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선생님이 한분 계신다. 까까머리 중학생이 된 81년 겨울. 서울 용문중학교에서 난생 처음 합숙을 했다. 아직 초등학생의 때를 벗지 못한 나에게 2·3학년 형들과는 눈도 마주치기 힘든 살벌한 분위기가 영 낯설었다.
그런데 더 큰 걱정은 다른 데 있었다. 당시만 해도 학교의 지원이 없어 학부모들이 합숙비를 걷어 합숙을 했다. 물론 돈을 내지 못하면 합숙에 참가할 수 없었다. 마땅한 숙소도 없어 교실 한곳을 정해 책상을 모두 붙이고 그 위에서 잠을 잤다. 맨바닥에서는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치맛바람'도 거셌다. 친구 엄마들은 가끔씩 학교를 찾아 왔다. 엄마가 없는 나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합숙비도 제대로 못냈으니까….
하루는 김형인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돈을 왜 안 내느냐고 다그칠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걱정하지 말고 운동만 열심히 하라"며 등을 토닥거려 주셨다. 선생님은 때로는 직접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 합숙비를 내주기도 하셨고, 때로는 슬쩍 눈감아 주기도 하셨다. 아버지만큼 따뜻한 선생님 덕분에 나는 중학교 시절이 외롭지 않았고 합숙비도 빨리 내는 '모범 선수'가 됐다.
가장 민감한 사춘기에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애써 주셨던 선생님은 축구 감독을 그만두고 지금은 교편만 잡고 계신다.
귀국할 때면 자주 연락을 드린다. 이번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에도 찾아 뵈니 선생님께서는 내 손을 꼭 잡고 "힘들었던 시절을 잊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다"며 위로해 주셨다. 어느새 주름살이 하나둘씩 늘어가지만 옛날의 인자한 모습 그대로인 선생님. 더 이상 늙지 않으셨으면 좋으련만….
대학시절 무명이었던 나에게 태극마크를 달아준 뒤 "선수 기용은 감독의 고유 권한"이라며 주변인들의 잔소리와 욕설에 꿋꿋하게 싸우셨던 이회택 감독님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건국대 2학년때인 88년 11월7일. 날짜를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 이회택 감독님이 지휘봉을 잡은 대표팀 멤버에 내 이름이 올랐다. 청소년대표 경력도 없는 나를 뽑으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감독님이 온갖 비난의 화살을 받아야 했던 것도 검증되지 않는 풋내기를 뽑았다는 이유에서다. 하기야 최순호 정해원 변병주 이태호 등 쳐다보기도 힘든 기라성 같은 선배 스타플레이어들이 즐비했던 때이니까.
나는 태극호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11월 카타르에서 열린 아시안컵에 출전했다. 두번째 경기, 그것도 일본전에서 스타팅 멤버에 내 이름이 포함됐다.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황선홍이는 이렇게 공을 잘 차는 놈'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증명해 보이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진작부터 느끼고 있던 나도 이를 악물었다. 결국 1골 1어시스트. 믿기지 않게도 2-0 승리의 주인공이 됐다. 한국언론들은 국가대표 데뷔전에서 펄펄 난 나를 두고 '미완의 대기'라는 큼직한 제목을 달아 대서특필했다. 나를 보는 냉랭한 시선도 단숨에 사라졌다.
당시 한양대 축구부를 맡고 있던 이회택 감독님은 고교 때부터 나를 유심히 보셨다. 한양대와 내가 속한 용문고는 연습경기를 자주했는데 그때 나를 잘 보셨던 것 같다. 감독님은 한양대에서 프로팀 포항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도 한양대에 나를 꼭 스카우트하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결국 건국대로 진학했지만.
독일로 유학갈 당시 가장 많은 조언을 해 주신 분도 감독님이었다. 워낙 말수가 적은 분이라 늘 어려웠다. 직접 전화드리기가 그래서 감독님을 잘 아는 주위분들에게 항상 안부를 묻는다. 지금도 감독님은 내 걱정을 많이 하신다고 한다. 평생 동안 마음을 써 주시는 분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리고 이마가 벗겨질 정도로 헤딩 연습을 시켰던 건국대 정종덕 감독님….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되는 나를 키워주신 소중한 분들이다.
[황선홍 수기] <9> 잊지 못할 선생님
황선홍
이회택ㆍ정종덕 감독
나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선생님이 한분 계신다. 까까머리 중학생이 된 81년 겨울. 서울 용문중학교에서 난생 처음 합숙을 했다. 아직 초등학생의 때를 벗지 못한 나에게 2·3학년 형들과는 눈도 마주치기 힘든 살벌한 분위기가 영 낯설었다.그런데 더 큰 걱정은 다른 데 있었다. 당시만 해도 학교의 지원이 없어 학부모들이 합숙비를 걷어 합숙을 했다. 물론 돈을 내지 못하면 합숙에 참가할 수 없었다. 마땅한 숙소도 없어 교실 한곳을 정해 책상을 모두 붙이고 그 위에서 잠을 잤다. 맨바닥에서는 도저히 잘 수가 없었다.
'치맛바람'도 거셌다. 친구 엄마들은 가끔씩 학교를 찾아 왔다. 엄마가 없는 나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합숙비도 제대로 못냈으니까….
하루는 김형인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돈을 왜 안 내느냐고 다그칠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걱정하지 말고 운동만 열심히 하라"며 등을 토닥거려 주셨다. 선생님은 때로는 직접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 합숙비를 내주기도 하셨고, 때로는 슬쩍 눈감아 주기도 하셨다. 아버지만큼 따뜻한 선생님 덕분에 나는 중학교 시절이 외롭지 않았고 합숙비도 빨리 내는 '모범 선수'가 됐다.
가장 민감한 사춘기에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애써 주셨던 선생님은 축구 감독을 그만두고 지금은 교편만 잡고 계신다.
귀국할 때면 자주 연락을 드린다. 이번 월드컵이 시작되기 전에도 찾아 뵈니 선생님께서는 내 손을 꼭 잡고 "힘들었던 시절을 잊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성공한다"며 위로해 주셨다. 어느새 주름살이 하나둘씩 늘어가지만 옛날의 인자한 모습 그대로인 선생님. 더 이상 늙지 않으셨으면 좋으련만….
대학시절 무명이었던 나에게 태극마크를 달아준 뒤 "선수 기용은 감독의 고유 권한"이라며 주변인들의 잔소리와 욕설에 꿋꿋하게 싸우셨던 이회택 감독님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건국대 2학년때인 88년 11월7일. 날짜를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
이회택 감독님이 지휘봉을 잡은 대표팀 멤버에 내 이름이 올랐다. 청소년대표 경력도 없는 나를 뽑으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감독님이 온갖 비난의 화살을 받아야 했던 것도 검증되지 않는 풋내기를 뽑았다는 이유에서다. 하기야 최순호 정해원 변병주 이태호 등 쳐다보기도 힘든 기라성 같은 선배 스타플레이어들이 즐비했던 때이니까.
나는 태극호에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11월 카타르에서 열린 아시안컵에 출전했다. 두번째 경기, 그것도 일본전에서 스타팅 멤버에 내 이름이 포함됐다.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황선홍이는 이렇게 공을 잘 차는 놈'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증명해 보이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진작부터 느끼고 있던 나도 이를 악물었다. 결국 1골 1어시스트. 믿기지 않게도 2-0 승리의 주인공이 됐다. 한국언론들은 국가대표 데뷔전에서 펄펄 난 나를 두고 '미완의 대기'라는 큼직한 제목을 달아 대서특필했다. 나를 보는 냉랭한 시선도 단숨에 사라졌다.
당시 한양대 축구부를 맡고 있던 이회택 감독님은 고교 때부터 나를 유심히 보셨다. 한양대와 내가 속한 용문고는 연습경기를 자주했는데 그때 나를 잘 보셨던 것 같다. 감독님은 한양대에서 프로팀 포항으로 자리를 옮기면서도 한양대에 나를 꼭 스카우트하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결국 건국대로 진학했지만.
독일로 유학갈 당시 가장 많은 조언을 해 주신 분도 감독님이었다. 워낙 말수가 적은 분이라 늘 어려웠다. 직접 전화드리기가 그래서 감독님을 잘 아는 주위분들에게 항상 안부를 묻는다. 지금도 감독님은 내 걱정을 많이 하신다고 한다. 평생 동안 마음을 써 주시는 분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리고 이마가 벗겨질 정도로 헤딩 연습을 시켰던 건국대 정종덕 감독님….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되는 나를 키워주신 소중한 분들이다.
정리〓양정석 도쿄특파원 jsyang@hot.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