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요십조 그진실을 말한다

십조2006.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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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blog.naver.com/rozet77/80015263200

 

  

훈요십조

 

한국 정치사에 있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으며 여전히 국가발전의 장애로 작용하고 있는 ‘지역감정’. 지역감정은 그 해악에 대한 수많은 지적에도 불구하고 선거때마다 단골메뉴로 등장하고 오늘날의 정치판도 지역감정의 벽을 극복하지 못한 채 휩쓸려가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망국적인 지역감정의 근거로 흔히 고려 태조 왕건이 유훈으로 남겼다는 「훈요십조(訓要十條)」가 거론된다. 훈요십조는 “전라도 지방이 ‘배역의 땅’이니 그곳 사람들을 관료로 등용하지 말 것”을 명기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차별의 내용을 담고 있는 훈요십조에 대해서는 왕건이 당대에 지은 것이 아니라 후대에 조작됐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즉, 현종시대(1109-1031) 권력을 차지한 경주 최씨 집안에서 필요에 의해 제작됐다는 것. 훈요십조 조작의 내막을 알아봤다.


훈요십조 논란은 고려사 태조 왕건의 편에 기재된 일부 내용에 대한 것입니다. 아래와같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서기 943년, 눈을 감기 직전 가까운 신하였던 박술희를 불러 훈요십조를 전하면서 그 8조에서 "내가 죽은 후, 차현 이남과 금강 외의 사람들에게 벼슬을 주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려사 태조 26년 4월 조). ]

태조왕건의 가까운 신하라는 박술희 라는 인물은 충남태생의 후백제 전라도사람입니다. 왜 그 전라도의 인재를 등용 하지말라는 글이 담긴 훈요십조를 자신의 충복 박술희를 불러 전했을까요... 이것부터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또 지리적으로 전라도의 산형지세가 배역한다고 나와있지만 풍수지리 지질학자들에의하면 금강이남의 지역보다 오히려 경상도 지역의 지형이 수도 개성에 배역이 되는 지역이 훨씬 많았던 조사결과도 나왔지요.

훈요십조에서 말하는 차현이남(以南) 공주강외(外)」의「외(外)」는 『한화사전(漢和辭典)』 등에서 「바깥」이라는 의미와 「위(上)」라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공주강 외」는 「공주강 위」라는 뜻이며, 지리적으로 공주강 북쪽을 가리킨다. 이렇게 되면 차령 이남과 금강 북쪽에 해당되는 지역은 지금의 홍성·보령·부여·공주·연기·청주 일대로 제한된다 그렇다면 그 당시 그 지역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첫째, 환선길·이흔암의 모반사건과 청주지역 신라진골 호족세력의 반역 사건을 들 수 있다.

둘째 공주,홍성등 10여주 현의 투항사건,임춘길,진선의 반란사건 이렇게 태조는 즉위 4개월동안 공주강위 차령이남지역 안에서 연이은 반란사건을 격게된다 .

신라계 진골출신 호족들이 살던 충북 청주지방의 인물들이 당시 왕건이 집권하던 시절 찾아보기 힘들었던 점도 설득력을 뒷받침 한다.

 

[현종 시대(1010-1011)에 거란군 40만 명이 쳐들어 왔을 때 모두 불타고 없어졌다. 그래서 태조가 죽은 지 80년이 지나서 '고려사'를 다시 편찬했다. 이때 최제안이라는 인물이 최항의 집에 간직해 두었던 문서를 가지고 와서 왕건의 유서라고 하며 실록에 끼워 넣었다.(고려사 열전 최승로 제안 조) ]

거란침입으로 훈요십조를 보관해뒀던 곳과 궁이 타 없어지고 70여년의 세월동안 훈요십조는 그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었는데 최제안이라는 사람이 집에 간직해 두었다고 가지고 왔습니다. 최제안은 신라계 경주 사람으로 실제 고려 성종이후에는 신라출신 사대주의 성격이 강한 인사들이 정계에 많이 진출되었고 이들은 자신들의 반대 세력인 백제계 사람들 특히 후백제에 대한 좋은 감정이 없었습니다. 왕건은 민족융화정책을 쓴 왕으로 훈요십조에 까지 지역을 차별하려 했다는 것도 신빙성도 없거니와
거란침입당시 현종은 전주에 7일을 머무르고 ('고려사' 현종 2년 정월 기해 조)
나주지역으로 대피했다고 나옵니다. 호남에 대해 그렇게 기피하는 태조가 왜 강원,충청,영남지역이 아닌 전라도지역으로 대피했을까요...
금강이남은 경주에 대해 배산임수지역이지 개성에 배산역수지역은 아닙니다. 오히려 개성의 배산역수지역은 낙동강과 태백산맥지역이라는건 학계 조사로 이미 나온 사실들입니다.

그리고 당시 왕실을 뒤흔들만한 견제는 오히려 청주지방의 신라계 호족 세력이었지 전라도가 아니었으며 왕건의 평생 사표가 된 도선국사와 죽어서 태사가 된 최지몽 그리고 왕비이자 2대 혜종의 모후인 장화왕후 오씨는 전남 나주 사람이었고 그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또한 동산원부인과 문성왕후나 는 견훤의 외손녀들이었고 개국공신 신숭겸은 전남 곡성 사람들이었습니다 위에 몇분은 왕건의 최측근을 몇분 나열 한 것이고 그 외에도 수없이 많습니다.
왜 왕건이 전라도를 피하라는 훈요십조를 충복 전라도출신 박술희에게 전했을까요...

우리가 알고있는 왕건의 호남인재를 등용하지 말라 호남을 경계하라는 말의 진실.


 

호남의 도움으로 건국된 고려...

 

훈요십조의 내용

훈요십조는 고려가 불교 국가이므로 국가의 왕업은 반드시 부처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특히 한국 풍수지리의 시조인 신라 고승 도선(道先)의 의견에 따라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도선은 ‘차령산맥 이남이나 공주강(금강) 외곽 출신은 반란의 염려가 있으므로 벼슬을 주지말라'고 하였다고 한다.

즉, 「차현(車峴) 이남 공주강 밖은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반대방향으로 뻗었고 따라서 인심도 그러하니 그 아래 있는 주군 사람들이 국사에 참여하거나 왕후·국척들과 혼인을하여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면 혹은 국가에 변란을 일으킬 것이요, 혹은 백제를 통합한 원한을 품고 왕실을 침범하여 난을 일으킬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지방 사람들로서 일찍이 관가의 노비나 진(津)·역의 잡척(雜尺)에 속하였던 자들이 혹 세력가들에 투탁하여 자기 신분을 고치거나 간교한 말로서 정치를 어지럽게 하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재변을 초래하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방 사람들은 비록 양인일지라도 관직을 주어 정치에 참여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


훈요십조는 도선국사를 한국  풍수의 원조로 추앙해 놓고 그가 태어나 살다 죽은 고향(전남 영암)을 ‘배역의 땅'이므로 차별해야 한다는 부도덕한 기준을 마련해 놓고 있다. 훈요십조 제2조는 모든 사원은 도선이 산수의 순역에 따라 개창토록 정해 두었으므로 그에 따르라 하고, 다시 제8조에서 차령 이남 공주강 외는 산형지세가 다같이 배역인심의 땅이므로 사람을 쓰지 말라고 기록하고 있다.

도선은 신라말기인 827년 전남 영암군 구서면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개설했고, 장보고 선단을 통해 체증·현욱 스님 등이 당나라에서 불교를 배워왔다.

도선은 장보고가 살해되던 841년 출가해 장보고 선단을 통해 귀국한 혜철스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는다. 도선은 37세에 지리산 섬진강 근처 백계산 옥룡사에 터를 잡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그와 같은 고향에서 최형미(846-917), 김경보(868-947) 승이 태어났다. 이들은 모두 왕건의 부름을 받았던 인물고 같은 마을의 최지몽(907-987)은 왕건의 태사에 추증됐다. 그러나 이들 세 승은 공적이나 학덕에 있어 삼국통일을 예언한 도선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그런데 왕건이 도선의 말을 빌어 도선과 세승의 고향을 ‘배역의 땅'이라 한데는 모순이 있어 보인다. 더욱이 왕건은 전라도의 해양세력과 경기만 해양세력의 도음을 얻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호남의 서남해안은 중국의 장강 이남과 교류해오던 곳으로 신라 말기 당나라와의 교역으로 경제력을 길렀을 뿐만 아니라 선진된 문물을 흡수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왕건은 궁예와의 어려움이 생기면 선단을 이끌고 전남의 서남해안일 찾았고, 해양성이 강했던 나주·영암·순천·광양·영광 등지의 토호들의 환영을 받았다.

전남평야의 중심이라 할 나주의 토호 오희는 왕건과 이해를 같이해 그의 딸을 왕건의 제2 부인에 앉히고 영산강 어구의 영암토호 최흔(최지몽의 아버지)을 끌어들여 후백제에 치명타를 주었다. 순천의 박영규 세력은 처음에 후백제에 참여했다가 말기에 왕건편에 가담했다. 결국 왕건은 후백제의 해양세력의 협력을 얻어 후삼국을 통일한 것이고 통일후 후계자를 나주 출신 왕무(2대 혜종)로 삼았던 것이다.



훈요십조 위작의 문제

호남세력은 왕건이 죽은 뒤 정종·광종 대를 거치면서 황주의 황보씨 집안과 충주 유씨 집안, 경주세력 등의 따돌림을 받아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종이 고려를 침범한 거란에 쫓겨 나주로 피신하면서 새로운 기회를 잡는다.

신라계 인물들은 주로 문반이었으므로 쫓기는 현종을 보살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거란군이 강조를 죽이고 물러간 뒤 현종이 개경에 돌아가기까지 두달 동안 호남사람들의 접대는 어린 나이의 현종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전주에서 박온의 딸을 얻고 훈요십조에서 배역의 땅으로 지목한 공주강 나루터에서 김은부는 세딸을 현종과 동침시켜 개경에 남아 있던 경주계 권신 최항 등을 당황스럽게 했다. 기록에 의하면 최항은 채충순과 모의해 김치양을 역적으로 몰고 드디어는 30세의 목종까지 몰아내고 경주 김억렴의 외증손인 현종을 왕위에 올려세운 장본인이다.

최항과 같은 집안인 최제안은 현종을 만나 태조께서 왕들이 명심할 「훈요십조」를 남긴 바 있는데 그 「훈요십조」가 최항의 집에 있어 가져왔다고 내비친 바 있다. 이 경위는 현종 때 편찬한 <고려사>에 나온다. 그러나 최항이 난리(거란의 침입)를 겪은 3년뒤 새로 짓는 국사(고려사)의 감수국사를 맡아 적어넣었다는 점에서 의심이 가는 부분이다.

더욱이 이때 만든 <고려사>가 오늘날 전해오는 것이라해도 「훈요십조」는 나주 출신 왕무를 잘 보필하도록 당진의 면천 출신 박술희를 불러 이른 것으로 되어 있는데, 왕가도 아닌 최항의 집에있었다는 기록은 믿기 어려운 대목이다.

태조 왕건 자신이 전라도 연해안 세력과 협력하고 결혼한 입장에서 자식들에게는 경계하라고 했다는 논리를 정사(正史)로 받아들이기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유훈을 받은 박술희마저 혜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정종에 의해 강화로 유배된 뒤 살해당했으므로 그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다.

최항등은 강조가 거란의 성종에 의해 살해된 뒤 현종이 돌아오자 강조와 더불어 현종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운 전남 출신 위종정·박승종·탁사정 등을 해도로 유배시켰다. 그리고 경주 출신 최치원과 설총을 문묘에 배향하고 경주를 동경(東京)으로 승격시켰으며 「훈요십조」의 권위를 보완할 목적으로 전남 출신 도선을 대선사로 추봉하느 조치를 취했다.

학계 일각에서 <고려사>가 편찬된 시기와 배경을 두고 「훈요십조」의 위작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는 것은 위와 같은 이유에서 이다. 일본인 사학자 금서룡(今西龍)은 위작의 주동인물로 최항(현종 15년 사망)과 최제안(문종 즉위년 사망)을 꼽고 있다.

아래 내용은 동아일보 기사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805/nd98050100.html

http://www.ilyosisa.co.kr/ILYO/174/culture/48-1.html

지역감정이 심화되며 사회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부터이다.응답자의 92%가 그렇게 느끼고 있으며 이는 그동안 분석해 온 연구와 거의 일치한다고 볼수있다.(지역감정연구 / 학민사 191~211편) 


 

지금까지 전라도에 대한 수없는 악담을 듣고 살아왔으니 이런 진실도 봐주시고.
이런 글보며 지역감정 조장이라고 욕한다면 할 수 없지만 이런면도 있었구나 하고 이해 해주시길 바랍니다. 전라도 사람들은 인물없고 무식해서 지금과 같이 사는것이 아닙니다..

전라도 사람들은 인물이 없고 배운게 없고 무식하다?


지역감정이 심화되며 사회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부터이다.응답자의 92%가 그렇게 느끼고 있으며 이는 그동안 분석해 온 연구와 거의 일치한다고 볼수있다.(지역감정연구 / 학민사 191~211편) 

 

위에서 말한 글들에 대한 근거자료는 글의 목록에서 찾을 수 있다.

 

(hot) 지역감정관련 자주하는 질문 답변모음 http://blog.naver.com/rozet77/80012290845

 

지역감정이란 무엇인가?  http://blog.naver.com/rozet77/80010197762

 

전라도 빨갱이들? 광주 5.18은 좌익 폭동? http://blog.naver.com/rozet77/80010195376

 

전국 범죄율 통계 자료 (출처 명확) http://blog.naver.com/rozet77/80010194937

 

전라도 사람들은 인물이 없고 무식하다? http://blog.naver.com/rozet77/80010195363

 

고려 왕건의 훈요십조 그 진실은 http://blog.naver.com/rozet77/80010195227

 

조선왕조  전라도에 대한 편견 그 진실! http://blog.naver.com/rozet77/80010195334

 

고서와 이중환의 택리지가 남긴 고착된 편견 http://blog.naver.com/rozet77/80010195343

 

훈요십조 그진실을 말한다

 

 

추가 내용 태조왕건은 전라도 사람을 관리로 쓰지 않았을까?

출처 : 네이버 지식인 아이디 dragohsh

 

결론 부터 말씀 드리자면, 고려 태조 왕건은 다른 누구보다도 전라도 사람들을

더 우대 하였습니다.

 

1. 도선대사

당시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태조 왕건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도선대사는 호남의 영암군 출신입니다.

 

2.장화왕후 오씨

왕건이 나주를 공략하고 난뒤에 바로 나주의 호족이었던 오다련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는데, 이가 바로 장화왕후 오씨 이며, 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이가 2대 혜종입니다.

 

3.신숭겸

절대절명의 순간 왕건을 피신시키기 위하여 자신이 왕건의 갑옷을 입고,

백제군을 유인하여 끝내 장렬히 전사하여 고려가 망하는 순간까지 개국공신으로

추앙받았던 신숭겸 장군은 전라도 곡성 출신입니다.

 

4.최지몽

18세때 왕건에게 발탁되어 제6대 성종까지 고려의 중신으로 인정받고,

죽어서는 국장의 예로 장례를 치룬 최지몽은 전라도 영암 출신입니다.

 

5.고려사의 초기 기록

"태조께서는 수군으로 나주를 점령한 뒤 그 바다와 섬의 이익을 모두 얻었다.

그 재물의 힘으로 삼한을 통일할 수 있었다."

 

태조왈 "나주의 40여 군은 오랫동안 나의 울타리와 같은 곳으로 잘 따라왔다."

 

이처럼 마지막까지 왕건과 맞서 싸웠던 후백제의 근거지가 전라도 지역이었으니,

우리는 의례 전라도 사람을 미워해서 왕건은 등용하지 않았고,

또한 그때문에 훈요십조 제8조까지 호남인을 등용하지 말라고 했다고,

알고 있으나 실제 왕건은 지역차별없이 인재를 등용하고 포용하여

민심을 얻고 마침내 재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해를 가지고 계신분들은 여기까지만 읽으셔도 됩니다.

다만 훈요십조에 대해 추가적으로 설명을 해야 하니 인내심을 발휘하세요.

 

현재 학계에서는 훈요십조가 왜곡되었거나, 혹은 허구성이 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943년 태조 왕건이 죽을때 내전으로 불려가 박술희가 태조의 유언을 받아

적은 것이 훈요십조라는 것인데, 이에대한 증거를 밝혀줄 왕실기록은 1010년 거란의 침입때 소실되고 없어집니다.

사실 그때까지 훈요십조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어떤 기록에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던 것이 제8대 현종은 이전에 잃어버린 왕실기록을 재편찬하라고

명을 내리는데, 이때 왕실 재편찬에 참여한 최제안이라는 경주출신 신하가

느닺없이 현종을 왕위에 앉히는데 공을 세운 최항 이라는 자의 집에서

발견되었다고 왕에게 헌납한 것이 바로 훈요십조 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태조 왕건의 유언이라면, 그토록 중요한 것이라면, 굳이 기록이 불타 없어지더라도

단지 10개 밖에 안되는 내용이니 후대 왕들이나, 혹은 왕실 후손들은 잘알고 있을터인데

현종은 몰랐다는 것과,

귀중한 왕실기록이 일개 신하의 집에서 튀어나온것,

그리고, 그 최항은 현종을 옹립할때의 측근.

최제안은 실록 재편찬의 담당자이며, 그 발견되는 시점이 마침 실록을 다시 써야하는

순간인 점....

무엇보다 현종의 할머니는 신라의 마지막 경순왕이 투항할때 왕건에게 헌상한

김억렴의 딸이고, 최항 최제안 모두 신라계 경주출신 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첫번째는 훈요십조의 등장과 관련된 시기와

인물들에게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태조 왕건은 위와 같이 전라도 사람이라고 특별히 차별한 흔적이 없습니다.

또한 통일과정을 통해서 그가 보여준 포용력과 정책이 유독 제8조의 차별정책과는

극적으로 모순되어집니다.

 

허나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현종 3년, 거란의 침입을 받아 현종은 급히 남으로 피난을 떠나는데,

마침 지금의 전라도 삼례역에 다달았을때, 당시 전주 절도사 조용겸이 와서 행패를

부렸습니다.

이를 두고 그의 측근들은 옛 백제가 망한 원한을 품고 왕에게 행패를 부린것이라고

기록을 남겼습니다.

따라서, 모반의 기운을 타고난 호남인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제8조가 실현된

경험을 역사 재편찬을 지시한 현종 자신이 직접 겪었다는 것에 묘한 일치감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현종이후 정치세력 중에서 점차 나주를 중심으로한 전라도 출신 세력들은

쇠퇴하고, 경주 출신의 인물들이 득세를 하다가 훗날 신라계의 김부식이 '삼국사기' 를

편찬함으로써 신라중심 사상이 발전하게 된다는 것을 봤을때

 

우리가 익히 아는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는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조작되거나 혹은 만들어 졌을 개연성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출처: http://blog.naver.com/rozet77/80015263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