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2-3화> 비디오

바다의기억2005.12.06
조회11,081

크리스마스가 자꾸만 다가옵니다...

 

아아....아아아아....

 

안 좋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할까요?

 

========================= 크리스마스가 미워요 ==========================

 

 

꼬맹이= I see people.... I see dead people...



안군 ㅅㅂㄹㅁ...



기억 - ...... 미안.


민아 - ..... 아냐.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참담했다.



중년탐정 김정일을 보다가


실수로 다음 권을 잘못 집어서


‘범인은 바로 너야!!’ 장면을 봐 버린 뒤


이전 사건을 보는 듯한 그 기분.


퍼펙트 공략집 다 보고나서 게임 플레이 하는 기분.


한일전 경기 결과 듣고 재방송 보는 기분.



...웬일인가 했더니 스포일러였냐.



‘슈루루루루루루.....’



비디오 되감는 소리만 조용히 울리는 방 안에서


그녀와 나는 착잡한 기분으로 음료수를 홀짝거렸다.



기억 - 다른 거라도 하나 빌려다 볼까?


민아 - 휴.... 아니.


기억 - 하긴... 두 편 내리 보는 것도 그렇지?


민아 - 응..... 지금 몇 시야?


기억 - .... 7시 22분.



내 대답에 그녀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하는 듯 했다.



뭐...기껏 놀러 와서 영화만 딱 보고


털레털레 가는 건 모양새가 이상하니...


뭐... 이렇게 저렇게 그렇게.......해서 여차저차...


헉?!아아, 아니 되옵니다~!!



=딱! 레드선!=



끝없이 뻗어가는 상상력의 바다에서 헤매고 있던 난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민아 - 저녁 먹고 갈래? 오늘은 밥 있는데...


기억 - 나야 고맙지.


민아 - 카레가 좋아? 짜장이 좋아?


기억 - ...... 카레.


민아 - 오케이~. 3분만 기다려~.



지난번엔 라면이더니


이번엔 3분 레토르트 카레인가...


평소에도 이렇게 먹는 거야?


안 그럴 것 같은데..



그녀가 요리(?)를 하기 위해 주방으로 간 사이


멍하니 앉아있기가 어색했던 난 소파에서 일어나


TV 밑 비디오 선반에 꽂혀있는


테이프들의 라벨을 쭉 훑어보았다.


대부분 흰 라벨에 매직으로 제목이 써있는 테이프들.



=로미오와 줄리엣=


이건 나도 알지. 쉐윅쑤~쀠어가 쓴 거 아냐. 빚갚으리오 주연.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할 때 그 오이디푸슨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이건 혹시...... 아니겠지 설마. 그래도 제목이....



=오페라의 유령=


음~ 이것도 아는 거야. ‘빠바바바바밤~ 빠빠빠빠~’ 이거잖아.



그렇게 중간 중간


어디서 한 번씩 들어본 듯한 분들을 만나가며


50장정도 되는 테이프들을 살펴보던 중


제일 마지막에 꽂혀있는 테이프의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Money & Love 00/11/5=


이건......



난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테이프를 꺼내들었다.



민아 - 다됐어~. 응?



그 때 쟁반에 그릇을 받쳐 들고 방으로 돌아온


그녀의 눈길이 내 손을 향했다.


소파 앞에 있는 탁자에 쟁반을 내려놓은 그녀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와


내 손에서 테이프를 빼냈다.



민아

- 공연 때마다 방송부에서 녹화해주거든.


연출오빠한테 말하면 복사해 줄 거야.



기억 - 아.... 그거.... 지금 조금만 보면 안 될까?


민아 - 밥 먹어야지...


기억 - 먹으면서 보면 되잖아.



그녀는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였지만


그 정도로 물러서기엔


테이프를 보고 싶다는 욕구가 너무나 강했다.



기억 - 아이~.



....... 식사 중이셨던 독자여러분.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렇게 인간이기를 포기해가며(?)


비디오 시청권을 손에 넣은 난


그녀와 나란히 카레그릇을 들고 앉아


TV 화면을 주시했다.



기억 - 오, 나온다.



제3자의 시점에서 내 모습을 본다는 건


굉장히 낯선 느낌이었다.


이미 지난 과거의 일인데도 불구하고


한 순간 한 순간이 새로웠다.



업자 = 중요한 건 돈을 갚을 지블응력과 줌빙서류입니다만.


기억 - 아이고.... 무슨 발음이....



중간중간 =아이고=를 연발하게 만드는 실수들...



기억 - 내가 발음이 많이 안 좋구나...


민아 - 아마 긴장이 덜 풀려서 그랬을 거야.


기억 - 나중에 연습 좀 해야겠네. 간장공장 뭐 그런 거.



이후에도 한 마디씩 감상을 주고받아가며


카레를 팝콘삼아 비디오를 보던 우리.


하지만 연극이 절정에 가까워갈 수록


말 수는 줄어들고


그릇과 입을 오가던 숟가락질도 뜸해졌다.



업자 = .... 그렇게 쌀쌀맞게 굴 거면 차라리 독을 타.

선희 = 그래도 되나요?

업자 = ..... 많이 늘었군.

선희 = 당신 덕분에요.



기억 - .........



이미 뒤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는데도


입안이 바싹 타들어가는 긴장감.


오히려 뒤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슴이 이렇게 두근대는 건지도 모른다.



선희 = 당신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요.

업자 = 난 사랑을 안 믿어. 가질 수 있는 것만 믿거든.

선희 = 사랑을 가질 수 없다고 믿으니까 사랑받지 못하는 거예요.



문득 무릎을 잡은 손에 땀이 배어나오는 게 느껴졌다.


바로 이 다음 순간이다.


그녀와 키스했던 그 장면이....



업자

= 안 들려? 당장 꺼져버리라고!!

가질 수도 없는 걸 가지고 끙끙 거렸더니

머리가 부수어질 것 같아...

숨이 막히고 눈이 뒤집혀서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아!!!!



저런 표정이었구나....



무대 절반 가까이가 화면에 들어올 만큼


멀리서 핀트를 잡고 있는데도


숨을 씩씩거리는 게 역력히 보이는 격양된 모습.


손가락을 따라 흘러내리는 선명한 붉은색 핏줄기는


당장이라도 끓어오를 것처럼 뜨거워보였다.



저게 정말 나인 걸까?



너무도 낯선 화면속의 내 모습에


지독한 괴리감과 이질감 같은 게 느껴졌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


정말로 잠깐 어떻게 되었던 것 같은 기분.


뭔가에 홀렸던 것 같다는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다시 저렇게 연기를 하라면


죽어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선희 = 불쌍한 사람...


업자 = 마지막으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정지=



....응?!



기억 - 모모모모모뭐야? 여기서 끝이야?



너무나 황당한 기분에 말을 더듬어가며 고개를 휙 돌렸을 때


탁자에 비디오 리모콘을 내려놓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민아가 멈춘 건가?



기억 - ....어? 왜?


민아

- 아.... 아니.... 그게...


너무 시간이 늦은 것 같아서..



기억 - 그래도 커... 큼큼, 거의 다 끝났는데~.



마음이 조급해진 난


칼칼하게 막히는 목 때문에 헛기침을 해가며


리모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민아 - ....아, 안돼!!



그 순간 재빨리 리모콘을 낚아챈 그녀.


내가 미처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리모콘을 가슴 앞에 감싸 안고


거북이처럼 엎드린 방어자세로 들어갔다.



기억 - 거 참....



잠시 그녀의 등을 내려다보며 고심하던 난


이내 비디오 본체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적어도 그 땐


이 앞부분을 내 눈을 확인해보고 싶다는 것 외에


다른 건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민아 - 보지 마~!!!



리모콘만 안 주면 어떻게 될 줄 알았던 그녀는


다급히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고


난 잠시나마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기억 - .....아니 대..ㅊ....



끝까지 한 마디 해보려 뒤를 돌아봤을 때


그녀는 당겨 앉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얕게 흐느끼고 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하며


성층권에서 낙하한 죄책감의 창이 가슴을 꿰뚫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은 들었다.



결국 난 비디오를 포기하고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기억 - ..........



그때 문득 눈에 띄는 밥그릇.


비디오를 보는 데 정신이 팔려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탓에


4분의 1정도 남은 밥은 카레를 완벽하게 흡수해서


황색의 푸석한 무언가가 되어있었다.



음식을 이대로 남겨놓기도 미안하고


그녀에게 말을 걸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난 남은 카레를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보기보다 먹기 나쁘진 않군...



잠시 후 빈 그릇들을 쟁반에 담아


주방에 갖다놓고 돌아왔을 때에도


그녀는 그 모습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기억 - 미안...... 갈게.



딱히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든 난


조용히 가방을 집어 들고 현관을 나섰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바로 어제만 해도 능청스레 장난전화를 해가며


나를 놀리던 그녀의 모습과


지금 그녀의 반응이 미묘하게 엇갈리며


가슴을 꽉 죄어왔다.



피카츄 - 뷁!! 뷁!! 즈르르르를....



현관을 나서자마자 들리는 피카츄의 울음소리.


녀석은 개집에 묶여있으면서도


당장이라도 나를 향해 뛰어들 것처럼 우렁차게 울어댔다.



기억 - ..... 쭛쯋.



착잡한 기분으로 대문을 향하던 난


녀석과라도 좀 친해져볼까... 라는 생각에


개집 근처에 다가섰다.



피카츄 = 씨익 =


기억 - ?!



몇 걸음 걷지 않아 녀석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번지는 순간


난 녀석의 목에 줄이 묶여있지 않다는 걸 눈치 챘다.



날....사정거리 안으로 유인한 거냐?



피카츄 - 뷁뷁뷁뷁!!


기억 - 이런 쒯따빡!



지금은 물려도 구해줄 사람도 없다는 위기감에


난 대문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중간중간 바지 뒷단에 녀석의 이빨이 스치는 걸 느끼며


대문 근처까지 뛰어간 난


메고 있던 가방을 뒤로 휘둘러 약간의 시간을 번 뒤


잽싸게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콰앙!!=



피카츄 - 뷁뷁뷁!!



서둘러 대문을 닫는 순간


문 밑 틈으로 튀어나오는 피카츄의 발과 입.


사이즈만 조금 컸으면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았을 것이다.




기억 -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터덜터덜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가는 내 기분도


내리막길을 따라 가라앉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