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설계사이자 건축업을 하시던 아버지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이북에서 단신월남 해 온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하면서 어머니의 모친과 남매동생들을 자신의 가족처럼 돌보았다. 마흔이 넘어 얻은 무남독녀 딸을 두고 떠나면서 아버지는 외삼촌의 손을 잡고 나를 대학까지 마치게 도와달라고 유언을 했다. 그때 내 나이 9살 때의 일이었다. 1973년 외할머니는 너무 이른 나이에 혼자가 된 어머니가 안스러워 재혼자리를 알아보고 계셨던 거 같았다. 춘천 약사동에 살던 동네분에 의해 대머리아저씨가 나타난 건 아버지가 떠난 이듬해의 일이었다. 어머닌 아버지가 남기고 간 재산을 대머리 아저씨에게 건네주며 나를 대학까지만 보내달란 약속을 받아내고 그분의 아내가 되었다. 대머리 아저씨는 어머니를 자신의 호적으로 떼어가면서 내가 호주로 남겨진 호적에는 어머니를 사망으로 처리해 두었다. 우선 자리잡는데로 나를 데리러 오겠다는 어머니의 약속은 1년이 지난 후에야 이루어졌다. 1974년 약속대로 일년 뒤 어머니를 따라간 의부의 집은 춘천에서 45리 들어가는 산골마을의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직 직업없던 장남에서 초등학교 3학년 막내까지 6명의 아이들이 방이 두개밖에 없는 초가집에서 올망졸망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아, 그리고 사랑방에는 의부의 12번째 계모라는 칠순 넘은 할머니가 치매를 앓고 있었다. 아이가 둘밖에 없는 부농이란 의부의 처음 말은 거짓이었다. 나의 이모와 동갑인 큰 아들은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와 어머니에게 나가라고 행패를 부렸다.모두들 잠이 든 새벽녁 화장실을 가다가 나는 어머니가 부엌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숨죽여 울던 모습을 자주 보아야만 했다. 새벽이면 어머니는 그 많은 식구들의 아침 준비를 해 놓고 치매 할머니의 수발을 마친 뒤에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남의 집 품앗이 일을 나갔다. 생부가 계실 때엔 물 한방울 손에 묻힌 적 없던 어머니의 손은 일년만에 투박한 장정의 손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철없던 나는 형제자매가 생겼다는 것만으로 행복했었다. 겨울이면 개울에 나가 얼음을 깨가며 그 많은 식구들의 더럽혀진 옷을 빨아 어린 손은 동상에 걸렸지만 오빠 넷과 여동생 둘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겁고 신이 났었다. 1978년 의부는 어머니에게 정성이랄 만큼 잘해주었다. 어쩌면 그래서 어머니의 시름은 견딜만한 거였는지 몰랐다. 하지만 나에게 지난 4년간은 지옥과도 같은 거였다. 결혼을 하고 직장을 따라 횡성으로 떠나간 장남,그리고도 남겨진 오남매에게 나는 참혹하게 꺾여졌다. 형제들에게 돌아가며 성폭행을 당하고 반항하다가 통나무로 머리를 맞았다. 나보다 어린 여동생들의 고자질로 어머니는 의부에게 비냥거림을 당했고 난 이유 모르게 어머니에게 또 맞아야 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라는 의부의 말에 담임 선생님이 사정을 하다가 오히려 교무실에서 욕설을 듣는 것을 반 아이들과 지켜보면서 나는 그곳을 떠나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저녁 6시 45분 막차 그러나 보충 수업으로 막차를 놓치는 일은 비일비재했고 그럴 때면 친구 집이나 다리밑을 떠돌다가 잠이 들었다. 그래도 그게 집에서 보내는 지옥의 밤보다 나았다. 중학교 졸업식장에도 가지 않고 나는 안양 외갓댁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외할머니와 외삼촌 그리고 이모가 살고 있던 곳이었다. 이모가 소개를 해서 나는 낮에는 남성복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엔 야간 고등학교를 다녔다. 어머니가 몇번을 찾아왔지만 난 어머니를 만나지 않았다. 어린마음에 내 험악한 삶이 어머니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를 다시 만난 건 내가 미국에 오기 바로 한달전 즈음의 일이었다. 친구의 소개로 미군 장교를 만나고 그의 프로포즈를 받으면서 나는 내가 한국에 남겨져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어머니는 이미 나의 어머니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뉴욕에 온지 일년만에 큰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그 해 의부가 처음으로 내 전화를 살갑게 받았다. "내가 죽을 거 같애,네 엄마 불쌍해서 어쩌냐?" 함께 살던 4년동안 내 눈조차 바로보지 않던 의부였다. 금슬 좋던 어머니와의 유일한 다툼은 나를 데려왔다는 거였다. 그리고 4년동안 의부에게 나는 투명인간이었다. 내게 할말이 있으면 자신의 딸에게 건네 말할만큼 나와의 대화를 거부했었다. 그런 의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하고 한달만에 세상을 떠났다. 1990년 어머니는 또 혼자가 되었다. 아니 정확히 혼자는 아니었다. 의부의 마흔 넘은 셋째 아들,늘 반푼이라고 의부가 불러대고 어머니가 공을 들여 고등학교까지 마치게 한 그가 어머니와 남겨졌다. 형제들에게조차 홀대 당하는 그는 늘 술을 마셨고 술에 취하면 또 어머니에게 술값을 내 놓으라고 폭언을 했다. 어머닌 마굿간 옆에 숨어 있다가 그가 잠든 후에야 방에 들어 가 잠을 청했다. 하지만,나의 생부의 재산과 그간 어머니의 노고로 이뤄진 집과 논과 밭이 있어 어머닌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막내 여동생인 이모가 모시겠다고 했지만 어머니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30여년을 같이 해 온 이웃들과의 친목 또한 예순이 넘은 어머니에겐 값지고 소중한 인연이었으리라. 하지만 어머니의 그 행복은 지속되지 못했다. 반푼 취급하던 셋째아들을 불러내어 술을 사주고 어머니의 인감도장을 훔쳐내오라는 장남의 꾀임에 넘어가 셋째아들은 어머니가 밭일을 나간 사이 모두 장남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어머니도 모르게 어머니의 집과 땅들은 이미 다른 이들의 손에 넘어갔고 어머닌 그것도 모른 채 여전히 셋째아들의 주정에 시달리면서도 땅을 지키느냐 여념없었다. 봄을 맞으며 논에 모를 심으려 준비하던 어머니에게 더 이상은 그곳에 있을 수 없다는 소식은 청천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그렇게 어머니는 30여년의 삶을 도적질 당했다. 장남은 그돈을 아내에게 주어 사업을 하다가 다 날렸다고 했다. 차남은 2년 전 중국으로 떠나버리고 셋째 아들은 만취된 상태로 경운기를 몰다가 내장이 파열되어 무당이 된 다섯째 여동생에게 빌붙어 살아간다. 넷째아들은 모 교육청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역시 장남에게 있는 돈을 다 내어주고 생활조차 어렵다고 어머니를 도울 수 없다고 한다. 시민권자인 난 호적에 모친사망으로 되어있어 어머니를 초청하지 못하는 처지에 있다. 어머닌 지금 이모와 살고 계신다. 사업을 하다가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모댁도 어렵긴 마찬가지이지만 어머니가 딱히 가실 곳은 구미 이모님댁 뿐이다. 어머니의 호적엔 버젓한 6남매가 자녀로 남겨져 있어 어머닌 국가에서 노인들에게 베푸는 혜택도 못 받고 있다신다. 내 꿈,어머니의 꿈을 그렇게 다 빼앗겨 버렸다. 5년 전 여행으로 뉴욕에 오신 어머니는 지난 30년의 세월을 후회하고 통회하셨다. 세월이 다시 그때로 되돌려만 준다면 재혼하지 않고 나와 함께 살았을거란 어머니의 회한... 그랬다면 나 역시 미국에 오진 않았을테다. 다 늦은 후회긴 하지만... 지난 날을 끄집어 내는 일이 나에겐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머니가 빼앗긴 30년의 세월, 어머니가 빼앗긴 봄을 어찌하면 좋을지의 한이 이 글을 쓰게 했다. 우리 모녀는 빼앗긴 봄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뉴욕에서
내 어머니의 빼앗긴 봄
1972년
설계사이자 건축업을 하시던 아버지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이북에서 단신월남 해 온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하면서
어머니의 모친과 남매동생들을 자신의 가족처럼 돌보았다.
마흔이 넘어 얻은 무남독녀 딸을 두고 떠나면서 아버지는 외삼촌의 손을 잡고
나를 대학까지 마치게 도와달라고 유언을 했다.
그때 내 나이 9살 때의 일이었다.
1973년
외할머니는 너무 이른 나이에 혼자가 된 어머니가 안스러워
재혼자리를 알아보고 계셨던 거 같았다.
춘천 약사동에 살던 동네분에 의해 대머리아저씨가 나타난 건
아버지가 떠난 이듬해의 일이었다.
어머닌 아버지가 남기고 간 재산을 대머리 아저씨에게 건네주며 나를 대학까지만
보내달란 약속을 받아내고 그분의 아내가 되었다.
대머리 아저씨는 어머니를 자신의 호적으로 떼어가면서 내가 호주로 남겨진
호적에는 어머니를 사망으로 처리해 두었다.
우선 자리잡는데로 나를 데리러 오겠다는 어머니의 약속은 1년이 지난 후에야 이루어졌다.
1974년
약속대로 일년 뒤 어머니를 따라간 의부의 집은
춘천에서 45리 들어가는 산골마을의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직 직업없던 장남에서 초등학교 3학년 막내까지
6명의 아이들이 방이 두개밖에 없는 초가집에서 올망졸망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아, 그리고 사랑방에는 의부의 12번째 계모라는 칠순 넘은 할머니가 치매를 앓고 있었다.
아이가 둘밖에 없는 부농이란 의부의 처음 말은 거짓이었다.
나의 이모와 동갑인 큰 아들은 밤늦게 술에 취해 들어와 어머니에게 나가라고 행패를
부렸다.모두들 잠이 든 새벽녁 화장실을 가다가 나는 어머니가 부엌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숨죽여 울던 모습을 자주 보아야만 했다.
새벽이면 어머니는 그 많은 식구들의 아침 준비를 해 놓고 치매 할머니의 수발을 마친 뒤에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남의 집 품앗이 일을 나갔다.
생부가 계실 때엔 물 한방울 손에 묻힌 적 없던 어머니의 손은 일년만에 투박한 장정의
손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철없던 나는 형제자매가 생겼다는 것만으로 행복했었다.
겨울이면 개울에 나가 얼음을 깨가며 그 많은 식구들의 더럽혀진 옷을 빨아
어린 손은 동상에 걸렸지만 오빠 넷과 여동생 둘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겁고 신이 났었다.
1978년
의부는 어머니에게 정성이랄 만큼 잘해주었다.
어쩌면 그래서 어머니의 시름은 견딜만한 거였는지 몰랐다.
하지만 나에게 지난 4년간은 지옥과도 같은 거였다.
결혼을 하고 직장을 따라 횡성으로 떠나간 장남,그리고도
남겨진 오남매에게 나는 참혹하게 꺾여졌다.
형제들에게 돌아가며 성폭행을 당하고 반항하다가 통나무로 머리를 맞았다.
나보다 어린 여동생들의 고자질로 어머니는 의부에게 비냥거림을 당했고
난 이유 모르게 어머니에게 또 맞아야 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라는 의부의 말에 담임 선생님이 사정을 하다가
오히려 교무실에서 욕설을 듣는 것을 반 아이들과 지켜보면서 나는
그곳을 떠나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저녁 6시 45분 막차
그러나 보충 수업으로 막차를 놓치는 일은 비일비재했고 그럴 때면
친구 집이나 다리밑을 떠돌다가 잠이 들었다.
그래도 그게 집에서 보내는 지옥의 밤보다 나았다.
중학교 졸업식장에도 가지 않고 나는 안양 외갓댁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외할머니와 외삼촌 그리고 이모가 살고 있던 곳이었다.
이모가 소개를 해서 나는 낮에는 남성복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엔 야간 고등학교를 다녔다.
어머니가 몇번을 찾아왔지만 난 어머니를 만나지 않았다.
어린마음에 내 험악한 삶이 어머니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를 다시 만난 건 내가 미국에 오기 바로 한달전 즈음의 일이었다.
친구의 소개로 미군 장교를 만나고 그의 프로포즈를 받으면서
나는 내가 한국에 남겨져 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어머니는 이미 나의 어머니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뉴욕에 온지 일년만에 큰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그 해 의부가 처음으로 내 전화를 살갑게 받았다.
"내가 죽을 거 같애,네 엄마 불쌍해서 어쩌냐?"
함께 살던 4년동안 내 눈조차 바로보지 않던 의부였다.
금슬 좋던 어머니와의 유일한 다툼은 나를 데려왔다는 거였다.
그리고 4년동안 의부에게 나는 투명인간이었다.
내게 할말이 있으면 자신의 딸에게 건네 말할만큼 나와의 대화를
거부했었다.
그런 의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렇게 말하고 한달만에 세상을 떠났다.
1990년
어머니는 또 혼자가 되었다.
아니 정확히 혼자는 아니었다.
의부의 마흔 넘은 셋째 아들,늘 반푼이라고 의부가 불러대고 어머니가 공을 들여
고등학교까지 마치게 한 그가 어머니와 남겨졌다.
형제들에게조차 홀대 당하는 그는 늘 술을 마셨고 술에 취하면 또 어머니에게
술값을 내 놓으라고 폭언을 했다.
어머닌 마굿간 옆에 숨어 있다가 그가 잠든 후에야 방에 들어 가 잠을 청했다.
하지만,나의 생부의 재산과 그간 어머니의 노고로 이뤄진 집과 논과 밭이 있어
어머닌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막내 여동생인 이모가 모시겠다고 했지만 어머니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30여년을 같이 해 온 이웃들과의 친목 또한 예순이 넘은 어머니에겐 값지고 소중한 인연이었으리라.
하지만 어머니의 그 행복은 지속되지 못했다.
반푼 취급하던 셋째아들을 불러내어 술을 사주고 어머니의 인감도장을 훔쳐내오라는
장남의 꾀임에 넘어가 셋째아들은 어머니가 밭일을 나간 사이 모두 장남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어머니도 모르게 어머니의 집과 땅들은 이미 다른 이들의 손에 넘어갔고 어머닌 그것도 모른 채
여전히 셋째아들의 주정에 시달리면서도 땅을 지키느냐 여념없었다.
봄을 맞으며 논에 모를 심으려 준비하던 어머니에게 더 이상은 그곳에 있을 수 없다는
소식은 청천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그렇게 어머니는 30여년의 삶을 도적질 당했다.
장남은 그돈을 아내에게 주어 사업을 하다가 다 날렸다고 했다.
차남은 2년 전 중국으로 떠나버리고
셋째 아들은 만취된 상태로 경운기를 몰다가 내장이 파열되어
무당이 된 다섯째 여동생에게 빌붙어 살아간다.
넷째아들은 모 교육청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역시 장남에게 있는 돈을 다 내어주고
생활조차 어렵다고 어머니를 도울 수 없다고 한다.
시민권자인 난 호적에 모친사망으로 되어있어 어머니를 초청하지 못하는 처지에 있다.
어머닌 지금 이모와 살고 계신다.
사업을 하다가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모댁도 어렵긴 마찬가지이지만
어머니가 딱히 가실 곳은 구미 이모님댁 뿐이다.
어머니의 호적엔 버젓한 6남매가 자녀로 남겨져 있어 어머닌
국가에서 노인들에게 베푸는 혜택도 못 받고 있다신다.
내 꿈,어머니의 꿈을 그렇게 다 빼앗겨 버렸다.
5년 전 여행으로 뉴욕에 오신 어머니는 지난 30년의 세월을 후회하고 통회하셨다.
세월이 다시 그때로 되돌려만 준다면 재혼하지 않고 나와 함께 살았을거란 어머니의 회한...
그랬다면 나 역시 미국에 오진 않았을테다.
다 늦은 후회긴 하지만...
지난 날을 끄집어 내는 일이 나에겐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머니가 빼앗긴 30년의 세월,
어머니가 빼앗긴 봄을 어찌하면 좋을지의 한이 이 글을 쓰게 했다.
우리 모녀는 빼앗긴 봄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뉴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