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 오늘 어떤 색히가 시비 거는 바람에 한 판 떴다. 그래서 학원도 빠진거고. 근데 신경 쓸 거 없어. 내 얼굴 이정도 망가졌으면 그 색히는 어떻게 됐을지 짐작이 가지?
녀석은 자신이 행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숨기기 위해 선수를 쳐서 내게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을 찔러댔고 내 눈물샘을 자극시키고야 말았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녀석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돌렸던 고개를 바로 했다.
눈에 안약을 투여한 것처럼 눈물은 줄기차게 흘러댔고 그 떨어지는 눈물 방울이
녀석에게 들키지 않게끔 비나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녀석도 내 망가진 얼굴을 보고싶지 않았는지 계속해서 앞만 주시했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있는 내게 다정한 투로 물었다.
운: 근데 정말 나 보고싶어서 나오라고 한 거냐?
침을 삼켜 울컹거리는 목을 가다듬고 녀석에게 조용히 대답했다.
이대리: 그래. 갑자기 보고싶어서..
운: 색히. 그 동안 나한테 미안했나보구나.
내 말을 끊어버린 녀석은 길게 한 숨을 내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운: 이젠 더이상 나한테 미안할 짓 안해도 되게 생겼다. 일락... 취소됐단다. 그니까 더이상 티켓 문제로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선배들한테 더이상 맞을 일도 없을 거야.
나 대신 모든 것을 덮어쓴 녀석은 아직도 불안에 떨고 있을지도 모를 친구를
안심시키려고 또 한 번 거짓말을 했다.
그것도 하루도 안 되어 들통날 거짓말을.
녀석이 그렇게 나올 수록 내 마음은 더욱 힘들어만 갔다.
비록 내 등에 있는 짐은 덜어주었을지 몰라도 내 마음의 짐은 더욱 무겁게
만들고 있었기에.
녀석에게 속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이번엔 너의 선택이 틀렸다고.
오늘 너가 한 행동은 빚지고 못사는 내게 커다란 마음의 짐을 실어준 것이라고..
이대리: 몸은 좀 괜찮냐?
나도 녀석처럼 앞만 주시한 채 조용히 물었다.
그러자 녀석은 친구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 좀 전과는 틀린 절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운: 너, 내 맷집 아직도 모르냐? 죽도록 맞아도 끄떡없다는 걸? 왠만한 주먹은 나한테 솜방망이나 다름 없어.
이대리: ...
운: 근데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둘 다 꼴이 우습긴 우습구나. 누가 보면 둘이 싸운 줄 알겠지? 하하.
녀석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웃어댔지만 그 웃음소리는 내게 슬픈멜로디처럼
들려왔다.
그 슬픈 소리에 끌려 내 고개는 다시 한 번 녀석에게로 반쯤 돌아갔다.
그렇게 녀석의 망가진 옆모습을 다시 한 번 바라보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픔이 밀려왔다.
거울에 비친 내 망가진 얼굴을 볼 땐 참을만 했지만 나 때문에 이 지경이 되버린
친구의 얼굴을 보고있자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운: 그동안 나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내가 화도 많이 내고 서운하게도 하고 그랬는데 정말 미안하다. 사실 겉으론 냉정하게 대했지만 나 역시 맘은 편치 않았어. 너를 모르는 척 외면할 때마다 내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거든. 근데 다른 녀석이었더라면 그럴 이유가 없었겠지만 내가 가장 아끼는 녀석이기에 그랬던 거야. 이 점 이해해줄 수 있지? 앞으로는 더이상 인상 쓰지 않고 밝게 웃기만 할게. 이렇게 말야.
녀석은 씨익 웃으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 또한 그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고 눈물을 억지로 삼키며 녀석에게
슬픈 미소를 보였다.
흉터로 얼룩진 녀석의 얼굴은 내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지만 내 마음 곳곳에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징그러울 수도 있는 상처들이지만 그 상처들 하나 하나가 날 위한 마음들이란 것을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보기 흉한 얼굴은 내 두 눈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춰졌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대 자연의 모습마저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대리: 운아..
포근한 목소리로 친구의 이름을 부르자 운이가 눈빛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대리: 너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별 하나 안 보이는 밤하늘이 아름다워 보일 때가 있었냐?
운: 임마. 난 별이 있어도 하늘을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 없다.
이대리: 그럼 나만 그런 걸까? 난 오늘 밤 하늘이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인다.
운: 색히. 지금 시 쓰냐?
이대리: 그래서인지 만약 타임머신이 개발된다면 오늘로 꼭 한 번쯤 돌아와보고 싶다.
운: 참나. 전봇대에 머리라도 박고 왔나. 이런 우중충한 날씨가 뭐가 좋다고 타임머신씩이나 타고 돌아오냐.
이대리: 그래. 흐린 하늘이긴 하지만 그런 하늘이 가끔 아름다워 보일 때도 있나봐. 그래서 이 신비한 하늘을 또 보고 싶은 거고.
분명, 별 하나 안 보일정도로 흐릿한 날씨였지만 한 친구의 멋진 우정이 이 우중충한
하늘을 환한 빛으로 물들였기에 아름다울 수 밖에 없었다.
아니, 내 마음을 환하게 비춰서 어두운 하늘을 그렇게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오늘의 하늘은 내게 특별하고 가치있는 하늘이다.
소중한 추억이 담겨있고, 눈물나는 감동이 담겨있고, 빛나는 우정이 담겨있는 하늘이기
때문이다.
그리움의 목적지가 될 오늘의 밤 하늘.
친구가 이 하늘에 별을 쏘아 올렸다면 이번엔 내가 그 별을 환하게 비출 차례이다.
친구가 오늘이란 날짜에 우정이란 펜으로 문신을 새겨두었다면 이번엔 내가 그 문신에
밝은 색을 넣을 차례이다.
먼 훗날,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때 오늘을 지나치지 않게끔...
오늘의 날짜를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것은 이제 나만의 몫이었다.
이대리: 먼저 일어나야겠다.
자리에서 엉덩이를 때며 일어나자 운이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운: 뭐? 불러놓고 먼저 가겠다고?
이대리: 지금 당장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 그래.
운: 어딜?
이대리: 하늘에 빛을 뿌리러.
운: 이게 오늘 시집 읽다가 나왔나. 자꾸 이상한 소리만 해댈래?
이대리: 라이터 있냐?
운: 이 자식봐라. 피곤한 사람 기껏 불러내서 혼자 남겨두고 가는 것도 모자라 이젠 강도짓까지 하려고 하네. 너도 라이터 있잖아. 임마.
이대리: 오늘은 라이터를 두 개 쓰고 싶다. 하나로는 이 하늘에 빛을 내기 힘들거든.
운: 개자식.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남의 물건을 삥뜯으려 하다니. 불필요한 색히! 가져가라. 가져가. 그거 얼마나 한다고.. 치사 빤스한 놈.
라이터를 받아든 나는 이 자리를 벗어나기 전에 녀석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이대리: 백운. 그거 아냐?
운: 뭘 임마.
이대리: 진정한 우정은 역경속에서 시험된다는 것을. 넌 그 시험에 합격한 놈이다. 친구라 불리어도 될만한 자격이 있는 놈이라고.
해야 할 말이 더 있었지만 그 말은 소리내어 하지 않았다.
빤히 쳐다보는 친구에게 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이번엔 내 차례야. 내가 시험을 볼 차례.."
녀석은 내가 모든 것을 알고있는 건 아닐까하는 마음으로 조바심을 느끼고 있는지
날 바라보는 눈빛이 흔들리는 듯 했다.
녀석의 입에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나오기 전에 등을 돌려 놀이터 밖으로
걸었다.
녀석은 아무 말 없이 멀어지는 날 보고만 있었고 난 얼마전 그가 내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놀이터 밖으로 나왔다.
------------------------------------------------------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친구는 내 재산이야! 그 재산에 금이 가고 있는데 어떻게 모른 척 하냐고!! 넌 내가 남들한테 당하게 되면 모른 척 가만 있을 거야! 대답해봐! 색햐! ------------------------------------------------------
운아.. 그 날 아무런 대답도 못해서 미안해.
늦었지만 오늘 그 대답을 해줄게.
내 발걸음이 멈추는 곳에서 그 대답을 해줄게.
그 대답을 하고나면 너도 오늘의 하늘을 보며 아름답다 말할지도 모를 거야.
잠시동안 잊고있었던 분노를 두 주먹에 실으며 걸음을 빨리했다.
이 분노가 가시고 나면 친구에게 대답을 해줄 수 없을지도 모르기에 빨리
걸어야만 했다.
한참을 걸어서야 내 걸음은 멈추었고 그 곳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담뱃불 몇 개가 왔다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
평상시 같았더라면 두려운 불빛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오늘은 반가운 불빛들이었다.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서는 그 담뱃불이 있는 곳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렇게 다가가자 벤치에 앉아있는 선배 세 명이 어렴풋이 보였고 내 모습을 먼저 확인한
김형이 나를 반겨주었다.
예정대로라면 먼저 주먹부터 날아와야 했던 상황이지만 운이의 희생으로 인해
지금 나의 상황은 하루 아침에 극과 극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김형: 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너 아주 잘 왔다. 형들이 너의 반전드라마에 감탄해서 통닭이라도 한 마리 사주려고 했거든. 하하. 어떠냐? 형들이랑 같이 한 잔 하러 갈까?
내게 좋은 방향으로 뒤바뀌어 있는 상황이었지만 난 이런 상황 속에서 놈들처럼
여유롭게 웃을 수 없었다.
놈들과 몸을 마주하고 선 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을 뿐이었다.
이대리: 꼭 그래야 했나요?
살기어린 눈빛과 표정을 한 채, 내 감정만큼이나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그러자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강형이 톤을 올리며 되물었다.
김형: 무슨 소리야? 꼭 그래야 했냐니?
이대리: 죄라고는, 친구를 너무 사랑하는 죄밖에 없는 한 녀석을 그런식으로 무참히 짓밟아야 했냐고요.
김형: 이 자식이 뭘 잘못 먹었나. 무슨 헛소리야?
이대리: 운이가 들고왔다는 티켓 값! 그거.. 운이 몫입니다. 그러니까 전 한 장도 못 팔은 거고요. 이제야 감이 좀 잡히나요?
김형: 뭐야! 너.. 한 장도 못 팔은 거였어? 개색히..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이제야 상황파악이 되었는지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던 강형이 김형과는 다른 분위기의
말투로 말했다.
강형: 잠깐. 그럼 너 한 장도 못팔고 지금 니 발로 찾아와서 죽여달라고 큰 소리 치고있는 거냐? 아주 맞고 싶어서 환장을 한 놈이구나.
이대리: 아니요. 오늘은 맞으러 온 게 아니라 싸우러 온 겁니다. 그냥 맞고만 있진 않겠다는 겁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놈들을 노려봤다.
윤형: 너 지금 미쳤냐?
이대리: 미치지 않고서야 하늘같은 대선배님들께 이렇게 대들 수 없겠죠.
윤형: 훗. 오늘 정말 죽어서 나갈지도 모를텐데 두렵지 않냐?
이대리: 죽을 각오한 놈이 뭐가 두렵겠습니까.
김형: 이 미친색히가 진짜..
이대리: 가끔씩 이런 미친 놈 하나 보는 것도 재밌지 않습니까. 후배라 깔보지 말고.. 인원수 많다고 건방 떨지 않는게 좋을 겁니다. 미친 놈이 죽을 각오까지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거든요. 그리고 커다란 빚을 갚으러 온 놈은 그 빚을 갚을 때까지 죽을 각오로 덤비니 미친개에게 물리기 싫으면 정신 바짝 차리세요.
두 주먹에 라이터를 꽉 쥐었다.
나보다 한 살 많은 놈들이라 주먹의 파워가 나보다 뛰어나겠지만 라이터와 나의 분노가
가득 실린 주먹은 나이 벽을 깨부실만한 엄청난 파워를 낼 거라 자신했다.
선배에게 먼저 주먹을 날릴 순 없었기에 주먹이 날아들기를 기다렸다.
김형이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 얼굴에 주먹을 날렸고 난 기다렸다는 듯이
김형의 얼굴에 주먹을 강하게 날렸다.
김형은 뒤로 물러나면서 고통을 느껴야 했지만 나는 분노에 가려 아픔이 느껴지질
않았다.
이번엔 윤형을 향해 빠른 스피드로 주먹을 날렸고 동시에 강형이 날린 주먹에 맞아야
했다.
예상치 못한 주먹에 맞아 잠시 주춤거리긴 했지만 아픔따윈 잊어버린 채 놈들을 향해
악착같이 덤벼들었다.
그 동안 억울하게 당해야만 했던 온갖 서러움들을 두 주먹에 가득 담아 놈들에게도
똑같은 방식으로 되돌려주었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한 번에 씻겨내려가는 것처럼 너무나 통쾌했다.
있을 수 없는 현실을 깨부시고 이렇게 미치는 것이 너무나 후련했다.
그러나 그 통쾌함은 오래 가질 못했다.
치고 치이는 싸움이 얼마 못 가서 한쪽의 일방적인 폭력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너무 쉽게 말이다.
내가 나이도 어리고 쪽수도 부족하고 얼굴도 이미 망가진 터라 크게 불리한 싸움이란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오기와 분노로 무장하면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들 또한 쉽게 무너질 수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나이 어린 놈에게 맞으면 안 된다는 그들의 자존심이 바로 그 이유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분노는 그들의 자존심과 비기게 되는 것이고 결국 3:1라는 불공편한
숫자 그대로의 상황이 되기에 내가 맞을수 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티코 중고차로 그랜져 신형차 세 대와 줄다리기를 하는 모습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들에게 또 한번 희생양이 되어 처참히 짓밟히게 되었다.
자존심이 상한만큼 분노마저 느꼈는지 놈들은 날 죽일 기세로 짓밟아댔다.
힘없이 쓰러진 나를 일으켜 때리고, 쓰러지면 다시 일으켜 때리는 것을 계속 반복했다.
얼굴이 터지고 피가 쏟아져 나왔지만 날 위해 희생한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며
난 모든 것을 인내할 수 있었다.
눈가에 아른거리는 그 녀석의 얼굴을 보며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운아..
너가 남들한테 당하면 가만히 있을 수 있냐고 내게 물었지?
지금 내 몸이 그 질문에 대답을 해주고 있어.
내 몸이 말하잖아.
자신은 망가져도 괜찮으니 친구를 위해 불길 속이라도 뛰어들라고.
그런데 사실 난, 이런 대답을 할 자격도 없는 놈이야.
이건 내가 벌인 불장난이고 애초부터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으니까.
너가 내 몫을 대신해서 인내했지만..
결국 내 몫은 내가 찾아가게 되는 거야..
이제 더이상 날 위해 내 짐을 빼앗아 가려 하지마..
그것이 나를 위하는 거고 너를 위하는 거야..
이렇게 서로를 망가뜨리며 우정을 확인시켜 주지 않아도
우리 충분히 느낄 수 있잖아.
이제 너와 나 1:1 셈셈이라 치자..
그러니까 나 이제 너한테 빚진거 없어..
더이상 날 빚지게 만들지 말아줬으면 해..
이렇게 육체가 아픈 건 견딜 수 있지만...
맘이 아픈 건 견딜 수 없거든..
더이상 신음소리를 낼 힘도 없게끔 만들어버린 놈들은 피로 얼룩진 내 모습에
만족을 했는지 그만 주먹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숨을 헐떡거렸다.
김형: 헉헉... 넌 매일매일 이렇게 반쯤 죽여줄 거야. 알았냐? 십색햐!
윤형: 개같은 색히. 감히 선배한테 대들어? 아주 서서히 죽어봐라.
그들은 바닥에 쓰러져있는 내게 쌍스러운 말을 내뱉더니 씩씩 거리며 놀이터
출구쪽으로 걸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있는 내 모습은 참혹했지만 그제서야 난 안도의 한 숨을
크게 내쉴 수 있었다.
친구가 짊어준 가장 무거웠던 마음의 짐 하나를 스스로 없앴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젠 죄책감의 무게에 짓눌리며 힘들어하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안도의 한 숨을 길게 내쉴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놀이터 저쪽에서 낮고도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벼워진 내 마음을 다시 무겁게 만드는 목소리가.
"누가 나가라고 했죠?"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힘들게 고개를 틀자, 입구를 막고있는 한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야구모자에 반쯤 가려진 얼굴.
그는 운이었다.
운: 이대리! 그 타임머신에 자리 하나 남냐? 나도 오늘 밤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졌다!
적지에서 아군을 만나면 당연히 반가워야 했지만 지금의 상황에선 그렇지가 못했다.
이대리: 너.. 이자식.. 왜 따라온 거야!
운: 친구따라 강남도 간다던데 겨우 이 정도도 못 따라올까! 라이터 빌려갈 때부터 수상하다 했더니 역시나였군. 괘씸한 놈. 모든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나를 속이다니.
이대리: 너 정말 죽고싶어 환장했어!
운: 전에 너가 말했었지? 세상과 타협이 안 될 땐 한 번쯤 미쳐보는 거라고. 그래서 나도 앞 일 생각하지 않고 한 번 미쳐보려한다. 기왕 추억 만들거 기억에 오래 남도록 멋지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우리 둘 사이에 서있는 놈들은 우리들의 대화가 유치하다는 듯이 비웃음을 터뜨려댔고
운이는 그런 놈들의 웃음따윈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다시 외쳐댔다.
운: 그런데 그거 아냐! 한 놈이 미친 짓을 하면 그건 분명 미친 짓이지만 둘이서 같이 미친 짓을 하면 그건 미친 짓이 아니라는 것을! 그건 바로.. 의리다! 의리! 친구 혼자 외롭게 미치는 꼴은 못 봐주겠다!
녀석의 우정과 의리는 내가 따라가고 싶어도 따라갈 수 없는 것이었나 보다.
난 그런 녀석때문에 또 한 번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이대리: 개자식... 니가 날 빚쟁이 만들려고 작정을 했구나..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선배들은 더이상 못 봐주겠다는 듯
운이를 향해 주먹을 쥐고 다가갔다.
강형: 미친색히들. 아주 꼴깝을 떠는구먼.
그러나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운이가 그들에게 달려가 잽싸게 발을 날렸다.
그리고 내가 그랬듯이 녀석도 3:1의 싸움을 벌이며 밀고 밀리는 상황을 연출했다.
좀 전까지만해도 온 몸에 힘이 빠져 더이상 일어날 수 없는 나였지만 녀석이 그렇게
싸움을 하고있는 모습이 내 바로 앞에서 펼쳐지자 내 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힘이 펄펄 끓기 시작했다.
재빨리 몸을 추스리고 일어나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나도 질 수 없다는 듯 친구와 하나가 되어 싸웠다.
그런데 3:1에서 3:2가 된 것 뿐인데 혼자서 싸울때와는 틀리게 막상막하의 싸움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이 의리의 힘일까?
선배들은 악착같이 달려드는 우리들에게 점점 지쳐만 갔고 우린 죽을 힘을 다해
그리고 죽을 듯한 고통을 참아가며 끝까지 쓰러지지 않고 팽팽한 싸움을 유지해갔다.
운이가 두 명에게 당하고 있을 땐 내가 그를 도왔고 내가 두 명에게 당할 땐
운이가 나를 도우며 싸웠다.
서로 한치의 양보 없는 숨막히는 싸움이 한참 진행되면서 비명소리가 여러 입에서 들려왔고
누구의 혈흔인지 알 수 없는 핏물이 서로의 주먹을 물들이고 있었다.
양쪽 모두 상처가 점점 커지면서 무언의 약속이라도 한 듯 잠시 냉전의 시간을 가졌다.
둘과 셋. 이렇게 양쪽으로 갈라져서 서로를 노려보며 거친 숨만 뿜어댔다.
그런데 남의 땅에서 싸움을 벌인 댓가인가?
참 비극 스럽게도 반갑지 않은 손님들이 저 멀리서 이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얼굴을 확인할 순 없지만 분명한 건 우리 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운이도 그들을 봤는지 시선을 내쪽으로 옮기며 물었다.
운: 헉헉.. 자신있냐?
녀석에게 대답대신 미소를 보이며 녀석의 오른쪽 주먹을 잡았다.
이대리: 아까 빌려간 라이터다. 이자는 못 쳐주겠다. 행운을 빈다.
녀석도 라이터를 주먹에 꽉 쥐더니 내게 여유로운 미소를 보였다.
친구와 함께 한다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는 것을 서로 미소로 대답한 것이었다.
우린 서서히 입가에 미소를 지웠다.
그리고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바로 앞에 있는 세 명의 선배들에게 날라차기를 하며 길을
뚫었다.
그렇게 뚫린 길을 달리고 달려 마주 달려오는 놈들에게로 다시 한 번 허공을 날으며
날라차기를 했다.
강한 패기와 의리로 똘똘뭉쳐 우리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놈들을 상대하며 악착같이
싸웠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있게 덤벼대는 우리였지만 우린 진실을 알고 있었다.
이 싸움은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는 것을..
아무리 의리로 똘똘뭉쳤다 하거늘 힘과 숫자의 원리를 깨부시기엔 역부족이라는 것을..
그렇게 얼마 되지 않아 우리들이 예상한 결과대로 그들에게 둘러싸여 피비린내가
날 때까지 맞고 또 맞아야 했다.
박형: 아! 샹! 피 났잖아! 씨바알...
김형: 헉헉...이 씨브랄넘들.. 니들 오늘 제삿날이다.
그들은 우릴 동그랗게 포위하고서 죽어라 공격했고 우린 서로의 몸을 감싸며
아픔을 견뎌냈다.
친구는 정말 그런 존재였나보다.
기쁨은 두 배로 느끼게 하고 아픔은 반으로 줄일 수 있게하는 존재.
우리의 몸은 그들로 하여금 소름돋칠 정도로 망가져가고 있었지만 우린 아픈 만큼
귀한 것을 얻어만 갔다.
그들이 날리는 발길질 만큼이나 서로의 몸을 더욱 감싸주려는 우리의 우정이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살색으로 된 얼굴이 빨간 색으로 물들어가고만 있었지만 그 핏물이 결코 아깝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이것이 진정한 우정의 댓가라면 우린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맘먹은 것이다.
결국 우린 반죽음 상태로 우리가 치른 시험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게 되었고..
마지막 관문을 벗어난 우린 차가운 바닥에 함께 누워 더욱 환하게 밝아진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었다.
수 많은 관문들을 통과해오며 감수해야 했던 고통들을 거친 숨과 함께 하늘
위로 날려보냈다.
우리의 몸 속에서 빠져 나온 그 숨결은 하늘 높이 올라가 수많은 별들을 만들었다.
사랑의 별, 우정의 별, 의리의 별, 추억의 별, 믿음의 별, 위로의 별들을...
운: 하아~ 너 말이 맞았어. 별 하나 없는 하늘도 아름다워 보일 때가 있는 거였어.
이대리: 짜식. 날 미친놈 취급할 땐 언제고..
운: 몸 괜찮냐?
이대리: 이게 괜찮은 걸로 보이냐? 말이라도 할 수 있는게 다행이다.
녀석은 내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주고는 담배를 하나 물려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입에도 하나 물며 말했다.
운: 우리 중3때 죽도록 맞고 담배 처음 폈던 날. 그 날 몸이 아파서 그런건지 이상하게도 담배 맛이 좋았잖아. 지금도 그 날처럼 담배맛이 좋을까?
이대리: 그때보다 더 맞았는데 아무래도 더 좋겠지. 근데 라이터 멀쩡하냐?
운: 그래. 라이터 살 돈 없어서 조심조심 주먹 날렸다.
이대리: 어쩐지 그 자식들 니 주먹 맞고 꼼짝도 안 하드라.
운: 하하. 이제야 눈치챘구나.
하늘을 향해 담배연기를 크게 내뿜었다.
하늘로 풀려 올라가던 연기는 바람에 실려 아늑한 곳으로 금새 사라져갔다.
운: 아~ 역시 맞고나서 피는 담배맛은 죽이는 구나. 큰일이네. 이 맛에 너무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이대리: 그리울 때 말해라. 실컷 패 줄테니..
운: 하하. 그나저나 한번 미치고 나니 속이 다 후련하다.
이대리: 그러게말야. 사람들이 미치는 이유가 이런 이유에선가봐. 그러고보면 우린 좋은 경험을 한 거야. 힘들고 어려울 땐 한 번씩 미쳐야 한다는 것을 알게됐으니까 말야.
운: 근데 그 미치는 것도 때와 장소는 있는 거겠지.
이대리: 아마도.
운: 우린 같이 군대가면 절대 안 될 거야. 하극상 일으켜 둘 다 영창갈 거 뻔하거든.
이대리: 걱정 마라. 내가 먼저 가서 애들 교육시켜두고 있을 테니.
운: 하하. 그 방법도 괜찮네. 그럼 졸업하자마자 바로 지원해서 가라. 친구 덕 좀 보게.
녀석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고 나 또한 녀석처럼 웃었다.
웃을 수 없는 상황에 웃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미소짓게 만드는
밝은 희망이 몸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우리들의 우정이었다.
이대리: 너 오늘 일에 대해 후회 없냐? 내일부터 진짜 죽을지도 모르는데...
운: 친구와 함께 죽는다면 한 번 죽어볼만 하지. 근데 내일을 두려워하며 오늘을 불안에 떨며 보내지 말자. 내일 일은 내일 가서 생각하자고. 그게 맘 편한거야.
이대리: 짜식.. 우린 절대 선배들처럼 이런 양아치 짓은 하지 말자.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운: 나도 마찬가지 생각이다. 이렇게 당해야 하는 후배들의 기분을 느꼈으니 절대 그럴 일 없겠지. 그러고 보면 소중한 깨달음을 얻은거구나.
이대리: 나름대로 멋진 추억도 생긴 거고...
운: 훗. 10년 뒤엔 오늘을 떠올리며 미소지을 수 있겠지?
이대리: 미소 뿐이냐? 눈물도 흘리겠다. 내가 그 때가서 글만 쓸 줄 안다면 이 추억을 소설로 꼭 써보마. 아주 베스트셀러 되겠다.
운: 그럼 기대하지 말아야겠구나. 국어 책에 침으로 연못 만드는 놈이니까.
이대리: 이 자식이 날 아주 띄엄띄엄 보네. 내 글 읽으면서 눈물 흘리면 죽는다!
운: 색히. 정말 약속하는 거냐?
이대리: 그래. 이 하늘이 증인이다. 10년 뒤에 책이나 살 준비 하라고.
운: 하하. 잘하면 친구덕에 영웅 되겠는걸?
이대리: 미친놈. 넌 악역으로 만들어 버릴 거다.
운: 개자식.
죽을 듯이 맞은 우리였지만 우린 고통스러워 하거나 억울해 하면서 이를 갈지 않았다.
서로에게 느낄 수 있는 우정에 대한 뿌듯함 때문인지 평상시 보다 더 편안했고
여유있었다.
운: 후우~ 오늘 우리가 벌인 일들.. 이거 잘 한 짓일까 모르겠다.
이대리: 후회되냐?
운: 친구와 함께 한 일에 후회는 없다.
이대리: 그러면서 뭘 걱정하냐.
운: 우릴 보고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이대리: 글세다.. 10년 뒤에 그 글을 읽은 사람들이 평가해주겠지.
운: 아마 미친놈들이라 하겠지?
이대리: 훗.. 그 소리 들을까 두렵냐?
운: 임마. 나 말고 미친놈이 한 명 더 있는데 뭐가 두렵겠냐.
운이의 말처럼 그랬다.
우리가 만약 미친놈 취급을 받는다 하더라도 둘이 함께 있다면 세상이 두렵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대리: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되지?
운: 서기 1995년 11월 17일.
이대리: 1995년 11월 17일이라.. 지금 이 시간에 마음 속 시계바늘을 멈춰둬라. 우리 죽기 전에 타임머신 개발 되면 이 날로 한 번 돌아오는 거다.
운: 그래. 좋다. 또 실컷 맞고 이 아름다운 하늘을 이불삼아 누워보자고. 그리고 죽이는 담배맛도 느끼고 말야.
바닥에 뺨을 묻으며 녀석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언제 바라봐도 항상 듬직하고 믿음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불러도 불러도 질리지 않는 친구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이대리: 운아..
운: 응?
이대리: 친구란 뭘까?
운: 친구라.. 지쳐 쓰러질것만 같은 시기에 서로 위안이 되어주고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아닐까?
이대리: 그래.. 그게 바로 진정한 친구겠지. 우리 이 하늘 앞에서 한가지 더 약속할까?
운: 무슨 약속.
이대리: 그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흐른다 해도 절대 친구란 이름에 녹이 슬게 하지 말자고. 언제나 부르면 달려올 수 있는 변함없는 자리에서, 그 어느 날을 회상해도 항상 기쁘게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친구로 함께하자고. 약속 할 수 있지?
운: 그래. 매일 매일 기름칠을 해서라도 친구란 이름을 빛내보마. 우릴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동자도 빛나게 할 수 있는 그런 친구가 되도록. 약속할게.
녀석이 밝은 미소를 보이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친구가 내민 그 손가락에 나 또한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하나로 만들었다.
싸늘한 바람이 우리의 체온을 서서히 떨어뜨렸지만 우리들 손가락을 타고
각자의 몸으로 퍼져가는 우정의 전율은 우리들 몸을 난로보다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뿌려둔 밤하늘에 별빛들은 마치 온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는 태양처럼
우리들 마음 구석구석을 환하게 비춰주었다.
내게 진정한 친구란 무엇인지 알게 해준 녀석.
흔히 불리우는 친구라는 두 글자를 더욱 값지게 만들어준 녀석.
내 인생에 없어선 안 될 꼭 필요한 준비물인 녀석.
내 분신과도 같은 그 녀석은 변함없는 내 소중한 친구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참된 친구란..
무거운 짐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 주기 위해 도움의 손을 뻗치는 사람이다.
참된 친구란..
마음이 아플때 의지하고 싶은 사람이다. 그러나 의지하여도 그것을 이용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다.
참된 친구란..
쓰러져 있을때 곁에서 무릎을 꿇어 일으켜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건강하게 일어섰을때는 무릎꿇고 일으켰던 일을 잊어주는 사람이다.
참된 친구란..
슬플때 기대어 울 수 있는 어깨를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기쁠 때 같이 함박웃음을 지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참된 친구란..
내가 울 때 그의 얼굴에도 몇가닥의 눈물이 보이는 사람이다.
참된 친구란..
모든 사람에게 최악의 말을 듣고 있을 때에도 최선의 말을 해주는 사람이다.
내 슬픔을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항상 나를 위해주는,
내 등 뒤의 튼튼한 울타리.
바로 친구입니다.
이런 친구가 속상한 일이 생겨 힘들어 할 때..
아무 걱정없이 푹 쉬다 갈 수 있도록
내 어깨 한 쪽을 비워두고 있는 건 어떨까요?
아니, 먼저 친구에게 내 어깨를 빌려줘 보는 건 어떨까요?
Written by 이대리 이대리 유머공장 - http://cafe.daum.net/2daeri
친구와의 약속.. [하편]
놀이터에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야구모자를 푹 눌러 쓰고 걸어오는 운이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이 들여다 보이는 거리는 아니었지만 평상시에 잘 쓰지 않던 야구모자를
쓰고있는 걸 보니 그의 얼굴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래서인지 내 가슴이 급속도로 시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힘없이 걸어온 녀석이 내 옆에 어깨를 나란히 하며 앉더니 억양없는 말투로
조용히 물었다.
운: 피아노 잘 치고 왔냐?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묻는 녀석에게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고 왜 그런 멍청한 짓을
했냐며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구멍까지 차있던 그 말을 조용히 삼켜야만 했다.
녀석처럼 나 또한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하는게 날 거라 생각됐기 때문이다.
이대리: 그래. 외롭게 잘 치고왔다.
한 템포 늦게 대답을 하고서는 고개를 반쯤 돌려 녀석의 얼굴을 비스듬히 바라봤다.
얼굴에 붙여진 대일밴드와 모자창에 가려진 퉁퉁 부은 눈이 내 눈에 들어왔고 그것은
드라이아이스를 투여한 것처럼 내 가슴을 더욱 시리게 만들었다.
녀석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있자 운이가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정면 그대로 시선을 두며
입을 열었다.
운: 오늘 어떤 색히가 시비 거는 바람에 한 판 떴다.
그래서 학원도 빠진거고. 근데 신경 쓸 거 없어.
내 얼굴 이정도 망가졌으면 그 색히는 어떻게 됐을지 짐작이 가지?
녀석은 자신이 행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숨기기 위해 선수를 쳐서 내게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을 찔러댔고 내 눈물샘을 자극시키고야 말았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녀석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돌렸던 고개를 바로 했다.
눈에 안약을 투여한 것처럼 눈물은 줄기차게 흘러댔고 그 떨어지는 눈물 방울이
녀석에게 들키지 않게끔 비나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녀석도 내 망가진 얼굴을 보고싶지 않았는지 계속해서 앞만 주시했고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있는 내게 다정한 투로 물었다.
운: 근데 정말 나 보고싶어서 나오라고 한 거냐?
침을 삼켜 울컹거리는 목을 가다듬고 녀석에게 조용히 대답했다.
이대리: 그래. 갑자기 보고싶어서..
운: 색히. 그 동안 나한테 미안했나보구나.
내 말을 끊어버린 녀석은 길게 한 숨을 내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운: 이젠 더이상 나한테 미안할 짓 안해도 되게 생겼다.
일락... 취소됐단다.
그니까 더이상 티켓 문제로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선배들한테 더이상 맞을 일도 없을 거야.
나 대신 모든 것을 덮어쓴 녀석은 아직도 불안에 떨고 있을지도 모를 친구를
안심시키려고 또 한 번 거짓말을 했다.
그것도 하루도 안 되어 들통날 거짓말을.
녀석이 그렇게 나올 수록 내 마음은 더욱 힘들어만 갔다.
비록 내 등에 있는 짐은 덜어주었을지 몰라도 내 마음의 짐은 더욱 무겁게
만들고 있었기에.
녀석에게 속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이번엔 너의 선택이 틀렸다고.
오늘 너가 한 행동은 빚지고 못사는 내게 커다란 마음의 짐을 실어준 것이라고..
이대리: 몸은 좀 괜찮냐?
나도 녀석처럼 앞만 주시한 채 조용히 물었다.
그러자 녀석은 친구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 좀 전과는 틀린 절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운: 너, 내 맷집 아직도 모르냐?
죽도록 맞아도 끄떡없다는 걸?
왠만한 주먹은 나한테 솜방망이나 다름 없어.
이대리: ...
운: 근데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둘 다 꼴이 우습긴 우습구나.
누가 보면 둘이 싸운 줄 알겠지? 하하.
녀석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고 웃어댔지만 그 웃음소리는 내게 슬픈멜로디처럼
들려왔다.
그 슬픈 소리에 끌려 내 고개는 다시 한 번 녀석에게로 반쯤 돌아갔다.
그렇게 녀석의 망가진 옆모습을 다시 한 번 바라보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픔이 밀려왔다.
거울에 비친 내 망가진 얼굴을 볼 땐 참을만 했지만 나 때문에 이 지경이 되버린
친구의 얼굴을 보고있자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운: 그동안 나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내가 화도 많이 내고 서운하게도 하고 그랬는데 정말 미안하다.
사실 겉으론 냉정하게 대했지만 나 역시 맘은 편치 않았어.
너를 모르는 척 외면할 때마다 내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거든.
근데 다른 녀석이었더라면 그럴 이유가 없었겠지만 내가 가장 아끼는
녀석이기에 그랬던 거야. 이 점 이해해줄 수 있지?
앞으로는 더이상 인상 쓰지 않고 밝게 웃기만 할게. 이렇게 말야.
녀석은 씨익 웃으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 또한 그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고 눈물을 억지로 삼키며 녀석에게
슬픈 미소를 보였다.
흉터로 얼룩진 녀석의 얼굴은 내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지만 내 마음 곳곳에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징그러울 수도 있는 상처들이지만 그 상처들 하나 하나가 날 위한 마음들이란 것을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보기 흉한 얼굴은 내 두 눈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춰졌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대 자연의 모습마저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대리: 운아..
포근한 목소리로 친구의 이름을 부르자 운이가 눈빛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대리: 너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별 하나 안 보이는 밤하늘이 아름다워
보일 때가 있었냐?
운: 임마. 난 별이 있어도 하늘을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 없다.
이대리: 그럼 나만 그런 걸까?
난 오늘 밤 하늘이 무척이나 아름다워 보인다.
운: 색히. 지금 시 쓰냐?
이대리: 그래서인지 만약 타임머신이 개발된다면 오늘로 꼭 한 번쯤 돌아와보고 싶다.
운: 참나. 전봇대에 머리라도 박고 왔나.
이런 우중충한 날씨가 뭐가 좋다고 타임머신씩이나 타고 돌아오냐.
이대리: 그래. 흐린 하늘이긴 하지만 그런 하늘이 가끔 아름다워 보일 때도 있나봐.
그래서 이 신비한 하늘을 또 보고 싶은 거고.
분명, 별 하나 안 보일정도로 흐릿한 날씨였지만 한 친구의 멋진 우정이 이 우중충한
하늘을 환한 빛으로 물들였기에 아름다울 수 밖에 없었다.
아니, 내 마음을 환하게 비춰서 어두운 하늘을 그렇게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오늘의 하늘은 내게 특별하고 가치있는 하늘이다.
소중한 추억이 담겨있고, 눈물나는 감동이 담겨있고, 빛나는 우정이 담겨있는 하늘이기
때문이다.
그리움의 목적지가 될 오늘의 밤 하늘.
친구가 이 하늘에 별을 쏘아 올렸다면 이번엔 내가 그 별을 환하게 비출 차례이다.
친구가 오늘이란 날짜에 우정이란 펜으로 문신을 새겨두었다면 이번엔 내가 그 문신에
밝은 색을 넣을 차례이다.
먼 훗날,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때 오늘을 지나치지 않게끔...
오늘의 날짜를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것은 이제 나만의 몫이었다.
이대리: 먼저 일어나야겠다.
자리에서 엉덩이를 때며 일어나자 운이가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운: 뭐? 불러놓고 먼저 가겠다고?
이대리: 지금 당장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 그래.
운: 어딜?
이대리: 하늘에 빛을 뿌리러.
운: 이게 오늘 시집 읽다가 나왔나. 자꾸 이상한 소리만 해댈래?
이대리: 라이터 있냐?
운: 이 자식봐라. 피곤한 사람 기껏 불러내서 혼자 남겨두고 가는 것도 모자라
이젠 강도짓까지 하려고 하네. 너도 라이터 있잖아. 임마.
이대리: 오늘은 라이터를 두 개 쓰고 싶다.
하나로는 이 하늘에 빛을 내기 힘들거든.
운: 개자식.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남의 물건을 삥뜯으려 하다니.
불필요한 색히! 가져가라. 가져가.
그거 얼마나 한다고.. 치사 빤스한 놈.
라이터를 받아든 나는 이 자리를 벗어나기 전에 녀석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이대리: 백운. 그거 아냐?
운: 뭘 임마.
이대리: 진정한 우정은 역경속에서 시험된다는 것을.
넌 그 시험에 합격한 놈이다.
친구라 불리어도 될만한 자격이 있는 놈이라고.
해야 할 말이 더 있었지만 그 말은 소리내어 하지 않았다.
빤히 쳐다보는 친구에게 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이번엔 내 차례야. 내가 시험을 볼 차례.."
녀석은 내가 모든 것을 알고있는 건 아닐까하는 마음으로 조바심을 느끼고 있는지
날 바라보는 눈빛이 흔들리는 듯 했다.
녀석의 입에서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 나오기 전에 등을 돌려 놀이터 밖으로
걸었다.
녀석은 아무 말 없이 멀어지는 날 보고만 있었고 난 얼마전 그가 내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놀이터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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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신경을 안 써! 친구는 내 재산이야!
그 재산에 금이 가고 있는데 어떻게 모른 척 하냐고!!
넌 내가 남들한테 당하게 되면 모른 척 가만 있을 거야!
대답해봐! 색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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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아.. 그 날 아무런 대답도 못해서 미안해.
늦었지만 오늘 그 대답을 해줄게.
내 발걸음이 멈추는 곳에서 그 대답을 해줄게.
그 대답을 하고나면 너도 오늘의 하늘을 보며 아름답다 말할지도 모를 거야.
잠시동안 잊고있었던 분노를 두 주먹에 실으며 걸음을 빨리했다.
이 분노가 가시고 나면 친구에게 대답을 해줄 수 없을지도 모르기에 빨리
걸어야만 했다.
한참을 걸어서야 내 걸음은 멈추었고 그 곳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담뱃불 몇 개가 왔다갔다 하는 것이 보였다.
평상시 같았더라면 두려운 불빛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오늘은 반가운 불빛들이었다.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서는 그 담뱃불이 있는 곳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그렇게 다가가자 벤치에 앉아있는 선배 세 명이 어렴풋이 보였고 내 모습을 먼저 확인한
김형이 나를 반겨주었다.
예정대로라면 먼저 주먹부터 날아와야 했던 상황이지만 운이의 희생으로 인해
지금 나의 상황은 하루 아침에 극과 극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김형: 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너 아주 잘 왔다.
형들이 너의 반전드라마에 감탄해서 통닭이라도 한 마리 사주려고 했거든. 하하.
어떠냐? 형들이랑 같이 한 잔 하러 갈까?
내게 좋은 방향으로 뒤바뀌어 있는 상황이었지만 난 이런 상황 속에서 놈들처럼
여유롭게 웃을 수 없었다.
놈들과 몸을 마주하고 선 채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을 뿐이었다.
이대리: 꼭 그래야 했나요?
살기어린 눈빛과 표정을 한 채, 내 감정만큼이나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그러자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강형이 톤을 올리며 되물었다.
김형: 무슨 소리야? 꼭 그래야 했냐니?
이대리: 죄라고는, 친구를 너무 사랑하는 죄밖에 없는 한 녀석을
그런식으로 무참히 짓밟아야 했냐고요.
김형: 이 자식이 뭘 잘못 먹었나. 무슨 헛소리야?
이대리: 운이가 들고왔다는 티켓 값!
그거.. 운이 몫입니다.
그러니까 전 한 장도 못 팔은 거고요.
이제야 감이 좀 잡히나요?
김형: 뭐야! 너.. 한 장도 못 팔은 거였어?
개색히..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이제야 상황파악이 되었는지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던 강형이 김형과는 다른 분위기의
말투로 말했다.
강형: 잠깐. 그럼 너 한 장도 못팔고 지금 니 발로 찾아와서
죽여달라고 큰 소리 치고있는 거냐? 아주 맞고 싶어서 환장을 한 놈이구나.
이대리: 아니요.
오늘은 맞으러 온 게 아니라 싸우러 온 겁니다.
그냥 맞고만 있진 않겠다는 겁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놈들을 노려봤다.
윤형: 너 지금 미쳤냐?
이대리: 미치지 않고서야 하늘같은 대선배님들께 이렇게 대들 수 없겠죠.
윤형: 훗. 오늘 정말 죽어서 나갈지도 모를텐데 두렵지 않냐?
이대리: 죽을 각오한 놈이 뭐가 두렵겠습니까.
김형: 이 미친색히가 진짜..
이대리: 가끔씩 이런 미친 놈 하나 보는 것도 재밌지 않습니까.
후배라 깔보지 말고.. 인원수 많다고 건방 떨지 않는게 좋을 겁니다.
미친 놈이 죽을 각오까지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거든요.
그리고 커다란 빚을 갚으러 온 놈은 그 빚을 갚을 때까지 죽을 각오로 덤비니
미친개에게 물리기 싫으면 정신 바짝 차리세요.
두 주먹에 라이터를 꽉 쥐었다.
나보다 한 살 많은 놈들이라 주먹의 파워가 나보다 뛰어나겠지만 라이터와 나의 분노가
가득 실린 주먹은 나이 벽을 깨부실만한 엄청난 파워를 낼 거라 자신했다.
선배에게 먼저 주먹을 날릴 순 없었기에 주먹이 날아들기를 기다렸다.
김형이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 얼굴에 주먹을 날렸고 난 기다렸다는 듯이
김형의 얼굴에 주먹을 강하게 날렸다.
김형은 뒤로 물러나면서 고통을 느껴야 했지만 나는 분노에 가려 아픔이 느껴지질
않았다.
이번엔 윤형을 향해 빠른 스피드로 주먹을 날렸고 동시에 강형이 날린 주먹에 맞아야
했다.
예상치 못한 주먹에 맞아 잠시 주춤거리긴 했지만 아픔따윈 잊어버린 채 놈들을 향해
악착같이 덤벼들었다.
그 동안 억울하게 당해야만 했던 온갖 서러움들을 두 주먹에 가득 담아 놈들에게도
똑같은 방식으로 되돌려주었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한 번에 씻겨내려가는 것처럼 너무나 통쾌했다.
있을 수 없는 현실을 깨부시고 이렇게 미치는 것이 너무나 후련했다.
그러나 그 통쾌함은 오래 가질 못했다.
치고 치이는 싸움이 얼마 못 가서 한쪽의 일방적인 폭력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너무 쉽게 말이다.
내가 나이도 어리고 쪽수도 부족하고 얼굴도 이미 망가진 터라 크게 불리한 싸움이란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오기와 분노로 무장하면 그들을 상대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들 또한 쉽게 무너질 수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나이 어린 놈에게 맞으면 안 된다는 그들의 자존심이 바로 그 이유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분노는 그들의 자존심과 비기게 되는 것이고 결국 3:1라는 불공편한
숫자 그대로의 상황이 되기에 내가 맞을수 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티코 중고차로 그랜져 신형차 세 대와 줄다리기를 하는 모습이나 다름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들에게 또 한번 희생양이 되어 처참히 짓밟히게 되었다.
자존심이 상한만큼 분노마저 느꼈는지 놈들은 날 죽일 기세로 짓밟아댔다.
힘없이 쓰러진 나를 일으켜 때리고, 쓰러지면 다시 일으켜 때리는 것을 계속 반복했다.
얼굴이 터지고 피가 쏟아져 나왔지만 날 위해 희생한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며
난 모든 것을 인내할 수 있었다.
눈가에 아른거리는 그 녀석의 얼굴을 보며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운아..
너가 남들한테 당하면 가만히 있을 수 있냐고 내게 물었지?
지금 내 몸이 그 질문에 대답을 해주고 있어.
내 몸이 말하잖아.
자신은 망가져도 괜찮으니 친구를 위해 불길 속이라도 뛰어들라고.
그런데 사실 난, 이런 대답을 할 자격도 없는 놈이야.
이건 내가 벌인 불장난이고 애초부터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으니까.
너가 내 몫을 대신해서 인내했지만..
결국 내 몫은 내가 찾아가게 되는 거야..
이제 더이상 날 위해 내 짐을 빼앗아 가려 하지마..
그것이 나를 위하는 거고 너를 위하는 거야..
이렇게 서로를 망가뜨리며 우정을 확인시켜 주지 않아도
우리 충분히 느낄 수 있잖아.
이제 너와 나 1:1 셈셈이라 치자..
그러니까 나 이제 너한테 빚진거 없어..
더이상 날 빚지게 만들지 말아줬으면 해..
이렇게 육체가 아픈 건 견딜 수 있지만...
맘이 아픈 건 견딜 수 없거든..
더이상 신음소리를 낼 힘도 없게끔 만들어버린 놈들은 피로 얼룩진 내 모습에
만족을 했는지 그만 주먹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숨을 헐떡거렸다.
김형: 헉헉... 넌 매일매일 이렇게 반쯤 죽여줄 거야.
알았냐? 십색햐!
윤형: 개같은 색히. 감히 선배한테 대들어? 아주 서서히 죽어봐라.
그들은 바닥에 쓰러져있는 내게 쌍스러운 말을 내뱉더니 씩씩 거리며 놀이터
출구쪽으로 걸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있는 내 모습은 참혹했지만 그제서야 난 안도의 한 숨을
크게 내쉴 수 있었다.
친구가 짊어준 가장 무거웠던 마음의 짐 하나를 스스로 없앴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젠 죄책감의 무게에 짓눌리며 힘들어하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안도의 한 숨을 길게 내쉴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때였다.
놀이터 저쪽에서 낮고도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벼워진 내 마음을 다시 무겁게 만드는 목소리가.
"누가 나가라고 했죠?"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힘들게 고개를 틀자, 입구를 막고있는 한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야구모자에 반쯤 가려진 얼굴.
그는 운이었다.
운: 이대리! 그 타임머신에 자리 하나 남냐?
나도 오늘 밤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졌다!
적지에서 아군을 만나면 당연히 반가워야 했지만 지금의 상황에선 그렇지가 못했다.
이대리: 너.. 이자식.. 왜 따라온 거야!
운: 친구따라 강남도 간다던데 겨우 이 정도도 못 따라올까!
라이터 빌려갈 때부터 수상하다 했더니 역시나였군.
괘씸한 놈. 모든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나를 속이다니.
이대리: 너 정말 죽고싶어 환장했어!
운: 전에 너가 말했었지?
세상과 타협이 안 될 땐 한 번쯤 미쳐보는 거라고.
그래서 나도 앞 일 생각하지 않고 한 번 미쳐보려한다.
기왕 추억 만들거 기억에 오래 남도록 멋지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우리 둘 사이에 서있는 놈들은 우리들의 대화가 유치하다는 듯이 비웃음을 터뜨려댔고
운이는 그런 놈들의 웃음따윈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다시 외쳐댔다.
운: 그런데 그거 아냐!
한 놈이 미친 짓을 하면 그건 분명 미친 짓이지만 둘이서 같이 미친 짓을
하면 그건 미친 짓이 아니라는 것을!
그건 바로.. 의리다! 의리!
친구 혼자 외롭게 미치는 꼴은 못 봐주겠다!
녀석의 우정과 의리는 내가 따라가고 싶어도 따라갈 수 없는 것이었나 보다.
난 그런 녀석때문에 또 한 번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이대리: 개자식... 니가 날 빚쟁이 만들려고 작정을 했구나..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선배들은 더이상 못 봐주겠다는 듯
운이를 향해 주먹을 쥐고 다가갔다.
강형: 미친색히들. 아주 꼴깝을 떠는구먼.
그러나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운이가 그들에게 달려가 잽싸게 발을 날렸다.
그리고 내가 그랬듯이 녀석도 3:1의 싸움을 벌이며 밀고 밀리는 상황을 연출했다.
좀 전까지만해도 온 몸에 힘이 빠져 더이상 일어날 수 없는 나였지만 녀석이 그렇게
싸움을 하고있는 모습이 내 바로 앞에서 펼쳐지자 내 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힘이 펄펄 끓기 시작했다.
재빨리 몸을 추스리고 일어나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나도 질 수 없다는 듯 친구와 하나가 되어 싸웠다.
그런데 3:1에서 3:2가 된 것 뿐인데 혼자서 싸울때와는 틀리게 막상막하의 싸움을 할 수
있었다.
이것이 의리의 힘일까?
선배들은 악착같이 달려드는 우리들에게 점점 지쳐만 갔고 우린 죽을 힘을 다해
그리고 죽을 듯한 고통을 참아가며 끝까지 쓰러지지 않고 팽팽한 싸움을 유지해갔다.
운이가 두 명에게 당하고 있을 땐 내가 그를 도왔고 내가 두 명에게 당할 땐
운이가 나를 도우며 싸웠다.
서로 한치의 양보 없는 숨막히는 싸움이 한참 진행되면서 비명소리가 여러 입에서 들려왔고
누구의 혈흔인지 알 수 없는 핏물이 서로의 주먹을 물들이고 있었다.
양쪽 모두 상처가 점점 커지면서 무언의 약속이라도 한 듯 잠시 냉전의 시간을 가졌다.
둘과 셋. 이렇게 양쪽으로 갈라져서 서로를 노려보며 거친 숨만 뿜어댔다.
그런데 남의 땅에서 싸움을 벌인 댓가인가?
참 비극 스럽게도 반갑지 않은 손님들이 저 멀리서 이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얼굴을 확인할 순 없지만 분명한 건 우리 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운이도 그들을 봤는지 시선을 내쪽으로 옮기며 물었다.
운: 헉헉.. 자신있냐?
녀석에게 대답대신 미소를 보이며 녀석의 오른쪽 주먹을 잡았다.
이대리: 아까 빌려간 라이터다.
이자는 못 쳐주겠다. 행운을 빈다.
녀석도 라이터를 주먹에 꽉 쥐더니 내게 여유로운 미소를 보였다.
친구와 함께 한다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는 것을 서로 미소로 대답한 것이었다.
우린 서서히 입가에 미소를 지웠다.
그리고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바로 앞에 있는 세 명의 선배들에게 날라차기를 하며 길을
뚫었다.
그렇게 뚫린 길을 달리고 달려 마주 달려오는 놈들에게로 다시 한 번 허공을 날으며
날라차기를 했다.
강한 패기와 의리로 똘똘뭉쳐 우리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놈들을 상대하며 악착같이
싸웠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있게 덤벼대는 우리였지만 우린 진실을 알고 있었다.
이 싸움은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는 것을..
아무리 의리로 똘똘뭉쳤다 하거늘 힘과 숫자의 원리를 깨부시기엔 역부족이라는 것을..
그렇게 얼마 되지 않아 우리들이 예상한 결과대로 그들에게 둘러싸여 피비린내가
날 때까지 맞고 또 맞아야 했다.
박형: 아! 샹! 피 났잖아! 씨바알...
김형: 헉헉...이 씨브랄넘들.. 니들 오늘 제삿날이다.
그들은 우릴 동그랗게 포위하고서 죽어라 공격했고 우린 서로의 몸을 감싸며
아픔을 견뎌냈다.
친구는 정말 그런 존재였나보다.
기쁨은 두 배로 느끼게 하고 아픔은 반으로 줄일 수 있게하는 존재.
우리의 몸은 그들로 하여금 소름돋칠 정도로 망가져가고 있었지만 우린 아픈 만큼
귀한 것을 얻어만 갔다.
그들이 날리는 발길질 만큼이나 서로의 몸을 더욱 감싸주려는 우리의 우정이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살색으로 된 얼굴이 빨간 색으로 물들어가고만 있었지만 그 핏물이 결코 아깝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이것이 진정한 우정의 댓가라면 우린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맘먹은 것이다.
결국 우린 반죽음 상태로 우리가 치른 시험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게 되었고..
마지막 관문을 벗어난 우린 차가운 바닥에 함께 누워 더욱 환하게 밝아진 하늘을
올려다 볼 수 있었다.
수 많은 관문들을 통과해오며 감수해야 했던 고통들을 거친 숨과 함께 하늘
위로 날려보냈다.
우리의 몸 속에서 빠져 나온 그 숨결은 하늘 높이 올라가 수많은 별들을 만들었다.
사랑의 별, 우정의 별, 의리의 별, 추억의 별, 믿음의 별, 위로의 별들을...
운: 하아~ 너 말이 맞았어.
별 하나 없는 하늘도 아름다워 보일 때가 있는 거였어.
이대리: 짜식. 날 미친놈 취급할 땐 언제고..
운: 몸 괜찮냐?
이대리: 이게 괜찮은 걸로 보이냐?
말이라도 할 수 있는게 다행이다.
녀석은 내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주고는 담배를 하나 물려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입에도 하나 물며 말했다.
운: 우리 중3때 죽도록 맞고 담배 처음 폈던 날.
그 날 몸이 아파서 그런건지 이상하게도 담배 맛이 좋았잖아.
지금도 그 날처럼 담배맛이 좋을까?
이대리: 그때보다 더 맞았는데 아무래도 더 좋겠지.
근데 라이터 멀쩡하냐?
운: 그래. 라이터 살 돈 없어서 조심조심 주먹 날렸다.
이대리: 어쩐지 그 자식들 니 주먹 맞고 꼼짝도 안 하드라.
운: 하하. 이제야 눈치챘구나.
하늘을 향해 담배연기를 크게 내뿜었다.
하늘로 풀려 올라가던 연기는 바람에 실려 아늑한 곳으로 금새 사라져갔다.
운: 아~ 역시 맞고나서 피는 담배맛은 죽이는 구나.
큰일이네. 이 맛에 너무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이대리: 그리울 때 말해라.
실컷 패 줄테니..
운: 하하. 그나저나 한번 미치고 나니 속이 다 후련하다.
이대리: 그러게말야. 사람들이 미치는 이유가 이런 이유에선가봐.
그러고보면 우린 좋은 경험을 한 거야.
힘들고 어려울 땐 한 번씩 미쳐야 한다는 것을 알게됐으니까 말야.
운: 근데 그 미치는 것도 때와 장소는 있는 거겠지.
이대리: 아마도.
운: 우린 같이 군대가면 절대 안 될 거야.
하극상 일으켜 둘 다 영창갈 거 뻔하거든.
이대리: 걱정 마라. 내가 먼저 가서 애들 교육시켜두고 있을 테니.
운: 하하. 그 방법도 괜찮네. 그럼 졸업하자마자 바로 지원해서 가라.
친구 덕 좀 보게.
녀석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고 나 또한 녀석처럼 웃었다.
웃을 수 없는 상황에 웃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를 미소짓게 만드는
밝은 희망이 몸 속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우리들의 우정이었다.
이대리: 너 오늘 일에 대해 후회 없냐?
내일부터 진짜 죽을지도 모르는데...
운: 친구와 함께 죽는다면 한 번 죽어볼만 하지.
근데 내일을 두려워하며 오늘을 불안에 떨며 보내지 말자.
내일 일은 내일 가서 생각하자고. 그게 맘 편한거야.
이대리: 짜식..
우린 절대 선배들처럼 이런 양아치 짓은 하지 말자.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운: 나도 마찬가지 생각이다.
이렇게 당해야 하는 후배들의 기분을 느꼈으니
절대 그럴 일 없겠지.
그러고 보면 소중한 깨달음을 얻은거구나.
이대리: 나름대로 멋진 추억도 생긴 거고...
운: 훗. 10년 뒤엔 오늘을 떠올리며 미소지을 수 있겠지?
이대리: 미소 뿐이냐? 눈물도 흘리겠다.
내가 그 때가서 글만 쓸 줄 안다면 이 추억을 소설로 꼭 써보마.
아주 베스트셀러 되겠다.
운: 그럼 기대하지 말아야겠구나.
국어 책에 침으로 연못 만드는 놈이니까.
이대리: 이 자식이 날 아주 띄엄띄엄 보네.
내 글 읽으면서 눈물 흘리면 죽는다!
운: 색히. 정말 약속하는 거냐?
이대리: 그래. 이 하늘이 증인이다.
10년 뒤에 책이나 살 준비 하라고.
운: 하하. 잘하면 친구덕에 영웅 되겠는걸?
이대리: 미친놈. 넌 악역으로 만들어 버릴 거다.
운: 개자식.
죽을 듯이 맞은 우리였지만 우린 고통스러워 하거나 억울해 하면서 이를 갈지 않았다.
서로에게 느낄 수 있는 우정에 대한 뿌듯함 때문인지 평상시 보다 더 편안했고
여유있었다.
운: 후우~ 오늘 우리가 벌인 일들..
이거 잘 한 짓일까 모르겠다.
이대리: 후회되냐?
운: 친구와 함께 한 일에 후회는 없다.
이대리: 그러면서 뭘 걱정하냐.
운: 우릴 보고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이대리: 글세다..
10년 뒤에 그 글을 읽은 사람들이 평가해주겠지.
운: 아마 미친놈들이라 하겠지?
이대리: 훗.. 그 소리 들을까 두렵냐?
운: 임마. 나 말고 미친놈이 한 명 더 있는데 뭐가 두렵겠냐.
운이의 말처럼 그랬다.
우리가 만약 미친놈 취급을 받는다 하더라도 둘이 함께 있다면 세상이 두렵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대리: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되지?
운: 서기 1995년 11월 17일.
이대리: 1995년 11월 17일이라..
지금 이 시간에 마음 속 시계바늘을 멈춰둬라.
우리 죽기 전에 타임머신 개발 되면 이 날로 한 번 돌아오는 거다.
운: 그래. 좋다.
또 실컷 맞고 이 아름다운 하늘을 이불삼아 누워보자고.
그리고 죽이는 담배맛도 느끼고 말야.
바닥에 뺨을 묻으며 녀석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언제 바라봐도 항상 듬직하고 믿음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불러도 불러도 질리지 않는 친구의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이대리: 운아..
운: 응?
이대리: 친구란 뭘까?
운: 친구라..
지쳐 쓰러질것만 같은 시기에 서로 위안이 되어주고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아닐까?
이대리: 그래.. 그게 바로 진정한 친구겠지.
우리 이 하늘 앞에서 한가지 더 약속할까?
운: 무슨 약속.
이대리: 그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흐른다 해도 절대
친구란 이름에 녹이 슬게 하지 말자고.
언제나 부르면 달려올 수 있는 변함없는 자리에서, 그 어느 날을
회상해도 항상 기쁘게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친구로 함께하자고.
약속 할 수 있지?
운: 그래. 매일 매일 기름칠을 해서라도 친구란 이름을 빛내보마.
우릴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동자도 빛나게 할 수 있는 그런 친구가 되도록.
약속할게.
녀석이 밝은 미소를 보이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친구가 내민 그 손가락에 나 또한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하나로 만들었다.
싸늘한 바람이 우리의 체온을 서서히 떨어뜨렸지만 우리들 손가락을 타고
각자의 몸으로 퍼져가는 우정의 전율은 우리들 몸을 난로보다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뿌려둔 밤하늘에 별빛들은 마치 온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는 태양처럼
우리들 마음 구석구석을 환하게 비춰주었다.
내게 진정한 친구란 무엇인지 알게 해준 녀석.
흔히 불리우는 친구라는 두 글자를 더욱 값지게 만들어준 녀석.
내 인생에 없어선 안 될 꼭 필요한 준비물인 녀석.
내 분신과도 같은 그 녀석은 변함없는 내 소중한 친구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참된 친구란..
무거운 짐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 주기 위해
도움의 손을 뻗치는 사람이다.
참된 친구란..
마음이 아플때 의지하고 싶은 사람이다.
그러나 의지하여도 그것을 이용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다.
참된 친구란..
쓰러져 있을때 곁에서 무릎을 꿇어 일으켜 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건강하게 일어섰을때는 무릎꿇고 일으켰던 일을
잊어주는 사람이다.
참된 친구란..
슬플때 기대어 울 수 있는 어깨를 가진 사람이다.
그리고 기쁠 때 같이 함박웃음을 지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참된 친구란..
내가 울 때 그의 얼굴에도 몇가닥의 눈물이 보이는 사람이다.
참된 친구란..
모든 사람에게 최악의 말을 듣고 있을 때에도
최선의 말을 해주는 사람이다.
내 슬픔을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항상 나를 위해주는,
내 등 뒤의 튼튼한 울타리.
바로 친구입니다.
이런 친구가 속상한 일이 생겨 힘들어 할 때..
아무 걱정없이 푹 쉬다 갈 수 있도록
내 어깨 한 쪽을 비워두고 있는 건 어떨까요?
아니, 먼저 친구에게 내 어깨를 빌려줘 보는 건 어떨까요?
Written by 이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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