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율(礎律) 제 82화

피바다2006.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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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교..." 

 초율의 목소리가 막 여자의 눈에 삼켜지려던 아화의 영혼 뒷덜미를 거칠게 낚아 챘다. 질식할 뻔 한 아화는 소스라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꿈결같은 몽롱함 속을 거닐 때 초율이 뱉어낸 그 단어는 생생한 울림으로 그녀의 귓가에 남아있었다.

  " 뭐..뭐라 하셨습니까, 전하?"

  정신을 수습하느라 경황이 없는 속에서도 아화는 초율의 말을 되짚어 물었다.

  " 가교라 하였다. 그것이 이 아이의 이름이다. "

  초율은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해주었다.

  아화는 묘영을 떠 올렸다. 하지만 곧 스스로 자신의 순진함을 비웃었다. 묘영의 죽은 언니가 다시 살아 돌아올 리는 없었다. 아무리 초율의 사랑을 차지한 유일의 여자였지만 이렇듯 환상처럼 아름다울 수도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여자는 묘영과 전혀 닮지 않았다.

  아화는 어째서 여자의 이름이 '가교'가 되었을까 짐작하여 보았다. 사랑했던 여인, 묘아에게 초율이 내려준 이름이 가교였다.  '세상과 이어주는 아름다운 다리' 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세상에서 버려진 숙명적인 고아 초율을 다시금 세상 밖으로 끌어내 준 것이 묘아였고, 그녀는 초율에게 2번째 삶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옥같은 세상에서 자신을 끌어내 세상의 밝은 빛을 보게 해준 그녀를 초율은 아름다운 다리, 가교라 불렀다. 그 이름을 갖는 순간 그녀는 또한 초율의 운명이 되었던 것이다. '가교'는 그렇듯 절절한 사연이 있는 이름이었고 초율에게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단어였다. 그런데 초율이 데리고 온 이 낯설고도 아름다운 여자가 '가교'로 불리고 있었다. 

  아화는 그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자는 초율에게서 그 귀한 이름을 받은 것이다. 가슴 속에 오롯이 박혀 아직도 초율의 기억을 지배하는 묘아의 또 다른 이름 '가교'를 초율이 이 여자에게 주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아화는 다시 한 번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갓 태어난 아이처럼 맑고 순진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듯 그 눈에 어떤 감정도 싣지 않고 조용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초율은 다시 한 번 세상을 향하는 지도 몰랐다. 이 여자를 통해 자신을 행복하게도 했고 절망하게도 했던 그 여자들을 다시 살려내고 싶어하는 걸 수도 있었다.  기쁨은 잠시일 뿐 외로움과 절망만을 남기고 떠난 지나간 여자들을 깨워내 묻고 싶은 것이었다. 너희가 나에게 준 것이 무엇이었는가. 너희는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어했는가 하는 것. 초율은 새로운 가교를 통해 그 해답을 찾으려 하는 것이라고 아화는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드는 의문은 그렇다고 이 여자의 이름이 '가교'가 되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었다. 분명 이 여자는 초율에게 죽은 묘아 못지않게 중요한 존재가 분명했다. 아화는 설명할 수 없는 투기심이 몸을 풅고 지나가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놀랐다. 그것은 단단한 성벽과 같아 결코 뚫리지 않을 것 같던 제 4황자의 마음에 들어간 여자에 대한 기녀 본연의 질투였다. 자신이 얻지 못한 남자의 마음을 얻은 여자에 대한 기녀들의 본능과도 같은 질투심이었다.

  아화는 씁쓸하게 웃으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들킬까 싶어 서둘러 말을 꺼냈다.

  " 하온데 전하....소녀의 짧은 소견으로는 모르는 부분이 있사옵니다. "

  아화는 자신에게 책임이 완전히 떠넘겨지기 전에 분명히 해 두고 싶었다.

  " 전하께서는 소녀에게 '여자에 대해 알게 하라'하셨습니다. 소녀는 전하께서 아마도 남자를 데리고 오실거라 짐작하였지요. 하오나.....여자라니 소녀 솔직히 놀랐사옵니다. "

  초율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여자도 인형같이 감정없는 두 눈을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 여자를 알게 하라시고......이미 타고난 여인의 천성으로 그 안에 해답을 가진 여자를 데리고 오시다니. 소녀의 어리석음으로 이해하기 어렵사옵니다. "

  초율의 명은 분명 심한 모순이었다. 마치 먹을 던져주며 검게 만들라는 것과 마찬가지의 노릇이었다.

  " 가교는 아무것도 모른다."

  초율의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화는 그 말의 느낌이 얼핏 슬픈 듯 하였다.

  " 여자로 태어났으되, 여자가 무엇인지 모른다. 갓 태어난 영혼일 뿐이지."

  초율은 짧은 말로 설명을 끝냈다. 아화는 그 말의 진정한 뜻을 해석하는 일은 자기 몫으로 남았음을 알았다. 잠시 여자의 눈을 다시 들여다 본 아화는 그 사슴처럼 순진무구해보이며 호기심으로 타오르는 눈을 보고는 어쩌면 초율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할 일은 분명 초율의 명령대로 가교의 타고난 숙명-여자로서의 생명력에 불씨를 던지는 일인지도 몰랐다. 이제 책임은 아화에게로 완전히 넘어온 셈이었다.

  " 언제든 원할 때 가교를 보러오겠다. 네가 명심할 것은 여자에 대한 모든 것을 보여주고 가르치되.....짐슴같은 수컷들의 욕정이 가교에게 미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초율은 짧게 못을 박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말에 아화의 가슴이 찡하고 울렸다. 아주 잠시 그의 마음을 읽은 것만 같았다. 아화는 집요해져서는 초율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녀는 대기하고 있는 마차를 향해 눈을 밟으며 걷는 초율의 뒤를 따르다 걸음을 서둘러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 저 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제가 어찌 대하여야하는지 일러주십시오. 제가 어찌 처신하여야합니까?"

 아화는 자신의 호기심을 드러내면서도 마치 초율을 위한 일인 듯 교묘하게 말을 돌려 책임을 피하고 있었다.

  " 가교가 누군지 알려고 들 필요는 없다. 단지 열성을 다하여 네 맡은 바에 임하라."

  ".........마음에 두고 계신 분이십니까?"

  초율이 단칼에 자신의 말을 자르자 아화는 오기로 그 칼날을 잡듯 말했다. 그것이 주제넘게 초율에게 정면으로 들이대는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았지만 아화는 한 편으로 그가 자신을 어쩌지 못할 거라는 확신도 섰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아화의 도전적이고 무례한 언행은 몇 번이고 초율의 손에 죽을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불같이 화를 내고 살기를 쏟았지만 초율이 진짜 그녀를 해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손조차 대기 싫을 정도로 천한 족속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화는 그렇다하더라도 기꺼이 그 감정을 이용해 먹을만큼 간사한 끼가 있는 여자였다. 그녀는 기녀였던 것이다.

  하지만 아화의 예상은 빗나갔다. 초율은 화를 내지 않았다. 짧은 침묵이 지나고 그의 목소리가 가면 뒤에서 조용히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는 응어리진 감정을 누르는 듯 억제되었으면서도 약간은 떨리고 있었다. 아화가 듣기에 그 목소리는 전혀 다른 사람의 목소리였다. 매섭게 몰아치는 겨울 바람이 그렇게 들리게 했는지도 모르지만 아화는 참으로 낯설었다. 어디선가 들은 듯도 하지만 기억나지 않는 그런 거리감있는 목소리가 아주 선명한 애틋함이 묻은 채 바람처럼 흘러나왔다.

  " 마음이라...훗. 감히 어찌 가질 수 있겠느냐. 마음에 품는 것조차 아니 될 것을...."

  그런 낯선 초율의 모습이 흰 눈밭위에서 애처롭게 멀어져갔다. 아화는 그 날 다른 누군가를 대한 기분이었다.

 

  제공은 뒷짐을 지고 창문을 향해 서서 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열린 창문으로 나른한 오후의 봄바람이 불어들어와 그의 청록빛 머리카락을 스쳤다. 봄의 한 가운데서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력은 최고조에 이르러 있었다. 뜰은 봄꽃들이 모두 피어나 흐드러져있었고 벌과 나비는 꽃과 꽃 사이를 춤추며 날아다녔다. 싱그러운 어린 싹들이 땅을 폭신하게 뒤덮고 있는 정원은 활기가 넘쳐흘렀고 불어오는 바람에는 숨막힐 정도로 짙은 꽃내음이 가득했다.  

  하지만 제공은 그저 한 낮의 여유를 즐기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의 뒷 편, 책상을 건너 선 자리에는 정장을 한 말끔한 남자가 꼿꼿하게 차렷자세를 하고 서서 제공에게 보고를 하고 있었다. 남자의 보고 사항은 한들한들 불어오는 봄바람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겁고도 수상스러운 것이었다. 그가 보고를 끝내고 입을 다문지 한 참이 지나서야 제공은 몸을 돌려 그에게 처음으로 시선을 주었다. 제공의 얼굴은 엄격했고 그 낯빛에 남자는 저도 모르게 차렷 자세를 다시 잡았다.

  " 군사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제공이 남자에게 물었다. 그 아름다운 목소리에 무게가 실리자 더없이 강하게 다가왔다.

  " 한심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반 수 이상이 훈련조차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나오는 이들도 그저 바람이나 쐬러 나오는 식입니다. 형식적인 훈련인데다 참석하지 않아도 징계조차 없으니 어느 누가 자발적으로 나서겠습니까? 병사들은 나태해질대로 나태해졌고 소대장들이 통솔력을 잃은지 아주 오래입니다. 그러면서 봉급은 때에 맞춰나오지요. 그러니 다들 '지상낙원'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

  제공은 책상에 허리를 맡기고 섰다. 팔짱을 끼고 선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했다. 그리고 제공이 다시 입을 열었다.

  " 정체를 들키진 않았겠지?"

  " 물론입니다. 먹고 마시며 흥청망청대는 그런 바보같은 무리들한테 들킬리가 있겠습니까?"

  남자는 그 순간 긴장을 풀고 자신있게 대답했다. 하지만 곧 제공의 날카롭게 빛나는 눈빛을 느끼고 자신의 경솔을 깨달았다. 그는 자세를 더욱 바짝 바로 잡으며,

  " 조..죄송합니다. 경계하겠습니다. "

  제공은 책상을 둘러 몇 걸음 걷더니 서랍을 열었다. 남자에게 다가 온 제공의 손에는 돈이 든 작은 주머니가 들려있었고 제공은 그것을 남자의 손에 쥐어주었다.

  " 수고했다. 다시 부를 때까지 조심해라."

  남자는 자신이 가져온 하찮은 소식에 비해 매번 과하게 내려지는 포상에 이번에도 염치없음을 느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부담감만 몇 배 더 해진 기분으로 제공의 집무실을 조용히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남자가 사라지고나서 제공도 집무실을 벗어났다. 따스한 봄볕이 드는 뜰로 나서자 확실히 기분이 나아졌다. 봄의 볕이 몸을 어루만지는 느낌은 부드럽고 편안했다. 어머니의 손길이 주는 자상함과 아늑함이 봄볕 속에 있었다. 제공은 머리카락을 스치는 가벼운 봄바람과 피부를 간지르는 햇빛을 마음껏 즐겼다. 바람과 햇빛도 이 아름다운 남자를 애무하는 것이 기쁜 듯 더욱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제공은 다시금 생각을 펼쳐야만했다. 조금 전 그를 만나고 돌아간 남자는 제공이 설무랑의 2천 동방군 속에 숨겨 놓은 정보원이었다. 설무랑은 술자리가 지난 며칠 뒤, 천제에게 요구한대로 2천명의 늙거나 게으르고 의욕없는 병사들을 얻었다. 그 기이한 군사들 속에 제공이 믿을만한 정보원을 하나 끼워두는 것은 손쉬웠다. 하지만 그가 가져온 정보라는 것은 모두 다 하찮은 것 뿐이었다. 제공이 예상한 바는 완전히 벗어나 설무랑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그럴 수록 제공은 속이 더 타들어갔다. 설무랑이 조용할 수록 그 위기감과 불안감은 커질 수 밖에 없었다. 폭풍은 반드시 불어올 것이라는 게 제공의 생각이었다. 폭풍전의 고요가 깊을 수록 폭풍우는 거셀 수 밖에 없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지나 봄이 왔지만, 설무랑은 무슨 생각인지 선발된 군사들을 방치해 둘 뿐이었다. 그는 병사가 소집되고 며칠이 지난 뒤, 단 한 차례 병영을 방문했을 뿐이었다. 형식적으로 10명 단위의 소대, 100명단위위 중대와 1000명 단위의 대대가 조직되어있고 각 장(長)들이 선발되었지만 정보원에 의하면 그것도 설무랑이 나서서 조직된 것은 아니라하였다. 장들 역시 실력이나 경력과는 무관하게 제비뽑기나 거수로 임의 선발되어 권위따위가 전혀 없다하였다. 정말 그들은 버린 자식처럼 팽개쳐진 채 놀고 먹었다.

  그런 오합지졸을 데리고 무슨 수로 2만명의 수라족을 치겠다고 장담했는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제공에게는 떠오르는 묘수가 없었다. 천계에서 가장 용맹하고 단결을 잘한다는 제공의 남방군사들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2천명의 군사로 2만명을 치겠다는 것은 애초에 말도 안되는 게임이었다. 지장(智將)이라는 제공이 개인적으로 공을 들여 키워낸 남방특수군을 끌고 지략을 발휘하면 해 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의 설무랑의 군사들이라면 잘 훈련된 수라족 수십명만으로도 몰살당하기 딱 좋았다.

  그런 설무랑의 이해할 수 없는 여유에 제일 실망한 사람은 당연히 천제 비류천이었다. 누구보다 기대가 컸던 천제는 2천 동방군의 실태를 보고 받은 뒤 믿을 수가 없어 직접 시찰을 나갔다. 하지만 천제의 방문에도 설무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크게 노한 천제는 곧바로 설무랑을 제황성으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소식통에 의하면 제황성을 나오는 설무랑은 웃고 있었고, 그 후 천제는 마치 2천 동방군이 애초에 없는 존재인 듯 그에 대한 관심을 끊은 채 언급하는 일조차 없었다. 그 때, 제공은 설무랑을 상대하는 것이 지금껏 대했던 어떤 거대한 적들보다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와의 싸움이 그 생애 가장 치열할 것이라는 것도 예감했다.

  동방군의 책임자인 지국천왕에게도 기대할 것은 없었다.  지국천도 설무랑의 그런 태도와 여유가 의도적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 속셈에 당하지 않으려고 긴장하고 있었지만 그 역시 아들 설무랑의 여유를 해석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국천이 제공에게 한 가지 중요한 정보를 넘겨준 것이 있었다. 그것은 촉룡산의 영지권이 비로소 최근에야 4황자에게 완전히 이양되었다는 것이다. 제공은 제 4황자가 그렇게나 애타게 되찾으려하던 촉룡산이 뒤늦게 이양된 것에 주목했다. 제공은 설무랑과 제 4황자의 관계에 도 촉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더구나 제 4황자는 어느 순간부터 완전히 숨어버렸다. 북궁에 보낸 첩보원마다 그 어떤 실력자라도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버리자 제공은 더 이상 제 4황자를 감시하는 것을 단념했기때문에 더더욱 그를 찾을 길이 없었다. 만화루에도 초율은 발을 끊었다.

  그렇게 봄은 애매하고도 불안한 기운으로 피어올라 있었다. 그리고 후덥한 공기를 몰고 계절은 여름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이죠?^^ 저희 쪽에선 2월이 오히려 1년의 마감이라 모임에, 일에 분주했답니다. 봄이 어느 새 찾아왔네요. 오늘은 가볍게 차려입고 나갔다왔답니다. 오는 봄 즐겁게 맞이하시고 활기차게 생활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