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요!! 정말 왜 이래요?! 이런거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란아는 억지로 손에 쥐어진 벨벳 케이스를 눈앞의 남자에게 돌려주며 신경질 적으로 말했다. "한란아씨. 내이름은 이봐요가 아니라 김하민 입니다. 그리고 선물이라는데 왜 싫다는거죠?" 휴… 아침부터 시달린 두통이 다시 도지는 것 같다. "좋아요 김하민씨. 우선은 이유없는 선물도 싫거니와 이렇게 비싼걸 무턱대고 받기도 싫어요. 그렇게돈을 쓰고 싶다면 좀 더 의미있는 일에나 쓰시죠??" "훗.. 이유가 그거라면 더더욱 이 목걸이를 받으셔야 겠는데요? 이 선물은 제가 란아씨가 맘에 들어서..그러니까 연애하고 싶어서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별로 비싸지도 않아요. 또 제게는 란아씨 환심을
사는게 의미있는 일이기도 하구요." 회사 내에 있는 모든 여자들.. 심지어는 식당 아주머니들까지도 반하게 하는 미소를 지으며 눈앞의
남자가 말한다. "그것 참 안됐네요. 전 댁한테 관심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거니까요. 그러니까 서로 피곤해지는 이런 자리 다시는 만들지 말았으면 해요." 시선을 차도로 향하며 오늘따라 늦어지는 버스를 원망했다. "관심이 없다면 만나면서 차차 만들면 되죠. 왜 처음부터 딱 잘라 아니라고 말하는거죠? 제가 알기론 한란아씨 지금 만나는 사람도 없잖아요. 도대체 제 어디가 맘에 안드는 겁니까?" 아.. 정말 이런거 싫은데... 주위를 둘러보니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라해도 회사내에서 종종 마주치는 사람들이 몇몇 보인다. 예정에도 없는 택시를 타야하나…?
하민은 란아가 한동안 말이 없자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이곤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차로 향했다.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자리를 옮겨서 얘기하죠. 식사하러 갈…" 아직 채 말을 맺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손을 쳐내며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한다. "이봐요. 대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 거죠? 돈이 많아서..? 아님.. 인물이 반반해서…? 세상 여자들이 모두 당신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전 수차례 거절의 뜻을 밝혔는데도 왜 이러시는지 도대체 모르겠어요. 당신.. 머리 나빠요? 꼭 직설적으로 얘기해야 알겠어요? 난 당신이 싫어요. 부모 잘 만나서 노력없이 모든걸 쉽게 쉽게 얻으려 하는 당신같은 부류가 싫다고요. 알겠어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예고도 없이 휙 돌아 바로앞에 정차해 있는 택시를 타고 사라져갔다. 그녀가 남기고 간 말에 분명 기분 나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젠장… 화내는 모습이 너무 예뻐보였다. 정말... 반해버렸나 보다.
망했다. 아무리 그래도 저 대단한 대한그룹 회장의 아들인데… 너무 함부로 한건 아닌지 모르겠다. 나중에라도 자리하나 꿰차고 앉을지 모르는데… 이거 회사 생활 하기 힘들어 지는건 아닐까…? 하지만 이게 대체 몇번째냐고.. 내 월급 반년치를 모아도 살 수 없는 비싼 목걸이를 주면 뭐.. 내가 좋아서 넙죽 받을줄 아나…? 참나.. 그리고 뭐? 별로 비싸지도 않아? 그래~ 너한테는 껌값이겠지… 유학이랍시고 해외 물 좀 먹고와서 빈둥빈둥 노는 주제에… 자기 손으로 돈 한푼 벌어보지도 못했으면서 부모돈은 펑펑쓰지… 그래 솔직히 부럽다. 부러워서 배가 다 아프다. 요즘들어 경영 배운답시고 회사에 들락 거리는거… 그게 다 용돈 타러 온다는 것쯤 누구나 안다. 누구는 돈이란게 무서워 벌벌 떠는데… 한참 상념에 젖어 있는데 주머니 안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여보세요." "어~ 딸!! 엄마야. 아빠가 전화를 안받네? 아빠한테 전화해서 엄마가 맛있는 해물탕 끓여 놨으니까 오늘 일찍 들어 오시라고 해. 이것 저것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엄마가 계속 전화를 할 수가 없어.. 꼭 말씀드려~ 알았지? 어휴.. 정신없어라." "어.. 엄마!!!" 하지만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고, 란아는 벌써부터 가슴이 먹먹해지고 떨려온다. "저기요. 아저씨!! 죄송하지만 좀 빨리 가주시겠어요? 빨리요 빨리!!"
똑똑. "들어와요" 예후는 노크소리에 모니터에서 눈을 뗐다. 신상품 출시 문제로 눈 코 뜰새 없이 바쁜 지금이지만, 모두들 퇴근한 이 시간에 올만한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고, 또한 일 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였다. "사장님, 알아왔습니다." 김비서는 사진 한장을 책상에 올려 놓으며 예후가 사진을 살펴 볼 수 있도록 잠시 여유를 두었다. 사진은 적당히 햇볕에 그을린 듯한 건강한 피부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의 여자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포착한 것이었다. 사진 속의 여자는 활기가 넘쳐보였고, 특히 두 눈,,, 눈이 웃고 있었다. '천박해 보이는군..' "시작하지." "네. 이름 한란아. 나이 25세. 일년전 한국 전문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대한그룹에 입사. 이제껏 이런한 유례가 없었던 대한그룹에서 일년만에 대리로 승진하여 한동안 물의를 일으켰으나, 지금은 능력을 인정 받아 조용한 회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잠깐.. 승진한 시기가 언제였지..?" "김하민 군이 한국에 들어오기 한달전 입니다." "그 전에 만났을 가능성은 있나?" "현재로선 없어보입니다." "계속하지." "형제 자매는 없으며 어렸을 땐 꽤 유복하게 자랐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그 충격으로 어머니가 정신 질환을 앓게 되자 이때부터 실질적인 가장이 되었습니다. 학업은 매년 장학금을 받으며 마쳤고, 현재 살고있는 아파트 내에서도 평판이 좋습니다. 더.. 알아볼까요?" "아니 됐네. 그만 가보지." "피곤해 보이십니다.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니야. 그만 가보게." "네." 김비서가 나가자 예후는 그제야 의자에 등을 묻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와 눈을 감았지만 즐거운 듯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맑아 보이는… 아니야. 그런 여자일수록 더 치밀하고 계산적이지. 주변정리 깔끔하고 흠 잡을데 없이 보여지는 모습… 웃어…? 하하.. 남의 가슴에 피눈물 흐르게 하고는 웃음이 잘도 나오는군. 그래. 웃을 수 있을 때 실컷 웃어보라고. 예후는 손에 들린 사진을 사정없이 움켜쥐었다.
집에 도착한 란아는 거실의 풍경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한참을 넋놓고 바라보는데 엄마의 방에서 나오는 간병인 아주머니가 보였다. "아주머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어휴. 란아야. 말도마. 글쎄 아침에 눈뜨자마자 나더러 시장을 가자는 거야. 기분도 괜찮아 보이고 바람도 쐴겸 나갔다 왔지. 꼼꼼하게 장도보고 해서 오늘은 기분이 좋은가보다 했어. 집에와서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음식을 만들더니 글쎄 나더러 란아 아빠한테 전화를 넣으라는거야. 내가 전화번호를 모르겠다고 했더니 직접 번호를 누르더라? 그리고는 결번이라는 소리가 나오는데도.. 그후에 란아 너한테 전화해서 그렇게 끊은거야. 근데 전화 끊고 조용히 상차리던 사람이 갑자기 탕이랑 반찬을 집어던져서…. 집이 이모양 됐네. 겨우 말려서 진정제 먹였어. 지금 막 잠들었구." 가슴이.. 먹먹하다. 대체 언제까지 반복되어야 할까..? 난… 언제까지 엄마를 기다려야 할까…? 점점 지쳐가는 자신이 느껴진다. 하지만, 도망갈 수도,, 외면할 수도 없다. 끝없이 내려앉으려는 가슴을 겨우 겨우 붙들자, 이번에는 매번 저대신 이런일로 진을 빼시는 아주머니께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아주머니. 고생하셨죠? 이제 그만 가보세요."
"오늘 자고 갈까?"
"아니에요. 집에 얘기도 안해 놓으셨잖아요. 괜찮으니까 집에 가셔서 쉬세요." "그럼, 대충 치워주고 갈께." "아니, 제가 할께요. 우리 엄마 이만큼 잘 돌봐주시는 것만도 고마운데요. 뭘…" "어휴. 나야 돈받고 일하는건데… 당연하지. 얼른 들어가서 씻어. 내가 대충 치워줄께." 눈물이 맺힌 나를 보고도 못본척.. 고맙게도 화장실로 등떠밀어 주신다. 여지껏 많은 간병인 아주머니들이 바뀌었지만, 이만큼 오래 계셨던 분도 또 이만큼 우리를 살갑게
대해주시는 분도 없었다. 제발, 오래도록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예전의 엄마를 되찾는 것이다. 강하고.. 잘웃고… 활기차고 열정적이던… 엄마… 엄마…. 이젠 나를 좀 봐줘… 나 좀 안아줘…
다음날, 회사 로비로 들어서는데 모두들 자신을 보며 수근대는 느낌이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사무실로 들어서 자리에 앉을때까지 그 느낌은 가라앉지 않았다. 도무지 궁금증을 참지 못해 앞자리에 있는 김윤영에게 물었다. 윤영과는 입사 동기로 내내 친하게 지냈지만 요사이 란아의 진급 문제 때문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 하지만 지금 이 현상을 물어볼 사람은 윤영 밖에 없었다. "김윤영, 뭐야..? 왜 다들 날 보고 수근거리는거야?"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대리님." "야.. 너 진짜 이러기야..?" "네..? 뭐가요?" "꼬박 꼬박 존댓말 하는거 하며,, 요새 계속 나 피하잖아. 그리고 정말.. 몰라서 그러는거야?" 내 말에 새침하게 옆으로 비껴보더니, 새초롬히 대답하는 윤영이다. "궁금하면 이따가 거하게 쏴. 맨입으론 안돼." "푸훗~! 알았어. 알았어. 근데 뭐야. 진짜 뭐 있는거야?" "옥상으로 와. 여기는 귀가 너무 많아."
"뭐!!!!??? 하!! 참.. 어이가 없어서.. 진짜… " "진정해. 진정… 솔직히 나도 첨엔 그런 생각 들었어. 김하민이 너한테 그렇게 들이대고... 게다가 넌 회사 창설 이래 초고속 진급을 했잖아. 아무런 연줄도 없는 네가..." "하지만 내가 승진하고 나서 김하민이 입국 한거잖아!" "그렇긴 하지만 뭐..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세상이니까… 이리저리 짜 맞춰서 부풀리고 부풀리는거
아니겠어..? 이제는 니가 더 큰걸 노리고 김하민이랑 줄다리기를 하는거란 말도 나오고 있어." "뭐? 그게.. 무슨말이야?" "흠… 어제 버스 정류장에서 김하민이랑 실랑이가 있었다며?? 니가 지금으로 만족하지 않고… 저기…안방 차지하려 수 쓰는거라고.. 그런 남자 일수록 갖지 못하는거에 더 연연하기 마련인데 그런 심리를잘 이용하고 있다나..?"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회사일이 힘들긴 했지만 즐거웠었다. 인간 한란아로써 인정받고, 노력하는 만큼 돌아오는 곳이라 생각 했었는데… 전혀 예기치 않은 문제로 인해 하루 아침에 껄끄러운 장소가 돼 버리다니…
술도 기분좋게 취했고, 밤 공기도 알맞게 서늘해보여, 아파트 단지 입구에 택시를 세웠다. 다행히 오늘은 간병인 아주머니가 주무시고 가는 날 이어서 맘 편히 윤영과 술을 마실 수 있었다. 술을 마시고 보니 그까짓게 대순가.. 싶고, 나만 아니면 된거란 생각에 맘이 편해진다. 췌!! 그런걸로 기가 죽을 내가 아니라고… 낮동안 의기소침 해져있던 마음을 버리고 활기찬 나를 다잡으며 계단을 오르는데, 자동차 전조등이
두어번 깜박이며 시야를 가린다. 뭐야.. 매너없게… 슬쩍 째려봐주고 돌아서는데 이번엔 차문이 열린다. 헉… 설마 째려봤다고 해코지 하는건 아니겠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엘리베이터 상향 버튼을 눌렀다. 3층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무척 더디게 내려왔고, 열린 문 안으로 냉큼 올라타 버튼을 누르는데 입구에 검은 실루엣이 보인다.
급한 마음에 여러번 버튼을 눌러 보았지만,,, 도무지 닫히지 않는 문이 야속하기만 하다. 심장은 빠르게 두근거리고 손바닥엔 땀이 베어나왔다. 요새 이상한 사람 많다던데, 설마.. 설마… 문아~ 빨리 닫혀라. 제발… 조마조마한 마음에 발을 동동구르는데 닫히는 문 사이로 손이 들어온다. "꺄아악~~~~~~~~~!!!!!!!!!!!"
똑바로 걷기【1】
"이봐요!! 정말 왜 이래요?! 이런거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란아는 억지로 손에 쥐어진 벨벳 케이스를 눈앞의 남자에게 돌려주며 신경질 적으로 말했다.
"한란아씨. 내이름은 이봐요가 아니라 김하민 입니다. 그리고 선물이라는데 왜 싫다는거죠?"
휴… 아침부터 시달린 두통이 다시 도지는 것 같다.
"좋아요 김하민씨. 우선은 이유없는 선물도 싫거니와 이렇게 비싼걸 무턱대고 받기도 싫어요. 그렇게돈을 쓰고 싶다면 좀 더 의미있는 일에나 쓰시죠??"
"훗.. 이유가 그거라면 더더욱 이 목걸이를 받으셔야 겠는데요? 이 선물은 제가 란아씨가 맘에 들어서..그러니까 연애하고 싶어서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별로 비싸지도 않아요. 또 제게는 란아씨 환심을
사는게 의미있는 일이기도 하구요."
회사 내에 있는 모든 여자들.. 심지어는 식당 아주머니들까지도 반하게 하는 미소를 지으며 눈앞의
남자가 말한다.
"그것 참 안됐네요. 전 댁한테 관심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거니까요. 그러니까 서로 피곤해지는 이런 자리 다시는 만들지 말았으면 해요."
시선을 차도로 향하며 오늘따라 늦어지는 버스를 원망했다.
"관심이 없다면 만나면서 차차 만들면 되죠. 왜 처음부터 딱 잘라 아니라고 말하는거죠? 제가 알기론
한란아씨 지금 만나는 사람도 없잖아요. 도대체 제 어디가 맘에 안드는 겁니까?"
아.. 정말 이런거 싫은데... 주위를 둘러보니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라해도 회사내에서 종종 마주치는
사람들이 몇몇 보인다.
예정에도 없는 택시를 타야하나…?
하민은 란아가 한동안 말이 없자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이곤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차로 향했다.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자리를 옮겨서 얘기하죠. 식사하러 갈…"
아직 채 말을 맺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손을 쳐내며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한다.
"이봐요. 대체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 거죠? 돈이 많아서..? 아님.. 인물이 반반해서…? 세상
여자들이 모두 당신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나요? 전 수차례 거절의 뜻을 밝혔는데도 왜 이러시는지
도대체 모르겠어요. 당신.. 머리 나빠요? 꼭 직설적으로 얘기해야 알겠어요? 난 당신이 싫어요.
부모 잘 만나서 노력없이 모든걸 쉽게 쉽게 얻으려 하는 당신같은 부류가 싫다고요. 알겠어요?!!"
여기까지 말한 그녀는 예고도 없이 휙 돌아 바로앞에 정차해 있는 택시를 타고 사라져갔다.
그녀가 남기고 간 말에 분명 기분 나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젠장… 화내는 모습이 너무 예뻐보였다.
정말... 반해버렸나 보다.
망했다. 아무리 그래도 저 대단한 대한그룹 회장의 아들인데… 너무 함부로 한건 아닌지 모르겠다.
나중에라도 자리하나 꿰차고 앉을지 모르는데… 이거 회사 생활 하기 힘들어 지는건 아닐까…?
하지만 이게 대체 몇번째냐고.. 내 월급 반년치를 모아도 살 수 없는 비싼 목걸이를 주면 뭐.. 내가
좋아서 넙죽 받을줄 아나…? 참나.. 그리고 뭐? 별로 비싸지도 않아? 그래~ 너한테는 껌값이겠지…
유학이랍시고 해외 물 좀 먹고와서 빈둥빈둥 노는 주제에… 자기 손으로 돈 한푼 벌어보지도 못했으면서 부모돈은 펑펑쓰지… 그래 솔직히 부럽다. 부러워서 배가 다 아프다.
요즘들어 경영 배운답시고 회사에 들락 거리는거… 그게 다 용돈 타러 온다는 것쯤 누구나 안다.
누구는 돈이란게 무서워 벌벌 떠는데…
한참 상념에 젖어 있는데 주머니 안에서 진동이 느껴진다.
"여보세요."
"어~ 딸!! 엄마야. 아빠가 전화를 안받네? 아빠한테 전화해서 엄마가 맛있는 해물탕 끓여 놨으니까
오늘 일찍 들어 오시라고 해. 이것 저것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엄마가 계속 전화를 할 수가 없어..
꼭 말씀드려~ 알았지? 어휴.. 정신없어라."
"어.. 엄마!!!"
하지만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고, 란아는 벌써부터 가슴이 먹먹해지고 떨려온다.
"저기요. 아저씨!! 죄송하지만 좀 빨리 가주시겠어요? 빨리요 빨리!!"
똑똑.
"들어와요"
예후는 노크소리에 모니터에서 눈을 뗐다.
신상품 출시 문제로 눈 코 뜰새 없이 바쁜 지금이지만, 모두들 퇴근한 이 시간에 올만한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고, 또한 일 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였다.
"사장님, 알아왔습니다."
김비서는 사진 한장을 책상에 올려 놓으며 예후가 사진을 살펴 볼 수 있도록 잠시 여유를 두었다.
사진은 적당히 햇볕에 그을린 듯한 건강한 피부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의 여자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모습을 포착한 것이었다.
사진 속의 여자는 활기가 넘쳐보였고, 특히 두 눈,,, 눈이 웃고 있었다.
'천박해 보이는군..'
"시작하지."
"네. 이름 한란아. 나이 25세. 일년전 한국 전문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대한그룹에 입사.
이제껏 이런한 유례가 없었던 대한그룹에서 일년만에 대리로 승진하여 한동안 물의를 일으켰으나,
지금은 능력을 인정 받아 조용한 회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잠깐.. 승진한 시기가 언제였지..?"
"김하민 군이 한국에 들어오기 한달전 입니다."
"그 전에 만났을 가능성은 있나?"
"현재로선 없어보입니다."
"계속하지."
"형제 자매는 없으며 어렸을 땐 꽤 유복하게 자랐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그 충격으로 어머니가 정신 질환을 앓게 되자 이때부터 실질적인 가장이 되었습니다.
학업은 매년 장학금을 받으며 마쳤고, 현재 살고있는 아파트 내에서도 평판이 좋습니다.
더.. 알아볼까요?"
"아니 됐네. 그만 가보지."
"피곤해 보이십니다.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니야. 그만 가보게."
"네."
김비서가 나가자 예후는 그제야 의자에 등을 묻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와 눈을 감았지만 즐거운 듯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맑아 보이는…
아니야. 그런 여자일수록 더 치밀하고 계산적이지. 주변정리 깔끔하고 흠 잡을데 없이 보여지는 모습…
웃어…? 하하.. 남의 가슴에 피눈물 흐르게 하고는 웃음이 잘도 나오는군.
그래. 웃을 수 있을 때 실컷 웃어보라고.
예후는 손에 들린 사진을 사정없이 움켜쥐었다.
집에 도착한 란아는 거실의 풍경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한참을 넋놓고 바라보는데 엄마의 방에서 나오는 간병인 아주머니가 보였다.
"아주머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어휴. 란아야. 말도마. 글쎄 아침에 눈뜨자마자 나더러 시장을 가자는 거야. 기분도 괜찮아 보이고
바람도 쐴겸 나갔다 왔지. 꼼꼼하게 장도보고 해서 오늘은 기분이 좋은가보다 했어. 집에와서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음식을 만들더니 글쎄 나더러 란아 아빠한테 전화를 넣으라는거야.
내가 전화번호를 모르겠다고 했더니 직접 번호를 누르더라? 그리고는 결번이라는 소리가 나오는데도..
그후에 란아 너한테 전화해서 그렇게 끊은거야. 근데 전화 끊고 조용히 상차리던 사람이 갑자기
탕이랑 반찬을 집어던져서…. 집이 이모양 됐네. 겨우 말려서 진정제 먹였어. 지금 막 잠들었구."
가슴이.. 먹먹하다.
대체 언제까지 반복되어야 할까..? 난… 언제까지 엄마를 기다려야 할까…?
점점 지쳐가는 자신이 느껴진다. 하지만, 도망갈 수도,, 외면할 수도 없다.
끝없이 내려앉으려는 가슴을 겨우 겨우 붙들자, 이번에는 매번 저대신 이런일로 진을 빼시는
아주머니께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아주머니. 고생하셨죠? 이제 그만 가보세요."
"오늘 자고 갈까?"
"아니에요. 집에 얘기도 안해 놓으셨잖아요. 괜찮으니까 집에 가셔서 쉬세요."
"그럼, 대충 치워주고 갈께."
"아니, 제가 할께요. 우리 엄마 이만큼 잘 돌봐주시는 것만도 고마운데요. 뭘…"
"어휴. 나야 돈받고 일하는건데… 당연하지. 얼른 들어가서 씻어. 내가 대충 치워줄께."
눈물이 맺힌 나를 보고도 못본척.. 고맙게도 화장실로 등떠밀어 주신다.
여지껏 많은 간병인 아주머니들이 바뀌었지만, 이만큼 오래 계셨던 분도 또 이만큼 우리를 살갑게
대해주시는 분도 없었다. 제발, 오래도록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간절히 바라는 것은 예전의 엄마를 되찾는 것이다.
강하고.. 잘웃고… 활기차고 열정적이던…
엄마… 엄마…. 이젠 나를 좀 봐줘… 나 좀 안아줘…
다음날, 회사 로비로 들어서는데 모두들 자신을 보며 수근대는 느낌이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사무실로 들어서 자리에 앉을때까지 그 느낌은 가라앉지 않았다.
도무지 궁금증을 참지 못해 앞자리에 있는 김윤영에게 물었다.
윤영과는 입사 동기로 내내 친하게 지냈지만 요사이 란아의 진급 문제 때문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
하지만 지금 이 현상을 물어볼 사람은 윤영 밖에 없었다.
"김윤영, 뭐야..? 왜 다들 날 보고 수근거리는거야?"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대리님."
"야.. 너 진짜 이러기야..?"
"네..? 뭐가요?"
"꼬박 꼬박 존댓말 하는거 하며,, 요새 계속 나 피하잖아. 그리고 정말.. 몰라서 그러는거야?"
내 말에 새침하게 옆으로 비껴보더니, 새초롬히 대답하는 윤영이다.
"궁금하면 이따가 거하게 쏴. 맨입으론 안돼."
"푸훗~! 알았어. 알았어. 근데 뭐야. 진짜 뭐 있는거야?"
"옥상으로 와. 여기는 귀가 너무 많아."
"뭐!!!!??? 하!! 참.. 어이가 없어서.. 진짜… "
"진정해. 진정… 솔직히 나도 첨엔 그런 생각 들었어. 김하민이 너한테 그렇게 들이대고... 게다가 넌
회사 창설 이래 초고속 진급을 했잖아. 아무런 연줄도 없는 네가..."
"하지만 내가 승진하고 나서 김하민이 입국 한거잖아!"
"그렇긴 하지만 뭐.. 남의 말하기 좋아하는 세상이니까… 이리저리 짜 맞춰서 부풀리고 부풀리는거
아니겠어..? 이제는 니가 더 큰걸 노리고 김하민이랑 줄다리기를 하는거란 말도 나오고 있어."
"뭐? 그게.. 무슨말이야?"
"흠… 어제 버스 정류장에서 김하민이랑 실랑이가 있었다며?? 니가 지금으로 만족하지 않고… 저기…안방 차지하려 수 쓰는거라고.. 그런 남자 일수록 갖지 못하는거에 더 연연하기 마련인데 그런 심리를잘 이용하고 있다나..?"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회사일이 힘들긴 했지만 즐거웠었다.
인간 한란아로써 인정받고, 노력하는 만큼 돌아오는 곳이라 생각 했었는데…
전혀 예기치 않은 문제로 인해 하루 아침에 껄끄러운 장소가 돼 버리다니…
술도 기분좋게 취했고, 밤 공기도 알맞게 서늘해보여, 아파트 단지 입구에 택시를 세웠다.
다행히 오늘은 간병인 아주머니가 주무시고 가는 날 이어서 맘 편히 윤영과 술을 마실 수 있었다.
술을 마시고 보니 그까짓게 대순가.. 싶고, 나만 아니면 된거란 생각에 맘이 편해진다.
췌!! 그런걸로 기가 죽을 내가 아니라고…
낮동안 의기소침 해져있던 마음을 버리고 활기찬 나를 다잡으며 계단을 오르는데, 자동차 전조등이
두어번 깜박이며 시야를 가린다.
뭐야.. 매너없게…
슬쩍 째려봐주고 돌아서는데 이번엔 차문이 열린다.
헉… 설마 째려봤다고 해코지 하는건 아니겠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 엘리베이터 상향 버튼을 눌렀다.
3층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무척 더디게 내려왔고, 열린 문 안으로 냉큼 올라타 버튼을 누르는데 입구에 검은 실루엣이 보인다.
급한 마음에 여러번 버튼을 눌러 보았지만,,, 도무지 닫히지 않는 문이 야속하기만 하다.
심장은 빠르게 두근거리고 손바닥엔 땀이 베어나왔다.
요새 이상한 사람 많다던데, 설마.. 설마…
문아~ 빨리 닫혀라. 제발…
조마조마한 마음에 발을 동동구르는데 닫히는 문 사이로 손이 들어온다.
"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