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종교 개혁 운동이라는 것은 대사(大赦) 문제로 말미암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등장에서 발단되었다.
마르틴 루터의 초상화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도이칠란트 작센의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마그데부르크에 입학하여 2년 후에는 다시 아이제나흐에 입학하여 졸업하고, 18세에는 에르푸르트 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과 법학을 연구하고 20세에 벌써 학위를 받았다.
1505년 7월 2일 에르푸르트 교외에서 산보하면서 얼마 전에 결투 끝에 죽은 친구를 회상하면서 현세의 무상감을 절감하고 있을 무렵, 폭우가 쏟아지면서 벼락이 치는 바람에 옆에 있던 또 하나의 친구가 졸지에 저 세상으로 가 버리고 말았다. 너무나 황급한 루터는 순간 땅으로 엎어지면서 광부들의 수호 성녀인 성녀 안나를 부르며 이번에 자기 목숨을 구해 주면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하겠다고 소리 질렀다.
성 아우구스티노회의 수사 시절의 루터
그로부터 약 2주일 동안의 준비를 마친 루터는 같은 달 16일 밤 여러 친구들과 고별 연회를 마치고 다음 날,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들어가 2년 동안의 수련을 쌓고 마침내 1507년에는 청빈, 정결(평생 독신), 순명(장상의 명령에 복종)의 3대 서원을 하느님의 대전에 바치고 수도 신부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철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1512년에는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로는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디도서> 등을 강의하였다.
이 때부터 벌써 그는 "사람은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 것이지, 자신의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라는 주장을 마음 속에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의 생각을 세상의 공포할 기회가 왔다.
이른바 면죄부의 진상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이미 말했듯이, 도이칠란트 국내의 대사령 선포를 맡은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성 도미니코회의 테첼을 자기 구역 동부 지방 대사령 반포 선전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영화 <루터>에서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몰래 95개조 논문을 붙이는 루터
루터는 당시 명성이 높던 설교가 테첼 신부가 임명된 것을 보고는 불 같은 시기와 불만을 품게 되었다. 테첼이 비텐부르크 부근에 이르렀을 때, 루터는 이에 반항하여 95개조로 된 논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붙였다. 그 날이 바로 1517년 10월 31일 모든 성인들의 축일 전날이었다. 이 방법은 당시 신학자들이 자기 의사를 표현할 때 쓰던 한 방법으로 관례가 되어 있었다.
이에 테첼은 106조의 반박 논문을 성당 문에 붙이고 루터에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비텐베르크 대학생들은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고 그대로 불살라 버렸다.
루터는 여전히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선전하고 있었다. 이에 테첼 측의 신학자들도 궐기하여 드디어 일대 논전이 벌어졌다. 1518년 4월 하이텔베르크 수도원의 공개 토론회에서 루터는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부패되었으므로 자유 의지란 없다고 주장하여 옛 동지를 잃기도 하고 새 동지를 얻기도 하였다.
루터가 처음부터 교황에게까지 반역하려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교황에게 충심으로 복종한다고 언명하였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Leo X)는 카예타누스 추기경을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고 루터의 그릇된 의견을 바로잡아 주도록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 다음에는 또 도이칠란트인 밀티츨을 보내어 루터의 반성을 요구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태는 악화 일로를 걷게 되었다. 1520년 6월 15일, 교황 레오 10세는 드디어 <엑수르제(Exsurge)>라는 교서를 내려,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밝혀 설명한 뒤 60일 안으로 반성하기를 루터에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같은 해 12월 10일, 교황의 교서를 사람들 앞에서 불살라 버림으로써, 이듬해 1월 3일에 마침내 파문당하였다.
교황의 교서를 불태우는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
이 때부터 루터는 공공연히 교황을 배척하고 성세 성사와 성체 성사 외의 다른 성사는 파기하고, 자기의 3대 원리를 역설하여 나갔다.
루터의 3대 원리는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부패되었으므로 자유가 없다.
2.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받는 것이고, 인간의 선행이나 고행 등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3. 신앙의 규범은 성서 뿐이다.
1525년 6월 13일에는 하느님께 한 공식 서원을 깨뜨리고 당돌하게도 수사의 몸으로 26세의 젊은 수녀 카테리나와의 결혼 생활을 시작하였다. 루터의 동지였던 에라스무스는 이것을 보고 "비극같은 개혁 운동은 희극(결혼)으로 끝나 버렸다." 라고 조롱하였다.
루터의 관
루터주의는 불길처럼 퍼져 이제 분열은 아주 그 결정 단계에 이르렀다. 그 후 20년 동안 동지와 제자들의 끊임없는 분쟁을 지켜보면서 1546년 6월 28일, 어둠에 가득 쌓인 가슴을 안고 별세하였다.
그럼 이제 루터주의가 이처럼 북유럽 일대를 휩쓴 원인을 살펴 보겠다.
중세의 그리스도교 세계관은 인문주의(르네상스)의 영향으로 세속화되어 버렸다. 그 여파가 교황청의 문턱을 넘어들자 교황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 바 없지 않았고, 특히 북유럽 일대의 주교좌에는 악폐가 거듭 쌓이기에 이르렀다. 주교 선정에 있어서도 직접 간접의 세속권 간섭으로 부적임자도 많이 섞이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성직의 엄숙성을 망각하고 세속인으로 자처하는 자도 있고 보니, 그 사목 성직에 충실할 리 없었고, 따라서 다른 사제들에게 미치는 악 영향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교무금과 성례식 사례비로 겨우 살아나감으로써 성직자로서의 체면 유지도 못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천박한 자들도 있어서 결국에는 민중의 경멸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이에 따라 트리엔티노 공의회에서는 슬기로운 대책을 세웠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여러 수도원 중에는 신자들의 봉헌금과 국왕이나 부호들의 보조가 모여져 부유하게 되자, 수도 정신이 이완된 곳도 여기저기 있게 되었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의 쇠약과 로마법의 채용으로 지방 제후들의 세력이 강대하여짐에 따라, 그들은 교회까지 자기들의 세력권 내에 넣으려는 음흉한 야심을 품기에 이르렀다. 또 대부분의 제후들은 막대한 부채에 시달리던 차였으므로 자연히 성당 및 수도회의 재산에 침을 흘리게 되었고,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에 눌려 허덕이던 세상이었다.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운 상태에서 서민층에는 경박한 인문주의의 선전 책자들이 유포되어 민심은 나날이 해이해지고 악화되어 드디어는 교회를 등지기에 이르렀다.
사태가 이러하니 혁신의 기운은 이미 익었으나 교리를 의심하거나 가톨릭 교회와의 절연이란 꿈도 꾸지 못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십자가의 길 기도, 로사리오 기도와 같은 근행(勤行)도 널리 보급되어 신앙 생활에 엄숙 경건한 면도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이 16세기는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 요한 데 데오, 성 베드로 카니시오, 성 파스칼, 성 필립보 네리, 성 예로니모 에밀리아노, 성녀 데레사, 성 베드로 알칸다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십자가의 성 요한,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 성 알로이시오 곤차가 등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위대한 성인들이 많이 나온 세기이기도 하다.
어쨌든 형세가 급박한 이 때, 대사 선전원들 중에는 탈선적인 언동으로 대중의 반감을 산 자가 적지 않았다. 바로 이것을 노린 루터는 드디어 횃불을 들고 일어났다. 그 추종자들은 각계 각층이 망라되었다. 수도원을 뛰쳐나가는 수도자가 있는가 하면, 루터를 따라 결혼하는 성직자들도 많았다. 물론 그들은 성직의 엄숙성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자들이다.
루터는 도이칠란트 내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저술가인 동시에, 웅변으로 그 명성이 높았던 만큼 신자층에서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도이칠란트 연방 제후들 중에서 종교적 동기라기 보다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동기에서 그를 지지하고 비호하는 자들이 많았다. 이쯤 되면 대중은 으레 그를 추종하게 되는 법이다.
어떤 이유로든 교회에 불평이 있는 사람들, 어려운 선행은 필요 없고 그냥 믿기만 하면 구원된다는 달콤한 선전에 비상한 매력을 느낀 무리들, 교의야 어찌되었건 도이칠란트인들의 그리스도교를 창설해야 한다는 국수주의적 충동에 날뛰던 자들, 오랫동안 간절히 바라던 교회의 혁신이 이제 곧 이루어진다는 속단으로 경거망동하던 자들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이처럼 여러 해 동안의 혼란 상태를 겪은 뒤 드디어 커다란 분열은 결정적으로 형성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원인은 종교적이라기보다 정치적 경제적인 것이었다.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은 종교 분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종교 개혁의 종교적 요소가 현대적 견지에서 과대 평과되어 왔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도이칠란트 제후들이 루터주의를 강행시킨 데 있어서 그들의 이해 관계를 발견하지 못하였더라면 루터는 분명 신비주의의 한 지도자에 불과하였을 것이다"(Britanica Encycl., V.23, p.4~11)
프로테스탄트 사학자 찰스 리어도
"루터의 반역 동기는 원인(遠因)이든 근인(近因)이든 모두 심령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아주 세속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 개혁에 부수되는 종교적 변화라는 것은 간과하여도 무방하다. 실상 종교 개혁의 목적은 종교적 개혁에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증언하고 있다(Cambridge Modern History, V. I., p.653).
이것은 일명 하느님을 섬기고 구원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이 거듭 숙고해야 할 말들이다.
어떤우연한 작은 사건에 내재된 미래의 큰 파장은 예측할 수 없다. 그리고 强은 弱을 大는 小를이긴다. 이것이 기독교의 근본이다.
루터 이후에 나타난 프로테스탄트 지도자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했던 것은 요한 칼빈 (1509-1564)이었다. 프랑스 태생의 칼빈은 <기독교 강요>라는 책을 지어냈는데, 이 책은 프로테스탄트 교리를 훌륭한 솜씨로 집대성한 것이다. 스위스의 한 도시인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운동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스위스의 다른 도시나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에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 하고 있었다. 그는 이지적이기는 했으나 자존심이 지나치게 강하고 너그럽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윤리에 대한 자신의 해석과 다른 어떤 해석도 인정하려고 들지 않았다. 제네바에서만 해도 칼빈의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침묵을 강요당하거나 추방당해 야만 했다.
16세기 이후로 "양심의 자유"를 둘러싼 본격적 논쟁이 여러 번 있었지만, 칼빈과 카스텔리오의 논쟁이 그 첫 번째였다. 세바스찬 카스텔리오(1515-1563)는 칼빈의 옛 동지인데, 제네바의 개혁자가 채택한 무자비한 비관용 정책을 신랄하게 공격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세르베투스 처형 문제 때문이었다. 이 불운한 스페인인 신학자는 칼빈의 선동을 받고 들고일어난 제네바 시민의 손에 잡히어 처형당했던 것이다.
미카엘 세르베투스의 그리스드교 이해는 매우 급진적인 것이었다. 그는 나이 스무 살 때에 <삼위일체 교리의 잘못에 대하여>라는 책을 독일에서 출판한 바 있다. 사상 최초의 유니태리언교도(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그리스드교의 한 교파)라고 할 수 있는 세르베투스는 이 책에서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비판했다. 그런데 삼위일체 교리란 하느님은 세위(位. persona), 즉, 성부.성자. 성신으로 존재하신다는 신앙이다. 카톨릭이건 프로테스탄테이건 , 이 옛 교리를 당시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도 믿고 있다.
그들이 볼 때 이 교리야말로 그리스드교의 가장 근원적이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교리의 하나인 것이다. 만약에 이 교리가 깨진다면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워서 인간을 구원한다는 그리스드교의 기본 신앙이 와르르 무너진다고 당시의 그리스도인은 생각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삼위일체 교리라는 것은 성경에 아무런 근거를 두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모든 교리는 성경이라는 권위의 뒷받침을 받고 있어야 한다는 프로테스탄트 원리와 모순된다고 그는 주장했던 것이다.
이 책이 출판되자 비난의 소리가 빗발치듯했다. 그래서 세르베트스는 이름을 바꾸고 숨어살지 않으면 안되었다. 프랑스에 정착하고 의학을 공부한 다음 의사 생활을 하며 지냈는데, 겉으로는 독실한 카톨릭인처럼 행세했다.
그러나 그는 남모르게 전통적인 그리스도론, 유아세례, 교회론을 공박하는 원고를 집필하는 한편, 동물을 해부하여 혈액순환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가 154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요한 칼빈을 설득하여 자기의 종교적 견해에 동조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칼빈에게 편지를 여러 번 띄우기도 하고, 또 칼빈이 지은 <기독교 강요>에 대한 장문의 비평을 써 보내기도 했다.
칼빈이 볼 때 세르베투스의 이와 같은 태도는 한없이 건방진 것이었다. 머리끝까지 화가난 칼빈은 1547년경부터 이 스페인 출신의 이단자를 기어코 죽여버리기로 결심했다. 동지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서 칼빈은 이렇게 쓰고 있다. "만약에 그가 이 곳에 온다면, 그리고 내가 무슨 권위를 가졌다면 그를 결코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겠소."
그러던 중 1553년에 이르러 세르베투스는 마침내 정체가 탄로나서 남프랑스 카톨릭 종교재판소의 명령으로 체포당했다. 그런데 한 가지 신기한 것은 그의 체포가 카톨릭 신앙에 반대하는 측의 밀고로 이루어 졌다는 사실이다. 칼빈 자신과 그의 친구 한 사람이 밀고에 관련되어 있다. 세르베투스는 종교재판에서 처형이 선고되고 옥중에서 처형의 날을 기다리던 중, 용하게도 탈옥에 성공 했다. 그러나 탈옥 후 그가 취한 행동은 기괴한 것이었다. 무슨 생각에서 그랬는지, 세르베투스는 제네바에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칼빈의 설교를 직접 듣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사람들에게 들키어 또 다시 투옥 당하고 말았다. 이제 칼빈은 그의 소원을 풀게 되었다.
스위스의 여러 도시에서 활동하던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도 기꺼이 재판석에 앉고서는, 만장 일치로 세르베투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가엾은 세르베투스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 때문에 목숨을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처형의 날까지 그가 보내야 했던 3개월의 옥중 생활은 처참한 것이었다. 마침내 1553년 10월 27 일 그는 성문밖에 마련된 말뚝에 묶인 다음 화형을 당했다. 세르베투스의 처형 소식이 온 유럽에 퍼지자 각지의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교인은 똑같이 만족하게 생각했다.
칼빈에게는 이곳저곳으로부터 축하하는 글월이 날아들었다. 칼빈은 그 이듬해 초에 <정통신앙 옹호론>이라는 책을 간행했는데, 그 속에는 종교적 탄압의 정당성을 밝힌 대목이 있다. 위정자의 책임을 논하면서 하느님의 영광이 이단과 신성모독(神聖冒瀆)이라는 불법 때문에 더럽혀지는 일이 없도록 잘 살펴야 한다고 그는 논술하고 있다.
종교탄압의 목적은 불신자를 죽음의 위협으로 회개시키고자 하는 데 있다기보다는, 하느님의 위엄을 모독한 자에게 벌을 주는데 있다고도 했다. 칼빈의 글을 직접 인용해보자.
"이단을 처형한다는 일은 결코 그리스교도적 사랑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된다. 일반 신자가 이단의 거짓 가르침에 물드는 것을 막아주는 구실을 하기 때문에 그것은 사랑의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선한)목적을 위해서 는 한 도시의 주민 전부를 없앨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지 않거나,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현대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제네바의 개혁자는 이미 전통으로 굳어진 하나의 원칙을 재천명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는 것 을 알아야 한다.
당시 사람 치고 그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돌이켜 볼 때 종교문제와 관련하여 죽은 사람이 16세기만 해도 수만 명에 달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 한 것이 1572년에 일어난 성(聖)바돌로메 축제일의 대학살이다. 이날 프랑스의 카톨릭 열광파는 들고일어나 프로테스탄트 2만명을 때려 죽였다. 이 소식을 듣고 교황은 신바람이나서 특별 감사 미사를 드렸을 뿐 아니라 기념 메달을 제작, 배부하기까지 했다.
[초개그]루터에의한 개신교 탄생배경
마르틴 루터의 초상화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도이칠란트 작센의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마그데부르크에 입학하여 2년 후에는 다시 아이제나흐에 입학하여 졸업하고, 18세에는 에르푸르트 대학교에 입학하여 철학과 법학을 연구하고 20세에 벌써 학위를 받았다. 1505년 7월 2일 에르푸르트 교외에서 산보하면서 얼마 전에 결투 끝에 죽은 친구를 회상하면서 현세의 무상감을 절감하고 있을 무렵, 폭우가 쏟아지면서 벼락이 치는 바람에 옆에 있던 또 하나의 친구가 졸지에 저 세상으로 가 버리고 말았다. 너무나 황급한 루터는 순간 땅으로 엎어지면서 광부들의 수호 성녀인 성녀 안나를 부르며 이번에 자기 목숨을 구해 주면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하겠다고 소리 질렀다.
성 아우구스티노회의 수사 시절의 루터 그로부터 약 2주일 동안의 준비를 마친 루터는 같은 달 16일 밤 여러 친구들과 고별 연회를 마치고 다음 날,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들어가 2년 동안의 수련을 쌓고 마침내 1507년에는 청빈, 정결(평생 독신), 순명(장상의 명령에 복종)의 3대 서원을 하느님의 대전에 바치고 수도 신부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철학 교수로 임명되었고, 1512년에는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로는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디도서> 등을 강의하였다. 이 때부터 벌써 그는 "사람은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 것이지, 자신의 선행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라는 주장을 마음 속에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의 생각을 세상의 공포할 기회가 왔다. 이른바 면죄부의 진상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이미 말했듯이, 도이칠란트 국내의 대사령 선포를 맡은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성 도미니코회의 테첼을 자기 구역 동부 지방 대사령 반포 선전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영화 <루터>에서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몰래 95개조 논문을 붙이는 루터 루터는 당시 명성이 높던 설교가 테첼 신부가 임명된 것을 보고는 불 같은 시기와 불만을 품게 되었다. 테첼이 비텐부르크 부근에 이르렀을 때, 루터는 이에 반항하여 95개조로 된 논문을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붙였다. 그 날이 바로 1517년 10월 31일 모든 성인들의 축일 전날이었다. 이 방법은 당시 신학자들이 자기 의사를 표현할 때 쓰던 한 방법으로 관례가 되어 있었다. 이에 테첼은 106조의 반박 논문을 성당 문에 붙이고 루터에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이것을 비텐베르크 대학생들은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고 그대로 불살라 버렸다. 루터는 여전히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선전하고 있었다. 이에 테첼 측의 신학자들도 궐기하여 드디어 일대 논전이 벌어졌다. 1518년 4월 하이텔베르크 수도원의 공개 토론회에서 루터는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부패되었으므로 자유 의지란 없다고 주장하여 옛 동지를 잃기도 하고 새 동지를 얻기도 하였다. 루터가 처음부터 교황에게까지 반역하려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교황에게 충심으로 복종한다고 언명하였다. 당시 교황 레오 10세(Leo X)는 카예타누스 추기경을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고 루터의 그릇된 의견을 바로잡아 주도록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 다음에는 또 도이칠란트인 밀티츨을 보내어 루터의 반성을 요구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태는 악화 일로를 걷게 되었다. 1520년 6월 15일, 교황 레오 10세는 드디어 <엑수르제(Exsurge)>라는 교서를 내려,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밝혀 설명한 뒤 60일 안으로 반성하기를 루터에게 요구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같은 해 12월 10일, 교황의 교서를 사람들 앞에서 불살라 버림으로써, 이듬해 1월 3일에 마침내 파문당하였다.
교황의 교서를 불태우는 루터와 그의 추종자들 이 때부터 루터는 공공연히 교황을 배척하고 성세 성사와 성체 성사 외의 다른 성사는 파기하고, 자기의 3대 원리를 역설하여 나갔다. 루터의 3대 원리는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원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부패되었으므로 자유가 없다. 2. 구원은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받는 것이고, 인간의 선행이나 고행 등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3. 신앙의 규범은 성서 뿐이다. 1525년 6월 13일에는 하느님께 한 공식 서원을 깨뜨리고 당돌하게도 수사의 몸으로 26세의 젊은 수녀 카테리나와의 결혼 생활을 시작하였다. 루터의 동지였던 에라스무스는 이것을 보고 "비극같은 개혁 운동은 희극(결혼)으로 끝나 버렸다." 라고 조롱하였다.
루터의 관 루터주의는 불길처럼 퍼져 이제 분열은 아주 그 결정 단계에 이르렀다. 그 후 20년 동안 동지와 제자들의 끊임없는 분쟁을 지켜보면서 1546년 6월 28일, 어둠에 가득 쌓인 가슴을 안고 별세하였다. 그럼 이제 루터주의가 이처럼 북유럽 일대를 휩쓴 원인을 살펴 보겠다. 중세의 그리스도교 세계관은 인문주의(르네상스)의 영향으로 세속화되어 버렸다. 그 여파가 교황청의 문턱을 넘어들자 교황의 위신이 땅에 떨어진 바 없지 않았고, 특히 북유럽 일대의 주교좌에는 악폐가 거듭 쌓이기에 이르렀다. 주교 선정에 있어서도 직접 간접의 세속권 간섭으로 부적임자도 많이 섞이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성직의 엄숙성을 망각하고 세속인으로 자처하는 자도 있고 보니, 그 사목 성직에 충실할 리 없었고, 따라서 다른 사제들에게 미치는 악 영향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교무금과 성례식 사례비로 겨우 살아나감으로써 성직자로서의 체면 유지도 못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천박한 자들도 있어서 결국에는 민중의 경멸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이에 따라 트리엔티노 공의회에서는 슬기로운 대책을 세웠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여러 수도원 중에는 신자들의 봉헌금과 국왕이나 부호들의 보조가 모여져 부유하게 되자, 수도 정신이 이완된 곳도 여기저기 있게 되었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의 쇠약과 로마법의 채용으로 지방 제후들의 세력이 강대하여짐에 따라, 그들은 교회까지 자기들의 세력권 내에 넣으려는 음흉한 야심을 품기에 이르렀다. 또 대부분의 제후들은 막대한 부채에 시달리던 차였으므로 자연히 성당 및 수도회의 재산에 침을 흘리게 되었고,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에 눌려 허덕이던 세상이었다.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운 상태에서 서민층에는 경박한 인문주의의 선전 책자들이 유포되어 민심은 나날이 해이해지고 악화되어 드디어는 교회를 등지기에 이르렀다. 사태가 이러하니 혁신의 기운은 이미 익었으나 교리를 의심하거나 가톨릭 교회와의 절연이란 꿈도 꾸지 못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십자가의 길 기도, 로사리오 기도와 같은 근행(勤行)도 널리 보급되어 신앙 생활에 엄숙 경건한 면도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이 16세기는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 요한 데 데오, 성 베드로 카니시오, 성 파스칼, 성 필립보 네리, 성 예로니모 에밀리아노, 성녀 데레사, 성 베드로 알칸다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십자가의 성 요한, 성 프란치스코 보르자, 성 알로이시오 곤차가 등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위대한 성인들이 많이 나온 세기이기도 하다. 어쨌든 형세가 급박한 이 때, 대사 선전원들 중에는 탈선적인 언동으로 대중의 반감을 산 자가 적지 않았다. 바로 이것을 노린 루터는 드디어 횃불을 들고 일어났다. 그 추종자들은 각계 각층이 망라되었다. 수도원을 뛰쳐나가는 수도자가 있는가 하면, 루터를 따라 결혼하는 성직자들도 많았다. 물론 그들은 성직의 엄숙성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자들이다. 루터는 도이칠란트 내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저술가인 동시에, 웅변으로 그 명성이 높았던 만큼 신자층에서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도이칠란트 연방 제후들 중에서 종교적 동기라기 보다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동기에서 그를 지지하고 비호하는 자들이 많았다. 이쯤 되면 대중은 으레 그를 추종하게 되는 법이다. 어떤 이유로든 교회에 불평이 있는 사람들, 어려운 선행은 필요 없고 그냥 믿기만 하면 구원된다는 달콤한 선전에 비상한 매력을 느낀 무리들, 교의야 어찌되었건 도이칠란트인들의 그리스도교를 창설해야 한다는 국수주의적 충동에 날뛰던 자들, 오랫동안 간절히 바라던 교회의 혁신이 이제 곧 이루어진다는 속단으로 경거망동하던 자들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이처럼 여러 해 동안의 혼란 상태를 겪은 뒤 드디어 커다란 분열은 결정적으로 형성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원인은 종교적이라기보다 정치적 경제적인 것이었다.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은 종교 분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종교 개혁의 종교적 요소가 현대적 견지에서 과대 평과되어 왔다는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도이칠란트 제후들이 루터주의를 강행시킨 데 있어서 그들의 이해 관계를 발견하지 못하였더라면 루터는 분명 신비주의의 한 지도자에 불과하였을 것이다"(Britanica Encycl., V.23, p.4~11) 프로테스탄트 사학자 찰스 리어도 "루터의 반역 동기는 원인(遠因)이든 근인(近因)이든 모두 심령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아주 세속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 개혁에 부수되는 종교적 변화라는 것은 간과하여도 무방하다. 실상 종교 개혁의 목적은 종교적 개혁에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증언하고 있다(Cambridge Modern History, V. I., p.653). 이것은 일명 하느님을 섬기고 구원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이 거듭 숙고해야 할 말들이다.
어떤우연한 작은 사건에 내재된 미래의 큰 파장은 예측할 수 없다. 그리고 强은 弱을 大는 小를이긴다. 이것이 기독교의 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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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개신교인들이 그리 주절되는 칼빈에 대한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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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이후에 나타난 프로테스탄트 지도자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했던 것은 요한 칼빈 (1509-1564)이었다. 프랑스 태생의 칼빈은 <기독교 강요>라는 책을 지어냈는데, 이 책은 프로테스탄트 교리를 훌륭한 솜씨로 집대성한 것이다. 스위스의 한 도시인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운동을 주도했을 뿐 아니라, 스위스의 다른 도시나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에까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 하고 있었다. 그는 이지적이기는 했으나 자존심이 지나치게 강하고 너그럽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윤리에 대한 자신의 해석과 다른 어떤 해석도 인정하려고 들지 않았다. 제네바에서만 해도 칼빈의 해석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침묵을 강요당하거나 추방당해 야만 했다.
16세기 이후로 "양심의 자유"를 둘러싼 본격적 논쟁이 여러 번 있었지만, 칼빈과 카스텔리오의 논쟁이 그 첫 번째였다. 세바스찬 카스텔리오(1515-1563)는 칼빈의 옛 동지인데, 제네바의 개혁자가 채택한 무자비한 비관용 정책을 신랄하게 공격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세르베투스 처형 문제 때문이었다. 이 불운한 스페인인 신학자는 칼빈의 선동을 받고 들고일어난 제네바 시민의 손에 잡히어 처형당했던 것이다.
미카엘 세르베투스의 그리스드교 이해는 매우 급진적인 것이었다. 그는 나이 스무 살 때에 <삼위일체 교리의 잘못에 대하여>라는 책을 독일에서 출판한 바 있다. 사상 최초의 유니태리언교도(삼위일체를 부인하는 그리스드교의 한 교파)라고 할 수 있는 세르베투스는 이 책에서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를 비판했다. 그런데 삼위일체 교리란 하느님은 세위(位. persona), 즉, 성부.성자. 성신으로 존재하신다는 신앙이다. 카톨릭이건 프로테스탄테이건 , 이 옛 교리를 당시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도 믿고 있다.
그들이 볼 때 이 교리야말로 그리스드교의 가장 근원적이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교리의 하나인 것이다. 만약에 이 교리가 깨진다면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워서 인간을 구원한다는 그리스드교의 기본 신앙이 와르르 무너진다고 당시의 그리스도인은 생각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삼위일체 교리라는 것은 성경에 아무런 근거를 두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모든 교리는 성경이라는 권위의 뒷받침을 받고 있어야 한다는 프로테스탄트 원리와 모순된다고 그는 주장했던 것이다.
이 책이 출판되자 비난의 소리가 빗발치듯했다. 그래서 세르베트스는 이름을 바꾸고 숨어살지 않으면 안되었다. 프랑스에 정착하고 의학을 공부한 다음 의사 생활을 하며 지냈는데, 겉으로는 독실한 카톨릭인처럼 행세했다.
그러나 그는 남모르게 전통적인 그리스도론, 유아세례, 교회론을 공박하는 원고를 집필하는 한편, 동물을 해부하여 혈액순환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가 154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요한 칼빈을 설득하여 자기의 종교적 견해에 동조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칼빈에게 편지를 여러 번 띄우기도 하고, 또 칼빈이 지은 <기독교 강요>에 대한 장문의 비평을 써 보내기도 했다.
칼빈이 볼 때 세르베투스의 이와 같은 태도는 한없이 건방진 것이었다. 머리끝까지 화가난 칼빈은 1547년경부터 이 스페인 출신의 이단자를 기어코 죽여버리기로 결심했다. 동지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서 칼빈은 이렇게 쓰고 있다. "만약에 그가 이 곳에 온다면, 그리고 내가 무슨 권위를 가졌다면 그를 결코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겠소."
그러던 중 1553년에 이르러 세르베투스는 마침내 정체가 탄로나서 남프랑스 카톨릭 종교재판소의 명령으로 체포당했다. 그런데 한 가지 신기한 것은 그의 체포가 카톨릭 신앙에 반대하는 측의 밀고로 이루어 졌다는 사실이다. 칼빈 자신과 그의 친구 한 사람이 밀고에 관련되어 있다.
세르베투스는 종교재판에서 처형이 선고되고 옥중에서 처형의 날을 기다리던 중, 용하게도 탈옥에 성공 했다. 그러나 탈옥 후 그가 취한 행동은 기괴한 것이었다. 무슨 생각에서 그랬는지, 세르베투스는 제네바에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칼빈의 설교를 직접 듣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사람들에게 들키어 또 다시 투옥 당하고 말았다. 이제 칼빈은 그의 소원을 풀게 되었다.
스위스의 여러 도시에서 활동하던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도 기꺼이 재판석에 앉고서는, 만장 일치로 세르베투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가엾은 세르베투스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 때문에 목숨을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처형의 날까지 그가 보내야 했던 3개월의 옥중 생활은 처참한 것이었다. 마침내 1553년 10월 27 일 그는 성문밖에 마련된 말뚝에 묶인 다음 화형을 당했다. 세르베투스의 처형 소식이 온 유럽에 퍼지자 각지의 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교인은 똑같이 만족하게 생각했다.
칼빈에게는 이곳저곳으로부터 축하하는 글월이 날아들었다. 칼빈은 그 이듬해 초에 <정통신앙 옹호론>이라는 책을 간행했는데, 그 속에는 종교적 탄압의 정당성을 밝힌 대목이 있다. 위정자의 책임을 논하면서 하느님의 영광이 이단과 신성모독(神聖冒瀆)이라는 불법 때문에 더럽혀지는 일이 없도록 잘 살펴야 한다고 그는 논술하고 있다.
종교탄압의 목적은 불신자를 죽음의 위협으로 회개시키고자 하는 데 있다기보다는, 하느님의 위엄을 모독한 자에게 벌을 주는데 있다고도 했다. 칼빈의 글을 직접 인용해보자.
"이단을 처형한다는 일은 결코 그리스교도적 사랑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된다. 일반 신자가 이단의 거짓 가르침에 물드는 것을 막아주는 구실을 하기 때문에 그것은 사랑의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선한)목적을 위해서 는 한 도시의 주민 전부를 없앨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지 않거나,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현대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제네바의 개혁자는 이미 전통으로 굳어진 하나의 원칙을 재천명하고 있는 데 불과하다는 것 을 알아야 한다.
당시 사람 치고 그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돌이켜 볼 때 종교문제와 관련하여 죽은 사람이 16세기만 해도 수만 명에 달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 한 것이 1572년에 일어난 성(聖)바돌로메 축제일의 대학살이다. 이날 프랑스의 카톨릭 열광파는 들고일어나 프로테스탄트 2만명을 때려 죽였다. 이 소식을 듣고 교황은 신바람이나서 특별 감사 미사를 드렸을 뿐 아니라 기념 메달을 제작, 배부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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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에게 일제시대 개신교가 한국인에게 행한 모든 악행 자료가 많습니다 필요하시면 올려드리겟습니다
한국개신교가 독립운동을했다구요? 한창 조국을위해 독립운동을하는 훌륭하신 분들을 강제로 개신교에
가입하게하고 모두 고발해서 죽인게 독립운동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