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만 경숙이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분명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인데, 왜 나는 그것을 그냥 흘려버리지 못하는 걸까? 너무 황당무계 하다못해 인상적인 발상이라 뇌리에 꽉 박혀 버린 걸까? 이 따위 괴상한 생각을 내 머릿속에 심어 놓다니…….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 이런 망측한 생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라고!”
나의 갑작스런 외침에 운전을 하고 있던 지섭 오빠가 물었다.
“망측한 생각? 무슨 생각을 했는데? 설마……나랑 같은 생각?”
어울리지 않게 능글맞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지섭 오빠.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와 같은 생각은 아닐 거라는 쪽에 전 재산을 걸 수도 있다(재산이라고 할 만한 게 없어서 문제지). 설마하니 지섭 오빠가 승우 생각을 했을라고.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 완벽 그 이상이라고 할 만큼 멋진 남자친구인 지섭 오빠가 지금 내 곁에 있는데,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냔 말이다. 오랜만에 지섭 오빠와 단둘이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데, 그 음험한 승우 녀석의 얼굴이 내 눈앞에 자꾸 어른거리고 있다. 하여간 왕년의 원수답게 끝까지 나를 괴롭히는군.
‘나쁜 녀석. 자, 이제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
마음속으로 승우에게 악담을 퍼붓고,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녀석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래, 지금은 지섭 오빠와의 멋진 데이트에 집중할 때라고.
“요즘은 통 둘이 만날 기회가 없었지? 더블데이트도 재미있지만, 역시 이렇게 단둘이 만나는 것도 분위기 있고 좋다. 그치?”
진작 그런 생각을 하지. 그 동안 줄곧 승우 녀석을 대면하는 고통을 겪게 하기 전에 말이야.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엉뚱한 생각에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것 아냐? 앗, 또 머릿속에 승우 녀석 등장이다! 자자, 어서 다시 퇴장하라고!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멀리 가는 건 아니죠?”
“아냐, 아냐. 요 앞에 전에 봐둔 괜찮은 공원이 있거든. 금방 도착하니까 걱정하지 마.”
오빠의 말대로 목적지는 멀지 않았다. 곧 가로등 불빛이 아주 예쁘고, 작지만 호젓하고 분위기 있는 공원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런 공원에 왜 온 거지? 괜찮은 분위기기는 하지만 먹을 것도 안 팔잖아.’
나의 의구심에 답 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오빠는 나를 차에서 내리게 했다. 그리고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영아,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음, 내 생일은 확실히 아니고, 오빠 생일도 아니죠? 그렇다면 남은 건……내가 3일 만에 변비에서 탈출한 역사적인 날?”
나의 황당한 대답에 지섭 오빠는 풀 죽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저런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정말 오늘이 무슨 날인가 보네? 도대체 무슨 날이지?
“하긴, 요즘 새로운 일을 시작해서 정신없기도 할 거야. 오빠가 알아서 다 챙기면 되지 뭐. 오늘이 무슨 날인가 하면……아영이와 내가 만난 지 꼭 백일이 되는 날이야.”
지섭 오빠는 이렇게 말하며 갑자기 차 트렁크를 연다. 갑자기 트렁크에서 쏟아져 나와 하늘에 떠오르기 시작하는 오색 풍선들…….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런 장면을, 지섭 오빠가 나를 위해 연출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새 등장한 한 아름의 장미 꽃다발.
“99송이의 장미야. 나머지 한 송이는 바로 내 눈앞에 있는 아영이고.”
오빠는 이렇게 말하면서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적인다.
“영화나 드라마 보면서 애인 생기면 꼭 해보고 싶었는데……실제로 하려니까 진짜 쑥스럽다. 좀 닭살이기도 하고, 그치? 그래도 내 마음 알지? 유치하다고 놀리는 거 아니지?”
“솔직히……좀 유치하긴 해요.”
나는 그만 너무나도 솔직하게 대꾸하고 말았다. 사실 이런 건 영화에서 수도 없이 우려먹었던 거잖아. 이제 영화에서도 더 이상 써먹기에 식상하는 장면이라고.
“하지만……나 감동받았어요.”
머쓱해하던 지섭 오빠의 표정이 밝아진다. 그래, 정말 감동적이다. 세상에 어느 남자가 나를 위해 이런 유치한 장면을 연출해준단 말인가! 때로는 가장 유치한 것이 가장 원초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백일 축하해, 아영아. 하지만 가장 축하받고 싶은 건 바로 나야. 아영이를 만남으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됐으니까. 축하해줄 거지?”
너무나도 다정한 목소리. 그리고 너무나도 다정한 눈빛. 그 따뜻한 눈동자가 나만을 향해 반짝이며, 내 모습을 가득 담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여자가 꿈꾸는 그런 것이 아닐까? 나만을 사랑하는 완벽한 남자. 가슴이 벅찰 만큼 행복하고 과분한 선물이다. 그런데……내 기분은 어째서 가슴 한 구석에 바람이 든 것처럼 싸한 걸까?
“오빠처럼 멋진 남자를 만난 게 나에게 있어 최고의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이것은 분명 진심이다.
“나야말로 행운아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난 행운이라기보다는 재앙덩어리인 것 같은데…….”
“무슨 그런 말을! 내가 눈이 얼마나 높은데……재앙덩어리와 결혼하고 싶어 할 것 같아?”
결혼? 농담처럼 던진 오빠의 말. 그러나 단지 농담처럼 느껴지지만은 않는 심각한 말이다. 내 눈은 놀란 토끼마냥 동그래졌다. 나의 놀란 표정을 보고 지섭 오빠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너무 이른 말인 거 알아. 하지만 매일매일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면……결혼이란 것이 굉장히 매력 있게 느껴진다. 당장 결혼하자고 보채는 건 아니고……. 난 아영이의 마음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 그냥 우리의 만남이 그냥 가벼운 것만은 아니란 걸 네가 알았으면 좋겠다. 아영아, 사랑한다.”
사랑 고백, 그리고 프러포즈. 상상 속에서는 여러 연예인들을 통해 받아보았지만, 현실에서는 25년의 짧지 않은 인생을 통틀어 처음이다. 그러나 상상 속에서는 이런 기분일 줄 몰랐다. 그저 로맨틱하고 아름다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이 이런 무게를 지니고 있는 줄은 몰랐다. 이렇게 가슴에 묵직하게 내려앉을 줄은…….
마침내 지섭 오빠가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이번에는 나의 착각이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입맞춤을 하려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첫, 아니 두 번째 키스……. 따뜻한 손이 내 뺨을 감싸고, 촉촉한 입술이 마침내 내 입술에 와 닿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는 부드러움으로 내 입술을 점령하고, 나에게 따뜻한 온기와 숨결을 불어 넣었다.
첫 키스에 대해 상상할 때면(은하윤과의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입맞춤에 대한 기억은 일단 접어두자)……나는 그것이 가장 행복한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단순한 입술의 접촉이 아닌, 영혼이 부딪히는 느낌. 그리하여 세상 그 어떤 것보다 황홀한 경험일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틀렸다. 그의 입맞춤이 깊어질수록, 나의 마음은 점점 공허해졌다. 육체는 그의 입술 아래에 있지만, 마음은 따로 분리되어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나는 그만 왈칵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영아, 왜 그래? 괜찮아?”
지섭 오빠가 깜짝 놀라 내게 묻는다. 무척 걱정스러운 어조이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괜찮다는 대답을 하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결코 괜찮지 않았다. 절대로 괜찮아질 수가 없었다. 이미 괜찮다는 대답을 한다는 게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내 눈에서는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왜 우는 거야? 내가 너무 서두른 거니?”
나는 고개를 도리질 쳤다. 오빠가 자책하게 둘 수는 없었다. 그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걸.
“그럼 왜 울어? 응?”
내가 지금 왜 울고 있는 거지? 마구 눈물을 흘리면서도 왜 울고 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내게는 울 이유가 없는데……. 그러다가 내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한 가지 기억해내고야 만다. 그것은…….
“오빠의 손이……너무 따뜻해요.”
나의 말을 듣고 지섭 오빠는 당황스러운 표정이다.
“손이 너무 따뜻해서 운다니……그게 무슨 소리야?”
논리적인 답을 원해도 할 수 없다. 그게 다 인걸. 오빠의 손은 너무 따뜻하다. 그 따뜻한 손이 너무 슬펐고,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 따뜻한 손이 그보다 훨씬 차가웠던 손의 기억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에…….
나는 흠칫 놀랐다. 차가웠던 손의 기억이라니……그것은 승우의 손? 나는 지금 승우를 떠올리며 이렇게 울고 있는 건가?
그제 서야 깨달았다. 경숙의 말이 정답이었음을. 나는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것도 내 곁에 있는 지섭 오빠가 아닌, 바로 승우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일이 정말 벌어지고 만 것이다.
“아영아, 제발 울지 마.”
아무 것도 모르고 나를 달래기 위해 열심인 지섭 오빠. 정말 좋은 사람이다. 너무 착한 남자다. 왜 나는 그런 그를 사랑할 수 없었던 걸까? 그래,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사랑이라고 믿었던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다. 전에는 알지 못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으니까. 진짜 사랑을 하게 된 지금에서야 분명히 알 것 같았다. 지섭 오빠에 대한 감정은 그저 멋진 남자에 대한 설익은 동경, 자부심, 편안함일 뿐……사랑이 아니었다.
“말해 봐. 응? 내가 뭘 잘못 했어?”
“아니에요, 오빠. 잘못한 건 나에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로 충분할까? 나를 이토록 사랑하는 지섭 오빠의 품에서 다른 남자를 떠올리고 있는 지금, 미안하다는 말로 정말 충분할 수 있을까? 더구나 난 지금 그에게 더 큰 상처를 주려하고 있다.
“미안하다니……. 밑도 끝도 없이 미안하다는 건 무슨 소리야? 아영이가 나한테 미안할 일이 뭐가 있다고?”
“난……몰랐어요. 내가 오빠를 정말 사랑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것만은 믿어 줘요. 하지만……난 언제나 바보였잖아요. 이번에도 내가 틀렸어요.”
그래, 이제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몰랐을 때야 어쩔 수 없었다지만, 진실을 깨달은 지금 오빠를 기만할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계속 지섭 오빠의 곁에 머무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지섭 오빠에게 못할 짓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미안해요. 나……오빠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요.”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정적이 잠시 동안 우리 주위를 감쌌다. 너무나 차갑고 무거운 정적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마침내 입을 연 지섭 오빠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말은……무슨 뜻이야?”
“오빠를 더 이상 만날 수 없어요. 우리……헤어져요.”
그가 웃었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즐거워서 웃는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허탈한 웃음이었다. 당장이라도 내가 짓궂은 장난이었다고 선언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눈물에 젖어 창백한 내 얼굴을 보고, 초조한 듯 말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아무 문제도 없었잖아.”
“미안해요, 오빠. 정말 미안해요.”
“내가 너무 급하게 밀어붙이니까 네가 당황했나보다. 그런 거지?”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도대체 이유를 말해봐. 미안하단 말만 하지 말고, 내가 납득할 만한 대답을 해보라고!”
그의 화난 모습은 처음 본다. 그리고 그렇게 착한 지섭 오빠를 화나게 한 것이 나라는 사실은 더욱 나의 눈물을 샘솟게 한다. 그러나 내가 미안하단 말을 제외하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오늘 들은 얘기는 못들은 걸로 하겠어.”
“하지만…….”
“그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너, 지금 많이 흥분해 있어. 나중에……네 마음이 가라앉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때 다시 얘기하자.”
이렇게 말한 그는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차로 돌아간다. 화가 났지만 겨우 가라앉히려는 태도가 결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멀지 않으니까 혼자 돌아갈 수 있지? 오늘은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다.”
“네……. 오빠, 정말 미안해요.”
그러나 나의 마지막 말은 허공에서 흩날렸다. 지섭 오빠는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린 것이다.
사람의 감정은 왜 머리를 따라가지 못하는 걸까? 왜 나는 나를 그토록 아껴주는 지섭 오빠가 아닌, 나를 여자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승우를 좋아하게 된 걸까? 더구나 승우에게는……은혜라는 사랑스러운 여자 친구가 있지 않은가!
사랑으로 인하여 가슴이 아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이렇게 무너져 내릴 것 같이 아픈 거구나. 갑자기 희극에서 어울리지 않는 비극으로 내동댕이쳐진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떠오르는 것은 단 하나, 승우의 얼굴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런 대책도, 생각도 없었다. 그저……난 승우가 보고 싶을 뿐이었다.
행운 예감 - 제 9 장 - 광란의 밤 [24]
제 9 장
광란의 밤
1
자꾸만 경숙이의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분명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인데, 왜 나는 그것을 그냥 흘려버리지 못하는 걸까? 너무 황당무계 하다못해 인상적인 발상이라 뇌리에 꽉 박혀 버린 걸까? 이 따위 괴상한 생각을 내 머릿속에 심어 놓다니…….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 이런 망측한 생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라고!”
나의 갑작스런 외침에 운전을 하고 있던 지섭 오빠가 물었다.
“망측한 생각? 무슨 생각을 했는데? 설마……나랑 같은 생각?”
어울리지 않게 능글맞은 표정을 지어 보이는 지섭 오빠.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와 같은 생각은 아닐 거라는 쪽에 전 재산을 걸 수도 있다(재산이라고 할 만한 게 없어서 문제지). 설마하니 지섭 오빠가 승우 생각을 했을라고.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 완벽 그 이상이라고 할 만큼 멋진 남자친구인 지섭 오빠가 지금 내 곁에 있는데,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냔 말이다. 오랜만에 지섭 오빠와 단둘이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데, 그 음험한 승우 녀석의 얼굴이 내 눈앞에 자꾸 어른거리고 있다. 하여간 왕년의 원수답게 끝까지 나를 괴롭히는군.
‘나쁜 녀석. 자, 이제 내 머릿속에서 사라져!’
마음속으로 승우에게 악담을 퍼붓고,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녀석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래, 지금은 지섭 오빠와의 멋진 데이트에 집중할 때라고.
“요즘은 통 둘이 만날 기회가 없었지? 더블데이트도 재미있지만, 역시 이렇게 단둘이 만나는 것도 분위기 있고 좋다. 그치?”
진작 그런 생각을 하지. 그 동안 줄곧 승우 녀석을 대면하는 고통을 겪게 하기 전에 말이야.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엉뚱한 생각에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것 아냐? 앗, 또 머릿속에 승우 녀석 등장이다! 자자, 어서 다시 퇴장하라고!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멀리 가는 건 아니죠?”
“아냐, 아냐. 요 앞에 전에 봐둔 괜찮은 공원이 있거든. 금방 도착하니까 걱정하지 마.”
오빠의 말대로 목적지는 멀지 않았다. 곧 가로등 불빛이 아주 예쁘고, 작지만 호젓하고 분위기 있는 공원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런 공원에 왜 온 거지? 괜찮은 분위기기는 하지만 먹을 것도 안 팔잖아.’
나의 의구심에 답 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오빠는 나를 차에서 내리게 했다. 그리고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영아,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음, 내 생일은 확실히 아니고, 오빠 생일도 아니죠? 그렇다면 남은 건……내가 3일 만에 변비에서 탈출한 역사적인 날?”
나의 황당한 대답에 지섭 오빠는 풀 죽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저런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정말 오늘이 무슨 날인가 보네? 도대체 무슨 날이지?
“하긴, 요즘 새로운 일을 시작해서 정신없기도 할 거야. 오빠가 알아서 다 챙기면 되지 뭐. 오늘이 무슨 날인가 하면……아영이와 내가 만난 지 꼭 백일이 되는 날이야.”
지섭 오빠는 이렇게 말하며 갑자기 차 트렁크를 연다. 갑자기 트렁크에서 쏟아져 나와 하늘에 떠오르기 시작하는 오색 풍선들…….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런 장면을, 지섭 오빠가 나를 위해 연출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새 등장한 한 아름의 장미 꽃다발.
“99송이의 장미야. 나머지 한 송이는 바로 내 눈앞에 있는 아영이고.”
오빠는 이렇게 말하면서 쑥스러운지 머리를 긁적인다.
“영화나 드라마 보면서 애인 생기면 꼭 해보고 싶었는데……실제로 하려니까 진짜 쑥스럽다. 좀 닭살이기도 하고, 그치? 그래도 내 마음 알지? 유치하다고 놀리는 거 아니지?”
“솔직히……좀 유치하긴 해요.”
나는 그만 너무나도 솔직하게 대꾸하고 말았다. 사실 이런 건 영화에서 수도 없이 우려먹었던 거잖아. 이제 영화에서도 더 이상 써먹기에 식상하는 장면이라고.
“하지만……나 감동받았어요.”
머쓱해하던 지섭 오빠의 표정이 밝아진다. 그래, 정말 감동적이다. 세상에 어느 남자가 나를 위해 이런 유치한 장면을 연출해준단 말인가! 때로는 가장 유치한 것이 가장 원초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백일 축하해, 아영아. 하지만 가장 축하받고 싶은 건 바로 나야. 아영이를 만남으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됐으니까. 축하해줄 거지?”
너무나도 다정한 목소리. 그리고 너무나도 다정한 눈빛. 그 따뜻한 눈동자가 나만을 향해 반짝이며, 내 모습을 가득 담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여자가 꿈꾸는 그런 것이 아닐까? 나만을 사랑하는 완벽한 남자. 가슴이 벅찰 만큼 행복하고 과분한 선물이다. 그런데……내 기분은 어째서 가슴 한 구석에 바람이 든 것처럼 싸한 걸까?
“오빠처럼 멋진 남자를 만난 게 나에게 있어 최고의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이것은 분명 진심이다.
“나야말로 행운아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난 행운이라기보다는 재앙덩어리인 것 같은데…….”
“무슨 그런 말을! 내가 눈이 얼마나 높은데……재앙덩어리와 결혼하고 싶어 할 것 같아?”
결혼? 농담처럼 던진 오빠의 말. 그러나 단지 농담처럼 느껴지지만은 않는 심각한 말이다. 내 눈은 놀란 토끼마냥 동그래졌다. 나의 놀란 표정을 보고 지섭 오빠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너무 이른 말인 거 알아. 하지만 매일매일 헤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면……결혼이란 것이 굉장히 매력 있게 느껴진다. 당장 결혼하자고 보채는 건 아니고……. 난 아영이의 마음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 그냥 우리의 만남이 그냥 가벼운 것만은 아니란 걸 네가 알았으면 좋겠다. 아영아, 사랑한다.”
사랑 고백, 그리고 프러포즈. 상상 속에서는 여러 연예인들을 통해 받아보았지만, 현실에서는 25년의 짧지 않은 인생을 통틀어 처음이다. 그러나 상상 속에서는 이런 기분일 줄 몰랐다. 그저 로맨틱하고 아름다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이 이런 무게를 지니고 있는 줄은 몰랐다. 이렇게 가슴에 묵직하게 내려앉을 줄은…….
마침내 지섭 오빠가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이번에는 나의 착각이 아니었다. 그는 나에게 입맞춤을 하려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첫, 아니 두 번째 키스……. 따뜻한 손이 내 뺨을 감싸고, 촉촉한 입술이 마침내 내 입술에 와 닿았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는 부드러움으로 내 입술을 점령하고, 나에게 따뜻한 온기와 숨결을 불어 넣었다.
첫 키스에 대해 상상할 때면(은하윤과의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입맞춤에 대한 기억은 일단 접어두자)……나는 그것이 가장 행복한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단순한 입술의 접촉이 아닌, 영혼이 부딪히는 느낌. 그리하여 세상 그 어떤 것보다 황홀한 경험일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틀렸다. 그의 입맞춤이 깊어질수록, 나의 마음은 점점 공허해졌다. 육체는 그의 입술 아래에 있지만, 마음은 따로 분리되어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나는 그만 왈칵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영아, 왜 그래? 괜찮아?”
지섭 오빠가 깜짝 놀라 내게 묻는다. 무척 걱정스러운 어조이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괜찮다는 대답을 하려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결코 괜찮지 않았다. 절대로 괜찮아질 수가 없었다. 이미 괜찮다는 대답을 한다는 게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내 눈에서는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왜 우는 거야? 내가 너무 서두른 거니?”
나는 고개를 도리질 쳤다. 오빠가 자책하게 둘 수는 없었다. 그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걸.
“그럼 왜 울어? 응?”
내가 지금 왜 울고 있는 거지? 마구 눈물을 흘리면서도 왜 울고 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내게는 울 이유가 없는데……. 그러다가 내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한 가지 기억해내고야 만다. 그것은…….
“오빠의 손이……너무 따뜻해요.”
나의 말을 듣고 지섭 오빠는 당황스러운 표정이다.
“손이 너무 따뜻해서 운다니……그게 무슨 소리야?”
논리적인 답을 원해도 할 수 없다. 그게 다 인걸. 오빠의 손은 너무 따뜻하다. 그 따뜻한 손이 너무 슬펐고,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 따뜻한 손이 그보다 훨씬 차가웠던 손의 기억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에…….
나는 흠칫 놀랐다. 차가웠던 손의 기억이라니……그것은 승우의 손? 나는 지금 승우를 떠올리며 이렇게 울고 있는 건가?
그제 서야 깨달았다. 경숙의 말이 정답이었음을. 나는 사랑에 빠진 것이다. 그것도 내 곁에 있는 지섭 오빠가 아닌, 바로 승우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일이 정말 벌어지고 만 것이다.
“아영아, 제발 울지 마.”
아무 것도 모르고 나를 달래기 위해 열심인 지섭 오빠. 정말 좋은 사람이다. 너무 착한 남자다. 왜 나는 그런 그를 사랑할 수 없었던 걸까? 그래,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사랑이라고 믿었던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다. 전에는 알지 못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으니까. 진짜 사랑을 하게 된 지금에서야 분명히 알 것 같았다. 지섭 오빠에 대한 감정은 그저 멋진 남자에 대한 설익은 동경, 자부심, 편안함일 뿐……사랑이 아니었다.
“말해 봐. 응? 내가 뭘 잘못 했어?”
“아니에요, 오빠. 잘못한 건 나에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미안하다는 말로 충분할까? 나를 이토록 사랑하는 지섭 오빠의 품에서 다른 남자를 떠올리고 있는 지금, 미안하다는 말로 정말 충분할 수 있을까? 더구나 난 지금 그에게 더 큰 상처를 주려하고 있다.
“미안하다니……. 밑도 끝도 없이 미안하다는 건 무슨 소리야? 아영이가 나한테 미안할 일이 뭐가 있다고?”
“난……몰랐어요. 내가 오빠를 정말 사랑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것만은 믿어 줘요. 하지만……난 언제나 바보였잖아요. 이번에도 내가 틀렸어요.”
그래, 이제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몰랐을 때야 어쩔 수 없었다지만, 진실을 깨달은 지금 오빠를 기만할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계속 지섭 오빠의 곁에 머무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지섭 오빠에게 못할 짓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미안해요. 나……오빠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요.”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정적이 잠시 동안 우리 주위를 감쌌다. 너무나 차갑고 무거운 정적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마침내 입을 연 지섭 오빠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말은……무슨 뜻이야?”
“오빠를 더 이상 만날 수 없어요. 우리……헤어져요.”
그가 웃었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즐거워서 웃는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허탈한 웃음이었다. 당장이라도 내가 짓궂은 장난이었다고 선언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눈물에 젖어 창백한 내 얼굴을 보고, 초조한 듯 말했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아무 문제도 없었잖아.”
“미안해요, 오빠. 정말 미안해요.”
“내가 너무 급하게 밀어붙이니까 네가 당황했나보다. 그런 거지?”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도대체 이유를 말해봐. 미안하단 말만 하지 말고, 내가 납득할 만한 대답을 해보라고!”
그의 화난 모습은 처음 본다. 그리고 그렇게 착한 지섭 오빠를 화나게 한 것이 나라는 사실은 더욱 나의 눈물을 샘솟게 한다. 그러나 내가 미안하단 말을 제외하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오늘 들은 얘기는 못들은 걸로 하겠어.”
“하지만…….”
“그만,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너, 지금 많이 흥분해 있어. 나중에……네 마음이 가라앉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을 때 다시 얘기하자.”
이렇게 말한 그는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차로 돌아간다. 화가 났지만 겨우 가라앉히려는 태도가 결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멀지 않으니까 혼자 돌아갈 수 있지? 오늘은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좋을 것 같다.”
“네……. 오빠, 정말 미안해요.”
그러나 나의 마지막 말은 허공에서 흩날렸다. 지섭 오빠는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린 것이다.
사람의 감정은 왜 머리를 따라가지 못하는 걸까? 왜 나는 나를 그토록 아껴주는 지섭 오빠가 아닌, 나를 여자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승우를 좋아하게 된 걸까? 더구나 승우에게는……은혜라는 사랑스러운 여자 친구가 있지 않은가!
사랑으로 인하여 가슴이 아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이렇게 무너져 내릴 것 같이 아픈 거구나. 갑자기 희극에서 어울리지 않는 비극으로 내동댕이쳐진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떠오르는 것은 단 하나, 승우의 얼굴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런 대책도, 생각도 없었다. 그저……난 승우가 보고 싶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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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셨나요?
전 좀 슬픈 크리스마스였답니다~
이런저런 일이 생겨 남친도 못만나고, 23일 밤에 기분 안좋은 일도 생기고, 몸도 많이 안좋아지고...ㅜ.ㅜ
그냥 한해의 마무리 액땜했다 쳐야죠~에효
여러분들이라도 즐거운 성탄절을 보내셨다면 좋겠네요.
음, 이번 주는 일년의 마지막 주인 만큼 많이 바빠질 듯 하네요.
딱 이번 주만 글이 좀 불규칙하게 올라오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최선을 다해 올리도록 애쓰기는 할께요^^
아, 올 해 안으로 완결은 역시나 못낼 것 같네요.
그래도 이야기는 후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고고!!!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