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건국대 시절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연락을 받고 대전의 한 커피숍에 갔다. 10년 넘게 헤어져 있던 어머니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나는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혹시 못 알아볼 만큼 변한 것은 아닐까.
그날 이후 나는 후회를 많이 했다. 차라지 만나지 말 걸….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집을 나가신 어머니. 내가 기억하고 있는 어렸을 때의 그 '엄마'는 아니었다. 우리 가족만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는 나의 어린 생각은 산산조각이 났다.
이미 어머니는 재혼을 했고, 내 상상과는 달리 행복한 삶을 살고 계신 것 같았다. 야속했다. 어정쩡하게 인사말을 나누고 돌아선 뒤 한동안 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결국 나는 더 이상 어머니를 찾지 않기로 결심했다. 혹시 나로 인해 어머니에게 소중한 새 가정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된다는 제법 어른스러운 생각도 했다. 이제는 더 이상 원망도 미움도 없다. 행복하게 잘 사시기만을 기도할 뿐이다.
결코 자랑스럽지 않은 가족사. '그같은 일이 우리 가족 누구에게도 다시는 있어서 안된다'는 다짐이 이같은 고백을 가능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불우한 환경이 오히려 나에게는 더 높은 곳을 향한 도전의 문을 활짝 열어줬다. 남들처럼 단란한 가정에서 자랐다면 오늘의 내가 있기 힘들었을 것이다.
일찍부터 혼자 지내게 된 아버지는 매일 축구공을 옆구리에 낀 채 무표정한 얼굴로 대문을 나서는 나를 붙잡고는 "훌륭한 선수가 돼 신문에 나오면 어머니가 꼭 너를 찾을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왠지 나보다 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축구였다.
어느새 어머니의 얼굴이 희미해지면서 나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몇배 더 크게 느껴졌다. 운동선수라는 단 한가지 이유 때문에 아버지는 나를 아주 특별하게 대해줬다. 운수업을 하시면서도 경기 때면 빠짐없이 운동장에 나와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하셨다. 용문중학교 3학년 때 교통사고로 목발에 몸을 의지하고 운동장에서 박수를 치시던 모습은 지금도 선명하다.
나는 초등학교 내내 여동생하고 늘 둘이 밥을 챙겨먹었다. 집에 들어가야 남들처럼 반겨주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더욱 축구에만 매달렸고 해거름까지 온몸에 흙투성이가 되도록 신나게 공을 찬 뒤 집에 와 쓰러져서 자곤했다. 형편이 안 좋아 초등학교 때만 6∼7차례 이사를 갔다. 경기도와 서울·충남을 오가면서. 예산에서 서울로 올라와서는 아버지의 벌이가 넉넉지 않아 전학을 가지 못한 채 6개월 정도 쉬기도 했다.
구리시 양정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 숭곡초등학교 축구부 선생님이 소문을 듣고 나를 스카우트하러 온 게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결국 전학을 가 구리에서 서울로 매일 한시간 이상 걸려 통학을 했지만 소속감이라는 것을 처음 느껴봤다. 공부도 잘하지 못하고 가정 환경도 좋지 못한 아주 평범한 아이에게 숭곡초등학교 축구부 유니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보물이었다.
집을 나오면 늘 외롭고 소외감을 느끼던 내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되찾아 운동에 더욱 몰두할 수 있었다. 동료들과 함께 땀흘려 뛰면서 집에서 느끼지 못했던 공동체 의식이 생겼다.
그토록 나를 애지중지 키우셨던 아버님은 프로축구 포항시절인 96년 운명을 달리하셨다. 동생을 제쳐두고 늘 밥상을 앞에 두고는 맛있는 것을 내 밥위에 한점씩 더 얹어주셨던 아버지. 운동이라면 빚을 내서라도 뒷바라지를 해주셨던 그런 아버지. 나는 태어나서 가장 많은 눈물을 쏟았다. 늘 부상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만 하시다 돌아가셨다는 생각에 더 목이 메었다.
이번 월드컵이 끝난 뒤 나는 고향을 찾았다. 산소에 가 아버님께 훈장을 바치고 동네에 들어가니까 잔치가 한창이었다. 동네 어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시는 작은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나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바로 이 자리에 아버지가 계셨어야 되는데….
[황선홍 수기] <6>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오래 전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건국대 시절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연락을 받고 대전의 한 커피숍에 갔다. 10년 넘게 헤어져 있던 어머니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리고 나는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혹시 못 알아볼 만큼 변한 것은 아닐까.
그날 이후 나는 후회를 많이 했다. 차라지 만나지 말 걸….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집을 나가신 어머니. 내가 기억하고 있는 어렸을 때의 그 '엄마'는 아니었다. 우리 가족만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는 나의 어린 생각은 산산조각이 났다.
이미 어머니는 재혼을 했고, 내 상상과는 달리 행복한 삶을 살고 계신 것 같았다. 야속했다. 어정쩡하게 인사말을 나누고 돌아선 뒤 한동안 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결국 나는 더 이상 어머니를 찾지 않기로 결심했다. 혹시 나로 인해 어머니에게 소중한 새 가정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된다는 제법 어른스러운 생각도 했다. 이제는 더 이상 원망도 미움도 없다. 행복하게 잘 사시기만을 기도할 뿐이다.
결코 자랑스럽지 않은 가족사. '그같은 일이 우리 가족 누구에게도 다시는 있어서 안된다'는 다짐이 이같은 고백을 가능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불우한 환경이 오히려 나에게는 더 높은 곳을 향한 도전의 문을 활짝 열어줬다. 남들처럼 단란한 가정에서 자랐다면 오늘의 내가 있기 힘들었을 것이다.
일찍부터 혼자 지내게 된 아버지는 매일 축구공을 옆구리에 낀 채 무표정한 얼굴로 대문을 나서는 나를 붙잡고는 "훌륭한 선수가 돼 신문에 나오면 어머니가 꼭 너를 찾을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왠지 나보다 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 아버지를 위로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축구였다.
어느새 어머니의 얼굴이 희미해지면서 나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몇배 더 크게 느껴졌다. 운동선수라는 단 한가지 이유 때문에 아버지는 나를 아주 특별하게 대해줬다. 운수업을 하시면서도 경기 때면 빠짐없이 운동장에 나와 목이 터져라 응원을 하셨다. 용문중학교 3학년 때 교통사고로 목발에 몸을 의지하고 운동장에서 박수를 치시던 모습은 지금도 선명하다.
나는 초등학교 내내 여동생하고 늘 둘이 밥을 챙겨먹었다. 집에 들어가야 남들처럼 반겨주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더욱 축구에만 매달렸고 해거름까지 온몸에 흙투성이가 되도록 신나게 공을 찬 뒤 집에 와 쓰러져서 자곤했다. 형편이 안 좋아 초등학교 때만 6∼7차례 이사를 갔다. 경기도와 서울·충남을 오가면서. 예산에서 서울로 올라와서는 아버지의 벌이가 넉넉지 않아 전학을 가지 못한 채 6개월 정도 쉬기도 했다.
구리시 양정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 숭곡초등학교 축구부 선생님이 소문을 듣고 나를 스카우트하러 온 게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결국 전학을 가 구리에서 서울로 매일 한시간 이상 걸려 통학을 했지만 소속감이라는 것을 처음 느껴봤다. 공부도 잘하지 못하고 가정 환경도 좋지 못한 아주 평범한 아이에게 숭곡초등학교 축구부 유니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보물이었다.
집을 나오면 늘 외롭고 소외감을 느끼던 내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되찾아 운동에 더욱 몰두할 수 있었다. 동료들과 함께 땀흘려 뛰면서 집에서 느끼지 못했던 공동체 의식이 생겼다.
그토록 나를 애지중지 키우셨던 아버님은 프로축구 포항시절인 96년 운명을 달리하셨다. 동생을 제쳐두고 늘 밥상을 앞에 두고는 맛있는 것을 내 밥위에 한점씩 더 얹어주셨던 아버지. 운동이라면 빚을 내서라도 뒷바라지를 해주셨던 그런 아버지. 나는 태어나서 가장 많은 눈물을 쏟았다. 늘 부상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만 하시다 돌아가셨다는 생각에 더 목이 메었다.
이번 월드컵이 끝난 뒤 나는 고향을 찾았다. 산소에 가 아버님께 훈장을 바치고 동네에 들어가니까 잔치가 한창이었다. 동네 어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시는 작은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나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바로 이 자리에 아버지가 계셨어야 되는데….
정리〓양정석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