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건국대 축구부 숙소는 4학년과 3학년 1명씩, 1학년 2명 등 한방을 4명이 사용했다. 내가 1학년 때 들어간 곳이 3학년 정운이형이 있던 방이었다.
정운이형은 무섭게 생겼고 엄한 성격이어서 악명이 높았다. 훈련도 제일 열심히 해 후배들이 꼬투리를 잡을 만한 점이 없었다. 내가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해도 지하에 있는 웨이트트레이닝장으로 억지로 끌고 가 운동을 시켰다.
줄넘기를 하거나 튜브를 묶어놓고 정운이형이 잡고 있으면 내가 점프훈련을 하는 식이었다. 운동을 해도 정운이형은 힘이 있으니까 잘되는데 나무젓가락처럼 마른 나는 몇배 힘들었고 또 쉽게 지쳤다.
말년 고참의 개인비서로 보면 된다. 정운이형이 오후 훈련 직전에 잠을 자고 있으면 유니폼과 스타킹, 압박붕대를 반듯하게 정리해 머리맡에 놓아뒀다. 당시에는 경기 때만 테이핑을 하고 훈련 때는 압박붕대를 이용했다.
말단들은 형들이 자는 동안 운동장에 나가 땅을 고르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쉴 틈이 없었다. 선배들이 빨래를 내놓으면 여름이나 겨울이나 손빨래를 했다. 2층 침대를 사용했는데 정운이형이 1층에 자고 있으면 2층의 나는 한번 누운 자세를 바꾸지 못했다.
동기들도 우리 방에는 잘 놀러 오지 않았다. 먼저 문을 살짝 열고 목만 내밀어 정운이형이 있는지 확인했는데 그때 걸리면 끝장이었다. 정운이형은 "당당히 들어와서 보지 않고 고양이처럼 목만 빼서 본다"며 바로 기합을 줬다.
태어나서 '빠따'를 가장 많이 맞은 것도 대학교 1학년 때였다. 후배들이 뭔가를 잘못 해서 전체가 정운이형한테 맞았다. 4학년들은 1·2학년을 터치하지 않기 때문에 3학년인 정운이형이 몽둥이를 들었다.
"오늘 단체기합을 받을 테니 옷을 껴입을 수 있는 만큼 껴입으라"고 했다. 트레이닝복을 두세개씩 껴입으면서 '죽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체로 맞고 다시 개인별로 때렸는데 정운이형은 내 차례 때 "왜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느냐"고 한마디 했다. 50대 정도 맞았다.
정운이형은 나를 좋아했던 것 같다. 방에 들어와서는 멍든 엉덩이를 마사지해 줬다. 정운이형의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했고, '충성'했다. 방에 옷장 같은 사물함이 있는데 나중에는 내게 열쇠를 맡겼다.
대학 때 정운이형과 2년 정도 한방을 썼는데, 대학선발이나 국가대표팀 B팀 같은 데 나란히 뽑히면 피하고 싶었지만 거의 룸메이트로 지냈다. 항상 '빛과 그림자'였다. 결혼하면서 정운이형이 편해졌고 요즘도 자주 연락한다.
어릴 때는 나도 참 웃겼다. 정해원 선배(전 전남 코치)나 최순호 선배(포항 감독)를 좋아해 사인을 받으러 다녔다. 용문중 1학년 때 동대문운동장에서 박스컵(대통령배국제대회)을 봤는데, 정선배한테 사인을 받은 적이 있다. 대학교 2학년 때 태극마크를 달면서 선배들을 대표팀에서 만났다. TV에서 봐온 '내 영웅'들과 같은 팀에서 뛰다니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영광스러웠다.
선배들이 어려워 말 한마디 못하던 나는 운동장에서 다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선배들의 플레이만 봐도 "와∼" 하고 탄성을 질렀다. 예전에는 선수단 버스에 '국가대표팀 버스'라고 써 붙였는데 사람들이 창 밖에서 쳐다보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고,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픈 줄을 몰랐다. (경기에 출전하지 않고) 버스만 타고 운동장까지 30∼40분 다녀도 뿌듯했다.
직접 '빠따'를 때려본 것은 용문고 3학년 때였다. 3대를 때렸는데 엄청나게 후회했고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 대학교 때도 대표팀에 있다가 후배들을 만나면 그냥 좋다는 감정이 먼저 든다. 이번 월드컵 합숙에서도 농담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종종 "선배로서 위엄을 지켜야 하지 않느냐"는 얘기를 들으면 이렇게 합리화하곤 했다.
[황선홍 수기] <3> 졸병시절
황선홍 대학 2년 선배 고정운
1990년 건국대 4학년 때의 황선홍
고정운 선배는 한마디로 얘기해서 악마(?)는 아니다.당시 건국대 축구부 숙소는 4학년과 3학년 1명씩, 1학년 2명 등 한방을 4명이 사용했다. 내가 1학년 때 들어간 곳이 3학년 정운이형이 있던 방이었다.
정운이형은 무섭게 생겼고 엄한 성격이어서 악명이 높았다. 훈련도 제일 열심히 해 후배들이 꼬투리를 잡을 만한 점이 없었다. 내가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해도 지하에 있는 웨이트트레이닝장으로 억지로 끌고 가 운동을 시켰다.
줄넘기를 하거나 튜브를 묶어놓고 정운이형이 잡고 있으면 내가 점프훈련을 하는 식이었다. 운동을 해도 정운이형은 힘이 있으니까 잘되는데 나무젓가락처럼 마른 나는 몇배 힘들었고 또 쉽게 지쳤다.
말년 고참의 개인비서로 보면 된다. 정운이형이 오후 훈련 직전에 잠을 자고 있으면 유니폼과 스타킹, 압박붕대를 반듯하게 정리해 머리맡에 놓아뒀다. 당시에는 경기 때만 테이핑을 하고 훈련 때는 압박붕대를 이용했다.
말단들은 형들이 자는 동안 운동장에 나가 땅을 고르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쉴 틈이 없었다. 선배들이 빨래를 내놓으면 여름이나 겨울이나 손빨래를 했다. 2층 침대를 사용했는데 정운이형이 1층에 자고 있으면 2층의 나는 한번 누운 자세를 바꾸지 못했다.
동기들도 우리 방에는 잘 놀러 오지 않았다. 먼저 문을 살짝 열고 목만 내밀어 정운이형이 있는지 확인했는데 그때 걸리면 끝장이었다. 정운이형은 "당당히 들어와서 보지 않고 고양이처럼 목만 빼서 본다"며 바로 기합을 줬다.
태어나서 '빠따'를 가장 많이 맞은 것도 대학교 1학년 때였다. 후배들이 뭔가를 잘못 해서 전체가 정운이형한테 맞았다. 4학년들은 1·2학년을 터치하지 않기 때문에 3학년인 정운이형이 몽둥이를 들었다.
"오늘 단체기합을 받을 테니 옷을 껴입을 수 있는 만큼 껴입으라"고 했다. 트레이닝복을 두세개씩 껴입으면서 '죽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체로 맞고 다시 개인별로 때렸는데 정운이형은 내 차례 때 "왜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느냐"고 한마디 했다. 50대 정도 맞았다.
정운이형은 나를 좋아했던 것 같다. 방에 들어와서는 멍든 엉덩이를 마사지해 줬다. 정운이형의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했고, '충성'했다. 방에 옷장 같은 사물함이 있는데 나중에는 내게 열쇠를 맡겼다.
대학 때 정운이형과 2년 정도 한방을 썼는데, 대학선발이나 국가대표팀 B팀 같은 데 나란히 뽑히면 피하고 싶었지만 거의 룸메이트로 지냈다. 항상 '빛과 그림자'였다. 결혼하면서 정운이형이 편해졌고 요즘도 자주 연락한다.
어릴 때는 나도 참 웃겼다. 정해원 선배(전 전남 코치)나 최순호 선배(포항 감독)를 좋아해 사인을 받으러 다녔다. 용문중 1학년 때 동대문운동장에서 박스컵(대통령배국제대회)을 봤는데, 정선배한테 사인을 받은 적이 있다. 대학교 2학년 때 태극마크를 달면서 선배들을 대표팀에서 만났다. TV에서 봐온 '내 영웅'들과 같은 팀에서 뛰다니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영광스러웠다.
선배들이 어려워 말 한마디 못하던 나는 운동장에서 다리가 떨어지지 않았다. 선배들의 플레이만 봐도 "와∼" 하고 탄성을 질렀다. 예전에는 선수단 버스에 '국가대표팀 버스'라고 써 붙였는데 사람들이 창 밖에서 쳐다보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고,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픈 줄을 몰랐다. (경기에 출전하지 않고) 버스만 타고 운동장까지 30∼40분 다녀도 뿌듯했다.
직접 '빠따'를 때려본 것은 용문고 3학년 때였다. 3대를 때렸는데 엄청나게 후회했고 아직도 마음에 걸린다. 대학교 때도 대표팀에 있다가 후배들을 만나면 그냥 좋다는 감정이 먼저 든다. 이번 월드컵 합숙에서도 농담을 많이 하는 편이었다. 종종 "선배로서 위엄을 지켜야 하지 않느냐"는 얘기를 들으면 이렇게 합리화하곤 했다.
'세상은 즐겁게 살아야 모든 일이 잘된다'고.
정리〓김미연 기자 ibiza@ho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