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십일조 비판이야기입니다^^

김현갑2007.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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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icide : 안티가 말하는 말라기 십일조 강해와 대안(수정) [5] 11374 | 2007-03-29 추천 : 0 / 신고 : 0 | 조회 : 47  | 스크랩 : 0 말라기에 나타난 십일조(말 3:6-12)

한국의 개신교 강단에서 선포되는 십일조에 관한 설교에서 가장 사랑을 받는 성경 본문이다.

여기에서 십일조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구체적인 행동 가운데 하나이며.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규정짓는 것을 볼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훔치면 되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의 것을 훔치고서도"

'우리가 주님의 무엇을 훔쳤습니까?'

하고 되묻는구나.

"십일조와 헌물이 바로 그것이 아니냐!" (8절).


교회 지도자들은 십일조을 내지 않는 이유을 범법행위라 아래처럼 규정한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것이 범죄 행위에 해당되는 까닭은 첫째,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인간은 단지 이것을 위탁받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둘째, 10분 1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인간은 나눔의 최소화를 실천하게 되는데 이것은 물질소유에 대한 애착을 버리는 훈련의 기본단계이다. 이 훈련을 통하여 인간이 물질의 종으로 타락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사랑의 하나님의 뜻을 위반한 것이다. 하나님은 십일조의 운용을 통하여 복지 사회를 이루기 위한 소득의 재분배를 계획하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십일조의 규례를 지키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인위적으로 파괴한 것이다.


반박

이는 엄연한 자기들의 변명이다. 이 구절을 의식이 있는 자는 똑바로 보라.

잠시 이시대을 이해하는 도움을 주고자 한다.

(B.C..458년)에 있었던 제2차 포로 귀환이 이루어진 직후인 B.C.450년경에 사건이다. 당시의 상황은 제1차포로 귀환 민들이 스룹바벨 성전을 건축하며 이제는 거룩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할 것이라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서가 기록할 당시까지 70여년이 지났으나 오히려 이방민들의 침략으로 고통만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성전봉헌(스6:16-22절)할 때 가졌던 감격이 사라지면서 오히려 성전 중심의 여호와 신앙은 사라지고 거짓된 십일조와(말3:6-12절) 거짓된 제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었다.


즉 백성들은 외세 침략이라는 외형적 피폐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제사장들이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기보다는 오히려 각종 이권문제(느13:4,5절)에 관여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들의 생활 문제가 있는 정상적인 십일조 생활을 잘못 가르치고 왜곡시킴으로서 정상적인 제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다.

즉 이 구절들은 거짓된 십일조와 거짓된 교회 지도자들을 책망하시며 십일조가 교회 지도자들의 이권문제로 활용되는 변질을 욕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하나님은 야베스의 기도을 인정해주지 않았던가?!

이는 성경전체을 가르치지 않고 입맛대로 지덜 꼴리는 대로 가르치는 현이시대의 교회 지도자들이 당대 시대와 다를바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구절이 문제 되는 이유는 바로 이제는 성경조차 지덜 멋대로 가르치며 십일조을 왜곡시키는 더더욱 옛날이 비해 지능화된 거짓 선지자 지금의 교회 지도자들의 가르침만을 곳이곳대로 믿지을 말란 것이다.

교회사에 나타난 십일조와 헌금의 사용방법과 내역들은 이미 필자가 수차례 지적한바 빈민 구제용으로 사용되었음을 말했기에 생략하겟다(본인 아이디로 검색해보라 "안티가 십일조 문제 삼는건 사용용도의 변질이다" 라는 본인글 참조하시길 바란다)

즉 십일조의 올바른 사용은 나눔이라는 사랑의 실천이지 목사나 교회 지도자들 낼롬 쳐묵고 그걸로 교회 꾸미라는 돈은 아니란것이다. 빈민 구제용이 아닌 다른 용도로 활용되면 그것은 변질이라고 말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리 가르치지 않는 서글픈 현실이다.



결론

첫째, 교회의 회계는 투명해야 한다. 모든 교인들이 낸 헌금이 어디에 사용되었는지를 단 한푼까지 정확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이것은 교회를 해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건강하게 한다. 이렇게 된다면 신자들이 헌금을 더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바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교회는 십일조를 바치라고 신자들에게 가르치지만 말고 교회 스스로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



이 교회의 십일조는 교회 경상비에서 10분의 1을 자신의 교회를 위한 일이 아닌 곳에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



이 교회의 십일조는 십일조를 받은 레위인이 십일조를 하나님께 내는 것과 연관시켜 볼 수도 있다. 가난한 교회라고 예외일 수 없다. 가난한 신자에게 십일조는 면제가 되는 것인가? 교회의 경상비의 10분의 1에서 모아진 교회의 십일조는 무엇보다도 먼저 구제용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이 십일조는 개교회가 연합한다는지 지방회 또는 노회별로 연합한다든지 아니면 총회적인 사업으로 발전하면 좋으리라 생각한다. 이 십일조를 총회적으로 모은다면 한국의 개신교회도 독일 루터교회들이 하는 사회봉사국(Diakoniewerk)을 설립하여 대대적인 사회 복지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헌금이 꼭 필요한 일에 사용되도록 해야 한다.



가장 우선적인 일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일이다. 그러나 오늘 한국의 교회는 과거의 습성에 젖어 필요하지 않는 일에 재정을 낭비하는 경우가 많다. 그 한 예로 매주마다 한번보고 버려지는 주보의 발행을 들 수 있다. 과연 주보를 계속 발행해야할지 우리는 한번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주보를 매주 발행하는 것 대신 그날 부를 찬송과 성경말씀을 교회의 벽이나 앞면에서 알려주면 될 것이다. 그리고 매주 마다 바꾸는 강단의 꽃꽂이이다. 꼭 비싼 생화를 해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그 경비가 소외되고 그늘진 이웃들에게 전해진다면 그곳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퍼지지 않을까? 이런 일을 할 때에 무엇보다도 주의해야 할 일은 교회나 어떤 목사 또는 장로의 이름으로 하지 말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 한다(골 3:17)는 것이 성경의 원리이다.

기독교인의 경제관은 물질이 그의 소유가 아니라 단지 위임받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더욱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독점이 아닌 공유이며 나눔이다. 십분의 일이라는 나눔의 훈련을 통하여 십분의 일 이상을 나눌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닌 세상을 향해서 전파해야할 복음이다. 십일조의 정신은 사랑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