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는 이유 - 1 -

나나2006.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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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를 하고 나오자 전화벨이 급하게 울려댔다. 강준호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냉큼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준호씨. 저예요. 박혜은."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수화기에 가득 퍼지자 당장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여긴 어떻게 알고 전화한 거야?"


강준호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기며 빨리 끊고 싶다는 생각만 저절로 들었다.


"나야, 당신이 가는 길이면 어디든 찾아가죠."


정말로 끈질긴 여자다. 아무도 모르게 프랑스로까지 날아왔는데 여기서도 이 여자의 관심을 받아야 하다니... 하긴 고급 호텔이니 그럴만도 하겠지. 지독한 박혜은 성격에 여기라고 못 찾겠어.


"할 말 없으면 끊어."


퉁명스럽게 내뱉으며 전화를 끊으려 하자 다급히 외쳐대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끊지 말아요. 좀 도와줘요. 여기 파리라고요. 그런데 지갑까지 다 털려서 카드 한 장 없다고요."


그녀의 말은 정말인 듯 싶었다. 하지만 정말 귀찮다. 여기 낯선 곳에까지 와서 그녀의 뒤치다꺼리나 하고 있어야 하다니. 거기다가 스케줄도 한두시간은 남는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결국 그는 여린 마음을 탓하며 그녀에게 장소를 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시간을 벌 셈으로 옷도 되도록 천천히 갈아 입었다.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머리를 드라이로 말리면서 어떻하든 그녀를 다시 한국으로 되돌려 보내야 된다는 집념만 파고 들었다.
비서실장을 비롯한 직원들에게 잠시 나갔다 온다는 말을 하고 호텔밖을 나왔다. 택시를 잡아주는 도어맨의 친절을 거절하고 박혜은이 말한 장소로 되도록 천천히 걸어갔다.
그다지 걷기에도 부담감이 없는 짧은 거리라 여기 저기 적당히 눈요깃거리를 하면서 자그마한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서자 박혜은이 손을 들어 반갑게 맞아 주었다.


"거짓말 아니야? 괜히 바쁜 사람 오라가라 하는 것 아니냐고."


툭툭 내뱉는 그의 말에 조금도 반박하지 않고 박혜은은 생긋 웃었다.


"여전히 조금도 변함이 없어. 나를 보니까 반갑지 않아요."


"아니! 전혀."


솔직한 그의 말에 박혜은은 서운하면서도 애써 내색을 하지 않았다.


"정말 준호씨는... 여전해요. 나 준호씨 보러 왔어요. 허락 받고 왔거든요. 물론 준호씨 부모님도 혼쾌히 허락하신 일이고."


그녀의 끊임없는 재잘거림은 그를 더욱 더 무거운 마음으로 가라앉혔다. 그녀가 갑자기 나타난 이유부터가 수상쩍더니 그를 점점 머리 아프게 만들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 그 지갑도 다 찾은 것 같은데..."


그가 벌떡 일어나 버리자 혜은도 그를 따라 일어섰다.


"가긴 어딜가요. 이 낯선 곳에 나만 나두고 가버린단 말이예요."


그를 끝까지 따라 나서겠다는게 그녀의 태도에 그가 질려버렸다.


"박혜은.. 그만 돌아가. 비행기표 없으면 내가 예매해 줄게."


이제는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앞세우며 고집을 내세우는 그녀에게 그도 그만 포기하고 말았다.
그는 호텔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여기저기 파리 시내를 돌아다녔다. 한참동안 그의 뒤를 쫓아다니느라 박혜은의 다리는 점점 더 거세게 아파오기 시작했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은 다리를 손으로 주무르며 그를 원망의 눈빛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것봐요. 준호씨. 도대체 어디가는 거예요?"


쎄느강을 바라보는 강준호에게 지금까지 이를 악물고 따라다니기만 했던 박혜은은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자 그에게 따져 들었다.


"그러길래, 누가 따라오래. 그만 돌아가."


무심할 정도로 냉담하기 그지 없는 그에게 반박할 대꾸도 못하고 그저 속으로 울분만 토하고 있었다.


"아뇨. 계속 따라 갈거예요."


악문 잇새 사이로 말이 새어 나왔다.


"도대체, 넌 내가 어디가 좋아서 그 난리냐?"


이윽고 듣고 싶었던 말이 강준호의 입에서 나오자 고통스런 얼굴빛은 금새 사라지고 생기가 돌았다.


"꼭 말로 설명해야 해요? 그냥 모든게 좋아요. 준호씨 얼굴. 눈. 코. 입. 하다못해 목소리까지요."


참, 콩깍지가 씌워도 단단히 씌었군. 아주 눈이 멀어버렸어. 강준호는 속으로 혀를 차며 안스런 얼굴로 박혜은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쩌냐? 난 네가 싫은데?"


얼굴이 구겨지는 그녀의 얼굴을 무시하며 몸을 돌려 호텔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아무래도 긴 시간 밖에 나와 있다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거기다가 휴대폰까지 안 가지고 온 그는 직원들이 허둥대며 찾고 있을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나를 좋아하게 될 거예요. 나를 한 번 좋아해 봐요."


박혜은이 급히 걸음이 빠른 그의 뒤를 바짝 따라갔다.


"혹시, 여자가 생긴 거 아니죠?"


난데없는 질문에 준호는 머릿속에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왜, 여자 친구가 있으면 너, 한국으로 돌아갈래?"


"설마요? 그런 거짓말로 나를 설득할 생각은 포기해요."


박혜은은 고개를 저으며 살며시 웃어댔다. 아무래도 그를 믿지 못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호텔앞에 도착했을 때 때마침 호텔안에서 나오는 어떤 여자를 발견했다. 동양인 여자를 발견한 순간 그는 덥석 여자를 잡아당겨 입술에 진한 키스를 했다. 강력히 녹아드는 그 느낌에 그도 짜릿한 흥분을 맛보았다. 더 깊숙이 하고 싶은 것을 그는 꾹 눌러대며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박혜은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그녀가 없었다. 입술을 떼고 사방을 두리번 거렸지만 역시 이것이 커다란 충격이었나 보다. 하지만 안도하는 것도 잠시, 그는 뺨에 커다란 세례를 한차례 맞고 말았다.
얼얼한 이 기분,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다. 홍당무가 되어버린 이 여자를 보고 있으려니 괜히 기분이 들떴다.


"그렇다면, 강준호씨. 저한테 빛진거 있죠? 전 르노사의 윤민아라고 합니다."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대하며 악수를 청하는 순간 그는 깨달았다.

그녀가 눈이 부시어 잠시 눈을 껌벅였다.


"그렇습니까? 르노사라면 제가 만난다고 예약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