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건강하셨죠. 곧 설날이 나가오네요. 여러분 올 한해도 건강하시구요. 사랑하고 사랑받는 한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돌 다리도 두둘겨 보고 지나가는 한해가 되세요. “그런다고 남자가 되가지고 삐지기는.” “뭐?” “내가 뭘요.” 유신은 나가려다 말고 동희에게 다가왔다. “다 들었다.” “다 들었어요?” “그래.” “그러면서 왜 물어봐요.” 그는 자신의 귀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는 동희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언제 삐졌다고 그래." "지금요. 삐져가지고 휭 나가는거 아니였어요. 그렇게 소심해서 어디 사업하겠어요?" “말 좀 예쁘게 하면 어디가 덧나?” “네. 내 입이요.” 동희는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켰다. “차 잘 마셨어요.” “고맙다는 말 정말 못하네.” “그러게요.” 네. 그 사람하고 해어지고 나서 참 많은 게 달라졌거든요. 그 때는 쉬었던 모든 게 이제는 참 어려워요. “우리 나가죠. 난 우리 노친네 만나봐야겠어요.” “할머니 찾으셨다면서요.” 정 회장은 언제 나처럼 시간이 나면 서제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눈이 나빠졌다고 십년 전부터 투덜거리셨지만 책을 손에서 내려놓을 줄 모르는 부류였다. 남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정 회장이었다. “그래. 들어와라. 안경 다시 맞추어야겠다. 보이는 게 영 시원치 않아.” 정 회장은 손에 들고 있는 안경이 죄라도 진 냥 원망 섞인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요즘은 무슨 책 읽으세요.”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나온 지 좀 된 책 아니에요?” “맞다. 다시 읽는 거란다.” 정회자의 눈길은 그 전에 없이 차분했다. 마치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동희는 할머니의 발치아래 무릎을 꿇었다. “할머니?” “왜?” 정 회장은 갑작스런 동희의 걱정스러운 부름의 뜻을 이해했지만 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었 다. “병에 걸린 건 참 불행한 일이지만 자신의 죽음을 알고 준비하는 건 어쩌면 행운 같다는 생각이 드는 구나. 잠이든 시간은 죽는 거지만 아침에 다시 일어났을 땐 새 생명을 맏이 하 는 것 같다는 말이 이해가 간단다.” “할머니.” “걱정 할 것 없다. 나도 언젠간 죽는단다. 다른 사람이 그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 졌을 뿐이야. 살아 온 삶이 중요하듯이 마지막 가는 길도 중요하거든 마지막에 담담할 수 있다고 장담 할 수는 없지만 초라하거나 추해지는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전 아직 잘 모르겠어요. 할머니.” 정 회장은 아직은 더 많은 삶을 살아야할. 그 만큼 더 많은 시련이 미래에 남아있는 손녀 딸의 볼을 쓰다듬었다. 물론 행복한 날들 역시 그 만큼 많이 그녀의 앞에 놓여 있을 거라 는 걸 정 회장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자신이 그러했듯이 실수를 하는 법이 었다. 그리고 연장자의 말은 구닥다리 리어카가 굴러가는 소리처럼 듣기 싫어하는 법 이었 다. “뭐 할 건지 아직 생각 중이랬지.” “네.” “동희야? 인생 내 생각보다 참 짧다. 그리고 지금 까지 겪었던 시련들이 가장 큰 것처럼 여겨지지만 앞으로도 너의 남은 인생에는 그 보다 더 큰 시련이 다가올지도 모른단다.” “할머니?” 동희는 할머니마저 동희 만 남겨 놓고 눈앞에서 사라질 것 만 같아 무서웠다. “난 네가 더 이상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세요.” 동희는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할머니의 바람을 들어들이고 싶었다. 할머니가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을 시킬 리가 없다는 걸 믿었다. “회사에 나가라.” “할머니 전 예전부터 회사에는 관심 없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전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알아. 하지만 회사에 다니면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동희는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집중 할 수는 없어요.” 회사에 나가는 것만은 싫었다. 그림에 집중 할 수 없다는 말도 맞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동희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네 말대로 그림에 집중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인생을 배울 수는 있을 게다.” “싫어요. 할머니.” 정회장은 동희를 안타깝지만 강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제 동희를 더 강하게 만들어야 만 했다. 그래야 하늘에 먼저 간 아들 내외를 떳떳하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싫다면 이 집은 김 사장에게 넘어 갈 거다.” 동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말도 안돼요. 그는 우리 가족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잖아요.” “하지만 회사를 운영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사람이지.” “이 집은 부모님이 사시던 집이었잖아요. 저 작업실은 아버지가 직접 지어 주신거구요. 그 런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주겠다는 말씀을 하 실 수가 있어요.” “네가 노력하지 않는 다면 이 집을 가질 자격도 없다.” “회사는 이모가 있잖아요.” 동희의 말에 정 회장의 눈길이 사나워졌다. “말 그대로 나하고는 피 한방을 안 섞인 사이다. 네 아버지나 네가 아니었다면 말도 섞고 싶지 않다.” “다른 거라면 모를까 회사 나가는 건 싫어요.” “너 역시 네 이모와 함께 일하는 게 싫어서 회사에 나가는 걸 싫어하는 게 아니냐.” “…….” “좋다. 그럼 결혼을 해라.” “할머니?” 두 사람 다 단 한 발짝도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지만 동희는 정회장이 내놓는 두 번째 조건 듣자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결혼이 싫냐?” “네. 전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상처받는 게 무서워서 그런 거라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이 세상에 없을 거다.” “그게 아니에요. 정말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그럼 방법은 하나 밖에 없는 거구나.” 정 회장의 한숨 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그녀의 주름진 입술사이에서 흘러나왔다. “피곤하구나. 결혼하지 않을 거라면 출근 준비 서둘러라. 아 참? 나이가 드니 깜빡 깜빡 하는 건 어쩔 수가 없군.” 정 회장은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지만 동희는 속지 않았다. “얼마 있으면 공모전이 있다. 거기에 입상하지 못하면 이 집은 정말로 김 사장에게 넘어갈 거다.” “제가 회사에 나가면 무효화되는 거 아니었어요?” “듣지 않았니.” 할머니는 동희에게 단 한마디 할 기회도 더 이상 주지 않았다. “이 인간이 나 모르게 우리 할머니를…….” 쾅쾅쾅 노크가 아니라 망치로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유신은 샤워를 하다가 문을 부술 듯한 노 크 소리에 하는 수 샤워기 물을 잠갔다. 동희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이 인간이 왜 이렇게 안나오는 거야.” “잠깐... 헉.” “이봐....꺅.” 동희는 눈을 꼭 감고 뒤 돌아 섰고, 유신은 급하게 수건을 허리춤에 마져 채웠다. “이 여자가 미쳤나.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와.” “으흠.” 동희는 미안하고 무안했지만 기선 제압에서지지 않기 위해 어깨를 쭉 피면서 유신을 돌아보았다. “가릴 대는 다 가렸죠.” “그래. 창피한 것 도 잊어버리고 이제는 사과 하는 것도 잊어 버렸나 보지.” “사과 받을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해요?” “다짜고짜 쳐들어와 와서 밑도 끝도 없이 무슨 말이야?” 유신은 수건으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털어냈다. “보다 시피 난 지금 샤워 중이었으니까 할 말 있으면 빨리 하고 나가.” “우리 할머니에게 뭐라고 한거죠?” “내가 뭘? 네가 보기에 내가 한가해 보일지 모르지만 나 엄청 바쁜 사람이여서 회장님하고 말 할 시간도 없어.” “오! 그러세요?라고 할 줄 알았어요. 어디서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동희가 큰소리로 떠들었지만 유신은 그런 그녀가 방안에 없다는 듯이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봐요. 내 말 듣고 있는 거예요?” “난 거짓말 한 적 없어. 아직 덜 씻었으니까 빨리 나가줬으면 하는데.” 정 회장이 유신의 이름을 이용한 것 같았지만 유신은 두 여자 모두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 아 그에 대해선 함구했다. “그럼 관심 없는 거군요. 좋아요.” 뭐가 좋다는 건지.“할머니가 제시한 조건이 너무 터무니없다는 걸 알고 있죠.” 유신이 아무 말 하지 않고 동희를 내려다보자 그녀는 그걸 동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할머닌 제가 그 조건을 지키지 못 할 걸 잘 아시면서도 부당한 조건을 내놓으신거라구요. 할머니에게는 그렇게 한다고 말씀드리세요. 그리고 제가 할머니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더라도 그에 맞는 대가를 지불하겠어요. 어때요. 그쪽이 손해 볼 일은 없을 거예요.” “싫어.” 동희는 순간 멍해졌다. “싫다고. 난 한번 한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봐. 그러니 나한테 와서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하지 말고 조건을 이행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열심히 노력해봐. 다른데다가 에너지를 사용한다면야 나야 좋지만.” 유신은 말끝에 시선을 침대로 향했다. “꿈도 꾸지 마요. 좋아요.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 줘. 두고 보자고요. 그렇게 안 봤는데 김유신씨도 어쩔 수 없군요.” 동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유신의 방에서 나가버렸다. 유신은 정 회장이 어떤 조건을 내걸었는지는 들은 바 없었다. 하지만 그 일이 동희가 회사에 출근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야. 자기가 뭔데 우리 집을 공짜로 한 입에 꿀꺽 삼키겠다는 거 아니야. 할머니는 도대체 저 매너 꽝인 인간이 뭐가 좋다는 건지.” 그가 가져다준 커피와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지워져버렸다. 하지만 그의 벗은 몸은 지워지지가 않았다. 남자 누드도 여러 차례 그려본 경험이 있지만 유신의 몸처럼 기억에 남는 남자 모델은 없었다. 못 본 척 했지만 솔직히 볼 건 다 봤다. “그림 그리고 싶다.” “그 인간한테 모델이나 부탁해봐.” “잘못하다가 말처럼 목이 날아가는 수가 있다.” “으~~아. 근데 회사는 어떻게 다니냐고.” 동희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천장을 쳐다본다고 해서 답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고, 인형을 붙잡고 목을 졸라보아도 상황은 똑같았다. “미치겠네. 냉혈녀 이모하고 어떻게 같이 일하며, 소문은 어떻게 감당하라는 건지. 넌 아냐?” 그녀는 죄 없는 인형의 볼을 양손으로 때려가며 답을 요구했다. “야? 버꾸. 대답을 해봐. 니가 김 유신이냐 개 폼만 잡고 있게. 어헝~~ 내가 드디어 미쳤나봐. 그래. 회사에 나간다고 치자! 거기까지는 좋아. 그런데 어떻게 공모전에 내가 입상을 하겠냐구. 그게 말이나 돼?” 똑똑똑 동희는 혹시 유신이 마음을 바꾼 것이 아닌가 싶어 인형을 얌전히 내려놓고 벌떡 일어나 않았다. “네.” “아직 안자지?” 향미가 동희가 즐기는 생과일주스를 준비해 가지고 들어왔다. “이모. 아직 안 주무셨네요.” “응. 나이가 드니까 잠이 줄어든다.” 동희는 향미가 내민 주스 잔을 받아 들었다. “회장님이 뭐라고 하시던.” 자신도 모르게 동희의 입에서는 한 숨이 길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숨처럼 자연스럽게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었다. “회사에 나가래요.” “그래. 그런데 넌 회사에 나가기 싫은 거구.” “아시잖아요. 이모는 절 싫어하세요.” 향미는 어깨가 처진 동희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향미는 동희의 어릴 적을 기억하고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친 이모에게 얼마나 사랑받고 싶어 했었는지를. 하지만 동희는 그 노력에 대해 단 한번도 보상을 받은 적이 없는 불쌍한 아이었다. “그렇지 않아.” “이모도 아시잖아요. 우리 이모는 저한테 단 한번도 환하게 웃어 준적도 없고, 따뜻한 말 한 마디 해주신 적이 없는 분이에요.” “단지 표현을 하지 못했을 뿐이야. 네 이모도 널 사랑해. 넌 하나 밖에 없는 조카야.” “사랑이요? 다른 감정은 확실하지만 이모는 절 사랑하지 않아요.” “잘 잤냐?” “…….” “나랑 말 안하기로 했어?” “…….” “아무리 네 할머니 회사고 낙하산이라지만 그 꼴로 출근 할 건 아니지?” 유신의 생각대로 동희는 발끈했다. 심상치 않는 표정으로 그녀가 돌아섰지만 유신은 냉정한 눈길로 바라볼 뿐이었다. “내 모습이 어디가 어때서요. 꼴이 뭐예요? 꼴이.” “그렇지 않아도 갑작스럽게 마련된 네 자리 때문에 회사에서 말도 많고 너한테 쏟아지는 관심들도 많은데 그 꼴.. 아니지 모습을 보면 불에 기름 붙는 겪이 될 거다.” “잠깐 만요. 지금 회사에 내 소문이 났단 소리예요?” “당연하지.” 유신은 정말로 당황하는 동희의 모습에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더 생기는 걸 느꼈다. “오너 손녀가 갑자기 나타나서 회사에 나온다는데 사람들이 조용할 리가 없지.” “벌써 소문을 냈단 말이에요?” “뭔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난 소문 낸 적 없어. 회장님의 지시가 내려졌을 뿐이지.” “정말 첩첩 산 중이군.” “내가 보기엔 니 머리가 더 복잡해 보인다. 그거 부풀리려면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걸리냐?” “신경 끄세요.” 유신은 돌아서는 동희의 뒷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놀리는 게 왜 이렇게 재미있는지 설명할 수가 없었지만 정말 오랜만에 즐거웠다. “아니. 나하고 전생에 원수라도 졌어. 왜 아침부터 사람 약을 올 리냐고. 그렇지 않아도 심장 떨려 미치겠는데. 근데 소문나서 어쩌냐. 양동희 어찌 회사 생활이 앞으로 아주 갑갑할 것 같다.”
떴다!!! 그녀 {네번째이야기}
그동안 건강하셨죠.
곧 설날이 나가오네요.
여러분 올 한해도 건강하시구요. 사랑하고 사랑받는 한해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돌 다리도 두둘겨 보고 지나가는 한해가 되세요.
“그런다고 남자가 되가지고 삐지기는.”
“뭐?”
“내가 뭘요.”
유신은 나가려다 말고 동희에게 다가왔다.
“다 들었다.”
“다 들었어요?”
“그래.”
“그러면서 왜 물어봐요.”
그는 자신의 귀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는 동희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언제 삐졌다고 그래."
"지금요. 삐져가지고 휭 나가는거 아니였어요. 그렇게 소심해서 어디 사업하겠어요?"
“말 좀 예쁘게 하면 어디가 덧나?”
“네. 내 입이요.”
동희는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켰다.
“차 잘 마셨어요.”
“고맙다는 말 정말 못하네.”
“그러게요.”
네. 그 사람하고 해어지고 나서 참 많은 게 달라졌거든요. 그 때는 쉬었던 모든 게 이제는 참 어려워요.
“우리 나가죠. 난 우리 노친네 만나봐야겠어요.”
“할머니 찾으셨다면서요.”
정 회장은 언제 나처럼 시간이 나면 서제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눈이 나빠졌다고 십년 전부터 투덜거리셨지만 책을 손에서 내려놓을 줄 모르는 부류였다. 남은 시간을 낭비하는 것 죄악이라고 생각하는 정 회장이었다.
“그래. 들어와라. 안경 다시 맞추어야겠다. 보이는 게 영 시원치 않아.”
정 회장은 손에 들고 있는 안경이 죄라도 진 냥 원망 섞인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요즘은 무슨 책 읽으세요.”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나온 지 좀 된 책 아니에요?”
“맞다. 다시 읽는 거란다.”
정회자의 눈길은 그 전에 없이 차분했다. 마치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동희는 할머니의 발치아래 무릎을 꿇었다.
“할머니?”
“왜?”
정 회장은 갑작스런 동희의 걱정스러운 부름의 뜻을 이해했지만 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었
다.
“병에 걸린 건 참 불행한 일이지만 자신의 죽음을 알고 준비하는 건 어쩌면 행운 같다는
생각이 드는 구나. 잠이든 시간은 죽는 거지만 아침에 다시 일어났을 땐 새 생명을 맏이 하
는 것 같다는 말이 이해가 간단다.”
“할머니.”
“걱정 할 것 없다. 나도 언젠간 죽는단다. 다른 사람이 그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 졌을 뿐이야. 살아 온 삶이 중요하듯이 마지막 가는 길도 중요하거든 마지막에 담담할
수 있다고 장담 할 수는 없지만 초라하거나 추해지는 않을 것 같아서 말이다.”
“전 아직 잘 모르겠어요. 할머니.”
정 회장은 아직은 더 많은 삶을 살아야할. 그 만큼 더 많은 시련이 미래에 남아있는 손녀
딸의 볼을 쓰다듬었다. 물론 행복한 날들 역시 그 만큼 많이 그녀의 앞에 놓여 있을 거라
는 걸 정 회장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젊은 사람들은 자신이 그러했듯이 실수를 하는 법이
었다. 그리고 연장자의 말은 구닥다리 리어카가 굴러가는 소리처럼 듣기 싫어하는 법 이었
다.
“뭐 할 건지 아직 생각 중이랬지.”
“네.”
“동희야? 인생 내 생각보다 참 짧다. 그리고 지금 까지 겪었던 시련들이 가장 큰 것처럼
여겨지지만 앞으로도 너의 남은 인생에는 그 보다 더 큰 시련이 다가올지도 모른단다.”
“할머니?”
동희는 할머니마저 동희 만 남겨 놓고 눈앞에서 사라질 것 만 같아 무서웠다.
“난 네가 더 이상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세요.”
동희는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할머니의 바람을 들어들이고 싶었다. 할머니가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을 시킬 리가 없다는 걸 믿었다.
“회사에 나가라.”
“할머니 전 예전부터 회사에는 관심 없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전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알아. 하지만 회사에 다니면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동희는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집중 할 수는 없어요.”
회사에 나가는 것만은 싫었다. 그림에 집중 할 수 없다는 말도 맞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동희를 주춤하게 만들었다.
“네 말대로 그림에 집중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인생을 배울 수는 있을 게다.”
“싫어요. 할머니.”
정회장은 동희를 안타깝지만 강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제 동희를 더 강하게 만들어야
만 했다. 그래야 하늘에 먼저 간 아들 내외를 떳떳하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싫다면 이 집은 김 사장에게 넘어 갈 거다.”
동희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말도 안돼요. 그는 우리 가족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잖아요.”
“하지만 회사를 운영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사람이지.”
“이 집은 부모님이 사시던 집이었잖아요. 저 작업실은 아버지가 직접 지어 주신거구요. 그
런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주겠다는 말씀을 하 실 수가 있어요.”
“네가 노력하지 않는 다면 이 집을 가질 자격도 없다.”
“회사는 이모가 있잖아요.”
동희의 말에 정 회장의 눈길이 사나워졌다.
“말 그대로 나하고는 피 한방을 안 섞인 사이다. 네 아버지나 네가 아니었다면 말도 섞고
싶지 않다.”
“다른 거라면 모를까 회사 나가는 건 싫어요.”
“너 역시 네 이모와 함께 일하는 게 싫어서 회사에 나가는 걸 싫어하는 게 아니냐.”
“…….”
“좋다. 그럼 결혼을 해라.”
“할머니?”
두 사람 다 단 한 발짝도 물러서려고 하지 않았지만 동희는 정회장이 내놓는 두 번째 조건
듣자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결혼이 싫냐?”
“네. 전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상처받는 게 무서워서 그런 거라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이 세상에 없을 거다.”
“그게 아니에요. 정말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그럼 방법은 하나 밖에 없는 거구나.”
정 회장의 한숨 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그녀의 주름진 입술사이에서 흘러나왔다.
“피곤하구나. 결혼하지 않을 거라면 출근 준비 서둘러라. 아 참? 나이가 드니 깜빡 깜빡
하는 건 어쩔 수가 없군.”
정 회장은 자조 섞인 목소리로 말했지만 동희는 속지 않았다.
“얼마 있으면 공모전이 있다. 거기에 입상하지 못하면 이 집은 정말로 김 사장에게 넘어갈
거다.”
“제가 회사에 나가면 무효화되는 거 아니었어요?”
“듣지 않았니.”
할머니는 동희에게 단 한마디 할 기회도 더 이상 주지 않았다.
“이 인간이 나 모르게 우리 할머니를…….”
쾅쾅쾅
노크가 아니라 망치로 문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유신은 샤워를 하다가 문을 부술 듯한 노
크 소리에 하는 수 샤워기 물을 잠갔다.
동희는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이 인간이 왜 이렇게 안나오는 거야.”
“잠깐... 헉.”
“이봐....꺅.”
동희는 눈을 꼭 감고 뒤 돌아 섰고, 유신은 급하게 수건을 허리춤에 마져 채웠다.
“이 여자가 미쳤나. 남의 방에 함부로 들어와.”
“으흠.”
동희는 미안하고 무안했지만 기선 제압에서지지 않기 위해 어깨를 쭉 피면서 유신을 돌아보았다.
“가릴 대는 다 가렸죠.”
“그래. 창피한 것 도 잊어버리고 이제는 사과 하는 것도 잊어 버렸나 보지.”
“사과 받을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해요?”
“다짜고짜 쳐들어와 와서 밑도 끝도 없이 무슨 말이야?”
유신은 수건으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털어냈다.
“보다 시피 난 지금 샤워 중이었으니까 할 말 있으면 빨리 하고 나가.”
“우리 할머니에게 뭐라고 한거죠?”
“내가 뭘? 네가 보기에 내가 한가해 보일지 모르지만 나 엄청 바쁜 사람이여서 회장님하고 말 할 시간도 없어.”
“오! 그러세요?라고 할 줄 알았어요. 어디서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동희가 큰소리로 떠들었지만 유신은 그런 그녀가 방안에 없다는 듯이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봐요. 내 말 듣고 있는 거예요?”
“난 거짓말 한 적 없어. 아직 덜 씻었으니까 빨리 나가줬으면 하는데.”
정 회장이 유신의 이름을 이용한 것 같았지만 유신은 두 여자 모두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
아 그에 대해선 함구했다.
“그럼 관심 없는 거군요. 좋아요.”
뭐가 좋다는 건지.
“할머니가 제시한 조건이 너무 터무니없다는 걸 알고 있죠.”
유신이 아무 말 하지 않고 동희를 내려다보자 그녀는 그걸 동의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할머닌 제가 그 조건을 지키지 못 할 걸 잘 아시면서도 부당한 조건을 내놓으신거라구요.
할머니에게는 그렇게 한다고 말씀드리세요. 그리고 제가 할머니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더라도 그에 맞는 대가를 지불하겠어요. 어때요. 그쪽이 손해 볼 일은 없을 거예요.”
“싫어.”
동희는 순간 멍해졌다.
“싫다고. 난 한번 한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봐. 그러니 나한테 와서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하지 말고 조건을 이행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열심히 노력해봐. 다른데다가 에너지를 사용한다면야 나야 좋지만.”
유신은 말끝에 시선을 침대로 향했다.
“꿈도 꾸지 마요. 좋아요.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 줘. 두고 보자고요. 그렇게 안 봤는데 김유신씨도 어쩔 수 없군요.”
동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유신의 방에서 나가버렸다. 유신은 정 회장이 어떤 조건을 내걸었는지는 들은 바 없었다. 하지만 그 일이 동희가 회사에 출근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야. 자기가 뭔데 우리 집을 공짜로 한 입에 꿀꺽 삼키겠다는 거 아니야. 할머니는 도대체 저 매너 꽝인 인간이 뭐가 좋다는 건지.”
그가 가져다준 커피와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지워져버렸다. 하지만 그의 벗은 몸은 지워지지가 않았다. 남자 누드도 여러 차례 그려본 경험이 있지만 유신의 몸처럼 기억에 남는 남자 모델은 없었다. 못 본 척 했지만 솔직히 볼 건 다 봤다.
“그림 그리고 싶다.”
“그 인간한테 모델이나 부탁해봐.”
“잘못하다가 말처럼 목이 날아가는 수가 있다.”
“으~~아. 근데 회사는 어떻게 다니냐고.”
동희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천장을 쳐다본다고 해서 답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고, 인형을 붙잡고 목을 졸라보아도 상황은 똑같았다.
“미치겠네. 냉혈녀 이모하고 어떻게 같이 일하며, 소문은 어떻게 감당하라는 건지. 넌 아냐?”
그녀는 죄 없는 인형의 볼을 양손으로 때려가며 답을 요구했다.
“야? 버꾸. 대답을 해봐. 니가 김 유신이냐 개 폼만 잡고 있게. 어헝~~ 내가 드디어 미쳤나봐. 그래. 회사에 나간다고 치자! 거기까지는 좋아. 그런데 어떻게 공모전에 내가 입상을 하겠냐구. 그게 말이나 돼?”
똑똑똑
동희는 혹시 유신이 마음을 바꾼 것이 아닌가 싶어 인형을 얌전히 내려놓고 벌떡 일어나 않았다.
“네.”
“아직 안자지?”
향미가 동희가 즐기는 생과일주스를 준비해 가지고 들어왔다.
“이모. 아직 안 주무셨네요.”
“응. 나이가 드니까 잠이 줄어든다.”
동희는 향미가 내민 주스 잔을 받아 들었다.
“회장님이 뭐라고 하시던.”
자신도 모르게 동희의 입에서는 한 숨이 길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숨처럼 자연스럽게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었다.
“회사에 나가래요.”
“그래. 그런데 넌 회사에 나가기 싫은 거구.”
“아시잖아요. 이모는 절 싫어하세요.”
향미는 어깨가 처진 동희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향미는 동희의 어릴 적을 기억하고 있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친 이모에게 얼마나 사랑받고 싶어 했었는지를. 하지만 동희는 그 노력에 대해 단 한번도 보상을 받은 적이 없는 불쌍한 아이었다.
“그렇지 않아.”
“이모도 아시잖아요. 우리 이모는 저한테 단 한번도 환하게 웃어 준적도 없고, 따뜻한 말 한 마디 해주신 적이 없는 분이에요.”
“단지 표현을 하지 못했을 뿐이야. 네 이모도 널 사랑해. 넌 하나 밖에 없는 조카야.”
“사랑이요? 다른 감정은 확실하지만 이모는 절 사랑하지 않아요.”
“잘 잤냐?”
“…….”
“나랑 말 안하기로 했어?”
“…….”
“아무리 네 할머니 회사고 낙하산이라지만 그 꼴로 출근 할 건 아니지?”
유신의 생각대로 동희는 발끈했다. 심상치 않는 표정으로 그녀가 돌아섰지만 유신은 냉정한 눈길로 바라볼 뿐이었다.
“내 모습이 어디가 어때서요. 꼴이 뭐예요? 꼴이.”
“그렇지 않아도 갑작스럽게 마련된 네 자리 때문에 회사에서 말도 많고 너한테 쏟아지는 관심들도 많은데 그 꼴.. 아니지 모습을 보면 불에 기름 붙는 겪이 될 거다.”
“잠깐 만요. 지금 회사에 내 소문이 났단 소리예요?”
“당연하지.”
유신은 정말로 당황하는 동희의 모습에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더 생기는 걸 느꼈다.
“오너 손녀가 갑자기 나타나서 회사에 나온다는데 사람들이 조용할 리가 없지.”
“벌써 소문을 냈단 말이에요?”
“뭔가 오해하는 모양인데 난 소문 낸 적 없어. 회장님의 지시가 내려졌을 뿐이지.”
“정말 첩첩 산 중이군.”
“내가 보기엔 니 머리가 더 복잡해 보인다. 그거 부풀리려면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걸리냐?”
“신경 끄세요.”
유신은 돌아서는 동희의 뒷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그녀를 놀리는 게 왜 이렇게 재미있는지 설명할 수가 없었지만 정말 오랜만에 즐거웠다.
“아니. 나하고 전생에 원수라도 졌어. 왜 아침부터 사람 약을 올 리냐고. 그렇지 않아도 심장 떨려 미치겠는데. 근데 소문나서 어쩌냐. 양동희 어찌 회사 생활이 앞으로 아주 갑갑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