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2-20화> 성탄절아침

바다의기억2006.02.01
조회10,339

설 명절들은 잘 보내셨나 모르겠습니다.

 

대략 고스톱에서 돈 잃고 망연자실한 상태면 낭패.

 

아무튼 진짜 새해도 밝았으니

 

다시금 사기충전하고 금연 재시도 합시다.

 

=========================== 일단 술부터 줄이는 게 관건 ==========================

크리스마스 당일 아침.


팔이 저리다는 생각에 게슴츠레 눈을 뜬 난


그와 동시에 내 몸 구석구석에 닿아있는


나 아닌 무언가를 인식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내 왼쪽 팔을 지그시 누르고 있는....


검고 윤기 나는 실 뭉치.



이 장면, 이 각도... 예전에 한 번 본적 있다.


그래, 이건 민아의 머리야.


지금 오른손이 짚고 있는 부분은 허리쯤 될 거고...


내 가슴에 닿아있는 건 민아의 손이겠네.


그리고 내 다리 사이에 있는 건 민아의 허벅지....



...이런 지쟈쓰!!



잠이 확 달아날 만큼 충격적인 상황에


나른하던 몸의 감각들이 빠르게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짚고 있는 부분이


셔츠 속 맨살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런 미치신 손이 왜 거길 들어가 있어....?!



‘두근.......... 두근두근두근두근......’



간만에 느끼는 이 감각.


민아와 함께 있는 동안 역치가 올라갔는지


한동안 뜸하던 셧다운 현상이 다시 재발했다.



눈앞이 어둑어둑해지고 목이 꽉 죄이면서


이마에 맥이 뛰는 압박감.



악마1

- 망설일 것 없어! 갈 때까지 가는 거야!


넌 잘못한 거 없어, 처음부터 이런 상황이었다고!


여기서 한 발짝만 더 나가면 돼.


지금이 기회야, 남자라면 밀어붙여!


죽기 전에 폭탄은 다 쓰고 죽어야지!!



악마2

- 아냐, 우선 대피해!


이대로 기절해버리면 아깝잖아!


약간 거리를 두고 즐겨 보자고!


향기를 맡는다거나, 눈으로 본다거나....



악마3

- 자, 저를 따라하세요.


스웁....후아.....스웁.....후아....


차분하게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이 진정되길 기다립니다.


우선 이 상황에 익숙해지면


그 다음에 천천히 나아가도 늦지 않아요.


자, 눈을 감고, 신중하게 갑니다. 스웁....후아.....



역시나 갈등은 악마 대 악마였다.


그나마 한 마리 늘어나서 삼파전....



내 정신상태가 이상한 걸까?


나란 놈은 이런 상황에서



기억 - 스웁...후아....스웁..... 후아....



..... 심호흡을 하고 있으니.



좋아, 어느 정도 진정됐다.


정신 바짝 차리고 다시 간다.


그럼 우선........ 우선.........



‘두근두근두근두근...’



아아, 안돼....상상하는 순간 다시 위험해진다.


진정해 진정...... 마음을 가라앉히자.



기억 - 스웁.....후아....스웁....후아.....



그렇게 난 한참동안


번지점프대 끄트머리에서 뛰지 못하고 맴도는 사람처럼


‘자, 이제 가자!’ 와 ‘스웁...후아...’만 반복하며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악마1 - .....적당히 좀 하지?


악마2 - 그러게 내말을 들으라니까.


악마3 - 자자자, 침.착.하.게. 다시 갑니다. 할 수 있어요! 쫌!!



이제 악마들까지 날 무시하는 구나.



‘꼴깍.’



......응?


그 순간 느껴지는 민아의 미세한 움직임.


고개가 살짝 흔들리면서


혀뿌리가 식도 쪽으로 운동해


구강속의 아밀라아제를 목구멍으로 넘기는...


간단히 말해 침을 삼키는 동작.



..... 깨어있다.



2000년 4월 지름신의 부름을 받아


밥값으로 한정판 프라모델을 사버린 친구가


밥값 3만원을 위해 실험체로 참여했던 의과대학 실험결과에 따르면


사람은 자는 동안은 침을 삼키지 못한다.


입에 침이 고여 질질 새어나오고


뺨을 따라 폭포수처럼 흘러내려도


자는 동안은 침을 삼키지 못한다.


그 친구 본.인.의. 실험 결과가 그랬다.



결론적으로, 그녀는 지금 자는척하고 있다.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그녀가 깨어있다는 걸 확신한 순간부터


쪽팔림에 통제를 벗어나버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난 우선 그녀의 셔츠 속에 들어가 있던


민망한 손을 살며시 빼낸 뒤


자는 사람에겐 절대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말했다.



기억 - 저기....


민아 - ......


기억 - 지금 자는척하는 거지.



단정적인 내 말투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세를 고수하고 있는 그녀.


하지만 지금 그녀는...


가만있다 못해 숨을 멈춰버렸다.



민아 - ....


기억 - ....... 자는척하는데 숨까지 안 쉴 건 없잖아.



결정적인 실수를 눈치 챈 그녀의 귀가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끄럽기는 나도 마찬가지.


이렇게 밀착되어있는 상태라면


지금 가슴속에 날뛰는 심장박동까지


그녀에게 그대로 전달되고 있을 것이다.



기억 - ...... 깨어있는 거 맞지.



‘끄덕.’


결국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무척이나 민망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마주하고 앉은 우리.


너무 강렬하게 뻘쭘한 상황에


둘 사이엔 긴 침묵만이 흘렀다.


그러던 중,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민아 - .... 바보.


기억 - ...... 왜.


민아 - 그런 건 그냥 모른 척 해야지!


기억 

- 아니...난... 일어났으면 그렇다고 말을 해주지.


나 깨어있는 거 알았잖아?



민아 

- 심장은 터져라 발랑발랑발랑 거리면서


스웁~ 후아~ 스웁~ 후아~


그러고 있는데 어떻게 말을 걸어?



기억 - 그... 그 자세에서 긴장하는 게 당연한 거 아냐?


민아 

- 그럼 살짝 비켜 누우면 되지.


자기도 꼼짝 못하면서


그 자세로 계속 버티고 있으면 어떡해?


그리고 잠깐 자는 척 좀 해주면


무안하지 않게 일어날 수 있잖아!



뜬금없이 싸우는 구도가 되어버린 우리.


요소요소를 찌르는 그녀의 지적에


얼굴이 확 달아올라버린 난


기분을 수습하지 못하고 받아칠 말을 찾아댔다.



기억 - 그러고 보니..... 어제 저쪽에 누웠었잖아?


민아 - .......!!



완벽하게 핵심을 찔렀다.


어제 분명 그녀는 나에게서 2m 가까이 떨어진


다른 곳에서 잠들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승기를 휘어잡는데 성공한 나.



기억 - ..... 어쩜.


민아 - ......


기억 - 어떻게 그렇게.... 야한 자세로.....


민아 - 내, 내가 안 그랬어!


기억 - 그래. 내가 저기서 끌고 왔다, 그래...


민아

- 난.... 난 팔베개만 잠깐 하려고 했는데


기억이 네가 끌어안았잖아!



그....그랬나?



기억 

- 그렇다 쳐도 그건 당연한 본능이지.


처음부터 왜 호랑이 굴에 들어와, 들어오길.....



민아 

- 그럼 셔츠 속에 손 넣어도 돼?


얼마나 놀랬는지 알아?



기억 - 그러니까.... 잠결에 그런 걸 따져봤자.....


민아 - 그럼 깬 다음에도 왜 안 뺐는데?


기억 - ......



그 한 방으로 다시 수세에 몰려버린 나.



이걸 어떻게 해명해야 하나.


이것도 본능이라고 밀어붙여야 하나?


움직이면 잠에서 깰 까봐?


옆구리가 시린 걸 막아주려고?



기억 - 그냥... 좀 더 그렇게 있고 싶었어.


민아 - ......


기억 - ..... 미안.



딱히 뭐라 변명할 만한 말을 찾지 못한 난


결국 그렇게 백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처음부터 내 판단착오가 컸다.


이렇게 서로 민망해서 얼굴 붉힐 일이 아닌데....



민아 - 나도....


기억 - ......


민아 - 나도 그랬어. 바보야.



세수를 하러 가는 나를 향해


토라진 척, 자신도 같은 마음이었음을 말해주는 그녀.



싸울 이유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는지 모른다.


단지 둘 다 조금 서툴렀을 뿐.


.....특히 내가.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은 다음


그녀가 방에서 뭔가를 가지고 나왔다.



민아 - 짜라잔~


기억 - 뭐야? 산타 옷?


민아 - 응. 이거 입고 갈 거야.


기억 - 나도?


민아 - 글쎄, 사이즈가 맞을까 모르겠네.



잠시 후.


세 벌 중 가장 큰 옷을 받아 입어본 결과.



민아 - 푸..ㅂ....


기억 - 뭐야 이게.



약간 통이 있는 무릎길이의 원피스 밑에


바지를 받쳐 입은 것 같은 형태의 산타 옷.


어깨가 약간 끼는 것을 빼면 사이즈는 괜찮았지만


옷을 입은 모양새는 영락없이 빨간 홀맨이었다.



....그렇다고 내 머리가 크단 소린 아니다.



민아 - 난 어때? 어울려?


기억 - 응..



실제 같은 옷이라는 게 안 믿어질 만큼


그녀에겐 산타 옷이 잘 어울렸다.


산타에게 신세대 조수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기억 - 저기.... 다른 옷은 없어?



죽어도 이 옷차림으론 못 나가겠고


평상복 차림으로 가기도 좀 허전했던 나.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긴 했지만....



민아 - 있긴 한데.....



뭔가 망설이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문득 불안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기억 - .......


민아 - 음..... 잘 어울린다.


기억 - 진담이야?



그녀가 가져온 옷은 다름 아닌 루돌프.


머리에 덮어쓰는 후드엔 뿔이 달려있었고


마스크처럼 고정하는 빨간 코도 있었다.



제법 신축성 있는 소재에


전체적으로 복슬복슬 털이 나있어서


산타옷보다 제법 따듯하긴 하지만 역시 디자인의 압박이....



기억 

- 둘이 이러고 있으니까


무슨 유아용 프로그램에 나온 것 같지 않아?



민아 - 하하, 그러게.


기억 - 어린이 여러분, 안녕하세요~.


민아 - 풋. 기억이가 그러면 다 도망갈 걸?


기억 - 당연하지!! 핫핫..... 뭐?


민아 - .....앗.



선물을 싣고 갈 차가 도착할 때까지


우린 그런 농담(?)을 주고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문제는 그 농담들이


곧 현실이 될 지도 모른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