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율(初律) 제 79화

피바다2005.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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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화는 제황성에 다녀 온 뒤로 심하게 몸살을 앓았다. 만화루에 입적한 후로 두 번째 앓는 몸살이었다. 절천지 원수였던 반란군 토벌대장이었던 영조 장군을 용서하기로 한 날이 처음이었고 이번이 두번째 일이었다.

  그녀는 한스러움을 몸이 감당하지 못할 때 아팠고 한 번 앓기 시작하면 몇날며칠을 고열과 헛소리에 시달리며 거의 죽다 살아날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이번 몸살은 지난 번보다 그 정도가 심하여 만화루 사람 전체가 그녀의 병세를 걱정하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는 곧 죽을 듯 아팠다. 잠이 들때면 지독한 악몽에 가위를 눌리는 듯 헛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급기야 까무러쳤다가 의원들이 모두 달려들어야 겨우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할 정도로 심각한 증세였다. 사람이 그렇게 갑자기 죽을 수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아화의 몸살은 그녀의 육체를 망가뜨리고 있었다.

  그 사이 초율이 만화루에 한 번 다녀갔다. 그 때도 아화는 까무라치는 바람에 의원들이 용을 쓰며 그녀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아주 잠깐 지켜본 초율은 어쩐 일인지 묘영조차 만나지 않고 묵묵히 돌아가버렸다.

 

  꿈인지, 아니면 죽음 속인지 알 수 없었다. 아화는 세상 모든 악연을 끊어버린 듯 홀가분한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온통 어둠으로 뒤덮힌 텅 빈 공간을 걷고 있었지만 오히려 따뜻한 기운이 그녀를 감싸고 있어 아화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처음 어둠을 접했을 때는 두려움이 밀려와 자신의 상황을 살피며 긴장을 풀지 못했지만 어느 덧 암흑에 익숙해지자 아화는 그곳이 죽음의 중심부라고 해도 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끝나지 않을 것같은 깊은 어둠 속으로 그녀는 지치지도 않고 계속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걸어들어갔는지 알 수조차 없을 때, 아주 작은 소리가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화는 계속 걸어들어갔고 소리는 점차로 뚜렷해졌다. 그것은 마음이 놓이는 노랫가락이었다. 소리가 분명해지자 자신을 둘러싼 어둠처럼 어떤 색채도 띄지않던 그녀의 감정이 격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젠 눈부신 빛의 덩어리가 어둠의 한 쪽에서 아른거리며 나타났다. 아화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어둠의 길 끝에 이르렀음을 알았다. 그녀는 멈추어섰다. 그 빛이 문득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빛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 그녀에게 고통을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어느 새 친숙해진 어둠 속으로 되돌아가고픈 강렬한 욕구에 휩싸였다. 하지만 보다 선명해져 이젠 바로 옆에서 생생하게 들려오는 노랫가락이 그런 그녀의 충동을 붙들어 매고 있었다.

 그 때,

  " 어...머..니?"

  아화는 어느 새 곁에 와 서 있는 어머니를 발견하고 놀랐다. 계속 해서 그녀의 가슴에서 울려퍼지던 노래는 어머니의 입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들리는 순간부터 그녀가 침착할 수 없었던 그 친숙한 가락은 바로 어머니가 어린 아화의 머리맡에서 불러주곤 하던 자장가였다.

  어머니는 편안해 보였다. 그녀는 노래를 부르며 상냥하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아화의 눈에서는 이미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화의 어머니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며 빛을 향해 그녀를 이끌었다.

  " 내 착한 아가....이젠 가야지?"

  가슴을 졸이며 모여있던 만화루의 사람들은 아화의 눈이 서서히 뜨이자, 감격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 중에는 눈물을 훔치는 이들도 있었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막 정신을 차린 아화의 귀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웅성거림만이 전해질 뿐이었다.

  마침내 아화의 뜨인 눈이 현실의 초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손에서 전해진 온기가 아직까지도 자신의 손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곁에는 어머니가 아닌 환휴가 조용히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 맥을 재고 있었다.

  그는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삶의 길로 돌아온 아화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 당신은...삶을 택할 줄 알았습니다."

  아화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며칠 뒤, 초율이 다시 만화루를 찾았을 때 아화는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리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초췌하여 예전의 생기를 온전히 되찾지 못한 그녀는 화왕궁에서 요양 중이었다.

  초율이 만화루에 들어서는 순간 유목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아화의 처소로 안내하였다. 응접실 문이 열리자 화장기도 없이 수수하게 치장한 아화가 다소곳하게 절을 올리며 그를 맞이하였다. 창백해보였지만 그녀의 미색은 여전해보였다.

  " 전하의 은혜로 미천한 목숨을 부지하였습니다. 소녀 어찌 보답할 길이 보이지 않나이다."

  초율이 자리하자, 아화는 다시 예를 올리며 환휴를 보내 준 데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초율은 대답없이 가면 뒤에서 그녀의 모습을 다시 살필 뿐이었다.

 

  아화가 의식을 잃었던 날, 궁으로 돌아온 초율은 등을 돌린 채 서서 약초를 분류하고 있던 환휴에게 늘 그렇듯 무덤덤하게 아화의 병세를 이야기하였다.

  " 강한 여자지요. 하지만 누구나 몸이 견뎌낼 수 있는 고통의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게다가 부자연스럽게 짓눌렀던 고통이니 함께 터져나오면서 그녀의 몸에 치명적인 독이 될겁니다."

  환휴는 잠시 돌아서서 말을 마치고 다시 손을 놀려 약초를 구분했다.

  " 독?"

  초율은 의문스럽다는 듯 되물었다.

  " 예, 전하. 삭혀버리지 못한 고통과 분노는 무엇보다 강한 독으로 변해 그녀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몸과 영혼 모두를 말입니다."

  " 큭큭큭....."

 환휴의 말에 초율이 웃기 시작했다. 조롱이 섞인 가벼운 웃음이었다. 환휴는 초율의 반응에 가뜩이나 차가운 얼굴이 더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 너...오늘 말이 많군."

  초율은 정작 둘이 나누었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는 듯 했다.

  " 그렇습니까?"

  환휴는 대수롭지않게 대꾸하였고 초율에게서 웃음의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 그녀를 살리고 싶은가?"

  초율이 물었지만 환휴는 말이 없었다.

  " .............."

  그러자 초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이상 환휴와의 이야기에 흥미를 못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는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 초율은 다시 환휴에게로 몸을 돌리며,

  " 가라, 환휴. 가서 그 여자가 죽어버리지 않게 해."

  환휴는 초율쪽으로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절을 올렸다.

  ' 전하를 위해 살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한 생각을 초율이 알 리가 없었다. 초율은 신경질적으로 문을 쾅 닫고 사라져버렸다.

 

 초율이 생각에서 벗어날 즈음 아화가 큰 결심을 하고 물었다.

  " 전하, 소녀 물어볼 것이 있사옵니다. "

 " ..........."

  아화는 이번만큼은 초율의 허락을 기다리지않았다.

  " 부용이라는 이름을 ..........어찌 아셨는지요?"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바보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말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천계의 모든 것을 자기 손에 쥐고 있다고 한 자가 한 여자의 과거를 알아내는 것이 뭐가 어려웠겠는가. 정작 그녀가 하고 싶은 질문은 따로 있었지만 차마 입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초율은 역시 예리한 남자였다. 그는 아화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기꺼이 그녀의 질문을 받아 줄 모양이었다. 

  " 다시 듣겠다. "

  아화는 초율이 너그럽게 나오자 더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 어찌하여 소녀를 황궁에 데리고 가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

 그녀는 허리를 세우고 앉아 당돌할 정도로 초율의 가면을 빤히 바라보며 이어서 물었다.

  " 모든 것을 아시면서...그 남자가 그 곳에 있다는 것을 아셨으면서 어찌하여 소녀를 그 곳으로 들어가도록 하셨나이까?"

  그녀의 목소리에는 야속한 심정이 베어있었다.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과 원망이 몰려왔다.

  자 초율이 손을 뻗었다. 그는 흰 비단 장갑을 낀 손으로 아화의 선이 매끄러운 턱을 감싸 쥐고 그녀의 시선을 정면으로 붙들었다. 아화는 오히려 그런 초율의 태도에 당당함을 잃어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시선을 피할 길이 없었다. 초율은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아화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에게 시선을 붙잡혀 있었다.

  아화는 그 기회로 초율의 가면을 자세히 바라볼 수 있었다. 늘 두렵고 거북한 느낌이 들어 자세히 바라보지 못한 가면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이번에는 살필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아화는 가면의 무늬가 평소 기분으로 느끼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도 알았다. 괴이하고 장난스러운 듯 보이던 가면의 붉은 무늬를 하나하나 뜯어보니 장인의 솜씨가 분명하게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물결치고 있었다. 아름다운 문양이었다. 조각칼의 홈도 그 깊이가 일정했고 붉은 안료도 고급스러웠다.

  " 그것이 내 취향이라고 생각하나?"

  얼굴 바로 앞에서 초율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아화는 흠칫했다. 하지만 숨소리마저 들릴 듯한 거리에서 공기를 넘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감미로울 지경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미성이라는 것을 그녀는 처음 알았다.

  그리고 아화는 조금더 집중하면 가면 위로 뚫린 두 개의 구멍 사이에서 그의 비밀스러운 두 눈동자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때 초율은 그녀의 얼굴에서 멀어졌다.

  " 나는 ' 힘을 가진 자' 만 밟는다. 강한 자를 밟을 때만 쾌락을 느끼지. 설마 내가 너따위를 가지고 장난질을 쳤다고 생각하는건가?"

  아화는 맥이 탁 풀렸다. 초율이란 남자가 유치한 부류가 아닐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자신을 궁으로 데려가 수난을 겪게 한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초율의 말마따나 '아화따위'를 말이다.

  " 확인하고 싶었다. "

  초율은 여전히 수수께끼같은 말을 했다.

  " 무엇을....말입니까?"

  " 너는 그 자를 잊지 못했다. 언제든 기회가 되면 숨통을 끊어놓기위해 달려들것처럼 이를 갈았지만...그를 끊어내지 못한 거야. 내 말이 틀렸나?"

  ".........."

  아화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초율이 의도한 것이 아화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 일리 없었다. 그가 자신에게 가지는 마음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그녀가 더 잘 알았다.

  " 정말이지 이래서...계집따위는 짜증스러워."

  그 말을 툭 밷는 초율의 목소리에도 이미 참을 수 없는 깊은 짜증이 실려있었다.

  " 정해진 길이 있는데 결국 멋대로 벗어나 버리지.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지만, 속에서는 불꽃이 일렁이고 있어. 결코 예측할 수 없는 감정적인 존재....그것이 너희 열등한 계집들이다. "

 " 그것이...."

  아화는 반박한 마음이 없었다. 관지를 보게 되면 그렇게 무너져 버릴 것이라는 것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감정이 물결쳐 그녀를 질식하게 만들 거라는 것도 다 알고 있었다.

  " 사랑입니다...."

  아화는 슬픈 빛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영혼은 웃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를 울고 웃게 했던 비밀이었다.

  초율은 두 여자를 떠올렸다. 생모인 채와 그의 유일한 여자였던 가교였다. 사랑하던 남자를 스스로 떠나와 그의 영예를 위해 다른 사내의 품에 안기고 자신의 뱃속에서 자라던 초율에게 칼끝을 들이대었던 어머니. 그리고 초율이 바란 적도 없던 한낫 '정조'따위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사랑을 지키려했던 가교. 초율은 그 둘의 사랑을, 그 여자들의 세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에 있는 이 나약한 여자, 아화 역시 초율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모든 것을 얼리고도 남을 냉정과 모든 것을 불태울 듯한 증오심이 한 남자 앞에서 무참히 스러지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초율은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그래서 초율은 화가 났다. 분노조차 무의미해지는 그리움과 사랑. 초율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였다.

  " 사람을 하나 보내겠다...."

 결심이 선 듯 초율이 입을 열었다. 아화는 거부할 수 없는 단호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가 내린 명령은 아화조차 황당해할 수 밖에 없는 기상천외한 것이었다.

  " 그에게 ' 여자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도록 해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다...."

 

=======한참만에 글을 썼습니다. 마음은 있는데 여건이 그리 쉽게 펜을 들지 못하게 하더군요. 그래서 간만에 재밌게 썼습니다. ' 그녀' 가 나올 때가 되었는데 말이죠.

  부쩍 추워진 날씨가 밉지요? 감기 조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