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2-14화> 며느리

바다의기억2006.01.13
조회10,710

날씨가 많이 풀린 탓에

 

눈대신 비가 오는 오후입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체육관에서 스키캠프를 떠났겠지만...

 

우천 관계로 취소라 집에서 쉬고 있네요.

 

잔잔한 빗소리를 들으며

 

홍차 한잔 어떠실런지.

 

========================= 홍차는 셀프 =========================

 

왜 안 오는 거예요?


약속했잖아요... 꼭 오겠다고...


기다렸는데.... 기다렸는데...


믿었는데...


사랑했는데....


왜.....



=피피핏!!=



흠칫.



가슴 아픈 지난날을 꿈에 그리다


경련하듯 잠에서 깨어난 나.


몽롱한 시야에 꿈의 잔상이 번져 보이다


이내 주변이 뚜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 내 방.


매일같이 보는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묘한 이질감이 드는 건....



내가 대체 언제 여기 들어와서 잔거지?



기억 - 으윽......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


지끈한 두통이 엄습해왔다.



어제 술을 너무 마셔서 그런가....



지금 시각 새벽 6시 20분.


평소 같으면 절대 일어나기 힘든 시각이지만


싸리싸리 아파오는 아랫배와


용량초과를 외치는 방광은


내게 어서 화장실로 가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푸덕덕 푸덕, 꼬끼오~!!!=


기억 - 으허억...



오늘에야 비로소 숙취의 무서움을 깨달은 나.


내장까지 빠져나간 듯


초토화되어버린 배를 감싸 쥐고


비틀비틀 화장실을 나서는 찰나


옷에서 나는 담배냄새와 술냄새가 코를 찔렀다.



내 부산물들을 떠나보낸 직후인데 이정도 냄새라니...



아무래도 지금 옷을 갈아입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난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세탁기에 던져두고


면티에 사각팬티 차림으로 화장실을 나섰다.


다시 옷을 입으러 방으로 가는 길에


안방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기억 - 음? 어머니 일어나셨....


민아 - .....



......어째서?



민아 - 꺗!


=콰앙!!=



깜짝 놀라 문을 닫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


지금 시각 6시 45분.


장소는 분명 우리 집.


그런데 왜 그녀가 이곳에 있는 거지?


왜? 언제부터? 어떻게?



난데없는 그녀의 등장에


난 황급히 내 방으로 들어가 바지를 챙겨 입고


지난밤에 있었던 일들을 기억해내려 애썼지만


잉크를 쏟은 듯 까맣게 지워진 기억은


도통 떠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배를 타고 나와서 포장마차에 들렀다가...


전화를 했는지 받았는지 그래서....



.......앗차.



그래, 분명 어제 그녀를 만났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했더라?


뭔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 설마.


아냐, 그럴 리가 없지. 아무리 취했기로서니....


그럼 왜 우리 집에 있는 거야?


이 시간에 다시 왔을 리는 없잖아?



난생처음 필름이 끊긴데다


아침부터 패닉 상태에 빠져버린 난


가뜩이나 지끈거리는 머리를 싸잡고


앞으로의 행동에 대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어쩌지? 우선 밖으로 나가야 하나?



어머니 - 기억아~. 나와 봐라.



때마침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


대답 없이 빼꼼 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을 때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 뒤에 살짝 비켜 서있는 그녀가 보였다.



어머니 

- 어제 너 밖에 나갔다가


취해서 뻗어버린 걸 같이 옮겨왔다.


비쩍 말라가지고 뼈밖에 없는 놈이


옮기려니까 왜 그렇게 무거운지...


아무튼 시간도 늦었는데


그냥 보내기가 뭐해서 하루 재웠으니까,


나중에 갈 때 바래다줘라.



내가 밖에 나갔다가 취해서 뻗었다고?


어디서? 뭐 하다가?


이런 말을 들어도 막막하긴 마찬가지인 지난밤의 일.


뭔가 사고를 치진 않은 것 같지만...



방금 전에 있었던 시추에이션으로 인해


서로 얼굴 보기가 몹시 민망해진 우린


가볍게 아침인사만 나눈 뒤


각자의 일에 열중했다.



어머니 - 그쪽에 소금 좀 줄래?


민아 - 에... 이거요?


어머니

- 응. 그리고 냉장고에 감자 있으니까


세 개 꺼내서 껍질 좀 벗겨주렴.



민아 - 네~.



어머니와 함께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는 그녀.


내 방이 주방과 맞닿아 있는 관계로


그녀가 이곳저곳 부지런히 오가며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문 너머에서 생생하게 들려왔다.



기억 - 에.... 어디보자.....



난 지금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되고


케이스가 다소 손상된 핸드폰을


부활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금까지 부러진 곳은 거의 다 붙여 놓았는데...


그러니까.... 이 선이랑 이 선을 이어주면


액정에 전력 공급은 될 것 같고


신호전달 케이블은 따로 없는 건가?


그럼 우선 이쪽을 기판에 납땜해 보고...


배터리 들어가는 곳도 부러졌으니...


배터리도 전선으로 이어야겠네.


어디보자... 어디보자....



=반짝-띵뚜르딩딩 바라바밤~파팟!=



기억 - 오! 켜졌다!



다소 화면이 침침해지긴 했지만


분명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핸드폰.


난 붙여놓은 곳들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스레 핸드폰을 들고


0번을 꾸욱 눌렀다.



=공주=


=삐리링~ 뚜르르....뚜르르르.....=



민아 = 여보세요?


기억 - 응~ 나!


민아 = ..... 기억이?


기억 - 지금 핸드폰 고쳤어!


민아 = 아, 진짜?



통화까지 된다는 걸 확인한 난


자랑스럽게 방문을 열고 주방으로 나갔다.


그녀는 내 모습을 보고 활짝 웃으며


들고 있던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민아 - 이제 전화 되는 거야?


기억 - 응. 생각보다 속은 멀쩡했나봐.


민아 - 으아... 그래도 심했다.


기억 - 뭐... 6만원 아낀 셈 쳐야지.



내장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배터리와


한쪽 관절로 간신히 제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액정을 보며


경이로움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



민아 - 잠깐만 줘 봐.



조심조심 휴대폰을 건네받은 그녀는


이곳저곳을 살펴보다가


버튼을 하나하나 눌러보기 시작했다.



=또각 또각 또각=



민아 

- 진짜 되는 구나...


응? 그런데 5번이 안 눌리네? 8번도 그렇고....



기억 - 어? 그래?


=꾹꾹꾹..=


기억 - 어라..... 진짜 안 눌리네.



미처 생각 못했던 기능 이상에 당황한 난


잠시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심하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기억 - 괜찮아, 0번이랑 1번만 멀쩡하면 돼.


민아 - 어? 왜?


기억 - 응? 아.... 그게.....



어차피 전화를 거는 곳이라곤


단축번호 0번의 그녀와 1번의 집뿐이었기에 나온 말이었지만


그 이유를 설명하기가 쑥스러웠던 난


적당히 피하듯 말을 돌렸다.



기억 

- 하핫, 뭐 아무튼 그건 그렇고


어제 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일어나보니까 하나도 생각이 안 나네....


혹시 뭐 실수하거나 한 건 아니지?



어머니 - 어이구, 나이가 몇인데 벌써 깜빡깜빡이야?


기억 - 아하하.... 그러게 말이에요.


민아 - 전혀, 하나도 기억 안나?


기억 

- 으음... 전화 받고 나가서 만난 것 정도는 알겠는데


그 외에는... 모르겠어.



내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무슨 이유에선지 잠시 고민하다가


내 얼굴 이곳저곳을 찬찬히 살폈다.



민아 - 정말 기억 안 나는 거야?


기억 - 왜? 무... 무슨 일 있었어?


민아 - 으음... 아냐, 안 난다면 다행이고....


기억 - 허허, 거..... 왠지 그러니까 되게 신경 쓰이네.



심상치 않은 그녀의 반응에


난 이걸 더 물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넘겨야 하는지


심각하게 갈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는 게 힘이냐, 모르는 게 약이냐....



기억 - 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데?


민아 - 너 어제 많이 울었는데... 그것도 기억 안 나?


기억 - ...... 뭐?



이건 또 무슨 얌전한 고양이가 사람 잡는 소린가?



기억 - .... 말도 안돼.


민아 - 어어? 진짜 울었어~. 나보고 막.... 아무튼....


어머니 - 정말이니?


민아 - 진짜에요~!



정색을 하고 되묻는 나와 어머니의 반응에


그녀는 억울하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어머니 - 흐음... 그래. 우선 밥이나 먹자꾸나.


민아 - 어머니~이~! 진짜라니까요!




그 이야기의 진위 여부를 떠나


잠시 후 식탁에 둘러앉은 우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식사시간을 보냈다.



민아 - 맛있지? 응?


기억 - 아.... 응. 맛있어.


어머니 

- 음.. 간만에 맛이 제대로 뱄네...


이래서 딸 하나를 더 낳았어야 하는데.



기억 - 이젠 안 됩니다. 어머니.


어머니 - 그러니까 빨리 참한 며느리 하나 데리고 와.


기억 - .... 여기 있잖아요.


민아 - 어우 야~.


기억 - .... 말하고도 좀 그렇긴 하다. 하하.


어머니 - 어이구? 들어오기만 해라, 난 대환영이니까.


민아 - 정말요?



그렇게 화기애애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이런 저런 집안일을 거들며 시간을 보내던 그녀는


저녁때가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기억 - 집까지 바래다줄게.


민아 - 아냐, 요~기 전철역까지만 데려다 줘.


기억 - 에이~. 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 - 오냐.




집에서 나와 전철역으로 향하는 길.


우린 서로 손을 꼭 마주 쥔 채


저녁하늘의 남색 빛이 선명한 거리를


미술관을 누비듯 천천히 거닐었다.



기억 - 손 시리지?


민아 - 아냐, 괜찮아.


기억 - ......



난 그녀의 손을 감싼 그대로


내 코트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이후 말없이 거리를 걷는 동안


싸늘하던 주머니 안은 그녀와 나의 온기로 채워져


설핏 땀이 배어나올 정도로 따듯해졌다.



어느새 전철역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문득 그녀가 내게 물었다.



민아 - 기억아,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기억 - 응? 뭔데?


민아 - ....... =누나=가 누구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