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 경제력순은 아니잖소

으흠~2007.04.01
조회339
학생 시절,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영화가 큰 인기를 얻었다. 당시 과중한 입시 부담 때문에 자살한 고등학생이 사회문제가 되었고 그 영화는 많은 중고등학생들의 공감을 얻어냈다. 학교 선생님이 공부하라고 꾸중하면 당시 학생들은 속으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고 외치며 반항을 했다. 마찬가지로 요즘 각 언론 매체에 가끔씩 행복은 경제력 순이 아니잖아요를 외치는 목소리가 들린다.


작년에 발표된 영국의 싱크 탱크인 신경제학재단(NEF)의 보고에 따르면 삶의 만족도와 평균 수명, 생존에 필요한 면적과 에너지 소비량 등의 환경적인 여건 등을 종합해 178개국의 행복 지수 순위를 발표했으며, 이 조사에서 한국은 하위권인 102위에 랭크됐다.


재미있게도 행복 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로는 호주 부근의 작은 섬나라인 바누아투가 선정됐다. 그 곳 사람들은 작은 일에 크게 만족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행복해 하며 바누아투의 삶은 공동체와 가족, 타인에 대한 선의에 대한 것이고 많은 것을 걱정하지 않으며 오직 태풍과 지진만을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물론 바누투아를 보면서도 배울 점이 있겠지만, 자주 언론에 보도되는 이런 목소리들, 즉 경제적 번영을 추구하는 것을 가벼이 여기는 태도를 경계하고 싶다.


내가 아는 한 분이 젊은 시절 남미의 어느 나라에 가서 우리나라 기업의 어느 현지사업체를 맡아서 현지 노동자들을 구했다고 한다. 어렵게 채용을 한 뒤 며칠이 지났는데 그 노동자들 중 상당수가 결근을 했다. 그 사람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나 싶어 집을 방문했는데 아무 이유도 없이(!) 출근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왜 회사에 나오지 않느냐고 했더니 며칠간 일해서 돈을 벌었는데 왜 일을 하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한동안 일을 해서는 그 돈으로 먹고 파티도 하다가 다시 돈이 떨어지면 출근하겠다고 했단다. 직장이 없다는 이유로, 또는 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불행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약간의 돈을 벌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먹고 파티도 하면서 무척 행복한 표정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세계 여러 나라들의 행복지수를 조사해보면 아주 부유한 나라 못지않게, 매년 물난리로 먹고 사는 것도 힘든 나라이면서도 행복지수는 높은 경우가 있다.


비단 남의 나라 이야기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정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 최근 행복을 아주 중요한 인생의 요소로 여기고 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게 해준다는 실용서적만큼이나 행복에 대한 실용서적들도 많이 출간되고 매체에서 행복을 다룬 특집물을 내호는 것을 보면 사람들의 관심이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성장 중심의 경제 정책을 한물간 구세대의 시대정신으로 공격하기도 한다. 소위 웰빙시대에 경제 성장은 분배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잠시 옆으로 물러서야 하는 것인가?


물론 내 생각에도, 행복은 경제력 순이 아니다. 우리나라 대기업 회장의 행복이 소득에 비례해서 높을 리 없거니와 내 생각에(주위에 그만큼 돈이 많은 사람이 없어 추측만 할 뿐이지만) 많은 돈만큼이나 걱정과 근심이 많을 것이다. 천석꾼에게는 천 가지, 만석꾼에게는 만 가지 근심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여러 심리학 조사에 따르면 역시 행복의 여러 조건 중 경제력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경제적 어려움은 가정불화의 원인 중 하나이다. 분명 행복이 경제력만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력은 우리의 행복을 이루는데 무엇보다 필수적인 요소이다. 톨스토이는 행복한 가정은 대개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이유가 제각각이라는 말을 했다.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많은 조건들이 골고루 어느 수준까지 갖추어져야 한다는(그러므로 서로 비슷하다) 뜻으로 그 중 어느 하나라도 크게 부족하면 행복을 이루기 어렵다(그래서 다양한 불행이 존재한다)는 말일 것이다. 따라서 더 많은 국민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행복을 주기 위해서는 경제 성장은 어느 시대에나 밀려날 수 없는 최우선의 경제정책일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더 이상 경제적 성장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고 강변할 것이다. 그러나 성장을 밀어둔 채 분배에 집중했던 최근의 정권들이 국가 부채와 공무원 수는 늘이고 낮은 수준의 일자리만 급조한 채 경제적 활력을 잃어버리고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실업의 좌절을 안겨준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궁금하다. 최근 정권에 큰 지지를 보냈던 젊은 층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회에 진출하는 시기에 경제가 활력을 잃고 기업의 투자가 부진해지면서 연쇄적으로 결혼이나 출산, 육아 등에도 빨간 불이 켜졌다. 결국 분배로 행복을 만들어 내는 최근의 경제 실험은 실패한 것으로 생각한다. 현재 정권에 대해 기존 지지층이던 젊은이들이 등을 점점 돌리고 전체적으로도 ‘흔들림 없는’ 낮은 지지율을 보이는 것은 모두 그 실망감의 증거이다. 경험적으로 분배 정책은 행복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모두 인정할 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 성공보다 행복 자체를 추구함으로써 소위 물질만능의 시대를 극복하자고 말한다. 물론 개인마다 생각과 삶의 가치는 다양하므로 각자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최우선시하는 생각을 탓할 수 없다. 하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다수가 행복을 가장 큰 가치로 추구한다면 그 결과는 참담해질 수 있다. 우리나라의 고등학교 3학년의 생활은 사실 무척 힘들다. 그러나 그런 고통을 이겨내지 않고 단순히 젊은 때를 만끽하는 것으로 행복해 한다면(그 행복을 추구한다면) 직업 선택을 비롯해 경제적 사회적 기회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우리가 행복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결과적으로 분뇨 위에서나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 위에서 인생의 행복을 느끼면서 말이다. 그런 행복은 대다수 추구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껄끄럽지만 다소 거친 표현을 쓴 이유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행복추구는 그 자체로서 인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물질적 성취, 경제적 번영을 이루는 것을 마치 고상하지 못한 것인 양 매도하면서 철학적, 종교적, 또는 정치적 대의명분을 추구하는 것으로 행복을 얻는다는 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경우 사실이 아니다. ‘고상한’ 정치 사회적 대의명분을 달성하면 국민들이 행복해질 거라고 믿는 나머지 경제적인 번영을 이루는 일을 가볍게 여기는 어떤 정치 세력은 이 사실을 꼭 알아두었으면 한다.


행복은 경제력 순이 아니다. 그러나 물질적 번영을 위해 우리는 일시적으로 행복추구를 보류하기도 한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지혜로운 선택일 것이다. 대다수는 나중의 더 큰 만족과 행복을 위해 자주 참으며 행복한 순간을 유예한다. 가까이는 기러기 아빠들의 눈물겨운 생활담이나,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던 부모 세대의 이야기는 결코 낡은 것이 아니다. 고상한 이념을 추구하지 않았다 해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을 자랑스러워하는 사회가 되기를 소망해본다. 학생 시절,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영화가 큰 인기를 얻었다. 당시 과중한 입시 부담 때문에 자살한 고등학생이 사회문제가 되었고 그 영화는 많은 중고등학생들의 공감을 얻어냈다. 학교 선생님이 공부하라고 꾸중하면 당시 학생들은 속으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고 외치며 반항을 했다. 마찬가지로 요즘 각 언론 매체에 가끔씩 행복은 경제력 순이 아니잖아요를 외치는 목소리가 들린다.


작년에 발표된 영국의 싱크 탱크인 신경제학재단(NEF)의 보고에 따르면 삶의 만족도와 평균 수명, 생존에 필요한 면적과 에너지 소비량 등의 환경적인 여건 등을 종합해 178개국의 행복 지수 순위를 발표했으며, 이 조사에서 한국은 하위권인 102위에 랭크됐다.


재미있게도 행복 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로는 호주 부근의 작은 섬나라인 바누아투가 선정됐다. 그 곳 사람들은 작은 일에 크게 만족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행복해 하며 바누아투의 삶은 공동체와 가족, 타인에 대한 선의에 대한 것이고 많은 것을 걱정하지 않으며 오직 태풍과 지진만을 두려워한다고 말했다. 물론 바누투아를 보면서도 배울 점이 있겠지만, 자주 언론에 보도되는 이런 목소리들, 즉 경제적 번영을 추구하는 것을 가벼이 여기는 태도를 경계하고 싶다.


내가 아는 한 분이 젊은 시절 남미의 어느 나라에 가서 우리나라 기업의 어느 현지사업체를 맡아서 현지 노동자들을 구했다고 한다. 어렵게 채용을 한 뒤 며칠이 지났는데 그 노동자들 중 상당수가 결근을 했다. 그 사람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나 싶어 집을 방문했는데 아무 이유도 없이(!) 출근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왜 회사에 나오지 않느냐고 했더니 며칠간 일해서 돈을 벌었는데 왜 일을 하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한동안 일을 해서는 그 돈으로 먹고 파티도 하다가 다시 돈이 떨어지면 출근하겠다고 했단다. 직장이 없다는 이유로, 또는 돈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불행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약간의 돈을 벌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먹고 파티도 하면서 무척 행복한 표정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세계 여러 나라들의 행복지수를 조사해보면 아주 부유한 나라 못지않게, 매년 물난리로 먹고 사는 것도 힘든 나라이면서도 행복지수는 높은 경우가 있다.


비단 남의 나라 이야기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느 정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 최근 행복을 아주 중요한 인생의 요소로 여기고 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게 해준다는 실용서적만큼이나 행복에 대한 실용서적들도 많이 출간되고 매체에서 행복을 다룬 특집물을 내호는 것을 보면 사람들의 관심이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성장 중심의 경제 정책을 한물간 구세대의 시대정신으로 공격하기도 한다. 소위 웰빙시대에 경제 성장은 분배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잠시 옆으로 물러서야 하는 것인가?


물론 내 생각에도, 행복은 경제력 순이 아니다. 우리나라 대기업 회장의 행복이 소득에 비례해서 높을 리 없거니와 내 생각에(주위에 그만큼 돈이 많은 사람이 없어 추측만 할 뿐이지만) 많은 돈만큼이나 걱정과 근심이 많을 것이다. 천석꾼에게는 천 가지, 만석꾼에게는 만 가지 근심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여러 심리학 조사에 따르면 역시 행복의 여러 조건 중 경제력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경제적 어려움은 가정불화의 원인 중 하나이다. 분명 행복이 경제력만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력은 우리의 행복을 이루는데 무엇보다 필수적인 요소이다. 톨스토이는 행복한 가정은 대개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이유가 제각각이라는 말을 했다.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많은 조건들이 골고루 어느 수준까지 갖추어져야 한다는(그러므로 서로 비슷하다) 뜻으로 그 중 어느 하나라도 크게 부족하면 행복을 이루기 어렵다(그래서 다양한 불행이 존재한다)는 말일 것이다. 따라서 더 많은 국민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행복을 주기 위해서는 경제 성장은 어느 시대에나 밀려날 수 없는 최우선의 경제정책일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더 이상 경제적 성장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고 강변할 것이다. 그러나 성장을 밀어둔 채 분배에 집중했던 최근의 정권들이 국가 부채와 공무원 수는 늘이고 낮은 수준의 일자리만 급조한 채 경제적 활력을 잃어버리고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실업의 좌절을 안겨준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궁금하다. 최근 정권에 큰 지지를 보냈던 젊은 층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회에 진출하는 시기에 경제가 활력을 잃고 기업의 투자가 부진해지면서 연쇄적으로 결혼이나 출산, 육아 등에도 빨간 불이 켜졌다. 결국 분배로 행복을 만들어 내는 최근의 경제 실험은 실패한 것으로 생각한다. 현재 정권에 대해 기존 지지층이던 젊은이들이 등을 점점 돌리고 전체적으로도 ‘흔들림 없는’ 낮은 지지율을 보이는 것은 모두 그 실망감의 증거이다. 경험적으로 분배 정책은 행복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모두 인정할 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 성공보다 행복 자체를 추구함으로써 소위 물질만능의 시대를 극복하자고 말한다. 물론 개인마다 생각과 삶의 가치는 다양하므로 각자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최우선시하는 생각을 탓할 수 없다. 하지만 사회 전반적으로 다수가 행복을 가장 큰 가치로 추구한다면 그 결과는 참담해질 수 있다. 우리나라의 고등학교 3학년의 생활은 사실 무척 힘들다. 그러나 그런 고통을 이겨내지 않고 단순히 젊은 때를 만끽하는 것으로 행복해 한다면(그 행복을 추구한다면) 직업 선택을 비롯해 경제적 사회적 기회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우리가 행복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결과적으로 분뇨 위에서나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 위에서 인생의 행복을 느끼면서 말이다. 그런 행복은 대다수 추구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껄끄럽지만 다소 거친 표현을 쓴 이유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행복추구는 그 자체로서 인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물질적 성취, 경제적 번영을 이루는 것을 마치 고상하지 못한 것인 양 매도하면서 철학적, 종교적, 또는 정치적 대의명분을 추구하는 것으로 행복을 얻는다는 것은 대다수 사람들의 경우 사실이 아니다. ‘고상한’ 정치 사회적 대의명분을 달성하면 국민들이 행복해질 거라고 믿는 나머지 경제적인 번영을 이루는 일을 가볍게 여기는 어떤 정치 세력은 이 사실을 꼭 알아두었으면 한다.


행복은 경제력 순이 아니다. 그러나 물질적 번영을 위해 우리는 일시적으로 행복추구를 보류하기도 한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지혜로운 선택일 것이다. 대다수는 나중의 더 큰 만족과 행복을 위해 자주 참으며 행복한 순간을 유예한다. 가까이는 기러기 아빠들의 눈물겨운 생활담이나,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던 부모 세대의 이야기는 결코 낡은 것이 아니다. 고상한 이념을 추구하지 않았다 해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을 자랑스러워하는 사회가 되기를 소망해본다. 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