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레틱 빌바오와 그들의 역사

에릭 칸토나2007.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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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인기를 자랑하는 007 시리즈의 언리미티드편 오프닝에선 멋드러진 절경들과 유서깊은 구겐하임 박물관을 볼 수 있다.

바로 그 곳이 아틀레틱 빌바오의 연고지로 잘 알려진 바스크지방의 빌바오이다.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아틀레틱 빌바오를 알기 위해선 바스크에 대해 알아야하는 것은 인지상정.
아틀레틱 빌바오의 가장 큰 특징중 하나는 바로 바스크혈통을 지닌 선수만을 선발한다는 것.
바스크인은 이베리아 반도내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이며 스페인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고유의 언어와 풍습을 지니고 있다. 또 자치정부를 통해 자신들의 독립을 아직까지도 강력히 주장하고 있어 '스페인이지만 스페인인이 아닌' 민족으로써,
카탈루냐지방과 함께 反스페인을 주창하는 선봉장역할을 하고 있다.
빌바오는 당초 이베리아반도에서 독립된 존재였으나 19세기 말 스페인과 강제로 합병되었고 20세기엔 독재자 프랑코에 의해 카탈루냐지방과 함께 강한 탄압을 받았다.
독재자 프랑코의 사후(死後)에 자치정부가 들어서 끊임없이 자주독립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한편,
일부단체들의 악의적인 테러에도 적극가담해 스페인 중앙정부의 골머리를 앓게 하는 장본인이기도 하다.
일례로 빌바오의 독립단체 ETA는 지난 2005년 마드리드열차폭발테러사건에 가담, 자신들만의 독립운동을 펼쳐 전세계에 자신들의 존재를 알린 바 있다.

그런 바스크지방의 최고인기팀은 바로 1898년 창단된 아틀레틱 빌바오.

아틀레틱 빌바오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서 통산 7번의 우승을 거둔,
레알마드리드,바르셀로나,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함께 스페인전통 4대 명문팀으로 불리워지는 바스크의 자존심이다.

끊임없이 자주독립을 주창하는 강력한 바스크인답게 그런 그들의 모습은 아틀레틱 빌바오의 축구철학에 그대로 투영된다.
가장 좋은 예는 바로 철저한 바스크化. 빌바오는 1898년 창단이래 바스크에 적(籍)을 둔 선수만을 선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의 광주 상무 불사조구단처럼 오직 한국국적을 가진 선수로만 팀을 꾸리는 꼴인 것다.비록 광주는 타의이긴 하지만)
외국인용병없이 철저하게 바스크인으로만 구성된 이 팀은, 이런 핸디캡을 안고도 FC바르셀로나,레알 마드리드와 함께
프리메라리가역사상 단 한번도 강등되지 않은 클럽이기도 하다.


용병을 보유할 수 없다는 것은 팀구성에 있어 큰 어려움을 겪을 법한 문제.
세계최고를 자랑하는 유스시스템으로 그것을 메우곤 있지만, 다양한 국적의 팀으로 구성된 팀에 비하면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 아틀레틱 빌바오는 그들의 전통을 고집했고
그런 그들의 '옹고집'은 오늘날 그들을 프리메라리가의 명가로 자리잡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스페인,프랑스 중앙정부와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 투쟁해 온 바스크인들.
그들은 자주독립을 자신들의 강력한 주의지로 삼아, 앞으로도 그들의 전통을 고집할 것이다




아틀레틱 클럽의 태동을 말하기 앞서, 지역의 역사 또한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아틀테릭 클럽이 영국과 비즈카야 지방의 경제적·문화적 교류가 늘어나던 19세기 말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영국의 선박들이 비즈카야 지방의 경제 발전에 큰 공헌을 한 광부와 기술자들을 실어나른 것부터 빌바오가 시작됐다.
선박들은 빌바오항에 철을 수북히 쌓아놓고, 바스크의 중산층 젊은이들은 영국의 명문 학교로 유학을 가기 위해 선박들에 몸을 실었고
이러한 교류들은 '축구'라고 이름지어진 영국산신생 스포츠의 씨앗이, 탄탄한 지지기반을 지닌 빌바오의 전통스포츠들 사이에 뿌리내릴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었다.
조정, 필로타같은 빌바오 전통스포츠들은 '축구'라는 스포츠와 경쟁을 시작했고
이윽고, 바스크의 젊은이들은 22명이 11명씩 두 그룹으로 나뉘어 가죽공을 골대에 집어넣는 스포츠에 열광하게 되었다.



축구열풍은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로 퍼져나가, 빌바오를 연고로 둔 첫번째 팀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그 팀의 이름은 빌바오 F.C. (기록에 따르면 빌바오 F.C는 폭염속의 라미아코에서 창단 첫 경기를 치뤘다고 한다)
축구는 계속 바스크인들 사이에서 인지도를 넓혀 갔고, 자마코이스라는 유명한 체육관의 젊은이들도 그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1898년, 자마코이스와 빌바오 F.C.의 통합으로 빌바오 최고의 팀이 탄생한다. 현재의 아틀레틱 빌바오가 탄생되는 위대한 순간인 것이다.

1901년 2월, 카페 가르시아에서, 엔리케 고이리를 주축으로 첫 간부위원회가 소집되어 팀내규칙을 제정,
1901년 6월 11일에 이 규칙들을 정부에 제출했다. 정부에게 인가를 받은 1901년 9월 5일
최초의 구단주인 루이스 마르께스 마르몰레조씨는 33명의 위대한 멤버와 함께 '아슬레틱 빌바오'로서 힘찬 첫 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통합한 팀 사이에는 팀 이름을 두고 대립이 있었다.
결국 그들은 서로간의 의견을 절충, 팀 이름을 비즈카야 F.C.로 바꾸었다.
부르디칼라 부르데오스와의 리그전을 승리로 장식한 그들은 1902년 정규리그 결승전에서 F.C바르셀로나를 2:1로 물리치며 창단 첫 우승을 달성했다.

라미아코에 있던 아슬레틱 클럽의 구장에서 그들은 연승을 거듭했다.
그리고 1904년에 그들은 한 경기도 치루지 않고 챔피언의 자리에 앉아있었다.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코파 바스크,바스크리그,비즈카야 컵도 그들이 지배하게 된다.
이런 도중, 아슬레틱클럽은 역사에 족적을 남긴다. 1910년 1월 9일 스포르팅 이룬과의 대결에서 빌바오의 상징인
흰색과 빨간색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유니폼을 처음으로 착용한 것.
이후, 아슬레틱 클럽은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존폐 위기를 몇번이고 넘긴 이후, 홈 경기장을 졸라세타로 바꾼다.
그 구장의 첫 경기는 아슬레틱 클럽 역사상 처음 가지는 해외팀과의 경기였다.
당시 팀의 첫번째 감독인 쉐퍼드는 팀을 한달동안 지도한다.


바스크사람들은 점점 축구에 몰입했다. 새로 부임한 엘레산드로 데 라 소타 구단주는 산 마메스와 가까운 그랑 비아의 땅을 사기로 결정한다.
노비아 살체도 가(家)가 소유하고 있던 그 땅의 가격은 89000ptas, 시대를 고려하자면 엄청난 액수였다.
마누엘 스미스가 당담자가 되어 1913년 1월 20일 공사가 시작되었다.
산 마메스의 새 경기장은 3500석의 좌석을 갖춘 당시로서는 대형경기장축에 속했다.
게다가 준공식은 국왕 알폰소 13세와 크리스티아나 여왕이 참가했을 정도로 국가적인 행사로 거행되었다.
주아조가 산 마메스가 처음으로 공을 만졌고 "피치치" 라파엘 모레노 아란자디가 첫 골의 영예를 안았다.
1913년 8월 21일, 무누엘 데 오르투자르 사제의 축복과 함께 산 마메스가 팬들에게 위용을 드러냈다.

윌리엄 반스와의 계약은 훈련 방식의 혁명으로 이어졌다. 이런 변화는 경기력으로 이어져 빌바오는 그야말로 무적이 되었다.
1916년에 3번 연속 컵 대회를 우승한 후, 4년째엔 레알 마드리드를 완파하며 트로피를 지켜내었다.


하지만 그 우승 이후 빌바오는 마치 마법에 걸린듯 부진의 길을 걸었다.
1차 세계 대전은 감독이었던 쉐퍼드를 고국으로 돌아가게 만들었고 팀의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흐트러져
1921년까지 아슬레틱 클럽은 한 번도 결승전에 올라가지 못했고 아틀레티코 데 마드리드와의 경기는 "피치치"의 마지막 경기가 되고 말았다.
그는 당시로서는 무서운 질병이었던 장티푸스로 생을 마감했다. 역사는 그를 축구계의 전설로 인정했고 리그 최대 득점자에겐 그의 이름
이 새겨진 트로피와 함께 그의 이름을 하사했다.(프리메라리가의 피치치라는 용어는 빌바오가 자랑했던 위대한 골잡이의 이름인 것이다)

당시 코치로 이름을 날리던 펜트랜드의 부임은 빌바오가 부진을 벗어날 전환점을 만들어주었다.
훈련이 일상으로 자리잡고 아슬레틱 선수들은 돈을 받고 경기를 하기 시작한다. (당시 넘버1 골리이던 비달은 아슬레틱 클럽에서 첫 유급(有給) 선수이다.
아슬레틱 클럽의 인기는 날이 갈 수록 높아졌고, 산 마메스도 대대적 정비에 들어갔다. 구단 운영진도 상황을 바꾸는데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1928년 스페인 축구역사상 처음으로 10개의 참가팀으로 이루어진 프로리그가 만들어졌다. 물론 아슬레틱 빌바오도 참가하였다.
바르셀로나가 우승을 차지했고 아슬레틱 클럽은 리그 최다 골을 기록한다.
2회 대회에서는 아슬레틱은 고로스티자와 이라라고리와 계약을 맺었다.
그들은 라푸엔테, 치리, 우나무노같은 명포워드들과 함께 역사에 길이남을 전설적인 공격진을 이뤄냈다.
그리고 그 시즌 아슬레틱은 사상최초로 무패우승을 한다. 리그 우승 외에도 컵 대회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패퇴시키며 두 개의 프로타이틀을 모두 가져간다.
아슬레틱 클럽의 전성기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이 득점한 골은 도저히 셀수 없을 정도였다.
아슬레틱 빌바오가 가지고 있는 최다 점수차 승리인 12대 1 이라는 기록은 바르셀로나에게 가지고 있는 것인데, 재미있는 것은
이 기록이 바르셀로나 역대 최다 점수차 패배라는 사실이다. 그만큼 아슬레틱 클럽은 막강했다.

1935년 여름은 클럽에 있어 중요한 해였다. 최초로 미대륙 투어를 진행해, 전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리그에서는 레알 마드리드와 패권을 다투었다. 마지막 바로 전 시합에서 레알 마드리드에게 비기고,
마지막 경기에서 최선을 다해 오사수나를 제압하며 또 한번의 우승을 차지했다.

아슬레틱 클럽은 바로 다음 시즌에 값진 3등을 차지한다. 그 시즌부터 파니조, 텔모자라같은 전설적인 선수가 뛰기 시작했다.
그 해는 변혁의 시기였고, 전설적인 선수들은 빼어난 활약으로 위대한 팀의 탄생을 예고했다.

1941년 2월 1일 정부는 스페인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작명을 금지하였다.
그로 인해 아슬레틱 클럽은 아틀레티코 데 빌바오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2/43 시즌, 아슬레틱 클럽은 마치 전성기로 돌아간 듯한 활약을 선보이며 2개의 타이틀을 획득했다.

1948년 아슬레틱 클럽은 결승전에서 바르셀로나를 5 : 0으로 대파한다.
1950년, 구단에 대변혁이 일어난다. 구단 본부가 후르타도 아메카가에서 베르텐도나로 이사한 것이다.
또 그 해 여름에 브라질 월드컵에 참가한 자라는 국가적 영웅이 된다. 마르카나에서 영국을 상대로 결승골을 넣은 것이다.

50년대 초반에는 좋지 않았다. 무관의 시즌이 연속되었고, 감독은 자주 바뀌었다.
결국 체코 출신의 코치인 페르난도 다우치크가 부임했고 클럽은 다시 한 번 영광의 날개를 펼 수 있었다.
이리온도, 베나치오, 자라, 파니조, 가인자로 구성되던 공격진은 코흘리개 삼척동자들에조차 동경의 대상이었다.
1955년 컵 대회를 우승하고, 56년에는 2개의 타이틀을 차지하였다. 1957년에 그들은 유럽 대항전에 리그 챔피언의 자격으로 나서게 된다.
아슬레틱은 오포르투와 부다페스트를 연속해서 물리쳤고 3번째 경기는 잉글랜드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대결이었다.
폭설이 내리는 가운데 아슬레틱 클럽은 영국 리그의 우승자였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5대 3으로 대파한다.
하지만 2차전에서 3대 0으로 패배해 안타깝게 다음 라운드진출에 실패한다.
57/58 시즌에 다시 한번 코파 델 레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뇨가 이끌던 유럽 챔피언 레알 마드리드를 그들의 홈구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2 : 0으로 물리친 것이다.
이 경기는 "피루" 가인자의 선수로써의 마지막 승리였다. 그는 다음 해에 은퇴한다.

아슬레틱 클럽은 계속 페이스를 유지했지만 다른 팀들의 맹렬한 추격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던 도중 팀의 스타였던 헤수스 가라이가 FC 바르셀로나와 계약을 한다. 그가 이적할 때 받은 이적금으로 구단은 경기장 북쪽에 대형 스탠드를 건설했다.
바로 그 시즌, 아슬레틱 클럽에 은퇴할 때까지 머물렀던 전설적인 선수인 호세 앙헬 이리바르의 활약으로 또 한번의 더블을 차지한다.
1962년 산 마메스에 조명이 설치된다. 같은 해, 클럽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감독 펜틀랜트도 별세하였다.
64/65 시즌 아슬레틱 클럽은 다시 한 번 유럽대회에 참가한다. 페어스 컵에 참가해서 4강에 진출하였지만 페렌츠바로스에게 패배해
또 한번의 분루를 삼켰다
60년대엔 결코 우승은 많지 않았지만, 1966년과 67년에 두 번이나 자라고자와 발렌시아를 격파하며 두 번이나 결승전에 진출하였다.
1969년에 아슬레틱 클럽은 다시 한 번 결승전에 진출하였다.
이번에는 중심선수인 옐체가 출전했고, 아슬레틱 클럽은 아리에타 II의 골로 1 : 0 승리를 거둔다.
이 승리 이후 아슬레틱은 다시 예전의 위용으로 되돌아와, 로니 알렌이라는 영국인 감독과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그에게 아슬레틱은 과분한 팀이었다. 저조한 성적을 거두고 언론과 마찰만 일으켰다. 그는 69/70 시즌 중에 떠나는 첫 감독이 되었다.

2 시즌 동안 아무 타이틀도 얻지 못한 채, 72/73 시즌에 유고슬라비아의 밀로라드 파비치를 감독으로 임명한다.
아슬레틱 클럽은 다시한번 컵 결승전에 올라 카스텔론을 주비아가와 아리에타 II의 골로 2 : 0으로 물리쳤다.
빌바오는 다시 한 번 달아 올랐고, 아슬레틱 클럽은 75주년 행사를 열었다.
1973년은 구단에게 매우 중요한 해였다. 발리엔에서 아슬레틱 클럽의 서포터즈모임이 창단된 것이다.

하지만 컵에서 우승을 거둔 후 아슬레틱 클럽은 우왕좌왕 두 시즌을 보낸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일은 체력 훈련 전문가인 마누엘 델가도 메코와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이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의 대부분의 축구 팀들은 체력 전문가를 고용하기 시작한다.



76/77 시즌은 클럽 역사에서 가장 잊을 수 없었던 시즌중의 하나였다.
컵 결승전에서 베티스에게 무릎을 꿇고 리그에서는 3위를 기록했으나,
가장 중요한 사실은 아슬레틱이 유럽대회 UEFA컵 결승에 처음으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우이페스트 도스자, F.C. 바젤, 밀란, F.C. 바르셀로나와 라싱 화이트를 차례로 물리치며
유벤투스와의 결승전을 앞두게 되었다. 1차전은 토리노에서 열렸고 아슬레틱은
이탈리아 최고의 멀티플레이어로 꼽히는 타르델리의 한 골에 1 : 0으로 패배했다.
2차전은 산 마메스에서 열렸고 이 경기는 아슬레틱은 2 : 1로 승리한다.
하지만 홈에서의 두 골에도 불구하고 원정골우선원칙에 의해 유벤투스에게 챔피언의 자리를 내준다.
카를로스와 이루레타가 이 경기에서 골을 넣었고, 유벤투스에서는 베테가가 득점에 성공했다.
하지만 빌바오의 많은 팬들은, 성공적인 시즌을 보낸 콜도 아기레 감독과 선수들을 존경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시즌 후, 팀은 좋은 활약을 보이지 못 했다.
운영진은 헬무트 세네코비치라는 새 감독과 계약을 맺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경기력은 물론, 결과는 더욱 처참했다.
리그에서는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컵 대회에서는 레알 마드리드의 2군격인
세군다 리그의 카스티야에게 패배한다.
80/81 시즌에, 아슬레틱은 베르나베우 원정에서 7대 1로 패배하며,
세네코비치는 책임을 물어 운영진에 의해 해임당한다.
이나키 사에즈가 그를 대체하기 위해서 나서게 된다. 팀은 점점 폼을 되찾아가기 시작한다.
또 82년 스페인 월드컵을 치룰 경기장에 산 마메스가 선정되어 보수가 시작되었다.

1/82 시즌은 아슬레틱의 미래를 위해서도 중요했다.
베티 두나베이티아는 1군을 부상 때문에 선수생활을 맞친 후 2군 감독이었던 하비에르 클레멘테에게 넘기기로 결정한다.
그 뒤 팀은 재미있는 경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우르키아가, 리세란쥬, 데 안드레스, 우르투비, 아르고테, 주비자레타 등 어린 선수들이 다니와 괴쾨체아 같은 노장들과 합심하여 팀을 무적으로 만들었다.
첫 시즌을 4위로 끝내고 UEFA 진출권을 따내는데 성공했다.


27년만에 82/83 시즌에는 다시 한 번 리그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
아슬레틱과 레알 마드리드의 마지막 경기에서 아슬레틱은 텐딜로의 골로 1-0 의 짜릿한 승리를 거두며 우승을 확정지었다.
백만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거리로 우승을 축하하러 나갔다.
아슬레틱 클럽은 네르비온 강을 쭉 따라 가면서 네르비온 강 양쪽의 비즈카야 사람들 전체의 환호를 받으며 우승을 자축했다.
다음시즌에도 우승을 차지하며 연패를 이뤄냈고, 컵 대회에서도 FC 바르셀로나를 엔디카의 골로 1 - 0 으로 물리치며 더블을 달성했다

경기가 끝나고 경기장은 전장처럼 변했는데, 디에고 마라도나가 미구엘 솔라를 거칠게 공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고는 축제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비즈카야는 다시 한 번 축제 분위기에 빠져 들었다.

다음시즌은 예상보다 좋지 않았지만, 컵 대회에서는 다시 한 번 결승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미구엘 페레즈 심판의 어처구니 없는 편파판정 덕택에 우승에는 실패했다.

시대는 흘러 빌바오에 변혁의 계절이 다시 한번 찾아왔다.
에버튼에서 리그, 컵, 컵 위너스 컵 등을 들어올리며 승승장구하던 하워드 켄달이 이 중역을 맡았다.
결과는 생각보다 좋지 못했지만 후에 중요한 역을 맡게 된 호수 우리티아, 안드레 가르티아노, 리트시 멘디구렌 같은 선수들이
프리메라리가에 데뷔를 한 시즌으로 기록되었다.

하워드 캔달을 해고한 이후엔 세츄 호조에게 감독직을 맡았다.
호조는 시즌을 다 치루지만, 새 경영진이 구단에 부임하면서, 감독도 바뀌고 만다.
새 구단주인 호세 율리안 레르툰디의 선택은 하비에르 클레멘테였다.또 한번의 중책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적부진으로 시즌 중반에 해고되고 만다. 대체자는 또 다른 성공자 이나케 사에즈였다.
하지만 성적은 계속 부진했다. 한 가지 다른 것은 사에즈가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도 결국 나쁜 성적으로 팀을 떠나고 츄시 아란구렌이 그를 대체하게 되었다.

이후 빌바오는 스페인의 천재적재능이라 불린 훌렌 게레로등을 배출했다.
특히 훌렌 게레로가 가지고 있던 천재성은 마드리드, 라치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같은 빅클럽들이 군침을 흘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들은 훌렌 게레로를 유혹했으나 훌렌 게레로는 이를 모두 거부하며 영원히 빌바오에 남을것이라 선언했다.
정말 그는 영원한 바스크인의 영웅이 되었고 에체베리아,우르사이즈,예스테등과 함께 빌바오 공격진을 이끌다
올 시즌을 앞두고 은퇴를 선언해 빌바오팬들을 큰 슬픔에 빠뜨렸다.

2003년 유소년에서 빌바오로 승격해 바스크의 카를로스라 불리우기도 했던 아씨엘 델 오르노는
팀 역사상 가장 비싼 이적료로 첼시로 이적했으며 빌바오가 배출한 선수들은 여전히 유럽시장에서의 가치를 인정받았지만
그들이 소속한 아틀레틱 빌바오의 성적은 빛났던 과거에 비하면 충분히 나쁘다고 할 수 있는 성적이었다.
지난시즌에 빌바오는 강등위기까지 몰렸다가 20여년만에 돌아온 클레멘테의 마법과 아두리스의 활약으로 강등위기를 겨우 벗어났으며
과거에 비하면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바스크인들은 성적이 아무리 좋지않더라도 바스크의 영원한 자존심인 아틀레틱 빌바오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을 것이다.

순수 바스크주의만을 고집해오고 있는 빌바오에게 리처드 줄리아노티 잉글랜드애버딘대 교수는 이런말을 했다.
"적어도 이 팀의 스타들은 보스만 룰의 상업성에서 자유롭다.
바스크 민족주의의 구현 그 자체인 팀에서 뛴다는 이데올로기적 매력을 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