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열하는 태양 아래 공기까지 끓어올랐다. 그 후덥한 공기를 들이쉰 폐까지 익어버릴 듯 고통스럽도록 무더운 여름 낮이었다. 태양이 폭주할 수록 풀과 나무만 그 푸르름을 더 해 갈 뿐, 다른 생명에게서 에너지를 얻으며 호흡하는 것들은 기를 펴지 못하고 늘어져있었다. 하늘은 맑았지만 그 공간을 삶의 터전으로 하는 날개달린 짐승들은 보이지 않았다. 동방성의 왕자궁 정원에도 여름의 태양열이 폭군처럼 스며들어와 구애하는 숫매미들만 목이 쉴 듯 울부짖을 뿐 모든 것이 바짝 엎드려 숨 죽이고 있었다.
그런 무더위 속에 설무랑은 한참을 말을 달리고 돌아왔다. 주인의 야성적인 검은 피부를 닮은 설무랑의 흑마(黑馬), 풍명(風鳴)역시 모든 생물이 그렇듯 타오르는 태양열을 견디지 못하여 온 몸에서 땀을 쏟아내고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천마는 설무랑이 안장에서 내리자 뜨거운 입김을 뱉어내며 휘청거렸다. 설무랑은 땀에 젖은 천마의 배를 쓰다듬어 주고는 달려온 하인에게 고삐를 넘겼다. 하인이 말을 끌고 천천히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설무랑은 흥건하게 젖은 웃옷을 벗었다. 태양 아래 땀에 젖은 그의 근육이 번들거렸다. 그의 등과 가슴을 타고 흘러내린 땀은 온 몸에 난도질된 상처를 만나 계곡처럼 따라 흘렀다. 잘 단련된 건강한 그의 육체는 매력적이고 야성적인 강함이 묻어났지만 생사의 문을 수도 없이 드나든 고통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상체에 수없이 많이 새겨진 상처는 곱게 새살이 올라 얼핏 아름다운 무늬와도 같아 보였다.
설무랑은 곧장 목욕탕으로 향했다. 젖은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놓고 그는 차가운 물 속에 뛰어들었다. 찬 기운이 서서히 그의 몸에서 땀을 씻어내고 더위를 몰아갔다. 머리 끝까지 찬물에 담가 한참 잠수를 한 설무랑이 호흡을 몰아 쉬며 머리를 밖으로 내었다. 이제 더위는 완전히 굴복하여 물러나 있었다. 설무랑은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편안한 자세로 욕조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그 때,설무랑을 모시는 단 한 명의 시녀가 습관처럼 쟁반에 차가운 과일주와 잔을 얹어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기계적으로 쟁반을 탁자위에 놓고 설무랑의 목욕을 거들기 위해 부드러운 수건과 고급 비누를 집어들었다. 반복적인 일상이기에 설무랑은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고 감정없이 말했다.
" 그냥 물러가라. "
시녀는 설무랑의 뒷통수에다 의미없이 고개 숙여 예를 표하고는 발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물러났다. 설무랑은 욕조에서 나와 앞을 여미지 않고 그저 가운을 걸친 채 준비된 과일주로 다가갔다. 얼음이 담긴 잔에 과일주를 가득 따른 설무랑은 잔을 집어들면서 중얼거렸다.
" 웅무...."
그러자 설무랑이 마주한 벽의 한 쪽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벽은 녹아내리는 가 싶더니 곧 욕조에 가득한 물처럼 잔잔한 파랑을 만들어내며 꿈틀거렸다. 흐물거리는 벽에서 두 개의 뿔이 달린 거친 금발을 한 머리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이어서 비정상적으로 발달된 어깨와 가슴과 팔과 다리가 밖으로 나왔다. 마침내 그 형상을 되찾아 목욕탕 바닥에 바짝 엎드려 최대한의 예를 올리는 그는 바로 수라족 웅무였다. 설무랑은 느긋하게 술을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다.
" 부르셨습니까, 주군!"
인사를 하는 그의 목소리는 우락부락하게 생긴 외모와 달리 감격으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오랜만에 보는구나..."
설무랑은 잔잔한 웃음을 띄며 다정하게 인사를 받았다. 웅무는 그저 다시 한 번 머리를 바닥에 닿을 정도로 조아리며 황송함을 표했다.
지난 번 촉룡산에서의 대면 이후 둘이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다시 부를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라던 설무랑이 자신을 너무도 오랜 시간 불러주지 않아 웅무는 이제 피가 바짝 마를 지경이었다. 주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걱정이 앞서 그는 몇 번이고 천계와 수라계의 경계지점까지 왔다가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설무랑이 꿈의 문을 열고 나타나 그를 부르고 떠나자 그는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단걸음에 달려온 것이다. 설무랑도 오랜만에 만나는 웅무에게 더없는 반가움으로 인사하였지만 웅무의 감격에 비할 게 못 되었다.
그런데 나타날 때부터 웅무는 약간 불안해보였다. 그는 계속 한 쪽으로 시선을 주고 있었다. 조심스럽고도 민첩한 동작이었지만 설무랑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 괜찮아. 신경쓰지마."
설무랑은 웅무를 달래 듯 말했고 웅무는 여전히 신경이 쓰였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 감정을 숨겼다.
설무랑은 빈 잔에 다시 과일주를 넘치듯 따라 웅무에게 건넸다. 웅무는 두 손으로 잔을 받아들고 황급하게 잔을 비웠다. 그런 웅무를 보며 설무랑은 더욱 밝게 웃으며 말했다.
" 웅무, 내가 요새 좀 심심해져서 말이야. 놀이판을 한 판 벌려볼까 하는데..."
" 하명하시옵소서, 주군."
웅무는 빈 잔을 한 손에 쥔 채 고개를 조아리며 힘차게 말했다. 주인의 뜻을 알아차린 웅무는 당장이라도 그대로 몰아부칠 기세였다. 하지만 설무랑은 뜸을 들이며 천천히 몸을 숙이더니 그의 손에 들린 잔을 살며시 빼냈다. 그리고 다시 한 잔을 따라 여유롭게 맛을 음미하면서,
" 동방의 과일주는 따라올 곳이 없지. 그거 하나만은 마음에 들어....."
설무랑은 목욕탕의 흰 불빛에 투명한 잔에 담겨 신비하게 찰랑이는 보랏빛 과일주를 비춰보이며 그 빛깔과 혀 끝에 남은 향을 감상했다. 웅무는 보랏빛 액체가 빛에 아롱이는 모습을 감탄스럽게 바라보는 주인의 표정을 얼핏 살피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주인이 묻거나 명하기 전에 먼저 입을 열지 않던 웅무는 이번에는 좀 다급해져서 그 원칙을 깨고 말았다.
" 주군...이...이 곳이....."
하지만 주제에 넘는 물음이라는 생각이 스치면서 웅무는 자신의 도발적인 행동에 놀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이미 꺼내버린 첫 마디를 수습하지 못해 어쩔 줄 몰라했다.
" 뭐가 알고 싶은거지?"
설무랑은 부드럽게 되물었지만 웅무는 더욱 난처해져서 머리를 거의 바닥에 쿵쿵 찧으며,
" 불경을 용서하십시요, 주군...이 미천한 것이 분수를 모르고....."
" 웅무, 뭐가 알고 싶으냐고 물었다. 같은 말을 더 반복하게 할 생각이더냐?"
설무랑은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조금 엄하게 다시 물었다. 이 무식할 정도로 순진한 충복은 이럴 때면 한숨이 나올 정도로 답답했다. 오랜 시간 충신으로 곁에 있던 웅무를 설무랑은 때론 주종관계를 떠나 벗처럼 느끼곤 했다. 웅무 역시 설무랑에게 신하가 가지는 충성 이상의 애착과 애정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마음에 꼭꼭 담아둘 뿐 언제나 신하로써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설무랑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설무랑은 역시 그런 웅무를 다룰 줄 알았다. 웅무는 할 수 없이 말을 이었는데 그 말에는 진득하니 애타는 마음이 묻어있었다.
" 이 곳이..주군의...마음에 드십니까?"
" 하하하하...하하하하....."
예상치도 못한 웅무의 물음에 설무랑은 목젓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었다. 속마음을 숨기지 않은 그 시원스런 웃음소리는 욕실 벽에 부딪히고 돌아오면서 메아리쳤는데 그 순간의 그 소리는 마치 2명이 동시에 내어지르는 것과 같았다. 주를 이르고 있는 목소리 아래 살짝 깔려 들릴 듯 말듯 함께 튀어나온 낮은 목소리에 웅무는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 얼마나 그립던 목소리인가.
겨우 웃음을 멈춘 설무랑의 눈가에는 살짝 물기까지 묻어나 있을 정도로 그는 간만에 속시원하게 웃었다. 웅무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설무랑은 잘 알았다. 투박하고 거칠게 생긴 이 짐승은 때때로 그 예상 밖의 순진함으로 설무랑을 이렇게 웃게 만들곤 했다.
" 그래, 웅무. 이곳이야말로 내게 딱 맞는 곳이야. 영원히 이 곳에 눌러 앉을 생각이다."
설무랑의 예상대로 웅무의 표정은 마치 뒷통수에 거대한 바위라도 떨어진 듯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설무랑은 이 순박한 충신이 자기 말을 사실대로 믿고 뛰어내리기 전에 장난을 그만두었다.
" 농담이야...."
웅무는 표나게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그의 어깨가 편안하게 축 늘어지는 것을 보고 설무랑은 입가에 웃음을 띄며,
" 솔직히 이 곳이 싫지는 않다. 이 곳의 공기는 따뜻하고 향기로우며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부드럽지.마음이 아늑해지는 곳이야. 하지만......"
설무랑은 말을 잠시 멈추었다. 그의 머릿 속에는 척박하고 거친 야생 상태인 수라계의 장관들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 하지만 나는 날마다 수라계의 피냄새가 사무치게 그리워. 내가 돌아갈 곳은 내 고향 뿐이다, 웅무."
웅무는 감격에 젖었다. 혹여나 설무랑이 오랜 시간 천계에 머물면서 그 몸이 가지고 있던 향수가 깨어나 천계에 눌러앉아버리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다 문득 과일주를 들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 어떤 아늑함이 스치자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주인은 고향을 잊지 않고 있었다. 분명히 돌아올 것이라 말해주자 그는 불안감이 사라지고 벅찬 감동이 몰려옴을 느꼈다.
설무랑은 잔잔한 웃음을 거두고 약간 악랄하게 눈빛을 빛냈다.
" 천계가 탐난다면...뺏어버리면 되는 거지. 안 그래?"
" 현명하신 생각이십니다. "
" 이제 조무래기들로 치는 장난질은 그만 두자. 천계놈들도 지루해졌을테니까 이제 본판을 열어야지."
설무랑이 말하는 것은 자신이 동방으로 돌아온 후 지속되던 수라족의 주기적인 소규모 침공을 뜻하는 것이었다. 지국천은 처음에 설무랑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던 국경지대 수라족의 빈번한 침략에 잔뜩 긴장하여 과하게 진압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수라족의 공격은 빈도가 잦아졌을 뿐 특징적인 변화가 없었고 그다지 피해를 입히지 않았던 터라 서서히 동방군의 방어공격도 시들해져가는 상황이었다. 설무랑이 그것으로 동방군의 전력을 파악하려 했다는 것을 아는 이가 없었다.
" 수라군으로 도솔천 북동쪽을 쳐라. 200여개의 부락을 빼앗는거다. 수라군을 얼마를 동원하든 상관은 없다만 지국천의 똥줄이 타게 되도록 거칠고 잔인하게 짓밟아. 수라병사들의 눈이 뒤집힐 정도로 굶겼다가 풀어놓는 게 좋겠군. 볼 만 할거야...2차 마계 대전 이후 잊고 있던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천계놈들이 다시 느끼게 해 주는거지. "
설무랑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듯 그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 그의 눈동자가 서서히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 끝이 나면 2만을 남기고 철수하도록 해. 특히나 남겨둘 2만명에게는........천계놈들의 부드러운 고기를 실컷 먹이도록 해라. 병사들이 지르는 즐거운 비명소리가 동방성에 있는 내 귀에도 들릴 정도로 마음껏 즐길 수 있게 해 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천국이 될 테니 그 정도는 해 줘야지 않겠어?"
그 말에서 무엇인가를 짐작한 웅무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그 말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잔인한 예언이었다. 그럼에도 설무랑은 동요하는 기색없이 즐거운 얼굴이었다.
설무랑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자 웅무는 온몸의 세포가 오그라들 정도로 얼어붙었다. 그것이 설무랑이 가진 절대감이었다.
" 목..목을 걸고 반드시 이행하겠습니다. 군의 선두에서 제가 이끌겠나이다!"
웅무는 경직된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내었다. 하지만 설무랑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눈빛이 더욱더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 너는 나서지 마라."
웅무는 놀라 고개를 들고 설무랑을 올려다보았다. 주인이 중요한 계획에서 자신을 빼버리려하자 서운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설무랑의 불타는 붉은 눈을 마주한 순간 웅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숨이 막힐 정도의 본능적인 공포가 그를 사로 잡았다.
" 주....주군!!"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웅무는 바짝 엎드렸다. 그의 몸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웅무는 대대로 수라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장수 집안 출신이었다. 수라왕족의 절대성과는 비교할 바가 못되지만 강한 혈통으로 상대할 자가 없는 집안의 순수한 혈통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강하기 때문에 수라왕족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결과, 대대로 이어지는 피 속에는 수라왕족을 지켜본 그 공포 역시 따라 이어지게 된 것이다. 수라왕족에게서 느끼는 공포는 힘을 다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그 자체로도 사람을 죽음으로 내 몰만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설무랑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미소 속에 피빛의 죽음이 숨어있었다.
" 웅무, 너를 못 믿어서가 아니다. 이 따위는 네가 죽을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야."
" 알겠습니다, 주군."
웅무는 여전히 아쉬운 기색이 남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수라족이 가진 맹목적인 충성의 본성이었다. 설무랑은 웅무의 오른 쪽 어깨를 힘있게 쥐었다.
" 너는 더 큰 자리에서 죽어라. 나를 위해 ."
설무랑은 몸을 세우며 목소리를 줄여 말했다.
" 이제 돌아가라. 그리고 바퀴벌레는 처리해서 먹어버려."
설무랑이 목욕탕을 벗어나자, 웅무는 순식간에 벽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곧 욕조의 하수구멍이 열리면서 욕조를 가득 채웠던 물이 회오리를 만들며 빠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물은 어느 새 피로 가득한 물로 변해있었다. 지국천이 보낸 감시원은 설무랑과 웅무의 만남에서부터 어마어마한 비밀을 알아내고도 입을 열지 못하고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3박 4일을 잡아 제주도에 다녀왔답니다. 서서히 봄이 찾아드는 시기라 아직까지는 칙칙한 검은 빛이 섞인 제주도였습니다만 한동안 여행을 못 다닌 제게는 즐거운 시간이 분명했습니다. 바람부는 제주도에서 고마운 메일을 한 통 받고 더욱 열심히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3월입니다. 봄빛의 행복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초율(礎律) 제 83화
작열하는 태양 아래 공기까지 끓어올랐다. 그 후덥한 공기를 들이쉰 폐까지 익어버릴 듯 고통스럽도록 무더운 여름 낮이었다. 태양이 폭주할 수록 풀과 나무만 그 푸르름을 더 해 갈 뿐, 다른 생명에게서 에너지를 얻으며 호흡하는 것들은 기를 펴지 못하고 늘어져있었다. 하늘은 맑았지만 그 공간을 삶의 터전으로 하는 날개달린 짐승들은 보이지 않았다. 동방성의 왕자궁 정원에도 여름의 태양열이 폭군처럼 스며들어와 구애하는 숫매미들만 목이 쉴 듯 울부짖을 뿐 모든 것이 바짝 엎드려 숨 죽이고 있었다.
그런 무더위 속에 설무랑은 한참을 말을 달리고 돌아왔다. 주인의 야성적인 검은 피부를 닮은 설무랑의 흑마(黑馬), 풍명(風鳴)역시 모든 생물이 그렇듯 타오르는 태양열을 견디지 못하여 온 몸에서 땀을 쏟아내고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천마는 설무랑이 안장에서 내리자 뜨거운 입김을 뱉어내며 휘청거렸다. 설무랑은 땀에 젖은 천마의 배를 쓰다듬어 주고는 달려온 하인에게 고삐를 넘겼다. 하인이 말을 끌고 천천히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설무랑은 흥건하게 젖은 웃옷을 벗었다. 태양 아래 땀에 젖은 그의 근육이 번들거렸다. 그의 등과 가슴을 타고 흘러내린 땀은 온 몸에 난도질된 상처를 만나 계곡처럼 따라 흘렀다. 잘 단련된 건강한 그의 육체는 매력적이고 야성적인 강함이 묻어났지만 생사의 문을 수도 없이 드나든 고통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상체에 수없이 많이 새겨진 상처는 곱게 새살이 올라 얼핏 아름다운 무늬와도 같아 보였다.
설무랑은 곧장 목욕탕으로 향했다. 젖은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놓고 그는 차가운 물 속에 뛰어들었다. 찬 기운이 서서히 그의 몸에서 땀을 씻어내고 더위를 몰아갔다. 머리 끝까지 찬물에 담가 한참 잠수를 한 설무랑이 호흡을 몰아 쉬며 머리를 밖으로 내었다. 이제 더위는 완전히 굴복하여 물러나 있었다. 설무랑은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기며 편안한 자세로 욕조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그 때,설무랑을 모시는 단 한 명의 시녀가 습관처럼 쟁반에 차가운 과일주와 잔을 얹어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기계적으로 쟁반을 탁자위에 놓고 설무랑의 목욕을 거들기 위해 부드러운 수건과 고급 비누를 집어들었다. 반복적인 일상이기에 설무랑은 그녀를 돌아보지도 않고 감정없이 말했다.
" 그냥 물러가라. "
시녀는 설무랑의 뒷통수에다 의미없이 고개 숙여 예를 표하고는 발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물러났다. 설무랑은 욕조에서 나와 앞을 여미지 않고 그저 가운을 걸친 채 준비된 과일주로 다가갔다. 얼음이 담긴 잔에 과일주를 가득 따른 설무랑은 잔을 집어들면서 중얼거렸다.
" 웅무...."
그러자 설무랑이 마주한 벽의 한 쪽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벽은 녹아내리는 가 싶더니 곧 욕조에 가득한 물처럼 잔잔한 파랑을 만들어내며 꿈틀거렸다. 흐물거리는 벽에서 두 개의 뿔이 달린 거친 금발을 한 머리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이어서 비정상적으로 발달된 어깨와 가슴과 팔과 다리가 밖으로 나왔다. 마침내 그 형상을 되찾아 목욕탕 바닥에 바짝 엎드려 최대한의 예를 올리는 그는 바로 수라족 웅무였다. 설무랑은 느긋하게 술을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다.
" 부르셨습니까, 주군!"
인사를 하는 그의 목소리는 우락부락하게 생긴 외모와 달리 감격으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오랜만에 보는구나..."
설무랑은 잔잔한 웃음을 띄며 다정하게 인사를 받았다. 웅무는 그저 다시 한 번 머리를 바닥에 닿을 정도로 조아리며 황송함을 표했다.
지난 번 촉룡산에서의 대면 이후 둘이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다시 부를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라던 설무랑이 자신을 너무도 오랜 시간 불러주지 않아 웅무는 이제 피가 바짝 마를 지경이었다. 주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걱정이 앞서 그는 몇 번이고 천계와 수라계의 경계지점까지 왔다가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설무랑이 꿈의 문을 열고 나타나 그를 부르고 떠나자 그는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단걸음에 달려온 것이다. 설무랑도 오랜만에 만나는 웅무에게 더없는 반가움으로 인사하였지만 웅무의 감격에 비할 게 못 되었다.
그런데 나타날 때부터 웅무는 약간 불안해보였다. 그는 계속 한 쪽으로 시선을 주고 있었다. 조심스럽고도 민첩한 동작이었지만 설무랑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 괜찮아. 신경쓰지마."
설무랑은 웅무를 달래 듯 말했고 웅무는 여전히 신경이 쓰였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 감정을 숨겼다.
설무랑은 빈 잔에 다시 과일주를 넘치듯 따라 웅무에게 건넸다. 웅무는 두 손으로 잔을 받아들고 황급하게 잔을 비웠다. 그런 웅무를 보며 설무랑은 더욱 밝게 웃으며 말했다.
" 웅무, 내가 요새 좀 심심해져서 말이야. 놀이판을 한 판 벌려볼까 하는데..."
" 하명하시옵소서, 주군."
웅무는 빈 잔을 한 손에 쥔 채 고개를 조아리며 힘차게 말했다. 주인의 뜻을 알아차린 웅무는 당장이라도 그대로 몰아부칠 기세였다. 하지만 설무랑은 뜸을 들이며 천천히 몸을 숙이더니 그의 손에 들린 잔을 살며시 빼냈다. 그리고 다시 한 잔을 따라 여유롭게 맛을 음미하면서,
" 동방의 과일주는 따라올 곳이 없지. 그거 하나만은 마음에 들어....."
설무랑은 목욕탕의 흰 불빛에 투명한 잔에 담겨 신비하게 찰랑이는 보랏빛 과일주를 비춰보이며 그 빛깔과 혀 끝에 남은 향을 감상했다. 웅무는 보랏빛 액체가 빛에 아롱이는 모습을 감탄스럽게 바라보는 주인의 표정을 얼핏 살피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주인이 묻거나 명하기 전에 먼저 입을 열지 않던 웅무는 이번에는 좀 다급해져서 그 원칙을 깨고 말았다.
" 주군...이...이 곳이....."
하지만 주제에 넘는 물음이라는 생각이 스치면서 웅무는 자신의 도발적인 행동에 놀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이미 꺼내버린 첫 마디를 수습하지 못해 어쩔 줄 몰라했다.
" 뭐가 알고 싶은거지?"
설무랑은 부드럽게 되물었지만 웅무는 더욱 난처해져서 머리를 거의 바닥에 쿵쿵 찧으며,
" 불경을 용서하십시요, 주군...이 미천한 것이 분수를 모르고....."
" 웅무, 뭐가 알고 싶으냐고 물었다. 같은 말을 더 반복하게 할 생각이더냐?"
설무랑은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조금 엄하게 다시 물었다. 이 무식할 정도로 순진한 충복은 이럴 때면 한숨이 나올 정도로 답답했다. 오랜 시간 충신으로 곁에 있던 웅무를 설무랑은 때론 주종관계를 떠나 벗처럼 느끼곤 했다. 웅무 역시 설무랑에게 신하가 가지는 충성 이상의 애착과 애정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는 그것을 마음에 꼭꼭 담아둘 뿐 언제나 신하로써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그것이 때로는 설무랑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설무랑은 역시 그런 웅무를 다룰 줄 알았다. 웅무는 할 수 없이 말을 이었는데 그 말에는 진득하니 애타는 마음이 묻어있었다.
" 이 곳이..주군의...마음에 드십니까?"
" 하하하하...하하하하....."
예상치도 못한 웅무의 물음에 설무랑은 목젓이 보일 정도로 크게 웃었다. 속마음을 숨기지 않은 그 시원스런 웃음소리는 욕실 벽에 부딪히고 돌아오면서 메아리쳤는데 그 순간의 그 소리는 마치 2명이 동시에 내어지르는 것과 같았다. 주를 이르고 있는 목소리 아래 살짝 깔려 들릴 듯 말듯 함께 튀어나온 낮은 목소리에 웅무는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 얼마나 그립던 목소리인가.
겨우 웃음을 멈춘 설무랑의 눈가에는 살짝 물기까지 묻어나 있을 정도로 그는 간만에 속시원하게 웃었다. 웅무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설무랑은 잘 알았다. 투박하고 거칠게 생긴 이 짐승은 때때로 그 예상 밖의 순진함으로 설무랑을 이렇게 웃게 만들곤 했다.
" 그래, 웅무. 이곳이야말로 내게 딱 맞는 곳이야. 영원히 이 곳에 눌러 앉을 생각이다."
설무랑의 예상대로 웅무의 표정은 마치 뒷통수에 거대한 바위라도 떨어진 듯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설무랑은 이 순박한 충신이 자기 말을 사실대로 믿고 뛰어내리기 전에 장난을 그만두었다.
" 농담이야...."
웅무는 표나게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그의 어깨가 편안하게 축 늘어지는 것을 보고 설무랑은 입가에 웃음을 띄며,
" 솔직히 이 곳이 싫지는 않다. 이 곳의 공기는 따뜻하고 향기로우며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부드럽지.마음이 아늑해지는 곳이야. 하지만......"
설무랑은 말을 잠시 멈추었다. 그의 머릿 속에는 척박하고 거친 야생 상태인 수라계의 장관들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 하지만 나는 날마다 수라계의 피냄새가 사무치게 그리워. 내가 돌아갈 곳은 내 고향 뿐이다, 웅무."
웅무는 감격에 젖었다. 혹여나 설무랑이 오랜 시간 천계에 머물면서 그 몸이 가지고 있던 향수가 깨어나 천계에 눌러앉아버리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다 문득 과일주를 들고 있는 그의 얼굴에서 어떤 아늑함이 스치자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주인은 고향을 잊지 않고 있었다. 분명히 돌아올 것이라 말해주자 그는 불안감이 사라지고 벅찬 감동이 몰려옴을 느꼈다.
설무랑은 잔잔한 웃음을 거두고 약간 악랄하게 눈빛을 빛냈다.
" 천계가 탐난다면...뺏어버리면 되는 거지. 안 그래?"
" 현명하신 생각이십니다. "
" 이제 조무래기들로 치는 장난질은 그만 두자. 천계놈들도 지루해졌을테니까 이제 본판을 열어야지."
설무랑이 말하는 것은 자신이 동방으로 돌아온 후 지속되던 수라족의 주기적인 소규모 침공을 뜻하는 것이었다. 지국천은 처음에 설무랑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던 국경지대 수라족의 빈번한 침략에 잔뜩 긴장하여 과하게 진압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수라족의 공격은 빈도가 잦아졌을 뿐 특징적인 변화가 없었고 그다지 피해를 입히지 않았던 터라 서서히 동방군의 방어공격도 시들해져가는 상황이었다. 설무랑이 그것으로 동방군의 전력을 파악하려 했다는 것을 아는 이가 없었다.
" 수라군으로 도솔천 북동쪽을 쳐라. 200여개의 부락을 빼앗는거다. 수라군을 얼마를 동원하든 상관은 없다만 지국천의 똥줄이 타게 되도록 거칠고 잔인하게 짓밟아. 수라병사들의 눈이 뒤집힐 정도로 굶겼다가 풀어놓는 게 좋겠군. 볼 만 할거야...2차 마계 대전 이후 잊고 있던 진정한 공포가 무엇인지 천계놈들이 다시 느끼게 해 주는거지. "
설무랑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듯 그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 그의 눈동자가 서서히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 끝이 나면 2만을 남기고 철수하도록 해. 특히나 남겨둘 2만명에게는........천계놈들의 부드러운 고기를 실컷 먹이도록 해라. 병사들이 지르는 즐거운 비명소리가 동방성에 있는 내 귀에도 들릴 정도로 마음껏 즐길 수 있게 해 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천국이 될 테니 그 정도는 해 줘야지 않겠어?"
그 말에서 무엇인가를 짐작한 웅무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그 말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잔인한 예언이었다. 그럼에도 설무랑은 동요하는 기색없이 즐거운 얼굴이었다.
" 거기까지가 네가 할 일이다. "
" 실수없이 받들겠습니다. 주군."
웅무는 비장하게 소리쳤다. 설무랑은 웅무에게 다가와 몸을 숙였다. 그리고는 웅무의 귀에 속삭였다.
" 명심해, 웅무. 무대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아 내 흥이 깨지면 용서하지 않아."
설무랑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자 웅무는 온몸의 세포가 오그라들 정도로 얼어붙었다. 그것이 설무랑이 가진 절대감이었다.
" 목..목을 걸고 반드시 이행하겠습니다. 군의 선두에서 제가 이끌겠나이다!"
웅무는 경직된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내었다. 하지만 설무랑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눈빛이 더욱더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 너는 나서지 마라."
웅무는 놀라 고개를 들고 설무랑을 올려다보았다. 주인이 중요한 계획에서 자신을 빼버리려하자 서운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설무랑의 불타는 붉은 눈을 마주한 순간 웅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숨이 막힐 정도의 본능적인 공포가 그를 사로 잡았다.
" 주....주군!!"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웅무는 바짝 엎드렸다. 그의 몸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웅무는 대대로 수라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던 장수 집안 출신이었다. 수라왕족의 절대성과는 비교할 바가 못되지만 강한 혈통으로 상대할 자가 없는 집안의 순수한 혈통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강하기 때문에 수라왕족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결과, 대대로 이어지는 피 속에는 수라왕족을 지켜본 그 공포 역시 따라 이어지게 된 것이다. 수라왕족에게서 느끼는 공포는 힘을 다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그 자체로도 사람을 죽음으로 내 몰만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설무랑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미소 속에 피빛의 죽음이 숨어있었다.
" 웅무, 너를 못 믿어서가 아니다. 이 따위는 네가 죽을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야."
" 알겠습니다, 주군."
웅무는 여전히 아쉬운 기색이 남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수라족이 가진 맹목적인 충성의 본성이었다. 설무랑은 웅무의 오른 쪽 어깨를 힘있게 쥐었다.
" 너는 더 큰 자리에서 죽어라. 나를 위해 ."
설무랑은 몸을 세우며 목소리를 줄여 말했다.
" 이제 돌아가라. 그리고 바퀴벌레는 처리해서 먹어버려."
설무랑이 목욕탕을 벗어나자, 웅무는 순식간에 벽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곧 욕조의 하수구멍이 열리면서 욕조를 가득 채웠던 물이 회오리를 만들며 빠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물은 어느 새 피로 가득한 물로 변해있었다. 지국천이 보낸 감시원은 설무랑과 웅무의 만남에서부터 어마어마한 비밀을 알아내고도 입을 열지 못하고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3박 4일을 잡아 제주도에 다녀왔답니다. 서서히 봄이 찾아드는 시기라 아직까지는 칙칙한 검은 빛이 섞인 제주도였습니다만 한동안 여행을 못 다닌 제게는 즐거운 시간이 분명했습니다. 바람부는 제주도에서 고마운 메일을 한 통 받고 더욱 열심히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3월입니다. 봄빛의 행복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