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가 자꾸만 다가옵니다... 아아....아아아아.... 안 좋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할까요? ========================= 크리스마스가 미워요 ========================== 꼬맹이= I see people.... I see dead people... 안군 ㅅㅂㄹㅁ... 기억 - ...... 미안. 민아 - ..... 아냐.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참담했다. 중년탐정 김정일을 보다가 실수로 다음 권을 잘못 집어서 ‘범인은 바로 너야!!’ 장면을 봐 버린 뒤 이전 사건을 보는 듯한 그 기분. 퍼펙트 공략집 다 보고나서 게임 플레이 하는 기분. 한일전 경기 결과 듣고 재방송 보는 기분. ...웬일인가 했더니 스포일러였냐. ‘슈루루루루루루.....’ 비디오 되감는 소리만 조용히 울리는 방 안에서 그녀와 나는 착잡한 기분으로 음료수를 홀짝거렸다. 기억 - 다른 거라도 하나 빌려다 볼까? 민아 - 휴.... 아니. 기억 - 하긴... 두 편 내리 보는 것도 그렇지? 민아 - 응..... 지금 몇 시야? 기억 - .... 7시 22분. 내 대답에 그녀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하는 듯 했다. 뭐...기껏 놀러 와서 영화만 딱 보고 털레털레 가는 건 모양새가 이상하니... 뭐... 이렇게 저렇게 그렇게.......해서 여차저차... 헉?!아아, 아니 되옵니다~!! =딱! 레드선!= 끝없이 뻗어가는 상상력의 바다에서 헤매고 있던 난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민아 - 저녁 먹고 갈래? 오늘은 밥 있는데... 기억 - 나야 고맙지. 민아 - 카레가 좋아? 짜장이 좋아? 기억 - ...... 카레. 민아 - 오케이~. 3분만 기다려~. 지난번엔 라면이더니 이번엔 3분 레토르트 카레인가... 평소에도 이렇게 먹는 거야? 안 그럴 것 같은데.. 그녀가 요리(?)를 하기 위해 주방으로 간 사이 멍하니 앉아있기가 어색했던 난 소파에서 일어나 TV 밑 비디오 선반에 꽂혀있는 테이프들의 라벨을 쭉 훑어보았다. 대부분 흰 라벨에 매직으로 제목이 써있는 테이프들. =로미오와 줄리엣= 이건 나도 알지. 쉐윅쑤~쀠어가 쓴 거 아냐. 빚갚으리오 주연.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할 때 그 오이디푸슨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이건 혹시...... 아니겠지 설마. 그래도 제목이.... =오페라의 유령= 음~ 이것도 아는 거야. ‘빠바바바바밤~ 빠빠빠빠~’ 이거잖아. 그렇게 중간 중간 어디서 한 번씩 들어본 듯한 분들을 만나가며 50장정도 되는 테이프들을 살펴보던 중 제일 마지막에 꽂혀있는 테이프의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Money & Love 00/11/5= 이건...... 난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테이프를 꺼내들었다. 민아 - 다됐어~. 응? 그 때 쟁반에 그릇을 받쳐 들고 방으로 돌아온 그녀의 눈길이 내 손을 향했다. 소파 앞에 있는 탁자에 쟁반을 내려놓은 그녀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와 내 손에서 테이프를 빼냈다. 민아 - 공연 때마다 방송부에서 녹화해주거든. 연출오빠한테 말하면 복사해 줄 거야. 기억 - 아.... 그거.... 지금 조금만 보면 안 될까? 민아 - 밥 먹어야지... 기억 - 먹으면서 보면 되잖아. 그녀는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였지만 그 정도로 물러서기엔 테이프를 보고 싶다는 욕구가 너무나 강했다. 기억 - 아이~. ....... 식사 중이셨던 독자여러분.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렇게 인간이기를 포기해가며(?) 비디오 시청권을 손에 넣은 난 그녀와 나란히 카레그릇을 들고 앉아 TV 화면을 주시했다. 기억 - 오, 나온다. 제3자의 시점에서 내 모습을 본다는 건 굉장히 낯선 느낌이었다. 이미 지난 과거의 일인데도 불구하고 한 순간 한 순간이 새로웠다. 업자 = 중요한 건 돈을 갚을 지블응력과 줌빙서류입니다만. 기억 - 아이고.... 무슨 발음이.... 중간중간 =아이고=를 연발하게 만드는 실수들... 기억 - 내가 발음이 많이 안 좋구나... 민아 - 아마 긴장이 덜 풀려서 그랬을 거야. 기억 - 나중에 연습 좀 해야겠네. 간장공장 뭐 그런 거. 이후에도 한 마디씩 감상을 주고받아가며 카레를 팝콘삼아 비디오를 보던 우리. 하지만 연극이 절정에 가까워갈 수록 말 수는 줄어들고 그릇과 입을 오가던 숟가락질도 뜸해졌다. 업자 = .... 그렇게 쌀쌀맞게 굴 거면 차라리 독을 타. 선희 = 그래도 되나요? 업자 = ..... 많이 늘었군. 선희 = 당신 덕분에요. 기억 - ......... 이미 뒤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는데도 입안이 바싹 타들어가는 긴장감. 오히려 뒤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슴이 이렇게 두근대는 건지도 모른다. 선희 = 당신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요. 업자 = 난 사랑을 안 믿어. 가질 수 있는 것만 믿거든. 선희 = 사랑을 가질 수 없다고 믿으니까 사랑받지 못하는 거예요. 문득 무릎을 잡은 손에 땀이 배어나오는 게 느껴졌다. 바로 이 다음 순간이다. 그녀와 키스했던 그 장면이.... 업자 = 안 들려? 당장 꺼져버리라고!! 가질 수도 없는 걸 가지고 끙끙 거렸더니 머리가 부수어질 것 같아... 숨이 막히고 눈이 뒤집혀서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아!!!! 저런 표정이었구나.... 무대 절반 가까이가 화면에 들어올 만큼 멀리서 핀트를 잡고 있는데도 숨을 씩씩거리는 게 역력히 보이는 격양된 모습. 손가락을 따라 흘러내리는 선명한 붉은색 핏줄기는 당장이라도 끓어오를 것처럼 뜨거워보였다. 저게 정말 나인 걸까? 너무도 낯선 화면속의 내 모습에 지독한 괴리감과 이질감 같은 게 느껴졌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 정말로 잠깐 어떻게 되었던 것 같은 기분. 뭔가에 홀렸던 것 같다는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다시 저렇게 연기를 하라면 죽어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선희 = 불쌍한 사람... 업자 = 마지막으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정지= ....응?! 기억 - 모모모모모뭐야? 여기서 끝이야? 너무나 황당한 기분에 말을 더듬어가며 고개를 휙 돌렸을 때 탁자에 비디오 리모콘을 내려놓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민아가 멈춘 건가? 기억 - ....어? 왜? 민아 - 아.... 아니.... 그게... 너무 시간이 늦은 것 같아서.. 기억 - 그래도 커... 큼큼, 거의 다 끝났는데~. 마음이 조급해진 난 칼칼하게 막히는 목 때문에 헛기침을 해가며 리모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민아 - ....아, 안돼!! 그 순간 재빨리 리모콘을 낚아챈 그녀. 내가 미처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리모콘을 가슴 앞에 감싸 안고 거북이처럼 엎드린 방어자세로 들어갔다. 기억 - 거 참.... 잠시 그녀의 등을 내려다보며 고심하던 난 이내 비디오 본체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적어도 그 땐 이 앞부분을 내 눈을 확인해보고 싶다는 것 외에 다른 건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민아 - 보지 마~!!! 리모콘만 안 주면 어떻게 될 줄 알았던 그녀는 다급히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고 난 잠시나마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기억 - .....아니 대..ㅊ.... 끝까지 한 마디 해보려 뒤를 돌아봤을 때 그녀는 당겨 앉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얕게 흐느끼고 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하며 성층권에서 낙하한 죄책감의 창이 가슴을 꿰뚫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은 들었다. 결국 난 비디오를 포기하고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기억 - .......... 그때 문득 눈에 띄는 밥그릇. 비디오를 보는 데 정신이 팔려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탓에 4분의 1정도 남은 밥은 카레를 완벽하게 흡수해서 황색의 푸석한 무언가가 되어있었다. 음식을 이대로 남겨놓기도 미안하고 그녀에게 말을 걸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난 남은 카레를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보기보다 먹기 나쁘진 않군... 잠시 후 빈 그릇들을 쟁반에 담아 주방에 갖다놓고 돌아왔을 때에도 그녀는 그 모습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기억 - 미안...... 갈게. 딱히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든 난 조용히 가방을 집어 들고 현관을 나섰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바로 어제만 해도 능청스레 장난전화를 해가며 나를 놀리던 그녀의 모습과 지금 그녀의 반응이 미묘하게 엇갈리며 가슴을 꽉 죄어왔다. 피카츄 - 뷁!! 뷁!! 즈르르르를.... 현관을 나서자마자 들리는 피카츄의 울음소리. 녀석은 개집에 묶여있으면서도 당장이라도 나를 향해 뛰어들 것처럼 우렁차게 울어댔다. 기억 - ..... 쭛쯋. 착잡한 기분으로 대문을 향하던 난 녀석과라도 좀 친해져볼까... 라는 생각에 개집 근처에 다가섰다. 피카츄 = 씨익 = 기억 - ?! 몇 걸음 걷지 않아 녀석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번지는 순간 난 녀석의 목에 줄이 묶여있지 않다는 걸 눈치 챘다. 날....사정거리 안으로 유인한 거냐? 피카츄 - 뷁뷁뷁뷁!! 기억 - 이런 쒯따빡! 지금은 물려도 구해줄 사람도 없다는 위기감에 난 대문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중간중간 바지 뒷단에 녀석의 이빨이 스치는 걸 느끼며 대문 근처까지 뛰어간 난 메고 있던 가방을 뒤로 휘둘러 약간의 시간을 번 뒤 잽싸게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콰앙!!= 피카츄 - 뷁뷁뷁!! 서둘러 대문을 닫는 순간 문 밑 틈으로 튀어나오는 피카츄의 발과 입. 사이즈만 조금 컸으면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았을 것이다. 기억 -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터덜터덜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가는 내 기분도 내리막길을 따라 가라앉는 듯 했다.
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2-3화> 비디오
크리스마스가 자꾸만 다가옵니다...
아아....아아아아....
안 좋습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할까요?
========================= 크리스마스가 미워요 ==========================
꼬맹이= I see people.... I see dead people...
안군 ㅅㅂㄹㅁ...
기억 - ...... 미안.
민아 - ..... 아냐.
결과는 말할 것도 없이 참담했다.
중년탐정 김정일을 보다가
실수로 다음 권을 잘못 집어서
‘범인은 바로 너야!!’ 장면을 봐 버린 뒤
이전 사건을 보는 듯한 그 기분.
퍼펙트 공략집 다 보고나서 게임 플레이 하는 기분.
한일전 경기 결과 듣고 재방송 보는 기분.
...웬일인가 했더니 스포일러였냐.
‘슈루루루루루루.....’
비디오 되감는 소리만 조용히 울리는 방 안에서
그녀와 나는 착잡한 기분으로 음료수를 홀짝거렸다.
기억 - 다른 거라도 하나 빌려다 볼까?
민아 - 휴.... 아니.
기억 - 하긴... 두 편 내리 보는 것도 그렇지?
민아 - 응..... 지금 몇 시야?
기억 - .... 7시 22분.
내 대답에 그녀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을 생각하는 듯 했다.
뭐...기껏 놀러 와서 영화만 딱 보고
털레털레 가는 건 모양새가 이상하니...
뭐... 이렇게 저렇게 그렇게.......해서 여차저차...
헉?!아아, 아니 되옵니다~!!
=딱! 레드선!=
끝없이 뻗어가는 상상력의 바다에서 헤매고 있던 난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민아 - 저녁 먹고 갈래? 오늘은 밥 있는데...
기억 - 나야 고맙지.
민아 - 카레가 좋아? 짜장이 좋아?
기억 - ...... 카레.
민아 - 오케이~. 3분만 기다려~.
지난번엔 라면이더니
이번엔 3분 레토르트 카레인가...
평소에도 이렇게 먹는 거야?
안 그럴 것 같은데..
그녀가 요리(?)를 하기 위해 주방으로 간 사이
멍하니 앉아있기가 어색했던 난 소파에서 일어나
TV 밑 비디오 선반에 꽂혀있는
테이프들의 라벨을 쭉 훑어보았다.
대부분 흰 라벨에 매직으로 제목이 써있는 테이프들.
=로미오와 줄리엣=
이건 나도 알지. 쉐윅쑤~쀠어가 쓴 거 아냐. 빚갚으리오 주연.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할 때 그 오이디푸슨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이건 혹시...... 아니겠지 설마. 그래도 제목이....
=오페라의 유령=
음~ 이것도 아는 거야. ‘빠바바바바밤~ 빠빠빠빠~’ 이거잖아.
그렇게 중간 중간
어디서 한 번씩 들어본 듯한 분들을 만나가며
50장정도 되는 테이프들을 살펴보던 중
제일 마지막에 꽂혀있는 테이프의 제목이 눈에 확 들어왔다
=Money & Love 00/11/5=
이건......
난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테이프를 꺼내들었다.
민아 - 다됐어~. 응?
그 때 쟁반에 그릇을 받쳐 들고 방으로 돌아온
그녀의 눈길이 내 손을 향했다.
소파 앞에 있는 탁자에 쟁반을 내려놓은 그녀는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다가와
내 손에서 테이프를 빼냈다.
민아
- 공연 때마다 방송부에서 녹화해주거든.
연출오빠한테 말하면 복사해 줄 거야.
기억 - 아.... 그거.... 지금 조금만 보면 안 될까?
민아 - 밥 먹어야지...
기억 - 먹으면서 보면 되잖아.
그녀는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였지만
그 정도로 물러서기엔
테이프를 보고 싶다는 욕구가 너무나 강했다.
기억 - 아이~.
....... 식사 중이셨던 독자여러분.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렇게 인간이기를 포기해가며(?)
비디오 시청권을 손에 넣은 난
그녀와 나란히 카레그릇을 들고 앉아
TV 화면을 주시했다.
기억 - 오, 나온다.
제3자의 시점에서 내 모습을 본다는 건
굉장히 낯선 느낌이었다.
이미 지난 과거의 일인데도 불구하고
한 순간 한 순간이 새로웠다.
업자 = 중요한 건 돈을 갚을 지블응력과 줌빙서류입니다만.
기억 - 아이고.... 무슨 발음이....
중간중간 =아이고=를 연발하게 만드는 실수들...
기억 - 내가 발음이 많이 안 좋구나...
민아 - 아마 긴장이 덜 풀려서 그랬을 거야.
기억 - 나중에 연습 좀 해야겠네. 간장공장 뭐 그런 거.
이후에도 한 마디씩 감상을 주고받아가며
카레를 팝콘삼아 비디오를 보던 우리.
하지만 연극이 절정에 가까워갈 수록
말 수는 줄어들고
그릇과 입을 오가던 숟가락질도 뜸해졌다.
업자 = .... 그렇게 쌀쌀맞게 굴 거면 차라리 독을 타.
선희 = 그래도 되나요?
업자 = ..... 많이 늘었군.
선희 = 당신 덕분에요.
기억 - .........
이미 뒤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는데도
입안이 바싹 타들어가는 긴장감.
오히려 뒤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슴이 이렇게 두근대는 건지도 모른다.
선희 = 당신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요.
업자 = 난 사랑을 안 믿어. 가질 수 있는 것만 믿거든.
선희 = 사랑을 가질 수 없다고 믿으니까 사랑받지 못하는 거예요.
문득 무릎을 잡은 손에 땀이 배어나오는 게 느껴졌다.
바로 이 다음 순간이다.
그녀와 키스했던 그 장면이....
업자
= 안 들려? 당장 꺼져버리라고!!
가질 수도 없는 걸 가지고 끙끙 거렸더니
머리가 부수어질 것 같아...
숨이 막히고 눈이 뒤집혀서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아!!!!
저런 표정이었구나....
무대 절반 가까이가 화면에 들어올 만큼
멀리서 핀트를 잡고 있는데도
숨을 씩씩거리는 게 역력히 보이는 격양된 모습.
손가락을 따라 흘러내리는 선명한 붉은색 핏줄기는
당장이라도 끓어오를 것처럼 뜨거워보였다.
저게 정말 나인 걸까?
너무도 낯선 화면속의 내 모습에
지독한 괴리감과 이질감 같은 게 느껴졌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기분.
정말로 잠깐 어떻게 되었던 것 같은 기분.
뭔가에 홀렸던 것 같다는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다시 저렇게 연기를 하라면
죽어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선희 = 불쌍한 사람...
업자 = 마지막으로...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정지=
....응?!
기억 - 모모모모모뭐야? 여기서 끝이야?
너무나 황당한 기분에 말을 더듬어가며 고개를 휙 돌렸을 때
탁자에 비디오 리모콘을 내려놓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민아가 멈춘 건가?
기억 - ....어? 왜?
민아
- 아.... 아니.... 그게...
너무 시간이 늦은 것 같아서..
기억 - 그래도 커... 큼큼, 거의 다 끝났는데~.
마음이 조급해진 난
칼칼하게 막히는 목 때문에 헛기침을 해가며
리모콘을 향해 손을 뻗었다.
민아 - ....아, 안돼!!
그 순간 재빨리 리모콘을 낚아챈 그녀.
내가 미처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리모콘을 가슴 앞에 감싸 안고
거북이처럼 엎드린 방어자세로 들어갔다.
기억 - 거 참....
잠시 그녀의 등을 내려다보며 고심하던 난
이내 비디오 본체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적어도 그 땐
이 앞부분을 내 눈을 확인해보고 싶다는 것 외에
다른 건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민아 - 보지 마~!!!
리모콘만 안 주면 어떻게 될 줄 알았던 그녀는
다급히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고
난 잠시나마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기억 - .....아니 대..ㅊ....
끝까지 한 마디 해보려 뒤를 돌아봤을 때
그녀는 당겨 앉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얕게 흐느끼고 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하며
성층권에서 낙하한 죄책감의 창이 가슴을 꿰뚫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은 들었다.
결국 난 비디오를 포기하고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기억 - ..........
그때 문득 눈에 띄는 밥그릇.
비디오를 보는 데 정신이 팔려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탓에
4분의 1정도 남은 밥은 카레를 완벽하게 흡수해서
황색의 푸석한 무언가가 되어있었다.
음식을 이대로 남겨놓기도 미안하고
그녀에게 말을 걸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난 남은 카레를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보기보다 먹기 나쁘진 않군...
잠시 후 빈 그릇들을 쟁반에 담아
주방에 갖다놓고 돌아왔을 때에도
그녀는 그 모습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기억 - 미안...... 갈게.
딱히 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든 난
조용히 가방을 집어 들고 현관을 나섰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바로 어제만 해도 능청스레 장난전화를 해가며
나를 놀리던 그녀의 모습과
지금 그녀의 반응이 미묘하게 엇갈리며
가슴을 꽉 죄어왔다.
피카츄 - 뷁!! 뷁!! 즈르르르를....
현관을 나서자마자 들리는 피카츄의 울음소리.
녀석은 개집에 묶여있으면서도
당장이라도 나를 향해 뛰어들 것처럼 우렁차게 울어댔다.
기억 - ..... 쭛쯋.
착잡한 기분으로 대문을 향하던 난
녀석과라도 좀 친해져볼까... 라는 생각에
개집 근처에 다가섰다.
피카츄 = 씨익 =
기억 - ?!
몇 걸음 걷지 않아 녀석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번지는 순간
난 녀석의 목에 줄이 묶여있지 않다는 걸 눈치 챘다.
날....사정거리 안으로 유인한 거냐?
피카츄 - 뷁뷁뷁뷁!!
기억 - 이런 쒯따빡!
지금은 물려도 구해줄 사람도 없다는 위기감에
난 대문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중간중간 바지 뒷단에 녀석의 이빨이 스치는 걸 느끼며
대문 근처까지 뛰어간 난
메고 있던 가방을 뒤로 휘둘러 약간의 시간을 번 뒤
잽싸게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콰앙!!=
피카츄 - 뷁뷁뷁!!
서둘러 대문을 닫는 순간
문 밑 틈으로 튀어나오는 피카츄의 발과 입.
사이즈만 조금 컸으면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았을 것이다.
기억 -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터덜터덜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가는 내 기분도
내리막길을 따라 가라앉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