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저녁, 회사로 걸려 온 낯선 전화 저쪽 편에서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였습니다. 사회부라는 곳이 원래 온갖 형태의 제보전화에 익숙한 곳이긴 하지만 조금 놀랐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목소리나 말투가 정말 서세원씨 였습니다.
그는 “너무너무 억울해서요” 라면서 입을 떼기 시작하더니, “지금 <조선일보>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고 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날(7월26일자) <조선일보>는 `서세원 프로덕션 검찰 수사'라는 내용의 기사를 아침판에 내보냈습니다. 이 기사는 방송국 PD들의 구속 사실을 보도하면서, 뒤쪽에 `서세원 프로덕션'도 홍보비를 제공했다는 혐의에 대해 검찰이 서세원 프로덕션 직원들을 소환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다음은 가능한 한 서세원씨의 말을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서세원씨는 조금 격앙된 상태여서 말의 순서가 조금 뒤바뀌기도 했습니다. “제가 모든 걸 그만둘 생각으로 고소한 겁니다. <조선일보>와 정면으로 맞서는데 각오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서세원쇼>MC도 그만둘 각오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제가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저에 대한 인신공격은 물론이고, 이 사이트 저 사이트에서 <서세원쇼> 폐지운동을 벌이는 단체도 있고, <서세원쇼>를 보고 `홍보 프로그램 창구다', `권력형 MC다'라는 등. 그동안 이런 비난에 대해 저는 침묵으로 일관해 왔는데, 이번에는 영화 홍보비 관련 사건에까지 휩쓸려갔습니다.
저는요. 연예생활 25년 했는데, 돈 주고 하지 않습니다. 신문을 보고 너무 열이 받아서…. 프로덕션 직원 4명밖에 없는 코딱지만한 곳인데, 무슨 홍보비를 씁니까? <네발가락>, <긴급조치 19호>관객도 없어, 거의 망했습니다. 저는 PD사태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프로덕션은 <조폭마누라>할 때인 작년에 설립한 겁니다. 영화사는 현진영화사이고, 저희 프로덕션은 투자회사 개념으로 설립된 겁니다.
<조선일보>기사를 보면, 기사에 거론된 다른 사람들은 구속영장이 청구되고 그런데, 서세원은 `조사 중'이라고 돼있습니다. 그런데 서세원 프로덕션을 큰 제목으로 뽑았습니다. 구속과 조사 가운데 어느게 더 큰 일입니까? 그런데 저는 아직 범죄사실이 확인도 안 된 상태인데 뭉퉁그려 구속된 사람들과 하나로 엮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또 기사는 직원이 소환돼 조사를 받고 있다고 했는데, 신문이 나온 당일 아침까지 저희 직원이 소환돼 조사받은 적이 없습니다. 만일 검찰에서 이런 내용을 들었다 하더라도, 저희 쪽에 전화 한 통화만 하면 확인되는 부분 아닙니까?
정작 검찰은 신문기사가 나온 뒤인 오늘(26일) 오후 1시께 회사로 들이닥쳐 회계장부를 다 가져가고(저는 다 줬습니다. 저는 뭐 꺼리낄께 없으니까), 저희 직원 2명을 임의동행 형식으로 데려가 지금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서세원씨는 <조선일보> 외에도 `문화개혁 시민연대'도 역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고, 또 그동안 자신이 받은 인터넷상의 협박과 관련해 서울지검 사이버수사대에 수사를 의뢰했습니다. `문화개혁 시민연대'와 관련해서는 사이트 홈페이지에 `<서세원쇼> 폐지이유 5가지' 등 자신에 대한 인신공격을 했다는 부분입니다.
사이버수사대 수사의뢰건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동정이 가기도 했습니다. “김남일 아버지 방송이 나간 6월27일 저녁, 집으로 협박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일가족을 몰살 시키겠다'는. 그리고 얼마 뒤에는 제 이름을 도용한 사과성명이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왔습니다. 누군가가 `미안한데, 잡히면 죽어'라고 쓰는 바람에 그 이후 벌집을 쑤신 듯 난리가 났습니다. 너무 시달렸습니다. 인터넷사이트에도 우리 집사람, 우리 자식들을 거론하는 음해성 글이 계속 올라 왔구요.”
그의 말을 다 들은 저는 되물었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내용을 기사화해도 괜찮겠습니까?” 라구요. 그러자 그는 “써주십시오. 제발 써주십시오. 크게 써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제 이름을 확인한 뒤, 자신의 핸드폰 전화번호까지 제게 알려주며 `궁금한 게 있으면 다시 연락하라'고 말했습니다. 그와의 전화를 끊고서, 그가 알려준 담당변호사와 관련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짤막하게 기사를 썼습니다. (서세원씨가 만족할만한 분량은 절대 아니 겠습니다만)
며칠 뒤, 신문에는 <조폭마누라>영화제작 당시 조폭 자금이 들어갔다는 보도가 또 나왔습니다. 이와 관련해 저는 서세원씨 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만, 연락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서씨의 말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싶습니다. 서씨는 너무너무 억울해 합니다만, 검찰에서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는 경우도 가끔 있으니까요.
서씨와의 전화를 끊은 뒤, 서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서세원에 대한 저의 기억은 1980년 가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세원씨의 데뷔는 이보다 더 빨랐을 것 같습니다.
1980년 가을은 한국 TV역사상 하나의 분기점을 이루는 시기입니다. 이때부터 컬러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됐고, 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때 언론통폐합이 실시됩니다.
이에 따라 당시 TBC 소속의 탤런트, 코미디언들이 MBC, KBS 등에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연예인들 사이의 경쟁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당시 TBC는 서울과 부산에서만 방영됐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TBC를 KBS에 통합시켰고, KBS는 TBC 채널을 KBS 2라는 이름으로 UHF(현재 우리가 보는 방송은 VHF) 방송을 통해 전국방송으로 내보냈습니다.
옛 기억을 더듬으시면, 텔레비전 채널이 VHF와 UHF 2개가 붙어있는 것을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잠깐 이야기하자면, 당시 대구에서 중학교를 다녔던 저는 TBC 방송을 볼 수 없었던 것을 늘 안타까워하고 있다가-특히 김성준·김상현 등 제가 좋아하는 프로복싱 세계타이틀매치도 TBC에서만 방송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KBS2 방송을 통해 TBC 방송을 볼 수 있게 돼 `언론통폐합'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다시 서세원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또 하나 이때 나타난 현상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배삼룡, 구봉서, 이기동, 남철, 남성남, 권귀옥, 이순주 등으로 대표되던 <웃으면 복이와요> 세대들이 후퇴하고 이른바 코미디언계에 일시적인 공백현상이 생겼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때 등장한 사람들이 개그맨들이었습니다.
물론 이 시기 이전에도 고영수, 장고웅 등이 콩트식 코미디를 했던 기존 코미디언들과 달리 스탠딩 개그를 했던 개그맨들이 존재하기는 했습니다만, 대중화되지는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79년 10.26 이후 시대분위기 탓에 우리 사회에서 한동안 코미디는 거의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마치 진시황의 통일처럼 79년 12.12를 거쳐 80년 가을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혼란은 끝이 나고, 그제서야 코미디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이때 등장한 청년이 서세원 이었습니다.
이 직전 코미디언이 아닌 젊은 개그맨 중심의 프로로 <청춘만세>가 있었고, 서세원도 이 프로그램에서 자주 모습을 보입니다. 당시 서세원은 한국말과 엉터리 영어를 섞어 쓰는 엉터리 미국유학생을 연기하면서 큰 히트를 칩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시 서세원은 숨쉴틈 없이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대사, 능수능란한 애드립, 무궁무진한 화제 등으로 이전의 대사에 충실한 연기를 중요시하던 코미디언들과는 전혀 다른 `파격'과 `자유분방함'을 보여줘 단숨에 최고스타 반열에 오릅니다. 변화하는 시대상황을 정확하게 꿰뚫었던 거죠.
81년께부터 서세원은 MBC의 <영11>이라는 젊은이 프로그램에 자기만의 고정코너를 배정받습니다. 젊은이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던 서세원은 당시 무대에 등장하면서 종이 꽃가루를 제 머리 위로 마구 뿌리고, 관중들을 향해 `박수가 적다', `슈퍼스타가 나오는데 이럴 수 있느냐'며 마구 꾸짖는 등 오도방정을 떨었지만 이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던져줍니다.
겸양이 미덕이던 이전과 달리 컬러텔레비전의 보급 등으로 인해 `자기PR 시대'가 본격화되던 80년대였고, 노골적으로 자신을 자랑하는 서세원은 일종의 `대리만족'을 심어줬고, 또 이전의 음흉스러운 겸양과 달리 서세원의 언행은 솔직하고 과감하게 비춰져 후련하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서세원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80년대 초반 KBS는 `대학생 개그맨 선발대회'를 통해 주병진, 이성미, 김형곤 등 신세대 스타들을 대거 등용하는데, MBC는 여기에 서세원 하나로 버틸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서세원은 당시 인기를 업고 드라마 <나리집>에도 출연 하고,(이 드라마에서 서세원은 중도하차 합니다. 싸가지 없는 게 개성이었던 서세원이 이 드라마에서는 너무 착한 대학생으로 나와 도저히 맞지가 않았거든요) 이어 똑순이 김민희(현재의 탤런트, 광고모델이 아닌 80년대 아역스타)와 함께 영화 <연분홍 치마> 등에도 출연하는 데, 이 영화 역시 실패합니다.
아마도 서세원과 영화의 불일치는 이때부터 시작됐나 봅니다.(서세원은 86년에도 영화 <납자루떼>를 제작하는데, 아마 당시 서울개봉 역대 최소관중 기록을 세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로인해 서세원은 쫄딱 망해 몇 년간 고생을 하기도 합니다. 지금의 검찰조사도 또 영화때문이니.)
텔레비전에서는 서세원을 능가할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서세원도 그 폭발력이 사그라들고, 점점 `관록'으로 버티는 듯한 인상 이었습니다. 재기발랄한 신세대 개그맨들이 거의 매일 쏟아지는 상황에서 그만큼이나마 버틴 것도 대단하다고 보여지긴 합니다.
최근 <서세원쇼>가 저질 시비를 낳고 있는 것도 혹 서세원씨가 느끼는 초조함 때문이 아닌가하는 추정도 해봅니다. 경쟁 프로그램이 잇따라 생겨나고, 더이상 예전 같지도 않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점점 더 자극적인 것을 찾다보니 경계선을 넘나드는 발언을 계속 하게되는.
저는 서세원씨가 대단한 독서광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조폭마누라> 이후 연달아 <네발가락>, <긴급조치 19호> 등 이른바 `정상'이라고 보기 힘든 영화를 왜 잇따라 제작하는지 솔직히 잘 이해가 안갑니다.
서세원씨의 스타일은 순전히 시청자의 입장인 제가 보기에 지난 1980년에 비해 크게 진전된 것 같지 않습니다. 그 원인이 뭔지는 모르겠습니다. 서세원에 비교되는 인물이 이홍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홍렬은 서세원이 한 시대를 풍미하던 1980년대 초반, 그저 평범한 개그맨 무리 중의 한 명일 뿐 이었습니다.
서세원이 데뷔 초기부터 화려한 각광을 받은데 비해 이홍렬은 꽤 긴 무명시절을 보냈습니다. <영11>에서 서세원이 독자코너를 갖고 있을 때, 이홍렬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무언극 형태의 당시 어린 제가 보기에도 유치했던 코미디를 하는 정도였습니다. 이미지도 그저 평범했고.
이런 현상은 계속 이어집니다. 70년대에 데뷔한 이홍렬이 빛을 보는 시기는 90년대에 들어와서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를수록 떨어지기 마련인 순발력이 이홍렬 에게 있어서는 마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오히려 발전돼 계속 시청자들의 `허'를 찌릅니다. 저는 코미디를 잘 모르지만, 코미디 또는 개그란 시청자들과의 한판 `수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청자들이 `다음에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이라는 것을 다 꿰뚫고 있을 때, 그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코미디언이나 개그맨은 개그맨으로서의 가치가 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홍렬은 이런 점에서 느리지만 꾸준히 성장해왔고, 그리고 20년 전에는 감히 비교 자체가 넌센스 였던 자칭 `슈퍼스타' 서세원을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처럼 역전 시킵니다.
물론 이홍렬도 몇 년 전 <이홍렬쇼>를 끝으로 정체상태에 빠진 것 같습니다만, 최소한 급격한 추락을 하고 있는 것 같진 않습니다. 서세원씨의 전화를 받고 보니, 그는 개인적으로 참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겪었던 듯합니다. 저는 서세원씨에 대해 호불호(好不好)의 감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난 20여년간 어떤 형태로든 우리를 즐겁게 해줬던(웃겨줬던) 것을 생각하면, 때로 그가 우리를 불쾌하게 만들었던 것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여유로워져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그가 제게 호소했던 것처럼 지금 정말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습니다.
[기사 펌]서세원씨로 부터 걸려온 전화
“저, 개그맨 서세원입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 회사로 걸려 온 낯선 전화 저쪽 편에서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였습니다. 사회부라는 곳이 원래 온갖 형태의 제보전화에 익숙한 곳이긴 하지만 조금 놀랐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목소리나 말투가 정말 서세원씨 였습니다.
그는 “너무너무 억울해서요” 라면서 입을 떼기 시작하더니, “지금 <조선일보>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고 왔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날(7월26일자) <조선일보>는 `서세원 프로덕션 검찰 수사'라는 내용의 기사를 아침판에 내보냈습니다. 이 기사는 방송국 PD들의 구속 사실을 보도하면서, 뒤쪽에 `서세원 프로덕션'도 홍보비를 제공했다는 혐의에 대해 검찰이 서세원 프로덕션 직원들을 소환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다음은 가능한 한 서세원씨의 말을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서세원씨는 조금 격앙된 상태여서 말의 순서가 조금 뒤바뀌기도 했습니다. “제가 모든 걸 그만둘 생각으로 고소한 겁니다. <조선일보>와 정면으로 맞서는데 각오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서세원쇼>MC도 그만둘 각오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제가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저에 대한 인신공격은 물론이고, 이 사이트 저 사이트에서 <서세원쇼> 폐지운동을 벌이는 단체도 있고, <서세원쇼>를 보고 `홍보 프로그램 창구다', `권력형 MC다'라는 등. 그동안 이런 비난에 대해 저는 침묵으로 일관해 왔는데, 이번에는 영화 홍보비 관련 사건에까지 휩쓸려갔습니다.
저는요. 연예생활 25년 했는데, 돈 주고 하지 않습니다. 신문을 보고 너무 열이 받아서…. 프로덕션 직원 4명밖에 없는 코딱지만한 곳인데, 무슨 홍보비를 씁니까? <네발가락>, <긴급조치 19호>관객도 없어, 거의 망했습니다. 저는 PD사태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프로덕션은 <조폭마누라>할 때인 작년에 설립한 겁니다. 영화사는 현진영화사이고, 저희 프로덕션은 투자회사 개념으로 설립된 겁니다.
<조선일보>기사를 보면, 기사에 거론된 다른 사람들은 구속영장이 청구되고 그런데, 서세원은 `조사 중'이라고 돼있습니다. 그런데 서세원 프로덕션을 큰 제목으로 뽑았습니다. 구속과 조사 가운데 어느게 더 큰 일입니까? 그런데 저는 아직 범죄사실이 확인도 안 된 상태인데 뭉퉁그려 구속된 사람들과 하나로 엮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또 기사는 직원이 소환돼 조사를 받고 있다고 했는데, 신문이 나온 당일 아침까지 저희 직원이 소환돼 조사받은 적이 없습니다. 만일 검찰에서 이런 내용을 들었다 하더라도, 저희 쪽에 전화 한 통화만 하면 확인되는 부분 아닙니까?
정작 검찰은 신문기사가 나온 뒤인 오늘(26일) 오후 1시께 회사로 들이닥쳐 회계장부를 다 가져가고(저는 다 줬습니다. 저는 뭐 꺼리낄께 없으니까), 저희 직원 2명을 임의동행 형식으로 데려가 지금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서세원씨는 <조선일보> 외에도 `문화개혁 시민연대'도 역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고, 또 그동안 자신이 받은 인터넷상의 협박과 관련해 서울지검 사이버수사대에 수사를 의뢰했습니다. `문화개혁 시민연대'와 관련해서는 사이트 홈페이지에 `<서세원쇼> 폐지이유 5가지' 등 자신에 대한 인신공격을 했다는 부분입니다.
사이버수사대 수사의뢰건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동정이 가기도 했습니다. “김남일 아버지 방송이 나간 6월27일 저녁, 집으로 협박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일가족을 몰살 시키겠다'는. 그리고 얼마 뒤에는 제 이름을 도용한 사과성명이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왔습니다. 누군가가 `미안한데, 잡히면 죽어'라고 쓰는 바람에 그 이후 벌집을 쑤신 듯 난리가 났습니다. 너무 시달렸습니다. 인터넷사이트에도 우리 집사람, 우리 자식들을 거론하는 음해성 글이 계속 올라 왔구요.”
그의 말을 다 들은 저는 되물었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내용을 기사화해도 괜찮겠습니까?” 라구요. 그러자 그는
“써주십시오. 제발 써주십시오. 크게 써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제 이름을 확인한 뒤, 자신의 핸드폰 전화번호까지 제게 알려주며 `궁금한 게 있으면 다시 연락하라'고 말했습니다. 그와의 전화를 끊고서, 그가 알려준 담당변호사와 관련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뒤, 짤막하게 기사를 썼습니다. (서세원씨가 만족할만한 분량은 절대 아니 겠습니다만)
며칠 뒤, 신문에는 <조폭마누라>영화제작 당시 조폭 자금이 들어갔다는 보도가 또 나왔습니다. 이와 관련해 저는 서세원씨 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만, 연락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서씨의 말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싶습니다. 서씨는 너무너무 억울해 합니다만, 검찰에서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는 경우도 가끔 있으니까요.
서씨와의 전화를 끊은 뒤, 서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서세원에 대한 저의 기억은 1980년 가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서세원씨의 데뷔는 이보다 더 빨랐을 것 같습니다.
1980년 가을은 한국 TV역사상 하나의 분기점을 이루는 시기입니다. 이때부터 컬러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됐고, 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때 언론통폐합이 실시됩니다.
이에 따라 당시 TBC 소속의 탤런트, 코미디언들이 MBC, KBS 등에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연예인들 사이의 경쟁이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당시 TBC는 서울과 부산에서만 방영됐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TBC를 KBS에 통합시켰고, KBS는 TBC 채널을 KBS 2라는 이름으로 UHF(현재 우리가 보는 방송은 VHF) 방송을 통해 전국방송으로 내보냈습니다.
옛 기억을 더듬으시면, 텔레비전 채널이 VHF와 UHF 2개가 붙어있는 것을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잠깐 이야기하자면, 당시 대구에서 중학교를 다녔던 저는 TBC 방송을 볼 수 없었던 것을 늘 안타까워하고 있다가-특히 김성준·김상현 등 제가 좋아하는 프로복싱 세계타이틀매치도 TBC에서만 방송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KBS2 방송을 통해 TBC 방송을 볼 수 있게 돼 `언론통폐합'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다시 서세원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또 하나 이때 나타난 현상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배삼룡, 구봉서, 이기동, 남철, 남성남, 권귀옥, 이순주 등으로 대표되던 <웃으면 복이와요> 세대들이 후퇴하고 이른바 코미디언계에 일시적인 공백현상이 생겼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때 등장한 사람들이 개그맨들이었습니다.
물론 이 시기 이전에도 고영수, 장고웅 등이 콩트식 코미디를 했던 기존 코미디언들과 달리 스탠딩 개그를 했던 개그맨들이 존재하기는 했습니다만, 대중화되지는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79년 10.26 이후 시대분위기 탓에 우리 사회에서 한동안 코미디는 거의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마치 진시황의 통일처럼 79년 12.12를 거쳐 80년 가을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혼란은 끝이 나고, 그제서야 코미디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이때 등장한 청년이 서세원 이었습니다.
이 직전 코미디언이 아닌 젊은 개그맨 중심의 프로로 <청춘만세>가 있었고, 서세원도 이 프로그램에서 자주 모습을 보입니다. 당시 서세원은 한국말과 엉터리 영어를 섞어 쓰는 엉터리 미국유학생을 연기하면서 큰 히트를 칩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시 서세원은 숨쉴틈 없이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대사, 능수능란한 애드립, 무궁무진한 화제 등으로 이전의 대사에 충실한 연기를 중요시하던 코미디언들과는 전혀 다른 `파격'과 `자유분방함'을 보여줘 단숨에 최고스타 반열에 오릅니다. 변화하는 시대상황을 정확하게 꿰뚫었던 거죠.
81년께부터 서세원은 MBC의 <영11>이라는 젊은이 프로그램에 자기만의 고정코너를 배정받습니다. 젊은이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던 서세원은 당시 무대에 등장하면서 종이 꽃가루를 제 머리 위로 마구 뿌리고, 관중들을 향해 `박수가 적다', `슈퍼스타가 나오는데 이럴 수 있느냐'며 마구 꾸짖는 등 오도방정을 떨었지만 이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던져줍니다.
겸양이 미덕이던 이전과 달리 컬러텔레비전의 보급 등으로 인해 `자기PR 시대'가 본격화되던 80년대였고, 노골적으로 자신을 자랑하는 서세원은 일종의 `대리만족'을 심어줬고, 또 이전의 음흉스러운 겸양과 달리 서세원의 언행은 솔직하고 과감하게 비춰져 후련하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서세원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80년대 초반 KBS는 `대학생 개그맨 선발대회'를 통해 주병진, 이성미, 김형곤 등 신세대 스타들을 대거 등용하는데, MBC는 여기에 서세원 하나로 버틸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서세원은 당시 인기를 업고 드라마 <나리집>에도 출연 하고,(이 드라마에서 서세원은 중도하차 합니다. 싸가지 없는 게 개성이었던 서세원이 이 드라마에서는 너무 착한 대학생으로 나와 도저히 맞지가 않았거든요) 이어 똑순이 김민희(현재의 탤런트, 광고모델이 아닌 80년대 아역스타)와 함께 영화 <연분홍 치마> 등에도 출연하는 데, 이 영화 역시 실패합니다.
아마도 서세원과 영화의 불일치는 이때부터 시작됐나 봅니다.(서세원은 86년에도 영화 <납자루떼>를 제작하는데, 아마 당시 서울개봉 역대 최소관중 기록을 세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로인해 서세원은 쫄딱 망해 몇 년간 고생을 하기도 합니다. 지금의 검찰조사도 또 영화때문이니.)
텔레비전에서는 서세원을 능가할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서세원도 그 폭발력이 사그라들고, 점점 `관록'으로 버티는 듯한 인상 이었습니다. 재기발랄한 신세대 개그맨들이 거의 매일 쏟아지는 상황에서 그만큼이나마 버틴 것도 대단하다고 보여지긴 합니다.
최근 <서세원쇼>가 저질 시비를 낳고 있는 것도 혹 서세원씨가 느끼는 초조함 때문이 아닌가하는 추정도 해봅니다. 경쟁 프로그램이 잇따라 생겨나고, 더이상 예전 같지도 않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점점 더 자극적인 것을 찾다보니 경계선을 넘나드는 발언을 계속 하게되는.
저는 서세원씨가 대단한 독서광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조폭마누라> 이후 연달아 <네발가락>, <긴급조치 19호> 등 이른바 `정상'이라고 보기 힘든 영화를 왜 잇따라 제작하는지 솔직히 잘 이해가 안갑니다.
서세원씨의 스타일은 순전히 시청자의 입장인 제가 보기에 지난 1980년에 비해 크게 진전된 것 같지 않습니다. 그 원인이 뭔지는 모르겠습니다. 서세원에 비교되는 인물이 이홍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홍렬은 서세원이 한 시대를 풍미하던 1980년대 초반, 그저 평범한 개그맨 무리 중의 한 명일 뿐 이었습니다.
서세원이 데뷔 초기부터 화려한 각광을 받은데 비해 이홍렬은 꽤 긴 무명시절을 보냈습니다. <영11>에서 서세원이 독자코너를 갖고 있을 때, 이홍렬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무언극 형태의 당시 어린 제가 보기에도 유치했던 코미디를 하는 정도였습니다. 이미지도 그저 평범했고.
이런 현상은 계속 이어집니다. 70년대에 데뷔한 이홍렬이 빛을 보는 시기는 90년대에 들어와서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를수록 떨어지기 마련인 순발력이 이홍렬 에게 있어서는 마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오히려 발전돼 계속 시청자들의 `허'를 찌릅니다. 저는 코미디를 잘 모르지만, 코미디 또는 개그란 시청자들과의 한판 `수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청자들이 `다음에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이라는 것을 다 꿰뚫고 있을 때, 그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코미디언이나 개그맨은 개그맨으로서의 가치가 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홍렬은 이런 점에서 느리지만 꾸준히 성장해왔고, 그리고 20년 전에는 감히 비교 자체가 넌센스 였던 자칭 `슈퍼스타' 서세원을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처럼 역전 시킵니다.
물론 이홍렬도 몇 년 전 <이홍렬쇼>를 끝으로 정체상태에 빠진 것 같습니다만, 최소한 급격한 추락을 하고 있는 것 같진 않습니다. 서세원씨의 전화를 받고 보니, 그는 개인적으로 참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겪었던 듯합니다. 저는 서세원씨에 대해 호불호(好不好)의 감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난 20여년간 어떤 형태로든 우리를 즐겁게 해줬던(웃겨줬던) 것을 생각하면, 때로 그가 우리를 불쾌하게 만들었던 것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여유로워져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그가 제게 호소했던 것처럼 지금 정말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습니다.
한겨레신문/2002-07-30 권태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