’
흑의를 걸친 사내가 얼어있는 장내를 깨뜨리며 말문을 열었다.
“가주의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사부님을 대신하여 제가 찾아뵙습니다.”
“감사합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아니지요. 오랜만에 막내아우의 얼굴도 볼 겸하여, 겸사겸사 들렀습니다.”
“두 해 만이시지요? 그동안 격조하셨습니다.”
“하북성의 분위기나 기세가 두 해 전과는 판이하군요. 놀라운 성장입니다. 이제 어엿하게 오대세가중 남궁가를 이어 두 번째 입지라고 들었습니다. 오는 길 내내 가주의 능력에 감탄을 거듭했지요.”
“과찬이십니다. 공동파야 말로 이번에 신기(神技)를 완성했다고 들었습니다만?”
“하하하. 가주의 정보능력이야말로 더욱 대단 하십니다. 사부님께서 구성의 성취를 이루셨지요.”
“축하드릴 일이군요.”
“그나저나 실례를 범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하북성에 발을 들일 때, 가주를 먼저 뵙는 것이 예의이나, 사제를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도 큰 바람에.”
말을 잇던 흑의를 걸친 사내는, 옆에 앉은 서문탁의 등을 탁탁 두드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노부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혼자말로 투덜거렸다.
“능구렁이 담 넘어가는 수작이군.”
그 소리를 들은 가주의 얼굴은 납빛으로 바뀌며, 급히 보이지 않게 손을 뻗어 노부를 제지했다. 공동파의 손님들도 그 소리를 들었을 테지만, 그들은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서문탁의 넷째 사형이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허나 가주님, 너무 정사에만 전념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어찌 저희 아우를 찬밥 버려두듯 하신 겁니까? 이렇게 하시면 곤란합니다. 저희들로써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요.”
“어허, 넷째야.”
“아니, 사형. 말은 바로 하라고했습니다. 어찌하여 아우를 이리 푸대접 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팽가가 우리 공동파를 고작 이리 생각한다는 겝니까?”
“말 한번 잘 꺼냈구나! 어찌하여 네놈은 그리 안하무인이라는 말이냐! 네 놈 눈에 비치는 팽가는 고작 공동파 가랑이 아래란 말이로구나! 어찌 가주 앞에서 이리 불손한 태도인가! 사제 놈들이 끼리끼리 다 똑같구나. 그 스승은 보지 않아도 뻔하다.”
“이런 노망난 늙은이! 감히 스승님을!”
서문탁의 넷째 사형이 발끈하여 찻잔이 놓인 탁자를 쾅 치며 일어섰다.
그 바람에 다기들이 우수수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순간! 짐짓 상황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던 팽용화는 굳은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내내 숙이고 있던 서문탁의 고개가 들려진 것도 바로 같은 순간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도자기들이 깨어지는 날카로운 비명을 예상한 팽가주는 질끈 눈을 감았다.
칼날 같이 날카로운 상황이 절정에 이르리라!
조용-
허나 그녀의 예상과는 어긋나게, 집무실 내에는 조용한 정적만이 흘렀을 뿐이다!
그녀는 의외의 사태에 놀라, 궁금증이 가득한 눈을 뜨고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분명히 잔들은 아무런 미동도 없이 조용히 탁자위에 놓여져 있었다. 처음 모습 그대로.
오직 찰랑이는 찻물만이 움직임의 여운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또한 곁에선 노부도 딱 버러진 입을 다물지 못하며 멍하니 다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동파의 손님들도 황당한 눈으로 다기와 서문탁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낭군인 서문탁은 그저 고개를 뻣뻣이 든 채로 자신과 숙부를 응시하고 있었다. 찰라 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게지?
「숙부? 어찌된 일이에요?」
답답한 눈을 들어 팽용화는 다급한 마음에 자신의 숙부에게 전음을 보냈다. 노부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막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려할 때였다.
“하하하……. 아마도 팽가주님께서 일취월장(日就月將)한 우리 막내를 어여삐 여기시어 꼭꼭 숨겨두신 모양이시구나. 넷째야.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자꾸나.”
“.......”
노련한 큰 사형은 상황을 얼버무리며 웃음으로 마무리 지으려했다.
그때 처음으로 서문탁이 입을 열었다. 그는 두 어깨를 으쓱이며, 팽가주를 향해 돌아섰다.
“안사치레는 이만하면 되었으니. 부인, 사형들이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셨으니 이만 모시고 가도록 하겠소.”
“아... 네에. 서방님. 그러하시지요. 이미 손님들의 전각을 준비해 두라 일렀습니다.”
“아니오, 간만의 회포도 풀 겸, 나의 전각에서 당분간 같이 머무르실 것이요. 사형들 그리하시겠지요?”
“.......그, 그리하지.”
말을 마친 서문탁, 그는 노부의 노안을 똑바로 응시했다.
순간 노인의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지극히 순간이었지만, 심장이 오그라들 듯한 눈빛이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눈동자로 매섭게 노부를 노려보며, 서문탁은 차갑게 내뱉었다.
“숙부님께도 아침부터 함께 하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허나, 앞으로 제 사부님을 들먹이실 때에는 다시 한번 더 신중히 생각을 하셔야 할 겁니다.”
“이, 이놈이?”
“서방님!”
“이빨 빠진 늙은 호랑이는 가죽 벗겨질 날만 기다리고 있는 셈이지요.”
“뭐, 뭐라!!”
허나 터지는 노성과는 달리, 노부도 팽가주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그가 내뿜는 기도가 평소와는 달리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문탁의 가죽을 뒤집어 쓴 다른 인물을 대하는 듯 했다. 의문으로 흔들리던 팽가주의 눈은, 잠시 후 쓰디쓴 빛으로 착 가라앉았다.
'결국 그리 된 것인가......?’
서문탁, 그의 두 눈에서는 까마득한 어둠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잔뜩 웅크리며 몸을 숨기고 있던, 고약한 고양이가 기지개를 펴듯이.
사이한 기운을 내뿜으며 턱을 찡그리던 서문탁은 마지막 말을 마저 내뱉었다.
“더러운 해충은 그만 제 집을 찾아 갑니다! 하하하”
그는 황망한 표정의 가주와 분노로 부들거리는 노부를 슬쩍 흘겨보았을 뿐이다. 그리고는 유유히 집무실을 가로질러, 문을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어제까지만 해도 고양이 앞의 쥐처럼 벌벌 떨던 그가 아닌가!
노부의 표정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심하게 구겨졌다. 흰 눈썹이 떨리고 있었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말이련다! 놈!!’
어리둥절하기는 공동파의 사형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둘러 그를 쫒아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허나 그들은 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큰 사형은 방금 전 그가 보여준 무위로 인해 머릿속이 어지러운 상태였다. 그의 넷째 사형은 ‘그럼, 그렇지!’ 하는 오만한 표정으로 장내를 휘둘러 본 다음, 비웃음을 흘리며 방을 나섰다.
망연히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가주는 그만 털썩하고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노부가 떨리는 눈길로 찻잔을 응시하며 조카를 향해 중얼거렸다.
“나는 그놈의 출수를 보지 못했다…….”
“무슨......?”
“묻지 않았느냐? 다섯 개의 찻잔이 허공에서 방향을 잃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네가 잠시 눈을 감은 사이 보지 못했듯이, 찰나였지.”
말을 마친 노인은 왼손으로 힘껏 탁자를 후려쳤다.
탁-
순간 절그렁거리는 찻잔 다섯 개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다섯 개의 방향으로 각각 치솟은 찻잔은 찰랑이는 찻물을 쏟아 붓기 직전이었다.
“이얍!”
노인의 위력적인 일갈과 함께, 곁에선 가주의 머리칼이 그가 일으킨 도풍(刀風)에 흩날렸다.
빠르게 도(刀)를 뽑아든 노부는, 찻잔들이 춤추는 허공을 향해 도를 뻗었다.
일단 곧게 일직선으로 뻗어 눈앞의 잔을 하나 받아 들었다.
‘하나!’
그리고 유연하게 허리를 꺾으며 도로(刀路)를 수직으로 꺾었다. 찰랑이는 찻잔이 무사히 도위에 안착했다.
‘둘!’
곧바로 그는 눈부신 속도로 수평으로 도를 찔렀다. 척! 하니 세 번째 찻잔을 도위에 앉혔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도를 급히 떨어뜨리며 네 번째 잔까지 무사히 받아냈다. 노부의 이마에 송골 땀 한 방울이 맺혔다.
‘셋! 그리고 북쪽으로 넷!’
마지막으로 노부는 눈빛을 빛내며 그의 도를 한바퀴 회전시켰다.
부웅-
도가 허공을 가르며 울었다. 허나 그의 도가 한발 늦었다.
쨍그랑-
마지막 잔은 미처 그의 도위에 얹히지 못하고 탁자위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카의 눈에는 감탄과 함께 의문이 가득 실렸다. 노부의 담담한 음성이 이어졌다.
“그놈은 그 순간 다섯을 모두 받아 내었다.”
“아아........!”
“나란 놈은 넷이 한계다. 순식간이었지. 내, 똑똑히 보았다. 그 놈의 소매 부근에서 검은 안개 같은 기운, 다섯 줄기가 쏘아져 나왔어. 그리고 채찍처럼 잔들을 휘감아 바닥에 내려놓고는 거짓말같이 손바닥 아래로 사라졌어!”
“.......!”
팽용화는 말을 잇지 못하고 표정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노부는 침울하게 덧붙였다.
“게다가 날 노려보던 그놈의 눈은!! 용화야. 보통일이 아니다. 그건, 그, 그건 정도(正道)가 아니야. 분명히 요사한 사기(邪氣)였어!”
노부의 마지막 말을 들은 용화는 앉은 채로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잡았다. 머리가 몹시 아파오는 듯, 연신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힘들게 입을 열었다.
“말씀 드려야 할 것 같군요. 숙부”
“오냐, 그래 말해보아! 네가 모를 일이 아니지! 무슨 일이 분명히 있는 게지?”
“먼저 당부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 분은 제 낭군이십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내일도 역시 마찬가지일 꺼 에요.”
“에잉! 쯧쯧.”
노부는 찡그리며 절래절래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조카의 말을 기다렸다.
“지금 하북성은 내부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어요. 그 중심이 서문탁 그의 전각입니다.”
아까까지와는 다르게 엄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 팽용화!
그녀는 은밀한 목소리로 한 시녀를 불렀다. 그녀의 부름에 답한 시녀는, 거짓말처럼 가주가 앉은 좌석 아래에 위치한 벽을 뚫고 집무실로 걸어 나왔다. 아마도 비밀 공간이 있으며 그 출입문이 가주가 앉은 비교적 높은 단상의 아래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너는 지금까지 네가 보고 들은 것들을, 숨김없이 노부께 말씀드리도록 해라.”
“예, 가주님!”
하녀는 그때부터 자신이 지금까지 보아 온 것들을 낱낱이 두 주군에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노부의 표정은 사납게 일그러졌으며, 그의 꽉 쥔 두 주먹은 연신 허공을 쳐 댔다. 때론 신음성을 흘리기도 했고, 끔찍함에 몸서리치기도 했다.
말을 잇는 시비는, 얼마 전 묵운과 함께 구석에서 서문탁을 모든 행동을 지켜보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이윽고 여인은 자신이 알아낸 바를 모두 토해낸 후,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거기까지가 마지막입니다. 이틀간 그는 비밀공간에서 두문불출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인근에서 사라진 수태한 여인이 둘.......입니다.”
“이, 이런 쳐 죽일 놈!”
노부는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가주는 조용히 감은 눈을 뜨며 말했다.
“일전에 현판을 하사하신 소림의 고승이 당부하신 말씀이 있으십니다. 아마도 그 분의 말씀대로 결국은 일이 그리 된 듯합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귀(魔鬼)가 날 뛸 때는, 반드시 하늘은 풀자(解子)를 같이 내리신다 하셨지요.”
“크흠....! 허나 이대로 두었다가는!”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숙부님.
더욱이 서방님은 정파의 한 축인 구대문파의 하나인 공동파의 제자이자 팽가의 가주인 저의 낭군이십니다. 자칫 이 일이 공론화 되어 공공의 적(公敵)으로 몰린다면, 지난 이십여 년 간 쌓아 온 것들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르지요.”
“어불성설(語不成說)! 밖의 적을 두려워하여 손놓고 있다가는, 내부가 먼저 썩어 문드러질 것이라는 걸 현명한 네가 왜 생각지 못하는 것이야! 감자에 돋아 난 싹을 그대로 두자는 말이냐! 네가 바라는 바가 무엇이냐! 왜 망설이는 것 이야! 혹여 저 놈을 서방이랍시고 사모하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순간 노부의 말에 무엇이라고 반박하려던 가주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노부는 설마 하던 짐작이 맞는다고 생각되자, 가슴속이 턱하고 막혀 오는 것만 같았다.
“이 일을 어찌할꼬! 이 일을 어찌할꼬!”
노부의 깊은 한탄 소리에 용화의 고개가 더 푹 숙여졌다. 그랬다. 가주이기 이전에 한명의 여자로써 용화는 그를 마음 깊이 사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직한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번민을 거듭했을지 짐작이 되는 노부는 한편으로는 그녀가 가엽기도 했다.
그러나 안 될 말이었다. 일개 여인으로서 조카의 마음은 가련하지만, 하북팽가의 가주로써 그녀는 지금 결코 옳은 처신을 하고 있지 못하다! 노부는 답답한 고개를 돌려 널부러진 찻잔을 바라보았다.
치지지직-
서문탁 그놈이 무슨 요망한 짓을 해 두었는지, 엎어진 찻물이 치직거리며 뇌전의 기운을 발하고 있었다.
‘놈....!!’
그때였다.
슈욱-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반사적으로 노부는 허리를 뒤로 꺾었다.
치지직-
허나 그의 반응이 약간 더 느려, 날카로운 물체는 그의 살을 파고들며 스치고 지나갔다. 불에 덴 듯한 극통이 노부의 왼팔을 휘감았다.
‘헉! 빠르다!!! 피하고자 하면 이미 늦었구나!’
순간적으로 노부는 서문탁을 떠올렸다. 노부는 고통에 찬 노성을 내질렀다.
“이 노옴!! 용서하지 않겠다!”
파앙-
두 번째 화살이 이번에는 가주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가주의 도는 제단 아래에서 약간 떨어진 받침대에 올려져 있었다. 노부는 앞뒤 가릴 것 없이 가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화살을 쳐냈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을 쳐낸 그의 도가 부르르 떨렸다.
‘빠르기뿐만이 아니다! 이 힘은 도대체?!’
그리고 다음 순간 다섯 발의 화살이 정확히 자신과 가주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일촉즉발!
잠시라도 지체한다면 머리통이나 어깨쯤은 간단하게 박살이 날 터였다!
용화는 재빠르게 두 바퀴 몸을 구르며, 제단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가 굴러간 자리 뒤로는 턱! 턱! 하고 두발의 화살이 간발의 차이로 제단에 꼽혔다. 제단은 화살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질 듯 흔들거렸다. 한편 그런 용화의 안전을 확인한 노부도 있는 힘껏 화살을 쳐내었다. 순간의 고비를 넘긴 가주와 노부는 서로의 등을 맞대고 섰다. 용화의 손에도 무사히 그녀의 애도(刀)가 들려있었다.
“누구냐! 감히 팽가의 가주를 암살하려는 자가! 모습을 드러내라!”
용화와 노부는 등을 맞댄 채로 한바퀴 돌며, 시선을 따라 주위를 살폈다. 딱히 기척이 느껴지는 곳은 없었다. 보이지 않는 적이라니! 노부는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저쪽 창가에서 스르륵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놀랍게도 핏빛의 가죽 옷을 차려입은 훤칠한 키의 여인이었다. 그녀의 왼손에는 커다란 활이 들려져 있었다. 차갑게 미소 짓는 전투신(戰鬪伸)!
“옳게 찾아 온 것 같군. 보아하니 당신이 가주인 모양인데…….”
집무실을 굽어보던 여무사는 활로 용화의 머리통을 정확히 겨냥했다. 노부는 흠칫 놀라 조카의 앞을 가리고 섰다. 그 모습을 보고 코웃음 치는 여인.
“서문탁, 그자는 지금 어디에 있지?”
난데없는 여인의 질문에 팽가주와 노부는 얼굴이 굳어 진채로 서로를 응시했다.
* * *
음산한 전각 안으로 발을 들여 놓은 도화는, 흠칫 몸을 떨었다. 시리도록 찬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 것만 같았다. 도화의 뒤에 바짝 붙은 비형랑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참이었다. 잡다한 것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방안은 마치 폐허와도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별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주위에는 더러운 오물과 함께 여인의 속옷이 섞인 옷가지 들이 뒹굴고 있었다. 특히나 비형랑, 그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쓰디쓴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움 스마라 환 옴미나 후옴....”
도화는 입술을 작게 들썩이며 낮은 주문을 읊조렸다. 환(奐)의 술이다. 소년의 몸 안쪽으로부터 야명주와 같은 밝은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주위를 살피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후우. 한결 보기가 편한 걸?”
도화의 어깨를 툭툭 건드린 비형랑이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세우며 싱긋 웃었다. 긴장된 도화의 얼굴에서도 바람 빠진 웃음이 새어나왔다. 철이 없는 것인지, 강심장인 것인지 가슴 떨리는 이 상황에서도, 비형랑은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도화의 피부를 스윽 스윽 문질러 보며 신기한 듯 살펴보는 중이었다. 한숨을 푹 내쉰 도화는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딱 멈추어 섰다.
“왜? 무슨 일이야!”
덩달아 멈추어 선 비형랑도, 화들짝 놀라 몸을 낮게 숙이며 도화를 향해 작게 물었다.
그의 오른 손은 이미 검을 쥐어들 만발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가만! 형, 지금 이 전각은 비어있어. 생명체의 살아있는 기(氣)는 오직 우리 둘이야! 허나 방금 전까지 이곳에 셋의 기운이……. 아니, 아니야. 둘은 확실한데, 하나는!”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설명해봐!”
“하나는 살아있는 기가 아니야……. 마치, 죽음의 기운과 섞인 듯한, 헉! 저건 뭐야!”
어둠 속을 더듬으며 말을 잇던 도화는, 으슥한 구석에 시선을 붙박았다. 소년의 곁에 바짝 붙어있던 흰둥이도 낮게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비형랑도 자연스레 도화의 시선이 멈춘 곳을 내려다보았다. 순간 그는 어제 아침에 먹은 소면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동물들의 난자당한 사체가 어지럽게 구석에서 뒹굴고 있었다. 썩어가며 풍기는 끔찍한 악취가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역겨운 광경을 보다 못한 비형랑이 도화의 팔을 잡아끌었다. 허나 소년의 두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내려다보더니 힘겹게 말문을 연 도화.
“미안해……. 하지만, 네 기억을 조금만 빌릴게.”
소년의 눈은 축축하게 젖어들기 시작했다.
“옴 스마라 스마라 미마나 사라 마하 자가라바 훔!”
소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주문을 외웠다. 도화의 몸이 기이한 보랏빛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비형랑은 숨죽여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동시에 그는 기운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주변의 인기척에 더욱 주의를 기울였다. 도화의 몸에서 작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기운은,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꿈틀꿈틀-
보랏빛 지렁이는 순식간에 동물들의 사체를 확 휘감았다. 그 순간!
도화의 발 앞에서 짓이겨져 있던 물컹한 물체가, 시간을 거꾸로 돌리듯 원형을 갖추어갔다.
흐물흐물한 새의 눈알.
푸르르 떨리던 핏빛의 눈알은 꿈지럭거리던 새의 머리통에 다시금 쑤욱 박혔다.
「찌르르- 찌르르-」
죽은 새의 미간에서 뿌연 안개 같은 것이 새어나왔다. 뿌연 안개는 흐릿한 영상을 만들어 내어 도화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한 남자였다. 잔인한 악마! 그는 장난스럽게 짐승들을 터트려 죽이고 있었다. 서슴지 않고 서너 마리의 동물들을 더 잔인하게 유린했다. 그리고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저쪽 모퉁이의 서재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은 기운은 없는지, 영상은 거기서 끊겼다. 죽음에 다다른 마지막 순간, 작은 새의 음성이 고통으로 구슬프게 흐느끼고 있었다. 도화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는, 백골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불쌍한 새에게도 편안한 안식을 주었다.
“미안해. 고통스러운 기억이었을 텐데. 다 잊고 좋은 곳으로 가거라.
옴 아마라 검제이니 후옴”
일어난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모퉁이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흰둥이는 소년의 곁에 바싹 붙어서 따랐다. 소년이 향하고 있는 목적지로 다가갈수록, 야호는 영물의 본성으로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다. 흰둥이의 은빛 털이 날카롭게 섰다. 코를 쥔 채의 비형랑도 말없이 도화를 따라 급히 걸었다.
그는 뒤에서 따라가느라 소년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왠지 녀석의 뒷모습은 화가 난 듯해 보이기도 했고, 슬퍼 보이기도 했다. 모퉁이를 돌아선 도화는 잠시 사방을 노려보며 기의 흐름을 감지했다. 곁에선 비형랑도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워 책의 종류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잘 꾸며진 서재였다.
“이깟 눈속임으로, 소마신의 자유로운 눈을 속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지!”
도화는 낮게 중얼거렸다.
장백산 천외봉의 절진(切診)속에서 성장한 도화에게, 이정도 공간의 눈속임은 어린아이 장난이었다. 그리고는 서슴없이 낡은 책장을 더듬어 한권의 책을 빼들었다. 도화는 정확하게 공간의 어그러짐을 짚어내고, 그 열쇠가 되는 책을 돌려 누였다.
다음순간, 놀랍게도 책장으로 보였던 곳의 입구가 빙그르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꺼먼 동굴은 끝이 없는 아가리를 드러냈다.
쏴아아-
순간 도화는 숨이 탁하고 막혔다.
해일처럼 밀려드는 엄청난 음기였다!
몸 안으로 밀려드는 너무나도 거대한 기운에, 잠시 동안 도화는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뒤적뒤적 품안을 뒤지더니, 누런 부적 두장을 꺼내어 들었다. 소년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비록 도화처럼 예민하게 기를 느끼지는 못했지만, 비형랑 역시 밀려드는 음기에 기겁을 하기 직전이었다.
“신(神) 아그니는 태양의 양기다. 보호하라! 갈!”
도화의 외침과 동시에 두장의 부적은 각기 다르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한 장은 도화자신의 머리위에서 둥둥 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비형랑을 향해 날아갔다. 소년의 손바닥에서 떠난 부적은 비형랑의 정수리 앞까지 날아가서 딱 멈추었다.
그리고는 확! 하고 타오르더니 허공에서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비형랑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보호막이 자신을 감싸고 있는 듯, 한결 숨쉬기도 편해지고, 걸어 다닐 만 했다.
“아그니...신이라!”
비형랑은 음기의 폭풍 속에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보고 머리를 털어 보기도 했다. 순식간에 타버린 아까의 부적은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리둥절해하는 비형랑을 보며 도화는 계속해서 아리송한 말을 중얼거렸다. 동시에 동굴을 향해서 고개를 돌리고는, 어둠 저 너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형!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야. 자신의 오감을 맹신하지 마.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은 눈에 보이지 않을 테니. 지금부터는 ……. 아마 형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적을 상대해야 해! 여섯번째 감각을 믿어봐.”
“……!”
도화는 큰 숨을 쉬며 비형랑을 보았다. 그의 머리위에는 방금 자신이 불러낸 아그니의 눈이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마 자신의 머리위에서도 타오르고 있을 테지.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도화는 어둠 속으로 서슴없이 걸어 들어갔다. 그 뒤를 흰둥이와 비형랑이 조심스럽게 따랐다.
잠시 뒤.
묵운을 삼켰듯 또 다시 도화와 비형랑을 삼킨 입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침을 때며 다시금 책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도화』 (29)
-나를 부르는 소리(6)-
한편 팽가주의 집무실에서는, 긴장된 다섯 개의 눈이 팽팽하게 서로를 견주고 있었다.
약간 높은 상석에는, 하북팽가의 가주 팽용화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노기를 띤 얼굴의 노부가, 꼿꼿하게 서서 마주앉은 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쪼르르-
그들 사이에 서서, 찻잔에 차를 따라 붓고 있는 시비의 팔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윽한 감로향이 뿌연 증기를 피워 올렸다.
시비는 흘깃 가주님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세 명의 사내를 빠르게 훔쳐보았다. 가운데 앉은 이가 서문탁 나리였고, 그의 양옆으로 공동파에서 온 두 명의 손님이 앉아 있었다. 오른쪽에 앉은 이는 몹시 인상이 차가웠으며, 짙은 흑의를 걸치고 있어 더욱 두려워 보였다. 반대쪽에는 뚱뚱하고 거만해 보이는 사내가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들의 가주님을 노려보고 있었다.
“영홍이는 차를 다 준비하였으면, 그만 나가 보아라.”
영홍이라 불린 아이는 양쪽에서 풍기는 날카로운 기운에 잔뜩 얼어있던 중이었다. 가주의 반가운 부름에 흠칫 놀란 몸을 움찔하고는, 재빨리 종종걸음으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일단은 이렇게 찾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가주 팽용화는 담담한 어조로 두 명의 손님을 향해 말했다. 그와 동시에, 서문탁의 넷째 사형이 불룩한 볼을 실룩이며 투덜거렸다.
“암! 감사해야지! 아우의 전각을 그리 찾기도 힘든 곳에 박아두다니. 찾느라 한참을 걸렸으니……. 제길.”
“더러운 해충은 제 숨을 곳을 찾아 깊숙이 파고드는 법이지.”
순간 사내의 투덜거림을 알아들은 노부가 사나운 눈으로 노려보며 작게 대꾸했다.
“뭐라고? 저 늙은이가?!”
“뭬야?? 늙은 이? 이놈들이 정녕!”
“조용히 해라. 넷째야!”
“숙부님!”
팽가주의 외침으로, 일단 노부는 입을 다물고, 더욱 매서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어 나올 것만 같았다. 또한 서문탁의 넷째 사형역시, 노려보는 큰 사형의 살벌한 눈빛에 기가 죽어 고개를 옆으로 홱 꺾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서문탁은, 고개를 숙인채로 비릿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더러운 해충이라……! 크크’
흑의를 걸친 사내가 얼어있는 장내를 깨뜨리며 말문을 열었다.
“가주의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사부님을 대신하여 제가 찾아뵙습니다.”
“감사합니다.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아니지요. 오랜만에 막내아우의 얼굴도 볼 겸하여, 겸사겸사 들렀습니다.”
“두 해 만이시지요? 그동안 격조하셨습니다.”
“하북성의 분위기나 기세가 두 해 전과는 판이하군요. 놀라운 성장입니다. 이제 어엿하게 오대세가중 남궁가를 이어 두 번째 입지라고 들었습니다. 오는 길 내내 가주의 능력에 감탄을 거듭했지요.”
“과찬이십니다. 공동파야 말로 이번에 신기(神技)를 완성했다고 들었습니다만?”
“하하하. 가주의 정보능력이야말로 더욱 대단 하십니다. 사부님께서 구성의 성취를 이루셨지요.”
“축하드릴 일이군요.”
“그나저나 실례를 범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하북성에 발을 들일 때, 가주를 먼저 뵙는 것이 예의이나, 사제를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도 큰 바람에.”
말을 잇던 흑의를 걸친 사내는, 옆에 앉은 서문탁의 등을 탁탁 두드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노부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혼자말로 투덜거렸다.
“능구렁이 담 넘어가는 수작이군.”
그 소리를 들은 가주의 얼굴은 납빛으로 바뀌며, 급히 보이지 않게 손을 뻗어 노부를 제지했다. 공동파의 손님들도 그 소리를 들었을 테지만, 그들은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서문탁의 넷째 사형이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허나 가주님, 너무 정사에만 전념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어찌 저희 아우를 찬밥 버려두듯 하신 겁니까? 이렇게 하시면 곤란합니다. 저희들로써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요.”
“어허, 넷째야.”
“아니, 사형. 말은 바로 하라고했습니다. 어찌하여 아우를 이리 푸대접 하신다는 말씀이십니까? 팽가가 우리 공동파를 고작 이리 생각한다는 겝니까?”
“말 한번 잘 꺼냈구나! 어찌하여 네놈은 그리 안하무인이라는 말이냐! 네 놈 눈에 비치는 팽가는 고작 공동파 가랑이 아래란 말이로구나! 어찌 가주 앞에서 이리 불손한 태도인가! 사제 놈들이 끼리끼리 다 똑같구나. 그 스승은 보지 않아도 뻔하다.”
“이런 노망난 늙은이! 감히 스승님을!”
서문탁의 넷째 사형이 발끈하여 찻잔이 놓인 탁자를 쾅 치며 일어섰다.
그 바람에 다기들이 우수수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순간! 짐짓 상황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던 팽용화는 굳은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내내 숙이고 있던 서문탁의 고개가 들려진 것도 바로 같은 순간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도자기들이 깨어지는 날카로운 비명을 예상한 팽가주는 질끈 눈을 감았다.
칼날 같이 날카로운 상황이 절정에 이르리라!
조용-
허나 그녀의 예상과는 어긋나게, 집무실 내에는 조용한 정적만이 흘렀을 뿐이다!
그녀는 의외의 사태에 놀라, 궁금증이 가득한 눈을 뜨고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분명히 잔들은 아무런 미동도 없이 조용히 탁자위에 놓여져 있었다. 처음 모습 그대로.
오직 찰랑이는 찻물만이 움직임의 여운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또한 곁에선 노부도 딱 버러진 입을 다물지 못하며 멍하니 다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동파의 손님들도 황당한 눈으로 다기와 서문탁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낭군인 서문탁은 그저 고개를 뻣뻣이 든 채로 자신과 숙부를 응시하고 있었다. 찰라 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게지?
「숙부? 어찌된 일이에요?」
답답한 눈을 들어 팽용화는 다급한 마음에 자신의 숙부에게 전음을 보냈다. 노부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그녀에게 막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려할 때였다.
“하하하……. 아마도 팽가주님께서 일취월장(日就月將)한 우리 막내를 어여삐 여기시어 꼭꼭 숨겨두신 모양이시구나. 넷째야.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 하자꾸나.”
“.......”
노련한 큰 사형은 상황을 얼버무리며 웃음으로 마무리 지으려했다.
그때 처음으로 서문탁이 입을 열었다. 그는 두 어깨를 으쓱이며, 팽가주를 향해 돌아섰다.
“안사치레는 이만하면 되었으니. 부인, 사형들이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셨으니 이만 모시고 가도록 하겠소.”
“아... 네에. 서방님. 그러하시지요. 이미 손님들의 전각을 준비해 두라 일렀습니다.”
“아니오, 간만의 회포도 풀 겸, 나의 전각에서 당분간 같이 머무르실 것이요. 사형들 그리하시겠지요?”
“.......그, 그리하지.”
말을 마친 서문탁, 그는 노부의 노안을 똑바로 응시했다.
순간 노인의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지극히 순간이었지만, 심장이 오그라들 듯한 눈빛이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눈동자로 매섭게 노부를 노려보며, 서문탁은 차갑게 내뱉었다.
“숙부님께도 아침부터 함께 하지 못한 점 사과드립니다. 허나, 앞으로 제 사부님을 들먹이실 때에는 다시 한번 더 신중히 생각을 하셔야 할 겁니다.”
“이, 이놈이?”
“서방님!”
“이빨 빠진 늙은 호랑이는 가죽 벗겨질 날만 기다리고 있는 셈이지요.”
“뭐, 뭐라!!”
허나 터지는 노성과는 달리, 노부도 팽가주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그가 내뿜는 기도가 평소와는 달리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문탁의 가죽을 뒤집어 쓴 다른 인물을 대하는 듯 했다. 의문으로 흔들리던 팽가주의 눈은, 잠시 후 쓰디쓴 빛으로 착 가라앉았다.
'결국 그리 된 것인가......?’
서문탁, 그의 두 눈에서는 까마득한 어둠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잔뜩 웅크리며 몸을 숨기고 있던, 고약한 고양이가 기지개를 펴듯이.
사이한 기운을 내뿜으며 턱을 찡그리던 서문탁은 마지막 말을 마저 내뱉었다.
“더러운 해충은 그만 제 집을 찾아 갑니다! 하하하”
그는 황망한 표정의 가주와 분노로 부들거리는 노부를 슬쩍 흘겨보았을 뿐이다. 그리고는 유유히 집무실을 가로질러, 문을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어제까지만 해도 고양이 앞의 쥐처럼 벌벌 떨던 그가 아닌가!
노부의 표정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심하게 구겨졌다. 흰 눈썹이 떨리고 있었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말이련다! 놈!!’
어리둥절하기는 공동파의 사형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둘러 그를 쫒아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허나 그들은 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큰 사형은 방금 전 그가 보여준 무위로 인해 머릿속이 어지러운 상태였다. 그의 넷째 사형은 ‘그럼, 그렇지!’ 하는 오만한 표정으로 장내를 휘둘러 본 다음, 비웃음을 흘리며 방을 나섰다.
망연히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가주는 그만 털썩하고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노부가 떨리는 눈길로 찻잔을 응시하며 조카를 향해 중얼거렸다.
“나는 그놈의 출수를 보지 못했다…….”
“무슨......?”
“묻지 않았느냐? 다섯 개의 찻잔이 허공에서 방향을 잃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네가 잠시 눈을 감은 사이 보지 못했듯이, 찰나였지.”
말을 마친 노인은 왼손으로 힘껏 탁자를 후려쳤다.
탁-
순간 절그렁거리는 찻잔 다섯 개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다섯 개의 방향으로 각각 치솟은 찻잔은 찰랑이는 찻물을 쏟아 붓기 직전이었다.
“이얍!”
노인의 위력적인 일갈과 함께, 곁에선 가주의 머리칼이 그가 일으킨 도풍(刀風)에 흩날렸다.
빠르게 도(刀)를 뽑아든 노부는, 찻잔들이 춤추는 허공을 향해 도를 뻗었다.
일단 곧게 일직선으로 뻗어 눈앞의 잔을 하나 받아 들었다.
‘하나!’
그리고 유연하게 허리를 꺾으며 도로(刀路)를 수직으로 꺾었다. 찰랑이는 찻잔이 무사히 도위에 안착했다.
‘둘!’
곧바로 그는 눈부신 속도로 수평으로 도를 찔렀다. 척! 하니 세 번째 찻잔을 도위에 앉혔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도를 급히 떨어뜨리며 네 번째 잔까지 무사히 받아냈다. 노부의 이마에 송골 땀 한 방울이 맺혔다.
‘셋! 그리고 북쪽으로 넷!’
마지막으로 노부는 눈빛을 빛내며 그의 도를 한바퀴 회전시켰다.
부웅-
도가 허공을 가르며 울었다. 허나 그의 도가 한발 늦었다.
쨍그랑-
마지막 잔은 미처 그의 도위에 얹히지 못하고 탁자위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카의 눈에는 감탄과 함께 의문이 가득 실렸다. 노부의 담담한 음성이 이어졌다.
“그놈은 그 순간 다섯을 모두 받아 내었다.”
“아아........!”
“나란 놈은 넷이 한계다. 순식간이었지. 내, 똑똑히 보았다. 그 놈의 소매 부근에서 검은 안개 같은 기운, 다섯 줄기가 쏘아져 나왔어. 그리고 채찍처럼 잔들을 휘감아 바닥에 내려놓고는 거짓말같이 손바닥 아래로 사라졌어!”
“.......!”
팽용화는 말을 잇지 못하고 표정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노부는 침울하게 덧붙였다.
“게다가 날 노려보던 그놈의 눈은!! 용화야. 보통일이 아니다. 그건, 그, 그건 정도(正道)가 아니야. 분명히 요사한 사기(邪氣)였어!”
노부의 마지막 말을 들은 용화는 앉은 채로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잡았다. 머리가 몹시 아파오는 듯, 연신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힘들게 입을 열었다.
“말씀 드려야 할 것 같군요. 숙부”
“오냐, 그래 말해보아! 네가 모를 일이 아니지! 무슨 일이 분명히 있는 게지?”
“먼저 당부드릴 말씀이 있어요. 그 분은 제 낭군이십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내일도 역시 마찬가지일 꺼 에요.”
“에잉! 쯧쯧.”
노부는 찡그리며 절래절래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조용히 조카의 말을 기다렸다.
“지금 하북성은 내부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어요. 그 중심이 서문탁 그의 전각입니다.”
아까까지와는 다르게 엄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 팽용화!
그녀는 은밀한 목소리로 한 시녀를 불렀다. 그녀의 부름에 답한 시녀는, 거짓말처럼 가주가 앉은 좌석 아래에 위치한 벽을 뚫고 집무실로 걸어 나왔다. 아마도 비밀 공간이 있으며 그 출입문이 가주가 앉은 비교적 높은 단상의 아래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너는 지금까지 네가 보고 들은 것들을, 숨김없이 노부께 말씀드리도록 해라.”
“예, 가주님!”
하녀는 그때부터 자신이 지금까지 보아 온 것들을 낱낱이 두 주군에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노부의 표정은 사납게 일그러졌으며, 그의 꽉 쥔 두 주먹은 연신 허공을 쳐 댔다. 때론 신음성을 흘리기도 했고, 끔찍함에 몸서리치기도 했다.
말을 잇는 시비는, 얼마 전 묵운과 함께 구석에서 서문탁을 모든 행동을 지켜보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이윽고 여인은 자신이 알아낸 바를 모두 토해낸 후,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거기까지가 마지막입니다. 이틀간 그는 비밀공간에서 두문불출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인근에서 사라진 수태한 여인이 둘.......입니다.”
“이, 이런 쳐 죽일 놈!”
노부는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가주는 조용히 감은 눈을 뜨며 말했다.
“일전에 현판을 하사하신 소림의 고승이 당부하신 말씀이 있으십니다. 아마도 그 분의 말씀대로 결국은 일이 그리 된 듯합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귀(魔鬼)가 날 뛸 때는, 반드시 하늘은 풀자(解子)를 같이 내리신다 하셨지요.”
“크흠....! 허나 이대로 두었다가는!”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숙부님.
더욱이 서방님은 정파의 한 축인 구대문파의 하나인 공동파의 제자이자 팽가의 가주인 저의 낭군이십니다. 자칫 이 일이 공론화 되어 공공의 적(公敵)으로 몰린다면, 지난 이십여 년 간 쌓아 온 것들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르지요.”
“어불성설(語不成說)! 밖의 적을 두려워하여 손놓고 있다가는, 내부가 먼저 썩어 문드러질 것이라는 걸 현명한 네가 왜 생각지 못하는 것이야! 감자에 돋아 난 싹을 그대로 두자는 말이냐! 네가 바라는 바가 무엇이냐! 왜 망설이는 것 이야! 혹여 저 놈을 서방이랍시고 사모하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순간 노부의 말에 무엇이라고 반박하려던 가주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노부는 설마 하던 짐작이 맞는다고 생각되자, 가슴속이 턱하고 막혀 오는 것만 같았다.
“이 일을 어찌할꼬! 이 일을 어찌할꼬!”
노부의 깊은 한탄 소리에 용화의 고개가 더 푹 숙여졌다. 그랬다. 가주이기 이전에 한명의 여자로써 용화는 그를 마음 깊이 사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직한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번민을 거듭했을지 짐작이 되는 노부는 한편으로는 그녀가 가엽기도 했다.
그러나 안 될 말이었다. 일개 여인으로서 조카의 마음은 가련하지만, 하북팽가의 가주로써 그녀는 지금 결코 옳은 처신을 하고 있지 못하다! 노부는 답답한 고개를 돌려 널부러진 찻잔을 바라보았다.
치지지직-
서문탁 그놈이 무슨 요망한 짓을 해 두었는지, 엎어진 찻물이 치직거리며 뇌전의 기운을 발하고 있었다.
‘놈....!!’
그때였다.
슈욱-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반사적으로 노부는 허리를 뒤로 꺾었다.
치지직-
허나 그의 반응이 약간 더 느려, 날카로운 물체는 그의 살을 파고들며 스치고 지나갔다. 불에 덴 듯한 극통이 노부의 왼팔을 휘감았다.
‘헉! 빠르다!!! 피하고자 하면 이미 늦었구나!’
순간적으로 노부는 서문탁을 떠올렸다. 노부는 고통에 찬 노성을 내질렀다.
“이 노옴!! 용서하지 않겠다!”
파앙-
두 번째 화살이 이번에는 가주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가주의 도는 제단 아래에서 약간 떨어진 받침대에 올려져 있었다. 노부는 앞뒤 가릴 것 없이 가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화살을 쳐냈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을 쳐낸 그의 도가 부르르 떨렸다.
‘빠르기뿐만이 아니다! 이 힘은 도대체?!’
그리고 다음 순간 다섯 발의 화살이 정확히 자신과 가주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일촉즉발!
잠시라도 지체한다면 머리통이나 어깨쯤은 간단하게 박살이 날 터였다!
용화는 재빠르게 두 바퀴 몸을 구르며, 제단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가 굴러간 자리 뒤로는 턱! 턱! 하고 두발의 화살이 간발의 차이로 제단에 꼽혔다. 제단은 화살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질 듯 흔들거렸다. 한편 그런 용화의 안전을 확인한 노부도 있는 힘껏 화살을 쳐내었다. 순간의 고비를 넘긴 가주와 노부는 서로의 등을 맞대고 섰다. 용화의 손에도 무사히 그녀의 애도(刀)가 들려있었다.
“누구냐! 감히 팽가의 가주를 암살하려는 자가! 모습을 드러내라!”
용화와 노부는 등을 맞댄 채로 한바퀴 돌며, 시선을 따라 주위를 살폈다. 딱히 기척이 느껴지는 곳은 없었다. 보이지 않는 적이라니! 노부는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저쪽 창가에서 스르륵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놀랍게도 핏빛의 가죽 옷을 차려입은 훤칠한 키의 여인이었다. 그녀의 왼손에는 커다란 활이 들려져 있었다. 차갑게 미소 짓는 전투신(戰鬪伸)!
“옳게 찾아 온 것 같군. 보아하니 당신이 가주인 모양인데…….”
집무실을 굽어보던 여무사는 활로 용화의 머리통을 정확히 겨냥했다. 노부는 흠칫 놀라 조카의 앞을 가리고 섰다. 그 모습을 보고 코웃음 치는 여인.
“서문탁, 그자는 지금 어디에 있지?”
난데없는 여인의 질문에 팽가주와 노부는 얼굴이 굳어 진채로 서로를 응시했다.
* * *
음산한 전각 안으로 발을 들여 놓은 도화는, 흠칫 몸을 떨었다. 시리도록 찬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들 것만 같았다. 도화의 뒤에 바짝 붙은 비형랑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참이었다. 잡다한 것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방안은 마치 폐허와도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별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주위에는 더러운 오물과 함께 여인의 속옷이 섞인 옷가지 들이 뒹굴고 있었다. 특히나 비형랑, 그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쓰디쓴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움 스마라 환 옴미나 후옴....”
도화는 입술을 작게 들썩이며 낮은 주문을 읊조렸다. 환(奐)의 술이다. 소년의 몸 안쪽으로부터 야명주와 같은 밝은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주위를 살피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후우. 한결 보기가 편한 걸?”
도화의 어깨를 툭툭 건드린 비형랑이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세우며 싱긋 웃었다. 긴장된 도화의 얼굴에서도 바람 빠진 웃음이 새어나왔다. 철이 없는 것인지, 강심장인 것인지 가슴 떨리는 이 상황에서도, 비형랑은 푸르스름한 빛을 띠는 도화의 피부를 스윽 스윽 문질러 보며 신기한 듯 살펴보는 중이었다. 한숨을 푹 내쉰 도화는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딱 멈추어 섰다.
“왜? 무슨 일이야!”
덩달아 멈추어 선 비형랑도, 화들짝 놀라 몸을 낮게 숙이며 도화를 향해 작게 물었다.
그의 오른 손은 이미 검을 쥐어들 만발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가만! 형, 지금 이 전각은 비어있어. 생명체의 살아있는 기(氣)는 오직 우리 둘이야! 허나 방금 전까지 이곳에 셋의 기운이……. 아니, 아니야. 둘은 확실한데, 하나는!”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설명해봐!”
“하나는 살아있는 기가 아니야……. 마치, 죽음의 기운과 섞인 듯한, 헉! 저건 뭐야!”
어둠 속을 더듬으며 말을 잇던 도화는, 으슥한 구석에 시선을 붙박았다. 소년의 곁에 바짝 붙어있던 흰둥이도 낮게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비형랑도 자연스레 도화의 시선이 멈춘 곳을 내려다보았다. 순간 그는 어제 아침에 먹은 소면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동물들의 난자당한 사체가 어지럽게 구석에서 뒹굴고 있었다. 썩어가며 풍기는 끔찍한 악취가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역겨운 광경을 보다 못한 비형랑이 도화의 팔을 잡아끌었다. 허나 소년의 두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내려다보더니 힘겹게 말문을 연 도화.
“미안해……. 하지만, 네 기억을 조금만 빌릴게.”
소년의 눈은 축축하게 젖어들기 시작했다.
“옴 스마라 스마라 미마나 사라 마하 자가라바 훔!”
소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주문을 외웠다. 도화의 몸이 기이한 보랏빛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비형랑은 숨죽여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동시에 그는 기운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주변의 인기척에 더욱 주의를 기울였다. 도화의 몸에서 작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기운은,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바닥을 기어가기 시작했다.
꿈틀꿈틀-
보랏빛 지렁이는 순식간에 동물들의 사체를 확 휘감았다. 그 순간!
도화의 발 앞에서 짓이겨져 있던 물컹한 물체가, 시간을 거꾸로 돌리듯 원형을 갖추어갔다.
흐물흐물한 새의 눈알.
푸르르 떨리던 핏빛의 눈알은 꿈지럭거리던 새의 머리통에 다시금 쑤욱 박혔다.
「찌르르- 찌르르-」
죽은 새의 미간에서 뿌연 안개 같은 것이 새어나왔다. 뿌연 안개는 흐릿한 영상을 만들어 내어 도화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한 남자였다. 잔인한 악마! 그는 장난스럽게 짐승들을 터트려 죽이고 있었다. 서슴지 않고 서너 마리의 동물들을 더 잔인하게 유린했다. 그리고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저쪽 모퉁이의 서재로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더 이상은 기운은 없는지, 영상은 거기서 끊겼다. 죽음에 다다른 마지막 순간, 작은 새의 음성이 고통으로 구슬프게 흐느끼고 있었다. 도화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는, 백골을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불쌍한 새에게도 편안한 안식을 주었다.
“미안해. 고통스러운 기억이었을 텐데. 다 잊고 좋은 곳으로 가거라.
옴 아마라 검제이니 후옴”
일어난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모퉁이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흰둥이는 소년의 곁에 바싹 붙어서 따랐다. 소년이 향하고 있는 목적지로 다가갈수록, 야호는 영물의 본성으로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하고 있었다. 흰둥이의 은빛 털이 날카롭게 섰다. 코를 쥔 채의 비형랑도 말없이 도화를 따라 급히 걸었다.
그는 뒤에서 따라가느라 소년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왠지 녀석의 뒷모습은 화가 난 듯해 보이기도 했고, 슬퍼 보이기도 했다. 모퉁이를 돌아선 도화는 잠시 사방을 노려보며 기의 흐름을 감지했다. 곁에선 비형랑도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두워 책의 종류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잘 꾸며진 서재였다.
“이깟 눈속임으로, 소마신의 자유로운 눈을 속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지!”
도화는 낮게 중얼거렸다.
장백산 천외봉의 절진(切診)속에서 성장한 도화에게, 이정도 공간의 눈속임은 어린아이 장난이었다. 그리고는 서슴없이 낡은 책장을 더듬어 한권의 책을 빼들었다. 도화는 정확하게 공간의 어그러짐을 짚어내고, 그 열쇠가 되는 책을 돌려 누였다.
다음순간, 놀랍게도 책장으로 보였던 곳의 입구가 빙그르 돌아가기 시작했다.
시꺼먼 동굴은 끝이 없는 아가리를 드러냈다.
쏴아아-
순간 도화는 숨이 탁하고 막혔다.
해일처럼 밀려드는 엄청난 음기였다!
몸 안으로 밀려드는 너무나도 거대한 기운에, 잠시 동안 도화는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뒤적뒤적 품안을 뒤지더니, 누런 부적 두장을 꺼내어 들었다. 소년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비록 도화처럼 예민하게 기를 느끼지는 못했지만, 비형랑 역시 밀려드는 음기에 기겁을 하기 직전이었다.
“신(神) 아그니는 태양의 양기다. 보호하라! 갈!”
도화의 외침과 동시에 두장의 부적은 각기 다르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한 장은 도화자신의 머리위에서 둥둥 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비형랑을 향해 날아갔다. 소년의 손바닥에서 떠난 부적은 비형랑의 정수리 앞까지 날아가서 딱 멈추었다.
그리고는 확! 하고 타오르더니 허공에서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러자 놀랍게도 비형랑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보호막이 자신을 감싸고 있는 듯, 한결 숨쉬기도 편해지고, 걸어 다닐 만 했다.
“아그니...신이라!”
비형랑은 음기의 폭풍 속에서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보고 머리를 털어 보기도 했다. 순식간에 타버린 아까의 부적은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리둥절해하는 비형랑을 보며 도화는 계속해서 아리송한 말을 중얼거렸다. 동시에 동굴을 향해서 고개를 돌리고는, 어둠 저 너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형!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야. 자신의 오감을 맹신하지 마.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은 눈에 보이지 않을 테니. 지금부터는 ……. 아마 형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적을 상대해야 해! 여섯번째 감각을 믿어봐.”
“……!”
도화는 큰 숨을 쉬며 비형랑을 보았다. 그의 머리위에는 방금 자신이 불러낸 아그니의 눈이 시뻘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마 자신의 머리위에서도 타오르고 있을 테지.
더 이상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도화는 어둠 속으로 서슴없이 걸어 들어갔다. 그 뒤를 흰둥이와 비형랑이 조심스럽게 따랐다.
잠시 뒤.
묵운을 삼켰듯 또 다시 도화와 비형랑을 삼킨 입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침을 때며 다시금 책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음산함을 뭉클뭉클 풍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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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기다리셨지요?
기다리게 해 드려서 너무너무 죄송합니다.(ㅠ_ㅠ)
급성 결막염이랍니다. 으흐흑
눈에 염증이 너무 심해서 궤양으로 번질 위험이 크다네요.
제가 별명이 곰팅이 이기는 하지만...
주치의(?)선생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실은 병원이 하나뿐이랍니다
)
우째 이리 아플때까지 참았냐고. 쿨,쿨럭.
쉴새없이 욱신거리며 시뻘겋던 눈도, 눈동자를 덮고 있던 허연 막도 이제는 거의 다 낳았답니다.
저번 주 진단을 받고 일주일간 열심히 치료를 받았거든요.
모니터를 당분간 보지 말라는 극약처방을 받았지만, 실은 몰래몰래 찔끔찔끔 썼답니다(ㅠ_ㅠ)
울 사랑 스러운 님들!
돈을 잃으면 하나를 잃지만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은 것이라고 하지요!
저처럼 참고 참으면서 후회하시지 마시고 약간이라도 이상이 느껴질때, 바로바로 치료를 받으셔야해요!
(감기, 눈병 유행이랍니다. 특히 외출하고 돌아왔을 땐, 손발을 깨끗이!)
11월의 힘찬 한주일의 시작이 되시길 바라며!
파안의가호가 함께 하시길 기도드릴게요(^_^)
저번주는 눈 때문에 약속을 못지켜 드렸죠? 대신.... 가을 시 한편을 선물로....(^^ㆀ
(칼이 날아 올까봐 후다닥 도망갑니다! 행복한 하루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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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사랑의 소리없는 아우성
운운(橒蕓)
사랑한다고 퍼부으리라
타오르는 가슴을 갈라내어 보이며
마디마다 절절이 베어 나오는
쓰디쓴 절망을 기꺼이 삼켜주리라
그리웁다고 소리치리라
하늘 향해 두 팔 벌려 바람을 움켜쥐며
미친 듯이 헤메이는 안타까움을
무심한 구름에 기꺼이 실어주리라
다 잊었노라고 웃어주리라
시커멓게 타버려 재가 된 가슴
살다가 사무치게 그리운 날이면
먼 훗날 반드시 그대는 후회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