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왔어." "정서방은?" 오늘도 정민의 엄마는 태형이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대뜸 정민에게 태형이 얘기부터 꺼냈다. 정민은 마치 태형과 함께 먹었다는 듯이 엄마에게 웃어보이며 말없이 빈 보온병이 담긴 쇼 핑백을 내밀었다. 그리고 정민은 엄마가 태형에대해 더 묻기전에 서둘러 씻을 준비를 했다. 아직은 엄마에게 태형과의 이별을 알려드릴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제까지 태형이만 보고 살아오신 엄마였다. 정민의 동생 정호는 아버지의 사망후부터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다. 그후로 연이은 사고와 가 출. 지금도 어디있는지 소식한번 없는 정호였다. 가끔 돈이 떨어질때만 찾아와서 온 집안을 뒤 져 돈을 쥐어가곤 했다. 그렇기에 자연히 엄마의 기대는 정민과 태형에게 쏠릴수밖에 없었다. 정민의 엄마는 비어있는 보온병에 만족하시며 욕실에 들어가는 정민의 뒷모습에 태형의 자랑 을 늘어놓으셨다. '엄마.. 우리 한번 해봤잖아. 보내주는거... 마음에서 보내주는거 우리 해봤잖아. 그러니까.. 이번엔 덜 힘들거야. 조금만 더 웃어... 아직은.. 나 엄마... 웃게 해주고 싶어..' 태형은 정민의 집앞에서 정민이 밟았던 곳을 몇번이고 따라 걸으며 정민의 남은 체취를 느끼 고 있었다. 벌써 4개째의 담배꽁초를 바닥에 비벼껐다. 태형 자신의 집앞보다 이제는 더 익숙 해진.. 더 편안해진 정민의 집앞은 더이상 태형이 설자리가 아니었지만 태형의 발은 그 사실을 인정할수 없다는 듯 몇시간째 움직이려하지 않았다. '옛날에 옛날에 평생을 불행하게 보낸 기사가 있었대. 기사주제에 아름다운 공주님을 사랑해 서... 평생동안 공주님을 볼수없는 형벌을 받아 하루하루 시들어가는 불행한 기사... 공주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기사로 인해 생전 처음 설레임을 배웠대. 어느날부터 보이지 않는 기사때문에 화가났었는데 이웃나라 왕자님을 만나 또다른 설레임을 알게된 공주님은 새로온 수호기사의 엄호를 받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결혼식을 올렸대. 모든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공주님은 몰랐겠지? 공주님의 행복한 결혼 소식에 감사하고있는 기사를... 비록 공주님을 볼 수없는 기사의 심장은 매일을 울지만 사랑하는 공주님이 더욱 더 빛날수 있을 그 결혼식에 기 사가 얼마나 감사하는지를... 공주님은 몰랐겠지? 서정민.. 난 정말 형편없는 기사인가봐.. 내가 지키지 못한 자리.. 다른 멋진 기사가 지켜주는 걸 감사해야하는데.. 화가나... 화가나서 미치겠어... 보고싶다... 서정민..' 기분좋게 주차를 마친 재하는 정원에 현관까지 이어진 돌계단을 밟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 다. 저녁 식사내내 쉬지않고 웃어주는 정민을 생각하면 어릴때도 쓰지않았던 일기까지 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돌계단을 하나하나 밟을수록 정민과 가까워 지는것만 같았다. "늦었구나." 재하가 태어나기도 전에 재하를 위해 아버지가 정원에 만들어준 그네위에 재하의 어머니가 책을 들고 앉아 즐거운듯 걸어오는 재하를 보며 미소짓고 계셨다. "추운데 왜 나와계세요.." 재하는 발걸음을 돌려 그네 뒤로 다가가 얇은 숄 하나만 걸치고있는 어머니의 어깨에 코트 를 벗어 올려주었다. "춥기는.. 난 여기 앉아서 책읽는 시간이 제일 좋아. 니가 아기였을땐 책대신 널 안고 있었 는데, 언제 이렇게 커버린거니?" "어떤 사람은 저더러 아직도 어린애라던데요?" "훗... 그래? 그럼 오랫만에 우리 어린 아들 한번 안아볼까?" "이제는 제가 안아드려야죠." 재하는 어머니의 작은 어깨를 감싸안았다. "무슨 책 읽고 계셨어요? 아들한테도 추천좀 해주세요." "엄마가 읽는 책은 유치한 사랑 얘기뿐이라 싫다면서?" "가끔은 아들도 유치해지고 싶다구요." "어떤 사람이니?" "네?" "누가 우리 아들 가슴에 날아든거야?" "민들레를 닮은 사람이요." "민들레?" "네. 훗.. 뭐 그냥 민들레처럼 흔하디 흔한 평범한 사람이예요." "너에게만은 특별한?" "네. 맞아요. 특별해요. 너무.. 특별해요. 어머니. 8살때의 풋사랑이 20년도 더 지난 지금까 지 유효할까요?" "제조일로부터 언제까지라고 유통기간이 적혀있는 통조림처럼 사랑에도 유효기간을 정할 수 있을까? 그래, 어쩌면 비슷한 부분이 있을수도 있겠구나. 사랑 역시 상하지않게 잘 보관 을 해두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사랑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모두다 완전한 사랑이 될수는 없 는거란다. 그 사랑이 변질되거나 퇴색되지않게 늘 가슴에 보관하고 지켜야 하니까... 굳이 사랑에도 유효 기간을 정해야 한다면 그건 그 사랑의 주인이 노력한 만큼이 아닐까? 엄마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제일 중요한것 같다고 생각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일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지만 그만큼 소중한 사랑이기에 그 사 랑을 지켜나가는 일은 어렵거든." "우리 어머니 글쓰셔도 되겠는데요?" "멋있었니?" "최고예요."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잖니. 유치한 사랑 얘기 손에달고 산세월이 얼만데.."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의 어깨를 안고있던 손에 더욱 힘을주어 안는 재하의 시선은 무심코 어머니의 손에 들린 소설책의 제목으로 향했다. 새하얀 표지에 연분홍색으로 적혀있는 책의 제목. '첫사랑' 첫사랑이라는 단어가 재하의 가슴을 두드렸다. 나의 첫사랑 서정민... "나만 빼고 둘이 데이트 하는건가?" "아버지. 나오셨어요?" "오냐. 할얘기 있으니 들어가자." "네." "당신없으면 나 아무것도 못하는거 알면서 왜 여기 있소." "이이는.. 애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네. 어서 들어가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손을 꼭 잡고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하는 이 자리에 없는 정민을 원망하며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부모님의 뒤를 따라 집안으로 향했다. 복사실에서 커피 한잔을 들고 복사기가 작동되는 소리를 들으며 오늘은 한층 더 초라해 보 이는 밖의 나무를 보고 있던 정민은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하는 핸드폰 소리에 얼굴을 찌푸 렸다. "결혼 준비는 잘되니?" "응. 잘지냈어?" "그렇지 뭐. 기분 어때?" "이상해. 나 결혼 하지말까?" "훗.. 하지마." "어머. 얘좀봐? 서정민 미워서라도 할꺼다!" "무슨 일로 전화한거야?" "아참. 내 정신좀봐. 우리 결혼식 피로연 쌍쌍파티 할꺼거든? 너야뭐 어차피 태형이랑 같이 올테니 쌍쌍파티를 하든 뭘하든 상관없겠지만." 은하는 정민의 대학시절 친구였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느끼는 해방감을 즐기는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늘 책을 싸안고 살았던 정민에게 다가온 친구. 시간과 돈을 아끼기위해 빵으로 대충 점심을 해결하고 수업시간 외에는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하던 정민에게 많은 도움이 된 친구였다. 태형이를 만나기 시작하면서 잠시 공부에 소 홀해진 정민은 은아의 노트가 아니었으면 장학금을 놓칠뻔 하기도 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늘 공부와 아르바이트에 시달리던 정민이 마음을 터놓는 유일 한 친구인 것이다. 태형과도 대학때 만나 연애를 시작했기에 정민과 태형의 사이를 누구보다 잘알고 있는 은 아였지만 아직 헤어진 사실은 모르고 있는듯 했다. "쌍쌍파티라니?" "우리 나이가 몇이니? 나나 상수친구들 다 결혼했거나 결혼 앞두고 있으니까 쌍쌍파티로 하려구. 재밌잖아. 뭐 부자들만 파티하라는 법있니? 파티라고 이름만 붙이면 그게 파티지. 안그래?" "그래.. 재밌겠네." "태형이한테는 니가 말해. 알았지?" "... 그래..." "근데 너넨 언제 결혼할꺼냐?" "글세.." "올해안은 어려울꺼고 내년은 넘기지마라. 내년이면 우리 서른이야." "봐서... 결혼식 준비 바쁠텐데 노닥거리고 있어도 되?" "기지배. 이쁘게하고와. 알았지?" "응.." "아참! 너희 축의금은 각자 준비해와!" "훗... 알았습니다." "식장에서 보자." "응.. 준비 잘하고." 은아의 결혼식이라면 얼굴만 비추고 올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태형과 같이 가는것 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두사람은 이미 헤어졌기에..... 편하게 알고 지내는 남자친구 하나없는 정민은 은아의 갑작스러운 쌍쌍파티 얘기로 심란 해졌다. 은아의 남편이 되는 상호도 정민과 같이 대학을 다녀서 상호 친구들도 정민과 아는 사이일것이다. 태형과 정민의 오랜 연애기간을 알고 있는 사람들... "오늘 3시에 JY 민회장과 선약이 있으니 너도 함께 가도록하자. 이참에 확실히 얼굴 도장도 찍을겸." "네." "민회장한테 잘보여라. 중요한 자리다." "네.." "이녀석아. 대답만 네네 하지말고! 이번 신상품 합동 프로젝트도 중요한 문제지만 앞으로 유정이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된다는걸 고려해볼때 JY와의 관계는 특별히 돈독히 해둘 필 요가 있다." "알겠습니다." "나가봐라." "네." 태형은 아버지와 얘기하는 내내 정민의 생각뿐이었다. JY는 정민이가 다니고 있는 회사였 다. 전부터 정민을 아끼시던 교수님의 추천으로 인해 좋은 곳에 취직하게 되었다며 아이처 럼 좋아하던 모습이 머릿속에 되새겨졌다. 우연히라도 정민을 볼수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태형은 유정 그룹으로 출근한후 처음으 로 미소를 지어볼수 있었다. 회사에서의 정민은 어떤 모습일까..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할때와 같은 모습일까.. 책상에 턱을 괴고 태형이 모르는 또다른 정민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태형을 방해한건 윤 미였다. 윤미는 노크도 없이 부장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쇼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옆트임이 심한 검은색 치마와 망사 스타킹, 그리고 뾰족한 검은색 구두는 윤미의 짙은 화장 과 어우러져 더욱 천박스러워 보이게 만들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태형은 비소를 날리며 윤 미를 외면했다. "무슨 일이야." "JY 간다며?" "그런데?" "서정민. 그 여자가 다니는 회사도 JY라고 들었는데, 맞나?" "알게 뭐야." "서정민한테 이제 관심 끊었다는 말투네?" "그래. 관심 끊었어. 그러니까 너도 관심 끊어." "훗.. 관심 끊은 사람의 행동이 너무 상식밖인데?" "무슨 말이야." "어젯밤에 어디갔었니?" "뭐?" "서정민 집앞에 정태형이 서있었던 이유가 뭘까?" 윤미의 말에 태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윤미를 노려보았다. "뭐야. 미행까지 하냐? 박윤미. 유치하네?" "맞아. 나 유치해. 몰랐니?" "박윤미." "정태형. 명심해. 난말이지, 손해보는 일은 안해. 내가 잃은 사랑, 너도 잃어줘야지 공평하 다고 생각하지 않아? 흣.. 겨우 미행가지고 화내면 재미없지. 앞으로는 더 재미있는 일이 많을텐데. 서정민이 죽는건 너도 원치않겠지?" "하하. 죽어? 죽여봐. 어디 죽일수 있으면 죽여봐." "못할거 같아?" "서정민이 죽든 살든 나와는 상관없어." "그래? 후후.. 내말을 안믿나 보네? 주요리가 나오기전에 에피타이저가 먼저 나오듯이.... 너한테도 에피타이저가 필요한 모양이구나?" "무슨 말이야?" "글쎄.. 기다려보면 알겠지." 태형에게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부장실에서 나가는 윤미의 뒷모습에 적지않는 불안함을 느 끼는 태형. 하지만 태형은 아무리 윤미라 할지라도 정민이를 다치게 하지는 않을것이라 스 스로를 안심시키며 자리에 앉아 책상에 엎드렸다. -점심 시간 24분전이야.- 점심 시간 30분전부터 1분에 한번씩 재하에게 문자가 왔다. 다른 말도 없이 시간만 줄어드 는 단순한 문자만을 연이어 보내는 재하의 행동에 실없는 웃음만 나오는 정민은 오늘 점심 도 재하와 함께 할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재하의 문자는 '점심 시간 정각입니다.' 에서 끝이났다. 재하의 마지막 문자를 보며 정민도 자리에서 일어나 이사실로 향했다. 식사후 정민은 재하에게 은아의 결혼식에 같이 가달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정민이 혼자 결 혼식장에 간다면 온갖 얘기들로 귀찮아 질것이기 때문이다. 정민은 재하라면 편하게 부탁 할수 있을것 같았다. 쌍쌍파티라고 해봐야 결혼식후 피로연장에서 잠시 어울리는 것뿐일 테니 도중에 빠져나오면 될것이었다. 오늘도 비서는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오늘도 정민의 노크에 바로 문을 열어주는 재하였다. "왔어?" "올수밖에 없게 만들었잖아." "그래서.. 싫어?" "아니.. 근데 이게 다 뭐야?" 정민은 테이블에 놓여진 온갖 음식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재하는 밖에서의 식사를 꺼리는 정민을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얘기를 해둔 터였다, 점심시간에 맞춰 박기사를 보낼테니 음식준비를 해놓으시라고... 일하는 아주머니가 준비해준 음식은 재하도 놀랄 정도로 화려했고 박기사도 제시간을 맞추 어 음식을 배달해왔다. 재하는 놀라는 정민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정민에게 앉으라 는 시눙을 해보였다. "매일 이런거 먹니?" "왜?" "내가 먹는 음식하고 너무 달라서." "이거 준비하느라 우리집 기둥뿌리 몇개 뽑있어. 그러니까 남기지말고 많이 먹어." "니네집 무너지면 나한테 책임지라고 하려고?" "눈치챘어? 우리집 무너지면 니네집에서 신세좀 지려고 했는데." "훗.. 어쨌든 잘먹을께." "맛있게만 먹어주세요. 서정민씨." "맛없게 먹고 싶어도 그럴수가 없겠네요. 민재하씨." "최기사님. 이 서류좀 대구 공장에 전해주고 오시겠어요?" "네. 부장님." "공장장님께 이 서류만 전해주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퇴근 시간 전까지만 도착하면 됩니까?" "늦을것 같으면 그냥 퇴근하세요." "네.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은근히 자동차 계열을 택하기를 바라시는 아버지때문에 태형은 오늘 대구에 있는 자동차 공장에 다녀올 예정이었다. 공장장에게 신제품에 관한 서류도 전해줄겸 해서 공장 상태를 봐두려고 했었지만 JY에 가야하는 관계로 최기사에게 대신 부탁을 한것이다. 최기사가 나간후 태형은 어느덧 점심 시간이 된것을 느끼며 한숨이 흘러 나왔다. 태형의 아버지와의 점심 식사도, 윤미와 박회장과의 점심 식사도 내키지 않은 태형은 약속 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혼자 나가 회사 근처에 있는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점심 시간을 때 우기로 결정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하야. 너 토요일에 뭐해?" "왜? 데이트 신청하게?" "응." "뭐? 진짜?" "훗.. 친구 결혼식인데 피로연에 쌍쌍파티를 한다잖아. 이 나이에 혼자 가는 것도 그렇고 해 서.. 혹시 시간되면 같이 갈래?" "서정민 부탁이면 시간이 없어도 만들어야지." "고마워.." "대신 나도 부탁하나 해도되?" "뭔데?" "토요일 저녁에 유정 그룹 딸 결혼 발표겸 신제품 출시에 관한 작은 파티가 있어. 근데 말이야. 우리 아버지가 나는 꼭 참석해야 된대.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번에도 혼자 올꺼면 올생각도 하지말래. 도대체 어쩌라는 말씀일까?" "응?" "아버님 말씀은 이번엔 여자 친구와 함께 오라는 소린데... 꼭 참석해야 되는 자리에 여자 친 구없이는 올생각도 하지말라는건 여자 친구를 필히 데리고 오라는 말씀이잖아." "아..." "니가 같이 가줘." "내가?" "나도 니 친구 결혼식가서 서정민 커플로서 최선을 다할테니 너도 그래줘." "그래도... 아버님 뵙는 자린데.. 내가 어떻게.." "괜찮아. 응? 부탁해." "생각.. 좀 해볼께." "넌 너무 생각이 많아서 탈이야. 그러니까 시집을 못갔지." "뭐?" "농담이야. 같이 가주는거다? 알았지?" "..." 은아의 결혼식과는 차원이 다른 자리에 동행을 부탁하는 재하. 정민은 조금 부담스러워졌다.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라면 기꺼이 동행하겠다 하겠지만 재하의 부모님에게 인사드리는 자리 나 마찬가지 인것같아 정민은 쉽사리 대답을 하지못했다. "네." "사장님께서 나오시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비서의 연락을 받은 태형은 JY의 민회장과의 만남을 위해 훝어본 자동차에 관한 서류를 접 고 일어나 양복 상의를 입고 나갈 차비를 했다. 그때 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책상에서 몇걸음 걸어나온 태형은 받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왠지 받아야만 할것같은 예감에 책상으로 다가가 수화기를 들었다. "네." "정부장님. 최기사가 대구에서 올라오는 길에 차고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네? 뭐라고요?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앞에 달리던 트럭 운전사의 졸음 운전으로 일어난 사고라고 합니다. 최기사는 병원으로 옴 기던 도중에 사망했습니다." "네?..." 자신의 부탁으로 대구에 다녀온 최기사의 갑작스런 사고에 당황하고 놀란 태형은 수화기를 붙잡은채 말문이 막혀버렸다. 태형의 기사가 된지는 얼마되지 않았지만 서글서글한 인상에 참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부탁때문에 최기사가 죽은것 같은 생각에 태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윤미가 부장실로 들어왔다. "무슨일 있니? 많이 놀란 표정이네?" 태형은 기분나쁜 미소를 짓고있는 윤미를 보자 오전의 윤미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설마... 설마... 아닐꺼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아닐꺼야..' 대답없는 태형에게 윤미가 다시 말을 꺼냈다. "누가 죽기라도 했니? 꼭 누가 죽기라도 한것같은 표정이네?" "박윤미.." "많이 놀랬니? 벌써부터 놀라면 재미없는데.. 시작일 뿐이야. 말했지? 내말 새겨들어. 다음 순서는 누가 될지 나도 몰라. 난 우리 아빠랑은 달라서 계획성이 부족하거든. 즉흥적이야. 그래서 다음 순서도 예고해줄수가 없네. 니가 제대로 안하면 이 장난은 계속 되는거야. 알았니?" "장난? 장난이라고 했어? 정말 너야? 니가 한짓이야?" "훗.. JY에 갈시간 아니니? 잘하고와. 합동 프로젝트에 관한 중요한 자리니까. 우리 아빠가 너한테 기대하고 계신거 알지? 니들 부자가 정말 원하는게 뭔지는 모르지만 아직은 우리 아 빠 발밑에서 기어야하잖아? 그러려면 오늘일 잘해야 될꺼야. 갈께." 태형은 부장실에서 나가는 윤미의 뒷모습을 보며 소름이 끼쳤다. 불안한 예감은 그대로 닥 쳐왔다. 다음 순서는 누군지 모른다. 정민이 될수도 있는 것이다. "하... 박윤이... 정말 니가 한짓이야? 정말 너야? 아무리 형편없는 사람일지언정 어떻게 이 런짓을 할수가 있니? 어떻게 사람을.... 장난? 장난이라고? 너한테는 사람 목숨이 장난이 니? 박윤미... 정말 너라면... 정말 니가 한짓이라면... 나도 가만있지 않아.. 박윤미... 너 정말 무섭다... 정말... 너라는 인간... 무섭다..." 5편을 들고 왔어요^^ 내일은 6편을 올리고... 6편의 내용은 전에 올렸던것과는 조금 수정이 된 글이 될거예요^^ 그리고 모래부터는 7편... 드디어 민들레도 진도를 나가겠네요^^ 읽어주시는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드려요^^ 그리고 항상 힘을 주시는 분들에게도 감사합니다. 태형의 힘든 사랑의 여정이 어찌될지... 열심히 이야기를 풀어나갈께요^^ 그럼 내일 6편으로 다시 만나요^-^
민들레 연가 # 5
"엄마. 나왔어."
"정서방은?"
오늘도 정민의 엄마는 태형이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대뜸 정민에게 태형이 얘기부터 꺼냈다.
정민은 마치 태형과 함께 먹었다는 듯이 엄마에게 웃어보이며 말없이 빈 보온병이 담긴 쇼
핑백을 내밀었다. 그리고 정민은 엄마가 태형에대해 더 묻기전에 서둘러 씻을 준비를 했다.
아직은 엄마에게 태형과의 이별을 알려드릴 준비가 되지 않았다.
이제까지 태형이만 보고 살아오신 엄마였다.
정민의 동생 정호는 아버지의 사망후부터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다. 그후로 연이은 사고와 가
출. 지금도 어디있는지 소식한번 없는 정호였다. 가끔 돈이 떨어질때만 찾아와서 온 집안을 뒤
져 돈을 쥐어가곤 했다. 그렇기에 자연히 엄마의 기대는 정민과 태형에게 쏠릴수밖에 없었다.
정민의 엄마는 비어있는 보온병에 만족하시며 욕실에 들어가는 정민의 뒷모습에 태형의 자랑
을 늘어놓으셨다.
'엄마.. 우리 한번 해봤잖아. 보내주는거... 마음에서 보내주는거 우리 해봤잖아.
그러니까.. 이번엔 덜 힘들거야. 조금만 더 웃어... 아직은.. 나 엄마... 웃게 해주고 싶어..'
태형은 정민의 집앞에서 정민이 밟았던 곳을 몇번이고 따라 걸으며 정민의 남은 체취를 느끼
고 있었다. 벌써 4개째의 담배꽁초를 바닥에 비벼껐다. 태형 자신의 집앞보다 이제는 더 익숙
해진.. 더 편안해진 정민의 집앞은 더이상 태형이 설자리가 아니었지만 태형의 발은 그 사실을
인정할수 없다는 듯 몇시간째 움직이려하지 않았다.
'옛날에 옛날에 평생을 불행하게 보낸 기사가 있었대. 기사주제에 아름다운 공주님을 사랑해
서... 평생동안 공주님을 볼수없는 형벌을 받아 하루하루 시들어가는 불행한 기사...
공주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기사로 인해 생전 처음 설레임을 배웠대. 어느날부터 보이지 않는
기사때문에 화가났었는데 이웃나라 왕자님을 만나 또다른 설레임을 알게된 공주님은 새로온
수호기사의 엄호를 받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결혼식을 올렸대. 모든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공주님은 몰랐겠지? 공주님의 행복한 결혼 소식에 감사하고있는 기사를... 비록 공주님을 볼
수없는 기사의 심장은 매일을 울지만 사랑하는 공주님이 더욱 더 빛날수 있을 그 결혼식에 기
사가 얼마나 감사하는지를... 공주님은 몰랐겠지?
서정민.. 난 정말 형편없는 기사인가봐.. 내가 지키지 못한 자리.. 다른 멋진 기사가 지켜주는
걸 감사해야하는데.. 화가나... 화가나서 미치겠어... 보고싶다... 서정민..'
기분좋게 주차를 마친 재하는 정원에 현관까지 이어진 돌계단을 밟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
다. 저녁 식사내내 쉬지않고 웃어주는 정민을 생각하면 어릴때도 쓰지않았던 일기까지 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돌계단을 하나하나 밟을수록 정민과 가까워 지는것만 같았다.
"늦었구나."
재하가 태어나기도 전에 재하를 위해 아버지가 정원에 만들어준 그네위에 재하의 어머니가
책을 들고 앉아 즐거운듯 걸어오는 재하를 보며 미소짓고 계셨다.
"추운데 왜 나와계세요.."
재하는 발걸음을 돌려 그네 뒤로 다가가 얇은 숄 하나만 걸치고있는 어머니의 어깨에 코트
를 벗어 올려주었다.
"춥기는.. 난 여기 앉아서 책읽는 시간이 제일 좋아. 니가 아기였을땐 책대신 널 안고 있었
는데, 언제 이렇게 커버린거니?"
"어떤 사람은 저더러 아직도 어린애라던데요?"
"훗... 그래? 그럼 오랫만에 우리 어린 아들 한번 안아볼까?"
"이제는 제가 안아드려야죠."
재하는 어머니의 작은 어깨를 감싸안았다.
"무슨 책 읽고 계셨어요? 아들한테도 추천좀 해주세요."
"엄마가 읽는 책은 유치한 사랑 얘기뿐이라 싫다면서?"
"가끔은 아들도 유치해지고 싶다구요."
"어떤 사람이니?"
"네?"
"누가 우리 아들 가슴에 날아든거야?"
"민들레를 닮은 사람이요."
"민들레?"
"네. 훗.. 뭐 그냥 민들레처럼 흔하디 흔한 평범한 사람이예요."
"너에게만은 특별한?"
"네. 맞아요. 특별해요. 너무.. 특별해요. 어머니. 8살때의 풋사랑이 20년도 더 지난 지금까
지 유효할까요?"
"제조일로부터 언제까지라고 유통기간이 적혀있는 통조림처럼 사랑에도 유효기간을 정할
수 있을까? 그래, 어쩌면 비슷한 부분이 있을수도 있겠구나. 사랑 역시 상하지않게 잘 보관
을 해두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사랑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모두다 완전한 사랑이 될수는 없
는거란다. 그 사랑이 변질되거나 퇴색되지않게 늘 가슴에 보관하고 지켜야 하니까...
굳이 사랑에도 유효 기간을 정해야 한다면 그건 그 사랑의 주인이 노력한 만큼이 아닐까?
엄마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제일 중요한것 같다고 생각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일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지만 그만큼 소중한 사랑이기에 그 사
랑을 지켜나가는 일은 어렵거든."
"우리 어머니 글쓰셔도 되겠는데요?"
"멋있었니?"
"최고예요."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잖니. 유치한 사랑 얘기 손에달고 산세월이 얼만데.."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의 어깨를 안고있던 손에 더욱 힘을주어 안는 재하의 시선은 무심코
어머니의 손에 들린 소설책의 제목으로 향했다.
새하얀 표지에 연분홍색으로 적혀있는 책의 제목. '첫사랑'
첫사랑이라는 단어가 재하의 가슴을 두드렸다. 나의 첫사랑 서정민...
"나만 빼고 둘이 데이트 하는건가?"
"아버지. 나오셨어요?"
"오냐. 할얘기 있으니 들어가자."
"네."
"당신없으면 나 아무것도 못하는거 알면서 왜 여기 있소."
"이이는.. 애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네. 어서 들어가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손을 꼭 잡고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하는 이 자리에 없는
정민을 원망하며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부모님의 뒤를 따라 집안으로 향했다.
복사실에서 커피 한잔을 들고 복사기가 작동되는 소리를 들으며 오늘은 한층 더 초라해 보
이는 밖의 나무를 보고 있던 정민은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하는 핸드폰 소리에 얼굴을 찌푸
렸다.
"결혼 준비는 잘되니?"
"응. 잘지냈어?"
"그렇지 뭐. 기분 어때?"
"이상해. 나 결혼 하지말까?"
"훗.. 하지마."
"어머. 얘좀봐? 서정민 미워서라도 할꺼다!"
"무슨 일로 전화한거야?"
"아참. 내 정신좀봐. 우리 결혼식 피로연 쌍쌍파티 할꺼거든? 너야뭐 어차피 태형이랑 같이
올테니 쌍쌍파티를 하든 뭘하든 상관없겠지만."
은하는 정민의 대학시절 친구였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느끼는 해방감을 즐기는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늘 책을 싸안고 살았던 정민에게 다가온 친구.
시간과 돈을 아끼기위해 빵으로 대충 점심을 해결하고 수업시간 외에는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하던 정민에게 많은 도움이 된 친구였다. 태형이를 만나기 시작하면서 잠시 공부에 소
홀해진 정민은 은아의 노트가 아니었으면 장학금을 놓칠뻔 하기도 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 늘 공부와 아르바이트에 시달리던 정민이 마음을 터놓는 유일
한 친구인 것이다.
태형과도 대학때 만나 연애를 시작했기에 정민과 태형의 사이를 누구보다 잘알고 있는 은
아였지만 아직 헤어진 사실은 모르고 있는듯 했다.
"쌍쌍파티라니?"
"우리 나이가 몇이니? 나나 상수친구들 다 결혼했거나 결혼 앞두고 있으니까 쌍쌍파티로
하려구. 재밌잖아. 뭐 부자들만 파티하라는 법있니? 파티라고 이름만 붙이면 그게 파티지.
안그래?"
"그래.. 재밌겠네."
"태형이한테는 니가 말해. 알았지?"
"... 그래..."
"근데 너넨 언제 결혼할꺼냐?"
"글세.."
"올해안은 어려울꺼고 내년은 넘기지마라. 내년이면 우리 서른이야."
"봐서... 결혼식 준비 바쁠텐데 노닥거리고 있어도 되?"
"기지배. 이쁘게하고와. 알았지?"
"응.."
"아참! 너희 축의금은 각자 준비해와!"
"훗... 알았습니다."
"식장에서 보자."
"응.. 준비 잘하고."
은아의 결혼식이라면 얼굴만 비추고 올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태형과 같이 가는것
은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두사람은 이미 헤어졌기에.....
편하게 알고 지내는 남자친구 하나없는 정민은 은아의 갑작스러운 쌍쌍파티 얘기로 심란
해졌다. 은아의 남편이 되는 상호도 정민과 같이 대학을 다녀서 상호 친구들도 정민과 아는
사이일것이다. 태형과 정민의 오랜 연애기간을 알고 있는 사람들...
"오늘 3시에 JY 민회장과 선약이 있으니 너도 함께 가도록하자. 이참에 확실히 얼굴 도장도
찍을겸."
"네."
"민회장한테 잘보여라. 중요한 자리다."
"네.."
"이녀석아. 대답만 네네 하지말고! 이번 신상품 합동 프로젝트도 중요한 문제지만 앞으로
유정이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된다는걸 고려해볼때 JY와의 관계는 특별히 돈독히 해둘 필
요가 있다."
"알겠습니다."
"나가봐라."
"네."
태형은 아버지와 얘기하는 내내 정민의 생각뿐이었다. JY는 정민이가 다니고 있는 회사였
다. 전부터 정민을 아끼시던 교수님의 추천으로 인해 좋은 곳에 취직하게 되었다며 아이처
럼 좋아하던 모습이 머릿속에 되새겨졌다.
우연히라도 정민을 볼수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태형은 유정 그룹으로 출근한후 처음으
로 미소를 지어볼수 있었다.
회사에서의 정민은 어떤 모습일까..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할때와 같은 모습일까..
책상에 턱을 괴고 태형이 모르는 또다른 정민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태형을 방해한건 윤
미였다. 윤미는 노크도 없이 부장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쇼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옆트임이 심한 검은색 치마와 망사 스타킹, 그리고 뾰족한 검은색 구두는 윤미의 짙은 화장
과 어우러져 더욱 천박스러워 보이게 만들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태형은 비소를 날리며 윤
미를 외면했다.
"무슨 일이야."
"JY 간다며?"
"그런데?"
"서정민. 그 여자가 다니는 회사도 JY라고 들었는데, 맞나?"
"알게 뭐야."
"서정민한테 이제 관심 끊었다는 말투네?"
"그래. 관심 끊었어. 그러니까 너도 관심 끊어."
"훗.. 관심 끊은 사람의 행동이 너무 상식밖인데?"
"무슨 말이야."
"어젯밤에 어디갔었니?"
"뭐?"
"서정민 집앞에 정태형이 서있었던 이유가 뭘까?"
윤미의 말에 태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윤미를 노려보았다.
"뭐야. 미행까지 하냐? 박윤미. 유치하네?"
"맞아. 나 유치해. 몰랐니?"
"박윤미."
"정태형. 명심해. 난말이지, 손해보는 일은 안해. 내가 잃은 사랑, 너도 잃어줘야지 공평하
다고 생각하지 않아? 흣.. 겨우 미행가지고 화내면 재미없지. 앞으로는 더 재미있는 일이
많을텐데. 서정민이 죽는건 너도 원치않겠지?"
"하하. 죽어? 죽여봐. 어디 죽일수 있으면 죽여봐."
"못할거 같아?"
"서정민이 죽든 살든 나와는 상관없어."
"그래? 후후.. 내말을 안믿나 보네? 주요리가 나오기전에 에피타이저가 먼저 나오듯이....
너한테도 에피타이저가 필요한 모양이구나?"
"무슨 말이야?"
"글쎄.. 기다려보면 알겠지."
태형에게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부장실에서 나가는 윤미의 뒷모습에 적지않는 불안함을 느
끼는 태형. 하지만 태형은 아무리 윤미라 할지라도 정민이를 다치게 하지는 않을것이라 스
스로를 안심시키며 자리에 앉아 책상에 엎드렸다.
-점심 시간 24분전이야.-
점심 시간 30분전부터 1분에 한번씩 재하에게 문자가 왔다. 다른 말도 없이 시간만 줄어드
는 단순한 문자만을 연이어 보내는 재하의 행동에 실없는 웃음만 나오는 정민은 오늘 점심
도 재하와 함께 할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재하의 문자는 '점심 시간 정각입니다.' 에서 끝이났다. 재하의 마지막 문자를 보며 정민도
자리에서 일어나 이사실로 향했다.
식사후 정민은 재하에게 은아의 결혼식에 같이 가달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정민이 혼자 결
혼식장에 간다면 온갖 얘기들로 귀찮아 질것이기 때문이다. 정민은 재하라면 편하게 부탁
할수 있을것 같았다. 쌍쌍파티라고 해봐야 결혼식후 피로연장에서 잠시 어울리는 것뿐일
테니 도중에 빠져나오면 될것이었다.
오늘도 비서는 자리에 없었다. 그리고 오늘도 정민의 노크에 바로 문을 열어주는 재하였다.
"왔어?"
"올수밖에 없게 만들었잖아."
"그래서.. 싫어?"
"아니.. 근데 이게 다 뭐야?"
정민은 테이블에 놓여진 온갖 음식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재하는 밖에서의 식사를 꺼리는 정민을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얘기를
해둔 터였다, 점심시간에 맞춰 박기사를 보낼테니 음식준비를 해놓으시라고...
일하는 아주머니가 준비해준 음식은 재하도 놀랄 정도로 화려했고 박기사도 제시간을 맞추
어 음식을 배달해왔다. 재하는 놀라는 정민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정민에게 앉으라
는 시눙을 해보였다.
"매일 이런거 먹니?"
"왜?"
"내가 먹는 음식하고 너무 달라서."
"이거 준비하느라 우리집 기둥뿌리 몇개 뽑있어. 그러니까 남기지말고 많이 먹어."
"니네집 무너지면 나한테 책임지라고 하려고?"
"눈치챘어? 우리집 무너지면 니네집에서 신세좀 지려고 했는데."
"훗.. 어쨌든 잘먹을께."
"맛있게만 먹어주세요. 서정민씨."
"맛없게 먹고 싶어도 그럴수가 없겠네요. 민재하씨."
"최기사님. 이 서류좀 대구 공장에 전해주고 오시겠어요?"
"네. 부장님."
"공장장님께 이 서류만 전해주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퇴근 시간 전까지만 도착하면 됩니까?"
"늦을것 같으면 그냥 퇴근하세요."
"네.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은근히 자동차 계열을 택하기를 바라시는 아버지때문에 태형은 오늘 대구에 있는 자동차
공장에 다녀올 예정이었다. 공장장에게 신제품에 관한 서류도 전해줄겸 해서 공장 상태를
봐두려고 했었지만 JY에 가야하는 관계로 최기사에게 대신 부탁을 한것이다.
최기사가 나간후 태형은 어느덧 점심 시간이 된것을 느끼며 한숨이 흘러 나왔다.
태형의 아버지와의 점심 식사도, 윤미와 박회장과의 점심 식사도 내키지 않은 태형은 약속
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혼자 나가 회사 근처에 있는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점심 시간을 때
우기로 결정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하야. 너 토요일에 뭐해?"
"왜? 데이트 신청하게?"
"응."
"뭐? 진짜?"
"훗.. 친구 결혼식인데 피로연에 쌍쌍파티를 한다잖아. 이 나이에 혼자 가는 것도 그렇고 해
서.. 혹시 시간되면 같이 갈래?"
"서정민 부탁이면 시간이 없어도 만들어야지."
"고마워.."
"대신 나도 부탁하나 해도되?"
"뭔데?"
"토요일 저녁에 유정 그룹 딸 결혼 발표겸 신제품 출시에 관한 작은 파티가 있어.
근데 말이야. 우리 아버지가 나는 꼭 참석해야 된대.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번에도 혼자
올꺼면 올생각도 하지말래. 도대체 어쩌라는 말씀일까?"
"응?"
"아버님 말씀은 이번엔 여자 친구와 함께 오라는 소린데... 꼭 참석해야 되는 자리에 여자 친
구없이는 올생각도 하지말라는건 여자 친구를 필히 데리고 오라는 말씀이잖아."
"아..."
"니가 같이 가줘."
"내가?"
"나도 니 친구 결혼식가서 서정민 커플로서 최선을 다할테니 너도 그래줘."
"그래도... 아버님 뵙는 자린데.. 내가 어떻게.."
"괜찮아. 응? 부탁해."
"생각.. 좀 해볼께."
"넌 너무 생각이 많아서 탈이야. 그러니까 시집을 못갔지."
"뭐?"
"농담이야. 같이 가주는거다? 알았지?"
"..."
은아의 결혼식과는 차원이 다른 자리에 동행을 부탁하는 재하. 정민은 조금 부담스러워졌다.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라면 기꺼이 동행하겠다 하겠지만 재하의 부모님에게 인사드리는 자리
나 마찬가지 인것같아 정민은 쉽사리 대답을 하지못했다.
"네."
"사장님께서 나오시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비서의 연락을 받은 태형은 JY의 민회장과의 만남을 위해 훝어본 자동차에 관한 서류를 접
고 일어나 양복 상의를 입고 나갈 차비를 했다.
그때 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책상에서 몇걸음 걸어나온 태형은 받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왠지 받아야만 할것같은 예감에 책상으로 다가가 수화기를 들었다.
"네."
"정부장님. 최기사가 대구에서 올라오는 길에 차고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네? 뭐라고요?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앞에 달리던 트럭 운전사의 졸음 운전으로 일어난 사고라고 합니다. 최기사는 병원으로 옴
기던 도중에 사망했습니다."
"네?..."
자신의 부탁으로 대구에 다녀온 최기사의 갑작스런 사고에 당황하고 놀란 태형은 수화기를
붙잡은채 말문이 막혀버렸다. 태형의 기사가 된지는 얼마되지 않았지만 서글서글한 인상에
참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부탁때문에 최기사가 죽은것 같은 생각에 태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윤미가 부장실로 들어왔다.
"무슨일 있니? 많이 놀란 표정이네?"
태형은 기분나쁜 미소를 짓고있는 윤미를 보자 오전의 윤미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설마... 설마... 아닐꺼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아닐꺼야..'
대답없는 태형에게 윤미가 다시 말을 꺼냈다.
"누가 죽기라도 했니? 꼭 누가 죽기라도 한것같은 표정이네?"
"박윤미.."
"많이 놀랬니? 벌써부터 놀라면 재미없는데.. 시작일 뿐이야. 말했지? 내말 새겨들어.
다음 순서는 누가 될지 나도 몰라. 난 우리 아빠랑은 달라서 계획성이 부족하거든.
즉흥적이야. 그래서 다음 순서도 예고해줄수가 없네. 니가 제대로 안하면 이 장난은 계속
되는거야. 알았니?"
"장난? 장난이라고 했어? 정말 너야? 니가 한짓이야?"
"훗.. JY에 갈시간 아니니? 잘하고와. 합동 프로젝트에 관한 중요한 자리니까. 우리 아빠가
너한테 기대하고 계신거 알지? 니들 부자가 정말 원하는게 뭔지는 모르지만 아직은 우리 아
빠 발밑에서 기어야하잖아? 그러려면 오늘일 잘해야 될꺼야. 갈께."
태형은 부장실에서 나가는 윤미의 뒷모습을 보며 소름이 끼쳤다. 불안한 예감은 그대로 닥
쳐왔다. 다음 순서는 누군지 모른다. 정민이 될수도 있는 것이다.
"하... 박윤이... 정말 니가 한짓이야? 정말 너야? 아무리 형편없는 사람일지언정 어떻게 이
런짓을 할수가 있니? 어떻게 사람을.... 장난? 장난이라고? 너한테는 사람 목숨이 장난이
니? 박윤미... 정말 너라면... 정말 니가 한짓이라면... 나도 가만있지 않아..
박윤미... 너 정말 무섭다... 정말... 너라는 인간... 무섭다..."
5편을 들고 왔어요^^ 내일은 6편을 올리고... 6편의 내용은 전에 올렸던것과는 조금 수정이
된 글이 될거예요^^ 그리고 모래부터는 7편... 드디어 민들레도 진도를 나가겠네요^^
읽어주시는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드려요^^
그리고 항상 힘을 주시는 분들에게도 감사합니다.
태형의 힘든 사랑의 여정이 어찌될지... 열심히 이야기를 풀어나갈께요^^
그럼 내일 6편으로 다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