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가 지나갔습니다. 어둠 속으로 대피하셨던 솔로분들은 이제 밖으로 나오셔도 됩니다. 이젠 커플 대신 연말 연시 술 조심, 추위 조심~. ============================== 이젠 술이 무섭다 =============================== 과정이야 어찌됐건 결과적으로 그녀와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성공한 나. 회계로부터 전해들은 말에 따르면 연습실에 그녀 혼자 남아있던 당시의 상황은 유니 선배가 연출에게 압력을 행사한 결과라고 한다. 그날 이후 핸드폰 소지 확인 및 배터리 충전은 내 일과에서 매우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되었고 그녀와의 중요한 연락수단으로 제 몫을 다하고 있다. 명분 유지를 위해 하고 다니던 깁스도 풀고 어느새 기말고사가 코앞으로 다가온 금요일. 점심시간이 가까워 올 때 즈음, 그녀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어디야? -민아 =여기 학생회관 식당. 날씨 참 좋은 것 같네. 밖에서 산책이나 할까? -기억 =ㅋㅋ. 우선 같이 밥 먹고. -민아 =그러자. 오늘 메뉴는 A코스에 생선가스 B코스에 마파두부튀김 C코스에 김치찌개야. -기억 =B가 좋겠다. 금방 갈게. -민아 =응.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기억 = ^^ -민아. .... 여기서 답장을 또 보내긴 그렇지? 여담이지만, 그녀가 처음 내 문자를 받았을 때 문자메시지에 마침표가 찍혀있는 걸 보곤 친구들과 한참을 웃었다고 한다. 난 그 이야기에 놀라 주변에서 마침표를 찍는 사람을 찾아봤지만 되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넌 마침표도 찍냐? 난 띄어쓰기도 안 하는데?=뿐...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지금도 난 아직 마침표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ㅡ를 대신 쓰고 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줄을 서있을 때 이젠 제법 익숙해진 전화벨소리가 울렸다. =빠바바밤빠밤빠바...= 기억 - 예. ?? - 나~. 기억 - 아, 어디야? 도착했어? 민아 = 글쎄~ 어딜까, 오른쪽을 보세요~. 기억 - .... 오른쪽? 안 보이는데? 민아 = 다시 오른쪽~. 기억 - .... 그래도 안 보여. 민아 = 이번엔 뒤로~ 돌아! 기억 - 뭐야~. 장난치지 말고~. 민아 = 싫~어. 허리에 손! 기억 - 그럼 전화를 못 받잖아. 민아 = .....그럼 왼손만 허리에. 기억 - 자, 했다. =삐리릭.= 기억 - 어, 뭐야. 왼손을 허리에 짚자마자 끊어지는 전화에 당황한 난 혹시 배터리가 다 된 건가 생각하며 두 손으로 핸드폰을 살폈다. 민아 - 와웅! 기억 - ....... 그 순간, 뒤에서 나타나 두 팔을 와락 교차하며 내 왼편을 스쳐 지나가는 민아. 일순간, 강력한 썰렁함이 우리 둘 사이에 흘렀다. 지금.. 팔짱을 끼려고 그랬던 건가.... 민아 - 이...이이이이... 뭐~야~~! 기억 - 아니, 갑자기 전화가 끊어지니까 왜 그런가 싶어서 보느라 그랬지! 민아 - 아..씨... 부끄럽게.. 주변 사람들 보기가 민망했는지 투덜투덜 거리며 어색하게 내 옆에 와서 서는 그녀. 난 그런 그녀의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민아 - ...... 조금 놀라는 듯 하다가도 이내 바싹 곁에 다가서 머리를 기대오는 그녀. 이 순간 콩콩 뛰는 두근거림이 좋다. 난 행복하다. 그녀와 함께 있는 모든 순간 그렇게 생각한다. 그녀와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 동안 주된 대화 주제는 역시 기말고사였다. 민아 - 시험공부 많이 했어? 기억 - 난 어차피 시험 치는 게 세 과목 뿐이라 일주일에 하나 씩 치는 걸. 그때 그때 하는 거지 뭐. 민아 - 아... 그럼... 오늘 나 수학 좀 가르쳐줘. 월요일에 시험인데 이번에도 좀 깜깜해서... 기억 - 지금? 민아 - 아니, 나중에 우리 집에 가서. 기억 - ........... ...대체 왜 아무 속뜻 없이 말하는 걸 알면서도 들을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까. 혹시나 엉큼한 속마음이 들킬까 무의식적으로 입가를 가리는 날 보며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민아 - 아.. 끝나곤 바빠? 그럼 굳이.... 기억 - 으으응?! 아, 아니, 나야 고맙....이 아니라.. 그러자. 응. 민아 - 아니... 굳이 무리할 것까진... 기억 - 노~ 노~. 아임 오케이, 정말로 괜찮아. 민아 - 오늘 안 되면 주말에라도 좋으니까... 기억 - 아, 진짜! 된다니까! 난 혹여 힘들게 찾아온 기회가 날아갈까 봐 허둥지둥 말을 수습하려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녀에겐 부담요인으로 작용했는지 그녀는 계속해서 =난 괜찮으니까...=를 연발했고 길고 긴 소모전 끝에야 난 그녀로부터 OK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 기억 - 알았지? 오늘 간다! 민아 - .....그러니까 정말로.... 기억 - 어허!!! 민아 - 아...알았어... ..... 앞으로 그녀가 뭔가 도움을 청할 땐 =즉시OK=를 모토로 삼아야겠다.... 그리하여, 저녁 무렵 그녀의 집을 찾은 나. 이로써 세 번째 입성(入城)이다. 민아 - 배고프지? 저녁 먹을래? 기억 - 아.... 응. 민아 - 으음... 오늘은 뭘 먹지? 돈가스 어때? 기억 - 저기... 매일 그렇게 먹어? 인스턴트나... 시켜먹거나..... 민아 - 응? 난 별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었지만 그녀는 =드디어 올 것이 왔나.=라는 표정으로 머쓱하니 앞머리를 쓸어내리다 이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민아 - 그냥.... 보통 혼자 있으니까... 밥을 해도 며칠씩 남아 있고... 반찬을 만들어도 일인분만 만들 순 없잖아. 처음엔 많이 해서 옆집이랑 나눠먹고 했는데 그것도 한 두 번이고... 시켜먹을 때도 한 그릇은 배달을 안 해주니까 두 그릇 시켜서 하나는 다음날 아침에 먹는 걸. 변해서 못 먹을 것 같은 건 그냥 피카츄 주고.. 착잡하고 쓸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는 그녀를 보며 몹시도 미안한 기분이 든 난 이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해야하나 고심하다 조심스레 물었다. 기억 - ......... 그럼... 다음주부터 저녁도 같이 먹을래? 민아 - 응? 기억 - 아니 뭐.... 매일 그렇게 먹으려면.... 돈도 많이 들고 혼자 먹기도 좀 그렇잖아. 그러니까... 민아 - .... 맛없을지도 모르는데? 기억 - 괜찮아, 보기보다 내구성이 좋은 편이라서... 그녀는 잠시 동안 진지하게 내 말을 검토해 보더니 이내 싱긋 웃으며 손을 저었다. 민아 - 아냐, 안 그래도 돼. 기억 - 응? 난 뭐..... 괜찮은데? 민아 - ...그럼 주말이 너무 싫어질 것 같아. 기억 - 아... 그럼 주말에도.... 또다시 장기전으로 나갈 것 같은 분위기에 고개를 가로저어 내 말을 막는 그녀. 하긴.... 내가 생각해도 좀 무리긴 했다. 민아 - 어차피 곧 방학 되면 동생도 같이 있을 거고... 이제 익숙하니까 괜찮아. 기억 - ... 동생 있었어? 민아 - 응. 여동생. 기억 - 아... 그랬구나... 아무튼 난 그냥 계속 그렇게 먹으면 몸에 안 좋을 것 같아서... 민아 - ....... 괜찮아, 나도 내구성이 좋은 편이거든. 기억 - 풋.... 민아 - 그래서 오늘은 돈가스? 기억 - 응. 대신 오늘은 내가 살게. 민아 - 아냐~. 아까 점심 기억이가 샀잖아. 기억 - 아, 그랬나? 그렇게 다시 밝아진 분위기 속에서 신속 · 정확하게 배달된 저녁을 먹고 우린 수학공부를 시작했다. 기억 - 음.... 어디보자. 2000년 물건 A에 대한.... ....수요가 어절씨구.... 이때 가격탄력성을 구하시오? 이거 수학 맞아? 민아 - 너무해, 그래도 힘들게 공부하고 있는데.... 기억 -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가격탄력성이 뭐야? 민아 - 어? 기억이는 이런 거 안 배웠어? 기억 - 응.... 한 번 들어는 본 것 같은데... 민아 - 그러니까.... 음.... 수요가 두 배가 됐을 때 가격이 두 배로 뛰면 가격탄력성이 1인 거고.... 가격이 네 배로 뛰면 가격탄력성이 2인 거야. 기억 - 여섯 배로 뛰면 3이고? 민아 - 그러니까.....응. 맞아. 기억 - 뭐야 그럼..... 결론은 dp/dx네. 민아 - 그게 뭔데? 기억 - 어? 그게...그러니까.....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공대생과 문과대생의 커뮤니케이션에 애로사항이 꽃피는 이유를 느끼게 된다. 그렇게 나의 경제 공부와 민아의 수학 공부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알찬 시간을 보내고 어느덧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난 그녀의 집을 나섰다. 민아 - 미안, 늦은 시간까지.. 기억 - 아냐, 나도 이것저것 많이 배웠는걸. 민아 - 그래도.... 그렇게 현관문에서 대문까지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걸어가는 동안 =이대로 가고 싶진 않다.= 라는 막연한 생각이 갑자기 머릿속을 꽉 채웠다. 민아 - 내가 나중에 맛있는 거 사줄게. 기억 - 아니....... 저기... 그것보다.... 민아 - 응. 기억 - 키스해도 돼? 갑작스런 내 키스신청에 그녀는 활짝 웃던 그 모습 그대로 굳어버린 듯 한동안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날 바라봤다. 말을 꺼낸 나도 짐짓 놀라긴 했지만 폭탄선언을 한 것 치곤 의외로 담담한 심정. 그 덕에 더욱 대담해진 난 부드럽게 그녀의 양 어깨를 잡으며 재차 물었다. 기억 - ...... 키스... 해도 돼? 민아 - .... 그녀는 대답대신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내 옷깃을 꼭 쥐며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조금씩 고개를 드는 그녀. 난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까이 했다. 피카츄 - 즐!!! 붸뷁!! 기억 - 뜨아앗?!!! 그때 갑자기 들려온 피카츄의 울음소리. 깜짝 놀란 난 혹시나 발을 물릴까 펄쩍 뛰듯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피카츄 - 즈르르르를... 뷁뷁뷁.... 하지만 저만치서 줄에 묶인 채 바닥을 박박 긁고 있는 피카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그녀를 돌아봤을 때 벙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가 소리 없이 작게 웃었다. 민아 - 풋..... 기억 - 아..... 아... 놀랐다. 하하. 가... 갈게. 확 깨진 분위기에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집을 나와 내리막길을 내려가던 중 귓가에 언뜻 피카츄의 비명이 들리는 듯 했다.
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2-9화> 기말고사
크리스마스가 지나갔습니다.
어둠 속으로 대피하셨던 솔로분들은
이제 밖으로 나오셔도 됩니다.
이젠 커플 대신
연말 연시 술 조심, 추위 조심~.
============================== 이젠 술이 무섭다 ===============================
과정이야 어찌됐건
결과적으로 그녀와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성공한 나.
회계로부터 전해들은 말에 따르면
연습실에 그녀 혼자 남아있던 당시의 상황은
유니 선배가 연출에게 압력을 행사한 결과라고 한다.
그날 이후
핸드폰 소지 확인 및 배터리 충전은
내 일과에서 매우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되었고
그녀와의 중요한 연락수단으로 제 몫을 다하고 있다.
명분 유지를 위해 하고 다니던 깁스도 풀고
어느새 기말고사가 코앞으로 다가온 금요일.
점심시간이 가까워 올 때 즈음,
그녀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어디야?
-민아
=여기 학생회관 식당.
날씨 참 좋은 것 같네.
밖에서 산책이나 할까?
-기억
=ㅋㅋ. 우선 같이 밥 먹고.
-민아
=그러자. 오늘 메뉴는
A코스에 생선가스
B코스에 마파두부튀김
C코스에 김치찌개야.
-기억
=B가 좋겠다. 금방 갈게.
-민아
=응.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기억
= ^^
-민아.
.... 여기서 답장을 또 보내긴 그렇지?
여담이지만,
그녀가 처음 내 문자를 받았을 때
문자메시지에 마침표가 찍혀있는 걸 보곤
친구들과 한참을 웃었다고 한다.
난 그 이야기에 놀라
주변에서 마침표를 찍는 사람을 찾아봤지만
되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넌 마침표도 찍냐? 난 띄어쓰기도 안 하는데?=뿐...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지금도
난 아직 마침표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ㅡ를 대신 쓰고 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줄을 서있을 때
이젠 제법 익숙해진 전화벨소리가 울렸다.
=빠바바밤빠밤빠바...=
기억 - 예.
?? - 나~.
기억 - 아, 어디야? 도착했어?
민아 = 글쎄~ 어딜까, 오른쪽을 보세요~.
기억 - .... 오른쪽? 안 보이는데?
민아 = 다시 오른쪽~.
기억 - .... 그래도 안 보여.
민아 = 이번엔 뒤로~ 돌아!
기억 - 뭐야~. 장난치지 말고~.
민아 = 싫~어. 허리에 손!
기억 - 그럼 전화를 못 받잖아.
민아 = .....그럼 왼손만 허리에.
기억 - 자, 했다.
=삐리릭.=
기억 - 어, 뭐야.
왼손을 허리에 짚자마자 끊어지는 전화에
당황한 난 혹시 배터리가 다 된 건가 생각하며
두 손으로 핸드폰을 살폈다.
민아 - 와웅!
기억 - .......
그 순간, 뒤에서 나타나
두 팔을 와락 교차하며 내 왼편을 스쳐 지나가는 민아.
일순간, 강력한 썰렁함이 우리 둘 사이에 흘렀다.
지금.. 팔짱을 끼려고 그랬던 건가....
민아 - 이...이이이이... 뭐~야~~!
기억
- 아니, 갑자기 전화가 끊어지니까
왜 그런가 싶어서 보느라 그랬지!
민아 - 아..씨... 부끄럽게..
주변 사람들 보기가 민망했는지
투덜투덜 거리며 어색하게 내 옆에 와서 서는 그녀.
난 그런 그녀의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민아 - ......
조금 놀라는 듯 하다가도
이내 바싹 곁에 다가서 머리를 기대오는 그녀.
이 순간 콩콩 뛰는 두근거림이 좋다.
난 행복하다.
그녀와 함께 있는 모든 순간 그렇게 생각한다.
그녀와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 동안
주된 대화 주제는 역시 기말고사였다.
민아 - 시험공부 많이 했어?
기억
- 난 어차피 시험 치는 게 세 과목 뿐이라
일주일에 하나 씩 치는 걸.
그때 그때 하는 거지 뭐.
민아
- 아... 그럼... 오늘 나 수학 좀 가르쳐줘.
월요일에 시험인데 이번에도 좀 깜깜해서...
기억 - 지금?
민아 - 아니, 나중에 우리 집에 가서.
기억 - ...........
...대체 왜 아무 속뜻 없이 말하는 걸 알면서도
들을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까.
혹시나 엉큼한 속마음이 들킬까
무의식적으로 입가를 가리는 날 보며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민아 - 아.. 끝나곤 바빠? 그럼 굳이....
기억 - 으으응?! 아, 아니, 나야 고맙....이 아니라.. 그러자. 응.
민아 - 아니... 굳이 무리할 것까진...
기억 - 노~ 노~. 아임 오케이, 정말로 괜찮아.
민아 - 오늘 안 되면 주말에라도 좋으니까...
기억 - 아, 진짜! 된다니까!
난 혹여 힘들게 찾아온 기회가 날아갈까 봐
허둥지둥 말을 수습하려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녀에겐 부담요인으로 작용했는지
그녀는 계속해서 =난 괜찮으니까...=를 연발했고
길고 긴 소모전 끝에야
난 그녀로부터 OK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
기억 - 알았지? 오늘 간다!
민아 - .....그러니까 정말로....
기억 - 어허!!!
민아 - 아...알았어...
..... 앞으로 그녀가 뭔가 도움을 청할 땐
=즉시OK=를 모토로 삼아야겠다....
그리하여, 저녁 무렵 그녀의 집을 찾은 나.
이로써 세 번째 입성(入城)이다.
민아 - 배고프지? 저녁 먹을래?
기억 - 아.... 응.
민아 - 으음... 오늘은 뭘 먹지? 돈가스 어때?
기억
- 저기... 매일 그렇게 먹어?
인스턴트나... 시켜먹거나.....
민아 - 응?
난 별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었지만
그녀는 =드디어 올 것이 왔나.=라는 표정으로
머쓱하니 앞머리를 쓸어내리다
이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민아
- 그냥.... 보통 혼자 있으니까...
밥을 해도 며칠씩 남아 있고...
반찬을 만들어도 일인분만 만들 순 없잖아.
처음엔 많이 해서 옆집이랑 나눠먹고 했는데
그것도 한 두 번이고...
시켜먹을 때도 한 그릇은 배달을 안 해주니까
두 그릇 시켜서 하나는 다음날 아침에 먹는 걸.
변해서 못 먹을 것 같은 건 그냥 피카츄 주고..
착잡하고 쓸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는 그녀를 보며
몹시도 미안한 기분이 든 난
이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해야하나 고심하다 조심스레 물었다.
기억 - ......... 그럼... 다음주부터 저녁도 같이 먹을래?
민아 - 응?
기억
- 아니 뭐.... 매일 그렇게 먹으려면.... 돈도 많이 들고
혼자 먹기도 좀 그렇잖아. 그러니까...
민아 - .... 맛없을지도 모르는데?
기억 - 괜찮아, 보기보다 내구성이 좋은 편이라서...
그녀는 잠시 동안 진지하게 내 말을 검토해 보더니
이내 싱긋 웃으며 손을 저었다.
민아 - 아냐, 안 그래도 돼.
기억 - 응? 난 뭐..... 괜찮은데?
민아 - ...그럼 주말이 너무 싫어질 것 같아.
기억 - 아... 그럼 주말에도....
또다시 장기전으로 나갈 것 같은 분위기에
고개를 가로저어 내 말을 막는 그녀.
하긴.... 내가 생각해도 좀 무리긴 했다.
민아
- 어차피 곧 방학 되면 동생도 같이 있을 거고...
이제 익숙하니까 괜찮아.
기억 - ... 동생 있었어?
민아 - 응. 여동생.
기억
- 아... 그랬구나... 아무튼 난 그냥
계속 그렇게 먹으면 몸에 안 좋을 것 같아서...
민아 - ....... 괜찮아, 나도 내구성이 좋은 편이거든.
기억 - 풋....
민아 - 그래서 오늘은 돈가스?
기억 - 응. 대신 오늘은 내가 살게.
민아 - 아냐~. 아까 점심 기억이가 샀잖아.
기억 - 아, 그랬나?
그렇게 다시 밝아진 분위기 속에서
신속 · 정확하게 배달된 저녁을 먹고
우린 수학공부를 시작했다.
기억
- 음.... 어디보자. 2000년 물건 A에 대한....
....수요가 어절씨구.... 이때 가격탄력성을 구하시오?
이거 수학 맞아?
민아 - 너무해, 그래도 힘들게 공부하고 있는데....
기억 -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가격탄력성이 뭐야?
민아 - 어? 기억이는 이런 거 안 배웠어?
기억 - 응.... 한 번 들어는 본 것 같은데...
민아
- 그러니까.... 음.... 수요가 두 배가 됐을 때
가격이 두 배로 뛰면 가격탄력성이 1인 거고....
가격이 네 배로 뛰면 가격탄력성이 2인 거야.
기억 - 여섯 배로 뛰면 3이고?
민아 - 그러니까.....응. 맞아.
기억 - 뭐야 그럼..... 결론은 dp/dx네.
민아 - 그게 뭔데?
기억 - 어? 그게...그러니까.....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공대생과 문과대생의 커뮤니케이션에
애로사항이 꽃피는 이유를 느끼게 된다.
그렇게 나의 경제 공부와 민아의 수학 공부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알찬 시간을 보내고
어느덧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난 그녀의 집을 나섰다.
민아 - 미안, 늦은 시간까지..
기억 - 아냐, 나도 이것저것 많이 배웠는걸.
민아 - 그래도....
그렇게 현관문에서 대문까지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걸어가는 동안
=이대로 가고 싶진 않다.=
라는 막연한 생각이 갑자기 머릿속을 꽉 채웠다.
민아 - 내가 나중에 맛있는 거 사줄게.
기억 - 아니....... 저기... 그것보다....
민아 - 응.
기억 - 키스해도 돼?
갑작스런 내 키스신청에
그녀는 활짝 웃던 그 모습 그대로 굳어버린 듯
한동안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날 바라봤다.
말을 꺼낸 나도 짐짓 놀라긴 했지만
폭탄선언을 한 것 치곤 의외로 담담한 심정.
그 덕에 더욱 대담해진 난
부드럽게 그녀의 양 어깨를 잡으며 재차 물었다.
기억 - ...... 키스... 해도 돼?
민아 - ....
그녀는 대답대신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내 옷깃을 꼭 쥐며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조금씩 고개를 드는 그녀.
난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가까이 했다.
피카츄 - 즐!!! 붸뷁!!
기억 - 뜨아앗?!!!
그때 갑자기 들려온 피카츄의 울음소리.
깜짝 놀란 난 혹시나 발을 물릴까
펄쩍 뛰듯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피카츄 - 즈르르르를... 뷁뷁뷁....
하지만 저만치서 줄에 묶인 채
바닥을 박박 긁고 있는 피카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그녀를 돌아봤을 때
벙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가
소리 없이 작게 웃었다.
민아 - 풋.....
기억 - 아..... 아... 놀랐다. 하하. 가... 갈게.
확 깨진 분위기에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집을 나와 내리막길을 내려가던 중
귓가에 언뜻 피카츄의 비명이 들리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