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생의 사랑 이야기 <2-38화> 견원지간

바다의기억2006.03.29
조회9,323

벌써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꽃샘추위가 풀리면

 

연인과 함께 꽃놀이라도 가보는 게 어떨지요.

 

물론, 꽃놀이가 커플들의 전유물이란 소리는 아닙니다.

 

===================== 솔로여러분, 커플을 응징하러 모입시다 =====================

 

 

마지막 날까지 다사다난했던 얹혀살기를 마치고 얼마 후


개강 기념 공연 준비를 위해 연극부원들이 뭉쳤다.



간만의 연극 준비에 잔뜩 부풀어서


부실문을 활짝 열고 들어섰을 때


제일 먼저 마주친 건 김양이었다.



기억 - 잘 지내셨습니까?


김양 - 응.


기억 - ..... 아, 네.



.... 뭔가 변화를 기대했던 내가 바보였나.



김양과의 짧은 인사를 마치고


연습실 안을 쭉 살펴보자


왠지 사람들이 많이 빈 것 같은 느낌이다.


혹시 내가 일찍 도착한 건가 시계를 확인해봤지만


약속 시간까지는 5분도 안 남은 시각.



연출로부터 개강 공연의 중요성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게 듣고 나온 나로선


지금의 한산한 분위기가 이해되지 않았다.



기억 - 어라.... 이것밖에 안 모였어요?


김양 -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연출한테 물어봐.



연출에게 들은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MT 끝날 연출과 회계가 제의했던 알콜로드에서


위태위태하다가 결국 맞붙은 김군과 박군.


정작 이 두사람은 별 상처를 입지 않았지만


이들을 말리던 어깨는


김군에게 떠밀려 넘어지는 바람에


자글자글 타는 불판을 손으로 짚었고


구수한 고기냄새를 풍기며 잽싸게 손을 떼다가


옆에 앉아있던 덩치의 광대뼈를 팔꿈치로 강타,


나란히 병원 신세를 지기에 이른다.


회계는 넘어지는 덩치에게 깔리면서


발목을 삐어 현재 요양 중.



이런 걸 새우싸움에 고래 등 터진다고 하는 건가.



아무튼 이 사건으로


김군은 김군대로 복수를 못했고


박군은 박군대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는


쪼잔 같잖은 스토리다,



현재 사건의 당사자인 김군과 박군은


서로 맞은 편 벽에 기대앉아


치열한 눈싸움을 벌이고 있다.


눈썹 위에 조그만 반창고를 하나 붙이고 있는 박군.


위에 언급되었던 피해자들에 비하면


경미하기 그지없는 부상으로 보인다.



연출

- 아직 역할 배정도 안 됐고 하니까


대본 보면서 생각 좀 해봐.


뭐, 어차피 네 역할은 정해져 있는 것 같다만...



둘을 씁쓸하게 바라보던 연출이


옆에 있던 상자에서 대본을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이전 대본보다는 조금 얇아 보이는 대본.


제목은 =메피스토펠레스의 단검= 이었다.

(메피스토펠레스 = 파우스트의 영혼을 샀던 악마)



흠..... 어디 보자.


등장인물.


선희, 철수, 천사, 악마, 사이코박사, 엑스트라 1~4.


........ 설마.




연습재개 3일 째.


새우싸움에 휘말렸던 고래들은 돌아왔지만


아직도 대치중인 김군과 박군으로 인해


연습실 전체 분위기는 평소대비 40% 다운된 상태.



본래 연습 뿐 아니라 그 어떤 일에도


없어서 아쉬울 것 없는 사람들이긴 했지만


더 이상의 애꿎은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회계는 둘의 화해 프로젝트를 수립하고


그 예산으로 거금 10만 원을 책정했다.



둘의 성격으로 볼 땐


한 사람에 4만원 씩 쥐어주고


=이거 줄 게 화해해= 라고 하면 할 것 같지만

(....그럼 2만원은?)


일의 모양새라는 게 있는 거 아니겠는가?




프로젝트 결성 후 3일 경과.


파격적인 예산안과 넘치는 의욕으로 시작된


김군love박군 프로젝트는


두 사람의 =상호 완전 무시 전법= 으로 인해


이렇다할 성과 하나 없이 표류상태에 빠져버렸다.


힘들게 둘을 붙여 놔 봤자


서로가 서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판국에


대화나 협상 따윈 이뤄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재 예산은


관계자들의 좌담회 개최를 위해 2만원 사용.




프로젝트 결성 후 5일 경과.


슬슬 각 배역의 윤곽이 드러나는 시점에서


프로젝트는 아직도 표류 중.



연출 - 자, 이제 남은 배역은 악마랑 엑스트라 3, 4 인데....


기억 - 잠깐만요, 왜 사이코박사는...


회계

- 기억아, 그냥 받아 들여라.


넌 처음부터 사이코박사 역을 맡을 운명이었어.



역할 배정을 맡은 회계와 연출이


나에게 일방적으로 사이코박사 역을 떠맡기고 있는 동안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너나없이 =딱이야, 딱.= 이라며 입을 모았다.



극중에 나오는 사이코박사는


이중인격에 편집증에 개념상실까지 겸비한....


말하자면 골룸 같은 역할이었기에


이 배역에 지원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 사채업자 다음은 사이코박사인가.



점점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분위기 속에


난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수많은 선인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양들의 침묵에 렉터 박사


지킬박사와 하이드에 지킬박사


드래곤볼에 겔로 박사


그랑죠의 사이코 박사...



감히 순위를 매기기 힘든


4차원적 사고를 가진 그들 옆에


나란히 서있는 나의 모습이란....


생각만 해도 아름답지 아니한가?



..... 과연 아니하다.



기억 - 아씨, 싫다니까요~!!


민아 - .... 내 생각에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기억 - .....



이젠 민아까지...



사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긴 하지만


그냥 좋다고 맡기엔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예전 버스에서 있었던 뜬금없는 난투.


스토리 진행과는 아무 상관없을 것 같던 그 사건이


지금에 와서 내 발목을 잡았다.


그냥 길 가다 똥 밟았다 생각하면


별 거 아닐 수도 있지만


그래도 사람의 기분이라는 게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안군....... 설마 이걸 노린 건가?



또다시 머릿속을 꽉 채우는 막연한 의혹.


곰곰이 그 때 상황을 되짚어 보며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하고 있을 때


누군가 살며시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 - 여기가 연극부 연습실 맞나요?


연출 - 아 네, 어떻게 오셨는지?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은


훤칠한 신장에 몹시 비쥬얼한 패션을 자랑하는


정체불명의 여성이었다.



강하게 웨이브진 머리카락 밑으로 보이는


치렁치렁한 피어싱과 장신구들.


까만 가죽 재질 미니스커트에


두꺼운 천으로 된 바지 같은 스타킹.


1월의 날씨와는 거리가 있음직한 청자켓.....



얼굴은 예쁘다는 생각이 들지만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에선


감당하기 힘들만큼 강한 전투력이 느껴졌다.



지금 문 밖으로 나가면


비슷한 패션에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이


무기를 하나씩 들고 서있을 것 같은 기분.....



박군 - 어? 누나?



그녀의 정체는 박군의 누나인 듯 하다.


우선 편의상 그녀의 이름은 박양이라 칭하자.



박양 - 박군아. 잠깐 나와 볼래?



박군이 생글생글 웃는 누님을 따라


밖으로 나간지 3분 뒤.



박군 - 아~ 내 #$ 드러워서 진짜....



박군이 대뜸 욕을 하며 부실로 돌아왔다.



박군

- 누가 저 아줌마 좀 데려가.


아, 진짜 짜증나서 못 살겠네....



박군의 이야기에 따르면


박군에겐 그보다 한 살 많은 누님이 있는데


21년 째 솔로 상태로


박군에게 소개팅을 부탁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3만원의 중개비를 받은 박군은


제법 괜찮은 남자 하나를 함정으로 유인(?)


자리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으나


박군이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박양이 고대하던 약속은 펑크.


이후 다시 연결을 시도했으나


남자는 =왠지 감이 안 좋다= 라며 약속을 무산시켜 버렸다.


제법 괜찮은 남자 사진을 보고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던 박양은


계약에 대한 책임을 지라며


박군을 끊임없이 닦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계약금으로 받은 3만원만이 문제라면


돌려주고 속 편히 있으면 되겠지만


박군의 주된 용돈 공급 루트가


부모님 -> 박양 -> 박군으로 이어지고 있어


이번 사태가 자칫 생명줄 차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게


박군의 진정한 걱정 거리였다.



박군

- 연출 형! 소개팅 한 번 안 할래요?


우리 누나 저 정도면 예쁘잖아요?



연출 - 아... 그렇긴 한 데....



방금 전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포스를 느낀 건


비단 나뿐이 아닌 듯


이 소개팅 소식에 혹하는 사람은 없었다.


영 떨떠름한 주위의 반응에


박군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작게 중얼거렸다.



박군 - 아 씨X 김군 X새끼 때문에....



박군의 담화는 바로 근처에 있던 나에게도


간신히 들릴 만큼 작은 것이었지만


인간의 잠재능력이란 본래 엄청난 것....


맞은편에 앉아있던 김군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박군에게로 향했다.



김군 - 야.


박군 - 아, 왜요?!



=ㄱ애새끼 귀는 존내 밝네....=


라는 생각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박군의 표정.


아무래도 올 것이 온 것 같은 분위기다.



잠시 박군을 노려보며


굳게 쥔 주먹을 부르 떨 던 김군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김군 - 그 소개팅... 내가 해도 되냐?


박군 - ....예?!



그렇게


개와 원숭이 사이에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