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18

allcross2005.11.24
조회399

 

18.


 직장에서 자유로워진 후 더 많은 시간을 서영과 보낸다.

 매일 아침잠을 실컷 잔 후 서영의 집으로 찾아간다.

 

 미래가 유치원에 간 이후라 서영은 혼자서 나를 맞이한다.

 서영과 나는 마주 보며 식사를 한다.

 

 평소 새 모이만큼이나 적은 양의 음식을 먹는 서영이지만

 찾아 온 나를 위해서 여러 가지 요리를 한다.

 

 서영의 한식 요리는 솔직히 훌륭하지 못하다.

 찌개도 깊은 맛이 우려나지 않고 김치나

 다른 밑반찬도 모두 사서 먹는 듯했다.

 그러나 파스타나 스테이크, 샐러드 등의 양식 요리는

 어느 레스토랑 못지않게 잘 만들었다.


 나는 서영이 뭘 차려주든 그저 잘 먹는다.

 서영은 그런 나를 자기 식사도 잊은 채 물끄러미 쳐다본다.


 식사를 마치면 내가 도와 같이 설거지를 한다.

 식기 세척기가 있는 듯 했지만 서영은 손으로 직접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후에 서영은 거실에 있는 오디오를 켠다.

 집에서 서영은 텔레비전을 켜지 않는다.

 나랑 만날 때 단 한 번도 TV프로나 연예인에 대한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은은한 클래식 선율은 악보 위의 음표들처럼 거실을

 떠다닌다.

 

 내가 거실 소파에 앉아 몸을 기대는 사이 서영은 발코니에 나가

 화초에 물을 주기 시작한다.

 화분의 수는 그리 많지 않지만 하나하나를 이파리까지 꼼꼼히

 살핀다.

 흡사 꽃들과 대화를 하는 듯하다.


 집안 청소는 항상 내가 찾아오기 전에 미리 해 놓는다.

 내게 깨끗한 집안을 보여주기 위해서인지 내가 돕겠다고

 나설까봐 미리 해 놓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여기까지의 일과가 끝나면 우리는 미래가 오기 전까지의

시간을 밖에서 보낸다.

서영의 차를 타고 가까운 한강 고수분지로 향한다.


인적이 드문 시각이라 강변은 한적하다.

우리는 통행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간다.


잔잔한 강바람이 서영의 긴 머릿자락과

치맛단을 가볍게 흔들면서 지나간다.


걸어가는 동안 서영은 별 말이 없다.

나도 굳이 그녀의 침묵을 깨지 않는다.


가끔은 서영은 멈춰 서서 강 쪽을 한참동안 응시한다.


그 시선이 너무나 멀리에 가 있고 눈동자 안의

음영은 너무 짙게 드리워진다.

이럴 때는 그녀가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안다.

고통스러운 기억인 듯해서 마음이 아프다.


너무나 오랜 시간동안 그녀가 생각에 잠겨있으면

고통에서 깨어나게 하고 싶어

조용히 다가가 어깨에 손을 올린다.


“.................많이 힘들어?”


서영은 그제야 내게로 시선을 돌린다.

나는 서영을 마주보며 말한다.


“이제 옛날 생각은 하지마. 거기엔 내가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 말을 들은 서영은 나에게 살며시 웃어 보인다.


하지만 아픔이 너무나 깊은 때문인지 서영의 눈 속의 어두운 그림자는 여전히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