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율(礎律) 제 80화

피바다2005.12.27
조회346

    깊은 밤, 비류천은 눈을 떴다.

  커튼은 활짝 젖혀져 하늘에 뜬 세 개의 보름달은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그 빛을 창 안으로 불어넣고 있었다. 방 안은 은빛으로 가득차 천제마저도 마치 은부스러기를 온 몸에 묻힌 듯 그 피부가 달빛으로 빛났다. 그는 몸을 일으켜 상반신을 세운 채 침대에 앉아 넋을 잃고 쏟아져들어오는 달빛을 바라보았다. 세 개의 보름달도 또렷이 하늘에 떠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움직임을 느껴져 천제는 옆 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그 날 밤 그가 욕정을 이기지 못해 안았던 후궁이 몸을 뒤척인 것이다. 알몸으로 잠든 그녀는 좋은 꿈을 꾸는지 편안해보였다. 그녀의 아이같이 보드라운 피부 위로도 달빛이 사뿐이 내려 앉아 있었다. 그 빛이 간지러운지 후궁은 입가에 잔잔한 웃음까지 머금었다. 그녀를 무심히 내려다보던 천제는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자 허무가 몰려왔다. 허무함은 점차로 무게를 더하더니 천제를 참기 힘든 격정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대상조차없는 그리움과 동시에 고독에 휩싸이고 말았다. 달빛이 가득찬 방의 분위기는 그를 더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세상 모든 것이 충만한 가운데 홀로 떨어져나온 느낌이었다. 그리고 사무치는 어떤 그리움.

  천제는 바닥에 팽개쳐 놓은 가운을 대충 껴입고 벽면을 모조리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창으로 다가갔다. 세 개의 보름달 아래 제황성은 평화롭게 꿈꾸듯 보였다. 그는 대상을 알 수 없는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한참을 달빛에 취해 서 있었다. 그 때, 저멀리서 그의 눈에 들어온 아스라한 빛더미가 그를 놀라게 했다. 그것은 달빛도 아니었고 어둠을 밝히는 조명도 아니었다. 자연스럽고도 신비한 빛무더기가 저 편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인..덕궁?'

   빛의 얼룩이 아롱거리는 곳은 바로 인덕궁이 있는 쪽이었다. 비류천의 심장이 몹시도 뛰었다. 300년간 한 번도 발길을 돌리지 않았던, 죽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던 그 땅이 그 날 밤에 그를 강하게 유혹했다. 천제는 어느 새 얇은 가운 하나만 걸친 채 반쯤 알몸인채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인덕궁의 초라해진 낡은 대문 앞에서 그는 망설인 건 아주 잠시. 천제는 훌쩍 담을 넘었다. 그리고 그의 눈 앞에 펼쳐진 인덕궁의 정경에 천제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히비어였다. 달빛을 먹고 사는 히비어는 세 개의 만월의 기운으로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히비어 꽃향은 어지러울 정도로 달콤하여 그는 환각에 빠지는 것만 같았다.

  300여년 전, 노여움에 이성을 잃어 완전히 짓밟아 버렸던 히비어 정원이었다. 그런데 이 꽃은 엄청난 생명력으로 강인하게 버티어 다시금 자신의 뿌리를 뻗어 활짝 피어나 있었다. 오히려 더욱 아름답고 더욱 처절하게 피어났다. 천제는 이 강인한 생명을 대하고 자기도 모르게 채를 떠올렸다. 도리질을 쳐 떨쳐내려했지만 그녀의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났다. 히비어는 너무나도 채를 닮은 꽃이었다.모든 꽃송이가 그녀의 얼굴로 보였다. 끔찍하면서도 숨막히게 행복한 환상이었다.

  천제는 달빛과 히비어가 내는 순백의 빛에 둘러쌓여 추억으로 빠져드는 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 정원에서 채와 나누었던 애틋한 사랑의 기억이 하나도 지워지지 않고 고스란히 천제를 일깨우고 있었다.

  천제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자신조차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가슴이 찢어질 듯 그리움이 사무쳤다. 천제는 더 이상 추억에 빠져들고 싶지 않았다. 추억이 그를 망치기 바로 직전에 그의 의지가 그를 추억의 수렁에서 건져냈다. 정신을 차린 천제는 두 번 다시 이 곳을 찾지 않도록 날이 밝으면 인덕궁 전체를 부숴버리리라 결심하였다. 

  그 때,

  " 사라라라락....."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너무도 생생하게 그의 귓가를 스쳤다. 천제는 재빨리 소리나는 쪽을 향해 몸을 돌렸고 그 순간,

  " ......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나즈막하게 신음 소리를 내고 말았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직도 히비어와 달빛의 마력에 취해 깨어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인덕궁에 올 리도 없었고 지금 그녀가...채가 눈 앞에 있을리가 없었다.

  무늬없는 소박한 흰 비단 옷을 단출하게 입고 흰 베일을 머리에 둘러쓴 그녀는 분명히 채였다. 그 키와 매끈한 허리와 부드러운 가슴과 거부할 수 없으리만치 매혹적인 붉은 눈동자. 그리고 달빛 아래 빛나는 긴 은발은 분명 그녀였다. 천제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순간만큼은 절대 깨지 않을 꿈이길 바랬다.

  하지만 히비어 속에서 사뿐사뿐 춤을 추던 채는 천제를 발견하고는 두려운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 그녀는 달아나려하였다. 늘 그랬듯 그녀는 또다시 달아나려하고 있었다. 천제는 소리치며 손을 뻗었다.

  " 채!"

  하지만 그녀는 바람을 타고 사라지듯 모습을 감추었다. 천제는 북받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울부짖었다. 그는 아이처럼 슬픔을 절제하지 못하고 서럽게도 울었다. 지독하게 가슴 아픈 꿈이었다.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끔찍한 악몽이었다.

  하지만, 아침 해가 떴을 때, 그는 손에 흰 베일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채의 향기가 그대로 남아있는 흰 베일이었다.

 

  천제가 히비어 꽃밭에서 악몽을 꾼 같은 날 밤, 설무랑은 촉룡산 밤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달빛이 밤을 완전히 정복한 밤이면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세 개의 보름달이 쏟아내는 빛에 밤 새 뒤척이던 그는 뜬끔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촉룡산을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환한 세 개의 달빛으로 밤 길을 오르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차가운 겨울의 바람도 산을 오르는 그에게 고마운 동행이었다. 제휴수의 머리꼭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곧 탁 트인 광장이 나왔고 설무랑은 광장 입구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설무랑은 숨을 고르며 달빛 아래 신비롭게 펼쳐진 제휴수와 그 주변을 감상했다.

  제휴수는 겨울에 열매를 맺는 나무로 그 푸른 잎사귀 사이로 말랑말랑한 열매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동그란 열매들 안에는 맑은 수액이 가득차 유리처럼 투명하여 속이 훤히 보였고 각기 그 색이 다른 씨앗으로 열매도 색이 달라보였다. 그 투명한 구슬 열매들이 달빛을 반사하는 모습이 꼭 수백개의 전구를 달고 있는 듯 했다.머지 않아 봄이 오면 유리알같이 맑은 열매들이 터지면서 깃털이 달린 씨앗을 사방으로 보낼 것이다. 날개를 단 붉은 열매들이 사방으로 바람을 타고 날으는 모습 또한 진풍경이었다.

  확실히 그 날 밤은 이상했다. 달빛이 조화를 부리는 게 분명햇다. 알 수 없는 감흥으로 설무랑은 잠을 이루지 못했고 기어이 깊은 밤 촉룡산에 오르고 말았다. 그가 이렇게 벅찬 감흥에 젖은 적은 이전에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 제휴수와 그 주변 광경은 마치 그를 기다렸다는 듯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함과 아름다움에 휩싸여있었다. 그를 위해 준비한 어떤 무대와도 같은 광경이었다. 달빛은 그가 정신을 놓았다간 한 순간에 그 빛에 빨려들 듯 어떤 강한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갑자기 센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자, 제휴수의 구슬 열매들이 서로 부딪히며 맑고 영롱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열매들은 저마다의 밀도가 달라 각각이 부딪히며 내는 소리 또한 달랐다. 마치 깨끗한 종소리가 차례로 울리며 멋진 하모니를 완성하는 듯 했다. 설무랑은 그 소리가 자신을 유혹하는 노랫소리인 듯 했다. 하지만 가히 듣기 좋은 소리의 조합이었다.

  설무랑은 분명히 넋이 빠져있었다. 그가 막 제휴수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그는 방금 전까지 놓치고 있던 이질적인 한 장면을 발견해 낸 것이다. 그것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 하지만 설무랑이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설무랑은 그것이 여자의 윤곽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제휴수의 오른편에 서서 제휴수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녀 역시 설무랑의 인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오른손을 뻗어 제휴수의 등걸을 매만지고 있었다. 그녀의 옆 보습은 달빛 아래 여신처럼 신성해보였다. 여인이 고개를 돌려 설무랑을 발견했다.

  그 순간 설무랑은 숨이 탁 막혀왔다. 그녀는 붉은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무랑은 곧 그녀가 눈부신 은발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 그런 여자가 더 있을 수는 없었다.

  달빛처럼 순수하고 깨끗하며 신비로운 살결과 별가루를 뿌린 듯 빛나는 긴 은색 머리카락과 불꽃처럼 강렬하고도 매혹적인 붉은 눈. 설무랑은 믿을 수 없었지만 그의 육체는 벅찬 감동과 본능을 숨기지 못했다. 설무랑의 보랏빛 눈이 그녀에게 반응하여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설무랑은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다. 그는 앞에 신기루처럼 서 있는 여자를 주의하여 살폈다. 그리고 알았다. 그녀는 그가 그토록 갈망하는 '채'가 아니었다. 처음엔 극도의 흥분으로 그녀가 채로 보였지만 분명 아주 닮긴 했어도 절대 채는 아니었다. 그가 채를 못 알아 볼 리 없었다.

  어쨌든 설무랑은 그녀의 정체를 알아야만 했다. 혹여 그녀가 제휴수에서 잠시 달빛에 이끌려 나온 혼령이라 할지라도 그녀에 대해 알고픈, 그리고 소유하고픈 욕망을 누를 수는 없었다. 설무랑은 천천히 다가갔다. 나타날 때 그러했던 것처럼 어느 순간에 사라질 것만 같아 그는 시선으로 그녀를 묶어두려는 듯 눈을 떼지 않았다. 두어 걸음 거리를 두고 다가갈때까지도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그의 시선을 거부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표정없이 야릇한 시선만 던지던 그녀가 갑작스레 환하게 웃었다. 아찔할 정도로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설무랑의 이성이 그 웃음에 지배당하는 순간 그녀는 그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달빛이 대신 채우고 있는 그 허전한 자리에 남은 생생한 발자국 표시는 설무랑이 겪은 그 날밤의 일이 환상만은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바람이 다시 불고 제휴수의 열매들이 구슬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간만에 올린 내용이 짧아 죄송합니다. 뒤이어 쓴 부분이 마음에 들지않아 쓰고 고치기를 몇 번했는데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네요. 컴퓨터 앞에 앉을 기회가 도통 없어 또 언제 글을 올리기 기약할 수가 없습니다.ㅠ.ㅠ 부지런히 해서 조만간 올리도록 애써볼게요. 감기 조심하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