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껏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데다,, 최근엔 사랑까지 만나게 됬는데, 여기를 정리하다니, 그럴순 없었다.
그렇다고, 상견례같은 자리를 미우가 끌려갈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태봉이란 사람이 있다고 말하기에는 권여사가 윤호와의 일을 이렇게 밀어붙이고 있다면, 태봉에게 피해가 갈수도 있을거다. 분명, 그러고도 남으실 성정이니... 미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이 한마디를 하고는 전화를 끊고 다시 현관으로 나갔다. 현관 앞에는 윤호가 그 자세 그대로 서서 미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 들어오세요!”
“금남구역이라면서요? 전 금지된 선을 넘어가기 싫습니다. 대신! 예약된 비행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얼른 외투라도 걸치고 나오시죠..”
미우는 화난 얼굴로 그런 윤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윤호만큼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로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시죠! 가면서 얘기하죠...”
미우는 말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핸드백을 들고 나왔다.
하다는 쉽게 끼어들지도 못하고, 옆에서 미우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벌한 기운을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미우는 그런 하다에게 다녀온다는 짧은 인사를 마치고, 현관문 밖으로 사라졌다.
공항으로 가는 내내, 미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윤호의 차 뒷자석에 앉아서...
그리고, 티켓팅이 끝이나고, 기내에 앉을때 까지도, 미우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윤호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미우의 머릿속에는. 대체, 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순순히 이런 행동들을 그만둘지, 그리고, 할머니는 어떻게 포기시킬지에 대한 생각이 가득찼다.
지금까지의 태도로 봐서 고집도 왠만하지 않은것 같고, 할머니 역시.. 그 고집을 익히 잘 알고있으니, 마치, 양옆으로 철갑산으로 막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태봉이 어릴적 일찍 부모님을 여윈데다가, 누나와 둘뿐이란건.. 겉포장을 좋아하는 집안 사람들의 눈에 차지않을 것이고, 권여사는 권여사대로, 어떻게든 태봉을 만나지 못하게 할것이 불보듯 뻔했다.
그렇다면,, 저 윤호라는 사람의 조건이 어떻길래? 그러고 보니,, 그 전에 들은 기억에 의하면, 이 쪽도 그리 좋은 집안은 아닌데... 그렇다면,, 천재에 가까운 똑똑한, 철저히 사업적인 두뇌를 가진 인간일 것이다. 감정 없어 보이는 차가운 얼굴이 딱! 그렇게 보이긴 했으니... 그러니까 결국 이 자식은 그때 미우에게 솔직하게 말하긴 한걸 것이다. 분명, 미우의 배경의 동경의 대상이였다는 말을 미우를 보며 당당히 말했으니.... 미우는 갑자기 윤호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말했다.
“음식 잘하세요?”
“글쎄요?... 갑자기 그건 왜? 물으세요?”
윤호는 집에서 나온지 두시간이 다 되는동안, 화난 얼굴로 앞만 보고있던 미우가 갑자기 물어오는 질문에 의아해했다. 음식을 잘 하냐니...
“대답해 주시죠?”
“잘 못해요.... ”
“혼자 유학생활까지 하셨고, 생활비 때문에 아르바이트도 했다고 하시면서, 음식도 못하세요? 외국에서 사먹는 밥은 돈이 많이 들었을 텐데?”
“... 아르바이트 하는데서 떼우거나, 굶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으세요?”
“전.. 요리 잘하는 남자 좋아하거든요!”
미우는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상무님이 요리는 별로라니까.. 더 맘에 안드네요!”
윤호는 그런 미우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잘하지 않는 것을 비교해가며, 기준미달로 잡으려는 미우의 속이 훤히 다 보였다. 점점 더 말도 안되는 조건들을 얘기하겠지?
윤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도자기.. 만들줄 아세요?‘
“글쎄요? 배워본 적이 없어서...”
“학교다닐 때, 미술과목이 어땠는데요?”
“글세요? 살면서 그다니 필요할것 같지 않아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만큼만요...”
“그래요? 난, 손끝이 섬세한 사람 좋아하거든요...내가 마실 컵정도 만들어 줄수있는..”
“그럼요.. 안그래도 따분하고 힘든 삶인데, 세심하고, 유머러스하고, 날 위해 특별한 시간을 선물해줄수 있는 남자가 좋은데.. 아무리 봐도! 상무님은 그 기준 미달입니다.. 그러니! 할머니와 상무님이 어떤 의도로 상무님 부모님까지 만나는 자리를 만든지는 몰라도! 나한테,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아요!”
“미우씨 한테 요구하는거 없어요.. 그냥..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만 주면 될것 같은데..저녁 7시 호텔 레스토랑입니다.”
“그것도 요구하지 마세요! 기대도 말구요~ 난!!! 내가 원하는 조건을 가지지 않은 사람과는 오래 얼굴마주보고 싶지 않거든요!”
“그래요? 그런데 어쩌죠? 미우씨는 내가 원하는 조건을 다 가졌는데?그래서 미우씨가 그렇게 말해도 포기할 생각 없는데...”
“그런 여자는 많아요! 어쩌면 나보다 훨씬 괜찮을 애들도 있구요! 이참에 누구 소개라도 시켜줄까요? 그렇지 친하지는 않은데, 그래도, 어릴적부터 잘 아는 애들은 꽤 되요! 요즘 선보러 다니느라. 진들 빼고 있는데...아! 그리고,그 애들은 무지 이쁘거든요!”
“난 예쁜여자 별로 안바래요! 미우씨 정도면 딱! 적당하네요.. 더군다나, 요즘 예쁜여자를 어떻게 믿어요? 다~ 성형한 얼굴일텐데.. 그런 의미에서, 난, 미우씨처럼 인위적이지 않은 얼굴이 좋아요! 2세에게 물려줘도 괜찮을 만큼!”
미우는 윤호의 말을 씹듯이 지나치며 물을 마시고 있었지만. 윤호의 입에서 나온,‘2세’라는 말에 입으로 들어갔던 물이 역류시켜 분수처럼 뿜어야 했다. 미우의 과민반응에 의해 뿜어져나온 물들은 고스란이 윤호의 정장위로 흩어졌지만, 윤호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손수건을 꺼내서 물기를 닦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음치란것도, 꽤 귀엽구요...음주가무에 뛰어나지 않으니, 그런 쪽으로 쏟아부을 체력을 좀더 효율적인 곳에 집중시킬수 있을테니까요,.
미우는 임만 벙긋거리다가 답답한듯, 창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게 비행기가 아니라, 버스정도만 됬어도, 뛰어내리고 싶었다. 미우가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능청스럽고 뻔뻔 하기까지 한 윤호의 태도에 할말을 잃은데다. 저 사람은 2세라는 구체적인 생각까지 해 놓은것 같으니.. 의외로 강적인것 같았다.
이제껏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야멸차게 쏘아붙이는 만큼, 얼마있지 않아, 떨어질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다...미우는 답답한 마음에 조금 남을 물을 들이키고,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재수없어.!!!’
미우는 공항에서 내리자 마자, 윤호에게서 쪼르르 도망쳐서는 재빨리 택시에 올라탔다.
윤호는 그런 미우를 보고 피식웃고는 여유롭게 대기하고 있는 택시에 올라탔다. 저렇게 도망쳐봐야, 결국은 집으로 올걸 알기 때문이였다.
윤호는 택시가 출발하자. 휴대전화를 꺼내서 권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회장님... 방금 도착했습니다. 전, 부모님께 가 있겠습니다. 저녁에 뵙겠습니다.”
그리고, 전화기 폴더를 닫고는, 다시 그의 원래 차가운 얼굴로 돌아와, 창밖을 응시했다.
재빨리 윤호에게서 도망쳐오긴 했지만, 지금 미우가 갈 곳이라곤 집밖에 없으니... 그러다 미우는 뭔가가 퍼득 생각이 났다. 자신보다 한발 앞서서, 태봉이 서울에 도착했을 것이다.
미우는 생끗 웃으며, 태봉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오래가지 않고, 이내 전화기 안으로 미우가 익숙하며, 반가워 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뭐야~ 전화해놓고, 그새 심심해?]
“응! 심심해서 죽을지경이야!”
[그래? 얘기 해줄까?]
“얘긴 됬고!! 지금 바빠?”
[그냥.. 누나가 저녁에나 온다고 해서, TV나 볼까해서!]
“그래? 잘됬다! 나~ 지금 어디게?”
[어딘데? 혼자 좋은 데라도 놀러간거야?]
“응~ 지금 한강 옆을 지나가고 있지!”
[뭐? 서울이야? 창원에 있겠다더니!]
“할머니가 워낙 극성이셔서 왔어~ 그러니까, 나랑 놀아주라!”
[알았어! 바로 나갈게!]
미우는 윤호 때문에 긁어놓았던 기분이 태봉 때문에 다시 좋아지는 것을 느끼며, 싱긋 웃었다.
그 시간, 윤호는 권여사가 잡아놓은 호텔 스위트 룸안에 있었다.
그 곁에는 그의 부모님도 함께, 윤호의 부모님은 영락없는 시골 노부부였다. 벌써 예전에 유행했을법한 촌스러운 옷차림에, 여름내 농사로 그을린 검은 피부와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그려놓은 깊은 주름까지, 그런 윤호의 부모님과 이 고급스런 호텔 스위트룸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였다.
“얘, 니네 회사 회장님께서, 뭔일로, 우리를 이런 호텔에서 묵게 해주신다냐? 좋긴하다만,,, 이유가 있을것 아니여!”
“그래, 이유나 알자!”
부모의 채근에 윤호는 평소의 그 차가운 표정과는 사뭇 다른... 부모님 앞이라서인지. 조금은 덜 차가운 얼굴에 결연한 뜻을 비추며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잘 들으세요.. 우리 회장님. 손녀,, 그러니까 ‘s'그룹 고명딸인 그 여자와 결혼 할겁니다. 오늘 장례 며느리감 보시게 될거에요.”
윤호의 부모들은 잠시 말을 잃었다. 아들의 나이가 차, 이제나 저제나, 언제 며느리를 볼지 기다렸는데, 느닷없이 며느리감을 보시게 됬다니. 그 사실까지야 반가운 사실이긴 하지만, 그 상대가, 국내에 제일 그룹이라는 집안의 고명딸이라니... 당신들의 자식이 잘나서, 어딜가도 빠지지 않는다는 평소의 자긍심이 무색하게, 너무 과하다 싶은 상대이다. 평생 농사나 지으며, 시골에 있어서도, 그 정도는 아니까..
“니네 회사 회장님 손녀를 말이냐?‘
“네, 아버지!!”
아버지의 확인하는 듯한 물음에 윤호는 못 박듯이 힘주어 말했다.
물론, 아직, 미우의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꼭! 미우와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면전에서 무안을 주는 미우를 몇 달 견뎌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할머니란 사람은, 자신의 그 어떤 조건을 들먹이지 않고, 단지 능력하나로, 흡족해하니... 분명,, 그녀와 결혼하게 될 것이다.
단지.. 그의 든든한 배경이 아니라.. 이젠.. 자신을 밀어내기만 하는 미우에게 어느 정도의 오기까지 생기고 있으니... 사뭇 처음과는 다른 감정이 샘솟고 있다는 사실은 윤호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태봉과 미우는 인사동의 거리를 손을 잡고 활보하는 중이였다. 난전에 펼쳐진 여러 골동품 같은 것들과, 그 주위에 늘어선, 많은 가게들과, 거리에서 춤을 추고 있는 할머니까지.. 이미 익숙할 정도로 많이 와본 곳이지만, 태봉과 함께 온 이곳이 미우의 눈에는 하나하나가 모두 새롭게 보였다.
그리고 한해의 마지막 날을.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보내게 될 줄은, 올해 초만해도,, 불과 한달전만 하더라고 몰랐으니..
“태봉씨. 우리 여기 들어가자!”
미우가 가르킨 곳은 옛날 물건들만 모아놓은 가게였다. 입장료까지 받는.,. 태봉은 미우가 하자는 데로,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미우의 손을 잡고, 가게안으로 들어섰다.
가게안은 미우와 태봉이 어릴적,, 그들이 아주 어릴적,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것도, 너무나 확실하게 기억나는 것들이. 즐비해 있었다. 하나하나가 새삼스럽고, 어릴때가 생각이 나는 그런 물건들을 보며 신기해하고, 즐거워했다.
“태봉씨,. 이거봐봐... 이거 종이인형, 나 이거 어릴적에 진짜 좋아했는데..”
“나두, 우리누나가 가지고 노는거 많이 봤어.. 난, 이거 딱지.. 이거 진짜 잘 가지고 놀았는데..”
“그러게.. 저것봐.. 저 공중전화기.. 길거리 마다 있었는데.. 요즘은 보기 힘들다. 그치!”
“요즘이야, 휴대전화기 다 가지고 다니니까.. 있어도, 더 새련된 디자인들로 바꿨잖아..”
“그렇지.. 어떻게 보면, 이런것들이 더 정겹긴 한데.. 그치..가만,, 그러고 보니... 태봉씨, 어렸을 때, 무지 귀여웠을것 같아”
“어릴때는 다들 귀엽지.. 미우씨는? 어릴때도, 그렇게 엽기공주님이셨어?”
태봉은 두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미우의 뺨을 살짝 꼬집으면서 말했다. 그 전같았으면, 태봉의 그런 행동에 미우는 애취급이니 뭐니하며, 입에서 불을 뿜었을테지만, 이제는 살짝 얼굵만 붉힐뿐이였다.
“엽기? 왜이러세요? 나? 어릴 때, 엽기랑은 거리가 멀었어. 이래뵈도, 고등학교 1학년때까진. 무지하게 낭만적이고, 로맨틱한 소녀였다구!”
“헉! 설마!”
“뭐? 일루와, 오늘 다죽었어..”
막 시작된 연인이여서 그런지. 그 주변에서 둘의 대화를 들으며, 반사적으로 피부에 돋아난 닭살에 치를 떠는 사람들은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온갖 닭살은 다 떨고 있는 그들이였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부러웠는지, 아니면, 도저히 견딜수가 없었는지, 그 곁의 고등학생쯤 으로 보이는 여학생들의 비아냥이 들려왔다.
“어머! 왠일이니? 나이 들어서 저러면, 안 쪽팔리나? 유치찬란해!”
“그러게.. 그런데, 남자가 아깝다!!”
“정말 그러네? 여자가 돈이 많나? 왠일이야? 너~ 무 언밸런스 하다..”
소녀들의 말은 바로 미우의 귀에 팍!팍!팍 꽃혀들었고, 미우의 미간이 순식간에 좁아졌다.
뭐, 틀린말은 아니다, 태봉이 어디 내놓아도 준수한건 사실이고, 태봉은 아직 모르지만, 집안에 돈이 많은것도 사실이고,, 객관적으로 보면, 언밸런스 하다는 소녀들의 말이 맞아떨어지긴 하지만, 어쨌든. 이 준수한 남자의 눈에 미우라는 콩깍지가 씌인걸 미우인들, 어떻게 할 수가 없질 않은가?
미우는 잔뜩 행복했던 기분에 갑자기 식초가 뿌려지는 시큼한 기분에 방금 자신들을 향해 쫑알거린 어린 소녀들쪽으로 시선을 돌려서 뭐라고 한마디 할 생각이였지만, 태봉의 입이 더 빨랐다.
미우의 귀에 생생히 들린 말이, 태봉의 귀라도 비켜가진 않았을테니. 태봉은 그 어린 소녀들을 향해, 미소띤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
“꼬마 아가씨들, 그렇게 말하면, 우리 자기가 기분 상하잖아? 그리고, 우리처럼 잘 어울리는 커플, 보기 드물텐데?”
태봉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소녀들은 바퀴벌레라도 씹은 얼굴로 일그러지면서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뭐, 사실, 사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미우역시, 소녀들과 똑같은 증상이 일어나 있는 상황이였고, 물론 다른 의미에서였지만, 태봉은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 소녀들을 석고상처럼 굳게 한마디를 더 하고는 미우을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가게안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꼬마아가씨들도, 우리 자기처럼 예쁘게 커요~”
태봉과 미우의 모습이 가게안에서 사라진 후에야 충격받은 소녀들은 겨우 한마디를 내뱉을 뿐이였다.
“저 아저씨,, 지금.. 우리한테. 저주 내린거 맞지....”
태봉에게 감싸 안긴채 가게안을 빠져나온 미우는 소녀들이 태봉의 말을 저주로 해석하고 있을 때 쯤. 진저리를 치듯, 태봉에게서 몇걸음 떨어져서는 아래위로, 태봉을 주욱 훝어보았다.
아직 미우의 눈에는 콩깍지란 것이 덜 씌었는지, 그런 태봉의 모습이 멋있어 보이기는 커녕, 100만톤짜리 버터를 한입에 삼킨것 같은 기분이들었다. 그런 미우의 야릇한 눈빛에 태봉은 씨익 웃었다.
“거기 엽기 아가씨! 눈초리가 왜 그래?”
“..태봉씨.. 오늘 버터로 맛사지라도 하고 나왔어? 어우~ 느끼!”
“어? 겨우 이정도로?”
“뭐? ‘우리 자기’”
“그럼. 그 애들앞에서, ‘우리 엽기 공주님’이라고 할까?”
미우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몸을 휙 돌려서 뚜벅뚜벅 걸어갔고, 태봉은 장난스런 표정으로 그런 미우를 쫒아갔다. 솔직히, 장난처럼 한 말이였는데, 다른 사람들 눈에 그렇게 느끼해 보일줄은 몰랐던 태봉이였고, 미우의 반응도, 꽤나 재미있었다.
추운줄도 모르고, 둘은 그렇게 알콩달콩한 데이트로 한해의 마지막날의 저녁을 맞이했다.
그리고, 미우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어느덧, 시계가 7시를 가르치고 있는것도 그랬고, 좀전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무시하기엔, 권여사의 불호령이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덥석 전화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분명, 윤호와 그 부모를 만나야 할것이다. 미우의 의사와는 상관도 없는 그 만남을...
민석의 말에 태봉은 단, 0.1초도 망설이지 않고 찬성했다. 게다가, 그렇게 결혼을 반대하던, 민석의 어머니가, 유미에게 손수 잉어까지 고아먹인다니. 서운해도 어쩔수 없는일이 아닌가..
태봉은 행복하길 바랬던, 누나가 행복속에서 사는것 같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거기다. 개인적으로 지금 자신도 너무나 행복하니...
태봉은 이왕 이렇게 된김에, 해보러 가자던, 미우의 말이 생각이 났다.
집에돌아가서, 미우에게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까이라도, 함께, 해보러 가자고, 새해의 첫 태양을......
가시방석같은 자리가 어느정도 정리가 되고, 미우의 가족은 집으로, 윤호의 가족은 호텔의 스위트룸으로 돌아간 뒤... 미우는 어색하면서도, 냉랭한 분위기의 오라를 온몸으로 뿜어대며 윤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윤호는 저녁에 평소보다는 덜 까치럽게 행동하며, 자신의 부모님에게 예의 갖추던 미우의 태도에 꽤 기분이 좋았지만, 가족들이 흩어진 직후, 딱딱하게 굳어서 싸늘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미우의 태도에 한치양보없이 맞서고 있는 중이였다.
차가운척은 해도, 그가 알고있는 바로는 본래가, 여린마음을 가졌던걸 아는 윤호의 생각에, 아마, 자신의 부모의 행색에, 그리고, 순박함에, 차마,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못했을거라고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분명. 지금 미우는 어떻게 하면, 윤호의 마음을 돌려놓을수 있을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이리라, 윤호는 미우의 차가운 눈빛을 은근히 즐기는듯, 여유롭게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미우는 대체, 이 놈의 얼음조각을 어떻게 해야 떼어놓을수 있을지 고민했지만,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면전에 대놓고 무시도, 면박도 줘봤고, 똑! 부러지게 얘기도 해봤지만, 아직까지 꿈적도 하지 않았으니. 일상적인 방법으로는 안될것 같았다. 냉랭한 표정으로 한참을 윤호를 쏘아보던 미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면, 그만 할래요?”
“......... . ”
“아까는, 그쪽 부모님 얼굴도 있고, 그쪽 부모님이야, 제가 이렇게 상무님 싫어하는거 모르시는것 같아서, 무안하지 마시라고. 참았어요.. 하지만, 더 이상은 나도 안되겠어요.. 대체 어떻게 해야 그만할래요?”
“말했잖아요.. 그만할 생각 없다고.. 그럼.. 미우씨는 어떻게 해야 나한테 올래요? 난 괘, 오랫동안 미우씨만 보고있는데...”
저 말은, 미우가 조금이나마 호의적인 관심, 그것도 사랑과 비슷한 관심이 마음의 단 1%라도 있었어도, 조금은 흔들릴 만한 소리였다. 아니, 단 1%의 관심이 없더라도, 멋진 남자가. 그윽한 시선으로 저런말을 했다면, 흔들릴수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지금 윤호의 입에서 나온말은. 그윽하기 보다는 마치, “이번 기획안 언제 넘겨주실래요?”라고 말하는것 같았다. 조금의 감정도 들어있지 않은... 그 말에 미우는 기가찼다.
“나만 보고있는 이유가, 저번에 말한 그 이윤가요? 그렇다면, 그만한 애들은 많아요, 나보다 조건이 더 놓은..”
“그것도 이미 말했을텐데요? 난. 다른 사람보다 미우씨가 마음에 든다구요.. 그리고,,,,,,,,,,”
윤호는 다음에 나올말을 입안에 놓고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윤호가 이어서 할말은..‘그리고, 당신이란 사람이 점점 더 잡고 싶어졌어요,’였다. 하지만, 그말은 차마 입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말했어도, 미우는 윤호 특유의 그 딱딱한 말투에 별 반응도 보이지 않았겠지만..
미우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윤호의 태도에 어쩔수 없었다.
지금 미우가 지키고 있는 비밀중 일부를 말해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상무님.. 아무리 그러셔도, 전, 상무님과 잘해볼 생각 없어요~. 저!... 만나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까요..”
미우는 말을 내뱉어놓고, 윤호의 반응을 살폈다. 따로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어느정도 반응이 있어야 정상일테니까. 하지만, 윤호의 표정을 봐선, 전혀 믿지 않는 것같았다. 아니, 믿기는 커녕, 오히려, 별 거짓말을 다한다는 표정으로 웃고있었다.
“이봐요! 나 만나는 사람 있다구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하라구요! 알아들어요?”
윤호는 미우의 말에 느긋한 미소로 답하면서, 지긋이 미우를 바라보았다.
어쩜, 까칠하고 냉정하던 아가씨가 요즘 자꾸만 빈틈을 보이는가 싶더니, 이젠, 말도 안되는 변명까지...
그렇게 자신이 싫단말인가. 왠지 씁쓸해지는 기분이 든 윤호는 지긋이 미우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특유의 차가움과 느긋함이 적절하게 섞인 분위기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그 사람 데려와 봐요... 나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면, 물러서 드리죠!”
윤호의 느긋한 태도는 건방지고 당당하긴했지만, 그 모습이 꽤나 잘 어울렸다.
하지만, 미우는 윤호의 그런 자신만만한 태도에 감탄을 하고 있을세가 없었다. 저 말대로, 당장이라도, 태봉을 부르면, 오겠지만, 더 큰 일은 뒷일이였다. 태봉이. 이런 관계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고, 또! 할머니인 권여사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를 일이니 말이다.
저 페이스에 말려들면 안되는데.. 미우는 태봉덕에 냉정함을 어느정도 잃어버린 후라, 윤호의 뻔뻔함에도, 그 이전처럼, 차갑게 얼어버리기란 나름 어려웠기에, 조금 당황했다.
“지금 당장은 안돼요! 그 사람은 내가 지금 그쪽 만나고 있는것도 모를텐데.. 다 설명한 다음이면 몰라도!”
윤호는 그럴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빙긋이 미소를 띄었다.
어떻게든, 자신과의 어떤 관계를 만들지 않으려고 애써 봤겠지만, 자신의 강경한 태도에 점점, 방법이 없었겠지.. 그렇지만, 겨우 생각했다는 것이. 있지도 않은 애인이나 만들려고 하다니...
윤호는 피식 웃으며,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모금 들이켰다. 그리고는,
“괜히, 지금한말 끼워 맞추려고, 아무나 데려오거나 뭐,, 그러진 말아요, 그런거라면, 정말 끄떡도 하지 않을 사람이니까요. 전.... 자! 그럼 가실까요? 집까지 모셔다 드리죠..”
“.......”
미우는 뭐라고 할 말이 없어 손으로 열받은 얼굴에 열심히 부채질해댈수 밖에 없었다.
집으로가는 내내, 미우는 잔뜩 머리를 굴려댔다.
어떻게 해야 한방에 태봉으로 할머니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고, 저 찰거머리같은 얼음조각을 떨어트려 놓을 것인지를 하지만, 마땅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럼... 야반도주?!!! 태봉과? 이런 생각까지 머물던 미우는 문득, 태봉이 말해준 그의 부모님의 사랑이야기가 떠올랐다.
‘부모님이 그런 사랑을 하셨는데... 어렵겠지?“
미우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딩동~’하는 소리와 함께, 미우의 핸드폰 메시지 알림 소리가 들려왔다.
미우는 얼른 전화기를 꺼내서 메시지를 확인했다.
[우리.. 내일. 해보러 갈까?새벽 2시 데릴러갈게 주소찍어!]
미우는 잔뜩 불만과 걱정으로 가득차 있던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띄우고는 바로 태봉에게 답장을 보냈다.
하지만, 앞뒤가 맞질 않았다. 여기서 아는 사람만나는 것이 부담스러워 지방지사로 내려간 걸로 알고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다라는 친구와 함께있으며, 회사, 집.. 그 외에는,.... 이상한 느낌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윤호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사람이 없을 것이다. 민석과의 결혼이 깨어진 다음. 마음의 빗장을 걸어잠궜을 미우일것이다.. 하지만, 미우의 얼굴에 떠오른 환한 미소에, 윤호는 내심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좋아! 2시까지 서울역 앞에 갈게]
태봉은 자신이 문자를 보내자 마자, 미우에게서 온 답장을 확인하고는 미리 챙겨놓을 것들을 식탁위에 주욱 늘어놓고, 알람 시계를 2시에 맞춰놓고, 잠을 청했다.
미우는 일어나지 못할까봐 책상에 엎드려 선잠을 자고. 알람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자신의 알람시계는 새벽 열두시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미우는 태봉과 함께, 새해의 첫해를 보러간다는 설레임에. 몰려오는 잠을 쫒아버리고, 이것저것 주섬주섬 챙기고, 이른 시간에 화장까지 하고, 까치발로,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나갔다. 혹시라도, 다른 가족들이 깨서 붙잡힐순 없으니, 미우는 숨도 거의 쉬지 못하면서, 겨우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미리 불러놓은 택시가 이미 대문앞에서 대기중이였다.
그리고, 차안의 두툼한 가방안은 미리 준비한 뜨거운 커피와 녹차가 각각 들어있는 보온병과 차안이라지만, 미우가 추울지도 모르니 감쌀 휴대용 담요와, 집근처 편의점에서 사온 이런저런 군것질 거리가 가득 담겨있었다. 그리고 삼각대와, 디지털 카메라까지...
미리 잠을 좀 자둬서인지. 그렇게 피곤하진 않았지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눈이 약간 뻑뻑한 느낌이 들었다. 악속한 2시가 조금 덜되서, 태봉의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미우였다.
태봉은 환하게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어디긴! 앞에 왔는데.. 태봉씨는 어디야?]
태봉은 근처라는 미우의 말에 문을 열고 내려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하얀 점퍼를 입은 미우의 모습이 보였다. 태봉은 반갑게 손을 흔들며.
“조금만 왼쪽으로 돌아봐.. ”
미우는 전화기를 귀에 댄체 태봉이 말한대로, 자신이 서있는 약간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금새, 손을 열심히 흔들고 있는 태봉이 보였다. 미우는 전화를 끊으며 태봉에게로 달려갔다. 바람처럼...
“오래, 기다렸어?”
“아니, 나도 금방 왔었어.”
“그런데.. 차 빌린거야?”
“어.. 기차탈까 생각했었는데, 이 시간에 기차가 없다!”
“음... 안피곤해?”
“괜찮아!”
“피곤하면, 말해! 내가 운전할게,,,”
“으이구~ 눈에서 아직 잠이 안가셨는데..근데! 이 시간에 화장까지 하고 나왔어?”
“그..그럼. 어떻게 맨얼굴로 나와?”
“괜찮아. 너 화장 안해도 알아볼수 있으니까. 자, 어서 가자!”
태봉은 미우가 탈수있게 문을 열어주고, 미우는 수줍게 웃으며, 태봉이 열어준 문으로 따뜻한 차 안으로 얼른 올라탔다. 찬 바람을 쏘이고 따뜻한 차 안으로 들어와서인지, 차가 출발하고 얼마되지 않아. 미우는 졸기 시작했다. 잠깐 잠들었던 시간조차, 일어나지 못할까와 책상에 엎드려 선잠을 자서인지 금새 피곤해졌지만, 운전하는 사람 옆에 두고 자는건 예의가 아니라, 자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태봉은 그런 미우를 보고는 잠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준비해온 담요를 꺼내서 미우에게 펼쳐주었다.
“화장까지 하고 나오느라고, 고생했어, 난 충분히 잤으니까. 내 걱정 하지말고, 눈좀 붙여.”
“그래도, 미안해서 어떻게 그래?”
“괜찮다니까.. ”
태봉의 따뜻한 표정에 미우는 잠시 미안하더라도, 뻔뻔해지기로 마음 먹었다. 이 사람앞에서 그래도 될것 같으니까...
“그럼.. 미안하지만, 실례,.,..”
미우는 태봉이 건넨 담요를 가슴께까지 올려 감싸고는 의자에 기대서 살짝 눈을 감았다.
태봉은 금새 잠들 미우를 보고 다시,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켰다.
얼마나 잤는지, 미우는 소란스런 소리에 눈을 떴다.
어느새, 어슴프레 날이 밝아오고 있었고, 주변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미우는 얼른 눈을 뜨고 옆을 돌아보았다. 미우의 옆에는 태봉이 음악감상을 하는듯, 살짝 두눈을 감고 있었다.
미우는 얼른 거울을 꺼내서, 얼굴상태를 먼저 살폈다. 눈꼽이나 끼지 않았을까 하고.. 살짝 얼굴을 가다듬고 고개를 돌리니, 태봉이 미우를 보며 웃고있었다.
“아! 깜짝이야.. 언제 깼어?”
“깨긴, 안잤어.. 뭘 그렇게 고쳐? 화장 안해도 되는데..”
“그래도 이왕 한건데.. 뭉개지면, 보기 싫잖아! 근데, 벌써 밝아지는 것 같은데?”
“응. 이제 슬슬 내릴까?”
“응!”
차에서 내린 둘은 나란히 서서 인파속으로 묻혀 들어가, 바닷가로 향했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에 닿아왔지만, 미우의 마음만은 따뜻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새해의 해를 보러오다니.. 예전... 아주 예전에 이런 꿈도 꿨었지만, 한동안, 이룰수 없는 꿈이라며, 포기했던 일...
그 꿈을 지금 미우는 현실에서. 이루고 있는 것이였다. 그래서 더 꿈인것 같았고, 더, 행복했다.
그리고, 방금전, 슬며시 미우의 손을 꼭쥔 태봉의 손길에. 꿈이 아니라, 현실인걸 알수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양은 그 찬란한 빛을 발하며, 서서히 수평선에서 떠올랐다. 미우는 새삼 그 태양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런 기분은 태봉도 함께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잔뜩 감격한 얼굴로 태양을 보는 미우를 보며, 어쩌면, 미우가 느끼는 행복보다 더 큰 행복을 느끼고 있는지도... 태봉은 자신도 모르게. 미우의 귓가에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 내 인생의 로맨스 >> - 42
#11장. <해피타임 >-3
일년의 마지막날 회사업무도 조기종료해서, 이른오후 미우는 집으로 돌아왔다.
3일간의 휴가를 태봉과 함께 보낼 생각을 하니, 마냥, 즐겁고 들뜨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미우의 설레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여보세요?]
“태봉씨! 우리 해보러 가자!”
[내일?]
“응! 내일 새벽 2시나 3시쯤 출발하면, 호미곳에서 해 볼수 있잖아!”
[어떡하지? 누나한테 가기로 했는데..]
“큰 설도 아닌데?”
[그러니까. 우리누나, 결혼한 몸이잖아.. 큰설에는 못봐..]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언제 가?”
[좀 있다가.. 예약해놨거든..]
“씨! 그걸. 인제 말하냐?”
[또, 삐진다! 미우씨는 뭐할거야?]
“뭐하긴. 3일내내, 침대 들쳐업고 잠이나 자야지! 누구한테 버림받은 충격으로!!!”
[이러니까, 나한테 애취급 받는거야! 대신, 갔다가 일찍올게..]
“됬어, 누나 얼굴 오랜만에 보는걸거 아냐? 나 신경쓰지말구! 누나한테 어리광이나 잘 부리다가 와!”
[전화할게... 그러지 말고, 지금 얼굴 잠깐 볼까?]
“됬어! 보면? 내가 안놔줄건데?”
[밥 잘챙겨먹구 있어!]
“알았어 다녀와~”
미우는 하는수 없이 뿌루퉁한 표정으로 옆에있는 곰인형을 한대 툭 때리고는 책 한권을 뽑아들고, 거실 쇼파로 나갔다. 거실은 오후햇살이 가득차있어 나른하고 아늑한 느낌으로 가득했고, 무슨일을 하는지 하다는 아까부터 노트북을 펼쳐놓은채 심각하게 들여다 보고 있는 중이였다.
“넌, 집에 와서 까지 일을하니?”
“일 아냐!”
“그럼?”
“오빠한테서 온 메일 읽고있는 중이야...”
“무슨 메일인데, 그렇게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어? 왜? 뉴욕의 멋진 아가씨라도 만났데?”
“글세? 차라리 그런거면, 머리가 아프지 않지 감정이 먼저 폭팔을 할테니까..”
“무슨일인데?”
미우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의 하다옆으로 가, 하다가 들여다보고있는 노트북을 들여다 보았다.
형진의 메일은 향수병에 시달리는 내용이였다. 삼십년동안 한달이상 한국을 떠나서 산적이 없는데다, 토속적인 입맛을 가진 한국남자라면, 미국에서의 생활이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은것이 사실일테니. 충분히 이해할 정도였다.
“형진오빠, 많이 힘드나 보네?”
“그러게.. 음식이 입에 안맞아서, 벌써 6키로나 빠졌댄다.. 이렇게 까탈스러워서야! 간지 반년이 다됬으면, 적응을 해도 골백번은 더 했겠구만..”
“넌, 니 애인일에 너무 둔한거 아냐? 형진오빠, 시골서 자라서 하루 세끼 밥으로 사는 사람인데, 빵쪼가리만 즐비한 식당에서 뭘 먹겠니.. 그리고, 뉴욕의 물가는 가히 살인적이야! 특히나, 한식이 얼마나 비싼데..”
“그래두! 아직 파견일수 반도 못채우고 오고 싶다고 투정이니 그러지!... 좀 참지..”
“니가 메일로나마 위로 많이 해줘라~”
미우는 다시 책을 들고, 옆 쇼파로가 반쯤 눕듯이 기대서는 책장을 펴 들었다.
하다는 노트북에서 눈을 떼고는 편안한 자세로 책에 집중하려고 하는 미우에게 말했다.
“뭐야? 휴가기간동안, 태봉씨랑 데이트 실컷 한다고 좋아하더니? 안나가?”
“태봉씨, 누나만나러 집에 간대!”
“그래? 그럼 너도 같이 가지 그랬어?”
“뭐, 오랜만에 누나 만나는 거니까, 할말도 많을거고,.. 세상에 둘뿐인 남맨데.. 내가 양보해야지..”
“태봉씨 누나는 뭐하는데? 회사원?”
“결혼했다니까.. 현직 주부겠지? 아님뭐, 회사 다니면서, 살림하는 슈퍼우먼인가? 잘 몰라, 누나에 대한 얘기는 거의 한적 없으니까.”
“그래? 그럼... 어떡할까? 출출한데, 우리 뭐라도 만들어 먹을까? 파전 어때?”
“파전? ....... 너! 그렇게 말하면서, 지금 나한테, 그거 가르칠려고 그러지?”
“당연하지! 지난주에너 태봉씨랑 역어주느라고, 요리강습 빼먹었다?!”
“그럼! 내일 하자, 오늘은 이거 마저 읽고!”
둘이 거기까지 말하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미우는 앞뒤 가리지 않고, 태봉일거라 생각을 하고 재빨리 책을 덮어놓고, 쪼르르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간다더니, 얼굴 보고 갈려고 들리는 구나 생각하며..
하지만, 반갑게 현관문을 연 미우의 눈 앞에는 전혀 달갑지 않은 사람이 서있었다. 그것도 아주 당당한 모습으로....
“권상무님이 여긴 무슨 일이세요?”
“매일 찾아올 때마다 없더니, 오늘에야 만나네요.... 뭐해요?”
미우는 현관에 비스듬하게 기대서서 팔짱까지 끼고는 윤호의 등장이 못마땅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여자끼리 사는 집에, 권상무님이 무슨 일로 매번 오세요? 여기는 금남의 구역이거든요?”
“그럼.. 여기서 기다리죠.. 얼른 준비하고 나오세요!”
“뭘 준비해요?”
“말씀 드렸을텐데요? 회장님께서 함께 오라고 하셨습니다.”
“난, 분명히 가지 않는다고 말씀 드렸고, 할머니와 통화도 했어요.”
“하지만, 전! 미우씨와 함께 가야겠는데요?”
“이봐요! 사람이 왜? 그렇게 말귀를 못알아들어요? 됬다구요! 난 권상무님이랑 역이고 싶은생각 눈꼽만큼도 없으니까, 자꾸 우리 할머니 들먹이면서, 수작 그만 부리란 말이에요!”
거절해도, 찰거머리처럼 자꾸만 달라붙는 윤호의 태도에 슬슬 짜증이 받쳤다.
대체, 이 남자가 뭘믿고, 이런식의 거절과, 무안을 매번 들이 퍼붓는데도, 이러는지 알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 미우로서는 그 이전보다 이 윤호라는 존재가 더 짜증스러웠다.
미우의 한톤 올라간 말투에 하다는 무슨일인지 현관으로 나왔고, 그 앞에 선 차가운 윤호와, 은근히 화가 달궈지는 미우의 모습을 볼수있었다.
“무슨일이야?”
“안녕하세요? 장하다씨? 하다씨께서, 미우씨 짐 대충 챙겨 주시겠습니까?”
“네?”
“회장님께서, 미우씨와 함게 올라오라고 하셔서요...”
정중한듯하지만, 어쩐지 말투안에 명령의 감이 담겨있는 윤호의 말투에 하다는 묘하게 나빠진 기분을 뒤로하고,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 미우는 가지 않겠다고 한것 같은데... 회장님께도 허락 받았구요..”
“그건 미우씨에게서 들어서 알고있지만, 그래도 해가 바뀌는데, 가족들과 함께 보내야죠?”
미우는 기가찬 듯 콧방귀를 뀌며, 그렇게 말하고 있는 윤호에게 야멸차게 쏘아붙였다.
“그럼, 상무님이나, 가족들한테로 가셔야지? 왜? 꼭! 절 데리고, 우리집엘 가시겠단 건데요?”
미우의 반박에 윤호는 그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저희 부모님께서도, 지금쯤이면, 회장님께서 마련해주신, 호텔에 도착하셨을 겁니다!”
윤호의 말이 끝나자 마자, 미우는 머리가 멍해졌다.
저말은. 윤호의 부모님까지 불러서 자리를 마련한단 소린데.. 그럼.. 상견례라도 한단 말인가?
미우의 의사와 상관없이? 미우는 머리끝에서 천만볼트짜리 전기가 터져나가기 위해 준비자세를 취하는 느낌을 받으며, 말없이 돌아서, 전화기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권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할머니?”
[오~ 미우구나! 그래, 지금 어디냐?]
“할머니. 권상무 하는 말이 뭐에요? 그 부모님 만나기로 하셨어요?”
[벌써 들은게야? 그래, 이 할미가, 만나뵙자고 그랬다.]
“할머니! 저한텐 아무말씀도 하지 않으셨잖아요!”
[네 녀석에게 말해봐야. 지금처럼 길길이 날뛰기밖에 더 할려구? 이 할미가 곱게 얘기할 때, 올라오너라~]
“저하고 어제저녁 통화하실땐 이런 말씀 없으셨잖아요!”
미우가 자꾸만 떼를쓰기 시작하자! 권여사는 엄한 목소리로 돌변해서는 은근히 미우에게 협박을 가했다.
[내, 당장. 사람 시켜서 그곳 정리하고, 너 데리고 오랴?]
한껏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데다,, 최근엔 사랑까지 만나게 됬는데, 여기를 정리하다니, 그럴순 없었다.
그렇다고, 상견례같은 자리를 미우가 끌려갈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태봉이란 사람이 있다고 말하기에는 권여사가 윤호와의 일을 이렇게 밀어붙이고 있다면, 태봉에게 피해가 갈수도 있을거다. 분명, 그러고도 남으실 성정이니... 미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이 한마디를 하고는 전화를 끊고 다시 현관으로 나갔다. 현관 앞에는 윤호가 그 자세 그대로 서서 미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 들어오세요!”
“금남구역이라면서요? 전 금지된 선을 넘어가기 싫습니다. 대신! 예약된 비행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얼른 외투라도 걸치고 나오시죠..”
미우는 화난 얼굴로 그런 윤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윤호만큼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로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시죠! 가면서 얘기하죠...”
미우는 말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핸드백을 들고 나왔다.
하다는 쉽게 끼어들지도 못하고, 옆에서 미우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벌한 기운을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미우는 그런 하다에게 다녀온다는 짧은 인사를 마치고, 현관문 밖으로 사라졌다.
공항으로 가는 내내, 미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윤호의 차 뒷자석에 앉아서...
그리고, 티켓팅이 끝이나고, 기내에 앉을때 까지도, 미우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윤호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미우의 머릿속에는. 대체, 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순순히 이런 행동들을 그만둘지, 그리고, 할머니는 어떻게 포기시킬지에 대한 생각이 가득찼다.
지금까지의 태도로 봐서 고집도 왠만하지 않은것 같고, 할머니 역시.. 그 고집을 익히 잘 알고있으니, 마치, 양옆으로 철갑산으로 막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태봉이 어릴적 일찍 부모님을 여윈데다가, 누나와 둘뿐이란건.. 겉포장을 좋아하는 집안 사람들의 눈에 차지않을 것이고, 권여사는 권여사대로, 어떻게든 태봉을 만나지 못하게 할것이 불보듯 뻔했다.
그렇다면,, 저 윤호라는 사람의 조건이 어떻길래? 그러고 보니,, 그 전에 들은 기억에 의하면, 이 쪽도 그리 좋은 집안은 아닌데... 그렇다면,, 천재에 가까운 똑똑한, 철저히 사업적인 두뇌를 가진 인간일 것이다. 감정 없어 보이는 차가운 얼굴이 딱! 그렇게 보이긴 했으니... 그러니까 결국 이 자식은 그때 미우에게 솔직하게 말하긴 한걸 것이다. 분명, 미우의 배경의 동경의 대상이였다는 말을 미우를 보며 당당히 말했으니.... 미우는 갑자기 윤호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말했다.
“음식 잘하세요?”
“글쎄요?... 갑자기 그건 왜? 물으세요?”
윤호는 집에서 나온지 두시간이 다 되는동안, 화난 얼굴로 앞만 보고있던 미우가 갑자기 물어오는 질문에 의아해했다. 음식을 잘 하냐니...
“대답해 주시죠?”
“잘 못해요.... ”
“혼자 유학생활까지 하셨고, 생활비 때문에 아르바이트도 했다고 하시면서, 음식도 못하세요? 외국에서 사먹는 밥은 돈이 많이 들었을 텐데?”
“... 아르바이트 하는데서 떼우거나, 굶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으세요?”
“전.. 요리 잘하는 남자 좋아하거든요!”
미우는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상무님이 요리는 별로라니까.. 더 맘에 안드네요!”
윤호는 그런 미우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잘하지 않는 것을 비교해가며, 기준미달로 잡으려는 미우의 속이 훤히 다 보였다. 점점 더 말도 안되는 조건들을 얘기하겠지?
윤호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도자기.. 만들줄 아세요?‘
“글쎄요? 배워본 적이 없어서...”
“학교다닐 때, 미술과목이 어땠는데요?”
“글세요? 살면서 그다니 필요할것 같지 않아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만큼만요...”
“그래요? 난, 손끝이 섬세한 사람 좋아하거든요...내가 마실 컵정도 만들어 줄수있는..”
“............”
윤호는 이제껏 미우의 침묵을 견뎌내느라 손에 들고있던 경제학 책을 조심스럽게 덮었다.
그리고, 빙긋이 웃었다..
“또요?”
“마술같은거 할줄 아세요?”
“그것도.. 배워본 적이 없느것 같네요?”
“대체 뭐하고 사셨어요? 그런 잔재주도 없게? 재미없는 남자.. 별로 안좋아해요!”
“요리잘하고, 손끝 섬세하고, 마술같은 재주 적당히 가지고 있고.. 그런남자 좋아해요? 미우씨?”
“그럼요.. 안그래도 따분하고 힘든 삶인데, 세심하고, 유머러스하고, 날 위해 특별한 시간을 선물해줄수 있는 남자가 좋은데.. 아무리 봐도! 상무님은 그 기준 미달입니다.. 그러니! 할머니와 상무님이 어떤 의도로 상무님 부모님까지 만나는 자리를 만든지는 몰라도! 나한테, 아무것도 요구하지 말아요!”
“미우씨 한테 요구하는거 없어요.. 그냥..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만 주면 될것 같은데..저녁 7시 호텔 레스토랑입니다.”
“그것도 요구하지 마세요! 기대도 말구요~ 난!!! 내가 원하는 조건을 가지지 않은 사람과는 오래 얼굴마주보고 싶지 않거든요!”
“그래요? 그런데 어쩌죠? 미우씨는 내가 원하는 조건을 다 가졌는데?그래서 미우씨가 그렇게 말해도 포기할 생각 없는데...”
“그런 여자는 많아요! 어쩌면 나보다 훨씬 괜찮을 애들도 있구요! 이참에 누구 소개라도 시켜줄까요? 그렇지 친하지는 않은데, 그래도, 어릴적부터 잘 아는 애들은 꽤 되요! 요즘 선보러 다니느라. 진들 빼고 있는데...아! 그리고,그 애들은 무지 이쁘거든요!”
“난 예쁜여자 별로 안바래요! 미우씨 정도면 딱! 적당하네요.. 더군다나, 요즘 예쁜여자를 어떻게 믿어요? 다~ 성형한 얼굴일텐데.. 그런 의미에서, 난, 미우씨처럼 인위적이지 않은 얼굴이 좋아요! 2세에게 물려줘도 괜찮을 만큼!”
미우는 윤호의 말을 씹듯이 지나치며 물을 마시고 있었지만. 윤호의 입에서 나온,‘2세’라는 말에 입으로 들어갔던 물이 역류시켜 분수처럼 뿜어야 했다. 미우의 과민반응에 의해 뿜어져나온 물들은 고스란이 윤호의 정장위로 흩어졌지만, 윤호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손수건을 꺼내서 물기를 닦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음치란것도, 꽤 귀엽구요...음주가무에 뛰어나지 않으니, 그런 쪽으로 쏟아부을 체력을 좀더 효율적인 곳에 집중시킬수 있을테니까요,.
미우는 임만 벙긋거리다가 답답한듯, 창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게 비행기가 아니라, 버스정도만 됬어도, 뛰어내리고 싶었다. 미우가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능청스럽고 뻔뻔 하기까지 한 윤호의 태도에 할말을 잃은데다. 저 사람은 2세라는 구체적인 생각까지 해 놓은것 같으니.. 의외로 강적인것 같았다.
이제껏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야멸차게 쏘아붙이는 만큼, 얼마있지 않아, 떨어질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다...미우는 답답한 마음에 조금 남을 물을 들이키고,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재수없어.!!!’
미우는 공항에서 내리자 마자, 윤호에게서 쪼르르 도망쳐서는 재빨리 택시에 올라탔다.
윤호는 그런 미우를 보고 피식웃고는 여유롭게 대기하고 있는 택시에 올라탔다. 저렇게 도망쳐봐야, 결국은 집으로 올걸 알기 때문이였다.
윤호는 택시가 출발하자. 휴대전화를 꺼내서 권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회장님... 방금 도착했습니다. 전, 부모님께 가 있겠습니다. 저녁에 뵙겠습니다.”
그리고, 전화기 폴더를 닫고는, 다시 그의 원래 차가운 얼굴로 돌아와, 창밖을 응시했다.
재빨리 윤호에게서 도망쳐오긴 했지만, 지금 미우가 갈 곳이라곤 집밖에 없으니... 그러다 미우는 뭔가가 퍼득 생각이 났다. 자신보다 한발 앞서서, 태봉이 서울에 도착했을 것이다.
미우는 생끗 웃으며, 태봉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오래가지 않고, 이내 전화기 안으로 미우가 익숙하며, 반가워 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뭐야~ 전화해놓고, 그새 심심해?]
“응! 심심해서 죽을지경이야!”
[그래? 얘기 해줄까?]
“얘긴 됬고!! 지금 바빠?”
[그냥.. 누나가 저녁에나 온다고 해서, TV나 볼까해서!]
“그래? 잘됬다! 나~ 지금 어디게?”
[어딘데? 혼자 좋은 데라도 놀러간거야?]
“응~ 지금 한강 옆을 지나가고 있지!”
[뭐? 서울이야? 창원에 있겠다더니!]
“할머니가 워낙 극성이셔서 왔어~ 그러니까, 나랑 놀아주라!”
[알았어! 바로 나갈게!]
미우는 윤호 때문에 긁어놓았던 기분이 태봉 때문에 다시 좋아지는 것을 느끼며, 싱긋 웃었다.
그 시간, 윤호는 권여사가 잡아놓은 호텔 스위트 룸안에 있었다.
그 곁에는 그의 부모님도 함께, 윤호의 부모님은 영락없는 시골 노부부였다. 벌써 예전에 유행했을법한 촌스러운 옷차림에, 여름내 농사로 그을린 검은 피부와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그려놓은 깊은 주름까지, 그런 윤호의 부모님과 이 고급스런 호텔 스위트룸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였다.
“얘, 니네 회사 회장님께서, 뭔일로, 우리를 이런 호텔에서 묵게 해주신다냐? 좋긴하다만,,, 이유가 있을것 아니여!”
“그래, 이유나 알자!”
부모의 채근에 윤호는 평소의 그 차가운 표정과는 사뭇 다른... 부모님 앞이라서인지. 조금은 덜 차가운 얼굴에 결연한 뜻을 비추며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잘 들으세요.. 우리 회장님. 손녀,, 그러니까 ‘s'그룹 고명딸인 그 여자와 결혼 할겁니다. 오늘 장례 며느리감 보시게 될거에요.”
윤호의 부모들은 잠시 말을 잃었다. 아들의 나이가 차, 이제나 저제나, 언제 며느리를 볼지 기다렸는데, 느닷없이 며느리감을 보시게 됬다니. 그 사실까지야 반가운 사실이긴 하지만, 그 상대가, 국내에 제일 그룹이라는 집안의 고명딸이라니... 당신들의 자식이 잘나서, 어딜가도 빠지지 않는다는 평소의 자긍심이 무색하게, 너무 과하다 싶은 상대이다. 평생 농사나 지으며, 시골에 있어서도, 그 정도는 아니까..
“니네 회사 회장님 손녀를 말이냐?‘
“네, 아버지!!”
아버지의 확인하는 듯한 물음에 윤호는 못 박듯이 힘주어 말했다.
물론, 아직, 미우의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꼭! 미우와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면전에서 무안을 주는 미우를 몇 달 견뎌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의 할머니란 사람은, 자신의 그 어떤 조건을 들먹이지 않고, 단지 능력하나로, 흡족해하니... 분명,, 그녀와 결혼하게 될 것이다.
단지.. 그의 든든한 배경이 아니라.. 이젠.. 자신을 밀어내기만 하는 미우에게 어느 정도의 오기까지 생기고 있으니... 사뭇 처음과는 다른 감정이 샘솟고 있다는 사실은 윤호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태봉과 미우는 인사동의 거리를 손을 잡고 활보하는 중이였다. 난전에 펼쳐진 여러 골동품 같은 것들과, 그 주위에 늘어선, 많은 가게들과, 거리에서 춤을 추고 있는 할머니까지.. 이미 익숙할 정도로 많이 와본 곳이지만, 태봉과 함께 온 이곳이 미우의 눈에는 하나하나가 모두 새롭게 보였다.
그리고 한해의 마지막 날을.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보내게 될 줄은, 올해 초만해도,, 불과 한달전만 하더라고 몰랐으니..
“태봉씨. 우리 여기 들어가자!”
미우가 가르킨 곳은 옛날 물건들만 모아놓은 가게였다. 입장료까지 받는.,. 태봉은 미우가 하자는 데로,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미우의 손을 잡고, 가게안으로 들어섰다.
가게안은 미우와 태봉이 어릴적,, 그들이 아주 어릴적,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것도, 너무나 확실하게 기억나는 것들이. 즐비해 있었다. 하나하나가 새삼스럽고, 어릴때가 생각이 나는 그런 물건들을 보며 신기해하고, 즐거워했다.
“태봉씨,. 이거봐봐... 이거 종이인형, 나 이거 어릴적에 진짜 좋아했는데..”
“나두, 우리누나가 가지고 노는거 많이 봤어.. 난, 이거 딱지.. 이거 진짜 잘 가지고 놀았는데..”
“그러게.. 저것봐.. 저 공중전화기.. 길거리 마다 있었는데.. 요즘은 보기 힘들다. 그치!”
“요즘이야, 휴대전화기 다 가지고 다니니까.. 있어도, 더 새련된 디자인들로 바꿨잖아..”
“그렇지.. 어떻게 보면, 이런것들이 더 정겹긴 한데.. 그치..가만,, 그러고 보니... 태봉씨, 어렸을 때, 무지 귀여웠을것 같아”
“어릴때는 다들 귀엽지.. 미우씨는? 어릴때도, 그렇게 엽기공주님이셨어?”
태봉은 두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미우의 뺨을 살짝 꼬집으면서 말했다. 그 전같았으면, 태봉의 그런 행동에 미우는 애취급이니 뭐니하며, 입에서 불을 뿜었을테지만, 이제는 살짝 얼굵만 붉힐뿐이였다.
“엽기? 왜이러세요? 나? 어릴 때, 엽기랑은 거리가 멀었어. 이래뵈도, 고등학교 1학년때까진. 무지하게 낭만적이고, 로맨틱한 소녀였다구!”
“헉! 설마!”
“뭐? 일루와, 오늘 다죽었어..”
막 시작된 연인이여서 그런지. 그 주변에서 둘의 대화를 들으며, 반사적으로 피부에 돋아난 닭살에 치를 떠는 사람들은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온갖 닭살은 다 떨고 있는 그들이였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부러웠는지, 아니면, 도저히 견딜수가 없었는지, 그 곁의 고등학생쯤 으로 보이는 여학생들의 비아냥이 들려왔다.
“어머! 왠일이니? 나이 들어서 저러면, 안 쪽팔리나? 유치찬란해!”
“그러게.. 그런데, 남자가 아깝다!!”
“정말 그러네? 여자가 돈이 많나? 왠일이야? 너~ 무 언밸런스 하다..”
소녀들의 말은 바로 미우의 귀에 팍!팍!팍 꽃혀들었고, 미우의 미간이 순식간에 좁아졌다.
뭐, 틀린말은 아니다, 태봉이 어디 내놓아도 준수한건 사실이고, 태봉은 아직 모르지만, 집안에 돈이 많은것도 사실이고,, 객관적으로 보면, 언밸런스 하다는 소녀들의 말이 맞아떨어지긴 하지만, 어쨌든. 이 준수한 남자의 눈에 미우라는 콩깍지가 씌인걸 미우인들, 어떻게 할 수가 없질 않은가?
미우는 잔뜩 행복했던 기분에 갑자기 식초가 뿌려지는 시큼한 기분에 방금 자신들을 향해 쫑알거린 어린 소녀들쪽으로 시선을 돌려서 뭐라고 한마디 할 생각이였지만, 태봉의 입이 더 빨랐다.
미우의 귀에 생생히 들린 말이, 태봉의 귀라도 비켜가진 않았을테니. 태봉은 그 어린 소녀들을 향해, 미소띤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
“꼬마 아가씨들, 그렇게 말하면, 우리 자기가 기분 상하잖아? 그리고, 우리처럼 잘 어울리는 커플, 보기 드물텐데?”
태봉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소녀들은 바퀴벌레라도 씹은 얼굴로 일그러지면서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뭐, 사실, 사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미우역시, 소녀들과 똑같은 증상이 일어나 있는 상황이였고, 물론 다른 의미에서였지만, 태봉은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 소녀들을 석고상처럼 굳게 한마디를 더 하고는 미우을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가게안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꼬마아가씨들도, 우리 자기처럼 예쁘게 커요~”
태봉과 미우의 모습이 가게안에서 사라진 후에야 충격받은 소녀들은 겨우 한마디를 내뱉을 뿐이였다.
“저 아저씨,, 지금.. 우리한테. 저주 내린거 맞지....”
태봉에게 감싸 안긴채 가게안을 빠져나온 미우는 소녀들이 태봉의 말을 저주로 해석하고 있을 때 쯤. 진저리를 치듯, 태봉에게서 몇걸음 떨어져서는 아래위로, 태봉을 주욱 훝어보았다.
아직 미우의 눈에는 콩깍지란 것이 덜 씌었는지, 그런 태봉의 모습이 멋있어 보이기는 커녕, 100만톤짜리 버터를 한입에 삼킨것 같은 기분이들었다. 그런 미우의 야릇한 눈빛에 태봉은 씨익 웃었다.
“거기 엽기 아가씨! 눈초리가 왜 그래?”
“..태봉씨.. 오늘 버터로 맛사지라도 하고 나왔어? 어우~ 느끼!”
“어? 겨우 이정도로?”
“뭐? ‘우리 자기’”
“그럼. 그 애들앞에서, ‘우리 엽기 공주님’이라고 할까?”
미우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몸을 휙 돌려서 뚜벅뚜벅 걸어갔고, 태봉은 장난스런 표정으로 그런 미우를 쫒아갔다. 솔직히, 장난처럼 한 말이였는데, 다른 사람들 눈에 그렇게 느끼해 보일줄은 몰랐던 태봉이였고, 미우의 반응도, 꽤나 재미있었다.
추운줄도 모르고, 둘은 그렇게 알콩달콩한 데이트로 한해의 마지막날의 저녁을 맞이했다.
그리고, 미우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어느덧, 시계가 7시를 가르치고 있는것도 그랬고, 좀전부터, 걸려오는 전화를 무시하기엔, 권여사의 불호령이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덥석 전화를 받고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분명, 윤호와 그 부모를 만나야 할것이다. 미우의 의사와는 상관도 없는 그 만남을...
“왜? 그래? 누구 전환데 안받아?”
“어.. 집...”
“그런데, 왜? 안받아?”
“받으면, 당장 들어오라고 하실거란 말이야,,”
“그래? 그러고 보니.. 시간이... 늦는다고 말 안했어?”
“응... 그냥.. 오늘 집에가면, 좀 불편한 사람을 만나야 돼서...”
“그래? 그럼, 나랑 저녁이라도 먹고 들어가!”
“그럴까?”
미우는 태봉의 말에 귀가 솔깃했지만, 때마침, 미우의 전화로도, 태봉의 전화로도 전화가 걸려왔다.
미우의 전화에 뜬 번호는 윤호의 전화번호였고, 태봉의 전화에 뜬 번호는 유미의 전화번호였다.
태봉은 얼른 전화를 받아들었고, 미우도, 뒷일을 적당히 감당하려면, 하는수 없이 받긴 해야겠다 싶었다.
“여보세요?”
[.....거기 어딥니까?]
미우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전과 다르게 윤호의 목소리가 조금 흥분한 목소리 같았다. 화가난듯이..
“네.. 잠깐, 친구좀 만나고 있는데요?”
[오늘 저녁,, 말씀 드렸을텐데요? 회장님께서도 화나신것 같습니다.]
“.... 알았어요.. 지금 가죠...”
[기다리겠습니다.]
“네...”
미우는 하는수 없이 가겠다는 말을 하고는 전화를 끊고, 태봉 쪽을 쳐다보았다. 태봉도 이제 막 전화를 끊은것 같았다.
“태봉씨,, 어쩌지.. 집에 가봐야 할것 같아서...”
“그래? 나두, 가봐야 할것 같아.. 누나가, 오늘 저녁밖에 내 얼굴 못본다네?”
“그래.. 그럼..”
“어디까지 가? 내가 데려다 줄게..”
“아냐, 근처야, 가족들이 다 외식하러 나오셨다네... 태봉씨나 얼른 가봐, 누나 얼굴 오래 못본다며..”
“그래...”
둘은 아쉬운 듯, 웃는 얼굴로 발걸음을 돌렸다.
미우는 잔뜩 못마땅하고, 걱정된 얼굴을 하고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대체 자신이 왜? 이런 자리에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참석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수가 없었지만, 권여사의 노여움이 무서워 어쩔수 없는 생존 본능으로 발길을 돌려온 것이였다.
그리고, 윤호의 화난 듯한 목소리에도 뭔가 찜찜했다. 하지만, 미안하지는 않았다. 미우는 분명, 그 사람에게 끌려 다니며, 우유부단하게 행동하지도 않았고, 분명하고 단호한 태도로 아니라고 수차례 말했다.
그러니, 윤호가 화를 내든 말든 미우의 잘못은 없는 것이다.
미우가 로비에서 쉼 호흡을 가다듬으며, 마음의 준비를 하고있을 때, 미우의 앞에서부터, 낯익은 그러나 낯선 분위기의 윤호가 미우를 향해 똑바로 걸어오고 있었다.
“전화도 받지않고, 이제까지 어디 있었어요?”
“어디 있든요?”
“말했죠! 저녁약속..”
“나도 말했죠?! 그 약속! 일방적인거지. 제 의사와는 상관 없다고..”
“회장님 화나셨습니다.”
“이미 예상하는 바에요.”
미우는 화난 듯한 얼굴을 뒤로하고,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윤호는 그런 미우의 뒷모습을 보고 짦은 한숨을 내뱉더니, 미우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정면을 바라보며, 미우에게 조용히 말했다.
“너무 일방적이란건 알지만,... 그래도, 누구에게나 기회는 줘야죠? 미우씨는 저를 기회조차 주질않고, 밀어내는군요?”
“...........”
미우는 대답없이 윤호처럼,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끝도 없을 입씨름에 미우는 더 이상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일방적이란걸 안다면서, 어쩜 이러는지.. 그 자체가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우는 분명, 양쪽의 어른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예의나 싸가지를 상실한 사람 취급을 받더라도 자신의 태도를 분명이 하겠다고 다짐하며, 엘리베이터에 발을 들여놓았다.
하지만, 예의나 싸가지를 상실한 사람처럼, 딱! 잘라 말하기에는 분위기가 적절하지 못하다는 것을 미우는 레스토랑 룸안으로 발을 들여놓으며 직감해야했다.
어진듯 미소를 띄우고는 있지만, 권여사의 엄한 표정과, 그리고, 윤호의 부모님인듯 보이시는 어느 노부부 때문에...
윤호의 부모는 이 자리가 그다지 편하지 않은것만은 확실했다. 어른들의 입맛으로 한식으로 셋팅된 식탁위라지만, 아무래도, 어색해 하는것 같기도 했고, 미우가 들어서는 순간. 노부부의 얼굴에선, 뭔가 알수없는 하지만, 상당히 순박하면서 호의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그 표정을 본 미우는 당차게. 이건 아니라고 말하려던 미우의 입을 봉해져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미우는 정말 상견례 같은 이 분위기에 최소한의 예의는 차리고 있어야 했다.
아무래도, 저 노부부가 없는 자리에서 거절을 해도 해야할것만 같았다.
유미의 전화를 받은 태봉은 유미가 오라고 했던, 레스토랑으로 달려갔다.
유미는 이미 민석과 함께 나와 태봉을 기다리고 있었고, 뭐가 그렇게들 좋은지 유미와 민석의 얼굴엔 함박미소가 가득 지어져 있었다.
태봉은 결혼하기전, 반대가 심해서, 유미가 스트레스로 야위거나 하지 않을지를 항상 걱정했지만, 이젠, 그 걱정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될것 같았다. 몇 번 만나보진 못했지만, 볼때마다, 민석은 언제나 한결같은 표정과 포근함으로 유미의 옆을 지켜주고 있었으니까.
“어서와... 집에 안있고, 어디 있었어?”
“어.. 누구좀 만나느라고...그나저나,, 내일이나 볼수 있겠다더니, 갑자기, 왜?”
“그렇게 됬어..”
“처남.. 기쁜소식있는데.. 가르쳐 줄까?”
민석은 태봉의 궁금증을 일으키며, 환한 얼굴로, 말했다.
태봉은 그런 민석의 표정이 꽤, 기쁜일이란걸 감지하고는 얼른 말하라는 눈빛으로 재촉했다.
“뭔데요?”
“음... 내년 8월이면, 처남.. 삼촌 되!”
“네?”
태봉은 그 말을 이해하고, 꽤, 기쁜일이 아니라, 굉장히 기쁜일로 해석이 됬다.
“뭐야? 누나 임신했어? 축하해. 매형 축하해요. 이제 두사람 엄마랑 아빠가 되는거네?”
태봉은 꽤 감격했다. 그리고, 태봉의 표정과 같은 표정이 유미의 얼굴에도 피어있었다.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 그것이 유미와 태봉의 바람이고, 꿈이였는데.. 이제 유미는 그 꿈을 이뤄가고 있는 것이다.
“자, 그래서, 처남얼굴 오늘밖에 못볼것 같아서... 내일, 우리 어머님께서 잉어 고은거 유미 먹인다고.”
“그럼 어쩔수 없죠.. 지금은, 남매 상봉보다. 조카 태교가 더 중요한때니까..”
민석의 말에 태봉은 단, 0.1초도 망설이지 않고 찬성했다. 게다가, 그렇게 결혼을 반대하던, 민석의 어머니가, 유미에게 손수 잉어까지 고아먹인다니. 서운해도 어쩔수 없는일이 아닌가..
태봉은 행복하길 바랬던, 누나가 행복속에서 사는것 같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거기다. 개인적으로 지금 자신도 너무나 행복하니...
태봉은 이왕 이렇게 된김에, 해보러 가자던, 미우의 말이 생각이 났다.
집에돌아가서, 미우에게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까이라도, 함께, 해보러 가자고, 새해의 첫 태양을......
가시방석같은 자리가 어느정도 정리가 되고, 미우의 가족은 집으로, 윤호의 가족은 호텔의 스위트룸으로 돌아간 뒤... 미우는 어색하면서도, 냉랭한 분위기의 오라를 온몸으로 뿜어대며 윤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윤호는 저녁에 평소보다는 덜 까치럽게 행동하며, 자신의 부모님에게 예의 갖추던 미우의 태도에 꽤 기분이 좋았지만, 가족들이 흩어진 직후, 딱딱하게 굳어서 싸늘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미우의 태도에 한치양보없이 맞서고 있는 중이였다.
차가운척은 해도, 그가 알고있는 바로는 본래가, 여린마음을 가졌던걸 아는 윤호의 생각에, 아마, 자신의 부모의 행색에, 그리고, 순박함에, 차마,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못했을거라고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분명. 지금 미우는 어떻게 하면, 윤호의 마음을 돌려놓을수 있을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이리라, 윤호는 미우의 차가운 눈빛을 은근히 즐기는듯, 여유롭게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미우는 대체, 이 놈의 얼음조각을 어떻게 해야 떼어놓을수 있을지 고민했지만,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면전에 대놓고 무시도, 면박도 줘봤고, 똑! 부러지게 얘기도 해봤지만, 아직까지 꿈적도 하지 않았으니. 일상적인 방법으로는 안될것 같았다. 냉랭한 표정으로 한참을 윤호를 쏘아보던 미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면, 그만 할래요?”
“......... . ”
“아까는, 그쪽 부모님 얼굴도 있고, 그쪽 부모님이야, 제가 이렇게 상무님 싫어하는거 모르시는것 같아서, 무안하지 마시라고. 참았어요.. 하지만, 더 이상은 나도 안되겠어요.. 대체 어떻게 해야 그만할래요?”
“말했잖아요.. 그만할 생각 없다고.. 그럼.. 미우씨는 어떻게 해야 나한테 올래요? 난 괘, 오랫동안 미우씨만 보고있는데...”
저 말은, 미우가 조금이나마 호의적인 관심, 그것도 사랑과 비슷한 관심이 마음의 단 1%라도 있었어도, 조금은 흔들릴 만한 소리였다. 아니, 단 1%의 관심이 없더라도, 멋진 남자가. 그윽한 시선으로 저런말을 했다면, 흔들릴수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지금 윤호의 입에서 나온말은. 그윽하기 보다는 마치, “이번 기획안 언제 넘겨주실래요?”라고 말하는것 같았다. 조금의 감정도 들어있지 않은... 그 말에 미우는 기가찼다.
“나만 보고있는 이유가, 저번에 말한 그 이윤가요? 그렇다면, 그만한 애들은 많아요, 나보다 조건이 더 놓은..”
“그것도 이미 말했을텐데요? 난. 다른 사람보다 미우씨가 마음에 든다구요.. 그리고,,,,,,,,,,”
윤호는 다음에 나올말을 입안에 놓고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윤호가 이어서 할말은..‘그리고, 당신이란 사람이 점점 더 잡고 싶어졌어요,’였다. 하지만, 그말은 차마 입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말했어도, 미우는 윤호 특유의 그 딱딱한 말투에 별 반응도 보이지 않았겠지만..
미우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윤호의 태도에 어쩔수 없었다.
지금 미우가 지키고 있는 비밀중 일부를 말해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상무님.. 아무리 그러셔도, 전, 상무님과 잘해볼 생각 없어요~. 저!... 만나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까요..”
미우는 말을 내뱉어놓고, 윤호의 반응을 살폈다. 따로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어느정도 반응이 있어야 정상일테니까. 하지만, 윤호의 표정을 봐선, 전혀 믿지 않는 것같았다. 아니, 믿기는 커녕, 오히려, 별 거짓말을 다한다는 표정으로 웃고있었다.
“이봐요! 나 만나는 사람 있다구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하라구요! 알아들어요?”
윤호는 미우의 말에 느긋한 미소로 답하면서, 지긋이 미우를 바라보았다.
어쩜, 까칠하고 냉정하던 아가씨가 요즘 자꾸만 빈틈을 보이는가 싶더니, 이젠, 말도 안되는 변명까지...
그렇게 자신이 싫단말인가. 왠지 씁쓸해지는 기분이 든 윤호는 지긋이 미우를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특유의 차가움과 느긋함이 적절하게 섞인 분위기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럼 그 사람 데려와 봐요... 나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면, 물러서 드리죠!”
윤호의 느긋한 태도는 건방지고 당당하긴했지만, 그 모습이 꽤나 잘 어울렸다.
하지만, 미우는 윤호의 그런 자신만만한 태도에 감탄을 하고 있을세가 없었다. 저 말대로, 당장이라도, 태봉을 부르면, 오겠지만, 더 큰 일은 뒷일이였다. 태봉이. 이런 관계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고, 또! 할머니인 권여사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를 일이니 말이다.
저 페이스에 말려들면 안되는데.. 미우는 태봉덕에 냉정함을 어느정도 잃어버린 후라, 윤호의 뻔뻔함에도, 그 이전처럼, 차갑게 얼어버리기란 나름 어려웠기에, 조금 당황했다.
“지금 당장은 안돼요! 그 사람은 내가 지금 그쪽 만나고 있는것도 모를텐데.. 다 설명한 다음이면 몰라도!”
윤호는 그럴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빙긋이 미소를 띄었다.
어떻게든, 자신과의 어떤 관계를 만들지 않으려고 애써 봤겠지만, 자신의 강경한 태도에 점점, 방법이 없었겠지.. 그렇지만, 겨우 생각했다는 것이. 있지도 않은 애인이나 만들려고 하다니...
윤호는 피식 웃으며,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모금 들이켰다. 그리고는,
“괜히, 지금한말 끼워 맞추려고, 아무나 데려오거나 뭐,, 그러진 말아요, 그런거라면, 정말 끄떡도 하지 않을 사람이니까요. 전.... 자! 그럼 가실까요? 집까지 모셔다 드리죠..”
“.......”
미우는 뭐라고 할 말이 없어 손으로 열받은 얼굴에 열심히 부채질해댈수 밖에 없었다.
집으로가는 내내, 미우는 잔뜩 머리를 굴려댔다.
어떻게 해야 한방에 태봉으로 할머니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고, 저 찰거머리같은 얼음조각을 떨어트려 놓을 것인지를 하지만, 마땅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럼... 야반도주?!!! 태봉과? 이런 생각까지 머물던 미우는 문득, 태봉이 말해준 그의 부모님의 사랑이야기가 떠올랐다.
‘부모님이 그런 사랑을 하셨는데... 어렵겠지?“
미우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딩동~’하는 소리와 함께, 미우의 핸드폰 메시지 알림 소리가 들려왔다.
미우는 얼른 전화기를 꺼내서 메시지를 확인했다.
[우리.. 내일. 해보러 갈까?새벽 2시 데릴러갈게 주소찍어!]
미우는 잔뜩 불만과 걱정으로 가득차 있던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띄우고는 바로 태봉에게 답장을 보냈다.
옆에 앉은 윤호는 그런 미우를 흘깃 보고는 미세하게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슨 문자이길래, 저렇게 좋아하고, 반가워 하는것일까? 정말.. 미우의 말대로, 다른사람이 있는걸까?
하지만, 앞뒤가 맞질 않았다. 여기서 아는 사람만나는 것이 부담스러워 지방지사로 내려간 걸로 알고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다라는 친구와 함께있으며, 회사, 집.. 그 외에는,.... 이상한 느낌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윤호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다른 사람이 없을 것이다. 민석과의 결혼이 깨어진 다음. 마음의 빗장을 걸어잠궜을 미우일것이다.. 하지만, 미우의 얼굴에 떠오른 환한 미소에, 윤호는 내심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좋아! 2시까지 서울역 앞에 갈게]
태봉은 자신이 문자를 보내자 마자, 미우에게서 온 답장을 확인하고는 미리 챙겨놓을 것들을 식탁위에 주욱 늘어놓고, 알람 시계를 2시에 맞춰놓고, 잠을 청했다.
미우는 일어나지 못할까봐 책상에 엎드려 선잠을 자고. 알람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자신의 알람시계는 새벽 열두시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미우는 태봉과 함께, 새해의 첫해를 보러간다는 설레임에. 몰려오는 잠을 쫒아버리고, 이것저것 주섬주섬 챙기고, 이른 시간에 화장까지 하고, 까치발로,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고 나갔다. 혹시라도, 다른 가족들이 깨서 붙잡힐순 없으니, 미우는 숨도 거의 쉬지 못하면서, 겨우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그리고, 미리 불러놓은 택시가 이미 대문앞에서 대기중이였다.
미우는 얼른 택시위에 올라타서는 ‘서울역’을 힘차게 외치고, 설레는 마음으로, 태봉에게 달려갔다.
태봉은 저녁에 미리 빌려놓은 차를 서울역 앞에 대기시켜 놓고, 미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차안의 두툼한 가방안은 미리 준비한 뜨거운 커피와 녹차가 각각 들어있는 보온병과 차안이라지만, 미우가 추울지도 모르니 감쌀 휴대용 담요와, 집근처 편의점에서 사온 이런저런 군것질 거리가 가득 담겨있었다. 그리고 삼각대와, 디지털 카메라까지...
미리 잠을 좀 자둬서인지. 그렇게 피곤하진 않았지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눈이 약간 뻑뻑한 느낌이 들었다. 악속한 2시가 조금 덜되서, 태봉의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미우였다.
태봉은 환하게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어디긴! 앞에 왔는데.. 태봉씨는 어디야?]
태봉은 근처라는 미우의 말에 문을 열고 내려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하얀 점퍼를 입은 미우의 모습이 보였다. 태봉은 반갑게 손을 흔들며.
“조금만 왼쪽으로 돌아봐.. ”
미우는 전화기를 귀에 댄체 태봉이 말한대로, 자신이 서있는 약간 왼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금새, 손을 열심히 흔들고 있는 태봉이 보였다. 미우는 전화를 끊으며 태봉에게로 달려갔다. 바람처럼...
“오래, 기다렸어?”
“아니, 나도 금방 왔었어.”
“그런데.. 차 빌린거야?”
“어.. 기차탈까 생각했었는데, 이 시간에 기차가 없다!”
“음... 안피곤해?”
“괜찮아!”
“피곤하면, 말해! 내가 운전할게,,,”
“으이구~ 눈에서 아직 잠이 안가셨는데..근데! 이 시간에 화장까지 하고 나왔어?”
“그..그럼. 어떻게 맨얼굴로 나와?”
“괜찮아. 너 화장 안해도 알아볼수 있으니까. 자, 어서 가자!”
태봉은 미우가 탈수있게 문을 열어주고, 미우는 수줍게 웃으며, 태봉이 열어준 문으로 따뜻한 차 안으로 얼른 올라탔다. 찬 바람을 쏘이고 따뜻한 차 안으로 들어와서인지, 차가 출발하고 얼마되지 않아. 미우는 졸기 시작했다. 잠깐 잠들었던 시간조차, 일어나지 못할까와 책상에 엎드려 선잠을 자서인지 금새 피곤해졌지만, 운전하는 사람 옆에 두고 자는건 예의가 아니라, 자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태봉은 그런 미우를 보고는 잠시 갓길에 차를 세우고, 준비해온 담요를 꺼내서 미우에게 펼쳐주었다.
“화장까지 하고 나오느라고, 고생했어, 난 충분히 잤으니까. 내 걱정 하지말고, 눈좀 붙여.”
“그래도, 미안해서 어떻게 그래?”
“괜찮다니까.. ”
태봉의 따뜻한 표정에 미우는 잠시 미안하더라도, 뻔뻔해지기로 마음 먹었다. 이 사람앞에서 그래도 될것 같으니까...
“그럼.. 미안하지만, 실례,.,..”
미우는 태봉이 건넨 담요를 가슴께까지 올려 감싸고는 의자에 기대서 살짝 눈을 감았다.
태봉은 금새 잠들 미우를 보고 다시, 차를 부드럽게 출발시켰다.
얼마나 잤는지, 미우는 소란스런 소리에 눈을 떴다.
어느새, 어슴프레 날이 밝아오고 있었고, 주변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미우는 얼른 눈을 뜨고 옆을 돌아보았다. 미우의 옆에는 태봉이 음악감상을 하는듯, 살짝 두눈을 감고 있었다.
미우는 얼른 거울을 꺼내서, 얼굴상태를 먼저 살폈다. 눈꼽이나 끼지 않았을까 하고.. 살짝 얼굴을 가다듬고 고개를 돌리니, 태봉이 미우를 보며 웃고있었다.
“아! 깜짝이야.. 언제 깼어?”
“깨긴, 안잤어.. 뭘 그렇게 고쳐? 화장 안해도 되는데..”
“그래도 이왕 한건데.. 뭉개지면, 보기 싫잖아! 근데, 벌써 밝아지는 것 같은데?”
“응. 이제 슬슬 내릴까?”
“응!”
차에서 내린 둘은 나란히 서서 인파속으로 묻혀 들어가, 바닷가로 향했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에 닿아왔지만, 미우의 마음만은 따뜻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새해의 해를 보러오다니.. 예전... 아주 예전에 이런 꿈도 꿨었지만, 한동안, 이룰수 없는 꿈이라며, 포기했던 일...
그 꿈을 지금 미우는 현실에서. 이루고 있는 것이였다. 그래서 더 꿈인것 같았고, 더, 행복했다.
그리고, 방금전, 슬며시 미우의 손을 꼭쥔 태봉의 손길에. 꿈이 아니라, 현실인걸 알수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양은 그 찬란한 빛을 발하며, 서서히 수평선에서 떠올랐다. 미우는 새삼 그 태양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런 기분은 태봉도 함께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잔뜩 감격한 얼굴로 태양을 보는 미우를 보며, 어쩌면, 미우가 느끼는 행복보다 더 큰 행복을 느끼고 있는지도... 태봉은 자신도 모르게. 미우의 귓가에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새해 복 많이 받자! 그리고,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