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는 이유 - 2

나나2006.02.22
조회721

민아는 조금전의 당황스러웠던 기분을 떨쳐 버리려 애쓰며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딱딱한 사업가로만 생각했던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위엄이 그의 얼굴에 서려 있었다.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포기하고 나오는 길입니다. 그런데 갑작스런 일을 당한 저한테 설명을 좀 해 주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준호의 입가에 쓴 웃음이 베어나왔다. 자신도 딱히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는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녀를 본 순간 키스를 해야겠다는 강렬한 느낌에 스스럼없이 자신도 모르게 헤괴망측한 일을 저지르고 만 것이다.


"제가  사람을 잘 못 봤습니다. 아는 사람인 줄 알고 그만 반가움에...."


그는 차마 자세한 설명을 할수 조차 없어 은근슬쩍 변명조로 대답했다. 더 이상 물어주지 않기를 바라며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 박혜은의 행방이 묘연한게 의심쩍었다.


"네.... 그렇군요."


민아는 조그만 실망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자 뜨끔거려 고개를 떨구었다.


"강준호 사장님, 저한테 빚졌으니까 빚은 갚아야죠? 안 그래요?"


고개를 이내 쳐들며 자랑스럽게 말하는 그녀의 미소 사이로 양 볼에 보조개가 움푹 들어갔다. 준호의 시선이 그녀에게 잠시 고정되어 있다가 이윽고 자신이 지금 뭘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이렇게 한가하게 잡담할 시간이 없었다. 분명 호텔안에 있는 직원들은 난리를 치며 그를 찾기 위해 수소문을 하고 다닐 것이다.
준호의 미간에 주름이 살짝 잡히더니 기대에 찬 얼굴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민아에게로 얼굴을 돌렸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나중에 찾아오도록 해요."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말투에 민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뭐라고요! 아니 고작 한다는 소리가 나중에 찾아오라고요. 그건 절대로 안돼요."


고개까지 세게 내저으며 한치의 물러섬도 보이지 않는 완고한 태도에 준호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일이 자꾸 꼬이는 거지?


"명함이나 있으면 명함이나 주고 가요. 내가 연락할 테니까."


귀찮아하는 표정이 역력한 준호에게 민아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내가 어떻게 당신같은 사람을 믿고 기다려. 그러나 내면의 울림을 무시하고 할 수 없이 가방에서 명함을 꺼내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약속이나 지켜요."


민아는 마지못해 대답하고는 미련이 남아 있는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걱정말아요. 내가 빚은 갚을테니...'


손에 쥐어진 명함을 소중한 것을 다루듯 양복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이내 호텔안으로 사라졌다.
민아는 그가 안 보이자 허탈한 가슴을 쥐어짜며 총총히 사람들 사이로 걸어갔다.

 

 

 

 

 


준호가 호텔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버튼을 누르고 서있자 누군가가 그의 팔사이로 팔을 집어넣었다. 화들짝 놀란 준호가 거칠게 팔을 잡아 떼었다.


"도대체, 왜 그래?"


목소리에 날이 선 날카로운 말이 혜은의 귓전에 고스란이 울렸지만 그녀는 무시하며 입을 삐죽거렸다.


"준호씨야말로 왜 그래요? 모르는 여자한테 키스까지 하면 내가 울며 불며 난리칠 줄 알았나요?"


"뭐!"


"저도 이 호텔 묵어요. 앞으로 며칠 간 한국으로 돌아갈때까지 준호씨 옆에 있을테니까 내 걱정하지 말라고요. 그리고 지배인한테 부탁해서 준호씨와 같은 층에 있게 됐어요."


준호는 숨이 막혀 질식이라도 할 것 같았다. 도대체 이 여자는 정말 거머리 같은 존재다. 아무리 집안끼리 잘 알고 어릴적부터 친하게 지내온 사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숨통을 죄어올 줄은 몰랐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준호와 혜은은 안으로 들어갔다. 버튼의 숫자를 누르며 준호가 혜은을 못마땅한 표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야! 박혜은. 너 감시하려고 이 먼데까지 찾아왔니? 하지만 미안하게됐다. 아까 그 여자,  애인이거든."


툭툭 내뱉은 말투가 비위에 거슬렸지만 혜은은 애써 담담해지려 마음을 추스렸다. 아까 그 낯선 여자와 준호의 낯뜨거운 장면을 봤을 때 혜은은 치밀어 오르는 질투를 참느라 갖은 애를 썼다. 그녀는 날카롭게 쏘아보며 얼른 그 자리에서 나오고 말았다. 하마터면 여자에게 덤벼들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준호의 연출인 것을 알고 있는 혜은으로써는 그저 참는 도리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전에도 이런 유치한 방법을 써 먹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는 눈이 뒤집혀지는 바람에 앞 뒤 생각도 없이 덤벼든 것이 도리어 화근이 되었기에 되도록 이면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그런 유치한 방법으로 날 설득하려 하지 말아요. 준호씨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이미 결혼 날짜가 잡혀 있을거예요."


혜은의 말에 준호는 경악했다. 이런 빌어먹을 일이 있나! 누가 내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정한 거야.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꾹 누르며 준호는 문이 열리자 차가운 바람을 일으키며 나갔다. 뒤에 따라오는 혜은은 안중에도 없는 듯 냉랭한 바람만이 준호를 감싸고 있었다.
그가 문을 열고 안으로 홱 하니 들어가버리자 혜은은 잠시 문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해, 사랑한다고. 그런데 왜 나한테는 그렇게 차가운거야.'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혜은은 카드키를 대고 안으로 들어갔다. 호화로운 가구들이 그녀를 맞이했지만 그녀는 쓸쓸함을 이기지 못하고 소파에 힘없이 쓰러졌다.
혼자 짝사랑한다는 것이 너무 비참해 지금 와서 그렇다고 그를 포기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해주기를 바랐다. 그런 날을 손꼽아 기다린것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철이 들때부터 그를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어떠한 감정도 없다는 것이 매우 서운했다.
그러나 며칠 후에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그는 어차피 나한테로 돌아올 것이다. 모든 것이 마무리가 되고 있으니까....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혜은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잠시 후 여러번의 신호음 끝에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다.


"엄마. 저예요. 여기 파리야..... 물론 준호씨 만났지..... 얼마나 반가워 하는데..... 그럼 잘 지내. 나중에 봐요."


간단한 말로 조여사의 안부를 물은 다음 대충 얼버무리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냉장고를 열어 음료수를 꺼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리며 혜은이 음료수를 마셨다. 메말라 있던 입안이 갈증이 풀리며 목 안이 시원해졌다.
그리고 협탁위에 있던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1203호 좀 연결해 주세요]


그녀는 서투른 불어로 부탁했다.

 

 

 

 

 


문을 거칠게라도 닫고 싶었다. 하지만 준호는 인내심으로 이성을 찾기 위해 애썼다. 무엇부터 잘못 되어 있는지 알수 없어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잠시 후 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자 준호는 문을 열었다. 시뻘개진 얼굴로 숨을 헉헉거리며 뻔히 쳐다보는 사람은 비서실장인 한태호였다.


"사장님..."


가뿐 숨을 몰아쉬는 것조차 힘이 들었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응, 그래... 미안하게 됐군. 갑자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늦었어."


그는 옷장에 걸어두었던 양복을 꺼내어 침대위에 나란히 뉘어 놓았다.


"한참 찾아다녔습니다."


"그래..."


준호는 입고 있던 옷을 벗기 시작했다. 탄력적인 단단한 몸에 양복을 재빨리 갈아 입고는 한태호에게 다가갔다.


"다 된 것 같군."


"그게... 저..."


머뭇거리는 한태호의 얼굴을 쏘아보며 빨리 말하라고 채근했다.


"오늘 한국의 신문에서 요란하게 한바탕 기사가 났는데, 그게 저....."


"빨리 말해!"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며 끊어오르는 조바심을 내비쳤다.


"성화그룹 박혜은씨와 사장님의 결혼기사가 났습니다. 아무래도 한국으로 돌아가면 엄청난 취재진이 몰려 들 것 같은데요."


한태호가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자 강준호의 입매가 꽉 다물어졌다. 언젠가 터지고 말 일이 터진 일이겠지만 지금은 시기 상조가 아니었다.


"우선은 지금 약속 장소로 가지."


그가 한태호와 함께 나가려고 하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한태호가 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사장님, 박혜은씨 전화입니다."


강준호는 얼굴이 일그러지며 전화기를 건네받았다.


"뭐지?"


"말씀드릴게 있어요. 결혼기사 난 것 이미 아시리라 짐작하지만, 그건 내가 한 일이 아니예요. 오해 없기를 바래요."


"참, 기가 막히군.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강준호의 눈가에 분노가 차 올랐다.


"미안하지만, 전 아니예요. 강회장님께서 결정하신 거예요. 물론 할아버님의 명령으로요."


수화기를 든 준호의 손이 한순간 부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