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수녀가 된다면..엄마 아빠가 많이 슬퍼하겠죠?

아이린2006.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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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한 살 여잡니다.

아이디가 드러나지 않는 곳이 이곳뿐인지라.. 부득이 여기에 글을 남깁니다.

제 아이디를 아는 사람이 이 글을 보면..정말 곤란할테니까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이야기..

 

수녀가 될 생각을 했습니다.

속세와의 연을 끊고 싶다는 생각에..

공포에 가까운 우울증에 끊임없이 시달려..이젠 미쳐버릴 것 같습니다.

 

저는 열둘 어린 나이에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그 나이 착한 맘에 도와주고 싶어 잠깐 따라갔다가

내 마음 한 구석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말았습니다.

 

이제 9년이 되어가는 일인데..

그거..안 잊혀지더군요..

지금도 일주일에 두세번은..악몽에 시달리기가 일쑤입니다.

 

저는 그 어린 나이에, '죽고 싶다' 도 아닌, '어떻게 죽어 버리나' 만 궁리했습니다.

약을 먹을까..청산가리는 어디서 구하지..한강에서 뛰어내릴까..옥상에서 뛰어내릴까..목을 맬까..칼로 찔러야 하나.. 그 순수했던 열두 살 나이에 저는.. 그런 생각으로 한동안 절망의 바다에서 헤엄을 쳤습니다..

 

저 스물한 살 이때껏 연애 한 번 못해봤습니다.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도 친구, 직장 동료, 후배, 선배로서.. 생물학적으로 XY염색체를 가진 세상에 반이라는 남자라는 종을 수없이 많이 만나겠지만,

저는 어느 누구도 제 인생을 같이 걸어갈 사람으로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인정하는 현실의 남자는.. 세상에서 제일 자랑스러운 아버지와.. 귀염둥이 막내동생 뿐입니다.

 

하지만 저도 여자인데, 왜 연애에 대한 환상이 없겠습니까.

남들처럼..머리 쓰다듬어 주고, 뺨 살짝 꼬집어 주며 따뜻하게 안아 줄 남자친구..그런 거 하나 있음 좋겠다.. 그런 생각이..안 들리가 없지요..

하지만 그에 앞서..저는..

XY염색체를 가진 남자라는 종이..두렵습니다.

네, 또래 남자친구들과 활달하게 어울려 잘 노는 발랄한 또래 친구들, 왜 부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저는 두렵습니다.. 저는 스스로 '그들' 과 일정 간격을 원치 않아도 긋게 됩니다.

남자라는 종 자체가 저는 두렵습니다. 무섭습니다.

 

제가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만화책, 소설책,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들을 보고 '야 멋있다' 말할 수 있는 건,

그들이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를 절대 '건드릴 수 없는' 가상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혹시 주위에 저런 사람이 내 남자친구였음 좋겠다 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 멋져 보이는 사람은..내 머릿속에서만..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사람과 실제로는 어떠한 교류도 할 수가 없습니다.

 

 

가끔씩 한가할 때, 생각에 잠길 시간이 있을 때마다 공포에 가까운 우울함이 나를 할퀴고 지나갑니다.

바쁜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시험공부든 뭐든 몰두할 게 있으면, 그 참혹한 상처를 마음 한구석에 조용히 둘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저는 한가한 것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가끔 떠오르면.. 크게 울지도 못하고..내 방안에서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조용히 눈물만 흘리는 정도로 내 상처를 끌어안습니다..

이런 걸..어떻게 부모님에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 당한 것만으로도 이미 부모님께 충분히 불효했습니다..

어떻게 더 이상 불효를 할 수 있겠습니까..

혹여 누구에게라도, 베프에게라도 털어놓고 이야기해 보고 싶었지만, 아시죠? 이런 얘기..아무한테도 할 만한 얘기가 못 된다는 거..

 

그 일 후였는지.. 저는 꽤 비뚤어진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나 자신이 가장 소중한, 극도로 이기적일지도 모르는 사람이지만..저를 사랑하는 법을 너무 오래 전에 잊어버렸습니다..

나 자신이 가장 소중해도..어떻게 나를 아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악마 같은 기억이 나를 갈기갈기 찢어놓을 때면..나는 저주합니다..

열둘 어린 아이를 건드린, 이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 저주받은 사탄의 자식과..

그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다는 증오심과..

그리고 너무 순수하고 착했던 어린 나의 어리석음과..

길에서 그를 맞닥뜨린 나의 참혹한 운명과..

지금도 상처를 끌어안고 있는 나의 한심함과..

그 끔찍한 기억이 휘말려 있을 때는, 혼자 엉엉 울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데도,

차마 그러지도 못하는 나, 자살할 용기도 없었던 나를 저주합니다..

 

매일 이렇게 시달렸다면 벌써 예전에 미쳐버렸겠지만, 다행히도 어느 날은 가슴에 조용히 묻어둘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그 무서운 트라우마에 시달릴 때마다, 극도의 증오심과 공포와 우울함에 시달릴 때마다, 속세와 연을 끊고 수녀가 된다면 괜찮아질까.. 하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면 엄마 아버지 생각이 나는 거예요.

내 앞에서 절대 내색하지 않고 나를 감싸준 엄마가 많이 슬퍼할 것 같아서..그리고..나 못지 않게 가슴이 아프셨을텐데도, 패닉에 빠져 있던 열두 살의 내게 '잊어버려', 그렇게 따뜻하게 말해주신..자랑스러운 아버지도.. 슬퍼하실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도 어느 정도 털어놓고 나니..속이 후련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 죽을 용기 같은 건 없습니다.

하지만..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아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