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는 60 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나의 공통된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누구도 인간 이상도 이하도 아닌 다만 한 사람의 인간에 지나지 않으며 그리고 언젠가는 이 땅에서 생활을 마치고 반드시 죽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이 땅에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사람도 예외가 없었던 사실이자 진리며 이 땅에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사실 말고도 우리 인간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인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빚어지는 대량 살상은 그만 두고라도 오늘 날 일상화된 운동 경기는 물론 인간의 일상적인 생활을 통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지만 오락을 위한 운동과 경기라는 이름아래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는 인간의 잔인함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에서 빚어지는 잔인함은 예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으며 이 장에서는 인간의 본질 속에 은밀하게 숨어 있는 원초적 잔인함을 - 1 - 하나씩 그 실례를 들어가며 보기로 하자. 이 장에서 논하고자 하는 대상은 위에서 본 것과 같이 이간의 행위를 통해 공공연히 나타나는 그런 유형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 뒤에 도덕과 윤리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는 무형의 기술적인 잔인함 들이다. 물론 당신은 이제부터 하나씩 들추어지는 인간의 가면 뒤에 숨겨져 있는 잔인함이 드러날 때마다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며 펄펄뛰며 부인할는지 몰라도 그러나 이 그을 통해 소개되는 사례들을 하나하나 끝까지 보고 난 후에도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감히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아직까지 그런 일이 한번도 없었으며 그런 감정을 가졌거나 느꼈던 일이 없었노라고 강변을 할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당신이 자신에게 조금만 더 솔직할 수 있다면 지금부터 하나씩 드러나는 잔인한 유형에 대해 이것이 과연 나의 실상이란 말인가 하는 무서움과 두려움에 전율하게될 것이다. 이것은 어디서 주워들은 그런 것들이 아닌 나의 실체적인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산지식이며 당신 역시 나와 같은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 라면 절대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아한 미소와 의젓하고 점잖은 가면 뒤에 숨겨져 있는 인간의 잔인함을 하나씩 드러내 그 실상을 보기로 하자. 그러나 위의 사실에 있어서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두 가지 사실 가운데 하나는 - 2 - 사람은 누구나 야누스적 이중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또 한가지 사람은 누구나 완전하지 못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연약하고 불안하여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 위로 받고 위안을 얻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그와 같은 원초적 속성과 본능에 의해 사람은 한 몸 안에 나와 또 한사람 내가 아닌 내가 동시에 상존하고 있으며 따라서 사람의 모든 행위가 서로 다른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가 먼저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죽음의 문제를 보기로 하자.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가까이는 부모와 형제로부터 시작해서 멀리는 한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그 때 마다 우리는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심심한 조의를 표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사람의 그런 행위가 반드시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데서 오는 순수한 것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물론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리고 그런 사람의 마음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죽음을 놓고 정말 한마음으로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인지라 당연하고 자연스런 것이기도 하지만 - 3 - 그러나 그와 동시에 고인의 죽음을 통해 살아 있는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일말의 안도감과 안도감으로부터 오는 어떤 승리감(?)과 보이지 않는 쾌감(?)을 느끼는 등 새삼 자기를 확인하고자 하는 면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도 언젠가는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생활을 마치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두고 고인의 죽음을 빙자해 언젠가 필연적으로 닥쳐올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여 사실은 자신의 미래에 있을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며 동정하는 면이 없지 않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살아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과 함께 살아있는 자로서의 안위와 일말의 승리감에서 오는 쾌감을 만끽하기도 하는데 과연 당신 안에는 그런 인간의 잔인한 속성들이 있지 않다고 장담을 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죽음을 두고 전혀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아니니 행여 이점에 대해서는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다만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통해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동시에 언젠가는 자기에게도 필연적으로 닥쳐올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에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동시에 아직 살아있는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과정에서 고인에 대해 산 자로서 일말의 승리감과 쾌감을 즐기기까지 하는 잔인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절대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 4 - 다음으로는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나 필연적으로 일어나기 쉬운 화재에 대해 보기로 하자! 화재는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면 어디나 일어나기 마련이며 특히 사람이 밀집해 살고 있는 도시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화재 는 많은 재산과 인명의 피해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화재가 발생하면 화재를 당한 사람들은 뜻하지 않은 재난으로 재산과 인명의 피해를 입고 예기치 않았던 재난에 넋을 잃고 어쩔 줄을 모르는데 화재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은 불길에 타들어 가는 건물이나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도 알지 못하는 일말의 짜릿한 흥분과 쾌감에 몸을 떨며 전율하기도 하는데 그런 사람들의 심리를 어떻게 설명해야 이해할 수 있을까? 더욱이 화재가 발생한 건물과 이웃한 건물에 살고 있는 사람은 아직 화재가 진압되지 않아서 계속 타고 있는 동안에는 자기의 건물에까지 화재가 번지지 않을까 해서 가슴을 졸이다가 다행히 화재가 자기 집까지 번지지 않고 진압되게 되면 그제서야 자기 집이 무사한데 대해 긴 한숨과 함께 벌떡거리던 가슴을 쓸어 내리며 화재가 옆집까지만 태우고 자기 집은 무사한데 대해 안도와 함께 일종의 후련함과 쾌감을 느끼기도 하는데 이 때의 사람들의 표정을 자세히 보면 겉으로는 안됐다는 표정을 하고 상심한 척 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인간의 부드러운 미소와 근엄한 표정 뒤에는 칼날보다 날카로운 悲情과 잔인함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는 사 실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 5 - 당신은 혹시 내 말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그래서 이치에도 맞지 않는 엉터리라고 할는지 몰라도 그러나 화재 현장에 가보면 내 말이 절대 거짓이거나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엉터리가 아니라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화재가 있는 곳이면 어디나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저마다 화재에 관한 말들을 주고받으며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화재를 걱정하고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자기들끼리 히덕거리며 짓까부는 사람들까지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렇다고 해서 화재를 걱정하거나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화재를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보다는 자기들끼리 히덕거리고 까불며 무슨 공연을 관람하는 사람들처럼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화재 현장을 한번이라도 가본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인간의 감추어진 치부를 들추어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의 이중성에서 오는 행위의 서로 다른 두 면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이번에는 우리의 가족이나 친척 친구 들 잘 아는 사람들이 다치거나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있거나 병석에 있어서 위문을 가게되는 경우를 보기로 하자! 우리의 가족이나 친척 혹은 친구나 이웃 등 아는 사람이 불의의 사고를 당해 다치거나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하거나 - 6 - 병석에 있어 병원이나 집으로 환자를 찾아 위문하고 위로를 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 이 경우 우리는 환자에게 갖은 좋은 말과 부드럽고 정다운 말로 희망과 용기를 북돋우고 위로하는데 이 때도 병상의 환자를 위로하고 위안하는 사람의 모든 행위가 전적으로 병상에 있는 환자를 아끼고 위하는데서 나오는 순수한 것이기만 한 것일까? 물론 사람이 가족이나 친척 친구 등 잘 아는 사람이 불의의 사고나 병을 앓아 병석에 있을 때 환자를 찾아서 진심으로 심심한 위로를 하고 위안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서 또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사람이 병석의 환자를 찾아서 위로하고 위안하는 것이 전적으로 환자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에서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환자를 찾아서 위로하고 위안하는 것이 사람의 거짓된 마음이라거나 위선과 가식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인간의 본성인 이중성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사람이 가족이나 친척 이웃 등 아는 사람이나 가까운 사람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건강을 잃고 병석에 있게 되면 환자를 찾아서 위로하고 위안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의 그런 행위의 이면에는 환자를 통해서 언젠가는 자기에게도 닥칠지 모르는 만일의 사태를 상정하고 환자를 위로하고 위안하면서 사실은 자기를 위로하고 자기가 위안 받는 잔인함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것과 같이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하며 불완전함에서 오는 불안과 연약함으로 해서 - 7 - 끈임 없이 누군가로부터 위로와 위안을 받고 사랑과 동정을 구하고자 하는 원초적 본능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으며 다른 사람도 내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 역시 내 삶을 대신할 수 없다. 내 삶은 오직 나밖에 살 수 없으며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하거나 대체할 수 없으며 나 또한 다른 사람이 삶을 대신하거나 대체할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남이 될 수 없고 남의 삶을 대신할 수 없듯이 남 역시 내가 될 수 없고 내 삶을 대신할 수 없는 한계 속에서 그 누구도 내 깊은 마음을 이해하고 알아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람은 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동정을 구하고 마음의 위로와 위안을 기대하지만 사람의 그런 기대와 욕구는 애초부터 충족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은 내가 아닌 남을 통해서 사랑과 동정을 구하고 위로를 받고 위안을 얻고자 하는 기대와 바램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과 남을 통해서 얻어지는 위로와 위안의 한계 때문에 자신의 기대와 욕구가 남을 통해 채워지지 않는 부분을 스스로 채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존재인지라 자기의 행위에 한계가 있으며 보다 많은 사람들의 이목과 관심을 자기에게 집중토록 함으로서 자신의 어떠함을 드러내고 과시함으로 말미암아 - 8 - 일종의 심리적 기대와 충족에서 오는 만족감으로 인해 기쁨과 즐거움의 효율적 제고를 통해서 보다 큰 자기 위로와 위안을 얻고자 하는 지혜를 터득하게 된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 얻어지는 위로와 위안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며 기대와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데서 오는 불만과 욕구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위로하고 위안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자기 혼자보다는 누군가 자기의 위로와 위안에 반향함으로서 그 효과를 증대할 수 있는 대상을 필요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의식한 세상적 체면과 위신 때문에 이를 공공연하게 나타내지 못하고 은밀하게 그 대상을 찾던 중 가족이나 친척 등 가까운 사람들과 친구 이웃 등 잘 아는 사람이 사고나 질병 등으로 병석에 있으면 찾아가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온갖 위로와 위안을 하게 되는데 환자를 위로하고 위안하는 근저에는 자신은 비록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는지 몰라도 사실은 환자를 위로하고 위안하면서 다른 사람을 통해 채워지지 않는 자기 위로와 위안을 충족코자 하는 인간의 잔인함이 은밀하게 숨어 있는 것이다. 그 밖에도 사람의 행위 하나 하나가 마찬가지여서 하나씩 일일이 그 예를 들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의 사고는 물론이고 불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마지막 남은 한 장의 열차나 고속버스의 승차권을 샀을 경우와 만원 버스나 전동차에서 - 9 - 다른 사람들은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는데 자신은 좌석에 편히 앉아서 득의의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인간의 이중성에서 오는 잔인함이 그대로 묻어나게 된다. 또 치열한 경쟁을 뚫고 친구는 불합격하고 자신은 합격한 경우와 어제까지만 해도 책상을 나란히 하고 같이 근무를 하던 사람이 다른 동료들을 제치고 유일하게 승진하여 커다란 책상 앞에 회전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어제의 동료들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즐길 수 잇는 여유도 운동 경기에서 다른 사람을 제치고 우승하여 트로피를 안고 환호하는 군중들을 향해 여유 있는 웃음을 선사하며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도 사돈이나 이웃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전래의 속설 못지 않 게 인간의 숨겨진 은밀한 잔인함을 드러내는 경우일 것이다. 다만 그런 인간의 보이지 않는 잔인함이 도덕과 윤리라는 이름 때문에 교묘하게 포장되고 감추어져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을 뿐 그것은 오늘 날 타락한 인간의 비정함과 잔인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승패가 가름되지 않는 경기나 우열이 가려지지 않는 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관심 하는 것은 오로지 승패와 우열에 있으며 승패와 우열을 가리는 과정이 격렬하고 극적일수록 희열을 느끼 며 가슴 벅찬 감동에 열광한다. 관중으로서 인간은 승자에게만 관심이 있을 뿐 패자에게는 관심이 없으며 열 번 잘 하다가도 한번 잘못하면 돌아보지도 않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아니던가? - 10 - 그러나 열 번 잘못하다가도 한번 잘하면 영웅이 되어 관중의 우상으로 떠오르는 것이 인간의 심리이다. 늘 승자에게는 관대하면서도 패자에게는 냉정한 인간 사회에서 승자와 패자를 가리고 우열을 다투어야만 하는 경쟁 사회에서 인간은 더불어 나누며 함께 살아 가야할 이웃이 아니라 끊임없이 싸우고 다퉈서 이기지 않으면 도태되어야할 공존이 아닌 독존을 위해 반드시 싸워 이겨야만 하는 적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간이 잔인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은 다 그렇더라도 자신은 절대 잔인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와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지 하나 모든 사람이 타락하기 전의 본래의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인간은 어떤 방법을 통해서도 지금과 같은 이중성에서 오는 겉 다르고 속 다른 이면의 잔인함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나아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찾아 위로하고 위안하고자 한다면 타락하여 더럽혀지고 추악한 우리의 실체를 바로 보고 타락의 산물로 나를 우리와 가르고 나누는 욕심을 버리고 지금 내가 나를 위하고 우리를 위하며 세상을 위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 실천에 옮길 때 우리는 비로소 나와 우리와 세상을 사랑하고 위로하며 내가 아닌 우리로 서로 돕고 나누며 더불어 어우러지는 진정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7.인간의 실체
7. 인간의 실체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는
60 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나의 공통된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누구도 인간 이상도 이하도 아닌
다만 한 사람의 인간에 지나지 않으며
그리고 언젠가는 이 땅에서 생활을 마치고
반드시 죽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이 땅에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사람도 예외가 없었던 사실이자 진리며
이 땅에 인류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사실 말고도 우리 인간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인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빚어지는
대량 살상은 그만 두고라도
오늘 날 일상화된 운동 경기는 물론
인간의 일상적인 생활을 통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지만
오락을 위한 운동과 경기라는 이름아래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는 인간의 잔인함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에서 빚어지는 잔인함은
예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으며
이 장에서는
인간의 본질 속에 은밀하게 숨어 있는 원초적 잔인함을
- 1 -
하나씩 그 실례를 들어가며 보기로 하자.
이 장에서 논하고자 하는 대상은 위에서 본 것과 같이
이간의 행위를 통해 공공연히 나타나는 그런 유형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 뒤에 도덕과 윤리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는 무형의 기술적인 잔인함 들이다.
물론 당신은 이제부터 하나씩 들추어지는
인간의 가면 뒤에 숨겨져 있는 잔인함이 드러날 때마다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며 펄펄뛰며 부인할는지 몰라도
그러나 이 그을 통해 소개되는 사례들을
하나하나 끝까지 보고 난 후에도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감히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아직까지 그런 일이 한번도 없었으며
그런 감정을 가졌거나 느꼈던 일이 없었노라고
강변을 할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당신이 자신에게 조금만 더 솔직할 수 있다면
지금부터 하나씩 드러나는 잔인한 유형에 대해
이것이 과연 나의 실상이란 말인가 하는 무서움과 두려움에
전율하게될 것이다.
이것은 어디서 주워들은 그런 것들이 아닌
나의 실체적인 경험을 통해서 얻어진 산지식이며
당신 역시 나와 같은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
라면 절대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아한 미소와
의젓하고 점잖은 가면 뒤에 숨겨져 있는 인간의 잔인함을
하나씩 드러내 그 실상을 보기로 하자.
그러나 위의 사실에 있어서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두 가지 사실 가운데 하나는
- 2 -
사람은 누구나 야누스적 이중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또 한가지 사람은 누구나 완전하지 못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연약하고 불안하여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 위로 받고
위안을 얻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그와 같은 원초적 속성과 본능에 의해
사람은 한 몸 안에 나와
또 한사람 내가 아닌 내가 동시에 상존하고 있으며
따라서 사람의 모든 행위가
서로 다른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가
먼저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죽음의 문제를 보기로 하자.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가까이는 부모와 형제로부터 시작해서
멀리는 한번도 본 일이 없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그 때 마다 우리는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심심한 조의를 표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사람의 그런 행위가 반드시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데서 오는 순수한 것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물론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리고 그런 사람의 마음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죽음을 놓고
정말 한마음으로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인지상정인지라 당연하고 자연스런 것이기도 하지만
- 3 -
그러나 그와 동시에 고인의 죽음을 통해
살아 있는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일말의 안도감과
안도감으로부터 오는 어떤 승리감(?)과 보이지 않는 쾌감(?)을
느끼는 등
새삼 자기를 확인하고자 하는 면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도 언젠가는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생활을 마치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두고
고인의 죽음을 빙자해
언젠가 필연적으로 닥쳐올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여
사실은 자신의 미래에 있을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며
동정하는 면이 없지 않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살아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과 함께 살아있는 자로서의 안위와
일말의 승리감에서 오는 쾌감을 만끽하기도 하는데
과연 당신 안에는 그런 인간의 잔인한 속성들이 있지 않다고
장담을 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죽음을 두고
전혀 슬퍼하거나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아니니
행여 이점에 대해서는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다만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통해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동시에
언젠가는 자기에게도 필연적으로 닥쳐올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에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동시에
아직 살아있는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과정에서
고인에 대해 산 자로서 일말의 승리감과 쾌감을 즐기기까지 하는
잔인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절대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 4 -
다음으로는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나 필연적으로 일어나기 쉬운
화재에 대해 보기로 하자!
화재는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면 어디나 일어나기 마련이며
특히 사람이 밀집해 살고 있는 도시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화재
는
많은 재산과 인명의 피해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화재가 발생하면 화재를 당한 사람들은
뜻하지 않은 재난으로 재산과 인명의 피해를 입고
예기치 않았던 재난에 넋을 잃고 어쩔 줄을 모르는데
화재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은
불길에 타들어 가는 건물이나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도 알지 못하는 일말의 짜릿한 흥분과 쾌감에 몸을 떨며
전율하기도 하는데
그런 사람들의 심리를 어떻게 설명해야 이해할 수 있을까?
더욱이 화재가 발생한 건물과 이웃한 건물에 살고 있는 사람은
아직 화재가 진압되지 않아서 계속 타고 있는 동안에는
자기의 건물에까지 화재가 번지지 않을까 해서 가슴을 졸이다가
다행히 화재가 자기 집까지 번지지 않고 진압되게 되면
그제서야 자기 집이 무사한데 대해 긴 한숨과 함께
벌떡거리던 가슴을 쓸어 내리며
화재가 옆집까지만 태우고 자기 집은 무사한데 대해
안도와 함께 일종의 후련함과 쾌감을 느끼기도 하는데
이 때의 사람들의 표정을 자세히 보면
겉으로는 안됐다는 표정을 하고 상심한 척 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인간의 부드러운 미소와 근엄한 표정 뒤에는
칼날보다 날카로운 悲情과 잔인함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는 사
실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 5 -
당신은 혹시 내 말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그래서 이치에도 맞지 않는 엉터리라고 할는지 몰라도
그러나 화재 현장에 가보면 내 말이 절대 거짓이거나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엉터리가 아니라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화재가 있는 곳이면 어디나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저마다 화재에 관한 말들을 주고받으며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화재를 걱정하고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자기들끼리 히덕거리며 짓까부는 사람들까지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렇다고 해서 화재를 걱정하거나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화재를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보다는
자기들끼리 히덕거리고 까불며 무슨 공연을 관람하는 사람들처럼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화재 현장을 한번이라도 가본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인간의 감추어진 치부를 들추어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의 이중성에서 오는 행위의 서로 다른 두 면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이번에는 우리의 가족이나 친척 친구 들 잘 아는 사람들이
다치거나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있거나 병석에 있어서
위문을 가게되는 경우를 보기로 하자!
우리의 가족이나 친척 혹은 친구나 이웃 등 아는 사람이
불의의 사고를 당해 다치거나 아파서 병원에 입원을 하거나
- 6 -
병석에 있어 병원이나 집으로 환자를 찾아 위문하고
위로를 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
이 경우 우리는 환자에게 갖은 좋은 말과
부드럽고 정다운 말로 희망과 용기를 북돋우고 위로하는데
이 때도 병상의 환자를 위로하고 위안하는 사람의 모든 행위가
전적으로 병상에 있는 환자를 아끼고 위하는데서 나오는
순수한 것이기만 한 것일까?
물론 사람이 가족이나 친척 친구 등 잘 아는 사람이
불의의 사고나 병을 앓아 병석에 있을 때 환자를 찾아서
진심으로 심심한 위로를 하고 위안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서
또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사람이 병석의 환자를 찾아서 위로하고 위안하는 것이
전적으로 환자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에서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환자를 찾아서 위로하고 위안하는 것이
사람의 거짓된 마음이라거나 위선과 가식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인간의 본성인 이중성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사람이 가족이나 친척 이웃 등 아는 사람이나 가까운 사람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건강을 잃고 병석에 있게 되면
환자를 찾아서 위로하고 위안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의 그런 행위의 이면에는 환자를 통해서
언젠가는 자기에게도 닥칠지 모르는 만일의 사태를 상정하고
환자를 위로하고 위안하면서
사실은 자기를 위로하고 자기가 위안 받는 잔인함을
은연중에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것과 같이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하며
불완전함에서 오는 불안과 연약함으로 해서
- 7 -
끈임 없이 누군가로부터 위로와 위안을 받고
사랑과 동정을 구하고자 하는 원초적 본능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으며
다른 사람도 내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할 수 없으며
다른 사람 역시 내 삶을 대신할 수 없다.
내 삶은 오직 나밖에 살 수 없으며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하거나 대체할 수 없으며
나 또한 다른 사람이 삶을 대신하거나 대체할 수 없음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남이 될 수 없고 남의 삶을 대신할 수 없듯이
남 역시 내가 될 수 없고 내 삶을 대신할 수 없는 한계 속에서
그 누구도 내 깊은 마음을 이해하고 알아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람은 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동정을 구하고
마음의 위로와 위안을 기대하지만
사람의 그런 기대와 욕구는 애초부터 충족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은 내가 아닌 남을 통해서 사랑과 동정을 구하고
위로를 받고 위안을 얻고자 하는 기대와 바램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과
남을 통해서 얻어지는 위로와 위안의 한계 때문에
자신의 기대와 욕구가 남을 통해 채워지지 않는 부분을
스스로 채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존재인지라
자기의 행위에 한계가 있으며
보다 많은 사람들의 이목과 관심을 자기에게 집중토록 함으로서
자신의 어떠함을 드러내고 과시함으로 말미암아
- 8 -
일종의 심리적 기대와 충족에서 오는 만족감으로 인해
기쁨과 즐거움의 효율적 제고를 통해서
보다 큰 자기 위로와 위안을 얻고자 하는 지혜를 터득하게 된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 얻어지는 위로와 위안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며
기대와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데서 오는 불만과 욕구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위로하고 위안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자기 혼자보다는
누군가 자기의 위로와 위안에 반향함으로서
그 효과를 증대할 수 있는 대상을 필요로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의식한 세상적 체면과 위신 때문에
이를 공공연하게 나타내지 못하고 은밀하게 그 대상을 찾던 중
가족이나 친척 등 가까운 사람들과 친구 이웃 등 잘 아는 사람이
사고나 질병 등으로 병석에 있으면 찾아가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온갖 위로와 위안을 하게 되는데
환자를 위로하고 위안하는 근저에는
자신은 비록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는지 몰라도
사실은 환자를 위로하고 위안하면서
다른 사람을 통해 채워지지 않는
자기 위로와 위안을 충족코자 하는 인간의 잔인함이
은밀하게 숨어 있는 것이다.
그 밖에도 사람의 행위 하나 하나가 마찬가지여서
하나씩 일일이 그 예를 들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의 사고는 물론이고
불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마지막 남은 한 장의 열차나 고속버스의 승차권을 샀을 경우와
만원 버스나 전동차에서
- 9 -
다른 사람들은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는데
자신은 좌석에 편히 앉아서
득의의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인간의 이중성에서 오는 잔인함이 그대로 묻어나게 된다.
또 치열한 경쟁을 뚫고 친구는 불합격하고 자신은 합격한 경우와
어제까지만 해도 책상을 나란히 하고 같이 근무를 하던 사람이
다른 동료들을 제치고 유일하게 승진하여
커다란 책상 앞에 회전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어제의 동료들을 느긋하게 바라보며 즐길 수 잇는 여유도
운동 경기에서 다른 사람을 제치고 우승하여
트로피를 안고 환호하는 군중들을 향해
여유 있는 웃음을 선사하며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도
사돈이나 이웃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전래의 속설 못지 않
게 인간의 숨겨진 은밀한 잔인함을 드러내는 경우일 것이다.
다만 그런 인간의 보이지 않는 잔인함이
도덕과 윤리라는 이름 때문에 교묘하게 포장되고 감추어져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있을 뿐
그것은 오늘 날 타락한 인간의 비정함과 잔인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승패가 가름되지 않는 경기나
우열이 가려지지 않는 일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관심 하는 것은 오로지 승패와 우열에 있으며
승패와 우열을 가리는 과정이 격렬하고 극적일수록 희열을 느끼
며 가슴 벅찬 감동에 열광한다.
관중으로서 인간은 승자에게만 관심이 있을 뿐
패자에게는 관심이 없으며
열 번 잘 하다가도 한번 잘못하면 돌아보지도 않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아니던가?
- 10 -
그러나 열 번 잘못하다가도 한번 잘하면 영웅이 되어
관중의 우상으로 떠오르는 것이 인간의 심리이다.
늘 승자에게는 관대하면서도 패자에게는 냉정한 인간 사회에서
승자와 패자를 가리고 우열을 다투어야만 하는 경쟁 사회에서
인간은 더불어 나누며 함께 살아 가야할 이웃이 아니라
끊임없이 싸우고 다퉈서 이기지 않으면 도태되어야할
공존이 아닌 독존을 위해
반드시 싸워 이겨야만 하는 적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간이 잔인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은 다 그렇더라도
자신은 절대 잔인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와 같은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지 하나
모든 사람이 타락하기 전의 본래의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인간은 어떤 방법을 통해서도
지금과 같은 이중성에서 오는 겉 다르고 속 다른
이면의 잔인함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나아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찾아 위로하고 위안하고자 한다면
타락하여 더럽혀지고 추악한 우리의 실체를 바로 보고
타락의 산물로 나를 우리와 가르고 나누는 욕심을 버리고
지금 내가 나를 위하고 우리를 위하며
세상을 위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 실천에 옮길 때
우리는 비로소 나와 우리와 세상을 사랑하고 위로하며
내가 아닌 우리로 서로 돕고 나누며 더불어 어우러지는
진정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