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만남 아저씨……. 나 아저씨 사랑해도 돼? 엽기국(國) 발랄공주 다음날 아침 강의실. ‘아이고 머리야. 골이 반으로 쪼개지네, 아주!’ 선영은 우거지상으로 책상위에 엎어져 있었다. 말 그대로 시체다, 시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은 그녀는,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 10시 15분 전이었다. 선영은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재빨리 문자를 보냈다. 「야! 윤희영. 빨랑 안와? 후딱 뛰어와라. 수업시작하기 15분 전이야. (-_-;)」 딩동- ‘어라? 이게 무슨 소리야?’ 문자 소리에 놀란 선영은 자신의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가방 속에서 희영의 핸드폰을 발견하고는, 제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메시지 표시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참! 내가 가지고 있었지? 에라~ 모르겠다. 그래. 실연당한 녀석은 하루정도 결석해도 돼.’ 선영은 더 이상 생각하기 귀찮다는 듯 다시 강의실 책상위로 무너져 내렸다. 그때였다. 누군가 선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이씨~ 뭐야? 나 오늘 건들지 말라니까! 시체 훼손 금지. 몰라?!” 일그러진 얼굴로 버럭 고함을 지르며 돌아보는 선영! 그리고 곧 자신을 깨운 대상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누구세요? 웬 붕어 한 마리가 허공을 둥둥 떠다니십니까!?” 희영이었다. 두 눈이 팅팅 불어서 쌍꺼풀의 형체가 사라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다만 눈이라고 짐작되는 곳에는 큼직한 살 덩어리 두개가 붙어서 끔뻑거리고 있었다. “풉!” “야……. 웃지 마.” 희영이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지켜보는 선영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배를 잡았다. “너 진짜 용감하다. 그러고 버스타고, 지하철 갈아타고 학교까지 온 거야?” “그럼... 걸어 오냐.” “못살아 정말. 아침은 먹었어? 속은 괜찮아?” 선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희영은 양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을 쉬었다. “말도 마. 어제 밤새도록 토하고, 또 토하고. 아침에도 토했어. 위장을 꺼내가지고, 깨끗이 빨아서 다시 넣었으면 좋겠다. 우욱!” “으이구. 그러게 왜 이기지도 못할 술을 그렇게 마셔 대냐? 응? 이따가 점심때 해장하자. 야! 그리고 그런 소리는 딴 데 가서 하지 마. 내 앞에서만 해라. 위를 꺼내느니 어쩌느니.” 선영은 헬쓱한 얼굴로 희영을 보며 밉지 않게 눈살을 찌푸렸다. 저 이쁘게 생긴 입에서, 틈만 나면 저런 엽기적인 소리가 아무렇지 않게 새어나오다니. “……선영아.” “왜?” “나...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마지막 말을 남긴 희영은, 선영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멍하니 선영을 바라보며 두 눈을 힘겹게 끔뻑거렸다. 꿈뻑. 그리고 다시 한번 천천히 꿈뻑. 희영의 표정은 몹시 진실했다. ‘내 눈에 재앙이 닥쳤어요. 너무 무거워요! 눈을 뜨기가 힘들어요.’라고.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바람 빠진 웃음이 새어나오는 선영. 정말 못 말린다니까. 학교에서 희영은 아주 유명했다. 일명- 발랄국(國) 엽기공주. 처음 희영을 보는 사람들은, 청순가련한 자태와 섹시미가 오가는 그 팜므파탈적인 이미지에 눌려 함부로 말을 걸지 못했다.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부류의 사람으로 보인다고나 할까. 하지만 일단 용기 내어 말을 걸어보고, 몇 마디 주고받으면 그걸로 게임 오버(Game Over). 희영에게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걸 천진함이라고 표현해야할지, 솔질함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아니면 순진함일 수도. 쓰러져 있는 희영을 바라보는 선영의 눈에 따뜻함이 가득 실렸다. ‘그래 자둬, 지난 두 달간이 꿈이었던 것처럼. 며칠 푹 자구, 잘 먹구. 그렇게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잊어 질 거야. 내가 옆에 있어줄게. 희영아.’ * * * 선영은 애살이 많은 편이었다. 부대끼는 속이 괴로웠지만, 꾹 참았다. 그리고 교수님 말씀을 부지런히 노트에 옮겨 적고 있었다. 당장 다음 주에 중간고사가 닥쳐왔기 때문이다. ‘그래, 이 한 몸 친히 희생하여, 두 사람이 빛을 보는 거야!’ 비장한 눈빛을 빛낸 선영은, 다시 한번 두 눈에 불을 켜고 노트 필기에 집중했다. 문득 선영은 필기하다말고,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희영을 보았다. 희영은 흠칫하고 놀라더니, 곧바로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버렸다. 선영은 똑똑히 보았다. 희영이 엎어져 있던 책상 옆으로 흥건히 괴어있는 눈물 자국을. ‘바보. 괜찮은 척 하고 있어도, 니가 울고 있는 거 다 안다고.’ 후우. 선영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필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자꾸만 나른한 졸음이 몰려왔다. 교수님의 말씀이 귀로 들어가서는 코로 줄줄 새어나오는 것만 같았다. “이것이 중력의 역장이다. 여기서 지구 중심까지의 거리가…….” 희영은 다시 반대쪽으로 가만히 고개를 돌려서 선영이를 보았다. 뭐를 저렇게 열심히 적고 있는지. 희영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걸렸다. ‘고마워. 나 혼자 있으면 정말로 슬퍼서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 너랑 있으려고 억지로 왔어.’ 희영은 두 눈을 꾹 감아 버렸다. 사실 뜨고 있기도 몹시 힘들었다. * * * “이모! 여기 올갱이 듬뿍 넣어서 두개요!” “아이고, 선영이하고 희영이하고 또 한잔 했나보네, 그래!” “윽, 여기까지 소문이 돌아요?! 우리 이모 귀 밝구나!” “속 풀어야지. 내가 올갱이 듬뿍 넣어서 시원하게 해장국 말아줄게. 젊은 처녀들이 적당히들 마시고 다녀! 응?” “에이 참. 우리가 다 마실 일이 있으니까 마시죠. 이모, 얘 눈 좀 봐요.” 선영은 낄낄거리며 희영의 얼굴을 단골가게 식당이모에게 드밀었다. 희영이는 그저 배시시 웃었다. “희영아, 또 실연 당했냐? 이궁. 이모가 좋은 놈으로 짝 찾아 준다니까~! 바보야 울기는 니가 왜 울어? 선영이 또 속 꽤나 터졌겠네.” “이모, 나 지금 비련의 여주인공이니까 아무 말도 말아줘요. 으흐흑 다 부숴 버릴 거야!” 희영은 식당이모의 한 팔을 잡고, 마치 ‘청춘의 덫’의 심은하처럼 열연을 펼쳤다. “야 너 그런 대사는 쫌 정상적인 얼굴일 때 읊어주라. 응? 하하하” 선영과 식당이모는 한참을 웃었다. 희영도 따라 웃었다. 한바탕 웃고 나니 마음이 약간 풀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우리 희영이꺼 맛있게 말아줄게. 밥 조금. 국물 많이. 오케이?” “네! 오케이.” 희영은 명랑하게 대답하며 환하게 웃었다. 이모는 곧 따끈따끈한 올갱이 해장국 두 그릇을 후딱 들고 나왔다. 새콤한 동치미 국물에 잘 익은 깍두기 까지 곁들여서. 후르륵- 선영과 희영은 정신없이 국물을 들이켰다. 이윽고 두 사람의 해장국 그릇이 바닥을 보인다. “야 정말 시원하다! 희영아 많이 먹어. 밥 못 삼키겠음, 국물이라도 다 마셔. 알았지?” “응! 이제 좀 살 것 같다, 정말로.” 선영이가 불러온 배를 타닥타닥 두드리며 말했다. 국물을 좀 마시고 나자 희영이의 뺨도 발그레하니 다시 혈색을 찾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는 선영. 그녀는 부스럭거리며 가방에서 무엇을 꺼내어 들었다. 그리고는 마치 백점 맞은 시험지를 자랑스럽게 엄마에게 들이미는 꼬마처럼, 흰 종이를 희영의 눈앞에 쫙 펼쳤다. “짜잔~!” “뭐야?” 희영이 무심한 눈으로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힘차게 대답하는 선영. “뭐긴 뭐야! 잘 봐라. 여기 적힌 글자를! 벨 . 라 . 지 . 오 !” “뭐야? 나이트클럽 이름이잖아.” 희영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순간 선영의 볼이 퉁퉁하게 부어올랐다. “야! 너 반응이 왜이래? 내가 이거 구한다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우리 언니한테 엄청 구박받으면서 얻어 온 건데…….” “……가자고?” “당연하지! 이거 십육만 원짜리 푸싱티켓이란 말이야. 가자~ 응? 응?” “나 안가고 싶어.” “야 윤희영. 너 이러기야? 여기 가면, 양주에 과일안주가 기본으로 나온다니까?!” 솔깃. 뭐시라? 양주에 과일안주? 무심한척해도 희영의 한쪽 귀가 슬쩍 꿈틀거리는 것을 선영은 놓치지 않았다. 희영과 선영은 누가 뭐라 해도 굴하지 않는 애주가들. 두 사람을 이렇게 꾹 묶어준 계기가 된 것도, 사실 그놈의 술 때문이었다. “가자.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스트레스도 풀고. 기분전환도 할 겸해서. 매일 소주병만 부여잡고 훌쩍거리지 말고. 응? 가는 거지? 언니한테 전화한다?” “야……. 나 춤 못 춰. 또 그런 곳 한번도 안가 봤단 말이야.” 희영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선영은 그 모습을 보며 씨익 웃었다. ‘짜식. 순진하긴.’ “괜찮아. 나도 처음 갈 때는 그랬어. 나만 믿고 따라와. 새로운 세상이 있다니까?” “괜, 괜찮을까?” 희영의 눈이 뚱그렇게 커지며, 호기심이 몽클 몽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반쯤 넘어왔다. 이제 굳히기에 들어갈 차례. “당연하지. 견문을 넓히는 것이야 말로 이십대 초반인 우리들의 의무가 아니겠어? 가봐.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안재욱 닮은 놈뿐이겠냐? 장동건도 있고 원빈이도 있을 거다.” “……오, 오케이. 좋아! 가는 거야.” 희영의 순진한 얼굴에 비장한 각오가 서렸다. ‘풉. 귀여운 녀석!’ 선영의 입술에 따뜻한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희영의 부은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이 흉측한 몰골이 얼른 나아야 데리고 가든지 말든지 할 텐데…….” “야아~! 그만 놀리라니까!” 희영이 빽 하고 고함을 질렀다. 선영이 웃으며 팔을 떼었다. “하하하. 이제야 엽기공주 희영이 같네. 이제 기운 내는 거야. 알았지?” “치. 내가 언제는 기운이 없었냐?!” “그럼! 매일 날아다니던 니가 이렇게 푹 쳐져 있는데 내가 다 살맛이 안 나더라.” 희영은 말없이 환하게 웃었다. 친구라는 건 정말로 좋은 거다. 더군다나 마음이 하나같은 친구라면. “참, 너 이쁘게하고 와야 해. 우리언니 아는 주임오빠가 특별히 넣어주는 거니까, 정말로 이쁘게하고 와야 해. 알겠지? 나는 벌써 옷도 다 골라 놨다니까~! 이번 주 금요일 저녁. 앞으로 D-day 2.” “그렇게 일찍?” “아~ 일찍은 무슨. 쇠뿔도 당김에 빼라고 그랬다. 그나저나 이리 좀 와봐.” 선영은 희영의 얼굴을 끌어 당겼다. “이 눈이 정말로 이틀 안에 정상으로 돌아올까? 풉!” “야, 한선영 고만해라, 응?!” “하하하하” 웃는 선영을 보던 희영은, 체념한 듯 짧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참, 내 핸드폰 니가 가지고 있지? 나 줘.” “너 핸드폰 받고 상에다가 자해하지 마.” “왜? 무슨 자해?” “암튼.” 희영은 선영에게서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메시지함을 뒤적거리던 순간! 쿵! 희영은 맥없이 탁자위로 이마를 찍었다. 옆에 있던 해장국 그릇이 들썩거렸다. 절망적인 얼굴로 고개를 빠끔히 들어 올리는 희영! 보낸 메세지함 1번: 「오빠, 나 지금 술 마시는데 오빠 너무 보고 싶어요. 괴로워... 나한테 이러지 말아요.」 “야 너 안 말리고 뭐했어? 응?” “희영씨. 내가 말릴 틈도 없었네요. 너 아마 엄지타자 분당 200타는 나올 거다.” “으아아. 나 쪽팔려서 어떡해……. 오빠가 나를 뭐라고 생각했겠어. 죽고 싶다 진짜.” “자존심 상할 짓을 왜해? 암튼 그놈의 술이 웬수지. 앞으로는 좀 작작 마셔라. 앙?” “으잉. 난 몰라 정말. 술만 마시면 왜 이러지. 감정의 조절이 안돼. 제어장치가 고장 나 버리는가봐.” 희영이 두 팔에 얼굴을 파묻으며 징징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선영이가 가방을 들고 일어서며 말했다. “됐어, 그런 맛에 술 마시는 지도 모르잖아. 좋아했으면 한번쯤 잡아보는 것도 나쁠 건 없어. 사랑에 자존심이 대수냐?” “…….” “참. 성민이 오빠한테는 고맙다고 인사했어?” “……응, 아침에 대충 문자 넣었어. 어제는 도무지 본 기억이 있어야 말이지.” 머리를 긁적이며 어제의 기억을 떠올려 보려는 희영. 하지만 거짓말처럼 기억의 한 자락이 새까맣게 비어있었다. 마치 잘려진 필름처럼. ‘미쳤어. 미쳤어 진짜. 내가 다시 술을 먹으면 사람이 아니다, 정말. 아아! 울고 싶어라.’ 희영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그리고 허둥지둥 일어서서 선영의 뒤를 따라 나섰다. 찰나 간에 만감이 교차하는 그녀였다. * * * 그 뒤 이틀은 금방 지나가 버렸다. 술에 술탄 듯 물에 물탄 듯, 밍숭밍숭하게 지나가버린 이틀. 희영은 주로 집에서 뒹굴 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아니면 선영이에게 붙들려 여기저기 돌아다니던가. 하지만 희영은 만사에 의욕이 없었다. 그냥 슬프기만 했다. 한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느낌. 유행가 가사를 들어도 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았고, 지나가는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어제는 그런 희영을 보며 선영이가 가만히 물었었다. “희영아, 넌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지면 왜 눈물이 나는데?” “응?” “왜 우냐고.” “이제 외롭잖아. 그리고 내가 너무 불쌍하잖아. 앞이 막막하기도 하고. 다시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자꾸 그런 생각들이 들면서 눈물이 쏟아져 나와.” 한참을 물끄러미 희영을 응시하던 선영은 말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이고, 우리 아기. 넌 좀 더 커봐야겠다. 사랑은 말이야……. 아니다 됐어. 너도 곧 알 날이 오겠지.” “뭐야? 도중에 이야기를 그만두고. 그럼 내가 하는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니란 말이야?” “아마도 내 생각에는. 사랑 비슷한 거지만, 진짜 사랑은 아닐 거야.” “무슨 소리야? 난 지금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데. 모르겠니?” “아니. 넌 몰라. 최소한 내가 도진이 오빠와 지금 헤어진다고 치자. 그럼 정말 많이 울겠지? 하지만 너 같은 이유 때문에 눈물이 날 것 같지는 않거든.” “……?” “난 말이야. 그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어서. 이렇게 헤어지고 나면 나만큼 아파할 그 사람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날 것 같아.” 뒹굴. 뒹굴뒹굴. 침대위에 누운 희영은 돼지 베게를 끌어안고 계속 뒹굴 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홱 돌아누운 채로, 돼지 베게를 위로 들어 올리고 돼지의 얼굴을 마구 으그러트렸다. ‘선영아 난 그 마음 잘 모르겠어. 내가 이기적이어서 그런 거야? 그냥 슬프기만 한걸.’ 베게를 내던지며 희영이가 막 일어나 앉았을 때였다. 딩동- 문자 소리가 울렸다. 선영이었다. ‘기지배. 호랑이 아니랄까봐. 지 생각 하니까 바로 문자보내기는!’ 「오늘 약속 안 잊었지? 이따가 8시에 태화백화점 앞에서 보자. 푸싱이라서, 울 언니가 9시까지 들어가야 한대. 이쁘게하고와 (^_^)♡」 ‘맞다. 오늘이 거기 가기로 한날이지. 휴우.’ 문자를 확인한 희영은 부랴부랴 일어나서 씻기 시작했다. 솔직히 나가기가 귀찮기도 했지만, 약속을 어겼을 경우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다. 오랜만에 화장을 정성들여서 꼼꼼히 했다. 메이크업베이스부터 아이라인 그리고 마스카라까지. 그리고 살굿빛 립글로스로 마무리. 그래도 오랜만에 깨끗이 씻고 화장을 하니, 확실히 기분 전환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흠. 뭘 입고 간다지?’ 옷장 앞에서 고민하던 희영은, 딱 달라붙는 흰 스커트와 야들야들한 분홍 니트를 꺼내들었다. 일단 스커트는 합격. 니트는 잠시 보류. 어깨가 훤히 들어나 보이는 니트는, 아슬아슬하게 가슴 윗선을 덮고 있었다. ‘흠. 조금 많이 파이긴 했지만. 괜찮겠지? TV 보니까 다들 그런 곳에서는 이런 걸입던데.’ 옷을 다 차려입은 희영은 서둘러 약속장소로 출발했다. 「선영아. 나 말이야. 그때 니가 했던 말. 이제는 정말로 가슴깊이 공감해. 헤어지고 나면 내가 아픈 거 보다 나 때문에 아파할 그 사람 때문에 눈물이 흐른다는 말.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죽을 만큼 서러워서 눈물이 난다는 말. 정말로 조금만 더 일찍 내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나와 오빠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
◈지독한 사랑◈ (3)
1장 만남
아저씨……. 나 아저씨 사랑해도 돼?
엽기국(國) 발랄공주
다음날 아침 강의실.
‘아이고 머리야. 골이 반으로 쪼개지네, 아주!’
선영은 우거지상으로 책상위에 엎어져 있었다. 말 그대로 시체다, 시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은 그녀는,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
10시 15분 전이었다. 선영은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재빨리 문자를 보냈다.
「야! 윤희영. 빨랑 안와? 후딱 뛰어와라. 수업시작하기 15분 전이야. (-_-;)」
딩동-
‘어라? 이게 무슨 소리야?’
문자 소리에 놀란 선영은 자신의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가방 속에서 희영의 핸드폰을 발견하고는, 제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메시지 표시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참! 내가 가지고 있었지? 에라~ 모르겠다. 그래. 실연당한 녀석은 하루정도 결석해도 돼.’
선영은 더 이상 생각하기 귀찮다는 듯 다시 강의실 책상위로 무너져 내렸다.
그때였다. 누군가 선영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이씨~ 뭐야? 나 오늘 건들지 말라니까! 시체 훼손 금지. 몰라?!”
일그러진 얼굴로 버럭 고함을 지르며 돌아보는 선영!
그리고 곧 자신을 깨운 대상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누구세요? 웬 붕어 한 마리가 허공을 둥둥 떠다니십니까!?”
희영이었다.
두 눈이 팅팅 불어서 쌍꺼풀의 형체가 사라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다만 눈이라고 짐작되는 곳에는 큼직한 살 덩어리 두개가 붙어서 끔뻑거리고 있었다.
“풉!”
“야……. 웃지 마.”
희영이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지켜보는 선영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배를 잡았다.
“너 진짜 용감하다. 그러고 버스타고, 지하철 갈아타고 학교까지 온 거야?”
“그럼... 걸어 오냐.”
“못살아 정말. 아침은 먹었어? 속은 괜찮아?”
선영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희영은 양 어깨를 으쓱하며 한숨을 쉬었다.
“말도 마. 어제 밤새도록 토하고, 또 토하고. 아침에도 토했어. 위장을 꺼내가지고, 깨끗이 빨아서 다시 넣었으면 좋겠다. 우욱!”
“으이구. 그러게 왜 이기지도 못할 술을 그렇게 마셔 대냐? 응? 이따가 점심때 해장하자.
야! 그리고 그런 소리는 딴 데 가서 하지 마. 내 앞에서만 해라. 위를 꺼내느니 어쩌느니.”
선영은 헬쓱한 얼굴로 희영을 보며 밉지 않게 눈살을 찌푸렸다.
저 이쁘게 생긴 입에서, 틈만 나면 저런 엽기적인 소리가 아무렇지 않게 새어나오다니.
“……선영아.”
“왜?”
“나...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마지막 말을 남긴 희영은, 선영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멍하니 선영을 바라보며 두 눈을 힘겹게 끔뻑거렸다.
꿈뻑. 그리고 다시 한번 천천히 꿈뻑.
희영의 표정은 몹시 진실했다.
‘내 눈에 재앙이 닥쳤어요. 너무 무거워요! 눈을 뜨기가 힘들어요.’라고.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바람 빠진 웃음이 새어나오는 선영.
정말 못 말린다니까.
학교에서 희영은 아주 유명했다. 일명- 발랄국(國) 엽기공주.
처음 희영을 보는 사람들은, 청순가련한 자태와 섹시미가 오가는 그 팜므파탈적인 이미지에 눌려 함부로 말을 걸지 못했다.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부류의 사람으로 보인다고나 할까.
하지만 일단 용기 내어 말을 걸어보고, 몇 마디 주고받으면 그걸로 게임 오버(Game Over).
희영에게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그걸 천진함이라고 표현해야할지, 솔질함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아니면 순진함일 수도.
쓰러져 있는 희영을 바라보는 선영의 눈에 따뜻함이 가득 실렸다.
‘그래 자둬, 지난 두 달간이 꿈이었던 것처럼. 며칠 푹 자구, 잘 먹구. 그렇게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잊어 질 거야. 내가 옆에 있어줄게. 희영아.’
* * *
선영은 애살이 많은 편이었다. 부대끼는 속이 괴로웠지만, 꾹 참았다. 그리고 교수님 말씀을 부지런히 노트에 옮겨 적고 있었다. 당장 다음 주에 중간고사가 닥쳐왔기 때문이다.
‘그래, 이 한 몸 친히 희생하여, 두 사람이 빛을 보는 거야!’
비장한 눈빛을 빛낸 선영은, 다시 한번 두 눈에 불을 켜고 노트 필기에 집중했다.
문득 선영은 필기하다말고,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희영을 보았다.
희영은 흠칫하고 놀라더니, 곧바로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버렸다. 선영은 똑똑히 보았다.
희영이 엎어져 있던 책상 옆으로 흥건히 괴어있는 눈물 자국을.
‘바보. 괜찮은 척 하고 있어도, 니가 울고 있는 거 다 안다고.’
후우.
선영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필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자꾸만 나른한 졸음이 몰려왔다.
교수님의 말씀이 귀로 들어가서는 코로 줄줄 새어나오는 것만 같았다.
“이것이 중력의 역장이다. 여기서 지구 중심까지의 거리가…….”
희영은 다시 반대쪽으로 가만히 고개를 돌려서 선영이를 보았다.
뭐를 저렇게 열심히 적고 있는지. 희영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걸렸다.
‘고마워. 나 혼자 있으면 정말로 슬퍼서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 너랑 있으려고 억지로 왔어.’
희영은 두 눈을 꾹 감아 버렸다. 사실 뜨고 있기도 몹시 힘들었다.
* * *
“이모! 여기 올갱이 듬뿍 넣어서 두개요!”
“아이고, 선영이하고 희영이하고 또 한잔 했나보네, 그래!”
“윽, 여기까지 소문이 돌아요?! 우리 이모 귀 밝구나!”
“속 풀어야지. 내가 올갱이 듬뿍 넣어서 시원하게 해장국 말아줄게. 젊은 처녀들이 적당히들 마시고 다녀! 응?”
“에이 참. 우리가 다 마실 일이 있으니까 마시죠. 이모, 얘 눈 좀 봐요.”
선영은 낄낄거리며 희영의 얼굴을 단골가게 식당이모에게 드밀었다. 희영이는 그저 배시시 웃었다.
“희영아, 또 실연 당했냐? 이궁. 이모가 좋은 놈으로 짝 찾아 준다니까~! 바보야 울기는 니가 왜 울어? 선영이 또 속 꽤나 터졌겠네.”
“이모, 나 지금 비련의 여주인공이니까 아무 말도 말아줘요. 으흐흑 다 부숴 버릴 거야!”
희영은 식당이모의 한 팔을 잡고, 마치 ‘청춘의 덫’의 심은하처럼 열연을 펼쳤다.
“야 너 그런 대사는 쫌 정상적인 얼굴일 때 읊어주라. 응? 하하하”
선영과 식당이모는 한참을 웃었다. 희영도 따라 웃었다.
한바탕 웃고 나니 마음이 약간 풀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우리 희영이꺼 맛있게 말아줄게. 밥 조금. 국물 많이. 오케이?”
“네! 오케이.”
희영은 명랑하게 대답하며 환하게 웃었다.
이모는 곧 따끈따끈한 올갱이 해장국 두 그릇을 후딱 들고 나왔다.
새콤한 동치미 국물에 잘 익은 깍두기 까지 곁들여서.
후르륵-
선영과 희영은 정신없이 국물을 들이켰다. 이윽고 두 사람의 해장국 그릇이 바닥을 보인다.
“야 정말 시원하다! 희영아 많이 먹어. 밥 못 삼키겠음, 국물이라도 다 마셔. 알았지?”
“응! 이제 좀 살 것 같다, 정말로.”
선영이가 불러온 배를 타닥타닥 두드리며 말했다. 국물을 좀 마시고 나자 희영이의 뺨도 발그레하니 다시 혈색을 찾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는 선영.
그녀는 부스럭거리며 가방에서 무엇을 꺼내어 들었다. 그리고는 마치 백점 맞은 시험지를 자랑스럽게 엄마에게 들이미는 꼬마처럼, 흰 종이를 희영의 눈앞에 쫙 펼쳤다.
“짜잔~!”
“뭐야?”
희영이 무심한 눈으로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힘차게 대답하는 선영.
“뭐긴 뭐야! 잘 봐라. 여기 적힌 글자를! 벨 . 라 . 지 . 오 !”
“뭐야? 나이트클럽 이름이잖아.”
희영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순간 선영의 볼이 퉁퉁하게 부어올랐다.
“야! 너 반응이 왜이래? 내가 이거 구한다고 얼마나 힘들었는데! 우리 언니한테 엄청 구박받으면서 얻어 온 건데…….”
“……가자고?”
“당연하지! 이거 십육만 원짜리 푸싱티켓이란 말이야. 가자~ 응? 응?”
“나 안가고 싶어.”
“야 윤희영. 너 이러기야? 여기 가면, 양주에 과일안주가 기본으로 나온다니까?!”
솔깃.
뭐시라? 양주에 과일안주?
무심한척해도 희영의 한쪽 귀가 슬쩍 꿈틀거리는 것을 선영은 놓치지 않았다.
희영과 선영은 누가 뭐라 해도 굴하지 않는 애주가들.
두 사람을 이렇게 꾹 묶어준 계기가 된 것도, 사실 그놈의 술 때문이었다.
“가자.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스트레스도 풀고. 기분전환도 할 겸해서. 매일 소주병만 부여잡고 훌쩍거리지 말고. 응? 가는 거지? 언니한테 전화한다?”
“야……. 나 춤 못 춰. 또 그런 곳 한번도 안가 봤단 말이야.”
희영이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선영은 그 모습을 보며 씨익 웃었다.
‘짜식. 순진하긴.’
“괜찮아. 나도 처음 갈 때는 그랬어. 나만 믿고 따라와. 새로운 세상이 있다니까?”
“괜, 괜찮을까?”
희영의 눈이 뚱그렇게 커지며, 호기심이 몽클 몽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반쯤 넘어왔다. 이제 굳히기에 들어갈 차례.
“당연하지. 견문을 넓히는 것이야 말로 이십대 초반인 우리들의 의무가 아니겠어? 가봐.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안재욱 닮은 놈뿐이겠냐? 장동건도 있고 원빈이도 있을 거다.”
“……오, 오케이. 좋아! 가는 거야.”
희영의 순진한 얼굴에 비장한 각오가 서렸다.
‘풉. 귀여운 녀석!’
선영의 입술에 따뜻한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희영의 부은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이 흉측한 몰골이 얼른 나아야 데리고 가든지 말든지 할 텐데…….”
“야아~! 그만 놀리라니까!”
희영이 빽 하고 고함을 질렀다. 선영이 웃으며 팔을 떼었다.
“하하하. 이제야 엽기공주 희영이 같네. 이제 기운 내는 거야. 알았지?”
“치. 내가 언제는 기운이 없었냐?!”
“그럼! 매일 날아다니던 니가 이렇게 푹 쳐져 있는데 내가 다 살맛이 안 나더라.”
희영은 말없이 환하게 웃었다.
친구라는 건 정말로 좋은 거다. 더군다나 마음이 하나같은 친구라면.
“참, 너 이쁘게하고 와야 해. 우리언니 아는 주임오빠가 특별히 넣어주는 거니까, 정말로 이쁘게하고 와야 해. 알겠지? 나는 벌써 옷도 다 골라 놨다니까~! 이번 주 금요일 저녁. 앞으로 D-day 2.”
“그렇게 일찍?”
“아~ 일찍은 무슨. 쇠뿔도 당김에 빼라고 그랬다. 그나저나 이리 좀 와봐.”
선영은 희영의 얼굴을 끌어 당겼다.
“이 눈이 정말로 이틀 안에 정상으로 돌아올까? 풉!”
“야, 한선영 고만해라, 응?!”
“하하하하”
웃는 선영을 보던 희영은, 체념한 듯 짧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참, 내 핸드폰 니가 가지고 있지? 나 줘.”
“너 핸드폰 받고 상에다가 자해하지 마.”
“왜? 무슨 자해?”
“암튼.”
희영은 선영에게서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메시지함을 뒤적거리던 순간!
쿵!
희영은 맥없이 탁자위로 이마를 찍었다. 옆에 있던 해장국 그릇이 들썩거렸다.
절망적인 얼굴로 고개를 빠끔히 들어 올리는 희영!
보낸 메세지함 1번:
「오빠, 나 지금 술 마시는데 오빠 너무 보고 싶어요. 괴로워... 나한테 이러지 말아요.」
“야 너 안 말리고 뭐했어? 응?”
“희영씨. 내가 말릴 틈도 없었네요. 너 아마 엄지타자 분당 200타는 나올 거다.”
“으아아. 나 쪽팔려서 어떡해……. 오빠가 나를 뭐라고 생각했겠어. 죽고 싶다 진짜.”
“자존심 상할 짓을 왜해? 암튼 그놈의 술이 웬수지. 앞으로는 좀 작작 마셔라. 앙?”
“으잉. 난 몰라 정말. 술만 마시면 왜 이러지. 감정의 조절이 안돼. 제어장치가 고장 나 버리는가봐.”
희영이 두 팔에 얼굴을 파묻으며 징징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선영이가 가방을 들고 일어서며 말했다.
“됐어, 그런 맛에 술 마시는 지도 모르잖아. 좋아했으면 한번쯤 잡아보는 것도 나쁠 건 없어. 사랑에 자존심이 대수냐?”
“…….”
“참. 성민이 오빠한테는 고맙다고 인사했어?”
“……응, 아침에 대충 문자 넣었어. 어제는 도무지 본 기억이 있어야 말이지.”
머리를 긁적이며 어제의 기억을 떠올려 보려는 희영. 하지만 거짓말처럼 기억의 한 자락이 새까맣게 비어있었다. 마치 잘려진 필름처럼.
‘미쳤어. 미쳤어 진짜. 내가 다시 술을 먹으면 사람이 아니다, 정말. 아아! 울고 싶어라.’
희영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그리고 허둥지둥 일어서서 선영의 뒤를 따라 나섰다.
찰나 간에 만감이 교차하는 그녀였다.
* * *
그 뒤 이틀은 금방 지나가 버렸다.
술에 술탄 듯 물에 물탄 듯, 밍숭밍숭하게 지나가버린 이틀.
희영은 주로 집에서 뒹굴 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아니면 선영이에게 붙들려 여기저기 돌아다니던가.
하지만 희영은 만사에 의욕이 없었다. 그냥 슬프기만 했다. 한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느낌.
유행가 가사를 들어도 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았고,
지나가는 낙엽 굴러가는 것만 봐도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어제는 그런 희영을 보며 선영이가 가만히 물었었다.
“희영아, 넌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지면 왜 눈물이 나는데?”
“응?”
“왜 우냐고.”
“이제 외롭잖아. 그리고 내가 너무 불쌍하잖아. 앞이 막막하기도 하고. 다시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자꾸 그런 생각들이 들면서 눈물이 쏟아져 나와.”
한참을 물끄러미 희영을 응시하던 선영은 말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이고, 우리 아기. 넌 좀 더 커봐야겠다. 사랑은 말이야……. 아니다 됐어. 너도 곧 알 날이 오겠지.”
“뭐야? 도중에 이야기를 그만두고. 그럼 내가 하는 사랑은, 진짜 사랑이 아니란 말이야?”
“아마도 내 생각에는. 사랑 비슷한 거지만, 진짜 사랑은 아닐 거야.”
“무슨 소리야? 난 지금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데. 모르겠니?”
“아니. 넌 몰라. 최소한 내가 도진이 오빠와 지금 헤어진다고 치자. 그럼 정말 많이 울겠지?
하지만 너 같은 이유 때문에 눈물이 날 것 같지는 않거든.”
“……?”
“난 말이야. 그 사람을 다시는 볼 수 없어서. 이렇게 헤어지고 나면 나만큼 아파할 그 사람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날 것 같아.”
뒹굴.
뒹굴뒹굴.
침대위에 누운 희영은 돼지 베게를 끌어안고 계속 뒹굴 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홱 돌아누운 채로, 돼지 베게를 위로 들어 올리고 돼지의 얼굴을 마구 으그러트렸다.
‘선영아 난 그 마음 잘 모르겠어. 내가 이기적이어서 그런 거야? 그냥 슬프기만 한걸.’
베게를 내던지며 희영이가 막 일어나 앉았을 때였다.
딩동-
문자 소리가 울렸다. 선영이었다.
‘기지배. 호랑이 아니랄까봐. 지 생각 하니까 바로 문자보내기는!’
「오늘 약속 안 잊었지? 이따가 8시에 태화백화점 앞에서 보자. 푸싱이라서, 울 언니가 9시까지 들어가야 한대. 이쁘게하고와 (^_^)♡」
‘맞다. 오늘이 거기 가기로 한날이지. 휴우.’
문자를 확인한 희영은 부랴부랴 일어나서 씻기 시작했다.
솔직히 나가기가 귀찮기도 했지만, 약속을 어겼을 경우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다.
오랜만에 화장을 정성들여서 꼼꼼히 했다.
메이크업베이스부터 아이라인 그리고 마스카라까지. 그리고 살굿빛 립글로스로 마무리.
그래도 오랜만에 깨끗이 씻고 화장을 하니, 확실히 기분 전환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흠. 뭘 입고 간다지?’
옷장 앞에서 고민하던 희영은, 딱 달라붙는 흰 스커트와 야들야들한 분홍 니트를 꺼내들었다.
일단 스커트는 합격. 니트는 잠시 보류.
어깨가 훤히 들어나 보이는 니트는, 아슬아슬하게 가슴 윗선을 덮고 있었다.
‘흠. 조금 많이 파이긴 했지만. 괜찮겠지? TV 보니까 다들 그런 곳에서는 이런 걸입던데.’
옷을 다 차려입은 희영은 서둘러 약속장소로 출발했다.
「선영아. 나 말이야. 그때 니가 했던 말. 이제는 정말로 가슴깊이 공감해.
헤어지고 나면 내가 아픈 거 보다 나 때문에 아파할 그 사람 때문에 눈물이 흐른다는 말.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죽을 만큼 서러워서 눈물이 난다는 말. 정말로 조금만 더 일찍 내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나와 오빠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