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것은 어쩌면 정상적인 감정이 아닐지 모른다. 일종의 정신병일지도 모른다. 사람을 정상적인 생각과 감정으로 살게 하지 않는다. 무척 자극적인 감정이다. 그래서 사람들을 사랑에 더 빠지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결혼을 했든 안했든 우리는 모두 평생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감정을 남몰래 숨기면서 살아간다. 혼자만의 감정일지라도 그 감정이 결국 사람을 살게 만든다. 약간은 불합리한 그 감정 상태가 사람에게는 무척 필요한 감정이다. 굳이 사랑을 아가페와 에로스 등등으로 분류하지 않더라도 사랑은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존재의 실존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수단이다. 그러기에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 감정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러기에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람에게 정신병적인 증세를 나타나게 만들기도 한다. 좋아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소유하려고 한다. 옆에 두고 언제라도 꺼내볼 수 있거나 만지려고 하기에 집착이 생겨난다. 다만 쌍방향의 감정교류가 있을 시에는 문제가 덜 하지만 일방의 감정일 때는 문제가 발생한다. 모든 발생하는 문제들이 그런 감정의 왜곡으로 인해서 벌어진다. 결론 지을 수는 없지만 그런 불편한 감정들이 좋기도 하지만 때로는 지긋하다는 느낌을 갖게도 한다. 사랑은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무슨 광고카피가 아니다. 사랑은 절대 머무는 법이 없다. 평생을 사랑한다는 다짐을 하지만 익숙해지면 사랑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설레이고 초조해지는 감정이 익숙함이란 만성진통제를 맞게 되면 더 이상 손 쓸수 없는 지경이 되버린다. 우리는 사랑을 시작하면 그와 또는 그녀와 익숙해지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러다 익숙해지면 새로운 사랑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회적 통념이 가로막고 있어서 직접적인 표현이나 움직임은 자제하지만 저마다의 감정속에서는 하루에도 몇번씩이라도 사랑을 창조했다가 허물어 버리는 작업을 계속 하고 있다. 그런것까지 누가 돌을 던지랴. 결국 그 자신만의 일인걸. 제도라는 것이 무섭기는 무서운가 보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 제도권 밖으로 이탈하는 법이 없기에 더욱 그렇다. 목숨같은 명예를 담보로 사랑의 움직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기에 유부녀와 유부남의 사랑을, 특히 유명한 사람들의 사랑은 위대하다고 말하나 보다. 하지만 속으로 들어가보면 결국 그들도 그저 하나의 불륜밖에는 아닌 것이다. 사랑이라고 그럴 듯하게 포장하지만 불륜은 불륜이다. 어쩌면 누구나가 이 불륜을 꿈꿀지도 모른다. 아니 결혼전에 하던 습관대로 어떤 사람이 좋거나 하면 그냥 자기 감정을 속이지 못하고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기에 미처 불륜인지도 인식하기 전에 이미 불륜속으로 빠져들고 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도,관습, 달리 표현하면 사람들의 시선 이런 것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을 제도권 안에서만 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모든 걸 걸고서 이탈하는 사람들은 일단 합리와의 과정을 겪는다. 부인이 또는 남편이 못해줘서 , 성격이 원래 안 맞아서, 아니면 더 깊숙이 들어가서 섹스 트러블이 심해서라는 등등의 이유를 들어서 자기가 왜 불륜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변호한다. 물론 솔직한 사람들도 있다. 그냥 저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것 뿐이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 무서운 것이다. 사랑의 감정, 일종의 정신병에 빠지게 되면 자기와 함께 살고 있는 부인과 했던, 남편과 했던 평생 이 사람만 사랑하겠습니다. 라는 다짐을 잊어버린다. 어쩌면 대부분의 부부들이 이 다짐을 기억이나 할 수 있을까? 결혼식장에서 습관적으로 내뱉었던 그 다짐들이 뭘 의미하는지 조차도 모르고 그저 주례선생이 물으니까 관습에 의해서 "네" 라고 대답해 버린 것이다. 사랑은 움직인다. 예나 지금이나 역시 변함이 없다. 거기에 이유 두지 말자. 변하는 것에, 그것을 지켜가는 사람도 있고, 지켜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다른 것이다. 사랑을 지키는 사람이 위대하고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위대하지 못하다는 잣대는 집어치우자. 사랑은 그냥 사랑이고 사랑의 속성은 움직임에 있다는 걸 알아버리자. 그래야 사랑에 속았다고 우는 일도 없을 것이고, 그 사람이 떠났다고 속을 태우는 일도 없을 것이다. 떠났다면 떠날만 하니까 떠났다고 생각하자. 애초부터 영원이란 존재하지 않기에 그렇다. 얼마나 갈까 생각지 말고 더 이상 볼수 없는 사람처럼 사랑할 때 최선을 다하자. 그러다 떠나야 한다면 보내주자. 왜,,.,그 사람이 떠남으로 인해서 나에게도 새로운 사랑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냉정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사랑의 정신병을 치유하는 데에는 냉정보다 중요한 약은 없을 것이다. 또 하나의 사랑의 속성은 오직 진행형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과거가 아니다. 어느 한 구석에 한 가지 형태로 만들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지금 이 시간 계속 움직이고 있는 것이 사랑이다. 처음에 끓어오르는 열정이 있었다면, 차츰 식어버리는 냉정도 존재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 두 가지를 인정해야만 사랑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너무나 변화무쌍하고 유동적인 사랑을 어느 한 곳에 고착시키려 한다면 그 사랑은 부패해 버릴 것이다. 조금씩 사랑이 무르익어 무한한 기쁨과 행복을 받았다면 조금씩 사랑이 식어 아픈 상처를 주는 것도 받아야 한다. 아니 그 두 가지가 공존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자신만의 사랑은 특별할 것이라는 기대는 자신만의 착각일 뿐이다. 물론 많은 노력을 통해서 진정 특별한 사랑으로 만들 수도 있다. 모든 집착이나 소유욕도 결국 그러한 과정을 인정하지 않기에 발생하는 현상인지도 모른다. 현세계에 무수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여러가지 언어와 인종이 존재하는 것이 다양한 사랑의 형태를 만드는 지도 모른다. 자신만의 사랑이 위대했다거나, 자신만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은 사랑의 유동성을 인정하 지 않는 또는 사랑의 속성을 잘못 인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혼을 통해 사랑을 지키려는 행위도 부족하고 모순 투성이인 인간의 속성을 규범으로라도 묶어보려는 일종의 관습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은 관습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이혼이라는 새로운 관습이 등장하여 사랑의 식음을 인정하라는 압박을 가하게 되었다. 결혼은 사랑의 모든 것을 성취했다고 인정하는 의식이 아니라 지금부터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랑을, 새로운 형태의 사랑을 시작한다는 관문에 지나지 않는다. 너무나 많은 미사여구와 환상을 사람들은 결혼이라는 의식에 옷을 입혀 놓았다. 조금 냉정한 말일 수도 있지만 결혼하여 자손을 낳는 것은 종족 보존의 의지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 즉 사랑이라는 것과는 조금 동떨어진 개념인 것이다. 사랑과 종족보존 그리고 결혼 이 세가지는 각기 다른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오랜 세월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익숙해진 문화속에 자리잡고 그것을 제도와 규범으로 인정하여 하나의 틀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결혼을 출발이 아닌 완성으로 보는 시각, 여기에서부터 우리의 모순은 잉태된다. 사랑의 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흐름일 뿐이다. 흐름속에 주어지는 아주 잠깐의 머뭄, 그 머뭄속에서의 무한한 것이 사랑이다. 만약 사랑이 완성된 작품이라면 어디까지가 완성일까? 어느 시점을 사랑의 완성으로 보아야 할까? 잠자리를 같이 하고 애를 낳으면 사랑이 완성된 것인가? 과연 그것이 다일까?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만물의 영장이라고 우기는 우리 인간들의 사랑이라는 것도 동물적인 것 말고는 다른 게 없다는 것이 말이다. 사랑은 진행형외에는 없다. 완료형은 사랑에 어울리지 않는다.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다 이지 사랑했었다는 없는 것이다. 과거의 한 장면을 현재에 맞추어 있는 것처럼은 할 수 없는 것이다. 무너진 예전의 건물을 지금 말한다고 해서 그 건물이 현재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수긍하는 것 중에 한 가지가 결혼을 했으면서도 다른 여인 혹은 남성에게 관심을 받으면 연애때처럼 설레임을 느낀다는 것이다. 역시 사랑의 진행형에 대한 단적인 예를 든 것이다. 결혼했다고 하여서 더 이상 아내에게 남편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사랑의 첫번째 속성인 움직임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싫다면 아내, 남편과의 사랑이 계속 진행형의 상태에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만약 결혼을 사랑의 완성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왜 다른 사람의 시선에 만족과 기쁨을 맛보는가? 더 이상 결혼을 사랑의 완성으로 보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자. 완성이라는 것은 더 이상 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결혼을 하게 되면 아내나 남편에 대한 관심을 거둔다. 계속 관심과 애정을 나누어야 하는데 완성이기에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을 받게 되면 그 시선과 관심을 흡수할 수 있지만, 지켜야 할 규범이 있기에 또한 우리가 만들어 놓은 도덕이라는 것이 있기에, 움직일 수 있지만 부부관계를 지키는 것에 더 많은 의미를 둔다. 그러한 규범과 도덕, 관습 이런 것이 맞는 사람도 있고 전혀 맞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다양한 사람이 사는 곳이 우리가 사는 사람동네일 것이다. 지금까지 사랑의 속성을 유동성과 진행성 두 가지로 표현해 보았다. 이 두 가지는 따로 떨어진 별개의 것이 아니다. 항상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 동시에 존재한다. 즉, 사귀던 여인에게 싫증이 났다면 이미 움직이고 있는 것이고 새로운 상대와 진행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애인과의 사랑을 계속 진행상태로 있게 하고 싶다면 노력이 필요하다. 새로운 환경과 문제 그리고 그 환경과 문제를 통해서 더욱 친밀해지는 시간, 그러한 거리조정을 통해서 사랑의 진행은 점점 더 성숙된 사랑으로 발전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한쪽에서만 의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의 노력으로 사랑의 신선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은 일종의 정신병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어쩌면 정상적인 감정이 아닐지 모른다.
일종의 정신병일지도 모른다.
사람을 정상적인 생각과 감정으로 살게 하지 않는다.
무척 자극적인 감정이다.
그래서 사람들을 사랑에 더 빠지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결혼을 했든 안했든 우리는 모두 평생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감정을 남몰래 숨기면서
살아간다.
혼자만의 감정일지라도 그 감정이 결국 사람을 살게 만든다.
약간은 불합리한 그 감정 상태가 사람에게는 무척 필요한 감정이다.
굳이 사랑을 아가페와 에로스 등등으로 분류하지 않더라도 사랑은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존재의 실존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수단이다.
그러기에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 감정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러기에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람에게 정신병적인 증세를 나타나게 만들기도 한다.
좋아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소유하려고 한다.
옆에 두고 언제라도 꺼내볼 수 있거나 만지려고 하기에 집착이 생겨난다.
다만 쌍방향의 감정교류가 있을 시에는 문제가 덜 하지만 일방의 감정일 때는 문제가 발생한다.
모든 발생하는 문제들이 그런 감정의 왜곡으로 인해서 벌어진다.
결론 지을 수는 없지만 그런 불편한 감정들이 좋기도 하지만 때로는 지긋하다는 느낌을 갖게도
한다.
사랑은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무슨 광고카피가 아니다.
사랑은 절대 머무는 법이 없다.
평생을 사랑한다는 다짐을 하지만 익숙해지면 사랑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설레이고 초조해지는 감정이 익숙함이란 만성진통제를 맞게 되면 더 이상 손 쓸수 없는 지경이
되버린다.
우리는 사랑을 시작하면 그와 또는 그녀와 익숙해지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러다 익숙해지면 새로운 사랑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회적 통념이 가로막고 있어서 직접적인 표현이나 움직임은 자제하지만 저마다의 감정속에서는
하루에도 몇번씩이라도 사랑을 창조했다가 허물어 버리는 작업을 계속 하고 있다.
그런것까지 누가 돌을 던지랴.
결국 그 자신만의 일인걸.
제도라는 것이 무섭기는 무서운가 보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 제도권 밖으로 이탈하는 법이 없기에 더욱 그렇다.
목숨같은 명예를 담보로 사랑의 움직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기에 유부녀와 유부남의 사랑을, 특히 유명한 사람들의 사랑은 위대하다고 말하나 보다.
하지만 속으로 들어가보면 결국 그들도 그저 하나의 불륜밖에는 아닌 것이다.
사랑이라고 그럴 듯하게 포장하지만 불륜은 불륜이다.
어쩌면 누구나가 이 불륜을 꿈꿀지도 모른다.
아니 결혼전에 하던 습관대로 어떤 사람이 좋거나 하면 그냥 자기 감정을 속이지 못하고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기에 미처 불륜인지도 인식하기 전에 이미 불륜속으로 빠져들고 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도,관습, 달리 표현하면 사람들의 시선 이런 것들이 대부분의 사람들을 제도권 안에서만
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모든 걸 걸고서 이탈하는 사람들은 일단 합리와의 과정을 겪는다.
부인이 또는 남편이 못해줘서 , 성격이 원래 안 맞아서, 아니면 더 깊숙이 들어가서 섹스 트러블이
심해서라는 등등의 이유를 들어서 자기가 왜 불륜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변호한다.
물론 솔직한 사람들도 있다.
그냥 저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것 뿐이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 무서운 것이다.
사랑의 감정, 일종의 정신병에 빠지게 되면 자기와 함께 살고 있는 부인과 했던, 남편과 했던
평생 이 사람만 사랑하겠습니다. 라는 다짐을 잊어버린다.
어쩌면 대부분의 부부들이 이 다짐을 기억이나 할 수 있을까?
결혼식장에서 습관적으로 내뱉었던 그 다짐들이 뭘 의미하는지 조차도 모르고 그저 주례선생이
물으니까 관습에 의해서 "네" 라고 대답해 버린 것이다.
사랑은 움직인다.
예나 지금이나 역시 변함이 없다.
거기에 이유 두지 말자.
변하는 것에,
그것을 지켜가는 사람도 있고, 지켜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다른 것이다.
사랑을 지키는 사람이 위대하고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위대하지 못하다는 잣대는 집어치우자.
사랑은 그냥 사랑이고 사랑의 속성은 움직임에 있다는 걸 알아버리자.
그래야 사랑에 속았다고 우는 일도 없을 것이고, 그 사람이 떠났다고 속을 태우는 일도 없을
것이다.
떠났다면 떠날만 하니까 떠났다고 생각하자.
애초부터 영원이란 존재하지 않기에 그렇다.
얼마나 갈까 생각지 말고 더 이상 볼수 없는 사람처럼 사랑할 때 최선을 다하자.
그러다 떠나야 한다면 보내주자.
왜,,.,그 사람이 떠남으로 인해서 나에게도 새로운 사랑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너무 냉정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사랑의 정신병을 치유하는 데에는 냉정보다 중요한 약은 없을
것이다.
또 하나의 사랑의 속성은 오직 진행형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사랑은 과거가 아니다.
어느 한 구석에 한 가지 형태로 만들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지금 이 시간 계속 움직이고 있는 것이 사랑이다.
처음에 끓어오르는 열정이 있었다면,
차츰 식어버리는 냉정도 존재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 두 가지를 인정해야만 사랑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너무나 변화무쌍하고 유동적인 사랑을 어느 한 곳에 고착시키려 한다면 그 사랑은 부패해 버릴
것이다.
조금씩 사랑이 무르익어 무한한 기쁨과 행복을 받았다면 조금씩 사랑이 식어 아픈 상처를 주는 것도
받아야 한다.
아니 그 두 가지가 공존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자신만의 사랑은 특별할 것이라는 기대는 자신만의 착각일 뿐이다.
물론 많은 노력을 통해서 진정 특별한 사랑으로 만들 수도 있다.
모든 집착이나 소유욕도 결국 그러한 과정을 인정하지 않기에 발생하는 현상인지도 모른다.
현세계에 무수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여러가지 언어와 인종이 존재하는 것이 다양한 사랑의 형태를
만드는 지도 모른다.
자신만의 사랑이 위대했다거나, 자신만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은 사랑의 유동성을 인정하
지 않는 또는 사랑의 속성을 잘못 인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혼을 통해 사랑을 지키려는 행위도 부족하고 모순 투성이인 인간의 속성을 규범으로라도
묶어보려는 일종의 관습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은 관습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이혼이라는 새로운 관습이 등장하여 사랑의 식음을 인정하라는 압박을 가하게 되었다.
결혼은 사랑의 모든 것을 성취했다고 인정하는 의식이 아니라 지금부터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랑을, 새로운 형태의 사랑을 시작한다는 관문에 지나지 않는다.
너무나 많은 미사여구와 환상을 사람들은 결혼이라는 의식에 옷을 입혀 놓았다.
조금 냉정한 말일 수도 있지만 결혼하여 자손을 낳는 것은 종족 보존의 의지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
즉 사랑이라는 것과는 조금 동떨어진 개념인 것이다.
사랑과 종족보존 그리고 결혼 이 세가지는 각기 다른 것일 수도 있다.
다만 오랜 세월 사람들이 살아오면서 익숙해진 문화속에 자리잡고 그것을 제도와 규범으로 인정하여
하나의 틀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결혼을 출발이 아닌 완성으로 보는 시각, 여기에서부터 우리의 모순은 잉태된다.
사랑의 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흐름일 뿐이다.
흐름속에 주어지는 아주 잠깐의 머뭄, 그 머뭄속에서의 무한한 것이 사랑이다.
만약 사랑이 완성된 작품이라면 어디까지가 완성일까?
어느 시점을 사랑의 완성으로 보아야 할까?
잠자리를 같이 하고 애를 낳으면 사랑이 완성된 것인가?
과연 그것이 다일까?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만물의 영장이라고 우기는 우리 인간들의 사랑이라는 것도 동물적인 것 말고는 다른 게 없다는 것이
말이다.
사랑은 진행형외에는 없다.
완료형은 사랑에 어울리지 않는다.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다 이지 사랑했었다는 없는 것이다.
과거의 한 장면을 현재에 맞추어 있는 것처럼은 할 수 없는 것이다.
무너진 예전의 건물을 지금 말한다고 해서 그 건물이 현재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수긍하는 것 중에 한 가지가 결혼을 했으면서도 다른 여인 혹은 남성에게
관심을 받으면 연애때처럼 설레임을 느낀다는 것이다.
역시 사랑의 진행형에 대한 단적인 예를 든 것이다.
결혼했다고 하여서 더 이상 아내에게 남편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사랑의 첫번째 속성인 움직임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싫다면 아내, 남편과의 사랑이 계속 진행형의 상태에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만약 결혼을 사랑의 완성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왜 다른 사람의 시선에 만족과 기쁨을 맛보는가?
더 이상 결혼을 사랑의 완성으로 보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자.
완성이라는 것은 더 이상 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결혼을 하게 되면 아내나 남편에 대한 관심을 거둔다.
계속 관심과 애정을 나누어야 하는데 완성이기에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을 받게 되면 그 시선과 관심을 흡수할 수 있지만, 지켜야 할 규범이 있기에
또한 우리가 만들어 놓은 도덕이라는 것이 있기에, 움직일 수 있지만 부부관계를 지키는 것에 더 많은
의미를 둔다.
그러한 규범과 도덕, 관습 이런 것이 맞는 사람도 있고 전혀 맞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다양한 사람이 사는 곳이 우리가 사는 사람동네일 것이다.
지금까지 사랑의 속성을 유동성과 진행성 두 가지로 표현해 보았다.
이 두 가지는 따로 떨어진 별개의 것이 아니다.
항상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 동시에 존재한다.
즉, 사귀던 여인에게 싫증이 났다면 이미 움직이고 있는 것이고 새로운 상대와 진행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애인과의 사랑을 계속 진행상태로 있게 하고 싶다면 노력이 필요하다.
새로운 환경과 문제 그리고 그 환경과 문제를 통해서 더욱 친밀해지는 시간, 그러한 거리조정을
통해서 사랑의 진행은 점점 더 성숙된 사랑으로 발전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한쪽에서만 의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의 노력으로 사랑의 신선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