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된 인내와 수련 속에 물집이 잡히고 껍질이 벗겨지다 보면 어느새 그 자리엔 굳은살이 맺혀 우리의 몸을 지킵니다. 하지만... 사방에서 자라난 굳은 살은 아직 못 다 자란 여린 부분을 눌러 참기 힘든 아픔을 주기도 합니다. 너무 많이 상처 받으면... 언제나 아플 수 밖에 없습니다. ====================== 정권 단련 필요 ============================ 다음날 오후. 학교. 물리 강의 시간. 권교수님 - 지금부터 제가 강의하는 내용에 대해서 절대로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거~죠? 필수 과목인데다 교수님도 깐깐하신 탓에 차분하기 이를 데 없는 분위기. 카랑카랑하고 다부진 교수님의 목소리와 노트 위를 휘달리는 펜 소리만 존재하던 강의실에 느닷없는 불청객이 뛰어들었다. =빠바바밤빠밤빠바~ 빠바바밤빠밤빠바~= 민망할 만큼 경쾌하게 울리는 운명 교향곡의 소리. 권교수님 - 누구야? 에부리바디 - ........ 권교수님 - Who?? 교수님의 날카로운 눈빛이 학생들 사이를 누비는 순간 주변에 있던 많은 시선들이 나에게 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억 - 어.... 어라. 혹시나 싶은 마음에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어보자 신나게 액정을 번쩍거리며 목청 높여 울어대고 있던 내 핸드폰이 자랑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기억 - ...... 이런 쉣. 권교수님 - 오케이. 그대~로 Come on. ....... X 됐다.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계속 울려대는 핸드폰을 손에 들고 터벅터벅 강단위로 올라섰을 때 교수님이 학생들의 주위를 모으며 외쳤다. 권교수님 - 자, 이제부터 우리의 소중한 강의시간을 방해할 만큼 아주~ 중요한 통화 내용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끊어지기 전에 빨리 받아~. 일이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고 느끼며 참담한 기분으로 핸드폰을 열자 교수님은 핸드폰 수화기 부분에 마이크를 갖다 대 통화 내용이 강의실 안에 들리도록 했다. 제발 060 이나 700 만 아니어라.... 기억 - ....예. ?? = 오빠~~~~!!! !!!!! 강의실 안 가득 맑고 청아하게 울리는 어린 여인네의 목소리에 일순간 분위기가 크게 술렁거렸다. 기억 - 누.... 누구신지? ?? = 유~~니~~. 오빠라는 말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기억 - 제....제 번호는 어떻게 아시고... 유니 = 비~~밀~~. 기억 - 저기,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수.. 권교수님 - 지금 끊으면 F야. .......... 유니 = 응? 수업중이야? 기억 - 아... 아뇨. 수, 숨이 차다고요. 유니 = 그래? 뭐하는데? 나중에 전화할까? 기억 - 아아아아아뇨~ 끊지 말아요, 지금 괜찮아졌어요. 유니 = 음... 나 심심해! 기억 - ...... 그래서요? 유니 = 훌쩍.... 오빠 나빠..... 그러기야? 그녀의 애교 아닌 애교와 투정에 야유와 환호성이 반반 섞여 울리는 강의실. 교수님도 매우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통화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기억 - ....... 어디세요? 유니 = 우리가 처음 맺어진 곳~. =오오~!! 휘익 휘익~!!= 아이고 누님..... 기억 - 맺어지긴 뭐가 맺어져요!? 유니 = 눈물을 글썽이며.... 너무해. 난 오빠만 믿고 허락한 건데... 기억 - 저기요, 선.배.님. 누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그런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씀을... 유니 = ...... 어머나, 이미 눈치 챈 거야? 기억 - 당연하죠, 그러니까 그 오빠 소리도 이제... 유니 = 아아~ 그냥 오빠 해죠~~~!! 오빠 오빠 오빠~~!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다..... 기억 - 제가 좀 있다 그리로 갈게요. 유니 = 아~~ 지금 와아잉~. 기억 - 지금 못 가요. 유니 =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지금 안 오면 나 삐질 거야. 기억 - 하아...... 마음대로 하세요. 권교수님 - 떽!! 유니 = 응? 방금 무슨 소리야? 옆에 누구 있어? 갑작스러운 교수님의 호통에 깜짝 놀라 내게 묻는 그녀. 그 소리에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기억 - 아, 아,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유니 = 올 거지? 권교수님 - 여자가 부르면 당장 뛰어가야지, 여기 굶주린 솔로가 몇 명인데 그렇게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어, 응? 아무도 예상치 못한 교수님의 호통에 열렬한 호응을 보내는 학생들. =그냥 이리로 오라고 그래~!= =친구들도 데리고 오라 그래~!= 같은 함성이 중구난방으로 터져 나왔다. 기억 - 아....아...네, 지금 갈게요. 유니 = 으응~ 빨리 와~ 쪽! 기억 - 아, 진짜! 그런 거 하지 마요. 쫌! 권교수님 - 떽!!! 유니 = .... 떽? 기억 - 아, 아니....그게.... 암튼, 기다리고 있어요. 유니 = 응~. 그렇게 간신히 전화를 끊고 나니 하염없이 밀려오는 민망함과 앞날에 대한 걱정. 하지만 교수님은 매우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계셨다. 권교수님 - 아직 공대의 미래는 밝구만. 대체 지금 이 상황과 공대의 미래가 어떻게 직결되는 겁니까...... 권교수님 - 뭐 해? 얼른 안 가고. 기억 - ...... 진짜로 갑니까? 권교수님 - 그럼. 기억 - ..... 정말 갑니다? 권교수님 - 안 가면 F야. 기억 -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이게 아닌데.... 뭔가 이상한데.... 권교수님 - 자, 그럼 솔로들은 남아서 미래의 마누라를 바꾸기 위한 노력을 계속합시다. 379페이지 5번! 학생A - 교수님! 저도 커플입니다만! 권교수님 - 그럼 자네도 전화가 오길 빌고 있어. 뭐... 그래도 이정도면 무사히 마무리 된 건가.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떠들썩해진 강의실을 떠나 연습실로 향했다. 잠시 후, 연극부 연습실. 문을 열고 연습실 안으로 들어서자 한쪽 구석에서 비디오를 보고 있던 유니선배가 반색을 했다. 유니 -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오빠~! 기억 - ......왜 그러십니까, 선.배.님. 유니 - 재밌잖아. 기억 - 방금 선배님 전화 때문에 제가 무슨 꼴을... 유니 - 예쁘지? 잘했지? 응? 너무나 당당하게 능청을 떠는 그녀의 모습에 난 따지는 것 자체가 허무한 일 같다는 회의감까지 느꼈다. 기억 - 대체 어제 처음 만난 사이에 그런 장난을.... 유니 - 당연하다는 투로, 그래야 효과가 있지. 기억 - 효과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유니 - 그런가? 암튼 일루 앉아봐, 이거나 같이 보자. 기억 - 뭔데요 이게? 박군 = 죽어! 죽어 이 ㄱ애새꺄!! 그녀가 보고 있던 비디오에선 박군 일당이 한창 김군을 패는 중이었다. 기억 - 이건... 유니 - 처음부터 볼래? 기억 - 아..아뇨, 괜찮습니다. 유니 - 하긴, 이제부터가 하이라이트니까. 기억 - 흠.....볼륨 조금만 높여주시겠어요? 유니 - 응? 김군 = 아아악!! 크흑! 어헉! =퍼억! 퍽퍽! 뻐어억!= 유니 - 이게 그렇게 듣고 싶었어? 기억 - 아...... 좀 있다가 올리죠. 유니 - 으음... 이런 취향이 있었구나. 기억 - 아니에요~!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새 클라이맥스. 문제의 키스장면을 앞에 두고 자꾸만 유니선배가 의식됐다 이걸 봐야하나 말아야하나. 그냥 보면 굉장히 민망할 것 같기도 하고.. 이거 가지고 또 장난치면 어떡하지? 문득 그 순간의 촉감들이 스멀스멀 살아났다. 목을 감싸던 그녀의 팔, 뺨에 느껴지던 콧바람. 품 안에 쏙 들어오던 여린 어깨. 영원처럼 길기도 하고 찰나처럼 짧기도 한 시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얼굴이 달아오르고 보여주기가 부끄러워졌다. 선희 = 불쌍한 사람... 업자 = 마지막으로.... 내게.... 키스해주겠어? 유니 - 오오....왔어 왔어 왔어~!! 기억 - ....... 그리고 이어지는 긴 침묵. 힘없는 갈대처럼 휘청거리는 내 모습과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날 바라보는 민아의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 웃고 있었구나. 그 때 난 웃고 있었다. 흐릿하면서도 쓰디쓴 느낌이 드는 미소를 지은 채 금방 수명이 다할 듯 깜빡이는 전구처럼 필사적으로 빛을 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선희 = 불쌍한 사람.. 하지만 그녀는 돌아섰다. 내 마지막 부르짖음을 뒤로한 채. 하지만 다시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하얗게 백열하며 증발해버리기 위해. 그리고 내 품으로 뛰어드는 그녀. 선희 = ....... 업자 = ......! =정지= 유니 - 모모모모모모오야~!!! 기억 - .....아? 유니 - 왜 멈춰? 기억 - ........ 어느새 내 손에 들려있는 리모콘. 내 엄지손가락은 아직도 정지버튼을 꽈악 누른 채 희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유니 - 잔뜩 화가 나서... 왜 찬물 뿌리고 그래? 한창 분위기 좋았는데. 기억 - 아, 저기.. 잠깐... 잠깐만요. 유니 - 모가 잠깐만이야! 이미 지난 일을. 기억 - 아니 그러니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난 비디오 본체를 향해 기어가려는 유니 선배의 발목을 잡아 뒤로 거듭 끌어당기며 그녀가 재생버튼을 누르지 못하게 막았다. 유니 - 왜 그래? 안 놔?! 기억 - 잠깐만 좀 있어 봐요!! 아직 준비가 안됐다니까요! 유니 - 어머, 너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니? 기억 - 아니, 그러니까... 유니 - 기가 차다는 듯이..... 알았어~ 안 보면 될 거 아냐? =콰앙!!= 자리를 떨치고 일어난 그녀는 정말로 화가 난 것인지 출입문을 힘껏 닫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 이게 아닌데. 난 단지..... 그런데 이 상황....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끼익.= 한숨을 푹 내쉬며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하고 있을 때 출입문이 빼꼼 열리며 유니가 고개를 내밀었다. 유니 - ..... 이제 민아 기분이 이해가 가? 기억 - 아! 유니 - 갔나보네. 기억 - 아.... 그렇지만 전 화는 안냈는데요. 유니 - 민아가 그랬는 걸? 문 쾅 닫고 나가버렸다고. 기억 - 그건 피카츄가 쫓아와서... 유니 - ...응? 기억 - 아니.... 그... 개가 줄이 풀려있는 바람에... 유니 - 한심하다는 듯..... 사정이 어쨌건 민아가 모르면 소용이 없잖아? 기억 - ....그러네요. 유니 - 알았으면 언능 뛰어가지? 기억 - 아..... 오늘 학교 안 왔나요? 유니 - 응. 기억 - .....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유니 - 빨랑 가기나 해~. 기억 - 옙! 유니 선배.... 생각보다 좋은 사람인지도.
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2-4화> 역지사지
고된 인내와 수련 속에
물집이 잡히고 껍질이 벗겨지다 보면
어느새 그 자리엔 굳은살이 맺혀
우리의 몸을 지킵니다.
하지만... 사방에서 자라난 굳은 살은
아직 못 다 자란 여린 부분을 눌러
참기 힘든 아픔을 주기도 합니다.
너무 많이 상처 받으면... 언제나 아플 수 밖에 없습니다.
====================== 정권 단련 필요 ============================
다음날 오후. 학교.
물리 강의 시간.
권교수님
- 지금부터 제가 강의하는 내용에 대해서
절대로 충격적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거~죠?
필수 과목인데다 교수님도 깐깐하신 탓에
차분하기 이를 데 없는 분위기.
카랑카랑하고 다부진 교수님의 목소리와
노트 위를 휘달리는 펜 소리만 존재하던 강의실에
느닷없는 불청객이 뛰어들었다.
=빠바바밤빠밤빠바~ 빠바바밤빠밤빠바~=
민망할 만큼 경쾌하게 울리는 운명 교향곡의 소리.
권교수님 - 누구야?
에부리바디 - ........
권교수님 - Who??
교수님의 날카로운 눈빛이 학생들 사이를 누비는 순간
주변에 있던 많은 시선들이
나에게 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억 - 어.... 어라.
혹시나 싶은 마음에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어보자
신나게 액정을 번쩍거리며 목청 높여 울어대고 있던
내 핸드폰이 자랑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기억 - ...... 이런 쉣.
권교수님 - 오케이. 그대~로 Come on.
....... X 됐다.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계속 울려대는 핸드폰을 손에 들고
터벅터벅 강단위로 올라섰을 때
교수님이 학생들의 주위를 모으며 외쳤다.
권교수님
- 자, 이제부터 우리의 소중한 강의시간을 방해할 만큼
아주~ 중요한 통화 내용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끊어지기 전에 빨리 받아~.
일이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고 느끼며
참담한 기분으로 핸드폰을 열자
교수님은 핸드폰 수화기 부분에 마이크를 갖다 대
통화 내용이 강의실 안에 들리도록 했다.
제발 060 이나 700 만 아니어라....
기억 - ....예.
?? = 오빠~~~~!!!
!!!!!
강의실 안 가득 맑고 청아하게 울리는
어린 여인네의 목소리에
일순간 분위기가 크게 술렁거렸다.
기억 - 누.... 누구신지?
?? = 유~~니~~.
오빠라는 말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기억 - 제....제 번호는 어떻게 아시고...
유니 = 비~~밀~~.
기억 - 저기,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수..
권교수님 - 지금 끊으면 F야.
..........
유니 = 응? 수업중이야?
기억 - 아... 아뇨. 수, 숨이 차다고요.
유니 = 그래? 뭐하는데? 나중에 전화할까?
기억 - 아아아아아뇨~ 끊지 말아요, 지금 괜찮아졌어요.
유니 = 음... 나 심심해!
기억 - ...... 그래서요?
유니 = 훌쩍.... 오빠 나빠..... 그러기야?
그녀의 애교 아닌 애교와 투정에
야유와 환호성이 반반 섞여 울리는 강의실.
교수님도 매우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통화내용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기억 - ....... 어디세요?
유니 = 우리가 처음 맺어진 곳~.
=오오~!! 휘익 휘익~!!=
아이고 누님.....
기억 - 맺어지긴 뭐가 맺어져요!?
유니
= 눈물을 글썽이며....
너무해. 난 오빠만 믿고 허락한 건데...
기억
- 저기요, 선.배.님.
누가 들으면 어떡하려고
그런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씀을...
유니 = ...... 어머나, 이미 눈치 챈 거야?
기억 - 당연하죠, 그러니까 그 오빠 소리도 이제...
유니 = 아아~ 그냥 오빠 해죠~~~!! 오빠 오빠 오빠~~!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다.....
기억 - 제가 좀 있다 그리로 갈게요.
유니 = 아~~ 지금 와아잉~.
기억 - 지금 못 가요.
유니
= 입술을 삐죽 내민 채....
지금 안 오면 나 삐질 거야.
기억 - 하아...... 마음대로 하세요.
권교수님 - 떽!!
유니 = 응? 방금 무슨 소리야? 옆에 누구 있어?
갑작스러운 교수님의 호통에
깜짝 놀라 내게 묻는 그녀.
그 소리에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기억 - 아, 아,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유니 = 올 거지?
권교수님
- 여자가 부르면 당장 뛰어가야지,
여기 굶주린 솔로가 몇 명인데
그렇게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어, 응?
아무도 예상치 못한 교수님의 호통에
열렬한 호응을 보내는 학생들.
=그냥 이리로 오라고 그래~!=
=친구들도 데리고 오라 그래~!=
같은 함성이 중구난방으로 터져 나왔다.
기억 - 아....아...네, 지금 갈게요.
유니 = 으응~ 빨리 와~ 쪽!
기억 - 아, 진짜! 그런 거 하지 마요. 쫌!
권교수님 - 떽!!!
유니 = .... 떽?
기억 - 아, 아니....그게.... 암튼, 기다리고 있어요.
유니 = 응~.
그렇게 간신히 전화를 끊고 나니
하염없이 밀려오는 민망함과 앞날에 대한 걱정.
하지만 교수님은 매우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계셨다.
권교수님 - 아직 공대의 미래는 밝구만.
대체 지금 이 상황과 공대의 미래가
어떻게 직결되는 겁니까......
권교수님 - 뭐 해? 얼른 안 가고.
기억 - ...... 진짜로 갑니까?
권교수님 - 그럼.
기억 - ..... 정말 갑니다?
권교수님 - 안 가면 F야.
기억 -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이게 아닌데.... 뭔가 이상한데....
권교수님
- 자, 그럼 솔로들은 남아서
미래의 마누라를 바꾸기 위한 노력을 계속합시다.
379페이지 5번!
학생A - 교수님! 저도 커플입니다만!
권교수님 - 그럼 자네도 전화가 오길 빌고 있어.
뭐... 그래도 이정도면 무사히 마무리 된 건가.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떠들썩해진 강의실을 떠나 연습실로 향했다.
잠시 후, 연극부 연습실.
문을 열고 연습실 안으로 들어서자
한쪽 구석에서 비디오를 보고 있던 유니선배가 반색을 했다.
유니 -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오빠~!
기억 - ......왜 그러십니까, 선.배.님.
유니 - 재밌잖아.
기억 - 방금 선배님 전화 때문에 제가 무슨 꼴을...
유니 - 예쁘지? 잘했지? 응?
너무나 당당하게 능청을 떠는 그녀의 모습에
난 따지는 것 자체가 허무한 일 같다는 회의감까지 느꼈다.
기억 - 대체 어제 처음 만난 사이에 그런 장난을....
유니 - 당연하다는 투로, 그래야 효과가 있지.
기억 - 효과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유니 - 그런가? 암튼 일루 앉아봐, 이거나 같이 보자.
기억 - 뭔데요 이게?
박군 = 죽어! 죽어 이 ㄱ애새꺄!!
그녀가 보고 있던 비디오에선
박군 일당이 한창 김군을 패는 중이었다.
기억 - 이건...
유니 - 처음부터 볼래?
기억 - 아..아뇨, 괜찮습니다.
유니 - 하긴, 이제부터가 하이라이트니까.
기억 - 흠.....볼륨 조금만 높여주시겠어요?
유니 - 응?
김군 = 아아악!! 크흑! 어헉!
=퍼억! 퍽퍽! 뻐어억!=
유니 - 이게 그렇게 듣고 싶었어?
기억 - 아...... 좀 있다가 올리죠.
유니 - 으음... 이런 취향이 있었구나.
기억 - 아니에요~!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새 클라이맥스.
문제의 키스장면을 앞에 두고
자꾸만 유니선배가 의식됐다
이걸 봐야하나 말아야하나.
그냥 보면 굉장히 민망할 것 같기도 하고..
이거 가지고 또 장난치면 어떡하지?
문득 그 순간의 촉감들이 스멀스멀 살아났다.
목을 감싸던 그녀의 팔,
뺨에 느껴지던 콧바람.
품 안에 쏙 들어오던 여린 어깨.
영원처럼 길기도 하고 찰나처럼 짧기도 한 시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얼굴이 달아오르고
보여주기가 부끄러워졌다.
선희 = 불쌍한 사람...
업자 = 마지막으로.... 내게.... 키스해주겠어?
유니 - 오오....왔어 왔어 왔어~!!
기억 - .......
그리고 이어지는 긴 침묵.
힘없는 갈대처럼 휘청거리는 내 모습과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날 바라보는 민아의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 웃고 있었구나.
그 때 난 웃고 있었다.
흐릿하면서도 쓰디쓴 느낌이 드는 미소를 지은 채
금방 수명이 다할 듯 깜빡이는 전구처럼
필사적으로 빛을 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선희 = 불쌍한 사람..
하지만 그녀는 돌아섰다.
내 마지막 부르짖음을 뒤로한 채.
하지만 다시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하얗게 백열하며 증발해버리기 위해.
그리고 내 품으로 뛰어드는 그녀.
선희 = .......
업자 = ......!
=정지=
유니 - 모모모모모모오야~!!!
기억 - .....아?
유니 - 왜 멈춰?
기억 - ........
어느새 내 손에 들려있는 리모콘.
내 엄지손가락은 아직도 정지버튼을 꽈악 누른 채
희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유니
- 잔뜩 화가 나서... 왜 찬물 뿌리고 그래?
한창 분위기 좋았는데.
기억 - 아, 저기.. 잠깐... 잠깐만요.
유니 - 모가 잠깐만이야! 이미 지난 일을.
기억 - 아니 그러니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난 비디오 본체를 향해 기어가려는
유니 선배의 발목을 잡아 뒤로 거듭 끌어당기며
그녀가 재생버튼을 누르지 못하게 막았다.
유니 - 왜 그래? 안 놔?!
기억 - 잠깐만 좀 있어 봐요!! 아직 준비가 안됐다니까요!
유니 - 어머, 너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니?
기억 - 아니, 그러니까...
유니 - 기가 차다는 듯이..... 알았어~ 안 보면 될 거 아냐?
=콰앙!!=
자리를 떨치고 일어난 그녀는
정말로 화가 난 것인지
출입문을 힘껏 닫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 이게 아닌데.
난 단지.....
그런데 이 상황....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끼익.=
한숨을 푹 내쉬며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하고 있을 때
출입문이 빼꼼 열리며 유니가 고개를 내밀었다.
유니 - ..... 이제 민아 기분이 이해가 가?
기억 - 아!
유니 - 갔나보네.
기억 - 아.... 그렇지만 전 화는 안냈는데요.
유니 - 민아가 그랬는 걸? 문 쾅 닫고 나가버렸다고.
기억 - 그건 피카츄가 쫓아와서...
유니 - ...응?
기억 - 아니.... 그... 개가 줄이 풀려있는 바람에...
유니 - 한심하다는 듯..... 사정이 어쨌건 민아가 모르면 소용이 없잖아?
기억 - ....그러네요.
유니 - 알았으면 언능 뛰어가지?
기억 - 아..... 오늘 학교 안 왔나요?
유니 - 응.
기억 - .....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유니 - 빨랑 가기나 해~.
기억 - 옙!
유니 선배.... 생각보다 좋은 사람인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