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바로 걷기【3】

쵸코쿠키2006.03.31
조회1,437

문을 열고 나오자 마자 무작정 뛰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더 이상 뛸 수 없을때까지…         
정신 없이 뛰었나보다.         
주위를 둘러보니 집은 벌써 몇 동을 지나쳐 있다.         
다시 되돌아 가야 하는데 우선은 어디 좀 앉아야 겠다.         
힐을 신고 뛰어서 무리가 갔는지 뒷꿈치가 벗겨진 거 같다.         
블록 위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하늘을 보았다.         
깜깜한 밤 하늘에 얼마 없는 별들을 찾아보려 애쓰는데…         
또르르.         
뺨 위로 눈물이 굴러 떨어진다.         
깜짝 놀라 두 눈을 깜박이며 눈물을 삼키려 했지만,,, 의도와는 달리 깜박이는 만큼 눈물은 흘러내린다.         
씨이… 왜 눈물이 나는거야.
왜?? 당연히 그 인간이 널 돈보고 달려드는 여자 취급하니까… 여기 저기서... 오늘 하루 동안 그런 눈총 받았으니까… 난 정말 아닌데.. 아니잖아.
멈춰 있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터져 나오자 주체 할 수 없는 설움이 밀려와 얼굴을 무릎에 묻고
엉엉 울어 버렸다.
왜… 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거야.
정말 사람 한순간에 바보되기가… 이렇게 쉬울 줄 이야.
너무 서럽고 아빠가 보고 싶고, 엄마도 밉고, 김하민 자식도 밉고, 그..그.. 예후란 자식도 밉다.
회사 사람들도 다~ 싸잡아 밉다.
그렇게 얼마를 울었을까..?
갑자기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이런 꼴로 누구 밉고 누구 밉고,, 이러면서 울던 거.. 아주 예전에…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아주 예전에
자주 했던건데…
아무런 걱정 없고 받기만 하던 시절 이었는데…
그땐 뭐가 그리 서러웠고, 누가 그리 미웠을까…?
피식.
그때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겠지…
아무튼 이렇게 속시원히 울고 나니 마음은 조금 후련해 진다.
철없는 어린애처럼 길바닥에 주저앉아 징징 울었다는 게 조금 창피하긴 하지만…
뭐 어떤가..? 오늘 난 그만큼 울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이내 마음을 다 잡고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어???!!!
어… 없다.
제길…. 내 가.방.
가방을 그 인간이 있는곳에 두고 왔던 것이다.


혹시나 해서 다시 가봤지만, 역시나 그 인간은 내 가방을 들고 사라진 후였다.
어쩌지…?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건…? 이름뿐이야..아.. 미쳐.. 지갑이고 핸드폰이고.. 다 들어 있는데..
김하민 주변 인물인가…? 그럴 가능성이 커…휴.. 어쨌든 그러고 나왔으니 조만간 또 찾아오거나
연락이 올거야..
애써 좋게 좋게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연락이 와도 문제 인지라 가슴 한켠으론 걱정이 쌓여 간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예후는 한란아에 대해 생각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첫만남..
닫히는 엘리베이터를 잡으려 반사적으로 손이 먼저 움직였는데.. 무작정 내려 치다니…
그것도 얼굴은 숙이고, 막무가내로 휘두르듯이…
저 가방으로…
옆자리에 놓여 있는 가방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젠장… 정말 아팠다.
무슨 놈의 가방이 저렇게 치렁치렁 한거야…?
신호 대기를 틈타 계속 노려보고 있자니.. 울컥 하는게… 창문을 열고 던져 버릴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호가 바뀌자 시선은 가방을 떠났고, 신경은 다시 한란아에게로 옮겨 졌다.
돈 얘기를 꺼냈을 때,, 부들 부들 떨리던 손을 보고, 실수 하는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런 연기 쯤이야…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마지막을 그렇게 장식하고 사라지는 그 여자를 보면서,, 내가 정말 실수 한 것이기를…
...간절히 바랬다.         
문을 열고 사라질 때까지… 그 모습을 쫒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피식.         
100억? 100억이라고…?         
상상을 초월하는 여자다.         
내 오기에 불을 지필만큼…         

 


난생 처음 맨 얼굴로 출근을 했다.         
집에 있는 화장품이라곤 스킨,로션 밖에 없는 관계로,,, 그 아침에 어디서 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체념하고 로비로 들어서는데…         
"어머~ 이젠 아주 청순으로 밀고 나가려나봐?"         
"어떻게든 새로운 모습으로 확실히 꼬셔놔야 하지 않겠니? 게다가 김하민씨 청순한 스타일 좋아         
하잖아.."         
여지 없이 가슴에 박히는 말들이 들려 온다.         
하루 새 소문은 더 불어 났는지.. 이젠 아예 모르는 사람이 없는가 보다.         
애써 태연한 척, 안 들리는 척... 더 당당하게 걸었다. 

 

        

평소보다 몇배로 일을 하다 보니 당연히 잡 생각도 멀어지고, 시간도 빨리 갔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 오자 그제사 하루종일 화장실에도 안 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자리를 정리하고 화장실로 향했는데 손을 씻고 있던 윤영과 마주쳤다.         
"한 대리님~ 어휴~ 이제사 자리를 뜨셨구만? 아주.. 오늘 미친듯이 일만 하더니…힘들지?"         
"피식. 그러네..사람이 할 짓이 못돼.."         
그때 다른 부서 직원 둘이 들어 오며 나를 보더니..         
"어머! 얘 나가자.. 우리가 감히 어떻게 여길 들어오니? 누가 계시는데.. 가자 가.."         
"킥킥.."         
이러면서 나가버린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저들 말마따나 꼬리를 친 적도 없고,, 그렇다고 먼저 말 한번 시켜 본 적 없는데…         
그저 그 사람과 얽히지 않으려 했을 뿐이다.         
그래.. 설사 내가 그 사람과 사귄다고 치자… 그게 뭐… 이 정도로 비난 받을 짓인가…?         
정말 알 수가 없다.         
"야… 한란아. 신경 쓰지마.. 그냥 부러워서 그런다 생각해. 지들은 그런 인물도 못되고 같은 사원으로서 하루 아침에 신데렐라가 된 너한테 배가 아플 뿐이야.. 참나.. 막상 니가 싸모님 되봐라.. 제일 먼저 붙을 것들이.. 그리고 꼭~ 혼자선 말도 못해요.. 뭉쳐 다니면서 저러지.. 쯪쯔… 한심한 것들 같으니라구…"
피식.
"야!!! 기운 못낼까!!?? 이 언니가 비싼 위로 해주는데 계속 그렇게 바람 빠지는 웃음만 지을래??
여걸 한란아 어디갔어? 악바리 어디 갔냐고!! 우씨… ... 술이나 땡기러 갈래?"
내 눈치를 봐가며 애써주는 윤영이에게 여간 고마운게 아니다.
하지만 의기 소침해 지는건 어쩔 수 없다.
"고맙지만 됐어. 오늘은 일찍 들어가 봐야해. 니 덕에 기분 많이 좋아졌으니까 걱정하지마. 얼른 퇴근
준비 해야잖아. 나도 금방갈께."
애써 웃어 보이며 윤영을 먼저 보냈다.

거울을 보았다.
바보 같이도 참… 우울해 보인다.
바보…
이런게 무섭니…?
더 힘든일도 많았잖아…… 그래도 다 이겨 냈잖아…
이런건 아무것도 아니야.. 단지 이런거.. 처음이라… 당황스러워 갈피를 못 잡는거 뿐이야.
넌 할 수 있어.. 무시하자.
무시하자.
나름대로 주문을 외우며 마음을 다잡았다.

 

조금 밝아진 마음으로 화장실 칸에 들어섰다.
참… 그러고 보니 어젠 엄마 얼굴을 못봤네…
오늘은 엄마가 좋아하는 만두국을 끓여볼까…?
아니면…
촤아악~!!!
오~ 세상에..!!!!!!!!!!!!!!!!!!!!!!!!!!!!!!
하늘 위에서 물벼락이 내렸다.
머리고,,, 옷이고,,,,신발이고,,,, 몽땅... 젖어 버렸다.
한동안 굳은 채로 앉아서… 아무 말도… 그 어떤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정말… 정말 너무한다.
이런 짓까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잔인하고,, 죽도록 싫어 진다.
이런 꼴로 여기에 앉아 있는 내가... 죽도록 싫다.
당하고만 있는 내가… 죽이고 싶도록 밉다.
절대… 절대, 울지 않을거야.
내가 울 줄 알아?
난… 절대 안 울어.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를… 악물었다.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이여자… 도대체 나올 생각을 안한다.
사람 기다리게 하는데 뭐 있군…
눈코뜰새 없이 바쁜 이 시기에… 길에다 시간을 버려가면서까지 이러는 자신이 낯설다.
하지만 자신의 다음 행동에 따른 그녀의 반응이 무척 기대 되는건 어쩔 수 없다.

입구에 언뜻 그녀가 보였다.
잠시후, 여전히 당찬 걸음걸이로 걸어 나오는데… 점점 가까워 질 수록 무언가 이상하다.
흐르듯이 퍼져 내려오는 치마는 이상할 정도로 다리를 휘감았고,, 짧은 쟈켓 속의 블라우스는 살과
밀착되어 보였다.
그 위로 푸르스름한 입술과 하얗게 질린 얼굴에는 머리카락이 달라 붙어 있었다.
차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향했다.
세상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이라니…
미세하게 떨리는 몸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보였다.
봄이라 해도 아직은 쌀쌀하다.
저대로 두면 감기 걸려 앓아 눕기 쉽상이지…
"건물에서 통 채로 세탁이라도 했소?"
잠시 눈을 들어 바라보더니, 귀찮다는 듯 지나 친다.
무의식 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아 돌려 세웠다.
"오. 가방 돌려 주러 여기까지 오시다니.. 무척 고맙네요. 얼른 주고 가시죠!? 하지만, 또 시덥 잖은
얘길 하러 온 거라면, 당장! 꺼지라고 말해 주고 싶네요. 오늘은 더 이상 아무말도 듣고싶지
않거든요. 보시다시피.."
어깨를 들썩이며 태연하게도 말한다.
꺼지라고…
뭐? 허 참… 나보고 꺼지란다..
난생 처음 듣는,,, 그 누구도 내 앞에서 꺼내지 못 할 말을… 눈앞의 이 조그만 여자에게 듣게 될 줄이야.
화가 났다.
버르장머리 없는 말 버릇에 화가났고,, 잡혀 있는 손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지는 떨림에 화가 났다.
"우선 타지."
악문 잇새로 내 뱉으며, 거칠게 차 문을 열고 그녀를 밀어 넣었다.
닫히는 문 사이로 그녀의 항의가 들렸지만,,, 반대로 돌아와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녀와 마주쳤다.
"경고하겠소. 발을 내 딛는 순간부터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차에 올라, 시동을 거는 동안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온다.
상의를 벗어 뒷자석에 던져두고 히타를 최상으로 틀었다.
"쟈켓은 벗는게 좋아. 그 상태로는 전혀 마르지 않으니까."

차는 매끄럽게 출발했다.